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
황태영
달력을 보니 1978년도 이제 몇 장 남지 않았군. 난 부산 전포동의 연립주택가에 거주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최팔도라는 사람이야. 뭐 그렇게 이름을 대어도 날 아는 작자는 아무도 없을 거로. 그저 그렇고 그런 보통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니까.
원래부터 죽 이 동네에 살아온 토박이는 아니야. 돌아가신 우리 부친의 고향은 이북 황해도 해주인데 그 놈의 전쟁통에 피난을 갈 수 밖에 없는 형편이 되어버린 거라. 왜 귓구녕이 있으면 다들 이런 노래 한두 번은 들어봤을 거로?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 홀로 왔다……
국군 1군단의 선봉부대가 두만강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중공군이 개입했는 거라. 그 바람에 국군이 후퇴를 거듭하다가 원산에서 육로 퇴각로가 완전히 막혀 고립되어 버렸거든.
그래서 나온 방안이 바로 흥남철수작전이야. 동부전선의 국군병력 10만여명이 흥남부두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해상으로 철수하게 되었던 것인데, 병력과 군장비를 싣고 나서 남은 공간에 피난민들을 태웠다 그 말씀야. 우리 부친도 그 때 가족을 데리고 수송선에 올랐다고 하더군.
수송선이 도착한 곳이 거제도 임시 피난민 수용소였다고 하데. 식량배급이 있었지만 워낙 양이 부족해 배를 곯았다더구먼. 그래서 배불리 먹고 살아보려고 육지로 나온 피난민들이 부산 영주동의 영성고개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하데. 지금 부산역 근처 산동네 말야.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두꺼운 골판지 박스에 방수가 되도록 기름을 발라 얼기설기 엮어 만든 골판지집 속에서 생활을 했는 거라. 그런 집들이 닥지닥지 붙어 정착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 말씀야.
그러다가 산동네에 큰불이 난 거야. 원래 산동네라는 것이 협소한 공간에 여러 세대가 간이집을 짓고 살다보니 물난리든 불난리든 다 함께 동시에 겪게 되거든. 물난리가 나면 동네 전체가 새벽에 다 같이 물을 퍼내는 짓꺼리를 똑같이 해야 하고, 불난리가 나면 다 같이 물을 물통에 담아와서 불에 끼얹는 짓을 똑같이 해야 한단 말이야.
골판지집들로 닥지닥지 붙어 있었으니 얼마나 활활 잘 타올랐겠어. 그 날의 화재로 순식간에 산동네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는 거야.
그 이재민들을 정착시킨 곳이 바로 부산 영도 청학동이었는 거라. 왜 "천막시장"이라고 불리는 데 있잖아? 그곳에 대형 천막들을 쳐서 여러 휘장으로 구분하여 그 속에 여러 세대를 살게 했거든. 밀가루, 세탁비누, 모포 등이 배급되었지. 밥 먹었는교, 식전이면 같이 먹읍시다, 하며 휘장너머 이웃 아저씨가 물어오던 기억이 나는구먼.
그러다가 그 지역의 땅을 나라에서 이재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말씀야. 당시에는 논이거나 밭이거나 버려진 공터였던 그 위에 흙집을 짓거나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거라. 땅을 팔고 다른 동네로 옮겨간 집들도 있고 그랬어.
동네 친구들과 함께 논에 개구리, 올챙이를 잡으러 다니던 기억이 나네. 맨발로 질퍽거리며 논바닥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찌그러진 세숫대야에 가득 담다가 논 주인에게 들켜 달아나던 기억도 나는구먼. 산 위에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메뚜기를 잡으러 아이들이 자주 갔었지. 아무리 대낮이라고 하지만 공동묘지에는 써늘한 기온이 감돌거든. 무덤 옆에서 낮잠 자던 거지가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깨어 불쑥 고개를 내미는 바람에 귀신인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불알이 요동소리가 나도록 달아나기도 했었지.
청학동 달동네에서 지겹도록 오래 살았어.
