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 《등장인물》 황사장(55) 박부인(55) 우 씨(55) <무대> '자가용 안' 앞좌석 의자와 뒷좌석 의자만이 단촐하게 놓여있고 앞좌석에는 핸들이 있다. 막이 오른다. 번개가 번쩍번쩍, 뒤이어 천둥이 우르릉 쿵쾅. 연이어 쏴아아아 쏟아지는 빗소리. 새벽닭 우는 소리처럼 비명이 들려온다. 갑자기 암전. 소리1(우 씨)：브레이크 고장이오. 꽉 잡고 고갤 숙여요. 소리2(박부인)：에그머니나, 시상에! 요거이 먼 일이다요. 소리3(황사장)：오메, 일났뿌렷네. 쏠링께 꽉 잡으란마시. 소리 (모 두)：사람 살려. 아악. 불협화음소리 이어지다가 쿵하고 부딪히는 소리 까무룩히 지르는 비명소리 비명소리 길게 이어지다가 재차 우탕탕 부딪히는 소리. 깊은 침묵 무대 밝아지고 구겨진 자동차 의자에 휴지처럼 어지러이 널려 있는 사람들. 박부인：차가 폭싹 쭈그러졌어요. 여보, 여보오-. 얼렁 대답 좀 해봐요. 뒷좌석에 낀 몸을 빼내려고 용을 쓰는 박부인, 하지만 꿈적하지 않는다. 박부인의 흐느끼는 소리 길게 이어지고 깊은 침묵. 황사장：(침묵을 뚫고) 와이구, 인자 꼴까닥했는갑네. 박부인：오마나, 이 냥반이. 진작 인기척을 해야제. 황사장：의자에 몸이 끼어 당최 숨을 쉴 수 없으니… 박부인：여보, 지도 죽겠고만요. 황사장：워치키? 박부인：갈비뼈가 뻑적지근한 것이 어째야 쓸꼬이! 숨쉬기도 힘들구만요. 황사장：나원참, 어느 눔이 그렇게 바스러지게 안아 뿔던가? 박부인：쑥대밭이 되었는디 시답잖게 장난이 나와요? 툭하믄 장난질이나 치고… 황사장：젠장맞을, 근디 저 눔이 사람잡더니 까딱도 않흐네. 와이고, 무신 날벼락이랑가! 황사장, 용을 쓰며 운전대에 고꾸라진 우씨를 일으키려 하나 텅 빈 자루처럼 쓰러져 버린다. 황사장：맙소사! 이런 변고가… 박부인, 손을 뻗쳐 우씨의 손을 잡는다. 황사장：외간 남자 손을 잡아서 뭐할라꼬? 박부인：맥박을 짚어봐야 할게 아뇨. 황사장：어쩐가? 박부인：죽은거 같아요. 벌써 뻣뻣해지는 데요. 황사장：(우씨 어깨를 잡아 흔들며) 아야, 일어나란 말이다. 썩어빠질 노옴! 박부인：그럴 기운있으면 기어서라도 신골 하고 오씨요. 황사장：나도 두 다리가 의자에 끼여 옴쭉달싹도 못허것는디 먼 수로 신골해. 박부인：그라믄 입이라도 닫으시오. 황사장：아니, 저노므 여편네가 어데라고 함부로 주둥아릴 놀려. 난 무늬만 살아 있지 아까부텀 삭신이 오그라붙어 당최 꿈쩍않은디. 박부인：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아무래도 저치한테 당한 거 같아요. 황사장：먼 소리야. 명색이 저느만 나완 불알친구잖아. 박부인：그렇지요. 같이 공장을 일구어 놓고 한평생을 살아왔응게. 곰곰이 생각해 보란 말요. 우리가 돈을 빼돌렸단 걸 알고 부터는 원수가 되었잖아요. 투자한 돈 일원 한푼 받지 못하고 고스란히 떼었으니 얼마나 원통하겠어요. 황사장：요런 맹추. 절마가 돈을 빼돌렸다는 걸 알 턱이 없잖아. 박부인：척보면 삼척동자도 알아요. 파산선고하고 뻥을 치면 누가 모를 성싶었소? 황사장：아이구 속터져. 우리가 처제 명의로 따로 부동산을 구해 놓았단 것은 당신과 처제 부부, 그리고 나 밖에 모르는 사실이잖아. 박부인：우리 가족 등기를 죄다 떼어보던가 아무튼 어떻게 알아냈겠죠. 한달 전부터 어쩐지 수상타 했더니만. 황사장：뭐가? 박부인：우리가 자금을 왕창 빼돌린 걸 알고 애초엔 바락바락 용을 썼잖소. 그러다 한달 전부터 체념한 사람 마냥 하루아침에 싹 달라졌잖아요. 모다 계산이 있어 가면을 썼던 게 아닐까요? 황사장：계산이라니? 박부인：친할수록 미움이 커지면 철천지 원수가 되잖아요.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마음 속은 모른다잖아요. 