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여성조선 시·에세이 문학상

2009년 뜨거운 성원 속에 시작된 ‘여성조선 시·에세이 문학상’이 올해로 2회를 맞았다. 지난해 제1회 문학상에서는 대학원생, 주부, 교사 등 문학을 사랑하는 다양한 독자들이 참여해 삶에 대한 ‘진정이 담긴 통찰’을 보여줬다. 올해 역시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뜨거운 열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이 시 외에 올해는 에세이 부문을 추가해 더욱 다양한 작품들이 <여성조선> 편집부로 도착했다. 시 105편, 에세이 85편의 주옥같은 작품들 중 네 편의 시와 세 편의 수필을 정성스레 선정했다.


글쓰기야말로 우리 삶의 소박한 축복
제2회 ‘여성조선 문학상’ 심사를 마치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올봄처럼 딱 들어맞는 해도 드물 것이다.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5월에도 눈이 내리고 돌풍이 들이닥치기도 했으니, 꽃들은 순서를 잃고 사람들은 옷의 순서를 잃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여성조선> 주최의 문학상 공모가 2회를 맞이했다. 올해에는 에세이까지 포함해 더욱 큰 잔치마당이 펼쳐졌다. 무엇보다 응모자들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은 바 크리라. 앞으로도 더욱 풍성하고 내실 있는 문학 잔치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제2회 여성조선 문학상>에는 시(105편)와 에세이(85편) 부문에서 모두 7편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신산하면서도 때로 아름답기도 한 우리 삶, 특히 여성들의 삶의 돌올한 무늬를 읽어내는 일은 심사하는 내내 벅차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우열을 가름하며 읽어야 하는 일이기에 고통스럽기도 했다.
식사(준비)를 하며 화장을 하며 길을 걸으며, 신문(텔레비전, 책)을 보며 식구들을 기다리며(방문하며) 그리고 자연과 함께 하는 곳에서 글은 씌여졌다. 부모님, 이성 혹은 남편, 학교생활이나 취업이나 군대 및 결혼을 겪는 자녀, 친구(동료) 들과의 관계 속에서 얻게 되는 삶에 대한 성찰 속에서 글은 분출되었다. 글이 탄생하는 시간과 공간이 우리 삶과 너무 가까운 것이고 가깝기에 때로 홀대하기 쉬운, 소중한 것임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었다. 특히 시의적인 문제로는 탈북이나 천안함 사태, 우리 사회에서 날로 문제화되는 노인 문제, 이혼 문제, 장애우 문제 등도 눈에 띄었다. 수필 분야가 새롭게 공모된 덕분일 것이다.
시와 수필 부문을 합해 심사위원이 각각 추천한 16분의 작품들이 본심에 올랐다. 일상에 대한 따뜻한 관찰과 묘사가 주를 이루었으며, 일상의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모두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성조선 문학상’의 더 높은 위상을 위해 조언하자면, 시 부문 경우에는 개성의 새로움과 깊이가 아쉬웠으며 수필 부문에서는 의미 있는 서사(묘사) 구조와 좀 더 치열한 산문 정신 혹은 현실을 향한 문제의식이 아쉬웠음을 밝혀둔다.
16분의 작품을 꼼꼼히 재독한 후의 심사 결과는 쉽게 일치했다. 수상자들은 다음과 같다.

대상 이향숙의 <감자박스를 보낸다>(시)
우수상 박희원의 <고등어 굽는 저녁>(시) / 김호정의 <화장하는 여자>(수필)
가작 이춘영의 <연(鳶이 울다>(시), 노정남의 <허공의 탄생>(시),  이한나의 <민들레>(수필), 조현숙의 <잠> (수필)

