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프로그램 정보

무인 토시이에

무인 토시이에

(利家とまつ〜加賀百万石物語〜)
일본드라마|49부작|2002.01.06.~2002.12.15.방송종료
편성
일본 NHK
줄거리
마에다 토시이에와 그의 아내 마츠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관련정보
참여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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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토시이에와 마츠 (일본 TV 대하드라마 49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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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책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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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이묘

마에다 도시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옛 동료이자 가신

[ ]

요약
마에다 도시이에는 센고쿠 시대와 아즈치 · 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활동한 무장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측근 가신에서 출발하여 시바타 가쓰이에 군단에 소속되었다. 특히 창을 잘 써서 ‘창의 마타자’라 불리기도 했다. 가쓰이에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충돌했을 때,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히데요시의 편을 들었으며,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호쿠리쿠 방면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도요토미 정권 내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5대로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죽음이 가까워진 히데요시는 도시이에를 아들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삼았으나 도시이에는 그 이듬해인 1599년 사망하여 이에야스의 전횡을 막지 못했다.
마에다 도시이에

마에다 도시이에원본보기

출생 - 사망1537년 ~ 1599년 3월 3일
시대센고쿠 시대 - 아즈치 · 모모야마 시대
지위다이묘
별칭이누치요()
마고시로()
마타자에몬()
하시바 지쿠젠노카미()
가문마에다() 가문
부모 : 마에다 도시하루()
: 조레이인()
배우자정실 : 마쓰(まつ)
측실 : 치요보()

출생과 청년기

도시이에는 1538년 오와리 국 가이토 군 아라코 마을에서 마에다 도시하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이누치요였다. 도시이에는 14살 때인 1551년에 노부나가를 섬겼는데, 주군 곁에서 시중을 드는 고쇼()였던 것으로 보인다. 1552년 처음 전투에 나간 이후 연달아 전공을 올렸으며 그에 따라 봉록과 지위도 높아졌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도시이에는 1559년경 노부나가의 예능 일을 담당하던 동붕중() 한 명을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켜 칩거를 명령받았다. 이듬해 비록 근신 중이었지만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쳐들어오자 노부나가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오케하자마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세 명의 수급을 베어 이를 보고했음에도 노부나가는 사면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이에는 포기하지 않고 1561년 ‘목따기 선수 아다치’라는 별명을 가진 사이토 가문의 용장 아다치 로쿠베에를 죽였다. 이때서야 노부나가는 노여움을 풀어 새로 300관의 토지를 주었다.

노부나가의 친위대로 활약

도시이에는 이후 미노의 사이토 가문, 이세의 기타바타케 가문, 오미의 아자이 가문, 에치젠의 아사쿠라 가문, 그리고 일향종 세력과의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워 노부나가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적호로중()이 되었다. 노부나가는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흑 · 적호로중을 각각 18명씩 선정했다. 도시이에는 이중 적호로중의 필두였다. 적과 흑의 구별은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쪽이 흑, 젊은 쪽이 적이었다. 흑호로중은 말을 소유한 직할 군대인 우마마와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적호로중은 고쇼들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노부나가의 직속 가신이라 해도 도시이에는 아라코 성주 마에다 가문의 서류에 불과했다. 1560년 부친 도시마사가 죽은 이후 형 도시히사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도시히사는 아들이 없었고 병약했기 때문에 1569년 노부나가는 도시이에를 마에다 가문의 후계자로 삼았다. 이때 마에다 가문의 영지는 대략 2,450관 정도였다. 이에 앞서 1568년 노부나가가 교토로 상경한 이후 1573년까지 도시이에는 노부나가의 친위 군단인 우마마와리로서 활약했다.