황사장：저놈이 얼마나 교활한 줄 몰라서 그래? 박부인：그 사람 흠집을 털어 내려고 하지 말아요. 그 사람 이떻게 된 거 따지고 보믄 당신한테 문제가 있어서라구요.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곱씹어 보란말요. 황사장：뇌에 종양이 생긴 것도 내 탓인가. 다 지놈 팔자소관이지. 박부인：뇌에 종양이 생긴 것도 일종의 화병일 거라구요. 골머리를 앓고 보면… 황사장：닥쳐. 화병이 머리에 생긴 것 봤어. 박부인：그래도 그 사람 치료받을 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구요. 황사장：자꾸 얼빠진 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머리 속에 그런 나쁜게 들어찬다고. 박부인：그래도 생각하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그 사람들 지금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잖아요. 곰곰이 생각해 봐요.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원수한테 등을 싹 돌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잘해준 이유가 뭐겠어요. 황사장：고깝긴 해도 이 자가용이라도 운전해야 거미줄 안치겠기에 그런 거지. 박부인：(고개를 흔들며)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꿍꿍이 속이 감추어져 있는 것만 같아요. 황사장：무슨 흰소린가? 박부인：아직도 모르겠어요. 황사장, 두 눈을 꿈뻑꿈뻑한다. 황사장：뜸들이지 말고 얼렁 말해! 박부인：우리와 함께 죽을 속셈. 황사장：어렵쇼! 당신도 참 어지간하군 그래. 퍽이나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렇게 성토에 나선걸 보면. 박부인：저 치가 치밀한 속셈으로 우릴 죽이려 했다구요. 황사장：이 새끼가 뒤로 호박씰 깠다… 박부인：그래요.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으니 정분을 봐서 기사로 써달라고 손이 닳도록 싹싹 빌었잖아요. 어차피 자신은 종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니까 우리와 함께 죽는다고 해도 별로 원통할 것도 없었을 거예요. 황사장：아무리 그렇더래도 동반자살까지 생각했을라고. 박부인：우리가 부상을 당하더라도 살아 나오지 못할 장소를 미리 물색해 둔 게 틀림없어요. 쥐새끼도 막다른 골목에 다달으면 고양이를 문다잖아요. 종양이 생겨 사형선고를 받고 모아논 돈도 모조리 털렸으니… 아무튼 약정된 돈을 틀어쥐고 내놓지 않는 인색한 악덕 사업주를 그만둘 수 없었겠죠. 황사장：주둥아리 조심해. 악덕사업주라니… 누굴 보고 함부로 주둥아릴 놀려. 박부인：이번 여행에서 부부동반을 하자고 해도 한사코 자기 마누란 데려오길 꺼려했잖아요. 황사장：맞아. 그러고 봉께 목적지를 온천장으로 바꾸자고 한 것도 저느마야. 공짜 온천장 초대권이 있다도 하구서 말야. 박부인：당신은 빈틈없이 단단한 철이었어요. 황사장：쇠는 담금질할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강해지지. 박부인：단단한 철이라도 너무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죠. 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무실을 거쳐간 모든 직원들이 세 달도 버티지 못하고 속속들이 철새처럼 떠나간 이유가 뭐겠어요. 