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제12회 정읍사문학상 작품공모

백제가요 정읍사의 문향을 기리며 참신한 문학인을 발굴을 위한 제12회 정읍사문학상 작품을 공모합니다.

*공모분야:
시 (3편),
수필 (2편,200자 원고지 15매 내외)

*접수기간:
2024년 5월 1일~ 7월 30일
(우편 접수 또는 이메일 접수 가능, 마감 당일소인 유효함)

*공모소재:
소재 제한은 없으나, 정읍관련 제출작품 우대

*공모대상:
제한 없음

*시상내역:
대 상 1명 300만원
최우수상 1명 100만원
우수상 1명 50만원
시상식 날짜는 별도 통보

*응모방법:

가. 미발표 순수창작품이어야 하며 반드시 별지에 응모자 인적사항 (본명,필명),주소,연락처(자택,휴대전화,이메일)과 응모분야, 작품 제목을 구체적으로 명기하고 작품 각 2부씩을 우송할 것. 겉봉투 상단에 필히 [정읍사 문학상 공모 응모작]이라 표기
나. 출품작에는 개인 신상에 관한 정보를 표기할 수 없으며, 제출분량을 지킬 것(A4용지에 바탕체로 제목은 16포인트, 내용은 12포인트)
다. 당선작 발표 후 기 발표작 및 표절이 밝혀질 경우 원칙적으로 당선작 무효처리, 가명 탈락처리
라. 접수한 원고는 반환하지 않으며, 입상작에 대한 저작 재산권은 정읍문학회에 있음.

* 작품 접수처:
우편번호 56187 전북 정읍시 관통로 45(상동) 정읍문학상 담당자
※ 문의 063)532-2861 / 010-2613-2861 / 010-9852-7855

당선작발표:
2024년 9월중

정읍문학회 홈페이지(http://cafe.daum.net/jeongeupliterature)

주관: 정읍문학회
후원: 정읍시


제11회 정읍사문학상 공모작 최우수상

물 때

           장금식

 

물이끼 같은 물때다집중적으로 내린 장맛비의 폭격에 마음을 드러낸 색막지 못한 비바람부조화와 불균형의 연결고리에 마지못해 끼어있는못내 아픈 풍경의 색이다진하고 연한 초록과 거뭇거뭇하고 우중충한 초록 바닥이다자연 속큰 바위틈에 낀 녹색 이끼를 보면 절벽 모습이 어찌 저리도 아름다울까신의 조화라며 감탄을 연발할 텐데단독주택 시멘트 바닥 마당에 낀 물때는 미와 조금 거리가 멀다지우고 싶다.

깔끔한 성격 때문이 아니고 색에 대한 어떤 편견 때문에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다그저 보여주기 싫은 내 상처의 환부 같아서다그러나 추하고 보기 싫은흉한 것에서도 미를 찾아내는 예술가도 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언뜻 보면 흙 마당에 웃자란 잔디 같다추함이 있어야 미가 돋보이고 가시밭길을 지나 봐야 험난한 통과의 의미를 아는 이치니까그래도 이런 바닥을 보면 닦아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장마철이면 이삼일에 한 번씩 물때를 벗긴다손님이 오기라도 하면 익숙하지 않은 마당에 미끄러질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어서다집주인인 나는 조심하면 되지만 무엇보다 미관이 지저분한 게 걸려 온 힘을 기울인다오른손 왼손 번갈아 닦고 물 호스로 씻어내린다이마에 땀이 비 오듯 한다바닥이 규칙적으로 깎아 놓은 듯 평평하면 청소도 수월할 텐데 그렇지 않아 힘들다살짝 파인 곳도 있고조금 봉긋한 곳도 있어 서로 다른 높낮이의 바닥은 가지런하지 못한힘없는 내적 절규가 만들어낸 요철 문양 같다.

거무죽죽한 물때가 그려놓은 지도는 동그라미도세모도네모도 아닌 정형화된 어떤 모양이 아니다항아리 주변이나 화분 주변엔 물의 마찰이 더 많았던지 물때가 짙다옴폭 들어간 곳도 물이 고인 탓에 물때의 겹이 두껍고 시선을 돌리게 한다자꾸 보고 있으니 얕은산높은산살짝 가파른 구릉낮은 언덕높은 언덕집 근처 동산을 한곳에 그려놓은 등고선 같다시공간의 차이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비비대다가 그만둔 인생들의 집합소라는 표현이 어울릴까그들의 발자국이 남긴 흔적생의 지도 같은 것이다두께나 색의 명도나 채도에 따라 삶의 상처가 깊고 얕음을 보여준다색상과 채도가 없고 명도의 차이만 있는 암울한 내 처지의 현주소 같다.

