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용만 문학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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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왜 소설가가 되었나






  나에게는 불치의 병이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다. 빨갛고 노란 꽃이나 단풍을 고운 제 색깔로 느끼지 못하는 병, 하지만 나는 그 병을 고치려고 애써본 적이 없다. 그 병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병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병은 늘 상식적인 삶을 비틀며 내 문학을 이끌어왔다.


  나는 고향이 여러군데다. 충청도는 태어난 곳, 경상도는 중학교(부산중)에 다니고 사업한 곳, 전라도는 대학교(광주대)에 다니고 일가가 많은 곳, 서울은 고등학교(용산고)와 대학원(경희대학교 대학원)에 다니고 경찰생활한 곳, 경기도는 현재 살고 있는 곳, 강원도는 처갓집(양구)이 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강릉)이며 내 문학의 샘(사천진)이 있는 곳이다. 강릉과 사천진 바닷가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온 것도 그 때문이다.

  외딴 모래톱에서 철학서적을 읽으며 사색하던 진리 포구. 그곳은 또한 소설을 처음 써본 곳이기도 하다. 이십대 중반이었다. 하지만 생활환경은 나로 하여금 20여 년 동안 이리저리 떠돌며 문학과 멀어지게 했다. 경찰 생활과 생업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청계천 고서점을 뒤지다가 운 적이 있다. 서가에 꽂힌 헌 책들을 훑어보는 순간 저절로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먼지를 뒤집어쓴 책들이 거의 낯익었는데 나는 읽었던 그 책들의 이름조차 까막 잊고 살아왔던 것이다. 몽유병 환자라 한들 그처럼 까먹을 수 있을까. 벙어리로 살 수밖에 없는 팔자다. 말을 하고 싶어도 입이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마음 놓고 지껄일 수 있던 옛날이 그립다. 별빛이 쏟아지는 여름밤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앉아 농투성이 아버지와 이야기하던 초등학교 시절, 그때 나는 꽤나 유식했었다.  

  “이 방안을 우주라고 하면요, 저쪽 구석에 놓인 이불궤짝, 요강단지, 벽에 걸린 빗자루, 아버지의 몸, 그리고 아버지가 지금 막 재를 터신 재떨이와 담뱃대 등은 모두 별이다 그 말예요. 다만 방바닥이나 천장에 늘어붙어 있지 않고 그런 허섭스레기들이 방 허공에 둥둥 떠 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이잉 그렇구먼. 그렁게 별이란 천장 같은 하늘에 처박혀 있지 않구 둠벙에 떠 있는 개구리처럼 둥둥 떠 있는 거구먼. 그런디 허섭스레기란 뭔 말이여?”

  “쓸모가 없는 쓰레기 같은 물건을 뜻하죠.”

  “허면 내 몸뚱아리두 허섭쓰레기구먼?”

  아차, 나는 아버지의 권위와 존엄을 여지없이 도륙낸 자신의 불효를 통감하며 그 순진무구하기 이를 데 없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별 중의 별이라고 귀염기를 털어내 보였다. 그때 아버지는 헤헤벌쭉 웃기만 했다. 편안한 웃음이다. 바보 같은 웃음이다. 하늘의 별을 삼키려는 미련스런 웃음, 무량대수의 긴긴 시간마저 손으로 주무르던 터무니없는 웃음, 그런 웃음을 소유한 분이기에 아버지는 슬픔을 모르고 울 줄을 몰랐다.

  그런데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마곡사 은적암에서 불목하니로 지낼 때인 1961년 4월 29일 밤이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공군 입대를 하루 앞두고 찾아간 아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다가 갑자기 목이 메었던 것이다.

  “늬 엄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구나. 우리 세 식구가 언제 모여서 살는지.....”


  공군 기술교육단 항공병학교는 대전 유성에 있었다. 입대해서 머리를 깎고 보급품을 타던 날 밤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조명탄이 터지고 온 훈련소가 뒤숭숭했다. 그때 스피커 소리가 울렸다.  

  “남침을 자행한 북괴군은 서울을 정복하고 어느새 유성을 지나 만두고지에까지 접근하고 있다. 제군들은 비록 훈련병이지만 위난에 처한 조국을 위하여 용감히 전투에 참가해주기 바란다. 모든 장비를 갖춰서 0.5초 내로 연병장에 집결하기 바란다.”

  가슴은 두근거리는데 속에서 묘한 용기가 꿈틀거렸다. 모두 용감하게 출전 준비를 갖추고 연병장으로 달렸다. 조명탄은 아직도 하늘에서 작렬하고 있었다. 전 훈련병이 집합하자 지휘관이 단상에 올라섰다.

  “그럼 지금부터 노래자랑을 시작한다.”

  와아아, 연병장에 박수소리가 진동했다. 공군가 ‘은익의 노래’가 합창되고, 중대별로 차례차례 노래 잘 부르는 훈련병이 단상에 올랐다. 그런데 단상에 올라서는 족족 서울치 아니면 부산치였다. 내가 뛰어나가 단상에 올랐다.

  “나는 촌놈이다. 나 같은 시골치들은 박수!”  

