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티티야를 위하여
김헌일
고도가 이만 삼천 피트에 이르자 기장 다차인은 기체를 자동조종장치로 전환했다. 항공기 아래엔 암회색 비구름이 그득했지만 그 위로 펼쳐진 하늘은 티 없이 맑고 찬란했다. 마치 천국과 지옥의 경계를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장님. 걱정이 있으신 것 같네요.”
부기장 타닌이 계기판을 손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계기판에 무엇이 묻은 것은 아니었지만 닦고 또 닦아내고 있는 행동은 긴장된 그의 속내를 잘 드러내 주었다.
“내 딸이 몹시 아프네. 벌써 일주일째야. 이름이 티티야인데, 이제 겨우 다섯 살이지. 아침에 집을 나오는데, 아빠 가지 말라고 매달리는 바람에 혼이 났네. 억지로 떼어놓고 집을 나왔는데 그게 마음에 쓰여.”
“사모님이 계시잖아요. 아주 미인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미인이면 뭘 하나. 그 사람은 떠났네. 일주일이 넘었어. 그 사람 떠나고 나서 아이가 아프기 시작한 거야.”
그 때 여승무원 하나가 커피잔을 받쳐 들고 조종실에 들어섰다. 다차인은 여승무원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향긋한 커피향이 이륙을 하느라 쌓였던 긴장을 한결 풀어주었다. 하지만 찻잔을 받아 쥔 타닌은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다차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놀랬나? 행복하지 않으면 이혼할 수밖에 없는 거야. 따지고 보면 조종사와 결혼을 한 여자들은 불행하네. 늘 함께 지내다가 어쩌다 떠나보내는 게 보통의 인생인데, 우리처럼 늘 헤어져 사는 게 좋을 리가 있겠나. 그건 고문일세. 어느날 마누라가 이젠 당신 짐 싸주는데 지쳤다고 말하면서 펑펑 울더군. 그리고 집을 나갔어. 아내는 헤어지지 않아도 좋을 남자를 찾아 가버린 거지. 그런데 자네. 결혼했나?”
그는 부기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기장 타닌은 이제 삼십 중반의 젊은 사내였다. 옅은 커피색 피부에 유난히 맑은 눈망울이 총명해 보였다.
“아직 못했습니다.”
“왜, 스타 에어라인 조종사가 그렇게도 인기가 없던가?“
“좋아하는 여자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결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비행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훈련 받느라고 겨를이 없었거든요.”
“가급적이면 결혼하지 말게. 언제나 애인처럼 그렇게 지내. 떨어져 있다가 보고 싶을 적마다 만나고 하는 게 사랑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몰라.”
타닌이 뜨악한 눈초리로 다차인을 바라보았다.
“서운한가? 그렇겠지.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결혼을 해도 변할 것은 없어. 우리는 이 한 평 남짓한 조종실에 갇혀서, 이 깨알 같은 계기들과 더불어 평생을 떠돌기 마련이야. 짐 가방과 냄새나는 호텔방과 입에 맞지 않는 타국의 음식들. 그게 우리들의 삶이야. 우린 그렇다 해도 집에 혼자 남은 여자들은 어떻겠나?”
밤을 세워 해명이 울리더니 새벽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기상청에서는 카울라 해 일원에 폭풍주의보를 발령하였고, 강우량 300 밀리미터에 순간 최대 풍속 35노트의 강풍을 예보하였다.
스타 항공의 운항사 안토니오 파본은 초조한 마음으로 비행기로부터 무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항공기에선 아직 연락이 없었다. 그는 욱시근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찍어누르며 창가로 걸어갔다. 활주로 건너편 숲에선 야자나무들이 북쪽 하늘을 향하여 일제히 허리를 숙인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양은 일시에 몸을 조아려 기도를 하고 있는 이슬람 교도들을 연상케 하였다. 하수구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빗물이 계류장 위로 거대한 수면을 이루며 질펀하게 고여 있었다. 그 위로 타브라 산의 검은 자취가 유령의 망토자락처럼 펼쳐져 있었다.
짜륵 짜륵 짜르륵-. 텔레타이프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는 기상 정보를 숨가쁜 기세로 쏟아내었다. 남태평양에 자리 잡은 저기압대가 여기 필리핀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고, 그 영향이 오키나와와 타이완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웨스턴 항공과 퍼시픽 항공은 결항되었고, 홍콩발 피닉스 항공은 24시간 지연이 결정되었다. 아직 나뭇가지 하나 부러뜨리지 못한 정도의 비바람에 첨단 과학 문명이 여지없이 무릎을 꿇고 만 셈이었다.
대합실에선 갖가지 소음이 끊임없이 날아오고 있었다. 텔레비전 소리, 스텐레스 재떨이가 바닥에 넘어져 굴러가는 소리, 고장 난 커피 자판기를 두들기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짜증 어린 고함소리가 유리창 틈새를 후벼드는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뒤섞여 흉중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벌써 여섯 시간이나 꼼짝을 하지 않는 비행기가 사람들로부터 인내심을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오로 어프로우치(approach. 지상 관제소). 오리엔탈 스타, 나인 투 식스, 오버.”
관제탑을 호출하는 기장의 목소리가 싸아- 하는 금속성 음향에 섞여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긴 굴을 헤쳐나온 듯 가늘고 아득한 그 소리는,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마닐라 공항을 출발한 오리엔탈 스타 항공 926 편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마닐라 공항은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40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파본은 숨을 죽였다.
“오리엔탈 스타, 나인 투 식스, 고 어헤드.”
가까이서 들려온 어눌한 목소리는 관제탑의 응신이었다.
“지금 깔바요그 상공을 이만 천 피이트의 고도로 통과하고 있다.”
“알았다. 디어 지점에서 다시 교신하라. 고도는 이만 천을 계속 유지하라.”
“오로 공항 기상은 어떤가?”
“남풍이 강하다. 구름이 낮고 안개가 끼어 시계가 흐리다. 비도 많이 내리고 있다.”
“착륙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가?”
파본은 여기에서 라디오 볼륨을 높혔다. 뜨거운 양철판에서 물방울들이 자글자글 튀어오르는 듯한 소리가 한동안 정적을 메우더니, 관제사 말이 머뭇머뭇 뒤를 이었다.
“오피셜은……랜딩미니멈(landing minimum.최저 착륙가능수치)이다.”
“착륙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현 기상수치상으로는 ……그렇다.”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더 이상 교신은 이어지지 않았다. 마이크를 끈 조종사는 기창을 향하여 육박해 오는 폭풍우에 운명을 맡긴 채, 하필이면 조종사의 길을 택한 자신을 탓하며 습관적인 손놀림으로 조종간을 조작하고 있을 것이고, 관제탑의 사내는 한 잔의 뜨거운 커피로 몸을 녹이거나 집에 안부전화라도 걸기 위하여 자리를 떴을 것이었다.
