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 때 장금식
물이끼 같은 물때다. 집중적으로 내린 장맛비의 폭격에 마음을 드러낸 색. 막지 못한 비바람, 부조화와 불균형의 연결고리에 마지못해 끼어있는, 못내 아픈 풍경의 색이다. 진하고 연한 초록과 거뭇거뭇하고 우중충한 초록 바닥이다. 자연 속, 큰 바위틈에 낀 녹색 이끼를 보면 절벽 모습이 어찌 저리도 아름다울까, 신의 조화라며 감탄을 연발할 텐데. 단독주택 시멘트 바닥 마당에 낀 물때는 미와 조금 거리가 멀다. 지우고 싶다. 깔끔한 성격 때문이 아니고 색에 대한 어떤 편견 때문에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보여주기 싫은 내 상처의 환부 같아서다. 그러나 추하고 보기 싫은, 흉한 것에서도 미를 찾아내는 예술가도 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언뜻 보면 흙 마당에 웃자란 잔디 같다. 추함이 있어야 미가 돋보이고 가시밭길을 지나 봐야 험난한 통과의 의미를 아는 이치니까. 그래도 이런 바닥을 보면 닦아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거무죽죽한 물때가 그려놓은 지도는 동그라미도, 세모도, 네모도 아닌 정형화된 어떤 모양이 아니다. 항아리 주변이나 화분 주변엔 물의 마찰이 더 많았던지 물때가 짙다. 옴폭 들어간 곳도 물이 고인 탓에 물때의 겹이 두껍고 시선을 돌리게 한다. 자꾸 보고 있으니 얕은산, 높은산, 살짝 가파른 구릉, 낮은 언덕, 높은 언덕, 집 근처 동산을 한곳에 그려놓은 등고선 같다. 시공간의 차이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비비대다가 그만둔 인생들의 집합소라는 표현이 어울릴까. 그들의 발자국이 남긴 흔적, 생의 지도 같은 것이다. 두께나 색의 명도나 채도에 따라 삶의 상처가 깊고 얕음을 보여준다. 색상과 채도가 없고 명도의 차이만 있는 암울한 내 처지의 현주소 같다. 늘 평지에서 오밀조밀한 반경만을 그리며 왔다 갔다 하던 삶이 가파른 언덕에서 헉헉거리는 안쓰러움으로 바뀌어 가끔 자기연민에 빠진다. 남편을 잃은 후, 내 충격은 말할 것도 없고 아들마저 공황 상태에 빠져 정신병원 도움을 받아야 했다. 병원에 홀로 두고 헤어질 때, 복도에서 둘이 끌어안고 한없이 목놓아 울던 그 날, 나 홀로 집에 돌아와 고통의 문을 닫고 싶어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밤새 통곡하던 그 날, 갑작스레 맞닥뜨린 현실을 주체할 수 없어 하늘나라로 간 남편을 보겠다고 목 빼고 하늘을 바라보던 그 날, 그 마당이라 더 그렇다. 재난은 겹쳐오고 아픔과 슬픔이 폭우 내리듯 내 앞을 가로막던 그때 그 마당이다. 마음 깊은 곳까지 축축함을 말리지 못한 지가 2년이 넘었다. 목젖까지 차오른 물기를 다 삼키든지 한 줌 물기 없이 완전히 말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을 객관화하면 받아들이기가 수월해지려나. 숨 가쁜 삶의 언덕에서 조심스레 발을 내디디며 이제 한 발자국씩 내려가고 싶다. 조금 상황이 좋아졌다고, 잠을 조금 잘 수 있다고 안도하면 발을 헛디딜까 두렵기도 하다. 다시 이중의 고를 겪게 되면 재생의 힘은 아득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안 생길 수도 있으니까.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있다.”라는 안희연 시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의 시어 하나하나에 기대고 싶다. 내 가슴이 갈기갈기 찢긴 처절한 풍경에 위안을 주는 시다. 아픔과 빈 둥지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남은 세 식구가 이리저리 헤매며 에둘러 제 길을 찾아오기까지 시간이 흘렀다. 시인의 말대로 시간은 반으로 접혀있고 한참 지나고 보니 다른 풍경이 되어있다. 언덕에서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고뇌의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내리막길엔 조금의 여유가 생긴다. 길옆의 푸른 잎과 날아드는 나비를 본다.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린다. 하늘도 우울한 색이 아니고 새파랗다. 처절함과 비참함을 걷어낸 고유한 색이다. 푸른 잎도 나비도 새도 하늘도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생각하니 잃어버림에 대한 다른 풍경이 내 눈에 들어온다. 일그러져 보였던 바닥이 평평하게 보인다. 비틀거리던 감정을 추스르고 감정에 얼룩진 물때 벗기느라 굽혔던 허리 다시 올곧게 편다. 흔들리던 마음을 조금씩 땅바닥에 붙여가며 이제 시간을 반의반으로 접는 연습을 해야겠다. 마당의 질감이 발바닥에 착 붙는다. 여름 장마가 가을에 시간을 내줄 무렵이면 바람이 낙엽을 내 마당에 소복이 옮겨놓을 것이다. 얼룩진 생의 질곡을 덮어주는 따뜻한 이불이 되어주듯이.