집 근처에 전봇대가 하나 있었는데 아침에 판잣집 밖으로 나와 보면 간혹 목을 매단 시체가 혀를 길게 빼문 채 대롱대롱거리고 있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더러 있었어. 그 전봇대에는 복날이면 똥개를 매달아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개 잡던 곳이기도 했는 거라. 죽은 모습을 보니 사람과 개가 별 차이가 없데.
그리고 판잣집들의 구조라는 게 워낙 공간이 협소하여 문 열고 들어가면 바로 부엌이고 방이었는 거라. 마당이 따로 없었다 그 말씀야. 그래서 한여름에 샤워를 하려면 밤이 깊어 인적이 드물어진 시간에 좁은 골목으로 나와서 씻었다니까. 그러다가 사람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 놀라서 후다닥 집으로 들어갔다가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면 다시 골목으로 나와서 씻는 짓을 반복했다 그 말씀야. 동네 아낙네들은 부엌이 넓은 이웃집을 빌려 남정네들이 일하러 나간 대낮에 샤워를 했지.
한겨울에도 집안이 비좁으니까 뜨거운 물을 담은 세숫대야를 들고 골목으로 나와서 후다닥 세수하거나 머리를 감고는 골목에다 구정물을 훽 쏟아버리고는 덜덜 온몸을 떨며 집안으로 들어가지. 간혹 지나가는 학생을 미처 못 본 탓에 학생이 봉변을 당하는 수도 있었지. 교복에 비눗물을 허옇게 뒤집어 쓴 학생이 잠시 난감해 하다가 등교시간이 바빠 손수건으로 대충 닦고는 종종걸음으로 비탈길을 내려가는 거야.
겨울이 되면 버린 세숫물로 온동네가 빙판이 되니까 연탄을 깨서 연탄재를 길바닥에 뿌리는 일이 많아지지. 연탄배달이 안되니까 구멍이 19개라서 19공탄 혹은 구공탄이라 불리던 연탄을 새끼줄에 꿰어서 집으로 온 식구가 들고 비탈을 오르기도 했었어.
공동수도 이야기를 해볼꺼나.
지금도 영도 청학동은 고지대라서 물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 집집마다 옥상에 노란색 물탱크가 있잖아. 당시에는 청학동 달동네 물 사정이 아주 어려웠고 집집마다 개인수도가 없었거든. 그리하야 다들 공동수도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는 거라.
봉래산의 꼭대기 근처에 "청학 농예원"이 있었거든. 봉래산이 행정상의 이름이지만 우리는 고갈산이라고 불렀어. 가난한 주민들이 울창하던 숲 속의 나무들을 다 베어내어 나무가 고갈되었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는 거라.
"청학 농예원"은 고아들이 직접 농사짓고 밭일하며 자급자족하는 고아원이야. 바로 아래에 큰 공동 물탱크가 있었다 그 말씀야. 당시 고갈산에 비가 오면 지하수가 그 물탱크에 채워지거든. 영도구청에서 소독약을 뿌리며 수질관리를 했었지.
공동 물탱크에 연결된 공동수도가 동네에 몇 군데 있었고 1주일에 한 두 차례 새벽에 제한급수를 했다 그 말씀야. 낮에는 다들 직장에 나가니까 식구들이 달동네로 다 들어와 있는 야밤에 급수한 거라. 미리 알려주지. 매일 급수하는 게 아니니까.
함석으로 만든 물동이들을 온 식구가 많이 들고 나와서 공동수도 앞에 길다란 줄을 이루며 놓는다구. 새치기하지 못하도록 물동이들을 새끼줄로 일일이 묶어둔다니까. 앞 사람 물동이와도 새끼줄을 연결해두니까 새치기하기 힘든 거라. 그리고는 집집마다 식구 한 사람 정도는 물동이를 지키고 있지. 간혹 비가 너무 와서 물탱크가 넘치는 경우, 예정 시간보다 빨리 급수가 되기 때문에 다들 훨씬 더 일찍 나와 물동이들로 줄을 선다니까.
물 받는 중에, 왜 내 물동이를 건드리느냐, 내가 언제 그랬느냐, 하며 싸우는 사람들도 많았어.