아무튼 비행기가 여기 오로 공항까지 오기에는 아직 삼십 분 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파본은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유리창에 달라붙은 빗방울들이 순식간에 무리를 지어 크고 작은 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빠르게 모이고 엉켜들고 또 흩어져 가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파본은 이런 날씨 속으로 비행기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관제사는 공식적으로는 착륙이 가능하다는 한 마디로 그가 덧붙여야 했을 갖가지 말들을 대신해 버렸다. 비상착륙이라도 해야 할 형편이라면 몰라도, 백이십 명의 승객이 타고 있는 정기편 여객기를 폭풍우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세계 굴지의 다른 항공사들이 이곳 오로 공항에로의 운항을 포기해 버린 것이 그 증거였다.
답답하기는 기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안개까지 끼어 있다면, 비행기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고루 망라되어 있는 셈이었다. 다른 것은 모두 제쳐두고서라도, 자칫하면 하나뿐인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 버릴 지도 모를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식적이라는 단 한 마디에 말문을 닫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파본은 서둘러 그 상념을 떨쳐버렸다. 국영 오리엔탈 스타 항공에서 규정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였다. 세상은 딱딱한 규정과 수치에 의하여 돌아가고 있었다. 거기에 인간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오로 어프로우치. 오로 어프로우치. 오리엔탈 스타, 나인 투 식스.”
이십 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길게 이어진 침묵을 허물며 기장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현재 고도 육천에서 홀딩(holding.선회비행) 중이다. 기체가 심하게 요동을 한다. 이따금 계기가 말을 듣지 않을 정도다.”
“로져, 고도 변경을 원하는가?”
그간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관제탑의 사내가 비교적 신속히 응답했다.
“그렇다. 구천 피트로 올리면 좋겠다.”
“허가한다. 구천 피트로 상승한 뒤 대기하라. 여기도 바람이 거세어지고 있다.”
하늘과 땅을 일시에 뒤헝클어 놓으며 귀청이 찢어질 듯 요란한 소리가 울려왔다. 구름과 빗방울로 가득 찬 허공의 한 구석에서, 거대한 폭발음처럼 들려온 그 소리는 바람소리였다. 대합실을 가득 메우던 소음도 한순간 뚝 끊겨버렸다. 파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빳빳하게 팽창된 그의 눈동자로 항공기 계류장 한 쪽에 세워진 급유차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뒤뚱거리는 모습이 날아들었다.
기장 다차인은 안전벨트 착용 시그널을 눌렀다. 이어 여승무원의 안내 방송이 머리 위에 달린 스피커를 뚫고 쏟아져 내렸다.
-승객 여러분. 기류의 영향으로 기체가 흔들리고 있사오니 좌석에 앉아주시고 좌석에 앉으신 후엔 반드시 안전벨트를 착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장 다차인은 안내방송에 무심히 귀를 기울였다. 불안에 떠는 듯한 여승무원의 가냘픈 목소리를 타고 딸 티티야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깨에 매달린 채 떨어지지 않던 티티야. 그 아이의 간절한 울음소리에선 공포의 기색마저 느껴졌다. 티티야는 아직 엄마가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별의 의미를 알기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아내가 다른 사내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꽤 오래 전이었다. 하지만 그로선 아무런 내색도 할 수가 없었다. 혼자서 집을 지키고 앉아있기에 아내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세상은 강력한 최음제처럼 스며들어와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을 부추겼다. 이따금 아내를 향한 분노가 치솟았지만 그건 어리석고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쩌면 아내보다도 조종사라는 직업을 더 소중히 여겼던 자신에게 잘못이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했다. 그는 막힘없이 뚫린 하늘을 사랑했고 비행의 스릴과 자유스러움을 사랑했다. 엔진의 폭음과 그것에서 전달되어 오는 강력한 진동을, 그리고 공중에서 내려다보이는 산맥과 들과 강의 오밀조밀한 조화를 사랑했다. 네 개의 금줄이 달린 제복 또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긍지였다. 그것은 평생을 술과 도박에만 빠져 살다가 비명에 간 아버지와 가난하고 불우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통쾌한 보상이었고 앙갚음이었다.
“기장님. 오로 공항의 기상 상태를 알고 계시죠?”
부기장 타닌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알지. 시정이 천이백 미터, 운고는 삼백 피이트네. 남풍이 십 놋트로 불고……. 물론 돌풍의 위험이 있긴 하지만, 공식적인 수치는 착륙 가능 상태일세.”
“하지만 기장님도 잘 아시는 대로, 오로에 착륙하려면, 남쪽 바다에서 진입을 해서 산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날다가 타브라 산 직전에서 백 팔십 도 회전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수를 남쪽으로 튼 다음 활주로 방향에 재빨리 비행기를 맞추고 급격히 하강을 해야 합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도 쉽지 않죠. 한데 오로 공항은 기상 변화가 심하기로 유명하잖습니까? 오늘같이 시정이 좋지 않은 날엔 선회를 하다가 산에 부딪칠 위험이 있어요.”
“자네 말 그대로야. 오로는 조종사들이 꺼리는 공항이지. 타브라 산의 울창한 숲에선 열대지방 특유의 강력한 하강기류를 불시에 쏟아내. 재작년엔 추락사고도 있었어. 하지만 불지 안 불지도 모르는 돌풍 때문에 정기편 항공기를 취소할 수도 없잖은가?”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날씨가 좋지 않은 날 굳이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 비행기를 띄울 필요가 있을까요? 승객 입장에서 봐도, 관광이건 비즈니스 건 오늘 못 가면 내일 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물론 불편하기도 하겠고 어쩌면 금전적인 손해나 다른 문제도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목숨을 잃지는 않아요. 사고는 한번 나면 끝장이잖습니까. 이건 어리석은 도박입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항공사들은 일찌감치 운항을 취소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도박이지. 하지만 이 나라에서 도박이 아닌 게 어디 있나? 도박이 아니라 전쟁판이지. 만약에 우리가 비행기를 끌고나오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이 가나? 승객들은 떼로 몰려와 고함을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면서 울분을 토하겠지. 날씨가 나쁘건 비행기가 고장이 났건 그건 손님들이 관심을 둘 사항은 아니야. 손님들의 문제는 돈을 주고 산 권리가 일방적으로 침해당했다는 사실이지. 그렇게 될 경우, 우리에게 회사에선 뭐라고 할까? 있을 지도 모를 위험을 예방했다고 상을 줄까? 아니야. 당장 사표를 써야 할 걸세. 자넨 비행기 점거 농성이란 말도 못 들어봤나? 무슨 이유에서든 비행기를 점거한다는 일은 큰일이야. 외국에선 중죄에 속하네. 하이재킹이나 마찬가지로 여겨. 하지만 이 나라에선 그게 통해. 그 것이 이 나라의 정의고 세상 돌아가는 원리야.”
