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의 꿈 아전의 꿈                                                      황태영           1.           아전 정원태 (鄭元泰)는 소말동 (蘇末童)의 농가에 들어서서 나직히     그를 불렀다. 깊은 밤이어서 자신의 목소리가 실제보다 더욱 크게 울려     나왔다. 화들짝 놀라며 더욱 소리를 죽였다.      “말동이...... 말동이...... 자네 잠들었는가 ? 나 정원탤세.”      정원태는 문지방에 바짝 붙어 방안의 상황을 살피려는 듯 귀를 기울였다.     동시에 그의 두 눈은 연신 바깥을 조심스레 두리번거렸다. 모두 잠의 깊은     수렁에 빠졌을 축시 (丑時,밤 1-3 시)이기는 하지만 그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주위에 아무런 인기척도 없음이 확인되자 그제서야 방안의     소리가 방문에 붙은 귀를 통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 아아...... 우...... 헉헉......      금방이라도 숨통이 멎어버릴 듯이 내뱉는 두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조금 전까지의 불안도 잊고 갑자기 자신의 아랫도리가 뻐근해     짐을 느끼며 정원태는 저들의 방사 (房事)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헛간으로 몸을 숨겼다.      텅 비어 있는 헛간. 폐농가도 아닌 농사꾼이 살고 있는 헛간이 이토록     썰렁해서야...... 정원태는 항아리 뚜껑을 열어본다. 그 안에 팔을 넣어     휘저어본다. 쌀은 커녕 곡식이 있었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가지고온 보릿자루를 그 속에 부으려다가 그냥 항아리 옆에 내려놓았다.     조세를 바치라고 아전과 포졸들이 나와서 집안 구석구석을 뒤질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바로 쌀독 아닌가. 이 보릿자루를 잘 숨겨둬라고     말해줘야겠군. 굶주린 배로 무슨 힘이 남아서 방구들이 내려앉을     정도로 방사를 하누, 거참. 윗배를 못 채워주면 아랫배라도     채워줘야지요, 하던 소말동의 우스개 소리가 갑자기 떠올라 정원태는     어두운 헛간 안에서 허탈하게 웃는다.           도대체 이 망할 놈의 가뭄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헛간을 나오기     전에 다시 조심스럽게 바깥을 훑어보았다. 쥐 죽은 듯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는 야밤에 그토록 흔해빠졌던 개 짖는 소리도     사라졌구나. 몇 년째 계속된 흉년에다 가뭄까지 겹쳤고 역병까지     돌고 있는 판국에 온갖 조세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어대니,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소나무 껍질마저 먹어야 할 지경이거늘 어찌     개고기인들 한 점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희한한 조세도 많도다.     죽은 사람 몫까지 군포 (軍布)를 징수하는 백골징포 (白骨徵布),     갓난아기에게까지 군포를 거두어들이는 황구첨정 (黃口簽丁),     세금 착취에 못견뎌 고향을 떠나 유민 (流民)이 된 빈 농가가     많아지자 남아있는 친척에게 조세를 대신 받아내는 족징(族徵)까지     생겼으니.           어느덧 방안은 조용해져 있었다. 정원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불렀다.      “말동이, 게 있는가 ? 나 정원탤세.”      방문을 열며 소말동이 벌건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구, 나리 오셨구만요. 속히 들어오시지요. 남의 이목 (耳目)이     두렵습니다요.”      정원태가 들어서자 소말동의 아내가 급히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부석부석하고 주근깨가 많았다. 잔주름도 많이 생겨 나이     보다 십년은 더 늙어보였다. 그녀는 두 사람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듯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믐에 토포군 (討捕軍)이 산채를 덮칠 것이라 하더이. 가급적 관군     과는 접전을 피하라고 하게. 한양에서 더 큰 관군을 불러들일까 두렵네     그려. 최 두령에게 이 말을 전해주게. 몸조심하게. 이제 세상이 바뀌면     자네도 삼정승 (三政丞)이 부럽지 않을 걸세. 식솔에게까지도 우리 일이     알려져서는 아니 되네. 수천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두 사람의 눈이 번득였다. 목숨을 건 자들 특유의 굳은 결의가 눈빛에     강렬하게 어려 있었다.           2.           누르세 누르세 용왕님을 누르세      아랫말 우물 웃말 우물 동구밖 우물      이즈러진 머리 비단결로 감는 우물           기보 (畿輔, 경기) 여주 지방에 들린 아전 정원태와 중 여환 (呂還),     풍수 (風水) 황회는 마을 공동 우물 앞에서 한바탕 펼쳐지고 있는     대동 물고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세로다. 말세로다. 감결 (鑑訣, 정감록비결)에서 예언하기를,     말세가 닥치면 큰 흉년이 들며 호환 (虎患)에 상인 (傷人)하고 생선과     소금이 흔해지며, 천갈산붕 (川渴山崩, 냇물이 마르고 산이 무너짐)하면     호마장추 (胡馬長?, 오랑캐의 말이 길게 울어댐)한다고 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      여환이 탄식하듯이 말했다.      “스님, 지금은 승려가 부처를 공경하지 않고, 속인 (俗人)이 부처를     공경하고 있오. 바야흐로 미륵님이 하생 (下生)하실 때가     다가왔오이다.”      