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병실
황 태 영 作
나오는 사람들:
아픈이1 (병실 105호)
아픈이2 (병실 103호)
노숙자
그밖에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약간
때:
겨울
곳:
도로가의 개인병원
무대:
먹물을 끼얹은 듯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고 틈틈이 차들이 지나가는 듯한 소음이 들려온다.
천천히 막이 열리면 그와 함께 무대가 어슴프레 밝아져가고 처연히 낡은 병원 건물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관객 쪽에서 보아 단층인 건물의 왼쪽에서부터 원장실, 간호사실, 101, 102, 103, 105라는 하얀 팻말이 어색할 정도로 커다란 창문들 위에 차례로 붙어 있고 건물의 옥상에는 허름한 간판이 삐딱하게 걸려 “동제 욋과,산부인과의원”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느라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불 꺼진 창들 가운데서 갑자기 105호의 창에 불이 켜지면서 창문을 통해 바깥, 즉 관객쪽을 응시하고 있는 핼쓱한 얼굴의 아픈이1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 드러난다.
아픈이1:(창 밖을 내다보며) 또 요렇게 하루가 저무는 군. 거참, 신기하기도 하지. 꼭 지금쯤이면 정확하게 짙은 어둠이 깔린단 말야. (슬쩍 손목시계를 훔쳐보곤) 정확해. 정말 정확해. 내 구두처럼 딱 맞단 말야. 어제도 6시에 날이 저물었어. (길게 하품을 하면서) 아- 따분해. (목을 길게 뽑아 병실 안을 쓰윽 훑어보고는) 이제 이 좁은 공간에선 재미있는 일이라곤 완전히 동이 나버렸어. 구석구석에 남은 것이라곤 싫증, 그것뿐이야.
(사이, 병원 곁에 놓인 도로에서 차량들이 스쳐가는 약간 시끄러운 소음. 한번, 두번, 세번. 그 때마다 아픈이1은 괴로운 표정으로 정확히 네번씩 콜록거린다. 불 꺼진 병실들의 창에 차량들이 토해내는 불빛이 잠시 황홀하게 어리다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길 반복한다.)
아픈이1: 처음 트럭에 부딪혀 여기에 입원했을 즈음엔 그런대로 재미나는 일이 많았었지...... (속절없이 헤헤거리며) 따끔한 주사를 놓으러 온 간호사에게 “만약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 라고 묻기도 하고...... 그런데, 그 간호사의 대답 한번 걸작이었지...... 샐쭉해가지곤 “별볼 일 없죠! 당신만큼이나.” 라고 했으니까...... 그건 그렇고, 지금 몇 시나 됐나? (힐끔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를 본다.) 아니, 저런! 벌써 정각 일곱 시잖아. 이제 그만 자야겠군. 잠자는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이 건강회복의 지름길이거든. (두 팔을 주욱 뻗어 한번 기지개를 틀면서) 말동무라도 하나 생기면 따분함이 좀 줄어들텐데...... 제기럴, 어느 얼빠진 놈이 차에나 받히지 않나 ......
(이윽고 병실 105호의 불이 깜박 죽어버린다. 그러니 병원건물엔 불빛이라곤 없게 되었다. 갑자기 103호에 작은 불꽃이 피어난다. 어둠 속에서 작은 불꽃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를 반복한다. 노숙자가 담배를 빨고 있는 것이다. 담배 연기가 병실 안에 자욱해질 즈음, 103호에 스포트라이트-. 노숙자, 베드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노숙자: 역시 병원이 노숙하기에는 최고야. 깨끗한 시트와 눈부시게 하얀 베드…… 이거 원, 노숙이 아니라 입원한 기분인데. 내 당뇨병도 다 낫는 기분이 들고 말야. 불경기라 그런지 이 개인병원은 환자가 거의 없나 보군.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으며)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지. 그래야 내 집 드나들듯이 이 병실을 몰래 이용할 수 있거든. 그나저나 이 담배냄새는 어떻게 없애지? 항상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눈에 안 보이는 걸 숨기기가 힘든 법이지.
(병실 창문을 조금 연다. 창문 열리는 소리가 크게 난다.)