  우렁찬 박수가 터졌다. 곡명은 ‘대관령 길손’이었다.

  “갈 곳도 없는 몸이 쉴 곳이 있을 소냐. 떨어진 보따리를 베개 삼고 벗을 삼아.....”

  노래자랑은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즐거운 밤이었다.


  오락회를 치르고 일주일쯤 지나서였다. 새벽에 완전무장하고 집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단체기합인가 했는데 기합치고는 서두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래도 심상찮은 명령이었다.

  “새벽부터 오락회 열랑가?”

  “오락회만 열다 제대하모 좋겠다이.”

  연병장에 집합한 생도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집합이 완료되었는데도 지휘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다시 스피커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해체하라. 완전복장만 갖추고 내무반에서 대기하라.”

  생도들은 투덜거리며 도로 내무반으로 돌아갔다. 그때 또 명령이 하달되었다.

  “제군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동요하지 말고 지시대로만 행동하기 바란다. 함부로 떠들지 말고 복무에만 충실하라. 제군들은 군인임을 명심하고 명령에만 복종하길 바란다. 이상.”

  내무반이 점점 술렁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내사 알갔나. 암튼 집합 없고 편하니까이 좋다마.”

  “김일성이 쳐들어오다가 졸고 있는 거 아녀?”

  “맞당게. 전쟁허다 보면 지칭께로 졸리기두 헐 것이제.”

  그들은 벌렁 누운 채 계속 잡담을 늘어놓았다. 아무 지시도 없고 영내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스피커에서 이상한 말이 흘러나왔다. 아마 라디오를 틀어놓은 모양이었다.

  “포고령..... 혁명공약.....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저 소리가 머꼬?”

  “뭣이 터지긴 터진 모양인디.” 

  생도들은 하나둘 스피커 주위로 모여들었다. 1961년 5월16일 아침이었다.


  재밌는 훈련병시절도 나한테는 오래 가지 않았다. 훈련병에게 첫 면회가 있던 날 남들은 가족들과 껴안고 야단인데, 나한테는 이웃 아저씨가 찾아와 걱정보따리만 풀어놓았다. 어머니한테서 실성기가 보인다고 했다. 눈이 어두운 데다 치매까지 걸린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명랑하던 내 성격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훈련을 마치고 공군본부로 배속되자마자 나는 일등병 신분으로 군종감을 찾아갔다. 그 당시 참모총장은 김구 선생 아들인 김신 장군이었다.

  “제가 국방의무를 필하는 대신 역시 대한민국 국민인 부모님이....”

  내 딱한 처지를 듣고 난 군종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군은 원래 시험을 친 지원병이어서 의가사제도가 해당되지 않지만 참모총장 특명을 받아 상병으로 제대하게 되었다.

  제대복을 입은 채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공군 동기생 하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입대하기 전 부산 바닥 깡패였던 그는 보급창 수송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훈련병 시절 내가 그와 친하게 지낸 것은 연애편지를 대필해주었기 때문인데, 그는 몰래 차에서 휘발유를 빼내 팔아 그 돈으로 내 밥값을 조달했다. 내가 태종대 자살바위를 찾아갈 때까지 그는 쫄짜 신분으로 군소리 없이 내 뒤를 돌봐주었다.

  

  내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쩜 배냇짓일지 모른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살아온 내 과거가 결코 소설을 쓰게 된 동기일 수는 없다. 핏줄 탓이다, 라고 생각해왔다. 광대가 되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끼, 콩밭을 매다가 호미를 팽개치고 남사당패를 쫓아간 그 끼가 내 핏속에도 흐를 것이었다. 아버지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신 것도 그 끼 탓이 아닌가 싶다.

  나 역시 학창시절부터 뭐에 홀리고 싶어 안달했다. 진리에 홀리고, 사랑에 홀리고, 허무에 홀리고 싶었다. 그러다가 아주 미쳐버려 내 귀를 자르고, 내 눈을 빼버리고, 종국에는 내 몸을 태워 가루를 허허공간에 뿌리고 싶었다. 내 몽근 가루는 아승기겁의 긴긴 세월 동안 흩어지다가 우주 끝까지 날아갈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하늘을 보며 물었다.  

  “그런디 말여, 우주란 게 얼마나 넓댜? 우주 이쪽 끄트머리허구 저쪽 끄트머리를 명주실로 재면 몇 타래나 된댜?” 

  아버지의 그런 호기심을 채워드리기 위해 나는 늘 하늘과 친숙해야 했다. 하늘과 친숙해지면 사람이 멍청해진다.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멍해지는 것과 같다. 하늘과 친숙한데 똑똑해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바보처럼 생긴 내가 자랑스럽다. 결국 아버지는 바보스런 아들, 바보스런 소설가를 만들어낸 셈이다.

  

  하늘과 친숙해진 내 허무가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필연성을 부여했다면 경찰생활은 소설의 구체적인 제재를 공급하는 데에 이바지한 셈이다. 무엇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어떤 충동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그 충동이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다.