물이 채워지면 물지게가 있어서 물동이 두 개를 한꺼번에 나르는 좀 넉넉한 집도 있었지만, 보통은 아낙네들은 머리에 이고 나르고 아이들은 물동이 양측면의 철사로 된 두 귀에 나무 막대기를 끼워 함께 들고 운반했었어. 특히 한겨울에는 무거운 물동이를 들고 집까지 빙판으로 변한 가파른 비탈을 올라가다 보면 손이 다 얼어버리고 팔이 빠질 듯이 아프지.
산동네라서 물이 귀하다 보니까 우물 있는 집은 우물물을 돈 받고 팔아먹기도 했었어. 그것도 귀찮다고 안 팔려고 해서 부탁하며 사 먹기도 했는 거라.
게다가 함석 물동이가 삭아서 빵꾸가 나는 바람에 빵꾸 때우러 가야 했었는데 함석 빵꾸 때우던 추씨가 짭짤하게 돈 만졌을 거야.
그리고 동네 한쪽 넓은 공터에 공동변소가 있었지. 나중에 시멘트로 다시 지어졌지만 원래는 목재로 된 낡은 건물이었거든. 바닥도 나무판자였고 쭈그리고 똥 누는 재래식 변소였는 거라. 밑을 내려다 보면 똥물이 가득 차 있는 게 보이지. 공동변소 안에는 남자 4칸 여자 4칸으로 되어 있었는데 칸과 칸 사이는 베니어합판이었다 그 말씀야. 그래서 옆 칸에서 오줌 누는 소리, 똥 누는 소리, 방귀 뀌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어. 남자 칸과 여자 칸의 경계에는 베니어합판을 두 장 정도 더 붙였지. 어떤 놈팽이가 옆 칸을 훔쳐보려고 그랬는지 합판에 작은 구멍들이 나 있곤 했었어.
지붕 아래 처마 밑에는 악취가 나가도록 통풍을 위해 공간이 있었는데 비바람이 불면 빗물이 들어오거든. 그 때는 괜히 마음이 울적하고 처량해지면서 빨리 볼일 보고 나가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더구먼.
주민 수에 비해 변소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아침마다 공동변소 입구에는 극장 개봉관 매표소에 표 사는 줄처럼 길다랗게 줄이 이어진다 그 말씀야. 그런데 변소 들어가는 입구가 남녀가 같은 방향으로 되어 있은 거라. 아침마다 남녀가 두 줄로 평행선을 이루며 똥 마려워 몸을 비틀어대며 서 있어야 했는데 정말 어색하데. 내 경우는 말야 사춘기에 접어들자 그런 아침 시간이 정말 끔찍하도록 싫었어. 세월이 많이 흘러간 지금도 공동변소 꿈을 꾼 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고 일도 잘 안 되.
남의 골목에다 몰래 똥 오줌을 싸는 작자들이 있어서 똥 밟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이것이 다 변소가 부족한 탓인 거라. 볼일은 급하고 길다란 줄은 줄어들지 않고…… 에라 모르겠다 남의 골목에다 싸자, 그렇게 된 것 아니겠어?
간혹 공동변소 주변에 동네사람들이 웅성대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똥통 안에 죽은 태아가 탯줄이 붙은 채 버려져 있는 거야.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소름이 좍 끼친다니까.
저녁에는 변소 칸마다 30와트의 불그스럼한 전구가 일제히 켜져서 괴기한 분위기를 띄는 건물로 변하거든. 쥐는 왜 그렇게 많은지. 저녁에 무서워서 덜덜 떨면서 변을 보고 있노라면, 앞으로 뒤로 옆으로 심지어는 밑에서도 찍찍거리며 쥐들이 기어다니지를 않나. 한번은 들어가다가 어둠 속에서 쥐꼬리를 밟았는데 찍, 하고 쥐가 비명을 질러대고 튀어나가더니 아무래도 괘씸한지 똥 누고 있는 중에 쥐가 다시 들어와서 내 발가락을 깨물고는 달아나는 바람에 아파서 뒈질 뻔 했었어. 어디 것뿐인가. 밤중에 변소에서 바지를 내리는데 똥통 안에서 귀신이 튀어올라 오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잖아. 당시 밤에는 무서워서 누나랑 함께 공동변소에 갔었다 그 말씀야. 변소 바깥에서 지키고 있던 누나 말에 의하면 똥개가 빠졌다가 튀어올라 온 거라고 하데.