늘 평지에서 오밀조밀한 반경만을 그리며 왔다 갔다 하던 삶이 가파른 언덕에서 헉헉거리는 안쓰러움으로 바뀌어 가끔 자기연민에 빠진다남편을 잃은 후내 충격은 말할 것도 없고 아들마저 공황 상태에 빠져 정신병원 도움을 받아야 했다병원에 홀로 두고 헤어질 때복도에서 둘이 끌어안고 한없이 목놓아 울던 그 날나 홀로 집에 돌아와 고통의 문을 닫고 싶어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밤새 통곡하던 그 날갑작스레 맞닥뜨린 현실을 주체할 수 없어 하늘나라로 간 남편을 보겠다고 목 빼고 하늘을 바라보던 그 날그 마당이라 더 그렇다재난은 겹쳐오고 아픔과 슬픔이 폭우 내리듯 내 앞을 가로막던 그때 그 마당이다.

마음 깊은 곳까지 축축함을 말리지 못한 지가 2년이 넘었다목젖까지 차오른 물기를 다 삼키든지 한 줌 물기 없이 완전히 말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현실을 객관화하면 받아들이기가 수월해지려나숨 가쁜 삶의 언덕에서 조심스레 발을 내디디며 이제 한 발자국씩 내려가고 싶다조금 상황이 좋아졌다고잠을 조금 잘 수 있다고 안도하면 발을 헛디딜까 두렵기도 하다다시 이중의 고를 겪게 되면 재생의 힘은 아득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안 생길 수도 있으니까.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있다.”라는 안희연 시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의 시어 하나하나에 기대고 싶다내 가슴이 갈기갈기 찢긴 처절한 풍경에 위안을 주는 시다아픔과 빈 둥지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남은 세 식구가 이리저리 헤매며 에둘러 제 길을 찾아오기까지 시간이 흘렀다시인의 말대로 시간은 반으로 접혀있고 한참 지나고 보니 다른 풍경이 되어있다.

언덕에서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고뇌의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내리막길엔 조금의 여유가 생긴다길옆의 푸른 잎과 날아드는 나비를 본다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린다하늘도 우울한 색이 아니고 새파랗다처절함과 비참함을 걷어낸 고유한 색이다푸른 잎도 나비도 새도 하늘도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생각하니 잃어버림에 대한 다른 풍경이 내 눈에 들어온다.
물때를 반쯤 청소했다상처의 반은 지워진 듯하다빨리 해치우자는 마음은 급한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고통을 잠시 잊은 듯 벤치에 앉아 커피 한잔하며 청소된 부분을 본다허리를 편다손에는 벌써 물집이 생겨 찌르는 듯 알알하나 자국 없는 안경을 낀얼룩 없는 거울 앞에 선 듯 기분이 맑아진다청소한 쪽과 남은 쪽의 명암이 극명하게 대비된다남은 절반도 서둘러 지워야겠다 싶어 다시 호스와 솔을 들고 빡빡 더 세게 문지른다.
물때 지우기는 보기 싫은 내 아픔 같아 한 것이지만 얕은산을 지나 구릉을 넘고 헉헉거리며 언덕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삶을 마주한 듯고통의 시간을 절반 이상을 접은 듯한씻는 과정의 씻김굿인 셈이다상처로 쌓인 때도 같이 쓸어냈을 것 같다어둠과 아픔을 회피하진 않았고 그저 시선을 돌리기만 한 것 같은데 어두컴컴한 진초록 물때가 내 삶을 조명하고 어둠이 밝음을 안내해주었다.

일그러져 보였던 바닥이 평평하게 보인다비틀거리던 감정을 추스르고 감정에 얼룩진 물때 벗기느라 굽혔던 허리 다시 올곧게 편다흔들리던 마음을 조금씩 땅바닥에 붙여가며 이제 시간을 반의반으로 접는 연습을 해야겠다마당의 질감이 발바닥에 착 붙는다여름 장마가 가을에 시간을 내줄 무렵이면 바람이 낙엽을 내 마당에 소복이 옮겨놓을 것이다얼룩진 생의 질곡을 덮어주는 따뜻한 이불이 되어주듯이.

앞산이 마당을 내려다본다숲에서 지저귀던 새들이 내 마음 마당에 포르르 날아든다초저녁달 그림자를 품은 마당은 저녁 햇살을 숙연히 받아들인다.


