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년 면접 보러 간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자손대대로 세습되는 신분 계층을 4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브라만, 크샤트리아,바이샤, 수드라. 그런 4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신분도 있다고 한다. 이른바 불가촉천민이다.

   대한민국에도 노동자 신분 계층을 4계급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정규직, 무기계약직,계약직, 기간제 근로자. 그런 4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신분도 있으니 바로 실업자다.

   정규직, 비정규직에도 끼지 못하고 몇 개월의 단기간만 일하는 기간제 근로자는 1년 미만의 기간,즉 수개월만 일하다가 계약종료일이 되면 실직자가 되는 신분이다. 무기계약직은 특별한 잘못을 하지 않는 한 매년 자동으로 근무연장이 되는 안정적인 신분이지만, 기간제는 계약서에 쓰여진 기간만 일하고 계약종료라는 사유로 실직자가 되어야 한다. 게다가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에 따라 업무태만,지시 불이행 등의 사유로 언제든지 계약기간 내에 짤릴 수도 있다. 그러니 해마다 새 직장을 찾아 면접 보러 가야 한다. 한 장소에 정착한 농경민족이 아니라 유목민 신세라고나 할까?

   나는 50대 중반에 대기업에서 정년 퇴직하였다. 쉽지 않았던 직장 근무 중 맺힌 한풀이 시간이 필요하였다. 직장 다닐 때도 점심식사후 매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회사 뒷산을 산행하였었는데, 은퇴 후에도 몇 달간 집 근처의 동네산을 매일 산행하며 맺힌 한을 풀었다. 어느 정도 한이 풀리자 생활비 문제 등의 경제적인 압박감이 엄습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간인가 아닌가 여부가 행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적어도 남자에게는. 정년퇴직후 본의 아니게 실업의 기간이 길어지니까, 사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이러다가는 멀쩡한 사람도 우울증에 걸리겠다는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러 직장에 이력서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면접 보러 오라고 연락이 오는 직장은 거의 없었다. 갑자기 취업시장 바닥에서는 노인 취급, 더 정확히 말하면 퇴물 취급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청년들도 취업하기 어려운 시대이니 나이든 정년퇴직자는 더더욱 취업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특별한 기술이 있으면 그나마 들어갈 자리가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지인의 회사라면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늙은 나이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무직 출신은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지 않으니 가장 취업하기 어려운 직종이다. 허송세월은 흐르는 강물처럼 빨리 흘러갔다. 20대는 시속 20 Km, 30대는 시속 30 Km, 60대는 시속 60 Km로 점점 세월이 빨리 흘러간다는데 정말 그랬다. 현역시절 회사일을 바쁘게 처리하다 보니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나 보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은퇴후 아무 일 없이 빈둥거려도 세월은 빨리 흘러갔다. 그런 걸 보면, 일과 관계없이 나이대에 맞추어 세월이 흘러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다.

   3년간 공항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관세사 사무소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자 노력하였는데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드디어 한 곳에서 연락이 왔고 면접을 하였다. "최종적으로 함께 일할 우리 직원들과 이야기해보고 다음 주 통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회사대표는 면접을 끝내었다. 회사 대표와 사무장이 마음에 들어 하고 면접 후에도 사무장과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나로서는 출퇴근시 영종대교를 건너가야 하므로 통행료 부담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더라도 월 30만원이 교통비로 나가리라 예상되었다. 직장의 위치는 업무가 공항과 관련이 많다보니 화물청사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직원들은 영종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왜 그 직장에서 영종도에 사는 사람을 선호하는지를 이해가 갔다. "아마도 사장님이 별도의 교통비도 일부 지원해주실 겁니다."라고 사무장은 넌즈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고마운 말씀이다. 당시 나는 신입직원 초봉인 150만원을 제시하였는데 교통비 빼고 나면 월급이 120만원이 되는 셈인데, 별도의 교통비를 10만원 정도라도 지원해준다면 고마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음날 성당에서 기도 중에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동안 실직기간이 길어져서 무의식 중에 심적 고통이 깊어졌고 곧 출근한다는 기대감에 벅차서 이제 그동안의 쌓였던 마음의 힘듬이 끝이 나는구나, 라는 생각에 눈물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치솟아 올라온 모양이다. 신입직원의 초심으로 새 직장에 출근하면 회사 사무실 바닥을 밀대걸레로 닦아주고 업무를 시작하리라. 퇴근 후에는 사회 선배로서 힘들어 회사를 그만두려는 젊은 직원에게는 술도 같이 하며 인생 상담도 해주리라. 회사 홈페이지가 없으면 만들어주리라. 회사 개선사항에 대해서도 도움 줄 부분이 발견되면 개선시키리라. 그렇게 열정을 갖고 새롭게 회사일을 시작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나는 출근할 수 없었다. 회사로부터 문자메세지가 날아온 것이다. 불합격이라는 전혀 예상 못한 내용이었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아무리 회사 대표와 실무자 대표가 마음에 들어 하여도, 상사로 모실 젊은 20대,30대 직원들 입장에서는 아버지 같은 나이의 아랫직원은 부담스러울 것이다. 면접하는 날 젊은 직원들을 대면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나는 나의 열정을, 나의 초심을 직원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들의 걱정을 없애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면접에서는 회사 대표와 고위 임직원만을 만날 뿐 실제 함께 현장을 뛸 실무자들은 만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직원들 입장에서는 새로 입사할 사람이 50대 중후반이라는 사실만을 듣고는 부담스러워 일을 시킬 수 없다고 반대했을 것이고, 팀워크를 감안하여 아마도 나와 동갑으로 보이는 회사대표는 어쩔 수 없이 불합격으로 결정하지 않았을까? 어느덧 1여년을 허송세월하였다. 관세 사무소 입사 실패는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원하는 직장은 늙은 나이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직면하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직장을 찾을 게 아니라 나를 원하는 직장을 찾는 걸로 방향을 급선회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먼저 퇴직한 동료에게 전화를 하고 점심 약속을 잡았다. 며칠 후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나보다 먼저 퇴직한 동료가 전기 기능사 학원을 다니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지금쯤 계획대로 전기일을 하며 다니는 지 궁금하였다.

