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머 B. 헐버트 지음 | 옥성득 옮김 | 푸른역사 | 776쪽 | 4만5000원
고종이 대원군보다 더 대담했다... 결과는 나빴지만
이하응이 아들을 왕으로 만든 것은, 아니 아들을 왕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왕위계승순위에서 아들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자신이 직접 왕이 되려 했을 것이다.
아들을 두지 못한 철종이 사망했을 당시, 철종에게는 7촌 조카들이 있었다. 흥선군의 아들과 조카들이 이에 해당했다. 흥선군은 철종의 6촌 형제였기 때문에, 철종의 7촌 조카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선왕의 후계자는 선왕보다 아래 항렬에서 뽑는 게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흥선군이 아들을 왕으로 민 것은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54296
** [역사저널 그날] 역적의 손자가 왕이 된 기막힌 이야기 (KBS_1998.05.19.방송)
** [kbs 역사스페셜] 7회 고종황제 독살설 2009.08.15 토
이홍장을 배신한 묄렌도르프의 조-러 접근책
1882년 조선으로 하여금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토록 했던 이홍장은 그해 12월 조선에 묄렌도르프를 파견했다. 당시 청나라는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 경계선을 넘어 두만강까지 남진한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이 청나라와 친밀한 동시에 일본과 결속하고, 미국과도 연대해야 한다는 조선 책략을 갖고 있었다. 이홍장은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마건충을 보내 미국과의 조약문 작성을 도왔다.
헐버트 회고록
호머 B. 헐버트 지음 | 옥성득 옮김 | 푸른역사 | 776쪽 | 4만5000원
“서재필과 같은 인물들의 활동은 여전히 용인됐으나, 국왕과 고위 관료들은 그들의 유익한 조언에 짜증을 냈다. 이는 우체국이 독립신문의 배송을 거부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호머 B. 헐버트가 기록한 1898년 대한제국의 상황 중 일부다.
출처 : https://www.chosun.com/culture-life/book/2026/09/05/DZ7MMQZZ7BF7ZHXDIPPJNM7DXA/
호머 B. 헐버트 지음 | 옥성득 옮김 | 푸른역사 | 776쪽 | 4만5000원
그런데 임오군란 군인들이 저런 말을 한 장소는 흥선대원군이 사는 운현궁이다. 대원군은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며 자기 집에 유폐된 상태였다. 대원군을 만난 군인들이 이렇게 덧붙인다. “대감은 전혀 걱정마소서. 새 세상을 만들어 대감과 함께 태평을 누리겠나이다(大監勿慮勿慮 作新世上然後 與大監共太平).” 대원군은 이들을 격려했고, 군인들은 궁궐과 한성에 사는 민씨들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100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는 '고종 독살' 괴담[박종인의 '흔적']
[아무튼, 주말] 기록에 나와 있는 고종 사망의 진실은
괴담1 숙직한 이완용이 독살 지휘?
거짓말이다. 덕수궁과 창덕궁 당직실에서 작성한 ‘찬시실일기’에 기록된 당직자는 ‘자작 이완용’과 ‘자작 이기용’이다. 그런데 이 ‘자작 이완용(李完鎔)’은 우리가 아는 후작 이완용(李完用)이 아니다. 한자 이름이 다른 동명이인이다.
그런데 재야사학자 이덕일씨는 중앙일보 기고문은 물론 단행본에 ‘숙직시킨 인물들이 자작 이완용과 이기용(李埼鎔)’이라며 이완용의 한자 이름을 은폐했다(이덕일, ‘조선 왕을 말하다’2, 역사의 아침, 2010, p463). 이완용은 영친왕 결혼식 참석을 위해 일본에 있었다.
출처 :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4/07/06/N22Z3BT3INB67EB2QPOJGVVZN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