한번은 공동변소 뒤에 시커먼 쥐가 배가 터져 죽어 있었는데 똥파리가 그 속에 알을 깠나 봐. 쥐의 터진 내장 안에 빽빽하게 찬 수백 마리의 허연 구더기가 꿈틀거리고 있더라니까. 정말이지 공동변소 기억을 떠올리면 어떤 때는 몸서리가 쳐진다니까.
동네사람들 중에서 할 일 없는 이가 공동변소를 관리했는데 똥이 가득 차서 똥 퍼낼 때가 되면 집집마다 인원수를 감안하여 돈을 거두러 다니거든. 욕을 해대면서 못 주겠다 왜 못 주느냐 돈 못 주면서 똥은 왜 싸냐 내 똥구멍으로 똥 싸는 데 어느 잡놈이 지랄이냐 이 씨부럴 놈 찢어진 아가리라고 마음대로 씨부리는 것 보소, 하며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경우도 많았다 그 말씀야. 그러면 관리인은 똥이 산더미처럼 쌓이도록 똥 퍼낼 생각을 하지 않고 최씨와 오씨가 돈을 안 줘서 못 퍼낸다, 라고 동네사람들에게 씹어대지.
똥이 위험수위까지 차 오르면 똥 눌 때마다 똥물이 튀어올라 엉덩이를 흥건히 적시는 찝찝한 사태가 발생한다니까. 열 받은 동네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돈 안내고 버티는 집에 가서 싸우게 되는 거라. 결국 최씨와 오씨도 돈을 내도록 만든다 그 말씀야. 공동변소를 관리하며 푼돈을 걷다 보면 막걸리 값 정도는 떨어진 모양이더라구.
이 정도면 인간 최팔도 집안 내력과 성장과정에 대해 대충은 설명이 되었을라나. 이바구하다 보니 엿가락처럼 길어졌는데, 그 당시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 아나? 지긋지긋한 청학동 달동네를 벗어나는 게 나의 유일한 꿈이었다 그 말씀야. 이사 가는 집들을 볼 때마다 어찌나 부럽던지…… 정말이지 그 시절은 기억도 하기 싫다. 씨펄, 이제 그 때 이야기는 더 이상 안 할란다.
이제 행복했던 시절 이야기를 해 보더라고. 지금부터 하려는 이바구는 아마 10년은 좋이 됐을 껄. 주택난 해소정책으로 아파트가 한창 생기기 시작하고 변두리에 똑같은 색깔과 똑같은 구조의 집들이 조립하는 장난감집처럼 곳곳에 차곡차곡 지어질 때의 야긴데, 덕택에 그 당시 나같이 결혼하고도 5년이 넘도록 단칸방 전세살이를 못 면하던 작자도 얼렁뚱땅 주택융자금을 받아 50세대 정도가 사는 신흥 연립주택가에 집을 한 채 얻을 수 있은 거라.
거참, 자기 집이 있다는 게 좋기는 좋데. 전기세 때문에 주인집 양반과 아웅다웅 싸울 일이 있냐, 빨랫물 많이 쓴다고 싫은 소리를 귀 따갑도록 들을 일이 있냐, 똥 풀 때 분노수거료의 뿐빠이 땀시 다툴 일이 있냐, 허허허, 지상천국이 따로 없더라 그 말씀야. 나로서는 청학동 달동네를 드디어 벗어났다는 사실에 감회가 남달랐지. 밀물처럼 밀려오는 감동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니까.
마누라는 새집에 들어서자마자 저기는 다알리아를 심구요, 저기는 배추 몇 포기 심어 반찬거리나 해야겠어요, 하며 덤벙덤벙 몹시도 즐거운 모양이었어.