황회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나는 이제 갈 길이 바빠 떠나야 하니 스님, 수고해주오.”      정원태가 합장 (合掌)하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부디 몸조심하고 살펴가시오. 부처님의 보살핌이 있으리다.”      여환도 합장하며 예 (禮)를 드렸다.      정원태는 빠른 걸음으로 군중들 속으로 사라졌다.      여환은 구경하고 있는 늙은이에게 물었다.      “저 무당의 이름이 뭡니까 ?”      “원향 (元香)이지요. 본시 해서 (海西, 황해도) 은율 양가 (良家)의     딸이었다는데 용신 (龍神)이 내려 무당이 되었답니다. 용을 부르는     신통력이 있기로 예까지 뫼시고 온 거라우.”      “용을 부른다...... 용을 불러내어 물이 용솟음치게 한다......     용녀부인 (龍女婦人)을 예서 만나게 되었구나.”      여환은 독백하듯이 중얼거렸다.      여환과 함께 계속 강원도, 황해도, 경기도를 동행하고 있는 경기도     영평 (永平) 출신의 지사 (地師) 황회 (黃繪)가 물었다.      “용녀부인이라니요 ?”      “이 세상은 장구 (長久)할 수 없나니, 앞으로는 용이 아들을 낳아서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용은 미르요 곧 미륵이거늘 용의 아들을 품을     자가 곧 용녀부인이 아니더냐 ?”           뚫으세 뚫으세 펑펑 뚫으세      수정같이 맑은 우물 펑펑 뚫으세           원향이 주관하는 기우굿은 특이한 면이 있었다. 보통은 종이에 용을     그려서 빌고는 마지막 단계에 화룡 (畵龍)을 태우는 법인데, 원향은     흙으로 만든 작은 용, 즉 토룡 (土龍)을 사용하고 있었다.           기우제가 끝나자 풍수 (風手) 황회가 기다렸다는 듯이 군중 앞에 나섰다.      “여주는 거북이 형상이어서 홍수가 나지 않으면 가뭄이 나기 십상     이요. 토양은 메말라 흡사 거북등과 같아 용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비옥해질 수 없거늘 어찌 앉아서 비를 기다릴 것인가 ? 어찌 앉아서     용을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 석가가 다하고 미륵이 나오며 세상 또한     다른 세상이 된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는가 ? 여기 천불산 선인 (千佛山     仙人)의 말씀을 좇으면 미륵 부처님의 세상에서 배불리 먹으며 무병장수     할 것이외다.”      여환은 애정어린 눈길로 모인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일찌기 김화 (金化) 천불산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에 칠성 (七星)이     강림하여 누룩 세 덩이를 주셨는데, 누룩 국 (麴)과 나라 국 (國)은     음 (音)이 서로 같다. 백성은 궁핍 속에서 허덕이는데 당쟁만을 일삼고     자기네들 뱃속만 기름진 음식으로 채우는 간신배들로 가득찬 조정이     첫째 누룩이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국토를 유린했던 오랑캐     왜 (倭)와 청 (淸)이 둘째 셋째 누룩이라. 이제 세상이 기울어질 것이다.     조선만 그러는 것이 아니요 열두 나라가 차례로 미륵님 발 앞에     함락될 것이다. 이때 군사를 일으켜 도성에 입성할 것이니 비록     성인 (聖人)이 있더라도 반드시 장검 (長劍)과 관대 (冠帶)가 있어야     하니, 제자 (弟子)가 되는 자는 마땅히 이런 물품을 준비하여     서로 전파하여야 한다. 풍우가 고르지 못하여 농사가 되지 않아     백성들이 모두 굶어 죽게 될 때, 미륵존불 (彌勒尊佛)이 북쪽에서     나와 손바닥만한 큰 눈을 해가지고 금수찬란한 옷을 입고     손에는 큰 징을 쥐고 남북을 여러 차례 오르내릴 것이다.”      웅성대는 무리 속을 바라보다가 여환은 무당 원향의 뜨거운 눈과     마주쳤다. 여환의 가슴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이제 여주 서쪽에     있는 광주 (廣洲)로 넘어가야 한다.           석성산의 한 가지가 한강 남쪽으로 뻗쳐진 산꼭대기에 광주 고을이 있다.     성의 안쪽은 낮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해서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이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곳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한 것은     성이 함락되어서가 아니라 양곡이 떨어지고 이미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전란 후 외적의 침략을 막아낼     중요한 요새로 인식되어 성 안에 아홉 개의 절을 세워서 중들을     살게 하고 이들을 총지휘할 중을 승병대장으로 삼았다. 나라 안에     넘쳐 흐르는 승려들을 이용하여 성을 지키려는 조정의 의도였다.     해마다 활쏘기 대회를 열어서 우수한 궁사에게는 후한 상을     내렸으므로 대부분의 중들이 수행보다는 활쏘기와 활, 화살의     손질에 더 정성을 쏟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전 정원태는 광주 승병 (僧兵)의 군사력을 미륵군(軍)으로 돌릴 수     있다면 거사시에 그 군사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한양으로 순식간에     당도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앙군과의 충돌에서 세가 불리하여     미륵군이 퇴각할 수 밖에 없게 되면 천연의 요새인 광주에 들어가서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다며 반드시 광주에 들러 미륵신앙을     전파해달라고 여환에게 신신당부했었다. 여환은 광주로 넘어가기     전에 아무래도 원향과 인연을 맺지 않고서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여보게, 황 풍수(風水). 