어이구, 바람이 매서운데. 남대문 지하도는 무척 춥겠어. 박씨, 최씨 등짝이 매우 시릴텐데…… 오늘 저녁 여기서 잠잘 줄 알았다면, 바닥에 깔고 자던 내 라면박스를 빌려주고 오는 건데…… 아무래도 두 장을 겹쳐깔면 훨씬 낫거든.
(갑자기 105호에 불이 켜진다. 물론 스포트라이트를 이용-. )
아픈이1:(103호 쪽을 쳐다보며) 거기 누구요?
(노숙자, 화들짝 놀라는 모습-. )
아픈이1:거기 누구요?
(노숙자, 침대에서 내려와 벽에 귀를 붙이고 동향을 살피고 있다.)
아픈이1:거기 누구요?
노숙자:(더듬거리며) 백, 백, 삼 혼데요.
아픈이1:103호라구요?
노숙자:(이내 안정을 되찾으며) 당연하지. 105호 옆이면 103호 아니겠소?
아픈이1: 이상하네.
노숙자:이상하다구? (심드렁하니) 뭐가?
아픈이1:오늘 환자가 그 병실에 입원했다는 말을 못 들었거든요.
노숙자:이상하네.
아픈이1:이상하다니 뭐가요-.
노숙자: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소.
아픈이1:어떻게요?
노숙자:환자라고……
아픈이1:환자라고?
노숙자:난 환자라고 말한 적이 없소.
아픈이1: 그럼, 새로 온 의산가?
노숙자:아니요.
아픈이1:남자 간호사?
노숙자:아니요.
아픈이1:경비원?
노숙자:아니요.
아픈이1:그럼, 청소부?
노숙자:아니요.
아픈이1:경비원?
노숙자:아니요.
아픈이1:그럼……
노숙자: (아픈이1의 말 도중에) 아니요, 아니요.
아픈이1: 그럼……
노숙자: 노숙자요.
아픈이1: 노숙자라구요?
노숙자: 그렇소.
아픈이1: 노숙자가 병원에는 웬 일로……
노숙자: 왜, 서울역에 난장깔아라고?
아픈이1: 예? 난장깐다니요?
노숙자: 콘크리트 바닥에 골판지박스와 신문지를 깔고 덮고 노숙생활을 하는 것 말이요.
아픈이1: 노숙생활말이군요.
노숙자: 처음부터 서울역에 난짱깐 건 아니었소.
아픈이1: 저런! 실직하셨군요.
노숙자: 가구공장을 했었는데, 거래업체로부터 물품대금을 받아내지 못해 부도가 났어요. 빚쟁이 등쌀에 피해 다니다 보니 이 지경이 됐어요.
아픈이1: 마음 고생이 심하셨겠어요.
(노숙자, 벽에서 침대로 걸어간다. 침대에 걸터앉는다.)
노숙자: 처음 호주머니에 30만원을 가지고 서울역에 왔을 때는 주변 여관에서 잠을 잤지요. 그러다가 여인숙을 거쳐, 쪽방, 심야만화방에서 잠자다가 결국 돈이 다 떨어지니까……
아픈이1: 난장깔게 되었군요.
노숙자: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도저히 급식행렬에 설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사흘을 꼬박 굶었어요.
아픈이1: 사흘씩이나……
노숙자: 나중엔 눈에 뵈는 게 없더군요. 남의 집 담이라도 뛰어넘겠더라구. (사이) 용산역 광장에서 처음 국밥을 얻어 먹을 때 얼마나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지던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목이 메여 국밥이 목구멍에서 자꾸 걸리더라구요.
아픈이1: (안됐다는 듯이 혀를 찬다) 쯔쯧, 쯔쯧……
노숙자: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캡을 푹 눌러쓴 채, 하루종일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잠만 잤어요.
아픈이1: 지하철 비용도 만만찮았겠군요.
노숙자: 삥차로 탔지요.
아픈이1: 삥차라니요?
노숙자: 무임승차말이요. 노숙자 대부분이 급식장소로 이동할 때 삥차합니다. 역무원들도 초라한 행색을 보고 못본 척 눈감아줘요.
