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1916-2001)이라는 혁명투사이며 민족작가로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강철같은 기개로 일관하여 살아온 산 증인이 있다.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일제식민지 치하에 불리워진 <조선의용군 추도가>가 말해주고 있듯이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선생인 것이다. 김학철선생이 걸어온 길과 창작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학철선생은 1916년 11월 4일 북조선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녔으며, 1932년 17세에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포부를 품고 상해림시정부를 찾아 중국으로 들어왔다.
◇1916년 함경남도 원산출생인 김학철선생이 38선 纜을 찾은 모습.
처음 상해에서 민족혁명당 상해특구에서 활동하다가 1933년 남경에서 민족혁명당에 민족혁명당에 입당, 테러리스트들의 집단인 행동대에 편입되어 테러활동에 참가했으며, 1937년 중앙육군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에 입학하여 1년간 학습을 받아 1938년 7월에 졸업했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전신, 대장: 김원봉)에 참가했으며, 1940년 8월 29일 중국공산당(지부서기: 호철명)에 가입해 1940년 가을에는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에 참가해 활동하며 전투에도 참가하는 한편 부대의 수요에 따라 작은 신문도 편집하고 직접 연극 극본도 쓰고 가사도 썼다.
1941년 12월 10일 하북성 호가장전투에서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그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란 판결을 받고 일본으로 압송되어 1943년 4월 29일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 언도를 받기도 했다.
1945년 2월 감옥에서 다리절단수술을 받았는데, 945년 10월 6일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와 공산당에 속하는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위원으로 활동했다.
◇1989년 12월,조정래 대하소설 <太白山脈〉출판기념에 참석한 김학철선생.1945년 2월 감옥에서 다리절단수술을 받아 한쪽 다리를 잃은 모습.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했으며 그 후 1년간 육속 ≪문학≫지에 <담배국>, ≪신문학≫에 <균렬>, ≪서울문학≫에 <어간유정> 등 10편을 발표했다. <조선의용군>이라는 단편집을 묶어 ≪한성도서≫에서 출판예고까지 했는데 월북함으로써 출판되지 못했다.
1946년 12월에 조직에서 파견한 간호사 김혜원여사와 함께 북조선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처음에 ≪로동신문≫기자로 있다가 외금강휴양소 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민족군대≫주필을 역임했다.
6.25전쟁이 폭발된 후인 1950년 10월, 중국으로 들어와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소장: 정령)연구원으로 몇 년 있었는데 북경에서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을 한문(漢文)으로 출판했으며, 1952년 12월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연합회 준비위원회(주장 주덕해) 주임을 임명 되었으나 반년 후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1953년 9월 단편집 <새집 드는 날>이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며,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1, 2, 3부 소설집 <고민> 중편소설 ≪번영≫을 출간했으며 이밖에도 50년대 초에는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1957년 반우파투쟁확대화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되였다. 조선공민이기에 우파분자로 하지 않고 반동분자로 모호하게 표기하고 우파분자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공직과 노임마저 취소당하고 노동개조를 하면서 생활보조비 50원을 타게 된 것이 전부였다. 몇 년후 작가협회 자료실에서 자료원으로 있었으니 여전히 반동분자로 몰리게 된 것이다. 공직도 없고 로임도 없고 글도 발표할 자격이 없게 되었다.
◇1996년 11월 20일에 열렸던 <김학철선생님 문학창작 50돌 좌담회> 기념사진.
1964년부터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했는데, 1966년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폭발해 그 해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원고가 발견되어 기소되어 감금 되었으며 이때부터 50원 생활보조비도 취소되어버렸던 것이다.
1975년 5월 연변주법원의 10년 유기징역 판결을 받았는데 1977년 12월에 만기석방되었으며 그 후 3년간 계속 반혁명전과자 취급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1980년 12월 연변주법원에서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다'고 선포되어 1983년 국적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중국 국적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정식으로 공직에서 이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1983년 항일회상기인 <항일별곡>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1985년 ≪김학철단편소설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86년 3월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며, 1987년 6월에는 <김학철작품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1989년 12월에 이러러서야 중국공산당 당적이 회복되었으며, 1994년에 한국 KBS로부터 '해외동포상'을 수상했다.
◇2001년 한국 밀양문화원 초청 강연장에서 김학철선생.
또한,자서전인 <최후의 분대장>이 한국의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1995년에 출간되었으며, 1996년과 2001년에 걸쳐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와 김학철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 한국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밖에 수백편의 수필과 잡문을 여러 신문, 잡지에 발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다권집 ≪김학철문집≫ 출판중에 있으며,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에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중국 만주땅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선각자인 김학철선생의 생활신조는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그것이었다.
연변조선족 문학평론가인 최삼룡의 <김학철론>에서 김학철선생의 인격형성과 인격특점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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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앞에 한 거인이 서 있다.
량쪽 겨드랑이에 쌍지팽이를 짚은 척각의 로인, 년령 75세, 키 180센치, 수척한 몸매, 잔주름이 많기는 하지만 깨끗이 늙은 강파른 얼굴과 뽀족한 하관, 거기에 꾹 다문 입술과 한창때의 그런 광채는 세월과 함께 사라졌으나 정기가 도는 사려 깊고 슬기가 넘치는 한쌍의 눈. 이 거인이 바로 오늘도 백발을 흩날리면서 붓대를 틀어쥐고 문학의 고봉으로 톺아 오르는 투사이며 작가인 김학철이다.
총체적으로 령리하며 민감하며 강의한 인상을 주는 이 로인이 체질과 초상을 통하여 우리는 활발하며 움직이기 좋아하고 민감하며 반응이 빠르고 주의력을 빨리 변화시키고 흥취정서를 쉽게 바꾸며 벗을 사귀기 즐기고 다정다감하고 외향적인 다혈질의 청년 김학철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이러한 체격과 기질의 임자 김학철은 한평생 복잡하고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어왔다. 식민지시대의 고난을 눈물겹도록 맛보면서 지낸 비애의 소년시절, 항일전쟁의 피와 불의 세례를 겪은 격정의 청춘시절, 제국주의 감옥에서 몇 년, 광복 후 서울에서의 좌익운동 가담과 창작활동 그리고 평양, 북경에서의 문필생활, 연길에서의 본격적인 문학창작과 24년의 정치박해(그 중 10년은 옥살이)를 겪은 좌절 많은 중년시절, 65세에 와서야 다시 붓을 들어 창작의 왕성기를 맞이한 만년생활. 이렇게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 드물다.
세상에 실로 렬화속에서 아홉번 나보고 빙설속에서 아홉번 얼어보고 피못속에서 아홉번 목욕해본 작가가 있다면 그가 곧 김학철일 것이다.
("청화" 블로그에서 전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