제10회 정읍사문학상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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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길
오석영
내가 기억하는 첫 소풍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줄을 서서 산에 올라간 일과 부석사란 절을 찾아 분주하게 돌아다녔던 일들이 생각난다. 점심시간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친구들 피해서 소나무 밑에서 혼자 먹었고. 비록 순 보리밥이지만 간장에 버무린 고춧잎 반찬이 꿀맛이다.
이젠 그 소풍도 멀리 가버린 채 또 다른 길 위에서 서성인다.
머리가 하얗도록 급격하게 변화를 보인 건, 얼마 전에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일어났다. 아내가 갑자기 거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순간이다. 그동안 온갖 병에 걸려 힘들어 했지만 오늘처럼 슬픔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린 적은 없다. 아내가 응급실에서 다시 수술실로 들어가 4시간을 넘기면서부터는 공포로 확 바뀌고 격한 마음이 심장을 뒤흔든다.
사람들은 나이 84세면 관을 등에 메고 다닐 나이라고들 한다. 그래서일까. 이젠 눈앞에 보이는 온갖 조각들이 바람에 채이듯 허공에 던져진 채, 나루터 마른갈대가 서걱거리며 바람에 부대기는 심정이고, 그런 것들이 시야에 잡히다가는 힘없이 멀어지기도 한다. 세상에서 죽음처럼 확실한 게 없는데 무얼 주저할거냐고. 이 순간도 아내에게 세월의 질곡이 얼룩진 채 웅장한 산 그림자가 어깨를 떠밀고 있지 않느냐고.
죽음의 카운트다운 앞에서 그동안 저지른 이율배반적인 행동과 모습들이 후회와 원망으로 물밀듯이 밀려온다. 눈속임으로 영혼의 고운 빛깔을 지니려고 천방지축 뛰어 다녔고, 함박눈 멈춘 뒤 푸른빛 둥근달 뜨기를 바란 허망한 꿈들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며칠 전 북한산 칼바위를 산행하면서, ‘산을 오르는 길은 자신과의 싸움이다.’라고 다짐을 하고는 딴 짓을 했다. 내 능력껏 잘 걷다가도 누가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만 들리면 마음이 바쁘다. 피해의식 때문인지 빨리 가려고 온 힘을 다해 경쟁을 시작한다. 결국 앞선 채 정상에 도달할 때는 혼자서 웃지만, 비탈길에 넘어져 부상을 입을 때는 화를 내기도 했다.