   그는 산불방지원을 하고 있었다. 퇴직후 전기 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다고 들었는데, 전기일을 하는 게 아니라 산불방지원이라니? 당시 나는 직업훈련을 배우기로 마음 먹고 전기 혹은 CNC기계 둘 중 하나 배워볼까 고민 중이었는데 어느 쪽이던 6개월이상 소요되는 훈련이었기 때문에, 반년을 공부한 후 취직이 보장되느냐가 최대 관심사였다. 취직이 되지 않는다면 학원 다니는 6개월은 실직기간에 추가되는 것이고 그러면 전체 실직기간은 더 장기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나는 그렇게 되기를 결코 바라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퇴직한 동료는 나의 전철을 비슷하게 밟았었다. 관세사 사무소 문을 두들겼고 오라는 데는 전혀 없었고, 전기기능사 학원교육 수료후 젊은층은 일부 취직이 되지만 나이 많은 층은 우선순위에서 밀리니 취직된다는 보장이 없다고 했다. 나이 들면 아는 인맥으로 지인의 회사에 들어간다면 모를까 일반회사는 취업하기가 어려운 현실을 그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산불방지원 5~6개월, 주택조사원 몇 개월, 그런 식으로 힘 안드는 기간제근로자를 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나름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이 기간제 근로자였다. 60대가 주축이라는 것. 50대는 상대적으로 젊으니 경력이 없더라도 합격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일단 합격하여 약 1년 일하고 나면 경력자가 되니 다음해에도 합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 여러 시설관리공단에서 각각 필요한 기간제근로자들을 별도로 뽑으니 해마다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일할 수 있기에, 일명 메뚜기족으로 불린다는 것. 매년 1월은 시설관리공단이 몇 명 뽑을지 계획을 짜는 기간이고 2월은 1주일간 홈페이지에 채용 공고 내고 서류접수,면접,합격자 발표를 하는 기간이고 3월부터 일이 시작되어 정해진 몇 개월간 일을 하고 끝난다는 것. 그래서 2월에 뜨는 채용공고를 놓치면 그냥 1년이 지나가니 각 시설공단 홈페이지에 자주 들락거리며 유심히 잘 봐야 한다는 것. 그가 나에게 제공해준 값진 정보들이었다.

   덕분에 공원관리 혹은 조경이라고 불리는 직종에 취업하여 기간제 근로자 신분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육체노동을 난생 처음으로 해보았다. 어느덧 7년째 연속으로 공원관리인으로서 일하고 있다. 처음에는 갈퀴질 낫질도 서투르고 육체노동이 몸에 익숙하지 않아 몹시 힘들었지만 경력이 늘어날수록 견딜만 하였다. 육체노동을 견디는 내 자신이 대견하였다.

