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의 해가 밝고 며칠 지나지 않아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서류가방을 챙기고 공항버스에 오를 때까지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는 겨우 한숨을 돌리며 신문을 펼쳐 보았습니다. 지면마다 온통 월드컵, 월드컵 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이런저런 방향으로 잘도 이야기를 엮어내며 성공스런 잔치를 만들자는 구호로 도배를 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래, 잘해보자는 걸 뭐랄수는 없지만 이렇게 구호만 외친다고 뭐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공허함이 느껴지는 것은 비단 그날 아침의 단상만은 아니었습니다.
잠깐 다녀오는 당일 치기의 제주도 출장길이라지만 그래도 무언가 느낌이 특별하고 가벼운 설레임까지 느껴지는 것은 나이가 들어도 언제나 변함없는 비행기 여행만의 매력이었습니다. 사실 비행기 여행은 다른 교통수단에 비해 요금이 비싼만큼 사소한 서비스 하나 하나가 승객에게 신비로움과 환상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비행기 탑승전의 금속탐지 검사부터 시작하여 게이트를 통과하여 기내에 들어설 때와 이륙시 피부로 느끼는 속도감과 귀에 와닿는 굉음은 물론이고 기내에서의 비상시 대처요령 안내 시범과 함께 스튜어디스의 빠르게 읽어대는 이런저런 우리말과 영어 안내방송까지 어느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경험이 늘고 눈과 귀에 익숙해지고나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점차 눈에 보이지 않던 불편함이 하나 둘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맨 앞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좌석이 비좁아서 특히나 창가에 앉은 승객들은 화장실 다녀오기가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고 시도때도없이 연신 틀어대는 실내방송으로 조용히 휴식을 청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미국의 테러 여파로 인해 비행기 탑승 수속이 까다롭고 번거로워지는 만큼 비행기 타기가 꺼려지고 또 그로인해 항공사들의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다는 즈음에 있어 항공사들이 말로만 부르짖는 서비스 개선의 대안은 과연 어떤 것일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여행을 감수해야하는 제한된 공간내에서 획일화된 항공사의 기내서비스는 과연 어떤 인식의 전환을 거쳐야만 고객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인가... 이날의 제주도 출장 여행에서 그 답을 한가지 찾았습니다. 무척 신선하고 간단하면서도 기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한 뒤 순항궤도에 진입하고 나서 시골 다방같은 부산함속에 음료수 서비스가 끝나고 나면 대개 근엄하고 낮은 베이스 음성의 기장이 안내방송을 합니다. 몇 번 듣다보면 거의 그 레파토리가 머리속에 외워질 만큼 틀에 박힌 안내방송은 대개 비행기의 고도와 속도, 항로상의 날씨나 비행소요시간 정도가 전부랍니다. 우리말과 영어순으로 이어지는 그 나레이션은 대개 매뉴얼을 보고 읽듯이 무미건조하고 서비스 감정이 거의 배어있지 않는 단순한 톤으로 오히려 안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경우도 있습니다. 그 날도 그러려니 하면서 기장의 방송을 건성으로 들었는데,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기장의 기내방송은 너무나 친근하고 다정다감하며 재미있는 방송이었기에 지금도 기억에 새록새록한 그 안내방송 내용을 기억에 남아있는 대로 한 번 옮겨보겠습니다.
“..... (기본 안내 방송을 마친 뒤) 에, 지금 항로상의 날씨가 고르지 못한 편입니다. 간혹 이상기류로 인해 기체가 흔들릴 수 있으니 숭객여러분께서는 안전벨트를 꼭 매어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비행기 오른쪽 멀리 검은 먹구름 떼를 봐 주십시오. 저 구름속에는 많은 양의 비가 들어있고 바람도 심하며 심지어는 낙뢰까지 동반하고 있어 항로진행에 주의해야 합니다. 다행히 요즘의 비행기는 첨단장비를 갖추고 있어 자체 레이다를 통해 주변 기상을 분석해가며 저런 먹구름을 피해갈 수 있지만, 혹시나 사소한 부주의로 인해 저런 먹구름 속에 들어서면 최악의 경우 추락까지도 각오해야 하는바 항상 긴장을 늦출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대구상공을 비행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궂은 관계로 두터운 구름이 밑에 깔려있어 대구시내를 내려다 보실 수는 없겠지만 기상이 좋을 때 이곳을 지나시면 분지에 들어앉은 대구시내 모습을 한 눈에 조망하실 수 있습니다.