내 자식들은, 해봐야 둘 밖에 안되.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하는 캠페인이 당시 한창이었거든. 그런 정부시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했지.
암 나 같은 모범적인 시민도 드물 거로. 하기사 요사이는 요렇게 변했데. 딸 아들 구별말고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 글쎄, 그건 그렇고 우리 돌이와 순이도 아빠, 도둑놈 못 들어오게 세파트 키워요, 아냐 아냐 털이 보숭보숭한 스피츠 키워, 잉잉, 하며 아따 요란스러웠지 아마.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도 희미하구먼.
나는 나대로 오랜 숙원사업이던 내집마련이란 일평생의 대업을 달성했다 하여 애비로서 체면유지는 늦게나마 한 것 같아 흐뭇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있어서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이었다고나 할까.
건데 말야. 이 동네가 골목이 어찌나 많은지, 많은 걸로 끝나면 내사 말도 안하이. 도시계획을 한 도로들처럼 반듯반듯하니 똑같이 생겨먹었더라 그 말씀야. 게다가 말이 50세대지 똑같은 집 50채라면 적지 않은 수라구.
골목에 들어갔다가 이리저리 돌다 보면 원래의 자리로 도로 나오게 되던 일이 처음엔 한두 번이 아니었어. 아따, 환장하것데.
그래서 연립주택가로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우리집까지의 거치는 과정을 머리통 속에 수학적으로 집어넣었지.
입구의 좌측에서 하나, 둘, 셋, 넷. 그래 네 번째 집에서 몇 걸음 더 걸어가면 나오는 골목들 중에 우측 골목으로 돌아라. 그리고는 우측에서 세 번째 대문을 지나 다시 우측에 있는 골목으로, 아냐 또 헷갈리는구먼. 가만있자. 그렇지. 좌측으로 난 골목이야. 거듭하는 말이지만 10년 전의 일이라 애매해.
아, 어디까지 야기했더라.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하여튼 간에 좌넷우삼두리둘꺽사또도네-이런 식으로 아주 과학적으로 암기했지. 역시 머리는 쓰기 나름이야. 아이큐는 좋고 볼 일이더라구. 아, 그랬더니 진짜 쉽데.
물론 여러분들 가운데 이러는 작자도 있을 거야. 당신 이름이 뭐냐고. 아 나야 부산진구 전포동 44-103번지 8통 3반에 사는 명예반장 최팔도지. 아니, 그럼 최팔도란 글씨가 콱 박혀 있는 문패가 달린 대문을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어허, 이 사람들이 내 말 듣는 기야 안 듣는 기야. 대문도 지붕도 집안 내부구조도 똑같지만 워낙 많은 골목들도 엇비슷하게 생겨 먹어 돌다 보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나오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말 못들었어?
그러니 문패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 땀시 내가 수학을 이용한 거 아냐. 그래, 탁 까놓고 말해 나 수학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건지는 몰라. 소학교 밖에 안 다녔으니까. 그러나, 산수라고 하는 거보다야 수학이라고 말하는 게 더 알리바이라든가 알리트라든가 아 그래 엘리트지 아마, 그런 엘리트처럼 보이지 않것어. 그래도 명색이 명예반장인데.
어디 그런 골목이 있었을라고-하고 아직도 못 미더운 작자가 있다면 백문이불여일견! 대구에 한 번 가보더라고. 하도 골목이 복잡해놔서 정말이지 골 때린다구.
아마 그게 일부러 나라에서 그렇게 만들었다지. 왜 조선시대엔가 고려시대엔가 그 때려 죽일 놈의 왜놈들이 노략질을 많이 해댔었잖나베. 대구에 지금으로 치면 군사령부 정도 되는 게 있었다든가. 그래서 왜놈 첩자들이 군기밀을 염탐하러 침투해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했나봐. 일단 왜놈 첩자가 들어왔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관헌에서 둥둥둥 하고 북을 친데. 북소리와 동시에 알았다는 듯이 대구 외곽의 성문들이 모조리 굳게 닫히는 거야. 독 안에 든 쥐 아니것어.