  내가 경찰관이 된 것은 순전히 호구지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1963년 봄, 나는 그날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바다에 빠져죽으려던 날이었다. 나는 제대복을 입은 채 외판용 화장품 보따리를 들고 부산 시내를 뒤지다가 허기에 지친 몸으로 태종대 자살바위 위에 섰다. 하지만 부모님의 가엾은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몸이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참으로 죽을 자유마저 없는 몸이었다. 앙드레 말로의 작품 <인간조건>에서 주인공 진이 뇌까린, 죽을 자유가 없다는 그 말이 숫제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자살을 포기한 나는 밤늦게까지 바위에 앉아 있다가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한가한 버스 안에는 라디오 소리가 요란했다. 마감뉴스였다. 그런데 뉴스가 끝나갈 무렵의 공지사항이 귀를 뜨게 했다. 경찰관 모집 안내방송이었다. 생소한 직업이지만 망서릴 계제가 아니었다. 직장을 구할 욕심에서 서류를 갖추어 응시했고 며칠 뒤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그리고 인천 부평에 있는 경찰전문학교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 부산을 떠났다.  

  교육을 마치고 서울경찰청에 배속되자마자 연일 시위진압에 출동했다. 한일회담 ? 월남파병 반대시위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그런데 한번은 묘한 진압에 앞장서야 했다. 중부경찰서에서 근무할 때였다. 을지로 흥사단 건물에서 집회를 가진 윤보선(전 대통령), 백기완(백범사상연구소장)씨 등이 가두시위에 나섰는데 백기완씨는 내가 용산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국총학도연맹 주최 행사인 지리산 농촌계몽운동에 참가할 당시 인솔자였으며, 원효로 하숙집 이웃에 살 동안 내가 자주 놀러다녔고, 명문고교인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생이 만든 청진회에서 내가 고문으로 추대한 분이어서 형님 동생으로 지내던 처지였다. 나는 할 수 없이 뒤로 숨어야 했다. 그 뒤 세월이 흘러 내가 작가가 되고,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주최하는 어느 모임에서 만났을 때 내 손을 잡고 “얘가 김용만이야.” 하고 소리친 적이 있었다.


  내가 데모를 진압할 때 겪은 에피소드는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 한 가지를 더 쓰지 않을 수 없다. 6?3비상계험이 선포된 이듬해 봄이었다. 우리는 한양대학교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건국대학교 데모대가 한양대 데모대와 합세하기 위해 진격해오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 두 그룹을 차단하기 위해 철망 버스에 분승하고 성동교로 진출했다. 뚝방 쪽에서 데모대가 새까맣게 밀려왔다. 드디어 돌이 날아오고, 우리는 최루탄을 쏘아댔다.

  하지만 최루가스는 도심에서나 효력이 있지 바람 부는 허허벌판에서는 한갓 먼지에 불과했다.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는데 한양대학교 앞 길목에서는 돌이 빗발치고 있었다. 진압대원들은 달리는 차 옆등에 달라붙어 묘기를 부리거나 아니면 샛길로 빠져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짐 실은 우마차가 샛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진압대원들은 소 등을 타고 넘었다. 나도 소 등을 타고 넘는데 머리가 핑 돈다 싶더니 그냥 쓰러지고 말았다. 돌이 우측 관자놀이 부근을 강타했던 것이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가냘프게 생긴 여학생 하나가 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입에 찝찔한 소금맛이 느껴졌다. 핏물이었다. 가스마스크를 벗어보니 피가 튀어 있었다. 그 길로 앰뷸런스에 실려 경찰병원에 이송되고 보름간 치료를 받았다. 나는 지금도 그 여학생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예쁜 얼굴이었다. “다치셨군요.” 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잡다한 이야기를 쓰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잘잘한 추억들이 내 알찬 청춘의 기록물이란 데에 새삼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다. 혹은 땀으로, 혹은 눈물로, 혹은 근무일지로.....

  하지만 땀이나 눈물이나 근무일지로 남길 수 없는 과거가 하나 있다. 나를 강원경찰청으로 전근가게 한 요인이었다. 그 문제는 장편 <인간의 시간>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춘천 강원경찰청에서 지망하는 곳을 대라기에 이왕이면 바닷가에 가고 싶어 강릉경찰서를 찍었다. 난생 처음 가보는 동해안이었다. 고속도로는 고사하고 포장도로도 없었다. 서울 피서객은 한 사람도 없던 시절이었다. 고향에서 동해안에 가려면 기차를 타고 서울을 거쳐야 하니 이틀이 걸렸다.

  강릉경찰서에서도 인사담당이 지망하는 곳을 물었다. 제일 좋은 근무지가 묵호지서였지만 나는 한가한 곳에서 책을 읽으며 소설공부하고 싶은 욕심에서 유치장근무를 지망했다. 죄수들의 땀내가 진동하는 곳이지만 규칙적으로 쉴 수 있는 데다 야간근무 시간에도 교대를 마치면 텅빈 수사계 사무실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봉급 타며 공부할 수 있는 곳이었다. 또 죄수들과 어울림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호기심도 작용했다. 경무과장은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아침 조회시간에 칭찬을 늘어놓았다.

  “영전보다 좌천을 선택한 이 모범을 본받도록 해요.” 