황사장：썅, 누가 안 준다고 했나. 쬐만 기다리래도 딱히 씨알도 멕히지 않는 걸 날더러 어쩌란 말야. 박부인：제 아무리 눈 가리고 아웅해도 한 두 번이죠. 한달 벌어 한달 묵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잖아요. 그렇잖으면 누가 그런 독극물 쳐다나 보겠어요. 떠나가다 뿐이겠어요. 모다 학을 띠고 나가더군요. 더군다나 저 사람 사형선고를 받은 마당에 얼마나 마음이 쫄았겠어요. 저 사람 입원비, 수술비가 급히 필요하니 급전을 좀 융통해 달라고 말했을 때 당신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잖소. 황사장：내가 봉인가. 왜 저느마 수술비를 대. 표면적으론 이 몸도 원금을 몽땅 날렸다고. 박부인：막판에 몰린 사람을 법대로 해보라며 큰소리 뻥뻥 쳐댔으니. 결국 참다참다 못해서… 쌓이고 쌓인 한이 울컥하여 모사를 꾸민 거라구요. 황사장：썩을 노옴! 내가 왜 지 수술비를 떠 안아. 박부인：당신이 그 때 조금이라도 융통해 주었더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거에요. 산통을 거기서부터 깨진 거라구요. 황사장：우라질, 이날 입때껏 밥 먹여주고 재워주면 됐지 얼마나 더. 내가 자선 사업가인 줄 아나. 지가 너무 헤퍼서 돈을 모으지 못한 걸 날더러 어쩌란 말야. 지지리도 못난 놈. 박부인：우린 저 자의 치밀한 계획 하에 동반 죽음을 당하러 이 골짜기까지 내몰린 거라구요. 황사장：모두 내 불찰이요. 저 화상이 수술 후에 방사선 치료받을 적부터 알아봤시야 하는 건데. 절마가 물귀신처럼 우덜과 함께 죽을라꼬 했다니… 박부인：그랑께 왜 사람 가슴에 못을 박아요. 황사장：은제부터 저 놈 편에 서서 그렇게 역성을 드는겨. 사업을 하다보면 딱히 마음대로 되지 않다가도 아침에 떠오르듯이 쫘악 떠오르는 것이 사업인게여. 꼬장꼬장 눈에 핏대를 세우더만… 박부인：저 사람 평생 모은 돈을 못받고 있으니 속깨나 탔을 거요. 얼마나 밉고 얼마나 죽이고 싶었겠소. 저 사람은 평생을 밀폐된 공간에서 중크롬 독성을 다루어왔어요. 얼마나 중독성 있는 줄은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황사장：모르는 소리. 돈이란 그런 독성을 만져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거라고. 박부인：그 사람 퍽이나 답답했을 거에요. 증거라곤 머릿속 뇌종양뿐이지 가족들 생각하면 생계가 막연하지. 근로복지공단에서도 증거 불충분으로 산업재해보상을 받을 수도 없지. 하긴 사업장 안에 있던 증거란 증거는 당신이 송두리째 불살라 버렸으니… 아무리 전문가들이라고 해도 눈 씻고 찾아봐야 증거가 있을 리 만무하겠지요. 황사장：왜 자꾸 저 샌님 역성을 드는겨. 박부인：중크롬 같은 독성이 있는건 모두 우씨한테 맡겨놓았으니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딴 사람이 챙긴 것으로 생각하고 한풀이라도 하고 싶었을 거요. 저 사람 중크롬 독성을 평생 만져왔어도 당신 같은 독성은 첨이라고 대들었잖아요. 황사장：당신, 한술 더 뜨는군. 망상에 사로잡혀 너절한 입씨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냐, 어서 여기서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지. 와이고, 이게 웬 낭패란가. 박부인：철두철미하게 덫을 놓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아요. 