장터 입구의 주막에 방을 얻어놓을 테니     광주는 내일 새벽녘에 떠나기로 함세. 자네는 원향의 거처를     알아두었다가 술시 (戌時,저녁 7-9시)에 강 기슭에 있는     흑암 (黑岩) 바위에서 내가 뵙고자 한다고 전해주게나. 은밀히     해야 하네.”      여환은 황회에게 속삭이고는 사람의 왕래가 많은 저잣거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환은 바위 위에 결가부좌 (結跏趺坐)를 틀고 앉아 눈을 감은 채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강을 향해 중얼중얼 미륵하생경 (彌勒下生經)을     입 안에 굴리고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이따금 수풀 속에서 들려오는 꾸룩꾸룩거리는 산새 소리, 스쳐가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서걱서걱거리는 소리, 강물 위로 잠을 설친     물고기가 힘차게 솟아올랐다가는 이내 떨어져 첨벙거리는 소리,     그런 소리들과 섞여 여환의 불경 외는 모습은 묘한 신비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리따운 원향은 군데군데 껍질이 죽죽 벗겨져 있는 소나무 뒤에 서서     황홀한 얼굴로 그 소리를 음미하고 있었다.      갑자기 불경소리가 멎었다. 여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리 오시게. 진작부터 자네가 거기 있음을 나 알고 있었다네.”      여환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촉촉히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원향이 바위에 다가오자 그는 그제서야 돌아 앉으며 평평한 바위 위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원향은 바위 위에 앉더니 여환의 두 눈을 빨아들일 듯이 쳐다보았다.     미륵신앙을 퍼트리고 있는 천불산 선인(千佛山 仙人)에 대해 원향은     황해도에서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수중노인 (水中老人)과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부처님을 받들면 나라를     전하겠다는 계시를 자신에게 한 후 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2년간     전국을 돌고 있다는 괴상한 이야기, 관 뚜껑을 세 차례 두드리며     나무아미타불을 반복하자 죽은 이가 살아났다는 이야기, 여환이     오줌이나 똥을 눌 때는 땅이 저절로 열렸다가 감쪽같이 닫혀 흔적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그 자리가 메마르지 않는다는 이야기, 동해바다의     울릉도라는 섬에는 해산물이 풍부하다는 이야기, 황해도 장산곶에     있는 금사사는 바닷가 넓은 모래벌판에 세워져 있는데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래 속을 뒤적이면 해삼이 나오는데 해마다 4,5월이     되면 청나라 산동성에서도 배를 타고 몰래 와서 캐어 갈 정도로     유명하니 굶주린 자들은 그 쪽으로 이주해서 배불리 먹으라고     외친다는 이야기 등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억불정책을 취하여 유생들에 의해 불상의      파괴가 공공연히 행해져서 머리통 없는 돌부처가 도처에 볼썽사납게      서 있거나 자빠져 있었는데 미륵신앙이 무지렁이같은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울퉁불퉁한 둥근 돌을 돌부처의 머리 삼아 올려놓고      미륵불로 여기며 ‘당래하생 미륵존불 (當來下生 彌勒尊佛, 마땅히     이 땅에 와야 할 미륵부처님)’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모습도     황해도에서는 이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말로만 전해 듣던 살아있는      미륵불을 바로 눈 앞에서 보다니. 원향은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스님, 무슨 불경인지 쇤네 모르오나 그 소리가 듣기 좋구만요.”      “미륵하생경일세. 용화세계 (龍華世界) 대목이지. 논에 모를 심지     않아도 저절로 쌀이 생겨나고 껍질이 없고 향기로와 먹으면 병들어 고생      하는 일이 없는 세상. 금 은 호박이 길바닥에 흩어져 있어도 아무도 주워      가지 않는 세상……”           미륵경은 ‘미륵삼부경 (彌勒三部經)’이라고도 불리우는데 곧 ‘미륵대성     불경 (彌勒大成佛經)’, ‘미륵하생경 (彌勒下生經)’, ‘미륵상생경 (彌勒     上生經)’이 바로 그것이다. 현세는 고달프지만 참고 견뎌서 어질게     살다가 죽어서는 미륵님이 사시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상생신앙’의 근거가 되는 것이 미륵상생경이며, 고달픈 이 현세를     개혁하여 살아 생전에 이 세상을 미륵의 세상으로 만들겠다는     ‘하생신앙’의 근거가 되는 경전이 바로 여환이 읖조린 미륵하생경이다.           달빛이 어린 원향의 얼굴은 매혹적이었다. 무복 (巫服)을 입고 기우굿을     지낼 때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여염집 아낙네 차림으로 갈아 입은 원향의     몸매는 뭇사내가 탐낼 만한 곡선이 잘 드러나 있었다. 여환은 숨이 가빠져     옴을 느꼈다.      원향의 몸이 시나브로 여환의 가슴에 쏟아져 내렸다.      “용화세계가 이 넓은 가슴팍에 있사옵니까 ?”      “용과 용녀가 만났으니 비구름을 뿌려야 하지 않겠는가 ? 이 바위에서     두 용이 엉켜서 미륵의 나라를 다스릴 아들을 낳았다는 전설이 이 밤으로     말미암아 생기리라. 원향, 부디 용을 낳아주오.”      여환은 원향을 꼬옥 껴안고 접문 (接吻, 입맞춤)하더니 저고리 끈을     풀고 젖가슴으로 입술을 옮겨갔다. 원향의 입이 벌어지면서 단내가 났다.     어느새 여환의 한 손은 치마끈을 풀고 있었다. 