어떤 접속
진상용
유식은 또 시계를 들여다 본다. 8시 반이다. 이미 30분을 고스란히 축내며 앉아 있는 것이다. 핑계 둘러댄 채 잔업 근무까지 포기하고 나온 터였다.
휴대전화를 꺼내서 문자 메시지라도 오지 않았나 확인하며 초조감을 이기고 있지만 신경은 온통 출입문 쪽으로 집중되었다.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 섰다.
"저 여잔 모양이군"
기대 부풀었던 유식은 온몸의 힘이 쭈욱 빠져나가는 걸 여실히 느꼈다. 바로 뒤따라 들어온, 저보다 훨씬 우람하고 반듯한 사내녀석이 그녀의 일행인 것을 분위기만으로도 알만 했기 때문이었다. (젠장. 첨부터 악착같이 우롱하더니만 끝까지 가지고 노는구나.)
불현듯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여자한테 장난감처럼 이용당한 자신이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그래. 오분만 더 투자하자. 커피도 시켜 마실 겸.)
유식은 아까부터 몇 번이나 곁을 지나치며 눈총을 쏘던 종업원 아가씨를 지적해 불러 세우고 호기있게 냉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한 달 전쯤의 어느 휴일. 해 더할수록 느는 건 잠 뿐이니 가까운 산이라도 오르자는 동료들 제의를 적당한 구실 붙여 거절하고 아침조차 거르며 잠속에 빠져 있을 때였다.
흐릿한 벨소리. 유식은 본능마냥 더듬어 휴대전화를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저기 숲속이죠?"
가녀린 여자 음성은 얼토당토 않다.
"숲속이라니. 어딜 걸었어요?"
"01×-345-3355 아녜요? 숲속다방요."
"번호는 맞는데 여긴 숲속이 아니라 이불 속이요. 아냐 화장텁니다. 화장터!"
별 실없는 일로 토막잠 되고 만 걸 아까워 하며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갔을 때 또 벨이 울렸다.
몇 번 지난 다음에야 집어들자 아까와는 딴판으로 몹시 흥분한 여자는 분통을 폭포처럼 쏟아 붓는 것이었다. 전화를 잘못 걸 수도 있는 거 아니냐로부터 시작해 아침부터 그렇게 남의 기분 망쳐 놔도 되느냐. 그러니 이 화창한 대낮에 이불 속에서 뭉기적대는 부류들은 지상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둥 인격 모독까지 서슴치 않는 거였다.
끊어버리고 찾은덴 또 이불 속. 다시 벨이 운다. 그 여자 목소리다. 끊고, 또 울려대고… 결국 전원을 끊어 사태를 수습하는 수 밖엔 방법이 없었다.
잠이고 뭐고 금쪽같은 휴일 일정이 어긋나버린 유식은 시시껄렁한 TV프로에 매달려 하루를 지내야 했는데 정말 환장하게도 자정 가까운 시간에 또 전화 벨이 울리는 거였다.
수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여자의 목소리가 빠르게 쳐들어 왔다.
"여보세요옹? 거기 화장터지용? 화부아저씨 맞나요옹?"
눈에 보이는데 있다면 힘껏 갈겨주고 싶도록 얄미운 비양거림이었다.
"도대체 당신 누구야? 곧 알아내서 따끔하게 조처할테니까 장난 삼가! 알았어?"
"어머, 뭘 그렇게 화내세요. 화장터 아저씨. 사실 여긴요, 병원 영안실이거든요. 일감 많이 줄테니 지금 시체 가지러 오세요. 상부상조, 참 좋잖아요."
한동안의 실랑이 뒤에야 언쟁은 일단락되었다. 이튿날 막 출근하려는 판인데 유식은 다시 화장터 화부를 찾는 영안실 아가씨 문안 인사를 받아야 했다.
그날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 그는 아침 일어나서부터 잠들 때까지 복수의 전화를 해야 분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유식은 아주 독한 사람과 악연을 맺은 두려움에 주눅들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억력 좋은 여자는 아침 저녁 거르지 않고 전화질을 했다. 요즘 영업은 잘되느냐, 하루 몇 구의 시체를 처리하느냐, 놀지 않게 일감 대줄테니 할인할 수 있느냐는 기막힐 얘기에 당신같은 인간은 몇 곱 비용 더 준대도 내 손으로 안태울 거라고 지독한 악담을 쏟아부은들 씁씁하긴 마찬가지였다.
이튿날 통화에선 화장터에서 꽃집으로 업종 바꿨으니 제발 전화를 그만 하라 사정했고 그 다음날은 내 잘못 인정하니까 봐달라며 굴욕적으로 빌었지만 그녀는 화를 좀 누그러뜨리긴 했을 뿐 전화를 멈추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날이 지날수록 왠지 모르게 그녀로부터 악담 듣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은근히 정 비슷한 감정이 솟는 거였다. 그녀 목소리도 점차 본래의 나긋함으로 돌아가고 화장터와 영안실 아가씨 사이의 거친 대화주제도 세상사는 사람들 얘기로 바뀌는 거였다. 미치고 환장하겠던 악령의 소리. 소름끼치던 목소리는 알고보니 비길데 없이 정감 덩이리이며 표독스러운 만큼 사려깊은 여성임이 느껴졌다.
누가 더하고 덜함 모를만치 가까워진 어느날, 그녀가 또 전화를 했다. 그리고 느닷없는 질문을 해왔다.
"여자의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
"남한테 사랑받는 거 아닐까요?"
"유감스럽게도 아니네요. 여자 행복은요… 유혹자가 생기는 일이지요."
"그러니 나더러 유혹자가 되라?"
"착각이 펄펄 넘치는군요. 어쨌든 다음 일요일 저녁 여덟 시에 숲속다방으로 좀 나오세요. 알아보기 쉽게 왼쪽 눈에다 안대를 꼭 하시고요."
그대로 전화는 끊어지고 유식은 이상한 인연의 빌미가 된 '숲속'에서 이상한 모양을 한 채 이상한 처지에 놓인 것이다.
커피를 다 마신 유식은 아무도 눈치 못채게 재빨리 안대를 벗어 주머니에 쑤셔넣고 계산대로 걸어갔다.
그 때였다. 뒤에서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움찔하며 돌아보니 웬 여자가 서있는데 꽤 낯이 익었다. 싱그레 웃는 그를 잠시 바라보던 유식은 고교 동급생인 학배 여동생이란 걸 기억해냈다. 새침뜨기 학생 시절에 본 뒤 처음이었다.
그녀가 유식을 자리에 앉히며 물었다.
"실망스럽죠? 난 더해요. 미리 도착해서 안대를 하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니까 바로 오빠잖아. 쑥그러워서 그냥 갈까 했는데 나 때문에 다른 여자가 욕먹을까봐 붙잡은 거예요."
" …… "
"그리구 이런 얘긴 남들한테 비밀지켜야 도리잖아요. 또 하나, 다음부턴 전화 좀 잘 받으세요. 결례하지 마시고요. 어쩌다 화장터 불지피는 아저씨랑 데이트 하나보다 기대했더니 그마져도 내 복엔 안되네요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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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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