황사장：시러베 같은 놈. 모사를 꾸며 생사람 잡으면 자기 모가지는 성할 줄 알았나? 빌어묵을. 자알 디졌다. 당신, 가만있지만 말고 신골해. 박부인：내가 오뚜기라도 되는 줄 아쇼? 갈비뼈가 분질러졌는가 꼼짝 못하것소. 핸드폰 좀 내놔봐요. 황사장：진작 불통 났어. 이런 산골짝까정 먼 핸드폰이 터질라꼬. 박부인：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산중인데 어쩐데요? 황사장：그라믄 기어서라도 신골 하고 와야제. 박부인：웟따, 요 몸으로 깍아지른 저 벼랑을 올라가라고요? 아니면 암내나는 개처럼 씩씩거리는 강물을 건너란 말은 아니겠지라. 황사장：그라믄 어쩐댜? 박부인：앞은 강이고 뒤는 벼랑인디 부상당한 몸으론 빠져나가기는 영 글렀소. 우린 수렁속으로 빠진 거라구요.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더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늪. 황사장：재수없는 소리 말그라.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었어. 박부인：남 속일 때나 통하는 말이죠. 황사장：이노므 여편네가… 내가 누구 때문에 아둥바둥 그렇게 살았는데. 박부인：이제야 서서히 실토를 하는 구만요. 죽을 때가 되면 사형수도 죄를 뉘우친다잖아요. 자꾸만 뒤가 켕기는 거죠. 황사장：잠자코 기다려. 기다리고 기다리면 우린 구출될 거야. 그라고 봉께 우덜이 여행을 지옥으로 와뿌렀네. 박부인：당신이 있는 걸 봉께 지옥은 확실한 지옥이요. 고것도 물지옥. 황사장：이노므 여편네가 자발없이 깝죽거리긴. 황사장, 불쾌해진 턱부리가 부들거린다. 깊은 침묵. 황사장, 슬금슬금 죽은 우씨의 호주머니는 뒤져 돈을 챙긴다. 박부인：돈, 돈, 돈… 그 놈의 도둑 심보가 우릴 요로케 만든 거요. 죽어 가는 마당에 까짓 것 돈은 뭐하게요? 황사장：돈이란 반드시 쓸 데가 있는 벱이지. 박부인：지옥 들어갈 때 노자 돈에 쓸라꼬요. 황사장：죽통 닥쳐! 황사장, 용을 쓰고 밖을 내다보려 하나 다리가 찌그러진 의자에 끼여 옴쭉달싹 못한다. 박부인：눈 씻고 봐도 강물밖에 안보이는디. 뭘 보려고 그렇게 기를 쓰요? 황사장：슬픔이 넘쳐 흘러가는 것 같지 않아? 박부인：차가 강물에 굴러 떨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요. 황사장：어쩜 요러케 음침하고 비밀스런 아지트를 골랐을꼬. 박부인：그래야 완전범죄에 성공하잖아요. 황사장：지 놈이 죽을 목숨이니 꼭 요런 험한 곳이 아니라도 되잖아. 쏴하니 굵어지는 빗방울 소리. 박부인：예삿일이 아니오. 황사장：(입맛을 쩝쩝 다시며) 입씨름했더니만 입이 컬컬하고만. 그나저나 주전부리 싸온 거라도 있으믄 내놔봐. 박부인：아 요즘 시상에 묵을 것이 지천에 쌔고 쌨는디 쥐뿔났다고 갖고 다니것소. 황사장：오메 볼따구 미어터지게 밥 좀 한번 묵어봤으믄. 박부인：먹성은… 어딜 가나 밝힌다니까. 그렇게 밝힌 게 명이 길지라. 황사장：아니 그라믄 이 몸이 죽어야 좋것어. 어여 기운만 되찾아 봐. 박부인：나중에 보잔 사람 안 무서운께. 자꾸만 저 강이 요단강처럼 보이는디… 저 강을 건너가면… 황사장：쓰잘 데 없는 소리. 박부인：그런께 첨부터 뭐라고 합디여. 사람한테 원한사면 안된다고 했잖아요. 황사장：찰방지게 따라 나설 땐 언제고 인자 와서 궁시렁거려. 박부인：쫄딱 죽게 생겼어요. 우린 인자 저승객이 되뿔었다고요. 황사장：기어서라도 언덕배기까정 올라가여 할텐디 둘 다 중상이구, 이거 낭팬데. 박부인：피를 많이 흘려서 정신이 오락가락허구 비가 오는데도 별들이 보이구만요. 