원향이 알몸이 되자 여환은     달빛에 은은하게 반사되는 여체를 황홀하게 잠시 바라보다가 승복을 훌훌     벗어던지더니 두 마리의 용이 되어 한동안 뒤엉켰다.           두 남녀가 운우 (雲雨)를 즐기고 있을 때 주막의 방 한 칸에 봇짐을 푼     풍수(風水) 황회는 같은 주막에서 하룻밤 묵는 나그네들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미륵신앙을 전파하고 있었다.      온갖 고을 출신이 다 들리는 주막이야 말로 미륵신앙을 퍼트릴 가장     좋은 장소였다. 함께 술을 마시다 보면 경계의 눈빛이 어느새 사라지고,     낯선 객지에서 맞이하는 지루한 기나긴 밤을 이야기를 나누며 재미있게     보내게 되어 잘 됐다고 반기기 마련이어서 술술 일이 잘 풀려가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날이 밝으면 길손들은 여러 고을로 흩어져서     자연스럽게 입에서 귀로 다시 입에서 귀로 은밀히 이웃에 옮길 것이다.      낮에는 주막에 들리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질병을 치료해주면서     자연스럽게 미륵에 대해 알려주었다. 전국 각지를 돌면서 민간요법을     주워 들은 게 많았고 이 산 저 산에서 뜯어 말린 약초들이 자신의 봇짐     속에 가득하여 필요할 때마다 꺼집어내어 사용하였다. 웬만한 병에는     신통하게도 효험이 있어서 명의 (名醫)라고 소문이 곧 나서 귀찮을     정도로 병자들이 들락날락하기 마련이었다.           평소에 황회를 눈여겨 본 정원태가 황회의 궁핍한 살림에 오랫동안     수시로 도움을 주다가 서로 믿을 수 있는 사이가 되자 어느날 여환을 따라     다니며 도와주라고 간절히 부탁하길래 흔쾌히 승낙하고 여환을 도운 지     어느덧 한 해가 지났다.      지금도 정원태의 도움을 받던 시절을 생각하면 황회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전과 포졸놈들이 들이닥쳐 조세를 내라고 소리치더니     마구잡이로 텅 빈 쌀독을 뒤져보고 베틀에서는 베를 끊어가고 그래도     모자라자 황회를 묶더니 관아로 끌고가서 원님 앞에 대령했었다.     소상하게 사정을 밝히면 원님은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원님은 더한     놈이더라. 큰칼을 목에 씌우고 골병들도록 곤장을 쳐라고 명하더니     혼절하자 물을 끼얹어 정신이 들게 하고 나흘의 말미를 줄 터이니     그 때까지도 조세를 내지 못하면 칠성판에 누워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며 관아 밖으로 내동댕이쳤었다. 그날 저녁 칠순 노모와     황회는 서로 끌어안고 꺼어꺼이 울면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사흘째 되던 날 정원태가 엽전뭉치를 건네주면서 이걸로 조세를 내게나,     라고 말했을 때 이런 고마운 아전도 있구나, 하며 감격했었다.           3.           경기도 양주 무당 정계화 (鄭戒化)의 집에 머물면서 여환은 ‘천불산     미륵경 (千佛山 彌勒經)’을 손수 집필하고 있었다. 후고구려를 세웠던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이라고 칭하면서 불경을 20여권 지었듯이 여환은     자신의 미륵신앙을 불경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고 싶어졌다. 거사를     일으켰다가 혹시 일이 잘못 되어 어이없게 죽게 되더라도 이     ‘천불산 미륵경’이 새로운 미륵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한 톨의 볍씨가     될 수만 있다면 결코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리란 믿음으로 그는 불경     쓰는 일에 매달렸다.           닷새 전에 정원태가 밤중에 은밀히 들렀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어찌 나라를 구할 수 있겠오 ?”      “방법이 있을 것이요. 기다리면 부처님께서 방법을 알려주실 것이요.”      “때가 왔오이다. 난 십년을 준비했오이다. 이 기회를 놓쳐버리면 수     십년을 더 기다려야 할 지 모르오. 대의를 위해서라면 작은 목숨쯤은     얼마든지 잃을 수 있오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미물 (微物)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성품이     있다고 했오. 생명에 대소경중 (大小輕重)의 구분이 어디 있으리요. 온     천하를 얻는다 하더라도 중생의 소중한 목숨 하나라도 헛되이 잃게     된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으리.”      “헛되다니요 ! 한 중생을 잃고 백 중생을 살리고자 하거늘 어찌 그리     말하시요 ! 온 백성들이 미륵님의 결단만을 기다리며 죽지 못해 살고     있오이다. 왜 이리 우유부단하시요 ? 저 불쌍한 백성들의 고통을 정녕     외면하고만 있을 것이외까 ? 미륵님은 3년간 전국 (傳國, 전국을 돌며     깨달음을 전함)하였으나 나는 십년을 준비했오. 충분히 준비가 다 되어     있오이다. 이제 일어서기만 하면 이 예토 (穢土)를 단박에 정토 (淨土)로     바꿀 수 있오 !”           정원태가 재촉하여 거사일을 정했지만 너무 이르지 않나 여환은     자꾸 걱정이 되었다. 거사일이 다가옴에 따라 불안해지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도 불경 쓰는 일이 도움되었다. 여환은 종이에     ‘7월에 큰 비가 퍼붓듯 내려 산악 (山岳)이 무너지고 국도 (國都)도     탕진 (蕩盡)될 것이니, 8월이나 10월에 군사를 일으켜 도성으로     들어가면 대궐 가운데 앉을 수 있다.’ 라고 붓으로 썼다.      계화가 밥상을 차려 방으로 들어왔다.      여환은 붓을 내려 놓았다.      “자네의 정성에 감복하였네. 고마움의 표시로 그대를 ‘정성인 (鄭聖     人)’이라 부르리라.”      