이 비행기는 항공유(油)를 사용해서 비행하는데, 1드럼의 기름으로 4분 정도를 운항할 수 있습니다. 항공유는 일반 휘발유에 비해 휘발성이 매우 강하여 비행기 운항에 적합합니다. 김포를 출발할 때 이 비행기는 40드럼의 기름을 싣고 이륙했는데, 이는 도착지인 제주 공항 사정으로 착륙이 불가능하여 회항해야 하는 경우까지 고려한 조치입니다.
도착지 김포 공항에는 지금 가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비는 안개와 달리 비행기 이착륙에는 별 다른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승객여러분을 끝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략 이런 내용의 안내방송이었는데 어찌나 재미있고 명쾌한 설명이었던지 맛있는 과자를 다 먹어버린 아이의 아쉬움 가득한 입맛 다심처럼 기장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더 해 달라고 조르고 싶었습니다. 비록 이러한 친절한 설명을 영어로까지 덧붙여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때 승객들은 누구나 한 마음으로 이 기상천외의 색다른 서비스에 대해 흐뭇한 만족을 느꼈으리라 생각됩니다. 새삼 어린시절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볼때마다 느끼던 가슴이 터질듯한 동경을 이제는 아쉬움없이 현실로 누리면서도 막상 이런 세세한 일들에 귀를 기울이면서 가슴이 설레이는 내 자신이 참 신기했습니다. 최첨단 자동항법장치를 장착했다지만 그래도 이륙과 착륙은 조종사에게 있어 가장 어렵고 긴장되는 순간들이라는데 과연 그러한지, 비행기는 진정 자체 동력으로 후진을 못하는지 또 공항주변에서의 어처구니없는 스치기 사고는 왜 발생하는지 등등 그동안 무의식 속에 묻어 두었던 궁금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이런 서비스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고객응대의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고는 하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진정한 서비스란 이처럼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서 밝은 표정으로 연결되고 다시 기품있는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 반복적이고 물질적인 서비스의 제공이 주는 만족은 어차피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항공사에서 기내 음료 서비스를 강화하여 메뉴를 늘리고 사탕 몇 개 더 돌린들 이 비행기 기장의 ‘립 서비스’보다 더한 만족을 느끼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서비스의 품질은 고객이 먼저 느끼는 것이고 이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행여 안전운항에 최선을 다해야 할 비행기 기장이 이런 허튼 일에 신경을 쓰다가 정작 중요한 임무에 소홀하게 될 우려가 있다든지 또는 항공사 내부 규정상 어떤 제약조건이 있어 함부로 이런 고급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비행기가 정상궤도에 진입하여 거의 자동운항 시스템이 가동되는 상태에서 기장이 평소에 하는 ‘브리핑 서비스’의 내용을 좀 더 충실하고 성의있게 제공한다고 생각해 본다면, 짧은 비행시간동안 최대한 획기적인 서비스의 질적 전환을 이루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큰 기대를 가져 보았습니다.
이제 2002년을 새로이 한국방문의 해로 정하고 2002년 월드컵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에 있어 수많은 외국인이 찾아오게 될 우리나라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알맹이없이 부르짖는 서비스 정신, 바로 이런 작은 배려에서부터 출발하면 어떨까 하는 알뜰한 애국심이 마음에 메아리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신선한 친절과 손님을 맞는 정갈한 자세, 그 작은 준비와 배려가 바로 애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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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