박부인, 손가방에서 루즈를 꺼내 작부처럼 입술에 바른다. 황사장：철딱서니없게 모냥내는 꼴 좀 보소. 호박에 줄 몇 개 긋는다고 수박되던가? 죽어가는 판에 주딩이에 빨간건 머땀시 쳐발라. 박부인：(너스레를 떨며) 죽을 때 죽더라도 때깔 곱게 보여야제라. 황사장：염라대왕한티 잘 보일라꼬? 박부인：죽어있는 불초 소생을 보고 무섭다고 까무러치믄 으짜겠오. 황사장：쥐잡아 먹은 쌍판처럼 꼴사나운께 치아뿌라. 노려보는 박부인의 모습이 저승사자처럼 섬뜩해 보인다. 몸을 사리는 황사장. 신음소리 이어지고 빗소리 쏴아아아-. 박부인, 밖을 휘둘러보다 거푸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쉰다. 황사장：저 빗물을 받아 놔야 목을 축일 것 아냐. 사람은 물만 있으믄 열흔은 너끈하게 버팅께. 박부인：근데 뭣에다가 받은다요? 황사장：정 없으믄 배때기에라도 받아야지. 후두둑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고. 박부인, 비닐 봉투를 펼쳐들고 물을 받는다. 박부인：여기가 어디께래요? 정신히 헤까닥 해서 당최 가늠을 못하겠구만이라. 보아하니 저건 필시 북한강인 모양 이오. 황사장：내 눈엔 소양강처럼 보인디. 라디오는 살아있을지 모르겠군. 자동차의 라디오를 트는 황사장. 앵 커：갑작스럽게 상륙한 폭풍의 영향으로 전국적인 게릴라성 폭우가 내려 도처에서 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너진 축대나 농작물에 피해가 없도록 만전을 기하시기 바랍니다. 기상청을 연결하여 기상 개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상통보관：오늘의 기상개황입니다. 강원 산간 지방에 당도한 폭풍으로 인하여 특히 이 지역에 집중적인 호우가 예상됩니다. 현 시각 부로 동해 남해 해상에 폭풍 경보를 발령합니다. 항해 및 조업하는 선박들은 배를 정박하시고 기상 개황에 귀를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바다의 물결은 남해동부 해상에서 오전에 4내지 5미터로 높게 일다가 오후에 3내지 4미터로 일겠고 동해 전해상은 먼바다 5내지 6미터, 앞바다 4내지 5미터로 일겠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동해 남부 해역에서 심한 강풍을 동반한 집중 폭우가 예상됩니다. 라디오를 끄는 황사장. 황사장：이 놈의 날씨마저 지금 꼬락서니하고 똑 같구만. 예삿일이 아녀. 황천길 가는데 바람이 너무 불어 길을 재촉하는 겐가. (고개를 흔들며) 간밤에 저승사자를 봤어. 인자 기운이 떨어지고 한속기 나서 더는 못 버티겠 다구. 박부인：맥빠지게 독한 당신마저도 살기를 포기할거요. 황사장：포기고 뭐고 목적지를 초장부터 바꿔 부럿는디 무신 수로 구출되것어. 박부인：그렇다고 무대뽀로 기다린다고 뾰족한 수 나오겠어요. 황사장：아서라, 이노므 몸뚱아리 삭신이 쿡쿡 쑤시고 숨쉬기도 힘드네. 신음소리 높아지고 우씨, 퀭한 눈으로 유령처럼 서 있다. 박부인, 우씨와 맞닥뜨리고 눈을 끔벅인다. 박부인：(깜짝 놀라며) 갸! 아이구머니, 시상에나! 죽은 사람이 벌떡 눈을 뜨고 우릴 바라보고 있어라. 황사장：물러터져가지고. 인자 실성해뿌렀는갑이네. 박부인：(손으로 가리키며) 저기. 귀, 귀신이… 저쪽에 있던 송장이 눈을 번쩍 떠부렀어라. 황사장：(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우씨를 보며) 에그머니나. 우씨가 흡뜬 눈으로 노려본다. 황사장. 봉고차 의자 사이에 낀 다리를 용을 쓰며 빼낸다. 황사장：(눈이 화등잔해지며) 맙소사! 저느마땜시 움쭉달짝하지 못하게 낀 발이 빠졌어. 