제10회 정읍사문학상 우수상 

천년의 기다림

 

                 이종월

 

 

햇살이 뜨락에 넘실댄다. 개나리는 고샅에 노란 물감을 풀어내고 살랑한 바람은 얼굴을 간질인다. 봄은 이렇게 소문도 없이 찾아와 나를 불러낸다. 따스한 볕에 등을 기대고 산책길에 나섰다. 아양산 언저리에 보일 듯 말 듯 봄빛이 다가온다. 설레는 마음으로 걸음을 서둘러 한적한 언덕배기에 이르렀다.

어머니의 품을 떠나 고등학교에 다니며 밥벌이를 찾아 이곳저곳 떠돌이 생활을 하던 때였다. 해가 기울 무렵이면 어머니는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동뫼까지 자박자박 걸어 나와 막내아들을 기다리곤 하셨다. 십수 년이 흐른 지금도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고향의 동뫼 언덕을 떠올리며 아양산 언덕바지를찾아온다.그때 어머니의 기다림은 설렘이었을 텐데, 나는 그리움이 가슴 바닥에 숨어 있다가 불현듯 목울대를 타고 울컥 솟아오른다.

아마도 여기 아양산 마루에 월하 부인의 기다림은 나보다 더 절절한 애잔함일 것이다. 봄볕은 이곳 굽이진 언덕에도 찾아와 부인을 감싸고 있다. 하지만 애달픔이 깊어서인지 북쪽 하늘만 바라보고 서 있는 부인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그대 품에」를 노래한 하동균은“기다림은 잊지 못한 연인을 품고자 하는 열망으로 어두운 그린(Green)표정이거나 갈색 이미지다.”라고 했는데, 그래서일까. 월하 부인의 어둑한 모습이 내 마음을 더 안타깝게 한다.

머뭇거리는 마음을 다독이어 부인의 곁에 앉으려니, 고매한 자태에서 풍기는 향취에 다가가기가 조심스럽다. 이럴 때는 무슨 말로 부인을 위로해야 할지 난감하다. 부인의 얼굴에 웃음을 띠게 하려면, 도림 총각과 월하 낭자가 샘바다 마을 우물가에서 속삭이던 사랑이야기를 꺼내 볼까. 망해봉 위로 달이 차오르던 날 밤이었다. 월하 낭자는 피리 소리에 이끌리어 버드나무 우물가에서 도림 총각을 만나 둘의 사랑이 무르익어 부부로 이어졌다.

부부는 사랑으로 맺어지고 정으로 깊어진다는데, 색색의 사연들이 켜켜이 쌓인 정이 얼마나 그립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부인께서는 가슴에 묻어둔 비밀을 들키기라도 한 듯 머리를 외로 돌리고 말까. 아니면 잠시 시름을 잊고 입가에 미소를 지을까. 낭군이 그리워 눈가에 이슬이 맺힐까. 하지만 부인의 온유한 성품으로 보아 어떤 내색도 하지 않을 듯싶다.

샘바다 마을에 산그늘이 내려와 어둠에 묻히면, 부인의 마음은 걱정으로 날을 샜으리.‘낭군은 지금쯤 전주를 지나 삼례 근방 어느 마을에 소금 짐을 짊어지고 발품을 다니고 있을까. 아니면 논산, 탄천의 저잣거리를 서성거리다 백제군에 이끌려 황산벌싸움에서 봉변이나 당하지 않았을까.’행상 나간 낭군이 돌아올 날짜가 지나자 이런저런 걱정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마중을 나가다 보니 아양산 마루에 이른다. 언덕바지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돌처럼 서 있는 부인의 곧은 정절에 숙연해진다.

부인의 시선은 정읍천을 건너고 시가지를 지나 북쪽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낭군이 오가며 쉬곤 했다는 말고개 느티나무 아래에 머물러 있을 성싶다. 이제는 말고개길로 오가던 발길도 뜸해지고, 맥없이 서 있는 아름드리 노목만이 세월의 어귀에서 애달픈 사연을 떠 올려주고 있지 않은가.

이곳에 올 적마다 부인의 마음을 헤아리노라면 순정의 연인 「솔베이지의 노래」를 읊조리게 된다. 어머니를 모시고 연인 페르귄트를 기다리는 솔베이지의 애련함이 도림을 기다리는 월하 부인의 애절함에 얹히어 들리는 듯하다.

“뒤돌아보면 보이는 자리는 그대를 매일 기다리던 곳 쉬어가던 큰 나무 그늘도 그대로…… 나를 기다리더라도 우린 다시 만나 사랑하고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

페르귄트는 어머니와 청순한 연인 솔베이지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돌며 살았다. 그리고 갖은 고생 끝에 돈을 모아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산적을 만난다. 무일푼으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다시 떠돌다가 어렵사리 여비를 마련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연인 솔베이지가 병들고 지친 페르귄트를 맞이한다. 솔베이지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운 페르귄트는 그녀의 자장가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녀는 꿈에도 그리던 페르귄트를 안고 「솔베이지의 노래」를 부르며 장지로 간다. 그리고 그녀도 뒤를 따른다.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이 저세상에서는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리.