사무실 문이 열리며 빅나얀이 들어왔다. 그는 스타 항공의 오로 공항 책임자였다. 비록 수십 개에 달하는 단위 부서의 일개 책임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절묘한 처세술과 추진력 그리고 난폭하기까지 한 성정으로 누구도 무시 못 할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리엔탈 스타 항공의 부사장을 비롯하여 영업본부장, 인사담당 전무가 그의 후견인이었다. 그밖에도 정부기관 요로와 내노라하는 기업체에 그의 단골 고객이며 후원자인 인사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의회 의원의 보좌관에 지니지 않았던 그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에는 그들의 각별한 배려가 절대적인 힘이 되었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비행기에선 아직도 연락이 없나?”
빅나얀은 예의 그 날카로운 그러면서 녹슨 함석조각처럼 쉰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상공에서 홀딩하고 있습니다.”
파본은 그가 두렵고 싫었다. 그의 쉰 목소리 속에는 오만이 숨어있었고, 분명하고 활기찬 몸짓에는 위선이 가득했다. 그에게 있어 매사의 유일한 판단 기준은 무서운 이기심이었다. 그는 이곳 오로 공항에서 황제처럼 굴었다. 출퇴근 시간마다 직원들은 현관에 나아가 도열을 하고 그를 맞이하거나 전송하였다. 약삭빠른 친구들은 업무는 팽게쳐 두고 그의 자동차나 구두를 번들거리게 닦아놓는 일에 열중이었다. 빅나얀의 말이나 행동은 곧 정의였고 진리였다. 직원들은 조금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빅나얀에 관한 것은 모두가 찬양과 감사의 대상이었다.
빅나얀도 파본을 드러내 놓고 싫어했다. 자신을 대할 적마다 파본의 가슴에서 꼿꼿하게 머리를 쳐드는 거부감을 적과 아군을 가리는데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그가 놓칠 리 없었다.
“뭐, 홀딩을 해? 도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병신 같은 자식. 여기선 난리가 난 줄도 모르나? 누가 대기하라고 했어? 너야?”
“관제탑에섭니다.”
“당장 전화해. 관제탑 바꿔!”
그는 한쪽 손을 전화기로 불같이 가져갔다.
“하지만……지사장님. 아무래도 날씨가 좋질 않습니다. 풍속이 최소한 이십 노트는 되고, 강도가 수시로 바뀌고 있습니다.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방향은 역풍에서 조금도 변하질 않습니다. 이백 피이트 상공에 적란운이 떠있고, 매시 이백오십 밀리미터의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실제 가시거리는 육백 미터가 될까 말까 합니다. 그리고 퍼시픽 에어라인 쪽 정보에 의하면, 만 피트와 삼천 피트 사이에 강력한 터뷸런스가 있고, 저고도 바람 때문에 윈드쉐어(windshear. 수직하강기류)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파본은 그동안 수집했던 기상정보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빅나얀의 입가에 칼자국처럼 패인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의 심사가 뒤틀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빅나얀은 파본의 말에서, 그가 애용하는 표현을 빌어, 부정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의도를 간파해 낸 것이 틀림없었다. 사실 파본의 말에는 빅나얀의 무조건적인 권위의식을 향한 반발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비행기를 그냥 되돌려 보내야 한다 이건가?”
다이얼을 누르다말고, 빅나얀은 한 손에 들고 있던 수화기를 파본의 코 밑에다 알씬알씬 흔들어 댔다.
“너, 공식 기상 체크해 봤어?”
“네, 아직……빌로우(below. 이착륙이 불가능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 말을 하면서 파본은 짧게, 막연한 의혹에 빠졌다. 왜 기상정보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돌풍은 반영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빅나얀 지사장님. 그것은 벌써 사십 분 전에 발표된 것입니다. 지금은 보시다시피 훨씬 악화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몇 마디의 설명을 덧붙히려던 파본의 의도는 빅나얀의 두터운 입술을 매섭게 젖히며 튀어나온 고함소리에 무참히 좌절되고 말았다.
“웬 잔소리가 그리 많아! 어쨌든 그건 오피셜한 거야. 자네 말은 그저 혼자 생각인 거고. 넌 수천 만 달러짜리 비행기를 주먹구구식 육감 가지고 띄우나? 니가 신이야? 점쟁이 무당이야? 회사엔 규정이라는 게 있어. 규정에 맞으면 내리는 거고 안 맞으면 돌아가는 거야.”
대합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한 남자의 거센 고함소리가 뺨을 후려치듯 날아왔다.
“도대체 비행기가 오는 거야 마는 거야? 시간! 시간! 시간은 돈이야. 니들 내가 얼마나 손해를 보고 있는 지나 알어?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빅나얀은 잠시 입을 봉하고 대합실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수화기를 전화통에 도로 던져놓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게 무슨 소린지 알아? 당장 비행기를 내놓지 않으면 여길 때려 부셔버리겠다는 거야. 내 경고하지만, 자네에겐 언제나 불순한 부정적 의도가 숨겨져 있어. 그게 네 눈알로 빤히 들여다보인다 그 말이야. 알겠나, 내 말?”
빅나얀은 파본을 향하여 짧게 목을 그어 보이고는, 휭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파본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담배를 한 대 질끈 뽑아 물었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갔다. 갑작스레 문짝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사무실로 몰려들어왔다. 호박색 와이셔츠 단추를 가슴팍까지 풀어헤친 건장한 체구의 사내, 검정 점박이 무늬 스커트를 암팡진 엉덩이에 걸쳐 입은, 동그란 눈매의 젊은 여인. 그리고 바르르 떨리는 손아귀에 비행기 표를 꼬기꼬기 움켜 쥔 노인……. 그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상기되어 있었고 노골적인 경멸의 빛을 띠고 있었다. 조금 전 문밖에서, 고함을 지르고 발길로 차고 두들기던 그 소리의 주역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파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감이 온몸에 엄습했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야?”
맨 앞에 선 덩치 큰 사내를 밀쳐내며, 한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덜퍽스런 치자색 입술을 가진 중년여자였다. 파본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쏟아지고 있는 불같은 적의에 당황했다. 마치 죄를 짓고 도망을 치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맞닥뜨려진 기분이었다.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짓예요? 우리를 일자 무식쟁이로 아는 거예요? 이래 보여도 배울 만큼 배웠고 가질 만큼 다 가진 사람들인데, 이게 무슨 경우죠?”