몇 숟갈 들었으나 요즘 부쩍 식욕이 줄어들어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뜨락으로 나갔다. 가뭄이 심해 논밭의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농작물들이 바싹 말라붙은 들판이 황량하게 담장 너머 펼쳐져 있었다.      여환은 요즘 부쩍 원향이 그리워졌다. 그녀를 처음 흑암 바위에서     안은 것이 지난해 이맘때쯤이었다. 그 이후로 황해도에 들릴 때마다     꼭 원향을 찾아 그녀의 알몸을 탐했었다. ‘고려 때 신돈이란 스님은     흰 말의 성기를 달여먹어 양기 (陽氣)를 북돋았다고 하옵니다’ 하며     내용물을 알 수 없는 보약을 거의 날마다 원향은 여환을 위해 달여     주었었다. 헤어질 때마다 보내고 싶지 않아서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이던 원향을 떠올릴 때마다 여환은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아무래도 정계화의 집으로 원향을 오게 하여 함께 살아야겠다고     여환은 마음 먹었다.           4.           경기도 안산의 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수리산의 정상에 산적     최 두령의 산채가 있는데 도적의 수가 300여명이 될 정도였다.     각종 명목의 세금 착취에 시달려 고리대를 빌렸다가 가뭄과 흉년이     계속되어 갚을 처지가 못되자 토지마저 빼앗긴 굶주린 백성들이     유망민 (流亡民)으로 떠돌다 화전 (火田)을 일구려고 산에     들어왔다가 도적이 되기도 하고, 조정 및 지방 관아에서     사용되는 물량을 전적으로 절에서 만들어 바치게 되어 있는     종이는 물론이요 아전들과 양반들이 요구하는 짚신, 과일,     밤나무 위패목, 산나물 따위를 마련하느라 골병든 중들이 절을     떠나 산채로 흘러 들어오기도 하여 엄청난 수로 불어난 것이다.           숙종 14년 (1688년)인 이즈음은 선조 때의 임진왜란과 인조 때의     병자호란으로 황폐화된 농토들이 아직 전란 전 상태로까지는     회복되지 못하여 곡식의 생산량이 전보다 못한데다가 극심한 가뭄에     역병까지 돌았고 국고가 텅 비어 조세를 무리하게 거두었으며     조정대신들은 국가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붕당의 이익에 치중하였고     지방관리들은 지나치게 조세를 더 걷어 일부 착복하여 농민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졌다.      게다가 언로 (言路)까지 막혀 이런 실정이 숙종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조선의 가장 뛰어난 제도 중의 하나였던 상소제도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원래 ‘봉사 (封事)’로 올린 상소는 승정원 (承政院)에서 뜯지 않고     봉해진 그 상태 그대로 임금에게 전하여 직접 보도록 했었다.     그러다가 명종 때 황해도 도적 임꺽정이 부하를 시켜서 한 통의     문서를 바쳐 마치 상변 (上變)인 것처럼 왕을 놀라게 했는데     명종은 몹시 노하며 승정원에 책임을 물어 승지 (承旨)를     파직 (罷職)시켰다. 그 이후로 승정원에서 모조리 뜯어본 뒤 올리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즈음에는 과중한 조세를 경감해줄 것, 탐관오리들의 실상,     춘궁기에 저리로 곡식을 빌려주고 수확할 때 받던 환자 (還子)가     고리대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 등등의 실정 (失政)을 알리는 상소가     많았으나 자신의 도당의 이익을 더 중시한 승정원은 숙종의 건강을     염려하여 옥체에 해가 될 내용은 가급적 올리지 않는 게 좋다는     핑계로 중간에서 많은 상소를 버렸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백성들의 불만이 팽배해졌고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떠돌다가 산도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 당시 험한 산 치고 도둑의 소굴이 아닌 곳이 드물었다.      도둑의 우두머리로 유명한 장길산은 양덕 (陽德) 지역에서     활동했는데, 장길산만큼이나 유명한 도적 두령들이 각 지역에     숱하게 많았으며 그들이 거느린 도적떼의 수도 상당히 많았다.      최 두령도 그런 도적의 우두머리들 중의 하나였다. 정원태의     거사 전갈을 받은 최 두령은 칼, 창, 화살 쓰는 훈련을 강화시켜     산도둑들을 강한 군사로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조세물품을 약탈하여 동굴에 잔뜩 채워두어 군량미로     쓰기엔 충분했다.      포도청에서 최 두령을 잡기 위해 장교(將校, 각 군영과 지방 관아의     군무에 종사하던 낮은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던 말)를 보내어     습격하여 체포하려 할 때마다 정원태가 미리 정보를 흘려주어서     번번히 관군은 최 두령을 체포하는데 실패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의 큰 두령치고 그런 도움을 받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한다. 몸은 하나일 텐데 각지의 군사정보를 수집하여 각지의     두령들에게 흘려주는 걸 보면 조직력이 대단한 작자이리라 여겨졌다.     물론 정원태는 본명을 사용하지 않고 정 도령이라는 거짓이름을     사용하면서 심복을 시켜 저자의 독쟁이 박가 (朴家)에게 흘려주었고     박가로부터 점조직으로 이어진 습격 정보가 최 두령의 귀에까지     당도하곤 했던 것이다.      정 도령이라. 정감록에 정씨가 왕이 된다는데 그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 본 적도 없는 정 도령이란 자가 도적인 나를 도와주는 이유는     뭘까 ? 몹시 궁금했었다.           뿌연 안개가 계곡마다 가득하여 지척 (咫尺)도 분별하기 힘든     아침이었지. 최 두령은 정 도령을 처음 만난 그 날을 떠올렸다.      “하마터면 정 도령 나리의 목을 벨 뻔했읍니다요.”      뒤통수를 긁적이며 부두령 김팔뚝이 정 도령을 모시고 최 두령의     방에 들어서며 말했다.      얼굴빛이 붉게 물든 여자가 흐트러진 저고리 밖으로 탐스러운     젖가슴을 불쑥 내놓은 채 따라주는 농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멧돼지     뒷다리를 뜯고 있던 최 두령이 술 취한 눈으로, 뻣뻣하게 서 있는     정 도령을 올려봤다.      “정 도령이라고 ?”      술기운 탓에 잠시 정 도령이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알이 근질거려 계곡 물에 사타구니를 씻고 있는데 인기척이     나서 봤더니 길 잃은 샌님이 헤매고 있지 않겠읍니까 ? 단칼에     모가지를 싹뚝 베어줄까, 몸통을 두 동강 내줄까,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며 벌거벗은 상태에서 방울을 딸랑거리며 칼을 치켜들었더니     ‘자네 양물 (陽物) 상당히 크구먼. 나, 정 도령일쎄. 최 두령을     만나러 왔으니 어서 앞장 서게나.’ 하지 않겠읍니까요.     정 도령이 누굽니까요 ? 관군이 들이닥칠 때마다 미리 알려줘서     산채에 피해가 없도록 해주신 분 아닙니까.”      부두령이 치마 사이로 드러난 여자의 가랭이를 힐끔 보며 말했다.      “나리!”      최 두령이 벌떡 일어나더니 정 도령의 손을 억세게 잡았다.      “만나서 반갑소이다. 나 정 도령이라고 하오.”      “난 최벽이요. 나리 목을 벨 뻔한 이 자는 부두령 김팔뚝이지요.     생명의 은인이 직접 산채를 찾아주시니 어찌 할 바를 모르겠오.”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며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양반 상놈이 없는 평등한 세상, 굶주린 백성 없이 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 썩은 조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면 새 임금이     생겨나는 법. 사내로 태어나 어찌 이 좁은 산채 만을 다스리리요.     최 두령이라고 병권을 쥐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에게 군영대장을 제수 (除授, 추천을 받지 않고     임금이 직접 관리를 임명함)하시겠오이까 ?”      최 두령이 묻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조선이 무너지면 다음엔 중원 (中原)을 차지할 걸세. 자네만한     그릇이면 병조판서감이 아니겠는가 ?”      “그럼 군영대장 자리는 제 차지가 되겠군요, 하하하.”      김팔뚝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병판어른, 이 몸은 정경부인이 되는 것이옵니까 ?”      술에 젖은 여자의 말에 모두 껄껄 기분좋게 웃었다.      그 날 최 두령과 정원태는 의형제를 맺었고, 하룻밤 묵고 가기를     권하여 정원태는 산채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최 두령은     의형제 식(式)이라며 한 구멍을 거쳐야 한다면서 술을 따르던     그 여자를 잠자리에 굳이 넣어주었다. 여자가 너무 적극적으로     덤벼드는 바람에 그냥 잠을 자려던 애초의 작심을 내던지고     정원태는 동굴을 찾아 들어갔다.           최 두령이 정 도령을 만난 지도 어언 두 해가 흘렀다. 드디어     거사일이 정해졌다. 최 두령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5.           깊은 밤 정원태의 사랑방에는 핵심 혁명세력들이 모여 준비사항을     점검하고 거사 방법을 토론하고 있었다.      “양주 관아를 쳐서 무기와 군량미를 확보한 뒤 한양으로 쳐올라가는     편이 쉬울 것이요. 양주는 다른 고을보다 완전히 민심이 돌아선     곳이어서 우리 군사가 들어가면 쉽게 농민들이 우리쪽에 가담할     것이요. 동서로 큰 길이 나서 육로로 수로로 운반되는 곡식에     부역동원이 빈번하고, 태조 건원릉을 비롯하여 능원이 많다보니 일이     있을 때마다 재궁 (齋宮)에 부역동원해대는 데다가 토지가 넓다고     조세는 더 많이 배정되니 백성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실정이요.”      정원태가 자신감이 넘쳐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산두령들쪽은 어찌 되어가고 있오 ?”      “한양 근처 3도 (道)에 이미 연락을 다 했오. 거사일에 신호만     보내면 각 산의 도적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조정은 곧 혼란에 빠질     것이요. 게다가 미륵교도들이 일제히 일어날 것이고 농민들도     합세하게 될 것이요.”      “여환을 따르는 세력이 너무 강대해져서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어요. 걱정이오.”      서얼 출신인 김준수가 또 그런 걱정을 했다. 그는 처음부터 여환을     이 일에 끌어들이는데 반대했었다. 현실감각이 없는 몽상가여서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칼과 군사 없이 어떻게 세상을     바꾼다는 말인가. 애초에 여환은 미륵을 믿기만 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여 김준수를 답답하게 했다. 그나마     정원태가 ‘열반경 (涅槃經)’의 ‘신심품 (信心品)’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 중에 ‘정법 (正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기를 써도 좋다’ 는     구절을 찾아내어 여환을 설득한 끝에 ‘이제 세상이 기울어질 것이니     이 때 도성으로 들어갈 것인즉 장검과 군장을 꾸려놓고 그 날을     기다려라.’ 로 말이 바뀌었으니 다행이었다.      김준수의 걱정스런 물음에 정원태가 대답했다.      “민심 (民心)은 곧 천심 (天心)이라 했네. 민심을 하나로 묶지     않고서는 나라를 세울 수가 없네. 설사 나라를 세웠다 하더라도     민심을 잃은 나라는 약한 바람에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십상이지. 3도의 도둑들과 노비들, 몇몇 중인(中人)들만으로는     나라를 세울 명분이 약해. 무당과 풍수, 남사당패, 탈춤 따위를     통해 정감록을 퍼트리거나 양반을 비꼬는 술책도 계속 쓰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백성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당기기에는 역부족이야.     거사를 위해 거의 십년을 준비하여 무기, 군량미, 전략은 완벽히     준비됐으나, 백성을 하나로 묶을 정신이 마련되지 않아 때를     기다리던 중에 우연히 미륵신앙을 전파하고 있는 여환을 보게     되었고 그의 행적을 오랫동안 눈여겨본 끝에 저 자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면 하나로 묶을 이념을 얻게 되겠구나 하고 느꼈다네.     온 백성이 미륵신앙으로 묶여져 감을 바라보게. 이제 우리의     거사가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가 ? 다들     그동안 은밀히 여환을 미륵으로 만드느라 무던히 애써왔지. 농민과     밀접한 무당, 풍수, 사당패를 통해 여환을 신격화할 온갖 소문을     퍼트리지 않았던가. 여환의 세력이 강대해졌다 하나 그의 힘을     이용하여 조선이 넘어지면 새로운 나라 새 조정은 현실정치를     잘 아는 우리가 자연스레 떠맡게 되지 않겠는가 ?”     “남사고비결 (南師古秘訣, 1592년의 임진왜란을 명종 말기에     예언한 조선 중기 학자인 남사고가 쓴 비결)에 이르기를     ‘마곡 (摩谷)은 서얼 (庶蘖, 서자의 무리)의 거주지이므로 이곳에     다섯 장수와 정승이 날 것이로되, 만약 수염 없는 자가 이르면 필시     일이 어긋날 것이다’ 고 했으니 걱정이외다. 한낱 기우 (杞憂)이기를     저도 바라오만......”      김준수의 말 중에서 ‘수염 없는 자’는 곧 ‘머리털이 없는 자’,     중을 뜻했다.           6.           드디어 7월 15일 거사일의 해가 밝아왔다. 여환은, 원향을 남복 (男     服)으로 갈아입히고, 황회, 정원태, 양주 (楊州) 사람 김시동 (金時同),     최영길 (崔永吉), 이원명 (李元明)과 영평 (永平) 사람 정호명 (鄭好明),     이말립 (李末立), 정만일 (鄭萬一)에게는 각자 군장 (軍裝)과 장검 (長劍)     을 준비시켜 함께 선발대로 도성 안에 몰래 들어가서 비오기를 기다렸다.      비가 퍼붓기 시작하면 신호를 보낼 것이고 그러면 3도에서 일제히     봉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징험 (徵驗)으로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오게 했다가     멎게 하기도 하는 등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다는 용녀부인     원향이 아무리 기우제를 하여도 하늘은 끝내 응답이 없었다.      “공부가 부족하여 하늘이 아직 응해주지 않는구나.”      여환이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했다.      잠시후 그는 정원태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삼각산으로 옮겨 다시 빌어보도록 하세.”      정원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삼각산에는 소, 쟁기를 팔고 장검을 사서 고향을 떠나온 많은 농민들과     험상궂게 생긴 산도적들이 숲 속에 몸을 숨기고 비가 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 눈썹을 붉게 물들여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여환 일행이 삼각산에 나타나자 붉은 눈썹들은 칼 든     손을 흔들며 일제히 소리를 질러댔다.      “당래하생 미륵존불 (當來下生 彌勒尊佛)! 당래하생 미륵존불!”      여환은 두 팔을 치켜들더니 붉은 눈썹들을 진정시켰다.      “부처님의 법력으로 비를 청하는 청우제(請雨祭)를 삼각산에서 열어,     도성 안에 큰 비가 퍼붓도록 할 것이니 다들 부정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도록 하라.”      여환은 가지고 온 괘불 (掛佛, 그려서 걸게 되어 있는 불상)을 고목에     걸고 나서 황색 천을 나무 밑에 깔고 그 위에 앉아 비를 청하는데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대운륜청우경(大雲輪請雨經)을 외며 하늘에서     비가 내려주기를 간절히 기원하기 시작했다.      끝끝내 비가 내리지 않자 여환은 후일을 기약하며 하산을 명하였다.      그러자 정원태를 비롯한 최 두령 등 강경파들이 반대했다.      “신호만 보내면 양주 고을이 함락되고 3도에서 미륵군이 봉기하도록     준비가 다 되어 있거늘 여기서 그냥 군사를 거두면 다시 모으기가 쉽지     않소. 계획대로 거사를 거행해야 하오 !”      정원태가 외쳤다.      “큰 비가 내려 한양에 홍수가 나면 미륵님이 나타나서 피 한 방울도     헛되이 흘리지 않고 조정을 무너뜨릴 수 있으나, 때가 일러 비가 내리지     않은 지금 미륵님의 뜻을 거슬러 군사를 일으키면 백전백패하리라.     미륵님의 계시가 머지않아 있을 것이니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때를     기다리라.”      “하늘의 뜻이란 게 과연 무엇이요 ? 저 백성들의 처참한 몰골을 보시요 !     모순으로 가득찬 이 세상을 뒤집어 엎어서 새 세상을 열고자 하는 저들의     한맺힌 염원을 보시요 ! 하늘의 뜻이 저들의 눈물에 있거늘 어찌 빗물에만     있으리오 ! 자, 당장 도성으로 쳐들어갑시다 !”      “하산하라.”      “이 많은 군사가 그냥 흩어져 버린다면 아무리 조심한다 하더라도     오늘의 거사가 소문날까 두렵소이다. 