가작을 수상한 이춘영의 <연(鳶이 울다>(시)는 추위와 바람 속에서도 비상의 희망을 잃지 않는 연(鳶)의 꿈을 우리 삶의 꿈과 잘 연결시키고 있으며, 노정남의 <허공의 탄생>(시)은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허공의 의미를 나비의 날개 짓과 장미의 입술이라는 시적 상관물을 통해 일깨워주고 있다. 이한나의 <민들레>(수필)는 ‘포공영(浦公英)’이라 불리게 된 민들레의 전설과 오버랩시켜 민들레를 밥상에 올리는 어머니 삶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으며, 조현숙의 <잠>(수필)은 고단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으며 한 생을 사신 어머니의 삶과 또 어머니가 된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풀어내고 있다.
우수상을 수상하게 된 박희원의 <고등어 굽는 저녁>(시)은 고등어가 식탁에 올라 우리들의 배 속으로 들어간 그 이후를 섬세한 시적 관찰과 감각적 묘사를 통해 형상화한 점, 김호정의 <화장하는 여자>(수필)는 모든 여성들이 공감할 만한 ‘화장’의 과정과 그 의미를 우리 삶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 심사위원들의 호감을 샀다. 그리고 이향숙의 <감자박스를 보낸다>(시)을 대상으로 내보낸다. 오래 되어 싹이 난 감자와 늙어가는 세상의 어미들을 연결시켜 생성을 위한 사멸의 의미를 차분하게 성찰하고 있다. 일상과 사물에 대한 성찰을 높이 평가했다.
이 외에도 시 부문에서 안타깝게 수상권에 들지 못했던 김현락의 <들어온다> 외 4편, 이주랑의 <망(網)> 외 4편도 녹록치 않는 시적 경륜이 녹아 있었다. 수필 부문에서도 일상에 대한 소박한 성찰과 서사가 돋보였던 임정희의 <길을 걷다>, 김현진의 <쑥에 관한 동화> 또한 끝까지 논의의 대상이었다. 계속 정진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 확신한다.
수상자에게는 오월의 꽃처럼 환한 축하의 마음을 전하고, 응모자 모두에게는 다음 해를 기약하는 오월 초록의 마음을 전한다. 수상과 무관하게 이런 기회가 있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쓰면서 성찰하고, 쓰면서 반성하고, 쓰면서 화해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런 글쓰기야말로 우리 삶의 소박한 축복이기도 할 것이다.

| 시 부문 |

 

대상

감자박스를 보낸다
이향숙

뿌리를 키우는 일이 단순한 욕망이 아님을
베란다 종이 박스 안
감자는 이미 알고 있었지
제 몸 쪼그라드는 줄 이미 알고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으니
뿌리를 키우는 일이 단순한 인연이 아님을
마른 젖무덤을 택배로 대신한
어미들은 이미 알고 있었지
사는 일이란 굳이
자기를 먹여 뿌리를 키우는 일.
제 몸 어딘가로부터
간지럼처럼 돌아 난 입술들이
어그적 어그적 거칠어지는 동안
온몸을 쪼글쪼글 비틀어서까지
마지막까지 비워진 영혼들은
날카로운 뿌리 끝조차 애틋이 쓰다듬고
철없는 뿌리는 어느새
조랑조랑 새로운 열매를 잉태하니
뿌리를 키우는 일이 단순한 인연이 아님을
이미 한 세상이 알고 있어
감자는, 오늘도
박스 안에서 기껍게 시름시름 앓고
세상의 모든 어미들은 비워 낸 제몸 뿌리 끝을 찾아
도시로 도시로
감자 박스를 보내지

우수상

고등어 굽는 저녁
박희원

빗방울 소리가 나뭇잎을 갉아먹는 저녁
오늘도 그녀는 등 푸른 고등어를 굽는다
차고 깊은 곳에서 자란 고등어에선 파도냄새가 난다
더러는 붉은 꽃잎 같은 아가미에서 해초냄새도 난다

