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제 5막
황 안또니오
약 31년간 다니다가 대기업에서 정년을 맞이했었다. 흔히 말하는 인생 제1막의 막이 내린 셈이다.
연극의 1막이 내리고 2막이 곧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뮤지컬 공연처럼 1막과 2막 사이에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을만큼 20분이라는 긴 시간의 간격이 있을 수도 있다.
인생의 막간 시간의 간격은 훨씬 오래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더 이상 연극배우로 출연하지 않고 관객석에 앉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연극배우로 다른 역할을 맡아 인생의 연극무대에 올라야 한다. 한때는 리어왕을 맡았던 배우가 늙으면 배역이 주어지지 않는 시기가 생기게 되고, 참으로 오랜만에 맡은 역할이 거지일수도 있다.
그러나, 노배우는 그런 배역마저도 고맙다. 참으로 오랜만에 연극무대에 다시 오를 수 있다면 배역이 대수인가. 대사가 한 마디도 없이 길거리의 어느 건물의 벽에 기대어 낮잠에 빠진 거지일수도 있다. 노배우는 기력이 예전 같지 않고 오랜만에 맡은 배역이라서 자신도 모르게 진짜로 잠에 빠져들수도 있겠다.
인생의 연극 2막이 올라가기 전까지의 시간은, 그런 노배우처럼 배역이 주어지지 않는 기간이 나에게는 참으로 길었었다. 나이가 많다고 면접오라는 직장이 거의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인생 제2막의 무대에 오를 수 있었는데 공원 노동자 배역이었다. 첫 단추를 짤 꿰매어야 한다는데, 첫 단추를 그런 배역으로 시작하다보니 해마다 계속 그런 배역으로 인생의 연극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올해는 인생 제5막이다. 작년 인생 제4막은 집에서 가까운 대공원에서 일했는데, 수년간 떨어졌다가 "올해는 꼭 여기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내 말의 진정성을 면접관이 느꼈는지 내가 가장 원하는 그 직장에서 일할 수 있었다. 올해는 집에서 멀고 대중교통이 불편한 것 같아 해마다 우선순위의 맨마지막에 두었던 월O 공원에서 일하고 싶었다. 대공원에서 일하던 동료들이 대중교통이 편하다고 말해주었고 전해지는 직장 분위기가 좋았다.
그런데 전날 늦잠을 잔 탓인가 면접을 잘 보지 못하였다. 안전사고 예방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고 면접관이 묻는데 너무 평범한 답변을 하였다. 그리고 면접이 너무 짧은 시간으로 끝났다.
"잠시 휴식을 취하더라도 장비의 시동을 껐다가 작업을 시작할 때 켭니다,귀찮더라도. 예초기를 예로들면 동료가 다치지 않게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작업하고, 주위에 시민들이 지나가지 않는지 보면서 예초작업합니다." 너무 평범한 답변.
옆 자리의 피면접자에게는 이전에 무슨 일을 했습니까, 하고 면접관이 물었다. 아마도 이력서의 빈칸이 많아서일 것이다. 그가 말했다. "기아에서 일했습니다." 기아 자동차. 대기업에서 정년 퇴직했거나 명예퇴직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합격하기 어렵겠군,하고 나는 생각했다. 대기업 정년퇴직후 내가 첫 면접에서 비슷한 장면을 겪어보았으니까. 이제 이 바닥의 경력증명서가 3장이다. 도움은 커녕 피해가 되는 대기업 경력은 이력서에 적지 않는다. 공원에서 일한 조경 경력만 이력서에 적는다. 햇볕에 검게 탄 내 얼굴에서 이제는 더 이상 대기업에서 일했던 내 흔적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면접을 끝내고 나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작년에 일했던 대공원도 같은날 면접이었는데 다행히 2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승용차를 몰고 가서 거기도 면접을 보았었다. 반장이 너무 좋은 사람이었으나, 몇년째 계속 대공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고참병 행세를 하는 문화가 있었다. 동일한 노동자인데 물이 고이면 썩는다고, 반장이 사람이 좋으니 조장이 유세를 떤다고나 할까? 호랑이 없는 숲에 여우가 호랑이 행세를 한다고나 할까? 그런데 올해는 100% 물갈이를 했다고 한다. 상부에서 그런 지시가 내려오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대공원의 호랑이 행세를 하던 여우들은 이제 다른 숲으로 가서 양이 되어 살아야 하는 신세로 변할 것이다. 100% 물갈이한 탓에 나도 대공원은 불합격했다. 이런 바람을 타는 시기에는 대공원을 처음 지원하는 노동자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 운이 좋은 것. 누군가에게 불행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행운이 될 수도 있는 것. 그런데 내 경우에는 대공원 불합격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왜냐하면 대공원 면접 결과발표 하루전에, 월O 공원에서 합격 문자메세지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붙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가장 빨리 합격여부를 발표하는 월O 공원에서 합격소식이 날아들다니 작년처럼 초장에 합격하는 바람에 취업 스트레스가 1월중에 짧게 끝났다.
2월중에는 시설관리공단 산하의 대규모 채용이 남아 있다. 거기서도 떨어지는 이들은 하청업체의 채용 혹은 몇달후 중도사직을 채우기 위한 추가모집이 뜨는지 계속 살펴보아야 하는데, 어디나 경쟁율이 세므로 합격할 때까지는 피말리는 취업 스트레스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일이 풀리지 않으면 한 해를 실업자로 보내야할지도 모른다는 심적 부담감이 점점 가중된다.