정직한 모습을 유지한 채 욕심은 버리겠다고 선언을 한 자신이, 자빠지고 부상당하는 건 과거에 상처 입은 치우라고 변명만 할 건가? 차라리 고교시절이 더 솔직하고 순수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회 화해의 아이콘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도 창피한 일이지만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그때는 마음이 약해서 같은 반 학생에게 매를 맞기만 했고 싸움을 몰랐다. 잘못도 없이 무시당한 채 매 맞던 순간이 떠오르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단번에 내 귀에 꽂힌다. 눈이 뻘겋게 붓고 앞니가 나간 내 모습을 본 아버지는, 깡패 놈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 길쭉한 강목을 들고 교문 앞을 지켰던 기억의 파편이 실루엣으로 다가와 파도에 쓸려가는 밤바다처럼 고요하게 흔들린다. 피안의 세계를 향해 출구가 보이는 그 길 위에서 보이는 퍼즐이다. 위선도 있었고 부끄러움을 숨기며 살아 온 삶이기에 창피하고 수치스럽다. 무늬 진 세월에서 빛나는 열매도 맺지 못했고, 윤기 난 녹색 잎을 촘촘히 만들어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 못했기에 부끄러운 것이 사실이다. 삶의 마무리도 완전하지 못한 채 죽음도 자신만의 해석으로 변형된 모습만 보이는 것 같다.
이제 나를 흔드는 바람도 오래 머물지 않을 것 같아 자녀들에게라도 말하고 싶다. 그동안 능력이 부족해서 잘 돌보지 못한 잘못에 대해서 먼저 용서를 구한다. 다만 살아온 경험을 되돌아보면 사람 사는 게 별것 아니고, 욕심보다는 마음 편안하게 사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그걸 어머니의 눈빛에서 본 것 같아 전하고 싶다. 어렸을 때 농촌에 살 때 내가 대문 밖을 나설 때마다 어머니는 ‘지금 어데 가느냐?’고 화사하게 웃으셨던 그 아련한 눈빛을 설명하고 싶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그랬다. 평소에 살던 시골집에서 목사의 손을 꼭 잡고 웃으시며 눈을 감았기에 그 모습도 빼놓을 수가 없다. 돌아가신 후 아버지 서랍 속 수첩에서 발견한 내용은 더욱 나를 놀라게 했다. 처음에 검은 글씨로 하나님의 말씀 요한복음 내용을 쓴 건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맨 끝장에 붉은 글씨로 확대해서 쓴 글 내용에서 ‘용서 하세요’ 와 ‘죽어야 합니다.’의 글은 지금도 옹이처럼 무겁게 받아드려 질뿐이다.
우리 아버진 돌아가시면서 상속이란 표현은 안했고 나 또한 나누어 줄 재산도 없기에 할 말은 없다. 자녀들이 알아서 제사 모실 자녀에게 더 선처하고 일부는 형평성에 맞게 해결하기를 바라는데···.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누구나 가을의 누런 들판을 보면 평화스럽고 기쁜 게 사실이라고. 깨달음의 빛과 향기로운 황금들판을 볼 때 스스로 고개 숙여진다고. 형제들 간에도 벼의 황금빛처럼 아름다운 가을을 보려면 서로가 아름다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보듬으며 살아가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지금 생각하면 죽는 일은 현실과 벽을 쌓고 가는 것 일뿐 별 것 아닌 것 같고, 그동안 허무한 삶에서 정직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실천하지 못한 아쉬움만 밀려온다.
이제부터 너의 어머니는 내가 간호할 것이고, 본인의 의지로 살기를 바라는데.
난 지금 응급실 앞에서 그동안 산과 강을 헤매던 일들이 한곳에 머무른 채 유리벽을 보고 있구나. 죽음은 숨이 끊기는 순간만 의미하지 않아서 내가 여기까지 온 거고 불시에 갈 것도 알기에 그 이상은 믿음만 믿고 판단하고 싶다.
그동안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듯 한줌 모래알 같은 얄팍한 생각으로 현실의 문을 두드리며 정신없이 살았지, 어둠의 섬광 같은 확실한 흐름은 고민하질 않았다. 이젠 죽음 저편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고민하는 순간이다. 어머니의 화사한 눈빛이 또 보인다. 이젠 아버지께서 수첩에 남긴 내용처럼 깔끔한 모습으로 어릴 때 소풍 가듯 그렇게 가야만하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