대구의 골목이 하도 헷갈리게 설계되어 있어서 처음 침투한 왜놈 첩자들은 부리나케 도망가다 보면 원래의 자리로 도로 나오곤 하여 당황한다는구먼. 그러는 동안 관군들이 포위망을 점점 축소시켜 꽝 하고 때려 잡았데.
괜히 잔소리가 길어졌잖은가. 그러니 쓰잘데 없이 내 말에 툭툭 불거져 나오지 말고 팍 믿고 청취해 보라 이 말씀야.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어 야근을 하고 밤 늦게 돌아올 때였어. 항시 야근을 하면 동료들과 끽, 하거든. 그 날 저녁도 마찬가지로 쇠주를 몇 병 까고 흠씬 취해 비틀비틀거리며 신흥주택가에 당도했더라 그 말씀인데.
촉수 낮은 전봇대의 등불들이 띄엄띄엄 떨어져서 골목을 어슴프레 밝히고 있는 광경이 마치 반딧불처럼 어른거리는 것이 야 정말이지 골통이 빙글빙글 도는 게 도무지 공식이 생각나지 않더라 이거야. 좌넷우삼두리…… 하는 공식말야.
할 수 없더군. 무작정 육감으로 집을 찾는 수 밖에. 전봇대에다 맨이마를 들이박고 꽈당 뒤로 자빠지곤 했었지. 워낙 취했으니까. 술고래들은 그런 경험이 있을 거로. 사내가 술 못 먹는담 병신 아닌가.
골목을 헤매고 있는데 웬 술고래가 비틀비틀거리며 내 곁을 지나가다가 우뚝 멈추더니 초점이 안 잡히는 눈알로
"집이 어디우?"
하고 묻데.
시골 사람이 초행길에 서울 사는 김씨도 묻고 물어 찾는다는데 도시인인 내가 제 집도 못 찾아 이러고 있다는 건 낯 뜨거운 일 아니것어.
해서,
"……요 앞에."
하며 아무데나 가리켰지.
허공에 대고 가리켰는지도 모를 일이야. 내 몸 하나 주체할 수 없으리 만큼 술에 흠뻑 젖어 있었는 걸.
"……요, 앞, 에?"
하고 그는 내 말을 또박또박 구관조처럼 되씹더니 뒤뚱뛰뚱 가던 길을 가데. 나원참, 별 싱거운 놈 다 봤어. 나는 집찾기를 계속했지.
야, 난감하데. 초록은 동색이라던가. 정말 대문은 동색이더군. 전부 하늘색이니 어떤 게 우리 대문인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게다가 어찌된 동넨지 대문마다 외등이라곤 씨가 말랐데. 문패를 보려고 해도 문패마다 어둠을 잔뜩 처바르고 있으니 당최 글씨가 보여야지. 하기사 제 집 마련 못하다가 늙으막에 이런 변두리의 연립주택가에 들어온 작자들이고 보면 영세민들이어서 외등 하나 다는 것마저 힘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야.
하긴 우리집도 당시 외등이 없었더랬어. 그래도 골목마다 띄엄띄엄 전봇대에 외로이 걸려 있는 희미한 보안등이라도 있었기에 망정이지 없었다면 온통 암흑투성이의 골목을 통해 집 찾는 일도 불가능했을 거로.
한참 걷는데 이상해. 뒤에서 아까부터 인기척이 나는 것 같더라 그 말씀야. 홱 돌아보니 살찐 오리처럼 생긴 아까 그 양반이더라구. 뒤뚱거리며 내 뒤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온 거라.
"아니, 왜 남의 뒤를 밟우!"
나는 대뜸 고함을 빽 질렀지. 순간 그는 깜짝 놀라는 듯 했어.
"……아, 그냥, 그냥."
하며 살찐 오리가 뒷통수를 긁적거리데.
"아하, 형씨도 집을 찾는구랴!"
그가 멋쩍은 듯한 몸짓을 해 보이더니 고개를 몇 차례 끄덕이더군.
야 정말이지 반갑데. 무인도에 갇혀 있다가 우연히 같은 처지의 인간을 만난 기분이 그랬을까.