  암튼 유치장 근무는 죄수에 대한 내 인식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나는 죄수들을 애정으로 대했고, 그들 역시 나를 좋아했다. 내가 근무하러 유치장에 들어서면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그때의 체험담이 현대문학에 발표한 <늰 내 각시더>의 소재가 된다.

 

  <늰 내 각시더>는 어느 엽기살인범의 이야기다. 지금은 강릉에 교도소가 생겼지만 당시만 해도 동해안에는 강릉경찰서 유치장을 대용교도소로 쓰고 있었다. 강릉관내를 비롯하여 고성, 속초, 양양, 삼척 등 강원 동부지역에서 모아진 300여 명의 죄수를 수감하고 있었는데, 수용자 수로 보나 수형자의 유형으로 보나 일반교도소와 다름없었다.

  수용자 계층도 기결수, 미결수, 소년수, 여수(女囚) 등 다양한 데다 공소 이전의 피의자와 심지어 경범까지 두루치기로 모듬해 놓아서 유치장도 아니고 교도소도 아닌 좀 애매한 곳이었다. 죄명 또한 시시한 절도나 폭행부터 살인, 강도, 강간, 방화 등 강력범에다 공갈, 사기, 횡령 등 얌체범, 세금을 포탈한 경제사범, 집총을 거부한 병역사범, 태백계곡을 파먹은 산림범, 심지어 사상범과 무장공비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그리고 미결수는 물론 웬만한 기결수도 거기서 형을 마치기 일쑤였다. 서울, 춘천 등지로 죄수들을 압송하려면 새벽부터 온종일 비포장길을 달려야 되기 때문에 죄수들을 그냥 유치해 두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밤이었다. 수사계 사무실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데 사무실에 붙어 있는 유치장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달려가 보니 20대 초반의 죄수가 철책에 제 이마를 짓찧고 있었다. 엽기살인범이었다. 수갑을 채워 사무실에 데려다 놓고 매질한 다음 마음을 눙쳐주자 그는 눈물을 쏟으며 가슴속을 털어놓았다. 나중에 서울 출장길에 그를 압송하게 되었는데 평창에서 화장실 용무를 볼 때던가, 잠시 수갑을 풀고 편의를 봐주었지만 엽기살인범인데도 도주하지 않고 돌아와 다시 손목을 내밀었다. 나는 그를 덥석 껴안아주었다. 


유치장 근무를 시작하고 1년쯤 지나자 더 한가한 곳에서 독서와 습작에 빠지고 싶어 진리 포구 임검소 근무를 자원했다. 혼자 근무하니 자유로운 데다 통금시간이 끝나갈 무렵 출항카드에 도장 찍는 일 말고는 권총 차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청와대 습격사건이 터지고 예비군이 창설되자 예비군 훈련, 야간 감시근무 등 해안 경비업무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직원도 증원되고 나는 분대장 업무를 맡게 되었다. 하필이면 진리 포구가 표준방위촌으로 선정되는 바람에 무기고가 생기고 해안봉쇄가 강화되었다. 그리고 울진? 삼척 공비침투사건의 중심지에 서게 되었다.

  그때 생포되어 온 무장공비가 또 나를 감동시켰다. 추운 겨울 밤 혼자 밥을 훔쳐먹으러 산속 초가에 들어간 공비는 자수논리와 체포논리에 뒤엉킨 탓으로 재판에 계류되었다.

  눈보라치는 밤에 포위망을 뚫고 북상하던 공비는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외딴 민가에 찾아들었다. 솥에는 밥이 한 그릇 들어 있었다. 따스한 아궁이 앞에서 밥을 먹은 공비는 몸이 지친데다 식곤증까지 겹쳐 제자리에 앉아 졸고 말았다. 이튿날 먼동이 틀 무렵 집 주인에게 들키지만 비몽사몽 중인 공비는 권총을 빼내어 쏘지 않고 그냥 내준다. 분명 자수였다.

  하지만 재판 중에 다른 사실이 폭로된다. 밥이 반 그릇은 보자기에 싸인 채 부뚜막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산에 남은 동료를 생각한, 다시 말해  재입산이 증명된 셈이었다. 그건 자수와 상반되는 체포논리를 성립시켰다. 나는 독방에 갇힌 그를 종종 찾아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는데, 어느 날 밤 그는 입산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내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만약 내가 검찰이나 재판정에서 이실직고했더라면 중형을 당할 일이었지만 나는 끝내 비밀을 지켜주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쓴 것이 현대문학 등단작품인 단편 <은장도>이고, 그 단편을 확대시킨 작품이 2003년에 중앙M&B에서 출간한 장편 <칼날과 햇살>이다.


  시국도 잠잠해지고, 습작에 몰두할 무렵 이웃 주문진항 임검소에서 큰 사건이 터졌다. 남파선을 타고 온 무장공비 5명이 임검소를 습격한 것이다. 그들은 국군복장으로 위장 침투했는데 그때 나와 강릉에서 함께 근무했던 염 경장이 칼에 맞아 죽었다. 요행이 결박당했던 사환 애가 탈출하는 바람에 금방 예비군이 소집되고, 고무보트로 탈출하려던 공비들은 모두 예비군의 총에 맞아 익사했다.