그녀는 몹시 자존심이 상한 듯이 말하였다. 불신과 이기심은 군사정부가 무너지면서 이 땅을 새롭게 지배하기 시작한 보편적 정서였다. 매사가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에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코앞의 이익이었다.
“이 놈들아. 왜 비행기를 빨리 내놓지 않느냐 그 말이야!”
비행기표를 움켜쥐고 있던 노신사가 바르르 떨리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슴에 빨간색 손수건을 맵시 있게 꽂아 넣은 그 노인의 데퉁스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년여자가 다시 흰 이를 드러내고 나섰다.
“벌써 몇 시간이나 목이 빠져라 기다렸잖아요. 저쪽에서는 아침 새벽부터 공항에 사람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게 사람을 어떻게 알고 하는 짓이냐 그 말이야.”
그 여자는 격하게 몸을 뒤틀었고, 급기야 달아오를 대로 오른 다른 사람들의 분통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도쿄에서 미국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 유학생입니다. 그런데 이러다 미국 비행기 놓치면 책임질 겁니까? 입학 취소되면 책임질 거냐고요.”
“이건 명백히 사기요. 남의 돈 받아 챙겼으면 그 대가를 내놔야 하는 거 아뇨. 정해진 시간에 비행기를 못 내놓을 거면 무슨 대책을 세워주든지. 정신적 피해, 시간적 물질적 피해 보상 말요.”
“아따. 따따부따 여러 말할 것 없어요. 어디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 생각해 줄 인간들입니까? 내 당장 신문사에 전활 해서 고발하겠어요. 그래도 이 나라에 법이 있고 정의라는 게 있는 건데, 이거 순전히 사람 우습게보고 하는 수작 아닙니까? 어디 우리가 바보 천칩니까? 흔해 빠진 빽줄 하나 없는 놈 서러워 어디 살겠나. 자랑은 아니지만 오로 신문사 사장이 내 집안 사람이예요. 나도 사람을 대자면 끝이 없어요.”
파본은 극심한 갈증을 느꼈다. 물기란 물기는 모두 말라버린 입안이 버석거렸다. 심장은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두근거렸고 손에선 땀이 배어났다. 사람들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지만 한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어…….”
파본은 타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사정을 설명하려 들었다. 두려움이 자꾸만 그의 말을 막아냈다. 사방에 덤불과 가시철망으로 둘러싸인 듯이 느껴졌다. 밖에선 대지를 뒤집어엎을 듯이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천둥소리가 쿠르릉 울려왔다.
“죄송합니다. 비행기는 지금 공중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저희대로 최선을 다 하고 있지만, 날씨가 더 안 좋아졌거든요. 어쨌든…….”
간신히 그 말을 덧붙였을 때였다.
“장난치나!”
사십 평 남짓한 사무실을 가득 메워버린 사람들 한가운데에서 그 한마디가 표창처럼 솟아올랐다.
“뭐, 날씨가 안 좋다고요? 거짓말 말아요. 우리가 그것도 모를 줄 아세요?”
파본의 말꼬리를 매섭게 휘어잡고 나선 이는 예쁜 눈을 가진 젊은 여인이었다. 바둑무늬 스커트의 그 여자가 목덜미까지 벌겋게 물들이며 말을 하고 나섰다.
“내가 똑똑히 들었어요. 붉은색 양복을 입은 그 사람. 이마가 벗겨지고 금테 안경을 쓴 어떤 남자가 그러는 거예요. 항공사에서 맘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비행기를 띄울 수 있다고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날씨가 나쁜 것 같애도 사실은 그렇지 않대요. 기상 수치라던가 뭐라던가…아무튼 괜찮다는 이야기였어요. 여보, 당신도 들었지? 정말이지 이럴 수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모른다고 막 속여먹어도 되는 거냐구요.”
정말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파본의 사고은 중심을 잃고 혼돈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붉은색 양복과 금테 안경-그것은 빅나얀의 모습이었다. 그가 그런 말을 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이곳 오로 공항의 책임자였다. 항공기의 안전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해야 할 위치에 그가 있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말을, 가뜩이나 흥분해 있는 군중들에게 흘릴 이유가 없었다.
아니면 어떤 목적으로 계산된 고도의 교란작전이었을까. 만약 그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행기를 내리기로 결심했다면, 그리고 무리한 착륙 중에 어떤 사고라도 일어난다면, 지금 사무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을 덜어줄 효과가 있었다. 독재정권이 물러난 후에 다중의 힘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라는 구호 아래 서슴없이 뭉쳤고 한데 뭉친 그들은 어떤 폭력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 승객들의 기세를 보아 당장 비행기를 띄우지 않는다면 폭동이라도 일어날 상황이었다. 오리엔탈 스타 항공의 사장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고객은 왕이다.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설령 그것이 조금 무리하거나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지지할 것이다.
그렇다 하여도 이 악천후 속으로 비행기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파본은 용기를 내어 입안에 담겨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그 말씀도 틀린 건 아닙니다. 공식적인 수치로만 따진다면 비행기 운항에는 지장이 없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날씨가 수시로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저기, 창밖을 보십시오. 날이 어두워 희미하긴 합니다만, 활주로 옆에 잠자리채 같은 것이 보이지요? 저것이 바로 윈드색이라는 것인데,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재는 장치입니다. 그것이 지금 직각으로 곤두선 채 조금도 수그러들질 않지 않습니까? 저 정도면 풍속이 최소 이십 오 노트는 됩니다. 저걸 옆구리에 맞으면 비행기가 뒤집어 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백 수십 명이나 타고 있는 비행기를 섣불리 불러들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시다시피 지금은 폭풍주의보가 내려진 상태가 아닙니까.”
파본이 말을 맺기가 무섭게 아까 그 덩치 큰 사내가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이를 뿌드득거리며 말했다.
“이 자식! 누구한테 설교하는 거야?”
이어 잠깐 인형 같이 귀엽고 깜찍하다는 생각을 들게 했던 바둑무늬 여자가 말을 받았다.
“이 사람이 또 우릴 속이려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를 줄 알고 제멋대로 떠들고 있어요. 이렇게 뻔뻔스럴 수가 있어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비행기가 떨어져봐야 죽는 건 우리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런 사람한테 매달려 통사정을 해야 하느냐구요. 내 돈 주고 비행기 타면서…….”
그녀의 높고 날카로운 한마디는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기름에 불길을 당기고 말았다. 더 이상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다음 행동으로 옮겨갔다. 전화기가 깨어지는 소리가 머리 뒤쪽에서 들려왔고, 의자가 뒤집혀졌으며, 필기구 탁상일기 휴지통이 날아다녔다.