우리는 사이좋게 흔들흔들거리며 하던 일을 계속했어. 그는 집집마다 대문의 초인종을 눌러대더군. 띵똥띵똥. 누구세요? ……저 김동건씨 댁입니까? 아닙니다, 나원참. 아, 죄, 죄송합니다. 띵똥띵띵똥. 누구세요? ……저 김동건씨 집이지요? 이 집 아녜요. 죄, 죄송합니다, 밤늦게……
"이거 원 똑같이 생겨놔서 집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수다래."
살찐 오리가 머쓱해져 탤런트처럼 이북 사투리를 쓰데.
"예서 헤어지는 게 어떻겠수?"
띵똥띵똥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내가 불쑥 말했지. 난 당최 음악하고는 담 쌓은 사내거든. 살찐 오리가 대답도 않고 돌아서서 불안하게 걸어가더니 캬, 하고 전봇대에다 오바이트를 해대고는 "잘 찾아보슈."하고 다시 초인종을 눌러대기 시작하데. 띵똥띵띵똥.
그 날 결국 난 통행금지에 걸려 파출소 신세를 졌지. 마누라한테 다음날 혼줄이 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고.
에, 건데 말야. 술이란 걸 안 먹겠다고 안 먹겠다고 안 먹겠다고 마다 해도 술을 먹자고 먹자고 먹자고 동료들이 우겨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먹게 되는 게 우리네 실정이거든.
특히 야근을 하면 꼭 먹어야 되는 게 법처럼 되어 있었어. 그 당시 외국에서의 주문량이 많아져서 여느 때보다 공장가동을 더 열심히 해야 했었는데 그 바람에 연일 야근을 해야만 했단 말야. 퇴근 무렵만 되면 몸뚱아리는 파김치가 되었지. 하지만 야근수당도 짭짤하게 들어오고 해서 좋긴 좋았는데 꼭 술을 먹어야 하니 그러면 도무지 집찾기가 난감한 일이었다 그 말씀이야.
정말이지 목구녕으로 술술술 잘도 넘어가던 술이 이사온 후로는 끌끌끌 걸리면서 어렵게 내려가데. 신경이 쓰여 술맛도 예전처럼 느끼기가 어렵더라 이거야.
술을 피하자니 동료와 의리가 상하겠고 술과 친하자니 집 찾는 일이 어렵겠고, 해서 궁리한 끝에 좋은 생각이 버번쩍 떠오른 거야. 종이었어. 종. 왜 있잖아. 에밀레종, 봉덕사종, 범종, 쇠종, 방울종. 그런 종 말씀야.
종소리가 땡땡 나면 동네 입구로 나와라. 그리하면 퇴근한 당신의 낭군이 서 있을 것이다. 그런 남편을 아내여 집으로 모셔라-하는 게 아내와 나만의 은밀한 신호요 약속이었어. 난 혹시 낮에도 술이 취해 오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낮에라도 땡땡 하면 동일한 행동을 취하라고 완벽을 기하기 위해 덧붙였지.
아내는 여자라서 그런지 공간지각관념이 뛰어나서 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었어. 정말 마누라 하나는 잘 두었다구. 암, 그으럼. 그 날로 난 고물상에 가서 좀 낡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쓸만한 종을 하나 구했어.
그로부터 며칠 후, 토요일이라 모처럼 일찍 퇴근한 날 대낮이었어. 정신도 말짱하여 공식에 따라 집을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고. 허나, 과연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이 종소리를 듣고 시킨 대로 행동을 틀림없이 취할 수 있을 것인가 확인을 해보고 싶었어.
난 동네 입구에서 신나게 종을 딸랑딸랑거리며 아내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그 말씀야.
거참, 종소리 한번 기차게 맑데. 난 음악이란 음자만 나오면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에 몇 시간이고 처박혀 있을 정도로 음악하고는 관계가 먼 사람이지만 이 종소리 하나는 마음에 쏙 들더라구. 해서 마구재비로 흔들어댔어. 종 속에 달린 불알이 요동을 치더구먼.