노토 국 지배자가 되다

1575년 시바타 가쓰이에가 에치젠 국을 지배했을 때 도시이에는 후와 미쓰하루, 삿사 나리마사 등과 함께 후추 삼인중()이 되어 가쓰이에를 감시하는 직책을 수행했다. 노부나가는 에치젠 12군() 중에서 가쓰이에에게 8군을, 도시이에, 미쓰하루, 나리마사에게 후추 인근의 2군(각각 1/3씩)을 주었다. 도시이에에게 2군의 지배권을 부여했지만 주요 사항은 노부나가가 직접 명령을 내리고 있어서 도시이에는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권한을 행사했다. 또 가쓰이에를 감시하는 역할이 맡겨졌다는 점에서 노부나가의 근신이란 성격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동시에 도시이에는 가쓰이에 군단의 일원으로서 그 지시를 받아야 했다.

도시이에는 1577년 가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는 호쿠리쿠 일향종 토벌군에 참가했으며, 1581년에 실시된 대규모 군사 기마행렬인 오우마조로에에서 에치젠중()의 일원으로 참가하는 등 가쓰이에 군단의 휘하에서 행동했다. 에치젠 지역은 원래 일향종 세력이 강력했는데 노부나가가 수행한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죽여버리는 철저한 섬멸전, 가쓰이에와 도시이에가 가한 가혹한 탄압을 통해 겨우 평온을 찾았다.

이후 가쓰이에는 1580년 11월 가가 국을 평정했다. 노부나가는 평정한 가가를 가쓰이에에게 주었으며, 가쓰이에 군단은 계속해서 노토, 엣추 방면을 점령해 나갔다. 이듬해 10월 도시이에는 노부나가에게 노토 국을 영지로 받아 나나오 성에 입성했다. 도시이에는 마침내 국 하나를 온전히 지배하는 국주()가 되어 가쓰이에, 삿사 나리마사와 나란히 호쿠리쿠 지역을 지배하는 데 중요 역할을 수행하였다.

가쓰이에와 히데요시의 대립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은 후에 노토 국의 세력 회복을 목표로 거병한 하타케야마 가문의 옛 신하들과 혼간지 세력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 때문에 도시이에는 노부나가의 복수를 위해 오미로 출전한 가쓰이에 군대에 합류하지 못했다.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가쓰이에 사이가 점차 나빠져 양측은 충돌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가쓰이에의 휘하에서 활동한 도시이에였지만, 어릴 적부터 히데요시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당시 처음엔 가쓰이에 편을 들어 참전했으나, 히데요시의 권유에 응하여 항복했으며, 이후 가쓰이에 토벌의 선봉을 맡게 되었다. 가쓰이에는 몰려드는 히데요시 군대를 막아내지 못하고 자살했으며, 히데요시 군대는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가가 국까지 손에 넣었다. 이후 도시이에는 기존 노토 국 이외 가가 국 절반에 해당하는 영지를 추가로 얻었으며 가나자와 성을 근거지로 삼았다. 대세를 읽고 가쓰이에가 아닌 히데요시를 선택한 도시이에는 결국 살아남았다.

히데요시 휘하의 유력자로 성장

1584년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쓰 사이가 악화되었다. 노부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끌어들여 히데요시에게 대항했다. 같은 해 4월 고마키 · 나가쿠테 전투가 발발했으나 도시이에는 호쿠리쿠 방면의 수비를 맡았기 때문에 자국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때 도시이에와 함께 후추 삼인중으로 활동했던 삿사 나리마사가 돌연 이에야스에게 호응하여 가가 · 노토 국을 침공하자 도시이에는 스에모리 성에서 이를 격파했다. 이후 나리마사와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1586년 3월 기이 국 남부의 사이카 세력, 6월 시코쿠를 연달아 제압한 히데요시는 8월 나리마사를 치기 위해 출진했다. 도시이에는 히데요시의 선봉 역할을 맡아 엣추로 출병하자 나리마사는 싸울 의욕을 잃고 항복했다. 히데요시는 새로 얻은 엣추 일부를 도시이에의 아들 도시카쓰에게 주었다. 이로써 도시이에 부자는 3국을 지배하는 다이묘가 되었다.