  주문진사건이 터지고 몇 달이 지난 뒤에 나는 군사분계선에 가까운 거진항 임검소장으로 발령이 났다. 겨울철이라 항구는 전국에서 몰려든 명태잡이 어선으로 북적거렸는데, 바다에서 군사분계선을 잘못 넘어 북한 경비정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배도 더러 있었다.

  귀환선이 입항할 때면 부두는 사람들이 백절을 쳤다. 귀환어부들 중에는 장난인지 참말인지는 몰라도 “북한에서 소장님 안부를 묻던데요.” 하고 내게 말을 걸며 북한제 담배를 빼주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나는 강릉경찰서에 처음 부임해서 유치장에 귀환어부들이 갇혀 있는 걸 보고 당황한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처럼 귀순자 환영은 못해줄망정 왜 유치장에 가두나 했는데, 북한에 끌려가 환대를 받고 돌아오니 사상이 달라진다고 했다. 겨울바람만큼이나 쌀쌀한 시대였다.


  하지만 읍내 길거리는 늘 술취한 어민들로 소란했다. 그들은 어한기인 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봄에는 데구리배(저인망어선)로 잡어를 훑으면 되었다. 그런데 그 해 봄부터는 어족 보호를 위해 당국의 시책으로 불법어로를 강력히 단속했다. 겨우내 명태가 산더미처럼 쌓였던 어판장은 먼지만 풀풀 날렸다. 빈 바구니를 든 아낙들이 출항을 애타게 기다리며 내 눈치만 살폈다. 직원들에게 출항지시만 내리면 될 텐데 어째서 애를 태우냐는 표정이었다. 지역 유지들이 매수하려고 접근해왔다. 삼척 등 다른 지역에서도 데구릿배를 출항시키는 바람에 방송에서 시끄러웠다.

  지역 유지들은 청와대에 진정서를 내고 국회를 찾아다녔지만 별 대책이 없었다. 아무리 처지가 딱해도 불법을 조장할 수는 없었다. 날짜가 지날수록 인심이 흉흉해졌다. 영세어민들은 일거리가 없어 배곯을 지경이었다. 메마른 어판장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아낙들의 얼굴에는 점점 그늘이 짙어졌다. 그 참담한 모습이 내 마음을 괴롭혔다. 그들의 풀어진 눈동자에서 보리쌀을 꾸러 다니던 어머니의 퀭한 모습을 읽었다. 나는 다만 며칠간이라도 출항시켜줄 궁리를 했다. 문책을 당해봤자 징계밖에 더 먹겠는가. 징계의 대가로 잠시나마 저들의 주름살이 펴진다면 두려울 게 없다는 묘한 용기가 솟아났다.        

  출항카드에 도장을 찍으라고 명령했다. 결과는 뻔했다. 며칠이 지나자 강릉 본대에서 급전이 날아왔다. 나는 당장 한가한 남해임검소로 쫓겨났다. 그곳에서 징계 날자만 기다리는데 갑자기 출동하라는 무전이 왔다. 북평 쪽에 무장공비가 출몰했다는 것이다.

  한 달간 산 속에서 작전하고 온 공로로 가벼운 징계를 먹었다. 감봉 1개월이었다. 그 대신 북쪽 오지에 있는 양구경찰서로 쫓겨났다. 거기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공무원으로 임용된 그녀에게 신원조회가 나왔는데 다른 직원의 소관인 것을 술 한잔 사주기로 하고 내가 맡았던 것이다. 결국 술값 500원을 주고 처녀 하나를 산 셈이었다.


  다시 서울경찰청으로 돌아와 정보형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연일 벌어지는 서울대학생 데모 현장에서 채증반원으로 활동했다. 증거를 확보하는 채증은 중요한 정보업무였다. 서울대 출입이 거의 일과가 되다시피했다. 정부에서도 학생 데모는 가장 신경써지는 사건이었다. 나는 서울대생들과 어울려 석굴암에서 막걸리를 마시곤 했는데 참으로 낭만 어린 시절이었다. 정보형사와 학생들이 술을 마시며 데모에 대해 논의할 정도의 낭만. 하지만 길거리에서는 돌을 던지고 최루탄이 불을 뿜곤 했다.

  데모 말고는 매일 사람을 만나는 게 일과였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지도층 인사를 만나야 했다. 그 중에서도 나는 교육계의 인사를 만나는 일이 즐거웠다. 문학과 다른 학문 등 지식 분야에 대해 뭐든 배우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마침 이희승 선생님이 서울대에 재직 중이어서 자주 만났다. 어느 날은 이화동 다방에서 7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분 역시 나와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 내 업무가 생소했던 모양이다. 대화는 주로 국어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전일사상(全一思想)과 국어의 유한성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는데 그분은 한글의 영원성을 말한 걸로 기억된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동해안 생활이 가장 그립다. 동해안은 내 소설의 산실인 셈이다. 수사계 빈 사무실에서 밤새 책을 읽고 습작하던 유치장 근무, 그리고 파도소리에 묻혀 사색에 빠져 지내던 임검소 근무는 내가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해준 셈이었다.