“이러지들 말아요. 이봐요, 그만 좀 해요.”
그 어느 땐가, 한 노파의 쉰 목소리가 어지러워진 파본의 가슴 속으로 날아들었다.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다고 당장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파본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노파의 모습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대신 악몽 같은 아수라장 속에서, 언뜻 빅나얀의 모습을 발견해 내었다. 흥분한 군중들의 어깨 너머로 환영처럼 솟아난 그의 얼굴엔 어이없게도 회심의 미소가 떠있었다. 파본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그는 가슴팍에 털이 곰실곰실 돋아난 그 덩치 큰 사내의 완력에 의하여 사무실 한 구석으로 팽게쳐지고 말았다.
다차인은 병째로 물을 들이켰다. 컵에 찔끔 따라 마시는 것으로는 도무지 갈증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비행시간은 칠천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그만하면 베테랑 조종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악천 후 속을 비행할 적마다 저며오는 두려움을 막을 수가 없었다. 더욱 어려운 문제는 그 긴장감을 어느 누구에게 내비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항공기의 책임자인 그는 그저 안으로 삼키고 삭여서 스스로 감당해 내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기창 너머의 햇살도 한껏 사위어 있었다. 항공기 아래의 먹구름은 바닥 깊은 늪처럼 고인 채 좀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저 구름에 갇힌 지상엔 짙어진 어둠 속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을 것이었다. 다차인은 그 어둠과 비바람의 한가운데 자신의 비행기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물을 들이켰다. 최신식 제트여객기일지언정 이 드넓은 하늘에 그것은 한 점 작은 티끌과 같았고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한 잎 낙엽에 불과했다.
“기장님. 아직도 따님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부기장 타닌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있겠지. 아이가 제 엄마를 닮아서 강단이 있어. 그런데 좀 피곤하군. 지난밤 이런저런 생각에 제대로 못 잤어.”
비행기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저기압이 강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전방에 산봉우리처럼 솟아있는 적란운이 보였다. 깊은 암굴 같은 구름의 가운데에선 번개가 일고 있었다. 다차인은 조종간을 우측으로 젖혔다. 비행기는 둔중한 곡선을 그리며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승무원에게 마실 거라도 가져오라고 할까요?”
“연료나 체크해 봐. 앞으로 얼마나 홀딩이 가능한가.”
“십 분입니다. 십 분 후엔 착륙을 하든 돌아가든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십 분이라…. 딱 술 한 잔만 했으면 좋겠군.”
“와인이라도 조금 하시겠습니까?”
“아니야. 승무원에게 커피 한 잔만 더 가져오라고 부탁해 주게. 아주 진하게 말야.”
부기장 타닌은 승무원에게 인터폰을 넣었다. 그는 진한 커피 두 잔과 얼음물로 식힌 물수건을 부탁했다. 그리고 조종석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기장님. 솔직히 저 지금 떨고 있어요. 왜 하필 이런 직업을 택했을까 후회됩니다.”
“그래도 그런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는 때가 행복한 거야.”
그렇게 말을 내뱉고 나서 다차인은 고개를 숙였다. 불현듯 솟아난 티티야 생각 때문이었다. 겨우 유아기를 벗어났을 뿐인 티티야는 아픔을 호소할 상대마저 잃어버린 상태였다. 티티야는 단 한순간도 진정한 아버지를 가지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떠나 있었고, 이젠 엄마마저 잃어버렸다. 티티야에게 가족이란 허울이었다. 그 애는 혼자였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사무실에 갑작스레 몰려든 적막을 타고 어디선가 작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입사를 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여사원이었다. 회색빛 철제 캐비넷이 세워져 있는 사무실 한 모퉁이에서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떨고 있었다. 한 권의 책만 쥐어주면 영락없는 고등학생인 그녀에게, 장차 자신의 분홍빛 삶이 펼쳐질 터전에서 일어난, 조금 전의 일은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여지껏 가꾸어 왔던 세상을 향한 꿈과 기대는 여지없이 박살나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른 직원들이 하나 둘 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난 군중들이 몰려오기가 무섭게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가 다시금 모습을 나타낸 그들 중엔 빅나얀의 충복 에스카노도 끼어 있었다. 파본은 그곳을 나와 버렸다. 그에게 인간이란 혐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는 스넥코너 앞을 지나 화장실 쪽으로 휘어돌아가는, 사람이 없는 좁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 길은 항공기 계류장으로 통하는 비상구와 이어져 있었다. 그 문을 통하여 바깥으로 나가 천지에 난무하는 비와 바람을 흠뻑 맞아볼 참이었다.
그 어느 때였다. 파본은 느닷없이 들려온 수다스런 웃음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히히힛……. 서툰 솜씨의 배우가 억지로 지어내는 것 같은 웃음소리는 분명 빅나얀의 것이었다. 이곳 오로 공항에서 그의 웃음소리를 알아채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 보게. 빅나얀군.”
걸쭉한 노인의 음성이 빅나얀의 웃음소리의 뒤를 이어 흘러나왔다.
“자네만 믿네. 내가 오늘 도쿄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임자도 알고 있지? 이 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사업가인 이 빌라도사가 그냥 알거지가 되는 거야. 문제가 그것뿐이겠는가? 만일에 내가 도산이라도 하는 날엔, 그 화가 자네 회사에도 미쳐. 내가 자네들 회사 주식을 적잖이 갖고 있기에 하는 말일세. 기왕지사 꺼낸 말이라서 하네만, 나와 자네들 사장과 사이가 어디 보통 사인가? 그 사람 여기저기 벌여놓은 사업이 혼자 힘으로 된 건 줄 아는가? 거기엔 다 내 각별하고 우정어린 지원이 숨어있다 그 말일세.”
“그야 여부가 있으시겠습니까? 회장님.”
그들의 대화는 골목이 남쪽으로 휘어져 돌아간 그 끝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귀빈전용 응접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파본은 훤칠한 키와 번쩍이는 눈빛 그리고 잘 생긴 이마 위로 가지런히 빗어넘긴 은발의, 미남배우 출신 사업가 빌라도사를 떠올렸다. 그는 오로 지방 첫째 가는 재벌이었고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가였다. 그에 비하면 빅나얀은 코흘리개 골목대장에 불과했다. 그런 두 사람이 어떻게 이렇듯 긴밀한 인연을 맺었던 것인지 파본은 빅나얀의 천부적인 사교력에 새삼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모두가 공동운명체란 말일세. 말이야 바른 말이지, 만에 하나 지금 공중에 떠 있는 비행기가 여기 착륙하다가 잘못되었다고 해 봄세. 그게 어디 자네 탓이고 내 탓이 되겠는가? 그건 이 지랄 맞은 날씨 탓이고 팔자소관 아닌가? 그리고 굳이 따지고 들자면 조종사 능력 탓일 수도 있고……. 생각해 보게. 세상에 멀쩡한 비행기 떨어지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있겠나? 하지만 매사 소극적인 사람은 곤란하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싸워서 쟁취하는 거라네. 겁 많고 비굴한 자는 살아갈 수 없는 체제가 자본주의야. 그렇다고 내가 자네더러 비행기 하나 제대로 통제 못하는 겁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일테면 그렇다 그 말일세. 허허. 어떤가, 자네 생각은?”
