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가 985년(성종4) 신료인 한국화(韓國華)를 고려에 보내 거란 협공을 요청한 외교문서의 내용이다. 송나라는 그 2년 전 고려 성종을 책봉(冊封)했는데, 이번에도 다시 책봉하면서 이같이 요청했다. 책봉은 해당 국왕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한편, 그 나라를 품에 안으려는 외교 의례다. 즉위 후 한 번의 책봉이 관례인데, 송나라는 이후 세 차례(성종 7, 9, 11년) 더 책봉한다. 다섯 차례의 책봉은 매우 이례적이다. 거란과의 전쟁에 고려를 끌어들이려는 송나라의 다급한 사정이 드러난다. 그러나 고려는 냉정했다. 거란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려는 목적에서 송과 관계를 맺은 것이지 군사동맹으로 또 다른 화를 자초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고려는 시간을 끌면서 송나라 요구를 거부한다.
중국의 소수 민족인 다얼족이 거란의 후예라는 것이다. 유전적인 유사함과 시조 설화, 언어, 풍습 등을 조사한 결과 다얼족이 거란의 그것과 일치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거란은 원나라에 복속되어 각지로 파견되어 전쟁을 치르다가 뿔뿔이 흩어지고 이렇게 소수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이슬람 세력에 귀화했다는 설도 있다.
“오랑캐와 화친하여 우호를 맺음으로써 전쟁을 멈추고 문(文)을 닦았으며, 부세를 감면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였고, 뛰어나면서 어진 자들을 등용하고 숭상하여 정사를 닦음에 있어 공평하였다. 안팎이 이에 평안하였고 농상(農桑)이 언제나 풍요로웠으니, 가히 중흥을 이룬 군주라고 할 만하다.”(고려사절요)
발해(渤海)-거란(契丹) 전쟁의 발생배경과 전개과정The Causes of the Balhae-Khitan War andIts Process
발해는 건국과정에 있어서 거란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당의 압박에 벗어나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서 일정 정도의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발해건국 후에도 등주공격, 마도산 전투,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던 8세기에도 대대로 원수지간이라 불릴 정도의 대적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9세기에 접어들면서 거란이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고, 발해는 부여부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거란에 대한 방비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혜성처럼 등장한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각 부족들을 통일시키고, 형제들의 모반을 수습하며 916년 황제에 등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