그녀는 시장에 가기 전에
지루한 평화만큼이나 긴 낮잠을 자고
골목에서 장미꽃이 피어날 때,
반들반들하게 온몸의 때를 밀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고등어를 저녁 밥상에 올린다
창밖에는 빗줄기가 국지성으로 굵어지고
후라이팬 위의 자반고등어가 타닥타닥 익어간다
그때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식탁에 앉아
코를 벌름거리며 파도의 살점을 뜯어 먹는다
갯비린내가 흘러나오는 저녁이다
아, 얼마나 향긋하고 슴슴한 음식인가
나는 감기몸살을 앓고 있었고
기운이 없었지만
고등어의 갈비뼈가 보일 때까지
저녁식탁을 지키고 있었다
내 뱃속에서 고등어가 헤엄치고 있을 것이다

가작

연(鳶)이 울다
이춘영

내몰아 치고 휘휘 감고
돌아서서 끝내 내팽개치고 마는
그 매정함에 나는 울고 말았다
매캐한 목메임에 울컥이고
시려오는 눈아림도 끝날 줄 모른다
그냥 자리에서 뱅뱅 돌고만 있다
불어오는 바람을 잡고
내달려 보지만 칭칭 죄어져
오는 목은 숨이 가쁘다
한바탕 실갱이 끝에
또르르 풀려 버리는 실오라기들을
붙잡지 못해 속울음이 터졌다
아마도 벗어나지 못하리라
다만 오롯하게 떠오르는
푸른 기억 속으로 팔랑 팔랑
꼬리를 흔들어 볼 뿐이다

속살 깊이 차가운 빗방울이
파고든다
이어 붙인 대쪽살이 쩍쩍
갈라지고 툭툭 소리내며 끊어져도
그냥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소원 담아 하늘 높이
날아 오른 나는
그냥 달려 있다

허공의 탄생
노정남

5월의 장미원에 나비 한 마리 날고 있다
데칼코마니로 찍힌 무지개날개 팔랑팔랑 장미꽃밭 넘나든다
우화 거듭하며 날개를 탄생시킨 나비는, 무지개를 내 건다
허공을 탄생시킨다
날개 밑에 조각별처럼 끌고 다니는 작은 그늘 아래 장미가 입술을 벌린다
나비도 장미도 무한 허공을 즐기는 것이다
달뜬 몸을 던져 봄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 수필 부문 |

우수상

화장하는 여자
김호정

화장을 하려고 거울 앞에 앉았다. 유난히 자외선에 민감한 피부인지라 불혹을 넘기는 세월 동안 내 얼굴에도 못 보던 잡티들이 많이 생겼다. 여름 햇살의 따갑고 강한 자외선이 남긴 흔적들이다. 선크림, 파운데이션…. 열심히 바르고 두드려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한 번 생긴 주름살이나 잡티들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마치 바람처럼 지나가는 세월의 흔적이 되어 어떤 모양으로든 그대로 남는다. 나는 때때로 나이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은 할 일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격려하곤 한다. 할 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리니 그 삶은 결코 외롭거나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화장을 하는 일은 내 삶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마치 내 인생처럼 누군가 대신 해주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내 인생을 살듯 날마다 정성껏 화장을 한다. 그리고 내가 화장을 다 마칠 때까지는 남편도, 아이들도 아무도 방해할 수 없도록 한다. 그 시간은 오직 나만의 사색의 시간이요, 바쁜 일상 속에서 오로지 내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잠시 동안 홀로 만끽할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이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화장을 하면서 늘 생각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화장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산다면 어떨까….
화장을 하는 시간에 대해 나는 언제나 성실하기를 원한다. 곱고 예쁘게 화장을 하려고 온갖 정성을 들이면서 문득문득 화장을 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 수 있기를 다짐한다. 왜냐하면 화장을 하는 시간이 내게는 단지 얼굴만 단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또한 추스르고 가꾸고 다듬는 순간이며, 아름다운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그 순간만큼은 누구든지 가장 아름다운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그 시간에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될 뿐 아니라 미처 생각지 못했던 기분 좋은 아이디어들이 떠올라 여러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일도 있고, 잊고 있었던 중요한 일들이 생각나서 화를 면한 적도 있기다 . 아마도 찡그리고 화를 내면서 화장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만일 있다고 해도 그 화장은 그리 예쁘지 않을 것이다. 화장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때의 심정이 어떤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그렇기에 매일 화장을 하는 사람은 화장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아름답고 고운 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래서 열심히 피부 관리를 하고 화장을 하는 사람들이 건강한 피부를 더 오래도록 지속하며 사는 것은 아마도 그 순간순간 남보다 더 많은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게 되는 한 몫이 있기도 할 것이다.
나는 화장을 하면서 나름대로 배우는 삶의 교훈이 있다.
-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기
- 기초화장처럼 기본에 충실하기
- 피부 관리를 하듯 자신을 사랑하기
- 거울 속의 나를 보듯 타인을 향하여 미소 짓기
- 색조화장처럼 삶을 다양하고 조화롭게 꾸미기
- 화장은 마무리가 중요하듯 맡은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기
- 그리고 매사가 잘 될 것 같은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서기