“그거야 제 생각이 다를 턱이 있겠습니까. 그렇잖아도 제가 데리고 있는 직원 가운데 삐딱한 녀석이 하나 있어서 호되게 야단을 쳐놓고 오는 길입니다. 이 녀석이 기장한테다 대고 자꾸 기다려라 신중하라 이런 소리만 늘어놓고 있질 않습니까? 어디 이 바쁜 세상에 그게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헤헤, 말씀드리기 뭐 합니다만, 비행기를 여기 상공에까지 끌어들이는 데도 제가 애를 좀 먹었습니다.”
문틈으로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파본은 흉중에서 무엇인가 뚝 끊겨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머리 속이 점차 뜨겁게 달아올랐다.
“암튼 말일세. 사업이라는 건 모험을 마다치 않는 투지에서 시작되는 거네. 인생도 다 마찬가지 아닌가? 위험과 정면대결해서 싸우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만 다니다간 빌어먹기 딱 맞네. 내 회사엔 그런 놈 없어. 난 그런 소인배는 용서 못하네. 그냥 모가지야.”
“관계부서마다 잘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필요한 조치는 다 취해 놓았습니다. 조금 지체가 되긴 했습니다만, 반드시 비행기를 착륙시켜서 회장님을 도쿄까지 모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회장님 분부신데, 어디 비행기뿐이겠습니까?”
“좋아요, 좋아. 내 오늘 자네 신세를 많이 지는군. 내가 도쿄에 도착하는 즉시, 자네 사장 에게 전화를 함세. 오리엔탈 스타 항공에도 자네 같은 인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 사람 좋아할 거야. 허허허…….”
빅나얀이 일어서는 모양이었다. 파본은 황급히 그곳을 벗어났다. 발을 내딛을 적마다 더해 오는 위기감으로 쿵쿵 가슴이 짓찧었다. 이것은 음모였다. 모반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파본은 마이크를 거머쥐었다.
“오리엔탈 스타, 나인 투 식스.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바람이 역풍에서 변하지 않은 채 세기가 수시로 바뀌고 있다. 돌풍이 20 놋트까지 분다. 착륙은 위험하다. 오버.”
끓어오르는 분노에 파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그러나 놀라서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았던 조종사로부터는 얼른 응답이 오지 않았다.
“반복한다. 즉시 돌아가라. 기상 상황이 예상보다 나쁘다. 호전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잠시 연유를 알 수 없는 침묵이 이어지고 난 뒤, 뜻밖의 대답이 라디오에서 굴러나왔다.
“……이미 알고 있다.”
“뭐, 뭐라고 했는가?”
“날씨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돌아가지 않는가?”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공식적인 기상수치가 수정되지 않는 한, 돌아갈 수는 없다. 그건 규정위반이다.”
“당신은 기장이지 않은가? 당신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비행기와 승객의 안전을 지켜야 할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다.”
“내 판단이라고 그랬나? 듣기 좋은 소리일 뿐이다. 기장의 판단이라는 것은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고객의 욕구를 백 퍼센트 만족시키는 데 있다고 교육받았다. 하지만 그럴 방법은 없다. 그것 때문에 조종사들이 얼마나 극심한 갈등을 겪는지, 단단한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당신들은 모를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짓을 그만 두고 싶다.”
“그럼 어쩌자는 것인가?”
“기다리는 거다.”
“뭘 기다리는가? 기상이 호전될 기미가 없다고 했지 않은가?”
“나도 모른다. 자꾸 묻지 말라.”
그 때였다. 출입문이 벌컥 열리고, 대합실 가득히 쌓여있던 소란이 사무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빅나얀의 험악한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뭐 하는 거야! 이 짜식이.”
그리고 이내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어났는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넌 모가지야. 당장 꺼져.”
저만치 파본을 밀쳐낸 빅나얀은 마이크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 지사장이다. 더 이상 지체 말고 착륙하라. 현재 오피셜 웨더는 어보우브(above. 운항가능상태)다. 즉시 착륙하라.”
“기장이다. 지독한 터뷸런스로 모두 지쳐있다. 승객들은 공포감마저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리고 뭔가?”
“내게 좀 어려운 사정이 있다.”
“말하라. 당장 해결해 주겠다.”
“그럼 말하겠다. 사실은 티티야가…….”
“티티야가 누군가? 브이 아이 핀가?”
“아, 미안하다. 다섯살박이 내 딸 이름이다. 딸이 몹시 아프다.”
“도대체 그게 어쨌다는 거야? 어린애를 보러 돌아가겠다 그 말인가? 소위 기장이라는 사람이 까짓 개인사정 때문에 회사 체면이 걸려있는 중대한 임무를 포기하겠다 이 건가?”
“좋은 날씨에도 착륙하는 데는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하다. 내 말은 이런 악기상 하에서는 조종사의 하찮은 정신적 피로라도 엄청난 실수로 연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쓸 데 없는 소리! 그렇다면 그 많은 계기나 장치들은 어디다 쓰겠다는 거야? 당신이 몰고 있는 비행기는 조종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우수한 비행기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기계를 조작하는 건 결국 사람이다.”
“착륙해! 당장 내리지 않으면 보고하겠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모든 피해와 불상사에 대한 책임을 당신 철저히 져야 할 거야.”
“……알았다. ……최선을 다 하겠다. 하지만 시도해 보고 안 되면 돌아가겠다.”
“뭐야? 한번으로 안 되면 두 번, 그래도 안 되면 세 번 네 번, 될 때까지 시도를 해야지 돌아가겠다는 것은 무슨 소리야. 지금 장난치는 거야?”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 나서 빅나얀은 마이크를 던져 버렸다.