  긴장된 공안업무를 수행하면서도 밤을 새우며 철학서적을 읽던 그 시절은 내 생의 황금기였다. 그곳에서 나는 영원히 살 수 있는 내 나름의 종교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나는 신(神)이 되고 싶었다.

 

  서울에서 근무하다 보니 또 소설과 멀어졌다. 엄혹한 군대생활 중에도 책은 읽을 수 있었지만 경찰업무는 책임이 따르기에 소홀할 수가 없었다. 한 달에 집에 들어가는 날이 몇 밤밖에 되지 않았다. 갈등이 컸다. 징계를 먹었으니 승진도 힘들 것이었다. 선거와 데모 문제로 평생을 보내야 할 판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 이듬해 드디어 사표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사표수리가 되지 않았다. 마음을 돌리라는 상사의 애정이 고마웠다. 정보과장은 당장 사표를 거두라고 노발대발했다. 눈물이 날만큼 고마웠다.

  나는 사표가 수리도 되기 전에 신분증, 권총, 수갑을 반납하고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옛날에 나를 돌봐준 공군 동기생이 자동차 서비스업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밀수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나는 광택 도장 등 서비스 기술을 익히며 종업원 관리에만 힘썼다. 하지만 함께 지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부산생활 1년만에 짐을 싸서 낯선 대구로 떠났다.


  대구 명덕로터리 부근에 부지를 마련하여 포장을 치고 자동차 서비스업을 시작했다. 국산 자동차는 아직 조립단계여서 외제차나 헌차를 수리해 쓰는 경우가 많아서 서비스업으로서는 황금기인 셈이었다.

  성실과 신용으로 서비스를 하다 보니 금방 소문이 퍼졌다. 차가 밀렸다. 도꼬이(단골)가 불어났다. 도청, 시청, 영남대 등 관공서와 대학교, 큰 사업체, 심지어 미군부대 차까지 줄을 섰다. 대구 돈 다 긁는다는 농담이 나돌 정도였다. 중동전쟁이 터져 유류파동이 일자 서비스업에 불황이 닥쳤지만 우리 업소는 번창하기만 했다. 하도 일에 열중하다 보니 내 모습이 꼭 거지꼴이었다.

  한번은 거래처 사장을 만나러 공장 옆에 있는 다방에 들렀다가 신참 마담한테 수모를 당한 적이 있다. 그녀는 단골업체 사장인 나를 거지로 알고 나가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나중에 주인이 찾아와 간곡히 사과했지만 그만큼 몸을 가꿀 틈이 없었다. 그런데 그처럼 잘되던 공장에 불이 났다. 잿더미만 남게 되었다. 공장에 주차한 남의 승용차를 여러 대 태웠던 것이다. 불에 탄 승용차 중에는 고급 외제차도 끼어 있어 피해가 더 컸다.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서울로 떠났다. 막막했다. 아끼던 세간붙이와 심지어 책까지 팔아서 월세방을 얻고 새살림을 시작했다. 그 바람에 지금 내 책장에는 옛날 책이 한 권도 없다. 다시 밑바닥생활이 시작되었다. 공사판 인부, 리어카 배추장사, 길거리 포장마차를 전전하다가 손바닥만한 가게를 얻어 밥장사를 시작했다. 잘될 리가 없었다. 요식업 성공은 경험 없이는 불가능했다.

  10년 동안 고생한 끝에 노하우를 살려 구로공단 5거리에 보쌈 ? 막국수 전문집인 <춘천옥>을 차렸다. 서울에서 청계천 한군데 말고는 보쌈집이 우리집밖에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매상이 상승곡선을 그었다. 기적이었다. 여의도 영등포 시흥 등 인근 지역은 물론 인천 수원 안양 등 수도권 멀리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다. 전국에서 체인점을 시켜달라는 청탁이 쇄도했다. 부산 대전 광주 제주도 등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에서도 연락이 오고, 설계 중인 잠실 롯데월드에서도 청탁이 왔다.

  체인점 문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빈번했다. 나는 체인 사업만 하면 큰 기업으로 성장할 걸 뻔히 알면서도 사업을 포기하고 소설을 택했다. 


  드디어 소설에만 매달릴 수 있게 되었다. 열심히 파고들었다. <현대문학>으로 등단도 했다.

  내가 처음 발표한 작품은 단편 <그리고 말씀하시길>이다. 그 작품은 한 걸인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구걸 행각을 벌이는 장면을 썼는데 발표 당시 칭찬이 자자했다.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문체말고도 주제 면에서도 정치폭력이나 이데올로기폭력으로 확대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강하다는 평을 받았다.

  나는 지금도 그 당시의 황홀한 추억 한 토막을 잊을 수 없다. 어느 지방 도시에서 문학행사가 열렸을 때였다. 거기에는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 시인, 평론가 열댓 명이 초청되었다. 그들은 밤에 따로 술집에 초대되었고,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얼근히 취한 상태로 호텔에 돌아왔다. 나는 감히 그들 축에 낄 수 없어 학생들과 로비에 남아 있었는데, 맨 먼저 로비에 들어선 유명 평론가인 K교수가 나를 보고 말했다.

