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겨울 개똥벌레

이병조

  허공에 손을 휘저으면 푸른 물이 금방이라도 배어 날 것 같은 맑은 초겨울 오후였다.
  점심을 먹고 창가에서 유리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겨울 햇살을 스푼으로 조금씩 떠먹으며 오수(午睡)에 막 빠져드려는 데 전화벨이 울렸다. 달아나려는 졸음을 억지로 허리춤에 잡아채며 수화기를 들었다. 대뜸 반말이 수화기를 타고 건너왔다.
  "얌마… 나야, 나… 나 몰라?"
  "저기… 누구… 시… 아… 너, 이쨔샤 오랜만이다…"
  고등학교 동창녀석이었다. 자주는 아니어도 경조사 때면 얼굴을 대하는 몇 안 되는 고향 친구인데도 빨리 목소리를 못 알아 본 것이 내심 찔렸다. 간단한 안부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나와 둘도 없는 고등학교 단짝 친구 아버님의 부음소식을 전해왔다. 아홉 형제 중 여덟째로 유일하게 아직 장가를 못 가서 항상 부모님게 송구스럽다고 얘기하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땅거미들이 슬금슬금 도로 위에 내리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주말을 하루 앞두고 벌써부터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었다 차창 밖에 부딪치는 초겨울 바람은 제법 사나웠다. 동창녀석의 조그만 소형차는 전북 순창을 오늘 밤 내내 달려 내려가 내일 출근시간에 대어야 하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힘겨워 했다. 경기도를 벗어나면서 길은 더욱 갑갑했다. 묵묵히 핸들을 붙잡고 앞만 보고 달리는 동창녀석에게 내개 먼저 지나가는 소리로 한마디 던졌다.
  "야 너희 병원은 저번 의약분업 파업 끝나고 월급 좀 올랐냐?"
  "오르긴, 똑같지 뭐. 의사들은 모르겠다만 나 같은 임상병리실에 근무하는 일반 병원 직원들이야 예전과 달라진 것 없어. 근데 너희 회사는 민영화된다면서?"
  "어, 으응……"
  입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요즘 추세가 다 그렇잖아'라고 가볍게 얼버무리면 될 것을 굳이 그 때 신경전달 돌기세포에서 미처 소화되지 못한 채 배설 대기 중인 기억들을 불러 낼 필요가 있었을까? 얼마전, 사내 월례조회때 국내의 저명한 경제학 교수님 초청강연이 있었다. '부채가 많고 인력의 구조조정이 안 된 회사는 무한경쟁 시대에서 뒤질 수밖에 없으며 또한 도태되리라는 것은 강 건너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따라서, 강력한 공기업 구조조정을 통한 민영화가 선결되어야만 한국경제가 다시 살아 날 수 있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만… 하지만이 문제였다.
  차안에 잠시 흐르던 어색한 침묵은 동창녀석에 의해 깨졌다.
  "너 아직 결혼한지 1년도 안됐지? 애는 아작 없냐? 제수씨 뱃속이라도… 요즘 신혼재미는 어떠나, 깨가 쏟아지냐?"
  대전을 지나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렸다. 용변도 용변이지만 동창녀석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자꾸 운전 중에 명치끝을 누르기에 물었더니, 어제 저녁, 찹쌀떡을 먹고 체했었는데 오전에 조금 나아져서 점심을 먹었더니 다시 탈이 났다고 했다. 휴게소에는 약국이 없었다. 화장실만 갔다와서 출발을 서둘렀다. 둘 다 한 번도 다녀온 적이 없는 길인데다 내일 새벽길로 다시 돌아와서 출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 크게 부담이 되었다.
  동창녀석을 운전을 교대로 하자는 제의를 고사하며 고집스럽게 차를 몰아 밤 10쯤 정읍 톨게이트에 도착했다. 친구 집까지는 거기서도 내장산 쪽으로 30분은 더 들어가야 하는 산골이었다. 정읍시내 약국에서 약을 지어먹고도 동창녀석의 막힌 명치끝은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았다.