기장 다차인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얼굴을 훔쳤다. 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꼼꼼히 닦아낸 다음 그 물수건으로 기창을 정성 들여 닦았다. 항공기가 연해 심하게 덜컹거렸다. 전방에 가득 찬 암회색 구름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다차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친구 이름이 빅나얀이야. 무서운 놈이지. 우리가 이런 날씨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저 친구 때문일 걸세. 다른 회사 비행기는 모두 결항되었는데, 유독 스타항공 비행기만 버젓이 뜨고 내린다면 대단한 자랑거리가 아니겠나? 저 친구는 그걸 노린 거야.”
“…….”
“자. 이제 내려가세. 자네가 유의해야 할 사항은 지상의 불빛을 잘 관찰하는 거야. 고도 200 피트까지 내려가서 활주로가 보이지 않으면 고우 어라운드(go around. 착륙을 포기하고 다시 상승하는 것) 할 거야. 만약 활주로 불빛이 보이면 그 다음엔 전방을 잘 살피게. 앞쪽에 고속도로 불빛이 보일 거야. 고속도로를 넘어서기 전에 항공기를 돌려야 해. 만약 고속도로를 그냥 넘어서면 우린 타브라 산의 산신령이 될 거야. 알겠나?”
“네.”
부기장 타닌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자네 애인 이름이 뭐랬지?”
“아루니입니다.”
“이제부터 아루니만 생각해. 그 이름이 용기를 줄 걸세.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계기판에서 눈을 떼지 말아.”
“옛, 알겠습니다.”
“가자. 자동조종장치 해제.”
“기어 다운.”
“기어 다운.”
“플랩 피흐틴.(flap 15)”
“플랩 피흐틴.”
“라…라이트….”
착륙절차 체크 리스트를 읽어 내리는 부기장 타닌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왜 그렇게 덤비나.”
“라이트 턴.”
“앗! 비행기닷!”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 즈음, 대합실 유리창에 몰려있던 사람들 한가운데서 고함소리가 솟아올랐다. 파본은 감전이라도 된 듯한 전율을 느꼈다.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어느새 사무실에 들어온 빅나얀이 서둘러 달려가 창가에 매달렸다. 그의 충복 에스카노와 그 밖의 직원들도 그를 에워싸듯 몰려서서 바깥 하늘을 응시했다. 지진을 만나 놀란 짐승들이 한꺼번에 달려가는 것 같은 소리가 대합실의 높은 천장을 울리며 들어왔다. 재떨이가 나동그라지고 의자가 발길에 채어 끌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레 겁을 먹은 어린아이들은 악을 쓰며 울었다.
아직 비행기는 광활한 암흑 속의 한 점 빛에 불과했다. 그러나 드넓은 하늘을 채우고 있는 칠흑 같은 어둠과 세상을 그대로 떠내려 보낼 듯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그것은 지구 상 무엇보다도 강렬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가슴에 각인되었다.
불빛이 점차 가까워졌다. 한 개의 작은 점으로 보이던 불빛은 양쪽 날개 끝에 달린 청홍의 영롱한 광채로 갈라졌고, 이어 동체 아래서 거대한 기둥처럼 지상을 향해 뿜어져 나온 은백의 눈부신 광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객실의 노란 불빛들이 점점이 드러나면서, 여객기의 위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숨도 쉬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하나 둘씩 탄성이 터졌다. 그것은 자연의 위세에 감히 맞서고 있는 인류 문명에 대한 감탄과 자부의 소리였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차갑게 반짝이는 그들의 눈동자는 단순히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굶주린 사자와 노예의 사투를 지켜보는 원형 경기장의 로마인들처럼, 평생에 걸쳐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기막힌 구경거리를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격한 흥분에 들떠서 득의양양한 기세로 망막에 주워 담고 있었다.
“이봐. 대가리 좀 치워. 안 보여.”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한 구석에서 날아왔다. 유리창에 붙어서 꼼짝을 하지 않던 빅나얀이 비행기에서 눈을 떼며 파본을 향해 소리쳤다.
“야. 파본. 네 눈깔에도 저게 보이냐? 비행기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형편없는 불평불만분자 같으니. 이 빅나얀을 겁쟁이로 만들려고 작심이라도 했었나? 천만에. 날 우습게보지 마. 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자네 에스카노. 당장 보고서를 작성해. 오늘 이 공항에서 일어난 일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글로 써. 물론 언론사에도 연락해. 오로 공항에서 다른 비행긴 다 죽고 유일하게 우리 스타 항공사만 운항을 하였다고 단단히 알려 줘. 이런 날씨에 비행기를 띄울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이 빅나얀 뿐이라고 말야.”
군중들의 가슴을 꿰뚫고 있는 쾌감은 그에게 이르러 더 한 것 같았다. 빅나얀의 입술은 터질 듯한 환희에 바르르 떨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점차 증폭되어 갔다.
“기수가 너무 떨어집니다.”
“기수 올려.”
“네.”
“네만 말고 올려.”
“넷!”
“돌풍이야. 콘트롤 시켜. 우로.”
“옳지.”
“스피드 브레이크 업.“
“식스티 넛트.(60 knots. 항공기 속도)”
“콘트롤 시켜, 우로….”
“파워 올려.”
타브라 산에 부딪칠 듯 아슬아슬 선회를 하여 활주로 방향으로 기수를 잡은 비행기가 위태로운 자세로 진입해 오고 있었다. 정상대로라면 불과 일이 분 후면 활주로에 닿을 것이었다. 활주로에서 비행기까지의 거리가 약 사 킬로미터, 최후 오 분 간의 강우량이 삼십오 밀리미터로 관측되었다.
사람들은 다시금 긴장했다. 괴괴하고 육중한 빗소리가 입을 다문 무리를 커다랗게 압도해왔다. 파본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빅나얀은 빌라도사와 맺은 비밀거래를 이행하기 위하여 모든 상황을 조작했음이 분명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기상이변 속에서 기상청의 공식상황이 한 시간 남짓이나 양호한 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9천 피트 상공에서 대기하라던 관제탑의 지시가 착륙허가로 바뀐 것도 그리고 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사무실을 유린한 것도 그의 신괴한 두뇌가 연출해 놓은 결과임이 분명했다. 아까 군중의 어깨 너머로 신기루처럼 돋아난 그 얼굴은 분명 빅나얀의 것이었다.
그러나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해야 했다. 비행기는 힘이었고 희망이었다. 그것은 한 인간의 가증스런 술책이나 이기심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엄한 진리 같은 것이었다. 아직도 너무나 많은 위험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만약 이 참담한 어둠 속에 유령처럼 버티고 서 있는 추상화산 타브라의 머리에서 바람이 내리쏟아진다면 모든 것은 끝이었다.
…원 마일 후럼 텃치 다운…온 코스…온 글라이딩 패스…헤딩, 원 에잇 제로….