"올해는 너무 취업이 어려워질 것 같애. 그래서 멀어서 사람들이 지원을 꺼리는 섬, 영O공원으로 지원할 건데 같이 지원하지 않겠는가?"라는 대공원 직장동료 김 선생의 말도 있고, 구청 산하의 여러 군데 서류접수하였으나 모두 떨어졌다, 경쟁율은 너무 세어졌다며 낙심하는 대공원 직장동료 정 선생의 말도 있어서, 나도 멀리 송O 공원에 지원서를 내었다. 거기는 토끼섬을 예초하려면 호수를 건너가야 하는데 예초기를 짊어진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안전한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호수에 빠질 수도 있다고 하여 수영 못하는 나로서는 후순위에 두었던 공원이었다. 그러나 다른 공원보다 2배의 인원을 더 뽑는다고 하니 올해는 가능성이 더 높은 송O 공원으로 지원서를 일찍 제출하고 명절을 쉬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었다.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동물원 사육사 경력 3주도 이력서에 적었다. 사슴 및 토끼 사육장이 있다고 하니 그런 경력이 합격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적성보다는 합격이 더 중요했다.
점쟁이처럼 말하던 김 선생의 예측이 맞아 떨어졌는지 몇년째 조경노동자로 일하며 알게 된 동료들이 거의 대부분 우수수 떨어졌다. 대공원 출신의 노동자 중에 나만 되었다,고 주위 소식통 동료가 알려주었다.
내가 알고 지내는 불교신자인 노동자 다른 김 선생이 다행히 합격하였다. 모두 우수수 떨어졌으니 나의 합격을 표나게 기뻐할수도 없다. 2월중에 시설공단 조경 합격자 발표가 나면 1월 모집에 떨어진 동료들의 많은 수가 붙을테고 그때는 자축하듯이 모여 술잔을 함께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월O 공원의 합격 문자메세지를 받고 다음날 부랴부랴 채용신체검사를 동네 병원에 가서 받았다. 평소에 혈압이 정상 범위 안인데 왜 채용신체검사를 받으러 오면 혈압이 기록을 갱신하는지? 긴장해서라고 하는데, 하루종일 반복해서 재어도 평소의 혈압이 나오지 않았다. 이거원, 희한하게 높게 나온 혈압때문에 불합격하게 생겼네. 예상치 않은 복병을 만난 격이랄까? 작년에도 이 병원에서 이런 현상이 발생하여 여러 번 쟀는데, 올해는 더 혈압이 출렁대니 환장할 지경. 다음날 혈압만 다시 재러 왔다. 그래도 고혈압이 아닌, 평상시의 혈압으로 떨어지지 않아 고혈압에서 약간 높은, 가장 낮게 나온 수치를 선택하고 신체검사하는 병원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갔다. 내과 문진을 마지막으로 하고 카운터에 검진서를 제출하고 병원을 나가려는데 입구에 놓인 자동혈압계가 보였다. 3번을 연속해서 재었는데 평상시의 정상혈압 범위가 계속 인쇄되어 나왔다. 나는 3장의 종이를 들고 2층으로 다시 올라가서 신체검사실 실장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자기가 내려가서 보는 앞에서 측정해보자며 내가 먼저 내려가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1층 자동혈압계에 앉아 있는데 토요일이라 오후 1시가 지나자 직원들이 퇴근하기 시작하는데 30분이 지나도록 실장이 내려오지 않는다. 이거, 신경 쓰게 만드는군. 안정을 취하고 혈압을 재야 하는데. 카운터 여직원에게 전화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자리에 없는지 연결이 잘 되지 않고 있었다. 기다린지 30~40분이 지나자 실장이 내려왔는데 일하다가 깜박 나의 기다림을 잊고 있었단다. 직원들이 퇴근하느라 그런지 출입구의 문이 열리면서 찬 바람이 불어들어오고 혈압을 재니 또 훌쩍 뛰었다.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의사의 하얀 옷을 보면 혈압이 올라가는 현상이 있다는데, 아무래도 실장을 보면 혈압이 올라가는지도 모른다. 내년에는 다른 병원에서 채용신체검사를 받아보아야겠다.
2월 작업시작조,3월 작업 시작조, 4월 작업시작조가 있는데 나는 2월 작업시작조 4인에 포함되어 있으니 오는 월요일부터 작업에 투입되므로 작업복,작업화를 준비하고 오라는 작업반장의 전화를 합격 문자메세지에 뒤이어 받았었다. 1달 빨리 투입되는 선발조는 처음인데, 노동자 수가 적으니 못 다루어본 장비를 사용해볼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올해는 좋은 예초기를 선점할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선발조는 어떤 작업을 하는지 궁금증 해소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월요일 한 주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한다. 청색 잠바를 가져가야 할 것 같다. 대기업에서 일할 때 양복 상의는 옷걸이에 걸어두거나 집에 두고 공장근무자가 입는 청색 잠바를 와이샤스 겉에 겨울에 입고 다녔는데, 정년퇴직 즈음하여 청색잠바를 짐박스에 챙겨넣으니 이 잠바 버리고 가지 않느냐고 여직원이 묻길래, "인생 2막은 청색 잠바가 아마도 꼭 필요할 거야."라고 답했었지.
바지는 두꺼운 등산바지를 준비하면 될 것이고. 작업용 모자와 출퇴근용 모자도 챙겨야겠고, 목장갑, 고무코팅 장갑, 작업화, 장화, 비옷,팔 토시, 발토시, 양치질 도구,치간치솔,치약, 책, 도시락, 속옷, 양말, 손수건, 마데카솔, 동료에게 줄 사탕, 직사광선으로 눈을 보호할 썬글라스, 마스크, 월급통장 사본도 챙겨야겠지.
대중교통은 지하철,버스를 모두 이용해야 하는데 카카오맵으로 찾아 정리해두었다.
내일부터 또 다시 연극의 막이 오른다.
인생 제5막이 시작된다. 배역은 동일하다.
2020.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