얼마 전 모 TV프로그램에서 소개한 현대인의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 중에 웃음치료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직면하는 삶의 여러 문제들이 대부분 우리 자신의 마음의 태도와 많이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해를 거듭할수록 날마다 우리들을 더욱 곤고하게 만드는 불신과 분노를 보다 여유로운 긍휼의 눈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누군가 내게 자신은 세상을 이해하는 재미로 산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처럼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이해해보는 것은 어떨까? 화장할 때의 기분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사람들은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화장하는 방법도 달라진다.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눈가의 잔주름을 예방하는 아이크림을 애써 바르는 것이다. 기초화장품에도 달라지는 것이 있다. 유분과 수분의 밸런스를 잘 맞추고 주름 개선이 잘 되는 제품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 점이다. 미백효과까지 있다면 더욱 좋을 일이다. 그리고 색조화장에도 신경이 쓰이긴 마찬가지다. 나이에 맞게 분위기를 연출해줄 수 있는, 경망스럽지 않은 컬러에 자꾸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혹자는 화장하는 것을 매우 경시하는 경우도 있다. 뭘 그렇게 꾸미는가, 자연 그대로 살지, 생긴 그대로 살지, 인생이 연극무대 같아서 너도 분장을 하느냐….
하지만 우리 생긴 그대로가 그리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지 않나…. 모나고 거친 우리의 이기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인생을 조금이나마 다듬어가려는 마음가짐이 화장하는 마음에서도 묻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값지고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의 축적이나 성공이라는 커다란 사건들이 화제의 중심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순간순간 멈추어 서서 그러한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상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소중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더구나 자신의 장점을 돋보이게 하고 단점은 보완하면서 날마다 화장을 하는 여자는 고단한 인생을 슬기롭게 사는 하루하루를 연습하며 사는 것이리라.
사람들은 대부분 늙어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니 적어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나이가 들어가는 세월만을 생각하며 염려하기보다는 그 나이에 합당한 내 모습이 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염려한다.
그러하기에 행여나 내 삶이 품위를 잃고 향방 없이 너무 가벼워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겸허히 거울 앞에 앉아본다.
저 바다 끝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처럼 싱그럽고 힘차게, 정오의 하늘처럼 내 자리를 지키며, 고요하게 넘어가는 석양의 노을빛처럼 아름답고 황홀하게 인생을 그리듯, 맑고 고운 마음으로 화장을 하듯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보리라. 