착륙을 유도하는 관제탑의 교신이 숨막힐 듯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교신이 끊기는가 싶더니, 누군가의 입에서 혀가 부러지는 듯한 비명이 떨어져 나왔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리는 듯 광폭한 바람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한쪽으로 기우뚱 쏠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비행기는 활주로 끝 부분 착지 지점을 넘어서 후익후익 앞으로 떠밀려가고 있었다. 저런 상태라면 몇 십초 안에 활주로 너머 습지에 추락하고 말 것이었다.
“기장님. 기체가 조종되질 않습니다. 하강 기류가 너무 강합니다.”
“파워 올려!”
“엔진 파워……올려. 올려!”
“어! 플랩을 멈춰라. 그렇게 올리면 안돼.”
“플랩 다운! 플랩 다운!”
“파워. 파워.”
“플랩!”
“기수 들어! 기수 들어!”
“경보음입니닷!”
“풀 업. 풀 업. 풀 업! 티티야……”
아-. 아-. 아-. 아-.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서너 명의 입에서 시작된 그 소리는 순식간에 수백 명의 함성으로 돌변하였다. 고요한 수면에 쏟아지기 시작한 소낙비 소리처럼 번진 그 소리는 공포의 단말마였다. 그리고 동시에 짜릿한 환희였다. 적어도 자신만큼은 안전하다는 자각에서 우러나오는 안도의 환호였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휘파람 소리가 휘익! 하고 허공을 잘랐다. 그들이 진정 바라고 있는 것은 비행기 최후의 순간일는지도 몰랐다. 비행기는 왼편으로 커다랗게 기울어졌다가 다시금 젖혀졌다. 그리고 공중을 향해 뛰어오르듯 솟구쳤다가 사정없이 곤두박질했다. 거센 비바람 속에 비행기는 맥없이 너풀거렸다. 와- 와-. 떨어진다, 떨어져-. 와아-. 사람들은 고개를 빼어올리며 악을 썼다. 밀지 마! 안 보여! 이 새끼야! 서로 밀고 당기는 통에 일단의 사람들이 와르르 무너지며 험악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빅나얀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 있었다. 번득임을 잠시도 쉬지 않던 그의 눈동자도 허공에 빨려간 듯 공허히 열려있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 비행기가 불길을 뿜어내며 산산조각이 날지 몰랐다. 이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파본은 자신의 눈을 의심치 않을 수가 없었다.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 아싹 하면서 바스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 기적 같이 비행기가 자세를 바로잡고 내려앉고 있었다. 땅에 머리를 들이박을 듯이 곤두박질을 쳐오던 비행기가 그악스레 몰아쳐오는 폭풍우를 완강히 되받아치면서, 야자나무 숲을 배경으로 아스라이 뻗어나간 활주로 위에 그 육중한 동체를 사뿐히 얹어놓았던 것이다. 그 경이로움에 정신이 아뜩했다.
“내가 뭐랬어? 해치웠잖아! 만세! 빅나얀 만세!”
빅나얀과 그의 충복들은 신열에 들떠 고래고래 악을 썼다.
파본은 그들의 무리에서 소리없이 빠져나왔다. 대합실에선 사람들이 2층 출발장으로 바삐 옮겨가고 있었다. 그들의 재빠른 움직임이 그에겐 참담한 서글픔으로 다가왔다.
“미쳤어. 미쳤어. 다 미쳤어.”
그 말을 되뇌며 파본은 계류장으로 뛰어나갔다.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거센 빗줄기가 달려와 사정없이 몸을 휘감았다. 기쁨이었는지 분노였는지 모른 눈물이 뜨겁게 비어져나와 자꾸 앞을 가렸다. 속도를 줄이느라 내지르는 역추진 엔진의 굉음이 안개와 빗줄기를 제치며 끝없이 날아왔다. 파본은 아득한 저편 활주로에서 제동을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는 비행기를 향해 불끈 시선을 모았다.
비행기는 활주로 끝에 간신히 멈춰섰다. 그 자리에서 멈추지 못하고 단 몇 초만 더 달렸어도 항공기는 불길에 휩싸인 채 활주로 너머 뻘밭에 처박혔을 것이었다. 기장 다차인은 엔진의 파워를 낮춘 채 유도로를 따라 천천히 비행기를 몰아갔다. 불어오는 바람에 기체가 심하게 들썩거렸다.
“기장님. 대단하십니다.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부기장 타닌이 말했다. 그의 흰색 와이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건 잘한 것이 아니야. 아까 운항사의 말대로 비행기를 되돌려야 했어. 난 세상에 맞설 용기가 없었네. 그래서 폭풍우 속으로 뛰어들었던 거야. 비굴한 선택이었지. ……미안하이. 그런데 그 친구 이름이 뭐랬더라? 오로 공항 운항사말야.”
“저도 기억나질 않습니다. 경황이 없었거든요.”
“아까 항공기가 돌풍을 맞아 활주로를 이탈할 뻔 했을 때, 문득 9.11 사태가 떠올랐네. 빌딩을 향하여 비행기를 몰아가는 것과 폭풍우 속으로 몰아가는 것이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었어.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둘은 똑같은 사건이야. 이건 비정상이야. 세상이 완전히 돌았어. 어쨌든 이번 비행을 마치면 그만두기로 결심했네. 티티야를 이런 세상에 혼자 놓아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말을 마친 다차인은 흐릿해진 눈길로 정면을 응시했다. ‘지상의 낙원, 오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항 청사의 건물 위에서 커다란 네온사인이 빨강 파랑 노랑의 영롱한 빛을 발하며 연신 흐믈거리고 있었다. 그 영롱한 빗살 위로 문득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알아요. 당신은 훌륭한 조종사죠. 하지만 난 당신이 조종하는 기계덩어리가 아녜요. 난 당신의 하찮은 관심과 애정을 더 소중해 하는 여자예요. 그건 티티야도 마찬가지예요.
아내는 지금 지상의 낙원에 가 있을까?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이 모반과 광기의 세상에서 그녀 역시 또 하나의 이방인에 불과함을 아내는 지금쯤 아프게 깨닫고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 티티야에게 돌아간다면 아내 역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그는 버릴 수가 없었다.
다차인은 항공기를 브릿지에 대었다. 그리고 승무원에게 다시 커피 한 잔을 부탁했다. 독한 보드카를 마시고 싶었지만 아직 돌아가는 일이 남아 있었다. 항공기 저 아래서 한 사내가 장대 같은 비를 맞으며 연신 팔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기창에 가득 흐르는 빗물 때문에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계류장은 이미 물바다였다. 드넓은 물의 벌판 위로 수없이 많은 파문을 그리며 빗줄기는 누군가의 긴 울음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끝” (2005. 7. 16)
(작가와 사회. 200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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