아픈이1: 그래도 아직은 우리 사회에 따뜻한 인정이 남아 있어요. (사이) 일자리를 구해보시지 그래요.
노숙자: 많이 돌아다녀 봤지요. 구직알선단체에 다 다녀 봤지만 일자리가 정말이지 너무 드물어요. 잘나가던 후라이팬들도 일자리를 못 얻어 놀고 있는 시대요.
아픈이1: 후라이팬이라니요?
노숙자: 식당주방장말이요.
아픈이1: 거참, 심각하군요. (사이)노동이라도 해보시지 그래요.
노숙자: 일자리라곤 막노동 밖에 없는데 그것도 경험자 위주로 데려가다보니 마땅히 할 일이 없어요.
아픈이1: 건강은 괜찮나요?
노숙자: 동변상련이라고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다 보면, 매일 같이 술을 마시게 되지요. 빈 속에 독한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결국 건강을 해치게 되고 노동능력도 상실하게 되지요.
아픈이1: 그러다가 폐인이 되면 어쩔려구……
노숙자: 그래서 어떤 희망을 찾아 병원으로 찾아든 셈이지요. 노숙자들 무리에서 벗어나 병원에서 자다보면 어떤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피곤한 듯 길게 하품하면서) 아? 이제 조용한 102호 병실로 가서 눈 좀 붙여야겠어요.
(노숙자, 병실 103호의 열린 창문을 닫은 후 103호를 나가 102호로 들어간다. 그에 따라 103호 불이 꺼지고 잠시 102호 불이 켜졌다가 노숙자가 베드에 누우면 불이 꺼진다. 잠시후 105호의 불도 꺼진다. 이제 병원건물에는 불빛이라곤 없다. 검은 병원건물에 틈틈이 스쳐가는 차량들이 뱉아내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찰싹 달라붙었다가 이내 힘없이 떨어져 버리길 거듭한다.
천천히 효과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도로에서 차량들이 스쳐가는 소음이 효과음을 타고 길게 계속되다가 서서히 줄어들면서,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대형차량의 급정거하는 소리, 그와 동시에 짤막하게 일어나는 한 남자의 처절한 비명소리 -.
주위가 몹시 소란해지기 시작하면 먼저 원장실의 불이 불쑥 켜지고, 그 다음 잠시 후 간호사실의 불이 톡 켜진다. 조명효과로는 스포트라이트. 병원건물의 천장이 없기 때문에 스포트라이트가 가능하다. 차에 부딪힌 사람을 병원으로 옮기는 듯 병원문이 화들짝 열리는 소리가 나고, 이어 병원 복도를 우당탕퉁탕 울리는 발자국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 소리들에 채여 이리로, 아냐 저리로, 라고 외쳐대는 의사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와 녜, 103으로요, 하는 간호사의 가냘픈 목소리, 그리고 빨리 손 써주세요, 하는 운전수의 가볍게 떨리는 목소리가 점점 압박감을 주는 효과음을 타고 무대 바깥으로 산발적으로 튀어나온다.
한동안의 야단법석이 멎으면서 갑자기 병실 103호의 불이 켜진다. 물론 조명효과로는 스포트라이트 이용. 창을 통해 흰 까운을 걸친 의사와 간호사의 모습, 그밖에 약간의 사람들 모습이 보이고 비어 있던 하얀 침대 위엔 피투성이가 된 남자?아픈이2?가 눕혀져 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응급치료가 끝난 듯 문을 열고 의사가 나가고 그 뒤를 따라 간호사가 나가며 또 그 뒤를 따라 약간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가고, 얼굴에 붕대를 뱅글뱅글 감은 아픈이2의 모습이 관객들의 눈에 띄는 순간, 103호의 불이 살짝 꺼진다.
잠깐동안 복도가, 나가는 사람들에 의해 밟히는 소리가 좀 요란하게 들려온다.
복도에서의 소음이 멎으면 곧 원장실의 불이 꺼지고, 이어 간호사실의 불도 꺼져버리면 한동안 쥐 죽은 듯한 정적이 흐르는데 차갑고 무게감이 담긴 효과음이 그 정적을 실고 무대 위에 퍼진다.