의자 사이에 낀 다리가 빠졌단 말시. 박부인：그럼 뭘 꾸물거린게요. 담력 센 당신이 어찌 좀 해보란 말요. 황사장：죽은 사람이 눈을 뜰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웬 호들갑이야. 혹시 당신이 저느마 눈을 뜨게 한 건 아니겠지. 박부인：냄새나고 등골이 오싹해서 옆에 얼씬거리지도 못하는데도요. 저사람 우리한테 그만큼 원한이 깊은 게요. 황사장, 우씨의 눈을 감기려 하나 손을 내리면 다시 눈을 번쩍 떠버린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눈을 감기는 황사장. 황사장：독은 이렇게 독으로 잠재워야제. 박부인：귀신이 당신 다리를 꺼내준 셈이군요. 또다시 귀신이 나타나서 우릴 구해 줘야 할텐디… 황사장, 자유로워진 다리를 움직이려 하나 제대로 되지 않 는다. 박부인：싸게싸게 꼼지락거려 보란 말요. 황사장：옴쭉달짝 못하고 눌려있었는데 다리에 먼 힘이 있겠는가? 이곳이 크막한 관이 되부럿구만. 죽은 것보담 살아있는 게 훨씬 고통스런 생지옥 같아. 죽은 자의 얼굴은 편안코 산 자덜 면상은 고통에 찌들어 있는 걸 보면. 박부인：당신, 그래도 한가닥 양심은 남아 있는 모양이네요. 그렇게 뒤가 켕기는 걸 보믄. 우린 헛것이 씌여 미쳐가고 있소. 황사장：일어서지도 못하는 날 좀 보라고. 이게 어디 살아있는 목숨인가? 송장이제. 그래 모두 자업자득이지. 다 죄 값을 받는 거라고. 천벌이라면 달게 받아야지. 박부인：괄괄하던 그 성미는 어데간거요. 자꾸 꼼지락거려 물리치룔 해야 다리에 힘을 얻을 거 아뇨. 우리가 죽으면 원수의 뜻대로 되는 거란 말요. 황사장：아무렴. 철전지원수 뜻대로 되면 안 돼지. 삭신이 굳어지기 전에 자꾸 움직여야지. 황사장, 다리를 물리치료 하듯 움직인다. 쏴아아아 빗소리 이어지고 황사장：밑 빠진 독처럼 비가 많이도 쏟아붓는구만. 성난 강물이 금방이라도 삼켜 버릴 것처럼 촐랑거리네 그려. 박부인：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오. 저 놈의 비가 사고 흔적들을 죄다 쓸어부럿을 텐디… 우린 독 안에 든 쥐 신세요. 무작정 눈 번히 뜨고 죽어갈 참이요. 딱 부러지게 묘책을 내놔 보란 말이오. 황사장：이러다간 줄초상 나겠어. 난 너무 억울하다고. 아이구 냄새야. 먼 냄새가 요로케 독하다냐. 속이 뒤집힐 것 같아. 박부인：30년 묵은 한이 썩는 냄샌데 어련하겠수. 황사장, 웩웩거리며 헛구역질을 한다. 박부인, 개처럼 코를 킁킁거린다. 황사장：이 죽음의 냄새! 개를 델꼬왔으믄 좋아할 냄새야. 박부인：야튼 먼 수를 써야지 안되겠소. 그래도 당신이 남잔께 수고 좀 하시오. 황사장：겨우 발을 빼냈지만 힘이 없어. 보다시피 입만 살아있는 산송장이랑께. 황사장. 끙끙거리며 시신을 운전석에서 밖으로 밀쳐낸다. 박부인：겁은 많아가지고. 황사장：(비아냥거리며) 여긴 니놈이 있을 곳이 못돼. 비가 오는 물지옥으로 떨어지라고. 박부인：이제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거두어내도록 합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어 모르겠소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씨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지도 몰라요. 우리를 죽인 건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요. 황사장：천불나게 하지 말고 주둥아릴 닥치지 못해? 황사장, 불쾌해진 턱부리가 부들거린다. 박부인：머슴처럼 힘으로만 해결하려 들지 말고 머리를 써요. 