  “오늘은 당신 날이었소. 술자리에서 당신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였어.”

  나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단편 하나를 발표했을 뿐인데 칭찬이 자자하다니. 그때 L시인이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이제 당신은 쓸 일만 남았어. 쟁쟁한 작가 평론가들이 그처럼 이구동성으로 격찬하긴 처음이오.”


  첫 소설집 <늰 내 각시더>가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자 정말 문단이 시끄러웠다. 작품 좋다는 칭찬이 쇄도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방송 신문 잡지 등 여기저기에서 인터뷰 요청이 줄을 이었다. 평론도 여러 군데 실렸다. 술자리마다에서 내 이야기가 안주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요즘 50년 넘게 써온 일기를 컴퓨터로 정리하는 중인데, 90년대 초반에는 며칠이 멀다하고 내 작품에 대한 평가와 소문이 기록되어 있다. 1993년도에는 ‘김용만의 해’ 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적혀있기도 했다.

  어느 선배 작가는 100여 명이 모인 세미나장에서 내 손목을 끌어올리며 “이 사람이 <늰 내 각시더>의 작가야.” 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어느 유명 작가는 술좌석에서 “이 사람이 10년 내로 나를 잡아먹을 거야.”라고 칭찬했고, 한국의 대표 시인중 하나인 H교수는 술자리에서 “김용만이가 누구야? 그렇게 소설을 잘 쓴다며?” 하고 떠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기도 했다. 또 어느 작가는 ‘아침에 일어나니 유명인이 되었다’는 어느 음악가의 경우를 빗대어 격려하기도 하고, 어느 원로 작가는 제자들이 수십 명 모인 자리에서 내 소설집에 대해 이야기 하며 중요한 작품도 있으니 읽어보라고 권했다는 말도 들었다. 어느 대학교에서는 <그리고 말씀하시길>이 단편구성 텍스트로 활용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내 작품에 대한 에피소드는 끝이 없다. 내가 듣지 못한 숨은 이야기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원고 청탁도 밀렸다. 사실 그때 나는 청탁에 일일이 응할 수가 없었다. 당시 권위지였던 H문학 같은 데서는 “작품을 그렇게 안주면 앞으론 청탁 안 할 거에요.” 하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첫 창작집 출간 한번으로 엄청난 평에 휩싸였던 늦깎이 작가. 그 때문인진 몰라도 나는 건방지게 웬만한 문학상은 거절했다. 상을 타라는 청탁을 받은 것만 해도 세네 가지나 된다. 그 중에는 요즘 한창 알아주는 상도 있다. 지금의 나로서는 죽을 때까지 못 받을 상이다. 거절한 게 정말 후회스럽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어이가 없다. 아마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한두 가지 상 아니면 안 받겠다는 오만이 꿈틀거렸던 모양이다. 요즘은 자기가 상을 만들어서 타버리는 유치한 짓도 한다지만 그때만 해도 순결하고 권위 있는 상들이었다. 아무튼 지금 내 약력에는 수상 경력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그처럼 글 좋다고 소문난 내가 왜 자리매김이 제대로 안되었을까?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대학원에 다닌 게 화근이었다. 젊은 학생들과 어울리다 보니 내 의식과 정서가 흔들렸다. 어느 신문 보도처럼 “얻은 것은 학력이요 잃은 것은 문체”였다. 한국의 지성지를 대표하는 M사 같은 데서는 내게 소설집 출간을 권유했다가도, 왜 <늰 내 가시더> 같은 작품이 아니냐며 출간을 미루기도 했다.

  나중에 그때의 작품을 다시 읽어 보니 닭살이 돋을 만큼 작품이 형편없다는 걸 깨달았다. 창피스러웠다. 늦깎이도 큰 약점인데 거기에다 학교 때문에 시행착오까지 겪어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치명타를 준 것은 인터넷 문화의 대중화였다. 인터넷 시대가 일이십 년만 늦게 도래했어도 내 입지는 달라졌을 것이다. 깊이 묻혀버린 우리의 어휘를 갈고닦아서 빛낸 ‘독특한 토속문체’라고 칭송이 자자했지만 요즘에는 누가 그런 문장에 익숙하겠는가. 인터넷은 국어사전을 베고 잤던 내 피나는 수고를 무력화시켰다. 나는 읽기 쉬운 문장을 새로 개발해야 했다. <칼날과 햇살>이 출간 되어 기자회견이 열렸을 때 어느 기자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이삼 년 안에 쓰고 싶은 걸 모두 토해버리세요. 앞으론 그런 글을 읽을 독자가 없을 겁니다. 중학생도 학년에 따라 세대차이가 나는 시대잖아요.”

  충정 어린 말이었다. 그는 내 작품에 대해 가장 큰 애정을 갖고 문화면 한 장을 칭찬으로 채웠던 기자였다. 하루가 달라지는 시대의 격변을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는 충고였다. 어느 작가는 이 시대의 인간형을 신인류라고 정의했다지만 천지개벽에 비유될만한, 예측불허의 시대가 아닌가.