현재 병원건물엔 불빛이라곤 없다. 다만 희미한 배경조명이 건물의 윤곽을 힘겹게 그려내고 있는 상태-.
어둠을 감싸고 있던 정적을 아픈이1이 깨뜨리면 효과음도 그만 멎는다. 곧 이어 암흑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된다.)
아픈이1: (아주 낮은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여보셔.
(103호에선 계속 대꾸가 없다. 긴장의 연속? .)
아픈이1: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여보시오, 103호 양반......
(103호에선 계속 대꾸가 없다.)
아픈이1: (혼자소리처럼 내뱉는다) ......이 사람이 죽었나......
(이때, 아픈이1 의 말끝을 뚝, 분질러뜨리면서 아픈이2의 목소리가 103호에서 105호로 벽을 통과한다.)
아픈이2: (시큰둥하게) 안 죽었네.
아픈이1: (깜짝 놀란 음성으로) 안죽었네? (멋적어진다) 아, 제가 실없는 소리를 했군요. 허허허...... (사이) 그건 그렇고...... 우리 서로 인사나 하고 지냅시다.
아픈이2: (굉장히 기분이 나쁜 듯한 어조로) 좋소!
아픈이1: (흠칫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거린다) 저, 저...... 아, 아까 한 헛소리는 죄송했습니다...... 이, 이해해 주시구요...... (사이) 전 “황”입니다. 미스터 황. 강서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있죠. (괜히, 쓸데없이 웃는다) 헤헤헤......
아픈이2: 참, 재미있는 친구군. 난 “독고”란 사람이요.
아픈이1: 도꼬씨라구요?
아픈이2: 아니, 미스터 독고. (천천히 또렷또렷하게 한 자씩 뱉는다) 미, 스, 터, 독, 고. 난 무직자요. 오래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죠.
(사이, 소름끼치게 급정거하는 대형차량의 소리-. 갑자기 105호에서 불이 불쑥 켜진다. 곧 이어 103호에도 스포트라이트? .)
아픈이1: (목을 주욱 뽑아 창 바깥을 내다보며) 여보 형씨, 또 교통사고 난 것 아뇨?
아픈이2: (같은 동작을 하며) 글쎄올시다. 바깥이 조용해진 걸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사이) 그런데 언제부터 여기에 입원해 있었소?
아픈이1: 누가요?
아픈이2: 누구긴 누구요, 당신 말이지.
아픈이1: 나요? (새삼스레 아는 듯) 아, 그렇군요. 이 병원엔 형씨와 나, 그렇게 환자가 두 사람밖에 없으니 나에게 묻는 물음이 되겠군요. (깜빡 잊은 듯) 참, 무얼 물으셨던가요?
아픈이2: (심드렁하니) 그만둡시다.
아픈이1: (갑자기 큰소리로) 아, 알았다!
아픈이2: 아, 알았어? 무얼?
아픈이1: 헨델의 “유쾌한 대장간”과 저 차들이 내는 소음과의 공약수를 이제야 알겠어요.
(사이, 차량들이 지나가는 시끄러운 소음. 클랙션 소리 한번, 두번, 세번, 네번)
아픈이1: (혼자말처럼) 바로 저거야. 저거라구. (박자를 맞추며) 빵빵바방...... 빵빵바방...... 동동동...... (103호를 향해 소리친다) 여봐요. 따라해봐요.
아픈이2: (잠시 머뭇거리다가 따라한다) 빵빵바방...... 빵빵바방...... 동동동......
아픈이1: 이번엔 모션을 취하면서 해봅시다. (흥겹게 앞뒤로 머리통과 두 팔을 흔들면서) 빵빵바방...... 빵빵바방...... 동동동...... 빵빵바방...... (노래를 멈추고는) 왜 따라하지 않아요?
아픈이2: 안보이니까, 형씨의 모션이.
아픈이1: (안됐다는 듯이) 저런!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어버리신 모양이군요......
아픈이2: 그게 아니고......
아픈이1: 그게 아니고?
아픈이2: (침울한 음성으로) 형씨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저 두터운 벽 때문에.