가작

민들레
이한나

옛날 어느 부잣집에 시집 안 간 딸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가슴에 종양이 있었으나 의원에게 환부를 드러내 보일 수 없어 홀로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던 중, 어머니로부터 외간 남자를 사귀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야단을 듣게 되자 크게 상심한 여자는 물에 몸을 던지고, 때마침 근처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포(浦) 씨 성을 가진 어부와 딸에 의해 구조된다. 젖은 옷을 갈아입히다가 유방의 종양을 발견한 어부의 딸이 산에서 약초를 뜯어와 여자를 낫게 하였는데, 때문에 이 약초를 그 딸의 이름인 포공영(浦公英)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 포공영이 우리 집 밥상에도 올랐다. 삶아내어 된장양념으로 맛깔스럽게 버무려진 풀 잎사귀는 우리에게 ‘민들레’란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민들레를 삶고 난 초록빛 물을 한 컵씩 자식들 앞에 내려놓으시며 어머니는 ‘약이다’라고 마시라며 강권하셨다. 나는 아직 식지 않아 뜨끈한 물에 입술만 대강 적시고는 맛없다며 이내 내려놓았다.
그래도 며칠간 꾸준히 어머니는 민들레 나물과 민들레 삶은 물로 밥상을 차리셨다. 아마도 오빠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아토피를 심하게 앓고 있는 오빠로 인해 한의원, 피부과 할 것 없이 좋다는 병원은 다 찾아다니고, 시중에 음성적으로 나도는 건강보조식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섭렵하신 어머니였다. 그러나 그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오빠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직장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얼굴을 비롯한 환부는 더욱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코끼리처럼 두꺼워진 피부에 생긴 주름은 나날이 목과 얼굴에 진한 음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최근에는 직장동료가 아토피에 좋다는 천연비누를 만들어 선물도 해주었다. 물론 그런 비누도 집에서 이미 쓰고 있었다. 다만 효과가 없을 뿐이었다. 나아지지 않는 치료에 지친 오빠는 회복에의 가망을 버린 지 오래였으나 어머니는 기존에 쓰던 것과는 다른 그 비누에 전보다 더 간절한 기대를 거시는 듯했다. 그리고 타인이 보여준 정성에 자극을 받으셨는지 어머니는 또다시 밥상 위의 주인공을 미나리에서 새로운 것으로 바꾸시며 분발하셨다. 그것이 바로 민들레였다.
휴일인 오늘, 아침을 들며 어머니는 나에게 오후에 산에 함께 가자고 하신다. 꽃 지기 전, 딱 이맘때쯤의 민들레가 약이 된다며, 편도도 잘 붓고 열이 많은 오빠에게 좋을 거라고 하시며, 약효가 더 좋다는 토종민들레가 벌써부터 어머니의 눈에서 하얗고 노랗게 빛나는 듯하다.
나는 어머니의 마음이요 밭인, 밥상에서 그 소산물인 민들레 나물을 한 점 집어 먹는다. 그리고 전에 없이 탐욕스럽게 민들레 물을 들이킨다. 한 모금에 어머니의 땀방울이, 두 모금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내 가슴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것을 느낀다.
앞으로 ‘민들레’ 하면 매정한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포공영의 이야기보다는 내 어머니의 밥상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