그해 4월 호쿠리쿠의 총책임자라 할 니와 나가히데가 사망하자, 도시이에는 그를 대신하여 호쿠리쿠 방면 총대장으로 에치고의 우에스기, 간토의 호조, 동북의 여러 다이묘들과 접촉하였다. 위상이 올라간 도시이에는 1586년 3월 교토로 상경하여 종4위하 권소장에 서임되었으며, 히데요시가 간바쿠()에 취임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지쿠젠노카미라는 관직명을 물려받아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 시기 도시이에의 관위 승진은 이에야스는 물론이거니와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보다도 뒤처졌다.

1587년 히데요시가 규슈로 출진할 때 도시이에는 도요토미 히데쓰구와 함께 남아 교토 · 오사카의 방어를 맡았으며, 그를 대신하여 장남인 도시나가가 참전했다. 1590년 고호조 가문을 칠 때는 간토 북부의 마쓰이 성 포위전에 참가했으며, 이후 도요토미군이 오슈로 출정할 때는 저항의 모습을 보이던 동북 지역의 유력 무장 다테 마사무네에게 히데요시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말년의 도시이에

1592년 도시이에는 교토를 출발하여 조선 침략의 전초 기지인 히젠 국 나고야 성으로 향했다. 그해 5월 한양이 함락된 직후 히데요시는 직접 바다를 건너 출진하려 했으나 도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풍랑을 이유로 만류했다. 히데요시는 도시이에의 충성스런 마음에 감동했다고 한다. 같은 해 7월 히데요시가 모친이 위독한다는 소식을 듣고 교토로 귀환했을 때 도시이에는 히데요시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규슈 나고야 지역에서 이에야스와 더불어 정무를 담당했다. 1593년 명나라 강화사절이 일본에 왔을 때 접대를 담당하기도 했다.

1594년 히데요시는 후시미 성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조선에 군대를 보내지 않고 일본에 남아 있던 다이묘에게는 영지의 석고()에 따라 맡아야 할 축성 분량을 할당했다. 『당대기()』에는 이 시기 석고로 도시이에 23만 5천 석, 그의 첫째 아들 도시나가 32만 석, 노토의 둘째 아들 도시마사 21만 석으로 합계 76만 5천 석을 할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야스 240만 2천 석과 비교하면 1/3에 불과했다.

1595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 직후 반포된 도요토미 정권의 규정 및 추가 규정에 대해 이에야스와 함께 총 6명이 이를 준수한다는 뜻을 담아 서명했으며, 여기서 그는 도요토미 가문의 필두격으로 대우받았다. 1596년 히데요시 · 히데요리 부자가 천황을 알현하러 궁궐에 입궐할 때도 함께 갔으며, 이를 계기로 종2위 권대납언으로 승진했다.

1598년 60세를 넘긴 도시이에는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4월에 장자 도시나가에게 마에다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넘겨준 후 은퇴하려 했지만, 히데요시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죽음이 가까워진 히데요시는 5대로() · 5봉행() 제도를 만들어 도시이에를 5대로의 선봉으로 내세워 이에야스를 견제하려고 했다. 그해 8월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시이에는 그 사후 처리를 부탁받아 오사카 성으로 들어가 히데요리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1599년 정월 도시이에는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시기 제정한 법을 위반했을 때 이를 추궁했지만 곧 화해했으며, 이에야스와 협력하여 히데요시 사후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얼마 후 건강이 급속히 나빠져 같은 해 3월 3일에 오사카 성에서 향년 62세에 사망했다. 도시이에의 죽음으로 이제 이에야스를 견제할 인물도 사라지게 된 셈이었다.

참고문헌

  • 岩澤愿彦, 『前田利家』, 吉川弘文館, 1969.
  • 『織田信長家臣人名辭典』(吉川弘文館)
  • 『國史大辭典』(吉川弘文館)

    [네이버 지식백과] 마에다 도시이에 [前田利家]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옛 동료이자 가신 (일본 다이묘, 세손출판사, 일본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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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158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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