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고운용
점심 시간이 되서야 일손을 멈추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쉬고 있는데 편지 한 통이 전해졌다. 3년째 주말부부로 살고있는 아내가 수원에서 보낸 것이다. 왠지 색다른 감정이 들어 구석진 의자에 앉아 몇 번이고 읽었다.
회사 이전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살고 있긴 하지만 매일 전화통화로 안부를 물으며 서로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곤 했다. 그런데 생각지 못했던 아내의 편지를 받아보니 넘치는 그리움으로 울고 싶었던 기억이 부활해오며 어느새 사색의 강기슭을 기웃거린다. 새하얀 봉투에 마음에 둔 이름을 적어 우체통의 입에 꽃잎처럼 떨구고, 오늘은 오늘은… 조바심을 치다가 회답을 받아들 때 마음이 떨려 두손마져 경련을 일으켰던 느낌마저 들었다.
지지난주 토요일 일주일만에 집에 갔다. 일주일만에 보는 가족들이라 그런지 새삼 반가울 뿐이다. 그래서 주말이 되기 전에 가족들과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하는 계획을 짜곤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향해 출발을 하곤한다. 그러나 전날 아버님 생신 때문에 큰댁에 다녀온 아내와 사소한 일로 다투었다. 힘에 부치기도 하고 큰일 때마다 혼자라는 생각으로 소외감이 들었나보다. 결국 그날 하루를 같이 있지 못하고 저녁으로 직장이있는 청주로 내려왔다.
편지 내용 중에 "조금만 내가 이해하면 될 일이었는데 일주일만에 올라온 당신에게 속상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내마음은 정말 어머님 아버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괜히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앞으로 잘할께요. 여보! 요번 토요일 날엔 꼭 올라 오셔야돼요."
전화나 얼굴을 맞대고 화해의 분기를 만들기보다 마음의 글로서 화해를 하려 했던 모양이다. 만약 빠른 템포의 가락처럼 얼굴을 마주 보고 화해를 하려 했다면 은연 중 또다른 어떤 말 한마디의 실수로 인하여 더 큰 말다툼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작은 일에도 근심과 투정의 지난 시간들을 백지로 덮고 그 위에 하얀 마음으로 미안함을 전한 아내가 사랑스럽고 어느새 서운한 감정대신 그리움이 앞선다.
편지글이란 대화보다 자기 감정을 솔직히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잘못된 점이 있더라도 얼굴을 붉히지 않고 상대방의 심정을 몇 번이고 읽어보다 보면 이해하게 되고 용서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요즈음은 편리한 전화가 있어 편지 쓰는 일이 거의 없다. 더구나 휴대폰까지 생겨나고 보니 이렇게 편리한 전화가 할 수 없는 소중한 뜻을 담을 수 있다. 쓰는 동안 내마음의 편안함도 소득이지만 받는 사람을 감동시키는데 있어 전화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강하다. 편리한 전화를 두고 편지를 쓴다는 그 성의가 우선 큰 몫을 한다.
언제였던가. 편지라는 말이 하나의 기억으로 우리의 한구석을 지키기 시작한 때는…… 그렇다. 현대라는 것 문명이라는 것에 흡수당하면서 어느 장소에서라도 버튼만 누르면 쉽게 튀어나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젖어들었다. 즉석으로 들리는 현장감과 상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이 반갑기도 하다. 하지만 말과 말이 이어지며 자칫 말 한마디 실수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빌미도 되곤 한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사람의 혀는 뼈가 없어도 사람의 뼈를 부수더라고' 좋은 일보다는 다시 수습해야 할 말들이 더 많아지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과 마음이 흩어지는 어둠의 세계를 겉돌며 사회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청소년층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글쎄, 삭혀도 삭혀도 끝이 없는 것이 말이라고 하는데, 경제 사정으로 잔득 움츠려 있는 생활이 너무 길기 때문일까? 눈빛들만 음흉하게 번득이고 누구엔가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따뜻한 말이란 언어는 점점 들어 보기가 힘들어 지고 있으니. 문득 옛 친구로부터 보내진 하얀 편지봉투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싶다. 갑자기 내가 보고 싶어져 안부를 전한다는 가식 없는 표현이 담겨 있는 편지를 기다리고 싶어진다.
인생의 성숙함은 기다림이라 했다. 그래서 편지를 기다리듯 여유를 갖고 살다보면 감정도 누구러지게 되고 순간으로 발상되는 악한 마음들을 차분히 가라앉을 수 있게 되나보다. 그러나 받으려는 마음보다는 주려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 그럴 때 훈훈한 정이 남에게 줄 수 있는 샘으로 솟고 또 상대방의 마음속에 채워져 사랑과 용서의 미덕을 갖게 되리라. 편지는 표정이 아닌 마음을 알아 볼 수 있어 쉽게 감동을 주는가 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면서 부와 명예가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정작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것은 마음 씀씀이라 했을까. 진정 남을 위하고 남을 먼저 생각해 주는 따뜻한 배려, 다른 사람에게 한 순간 만이나마 마음이 담겨있는 손길을 주는 사람만이 새벽 한시쯤 되었을지라도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글자가 틀리거나 한 획이 삐뚤어질지라도 정성 들여 쓴 마음 한 잎으로 다른 사람에게 그늘이 되어줄 여유를 가져보자. 화려한 문체나 향기가 나는 편지지가 아니더라도 그대의 벽과 개인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될 것이라 본다.
창밖으로 오랜만에 단비가 내리고 있다. 내내 강철같이 굳어있던 내마음이 빗소리에 일렁거린다.
오늘밤은 왠기 향기롭기만 하던 아내와의 시절이 그리워지며 편지가 쓰고 싶어진다. 턱을 괴고 누워 내가 가장 소중해 하던 가슴속의 낚시대를 환상의 수면에 드리운다. 행복의 비늘이 빛을 발하는 사랑의 언어를 물어 올려 한바구니 가득한 편지를 써내려간다. 아내에게 살포시 안겨질 내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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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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