일단 칼을 뽑은 이상 싸우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요 !”      소말동이 죽창을 쳐들었다.      “하늘의 뜻을 어찌 중생이 헤아릴 수 있으리.”      “정감록에 예언하기를, ‘중의 무리가 한산 (漢山)에서 재앙을 만드는     일이 많아 무기 (戊己) 사이에는 중의 피가 강을 가득 채운다’ 고     했는데 이제야 그 의미를 알겠구나. 거사를 중이 망치니 이를     경계하라는 뜻 아닌가 ! 정녕 그대는 거사를 망치려 하는가 !”      성난 정원태가 칼집에서 칼을 휙 빼들어 여환의 목에 겨누었다.      삼각산에 모인 군사들의 눈들이 일제히 정원태와 여환에게 향했다.     붉은 눈썹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여환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칼을 쥔 정원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침내 정원태는 칼을 내려 놓으며 혼잣말 하듯이 말했다.      “어찌 내 손으로 미륵을 벨 수가 있겠는가……”      기도를 끝낸 여환이 삼각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여 붉은 눈썹 대부분이 여환의 뒤를 따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님, 우리 군사만으로 도성을 칩시다 !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오이다 ! 저따위 중놈과 함께 거사를 도모한 우리가 한심하구려.”      최 두령이 씩씩거리며 도끼로 옆의 거대한 나무를 찍어대기     시작했다. 이내 우지끈, 비명을 지르며 나무가 쓰러졌다.      가슴 속의 분노를 삭히고 있던 정원태는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분노로 말하자면 아우님보다 못하지 않으이. 허나, 그러다 일을     그르칠 수 있는 법. 우리 군사만으론 성공할 수가 없지 않은가.     허, 어느새 여환의 도움 없이는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되었구나.     후일을 기약할 수 밖에…...”      한동안 산에 남아 있던 강경파들은 정원태를 따라 하산하기 시작했다.           7.           “역적 정원태는 즉시 나와 오라를 받으렷다 !”      대문이 부서질 듯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마당이 소란해졌다.      며칠째 병상에 누워있던 정원태는 깜짝 놀라며 일어나 머리맡의 칼을     집어 들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환도를 찬 장교와 긴 창을 든 포졸들이     마당에 버티고 서 있었다. 정원태는 담 너머 달아날 곳을 재빨리 눈으로     훑었다. 벙거지들이 언뜻언뜻 담 위로 보이는 걸 보아 포졸들이 집을     에워쌌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뒷간 밖은 비탈이어서 포졸들의 방비가     허술할 것이다. 정원태는 마루에서 뛰어내려 칼을 휘둘렀다. 포졸 둘이     쓰러지자 다른 포졸들이 그 기세에 눌려 뒷걸음쳤다. 이때다 ! 정원태는 그     틈을 이용하여 뒷간쪽으로 뛰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담을 넘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투승이 날아와서 정원태는 곤두박질치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포승으로 묶인 정원태가 관아로 끌려가는 모습을 많은 구경꾼들이 쯧쯧     혀를 차며 바라보고 있었다. 구경꾼들 속에 소말동이 몸을 숨기고     바라보다가 정원태와 눈이 마주쳤다.      “나리, 벌써 소문이 좍 퍼졌기에 저 한 목숨 부지하려고     발설했읍니다요......”           8.           태장 (笞杖, 작은 곤장인 태와 큰 곤장인 장으로 죄인의 볼기를     치는 형벌), 난장 (亂杖, 양쪽 엄지발가락을 한데 묶어 모아놓고     발바닥을 치는 고문), 주리틀기, 압슬 (壓膝, 죄인으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하여 기둥에 단단히 묶은 다음 다듬이돌과 같은 무거운 물건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 형벌이며 무릎 밑에는 깨진 사기그릇 조각이나     자갈 등을 깔아 살을 파고 들어가도록 했음), 단근질 등 온갖 악형으로     정강이뼈가 부러지고 볼기가 다 헤어지고 온몸에 화상을 입은     정원태와 여환이 초주검이 된 몰골로 참형 (斬刑)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태는 흐려져가는 의식을 바로 하려 애쓰며 옆에 있는 여환을     퀭한 눈으로 쳐다보며 독백하듯이 중얼거렸다.      “십년을 준비했건만 그대가 망쳐버렸구나. 정녕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되는가 ? 황제가 되어 왕도를 펼치려고 했는데 한낱 꿈이었던가.”      두 손이 묶인 여환은 두 눈을 감은 채 무릎 꿇고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망나니가 시퍼런 칼에다 입에 머금었던 물을 푸, 하고 세차게     뿜어내더니 여환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워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눈을 뜨고 비가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보려고 여환이 고개를 들려는 순간     망나니의 칼이 번쩍이더니 여환의 목을 순식간에 베었다. 잘린 목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여환의 잘린 머리통이 빗물이 흥건한 땅바닥을 굴러가는 바로 그 순간에     옥 (獄)에 갇힌 원향은 오랜 산통 끝에 아기를 낳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