아픈이1: (옆의 벽을 쳐다본다) 아참, 그렇군요. 저 두꺼운 벽 때문에 형씨는 날 볼 수가 없군요. (힘없이) 나도 형씨를 볼 수가 없고.
(사이, 다친 상처가 많이 아픈 듯 아픈이2 짧게 신음한다.)
아픈이1: 많이 아파요? 고놈의 운전수 때문에 형씨가 고생하는군요. (혀를 찬다) 쯔쯧, 쯔쯧......
아픈이2: 운전수 탓이 아니라.
아픈이1: 운전수 탓이 아니라면?
아픈이2: 내 탓이요.
아픈이1: 형씨 탓?
아픈이2: 그렇소.
아픈이1: 그렇다니요?
아픈이2: 내가 뛰어들었으니까.
아픈이1: 자살?
아픈이2: 그런데 타이밍이 맞지 않았어요. 정확해야 하는데 좀 늦게 뛰어들었거든.
아픈이1: (맞장구치며) 그렇죠. 정확이 최고죠. (사이) 그런데 알 수가 없군요, 왜 자살을 하려고 했나요?
아픈이2: 자살하려고 뛰어든 게 아니라 돈 좀 벌려고 뛰어들었지요.
아픈이1: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돈 좀 벌려고 차에? 그러다가 죽으면 어쩔려구?
아픈이2: 요령껏 부딪히기 때문에 많이 다치진 않아요. 직장을 그만둔 후로 두 달에 한번꼴로 자가용에 뛰어 들어온 걸요. 헌데 이번엔 좀 많이 다쳤어요. 하긴 무리였지. 자가용 전문이 버스를 택한 것부터가.
아픈이1: 거참, 거참.
아픈이2: 단 한번 부딪히면 거뜬히 두 달 생활비가 보상금으로 나오니까, 가족을 위해서 할만한 일이죠. 자가용이 보상금을 두둑히 주는데 오늘따라 승용차는 왜 그렇게 한 대도 안 달리던지...... 아주 급히 돈 쓸 데가 생겨 마음은 조급하고, 아쉬운대로 버스에 부딪힌 거죠. (고통스러운듯 신음을 토한다) 아? 역시 난 버스체질은 아닌가 봅니다.
아픈이1: 그러니까 형씨는 자의에 의해 차에 부딪혔군요. 난 그렇지 않은데. 난 횡단보도를 우연히 건너다가 달려오는 트럭에 부딪혔어요. 그 때 그 횡단보도를 건너가지만 않았다면 평생동안 교통사고와는 관계 없는 사람으로 살텐데.
아픈이2: (단호하게) 아니죠. 당신의 인생엔 교통사고가 태어날 때부터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언젠가 한번은 교통사고를 당하게끔 되어 있는 거죠. 형씨가 그 당시 그 횡단보도를 건너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언젠가 한번은 거기서 교통사고를 당해야 하는 거지요. 흔히 사람들은 불행을 가능한한 멀리 하려고 하지만, 그 불행은 언젠가는 꼭 자신에게 닥치는 겁니다. 날 봐요. 여러 번 차에 부딪혔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잖아요. 교통사고로 죽지 않도록 내 인생에 포함되어 있는 거죠.
아픈이1: 거참, 거참.
아픈이2: 왜 이런 경우가 있잖아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죽자, 하고 돌진하는 병사는 죽지 않고, 살려고 깊숙히 숨는 병사가 포탄에 잘 맞아 죽는 경우 말입니다. 다 인생에 그러도록 되어 있는 거죠. 죽으려고 한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살려고 한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아픈이1: 거참, 거참.
아픈이2: (갑자기 생각난듯) 참, 이 방이 몇 호실입니까?
아픈이1: 103호실.
아픈이2: (심각한 목소리로) 그럼 당신 병실은 104호겠군요.
아픈이1: (놀라서) 예? 예끼, 여보! 재수없게시리. 105호요, 105호. 병원에 “4” 란 숫자가 어디 있소, 무식하게시리.
아픈이2: (여전히 심각한 목소리로) 왜 없을까요?