  지도와 교통표지판에 의지한 채 산을 넘고 꼬불꼬불한 재를 넘었지만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산 속에서 목적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가 알려 준 위치는 이미 10분전에 지나쳐 온 곳이었다. 달려 온 길을 거꾸로 내달려서 어렵사리 마을 초입 팽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근조등(謹弔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구밖에 차를 대고 차에서 내렸다. 텁텁한 두엄냄새가 알싸하게 코끝을 찔러오자 비로소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이 찾아왔다. 매연에 찌든 폐와 뱃속을 씻어 내기 위해 게걸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쌓인 마을은 시커먼 어둠 속에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윗동네 산 턱 밑에 자리잡고 있는 한 집에 대낮같이 환한 불빛이 보였다.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 지르자 온 동네 개들이 돌림노래로 짖어대기 시작했다.
  친구가 어떻게 알았는지 사립문 앞에까지 나와있었다. 생각보다 얼굴이 상하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손만 한 번씩 마주잡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호상(好喪)이었다. 고인(故人)께서는 돌아가시는 당일 김장배추까지 손수 나르시고 저녁도 잘 잡수신 후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했다. 문상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앞뜰에 불이 환하게 켜진 비닐하우스 두 동이 설치돼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엔 장작불이 불타고 있었다.
  시장하던 차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 한 그릇을 벌건 육개장 국물에 말아 뚝딱 해치웠다. 허겁지겁 빈 뱃속을 채우고 나서야 동창녀석의 밥이 줄지 않은 것이 보였다. 얼굴도 하얗게 핏기가 가셔 해쓱했다. 바늘과 실을 달래서 동창녀석의 양쪽 손 엄지손톱 위를 땄다. 거무죽죽한 빨간 액체가 피부 위에 송골송골 맺혔다. 화장지로 닦아낸 후 장작불에 던졌다. 장작더미 위에서 작고 붉은 꽃송이가 피었자 싶더니 이내 사그라지었다.
  어른 허리통만한 굵은 장작들이 얽히고 섥히어 그 중심 안에서 용광로처럼 뜨겁고 강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붉음을 지나쳐 이글거리듯 타오르는 기운은 세상의 온작 더러움과 추악함을 태워버리고도 남을 듯 했다. 지난 해 광양제철소의 압연공장에서 보았던 충격적인 광경이 생생히 재생되었다. 두터운 널빤지 모양의 시뻘건 쇳덩어리가 강한 압력으로 분출되는 물줄기에 맞아 하얀 포말같은 살점을 비산(飛散)당한 후, 육중한 로울러에 짓이겨져 얇고 강해져만 가던 그 기막힌 모습들이… 그리고 11. 30일 공공연대 공동행동의 날을 맞아 노조의 초청으로 경제학자 한분이 서셨던 같은 장소, 같은 연단에서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를 비웃 듯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재야(在野)의 정신적 지주이신 어른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가슴을 후벼왔다. 그것은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주문(呪文)과도 같았다.
  "겁먹지 마라, 겁먹지 마라. 동지여! 그대들이 서로 손을 잡고 마음을 합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세력도 그대들을, 그대들의 하나됨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조국을 사랑하라. 당신들의 조국은 지금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다.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면 후손들에게 떳떳하게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장작소시게들을 뒤집기 시작했다. 시커멓게 타 들어가던 장작들이 서로 뭄을 비비기 시작하자 수백, 수천개의 새빨간 개똥벌레들이 서서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겨울 개똥벌레가 조금씩 하늘위로 날아 올라간다. 좌우로 날갯짓을 파닥거리면서. 그들을 쫓아 부지런히 눈높이 옮기다 나도 모르게 단말마의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들의 궤적을 그리며 사라져가는 겨울하늘 위로 어느새 어느사이엔가 수억, 수조개의 우주 개똥벌레들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오리온, 카시오페아 그리고 북두칠성. 난 그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네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아주 오래 전, 나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상념에 사로잡히기 훨씬 이전에도.
  친구가 문상객이 뜸해진 틈을 내서 밖으로 나왔다. 엊그제 백일이 지난 갓난쟁이 조카를 품에 안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귀여워했다던 손자녀석은 할아버지가 저 하늘로 돌아가신 걸 아는지 모르는지 쌔근쌔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산골의 밤은 아기 숨소리와 함께 조용히 깊어만 갔다.
  서울로 올라오는 새벽 고속도로는 시원하게 트였다. 조수석에 기댄 동창녀석의 막혔던 뱃속도 확 뚫렸는지 세상 모르게 잠들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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