  물론 적령기에 등단하여 자리매김이 된 작가는 고유한 문체가 오히려 이름을 빛내주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자리매김이 덜 된 상태에서 인터넷 문화가 홍수처럼 밀려오는 바람에,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언어 편의주의 사조는 내 독특하다고 소문난 토속문체를 그전처럼 평가하지 않았다.


  이유야 어떻든, 모든 건 내 잘못이다.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내 소신 없는 시도 탓이다. 또 문단의 생리를 모르고 내 소신만 믿어온 늦깎이의 허점도 나를 추락시키는 데에 한몫했다. 나는 너무 원시적이었다.

  이제 초심으로 돌아갈 각오다. 책상에 머리를 박고 죽는 게 내겐 가장 우월한 행복이다. 나는 죽어서도 소설에 매달릴 것이다. 나 같은 벙어리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을 말이 하나 있긴 하다.

  “제발 소설가는 소설만 쓰도록 하자! 모든 문인은 글만 쓰도록 하자!”

  요즘은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인이 책상에 앉아있는 게 손해 보는 삶처럼 여겨지다니, 글만 쓰는 진정한 문인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문단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내 젊은 시절의 일기장 제목은 <체험창조體驗創造>였다. 체험과 창조의 두 관계항을 놓고 볼 때 전자가 우연적 삶이라면 후자는 필연적 삶이랄 수 있겠다. 하지만 체험이라고 하는 인생의 더께가 낀 단어를 고교시절부터 즐겨 써온 걸로 보아 그 우연적 삶 역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세상을 살수밖에 없는 어떤 운명적 조화 탓이리라 여겨져 소름이 끼치곤 한다.

  이제 창조란 단어에 대해 말할 차례가 되었다. 창조는 나한테 가슴 설레게 하는 언어이다. 창조란 단어는 체험이란 단어를 알기 이전부터 좋아했다. 創과 造는 획에 있어서도 붓으로 쓰기에 무척 매끄럽다. 創자와 造자를 쓸 때는 정갈한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한테는 창조란 단어가 파괴(破壞)란 단어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 더욱 호감이 간다. 그 이질적인 두 단어의 동일시현상은 늘 나를 긴장시킨다.


  도대체 나는 어떤 인간일까? 왜 소설가가 되었나?

  나는 신이 되고 싶었다. 내 나름의 종교를 만들고 싶어 소설을 택했다. 그래서 문학을 일반종교보다 높은 위상에 놓고 살아왔다. 소설창작을 신의 창조행위로 여겨왔다. 솔직히 나는 일반종교를 갖지 못하고 있다. '유한성의 한계'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진작 종교를 갖고 싶었지만 종교를 갖는 순간 내 문학정신이 규범화되어 굳어질까 두려웠다. 요컨대 내가 종교에 갇히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만들고 싶어한 내 종교는 일반종교가 아닌 다른 무엇일 것이다. 기존의 모든 종교까지를 아우르며 새로 창조하고 세워나가야 할 종교..... 새로운 교리,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물, 새로운 세계, 그게 내 소설이 되어야 한다. 아직 써야할 것은 많고 작가로서 가야할 길도 멀다.


경기일보

[언제나 청춘] 1. 김용만 소설가 (75)


지난한 삶은 예정된 것처럼 그의 소설에 귀한 재료가 됐다. 마흔 아홉 살에 1989년 ‘현대문학’에 단편 <은장도> 로 등단, 이듬해 ‘한길문학’에 발표한 단편 <그리고 말씀하시길> 로 평단과 문인 사이에서 화제의 늦깎이 소설가로 떠올랐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은 한 걸인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구걸 행각을 벌이는 장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당시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독특한 문체에 이데올로기 폭력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는 상징성 뛰어난 작품으로 호평받았다. 53세가 되어서야 첫 소설집 <뉜 내 각시더(실천문학사 刊)> 를 출간, 인터뷰 요청과 원고 청탁이 밀려들었다.




** [반갑습니다] - "김용만 작가" 편 | 초대석 | 전주MBC 230805 방송



충남시대뉴스

연재소설 

[인기작가 잔아(김용만)의 장편소설] 제 1회 아내 찾아 90000리

  • 기자명
  •  김정란 기자
  •  
  •  승인 2022.06.09 00:13

  • 서곡(序曲)

    그자가 수니 말고도 다른 여자를 상대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수니 같은 여자와 살면서 그따위 짓을 해? 사내라면 누구나 침 흘리게 마련인 수니가 평생 그런 놈과 살았다는 게 참 이상해. 더구나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다면서? 남들이 다 하는 결혼식인데 왜 쓸데없이 그런 짓을 하냐고 고집을 부렸대.

    출처 : 
    https://www.icnsd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9861







    명주실로 우주의 폭을 잰 불목하니 / 김용만

    • 기자명 김용만 
    •  
    •  입력 2016.09.10 11:24
    •  

    내가 공군에서 의가사제대하고 공주 마곡사 은적암으로 아버지를 찾아간 것은 여름날 해 질 녘이었다. 가파른 산언덕을 걸어올라 암자에 도착하니 바깥마당을 비질하던 여승이 환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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