아픈이1: 그야 “죽을 사”가 연상되기 때문이겠지요.
아픈이2: (계속 같은 소리로) 단순히 그러한 한자와의 공약수 때문일까요? 옛날에 병원이 하나 있었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 많은 병실들 가운데 “4”란 숫자의 병실에 든 환자가 잘 죽더라 이거죠. 애초부터 “4”란 숫자가 들어 있는 병실엔 잘 죽도록 운명지워져 있다고 생각할 순 없을까요? 아, 이야기가 빗나가는 것 같군요.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병원측에서 아예 “4”란 숫자를 다 없애버렸다 이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불행이 없어질까요? 숫자를 없애는 것만으로 운명적으로 오게 되어 있는 죽음이란 불행을 피할 수가 있었을까요?
아픈이1: (얘기에 끌려든다) 그러니까 104호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수 있겠군요. 그럼 어디에......
아픈이2: 글쎄요...... 1,2,3, 다음에 4니까......
아픈이1: (질겁을 하며) 아니, 그럼 내 병실이 104호란 말이요! 틀림없이 105호요! 5옆의 수가 4니까 어쩜 형씨의 병실이 103호가 아니라 104호인 것 아뇨?
아픈이2: (깊이 생각에 잠긴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다가) 내가 103호, 당신이 105호...... (벽을 보며) 그럼 저 벽이...... 그래, 맞아, 저 벽이 104호야!
아픈이1: (옆의 벽을 쳐다보며) 저 벽 말이요?
아픈이2: (냉정하게) 그래요, 바로 당신 침대에 바싹 붙어 있는 그 벽!
아픈이1: (깜짝 놀라 더듬거린다) 저 벽이, 저 벽이......
아픈이2: (차가운 목소리로)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3개의 방을 2개의 방으로 줄여 버렸지만......
아픈이1: (가볍게 떨리는 음성으로) 3개의 방이라니요? (더욱 떨리는 목소리로) 3개의 방을 2개의 방으로 줄이다니요?
아픈이2: (가라앉은 음성으로) 쉽게 말해서 원래 있던 103호, 104호, 105호, 그렇게 3개의 병실 가운데 인위적으로 104호를 허물어 버렸다 이겁니다. 불행을 막으려는 허튼 수작이죠. (상처가 아픈지 전보다 더 쓰라리게 신음한다.) 아? 아? 또 상처부위가 아파오는군.
(사이, 아픈이1이 공포에 질려 몹시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보인다. 그리고 점점 압박감을 주는 효과음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픈이2: 104호란 불행을 피하려고 허물었지만...... 형씨!
아픈이1: (지나칠 정도로 놀란다) 네? 왜, 왜요?
아픈이2: (큰소리로) 보시다시피, 바로 당신 옆에 벽으로 그것이 뚜렷이 존재하고 있잖소! 벽으로 말이요! 벽으로!
(갑자기 아픈이1이 놀람과 공포의 비명을 지르고 아픈이2의 말은 차디찬 음성으로 계속된다. 아픈이1의 병실에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를 색깔 있는 것으로 바꾸어, 공포에 질려 덜덜 떠는 아픈이1의 모습이 돋보이도록 한다.)
아픈이2: (힘없이) 그런데 그 벽을 불행하게도 나도 공유하고 있어요. 바로 그벽이 103호의 벽이자 105호의 벽이니까요. (상처부위가 다시 아파오는 듯 신음한다.) 아? 제기럴, 왜 이렇게 아프다냐. 아? (신음을 멎고) 그러니까 당신과 나 사이에 그 104호가 유동성을 가지고 왔다 갔다 하겠죠.
(갑자기 아픈이1이 넋이 나간 듯이 소리친다. 그 소리에 맞추어 쳐대는 음향효과로서의 심벌즈-. )
아픈이1: 아, 벽! 벽! 벽! 벽! ......
아픈이2: (젖은 목소리로) 밤이 깊었군.
(갑자기 103호의 불이 꺼지고 홀로 어둠 속에 남은 105호의 불빛 아래에서 벽을 쳐다보며 미친 듯이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 있는 아픈이1의 모습이 창을 통해 보이면서 서서히 막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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