   예초기를 등에 짊어지고 무성한 잡초와 잔디를 자르면서 어깨가 축 쳐지고 몸이 지치지만 재미가 있었다. 웽웽 소리를 내지르는 엔진톱으로 고목을 베어 넘어뜨리며 희열도 느꼈다. 높은 나무의 굵은 죽은 가지를 고지톱으로 여러 번 톱질한 끝에 우지끈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흰불나방이 번지는 교목에 농약을 뿌려대는 방제 작업도 하였다. 호흡기에 좋지 않을 것이라 하기 싫은 작업이지만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호수에 가슴까지 올라오는 장화복을 입고 들어가서 녹조도 제거하였다. 낫으로 허리를 굽혀 수많은 갈대를 베어나갈 때는 허리가 아팠다. 정전기를 양손에 들고 관목을 전정작업 할 때는 양팔이 빠질 듯이 아팠다. 허리도 힘들었다. 비탈을 온통 뒤덮은 칡넝쿨들을 낫으로 밑둥을 베어가며 돌돌 말면서 비탈을 내려가면 칡덩어리는 넘어진 그리스 신전 기둥처럼 되었다. 그것들을 녹화끈이나 칡넝쿨 한 가닥으로 운반하기 좋게 묶었다가 힘들게 트럭에 실어 잔재하치장으로 버리기도 하였다. 온갖 종류의 장미들로 빽빽하게 심어진 장미밭에 들어가서 장미가시에 찔려가며 호미로 잡초를 제거하기도 하였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데, 손가락 마디에 가시가 찔리면 독성이 있는지 손가락 마디가 부어 한동안 굽히기가 불편하였다.장마철 대비하여 길다란 배수로의 퇴적물을 삽으로 퍼내어 외발수레에 실어 멀리 버리기를 반복하기도 하였다. 지나가던 시민이 덕분에 공원이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면 일하는 보람을 느꼈다.

   여러 공원에서 기간제 근로자로 조경일을 해보다보니 예초기를 사용할 줄만 알면 노후대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공원에서 일할 때였는데 노란 조끼를 입고 장비를 외발수레에 실고 동료와 작업현장으로 가고 있는데 인근 세차장 주인이 말을 걸어왔다. 세차장 건물 주위에 50평 화단이 있는데 잔디가 길게 자라서 예초를 해주면 1인당 10만원씩 주겠단다. 경험삼아 시세도 알 겸 해주기로 하였다. 돈을 아끼기 위해 1년에 1번만 예초하는 모양이어서 잔디는 길게 자라 있었다. 점심 식사 시간을 이용하여 몇 차례 예초작업을 하였고, 서비스로 철쭉과 회양목을 양날 전정기로 전정해주었다. 그리고 세차장 앞의 보도블럭 틈새에 볼썽사납게 올라와 있는 잡초들을 예초기로 때려 제거해주었다. 마지막으로 빗자루로 깨끗하게 청소해주었다. 그리고 내 핸드폰 전화번호가 인쇄되어 있는 명함을 주며 다음에도 예초를 맡겨주면 잘 해주겠다고 말하였다. 개인사업을 해본 적은 없지만, 이참에 그런 경험을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일을 해주면 고객을 감동시키고 계속 나의 고객으로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는 기회로 만들어 보고자 마음 먹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잔디밭의 예초 뿐이지만, 많지도 않은 관목을 전정기로 전정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고, 예초한 뒤 잔재를 치워주고 보도블럭의 잡초를 제거하고 깨끗하게 빗질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면 계속 내 고객으로 연락이 오게 만들 수 있겠다는 판단을 하였던 것이다. 예상대로 다음 해에도 세차장 주인으로부터 예초해달라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그 동네가 부자 동네여서 미국 가정처럼 앞 마당은 잔디밭인 집들이 많았다. 어떤 집주인은 점심값 줄 테니 앞 마당 예초해줄 수 있느냐,라는 요청하길래 경험삼아 예초해주었다.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이 동네 집집마다 앞 마당 잔디를 예초해주는 아르바이트도 영업 뛰면 생길 수 있겠다는 판단이 되었다. 그 동네에는 공원 근처에 우체국이 있었는데 이쁜 여자 우체국장이 예초기 소리를 듣고 작업현장에 나타나서 부탁을 한 적도 있었다. 우체국 주위의 작은 꽃밭에 잡초가 무성하니 예초해줄 수 있느냐,라고 묻길래 15분 정도 소요될 면적이어서 예초해주었다. 그랬더니 명절 선물로 준비한 선물 박스를 2개씩 우리 노동자 2명에게 안겼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근처에서 작업할 때는 우체국에서 커피를 얻어 마시곤 하였다. 어느 날 우체국장이 우리에게 어느 조경회사에서 일하느냐고 물어왔는데 아마도 기존 조경업체 대신에 우리에게 일 맡길려는 눈치였다. 우리는 조경업체 소속이 아니라 공원 소속의 기간제노동자이었으므로 우리는 조경회사 직원이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었다. 만약 내가 실직상태라면 그 우체국의 조경을 떠맡아 해주겠다는 영업을 해 볼 수 있었을 같고, 성실히 잘 해주면 우체국장이 다른 우체국에 나를 소개해줄 날도 올 것이고, 그렇게 계속 이어지다보면 노후대책도 될 수 있지 않을까?

   공원에서 기간제 근로자로 몇 년간 일하다보면, 예초기 사용에 능숙해지기 마련이고, 체력만 유지되면 늙어서도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