머리를. 워쩌크롬 해야 이곳을 알릴 수 있을까요? 황사장：글시. 박부인：대관절 사람 눈에 젤루 잘 뜨이는 게 뭘까요? 황사장：그라믄 머리 좋은 당신이 묘책을 내놔봐. 박부인：사람들이 젤루 싫어하는 건요? 황사장：저기 냄새나는 송장. 모다 무서워서 쳐다보려고 하질 않으니. 박부인：(곰곰히 생각에 잠기다가) 당신 돈만 밝히지 통 숙맥이군요. 황사장：그만 뜸들이고 후딱 말해 봐. 박부인：기왕에 죽은 사람… 저 시체를 강물에 띄우믄 어떻겠슈. 호주머니에 편지를 넣어서 말입니다. 황사장：웬 뚱단지 같은 소리야. 절마를 강물에 처박아서 뭐할라고! 박부인：그 방도밖에 더는 없어요. 시체가 부패하면 배에 가스가 차서 물에 떠오릉께 단박에 사고 장솔 알려줄 거요. 특급우편처럼 말이죠. 시체가 발견되면 샅샅이 조사하게 될 거요. 황사장：원수가 우리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꼬? 박부인：그래요. 우씨가 우리 목숨을 구하기 위해 종양이 생겨 죽을 목숨을 버린 것만 같아요. 우씨는 마지막으로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마지막 선물을 헌사한거요. 황사장, 태풍처럼 숨을 몰아쉰다. 황사장：아서라! 저렇게 냄새나는 시체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라꼬? 박부인：맞아요. 마지막 선물이죠. 황사장：원쑤가 우릴 죽음에서 기사회생시켜준다꼬? 박부인：그러니 어여 편지를 쓰시오. 우씨를 강물에 띄워 사고 위칠 알리는 거요. 물론 시체 주머니엔 편지를 넣은 봉다리를 담아서 말입니다. 우린 구출될거요. 황사장,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망설인다. 박부인：무얼 망설이는 거요. 빨랑 우씨를 강물에 던져요. 저 사람이 마지막 선물을 헌사하는 거라니깐요. 이건 죽은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거라니까요. 황사장：볼펜 좀 줘봐. 소포를 부치려면 주소를 적어야지. 박부인：여부가 있겠습니까? 박부인, 볼펜을 찾아 건넨다. 황사장：종이도 줘야제. 몸뚱아리에다 쓸까? 박부인, 더듬더듬 종이를 찾지만 없다. 박부인：종이는 없는디요. 감추어둔 돈 있잖아요. 거기다 쓰면 되잖소. 황사장：옳지. 이깟 것 종이보다도 쓸모 없는 돈. 박부인：돈이란 그렇게 요긴한데다 써야되는 거요. 황사장, 꼬깃꼬깃 숨겨둔 지폐를 꺼내어 볼펜을 든다. 황사장：근데 뭐라고 적을까? 박부인：희망을 적어요. 황사장, 골몰하며 지폐에 메모를 적는다. 비장한 음악 높아지며 황사장, 메모를 읽어나간다. 황사장：강원도 산꼴짝에 차가 미끄러져 내렸오. 한사람은 죽고 차안에 탔던 두 사람은 죽어가고 있소. 핸드폰도 끊기고 마지막 방법으로 시체를 강물에 띄웁니다. 그러니 이 시신이 발견된 강 위쪽을 수색하여 주시오. 부디…. 박부인, 침중하게 듣고 있다. 황사장, 메모를 적은 지폐를 비닐 봉지에 담는다. 시신의 옷자락에 봉지를 동여 매는 황사장의 표정이 비장 하다. 황사장：이 사람 영락없이 인당수에 제물로 바쳐진 심청이가 되는 구만. 박부인：시체는 조각배처럼 떠오를 테니 우린 필시 구조될 거요. 콜록 콜록. 황사장：큰 괴긴 기픈 물에서 노는 벱이야. 친구야, 넌 기픈 물에서 살려고 간단 말야. 황사장, 용을 쓰며 우씨를 밀쳐낸 강물에 빠뜨린다. 첨벙. 박부인：새처럼 훨훨 날아가세요. 훠얼∼ 훨. 황사장：아야. 면목 없다. 부디 날 용서하거라이. 조종처럼 까욱거리는 까마귀 울음이 무대에 번져온다. 서서히 암전.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