아 그랬더니 말야, 온 동네방네 철제대문들이 하나씩 둘씩 삐이꺽 열리더니 여인네들이 쓰레기통들을 머리에 이고 나오기도 하고 양팔을 벌려 들고 나오기도 하더라구. 그러더니 동네 한복판으로 나와 이상한 듯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거야.
그 무리들 중에 내 아내도 있더라구. 아이구, 이게 웬 날벼락이냐. 나는 황급히 종을 엉덩이 뒤로 숨겼어.
"아니, 당신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청소차가 왔는 줄 알았는데……"
하며 아내가 내 손을 잡고 동네 여인네들과 쓰레기통을 지나 허겁지겁 집으로 데리고 가데.
모인 여인네들 속에서 웅성웅성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군. 야 정말 미안하데. 낯짝이 불에 댄 것처럼 화끈화끈거리더라니까. 그게 청소차 종인 줄은 몰랐어. 정말야. 지금은 청소차가 오면서 내가 왔으니 쓰레기통을 들고 모두모두 모여라, 하는 표시로 종과 함께 띵똥띵똥띠띠똥또똥 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의 특정음악도 퍼뜨리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그런 게 있었나. 직원 중 한 사람이 차에서 내려 쇠종을 딸랑딸랑 하면서 온 골목을 휘젓고 다니는 게 고작이었지. 건데 내가 고물상에서 구한 게 바로 그것과 똑같은 종이었나 보이.
그길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종을 다른 걸로 째까닥 바꾸었지. 종마다 종류가 다양해서 음질도 다양하거든. 물론 엇비슷하기는 해. 그러나 청소차의 쇠종과 다른 종과는 소리에서 벌써 판이하게 차이가 난다구. 의심나는 작자는 한번 실험해 보더라고.
그렇게 종을 바꾸었더니 다시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데. 딸랑딸랑 하면 아내는 아내대로 잘 훈련된 애완용 동물처럼 꼬박꼬박 나를 데리러 나와주었고.
내 마누라 같은 여자도 드물 거로. 처 자랑은 팔불출이라는데 자랑할 것은 해야지. 그럼, 그으럼.
김장 김치 잘 담그지.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도 한 달 동안 거뜬히 버티지. 나 말야 그 여자와 이 나이 되도록 함께 살아오면서 바가지 한번 안 써 봤어. 사실 당신네들한테만 하는 야긴데, 나 같은 놈에겐 과분한 여자라구 어허허허.
종소리. 그래 그 종소리 덕분에 아무리 술이 취해도 난 안락한 우리집에 잘 들어갈 수 있었어. 정말 편리하더구먼.
그런데 말야.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어. 어느새 아내와 나의 신호가 타인들에게 발각이 되어버린 거야.
밤이 되면 살찐 오리도 종을 갖구 딸랑딸랑거리지 않나 앞집 장씨도 밤늦게 술에 만취되어 오면 종을 딸랑딸랑 흔들어대지 않나 온동네 바깥양반들이 다 종을 들고 설치더라 그 말씀야.
그러니 내가 종을 흔들면 온 동네 여인들이 다 대문을 열고 나와서 아내들에게 미안한 것은 고사하고라도, 막 잠이 들려고 하면 여기서 딸랑딸랑 하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깨고 다시 겨우 잠을 청하면 저기서 딸랑딸랑거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후- 정말 미치것데.
그래서, 아내와 나는 꼭 이사하기로 결정했었지. 암, 반드시 이사하고 말거야. 건데 그게 수월찮더라구.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동네에 살고 있는 걸.
불경기 탓으로 재작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어. 그 이후로 고물장수도 해보고, 새벽 청과물 시장에서 과일들을 사다가 리어카에 싣고 동네 시장통에서 팔아도 보았지. 요즘은 노가다를 하며 힘들게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는데 주택융자금 이자 갚기도 너무 벅찬 거라. 3개월 연체될 때마다 시뻘건 글씨로 날아오는 독촉장을 보면 심장이 놀라서 벌렁벌렁거린다니까.
……혹시 당신들 중에 우리집 살 사람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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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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