가작


조현숙

엄마 집으로 가는 길, 손에 닿을 듯 숲이 가깝다. 햇살이 차창을 찌르는데도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싱싱한 날것의 향기를 그대로 풍긴다. 좋다.
우리는 이 시골에 엄마 혼자 놔두고, 엄마가 좋아서 온 것이니까, 쉽게 잊고 이내 편해졌다. 그래서 조금 찔렸는데 풍광도 공기도 좋아 다행이다.
식구들끼리 모여 밥이나 한 번 먹자더니 정작 엄마는 자고 있다. 갓난아기처럼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나비잠을 잔다. 한밤중도 아닌데 빤히 들여다봐도 모를 만큼 귀잠이 든 엄마는 푸푸, 코까지 골고 있다.
“웬일이야, 울 엄마가?”
“이사하느라 많이 피곤했나보지, 뭐. 그리고 만날 텃밭에서 산다던데.”
“하긴 그 성격 어디 가나. 이삿짐센터에 그냥 맡기면 될 일을 일일이 간섭하고 다니니까 안 피곤해? 밭일도 그래. 언제 해봤다고 땡볕에서 살아?”
우리는 엄마가 이렇게 푹 퍼져 정신없이 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평생에 단잠이란 걸 자보기나 했을까?
엄마는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다. 새벽 꽃시장에서 꽃을 떼다 팔아 우리 사남매를 먹이고 가르쳤고 당신 스스로도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서 꽃꽂이 선생님이 되고 다도 선생님이 되었다. 첫 열차를 타고 서울로, 대전으로 다니면서 강의를 듣고 막차로 내려오는 일을 되풀이 하느라 늘 시간과 돈에 쫓겨 살았다. 꽃집이라는 게 고정 수입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아무리 알뜰히 살아도 늘 부족했다. 무슨 선생님이 되어 수입이 좀 늘만 하면 엄마는 또 다른 무엇을 배우고 있었다. 꿈을 꾸기 위해 잠을 잘 수 없는 엄마, 그래서 우리까지 힘들게 만드는 엄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열망이 없으면 고민도 서러움도 없을 텐데, 나는 하룻밤에도 한 뼘씩 자라는 풀포기처럼 싱싱하고 질긴 엄마의 꿈이 참으로 싫었다.
하지만 엄마의 꿈을, 말 그대로 꿈으로 끝나게 만든 것도 바로 우리 자식들이었다. 애면글면 사는 자식들을 더 두고 볼 수 없던 엄마는 당신의 평생을 토막 내어 우리에게 나눠준 뒤 시골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옛날부터 시골에서 살고 싶었어, 라는 엄마의 한 마디로 우리의 이기심을 쉽게 정당화시켜버렸다.

 

자꾸만 까라지는 엄마를 억지로 깨워서 점심을 먹었다. 밥을 넘기면서도 엄마는 졸다가 긁다가 다시 졸았다. “엄마! 정신 좀 차려봐.” 소리치면 “엉, 그래. 내가 왜 이러지?” 했다가 다시 바닥에 코를 박으며 내내 까라졌다.
“죽으면 끝도 없이 잘 잠, 뭐 하러 자꾸 자?, 하면서 그렇게도 뭐라 하더니만 정말 엄마가 웬일이지?”
딸네들은 옥수수를 맛나게 먹으면서 엄마의 잠을 수다거리로 삼아 떠들어댔다.
“그러게. 난 두벌잠 한 번 자는 게 소원이었다니까.”
“잠을 자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대.”
“그냥 졸리면 자고 피곤하니까 자는 거지, 달리 뭔 이유가 있어?”
“원래 아프면 오래 자잖아. 에너지를 절약해서 우리 몸을 보호하려는 거지.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져버리는 것도 일종의 보호 작용이래.”
“그래, 맞아. 울 엄마도 노인네인데 맘이야 성성하겠지만 이제 몸이 견뎌내지 못하는 거야.”
“풀독 올라 그런 거 아냐? 거기다 벌레한테 물린 데도 많던데.”
“전에 어떤 작가가 쓴 글인데, 자기는 어찌나 잠이 많은지 시댁에 제사를 모시러 갔다가 잠을 못 이겨서 어른들 눈을 피해 책상 밑에 들어가 잤대. 글 보면서 막 웃었는데 나중에 신문에서 그 작가가 무슨 병에 걸려서 고생하다가 죽었다는 기사를 봤어. 그 순간 갑자기 그 글이 떠올랐어. 그렇게 잠이 많았던 게 체질 때문이 아니라 병 때문이었던 게 아닐까….”
갑자기 수다가 끊기고 짧지만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눈이 눌러 붙은 엄마가 “괜찮아. 그냥 날 좀 나둬 봐.” 기운 없이 말했지만 우리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차를 돌리느라 돌아보는 눈 속으로 울타리 넘어 배롱나무 붉은 꽃잎이 확, 들어왔다. 너무 눈이 부셔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큰애한테 전화를 걸었다. 늦을 거라고, 어쩌면 할머니 집에서 자고 갈지도 모른다고 말하는데 대답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힘없이 속살거린다. 아이는 요즘 계속되는 불면증을 호소하고 있다. 한밤중까지 뒤척거리다가 새벽에야 겨우 풋잠을 자고 난 아이의 핏발 선 눈을 볼 때마다 애처롭다.
“제발 마음을 느긋하게 먹어라.”
말하면 아이는 별 말 없이 꾸역꾸역 물 말은 밥을 넘기거나 눈살을 찌푸리곤 했다. 하긴 어떻게 마음을 편히 먹는단 말인가. 원했던 대학에 가지 못한 아이는 내내 가슴앓이를 하더니 한 학년이 끝날 무렵 기여 자퇴를 하고 말았다. 다시 입시 준비를 하는 아이는 절박감 때문인지 걸핏하면 깼다. 인생을 길게 보면 지금 이 시간들이 그리 큰 낭비는 아니라고 위로해주지만 자퇴를 할 때 나와 격렬하게 갈등을 빚었던 일들이 그에게는 더할 수 없는 부담이었을 것이고 그런 마음이 그에게서 잠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잠이 오지 않을까 불안한 아이의 한숨을 닫으며 할 수만 있다면 내 여생의 잠을 뚝 떼어 그를 재우고 싶다.

“특별히 아픈 데는 없어 보입니다.”
피곤이 누적된 것 같다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우리의 장황한 설명에 조금 웃으면서 정이 염려스러우면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 했다.
어쩌면 평생의 피로가 누적된 것인지도 모른다. 늘 여읜잠만 잤던 엄마는 이제 아기처럼 우리에게 온몸을 맡겨놓고 단잠을 잔다. 잠결에도 북북 긁어대면서. 당신의 평생을 내어주고 마음의 정처를 잃었을 엄마. 혼자서 마음 다스리면서 그렇게 늠름하게 웃느라고 진이 빠진 걸까? 새소리도 좋고 매미 소리도 맑고 쩌렁쩌렁한 게 도시에서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텃밭에 있으면 하루가 금방이야. 얼마나 좋은지 몰라. 엄마는 입만 열었다 하면 후렴처럼 읊조렸지만 그것은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이었을 것이다. 오늘은 그 최면조차 잊고 저 무의식의 세계로 가고팠던 것일까?

드디어 엄마가 정신을 좀 차렸다. 해가 뉘엿이 넘어갔는데 그새 꽃밭에 나와 앉아 있다. 맨드라미를 보라고 한다. 손가락만 해서 거기에 있는 줄도 몰랐다. 느린 눈을 끔벅거리다 뭣을 봤는지 꽈리 눈이 되어 잽싸게 뛰는 개구리가 더 먼저 보인다. 입구에 피어 있는 것을 차 드나들다가 다치게 할까봐 이쪽으로 옮겼단다.
“여긴 흙도 촉촉하니까 저 살기에 더 좋을 것 같아 옮겨줬는데 지 맘에는 안 들었을까…. 며칠 뿌리 내린다고 시들시들 몸살을 앓더니만 이제야 생생해졌네. 작은 풀포기도 저 살던 곳에서 옮기면 저리 생 몸살을 앓는가봐. 참 신기하지? 그래도 잘 살아나서 대견스럽다.”
하면서 엄마가 웃는다. 웅숭깊고 뜨거운 속을 가졌는데도 겉이 차가워 딸네들 가슴을 많이도 아리게 했던 엄마. 채워지기도 전에 자꾸만 비워내야만 했던 당신의 삶이 허기졌던 건지도 모른다. 엄마의 살을 파먹고 자라는 자식들은 제가 파먹은 살은 아랑곳없이 엄마의 허기를 탓하기만 했다. 이제야 알겠다. 엄마의 꿈보다 더 질긴 자식들이 엄마의 가슴팍을 쳐대는 밤마다 엄마는 잠들지 못하고 어헝어헝 울고 있었음을.
내 눈 속에서 엄마의 얇은 어깨가 뿌옇게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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