솔베이지는 청춘을 기다림으로 보냈다. 봄이 가고 또 해가 바뀌어도 연인 페르귄트는 돌아오리라 믿고 기다렸다. 가슴이 저리어 오는 기다림이었지만, 이별의 순간이나마 함께 누릴 수 있었다. 월하 부인의 기약 없는 기다림에 비추어 보면 그나마 다행이지 싶기도 하다.

오늘도 봄볕을 맞으며 아양산 언덕바지에 서 있으려니“달님이시여 높이 높이 돋으시어 아, 멀리멀리 비추어 주소서”애타는 월하 부인의 읊조림이 귓가에 맴돈다. 봄은 계절을 타고 또 오고 있으니, 부인의 기다림은 비할 데 없이 애틋하고 간절하다.

월하 부인의 기다림은 낭군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다.어쩌면기다림에 지쳐있으면서도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천년 세월을 사랑으로 버티느라 눈물도 말라버린 부인에게 무슨 수로“기다림을 놓아 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달하 노피곰 도다샤…… 즌대를 드대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다시 읊어봐도 애잔함이 가슴 속에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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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정읍사문학상 우수상 당선작

소풍길

 

            오석영

 

내가 기억하는 첫 소풍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줄을 서서 산에 올라간 일과 부석사란 절을 찾아 분주하게 돌아다녔던 일들이 생각난다. 점심시간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친구들 피해서 소나무 밑에서 혼자 먹었고. 비록 순 보리밥이지만 간장에 버무린 고춧잎 반찬이 꿀맛이다.

 

이젠 그 소풍도 멀리 가버린 채 또 다른 길 위에서 서성인다.

 

머리가 하얗도록 급격하게 변화를 보인 건, 얼마 전에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일어났다. 아내가 갑자기 거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순간이다. 그동안 온갖 병에 걸려 힘들어 했지만 오늘처럼 슬픔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린 적은 없다. 아내가 응급실에서 다시 수술실로 들어가 4시간을 넘기면서부터는 공포로 확 바뀌고 격한 마음이 심장을 뒤흔든다.

사람들은 나이 84세면 관을 등에 메고 다닐 나이라고들 한다. 그래서일까. 이젠 눈앞에 보이는 온갖 조각들이 바람에 채이듯 허공에 던져진 채, 나루터 마른갈대가 서걱거리며 바람에 부대기는 심정이고, 그런 것들이 시야에 잡히다가는 힘없이 멀어지기도 한다. 세상에서 죽음처럼 확실한 게 없는데 무얼 주저할거냐고. 이 순간도 아내에게 세월의 질곡이 얼룩진 채 웅장한 산 그림자가 어깨를 떠밀고 있지 않느냐고.

죽음의 카운트다운 앞에서 그동안 저지른 이율배반적인 행동과 모습들이 후회와 원망으로 물밀듯이 밀려온다. 눈속임으로 영혼의 고운 빛깔을 지니려고 천방지축 뛰어 다녔고, 함박눈 멈춘 뒤 푸른빛 둥근달 뜨기를 바란 허망한 꿈들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며칠 전 북한산 칼바위를 산행하면서, ‘산을 오르는 길은 자신과의 싸움이다.’라고 다짐을 하고는 딴 짓을 했다. 내 능력껏 잘 걷다가도 누가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만 들리면 마음이 바쁘다. 피해의식 때문인지 빨리 가려고 온 힘을 다해 경쟁을 시작한다. 결국 앞선 채 정상에 도달할 때는 혼자서 웃지만, 비탈길에 넘어져 부상을 입을 때는 화를 내기도 했다.

정직한 모습을 유지한 채 욕심은 버리겠다고 선언을 한 자신이, 자빠지고 부상당하는 건 과거에 상처 입은 치우라고 변명만 할 건가? 차라리 고교시절이 더 솔직하고 순수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회 화해의 아이콘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도 창피한 일이지만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그때는 마음이 약해서 같은 반 학생에게 매를 맞기만 했고 싸움을 몰랐다. 잘못도 없이 무시당한 채 매 맞던 순간이 떠오르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단번에 내 귀에 꽂힌다. 눈이 뻘겋게 붓고 앞니가 나간 내 모습을 본 아버지는, 깡패 놈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 길쭉한 강목을 들고 교문 앞을 지켰던 기억의 파편이 실루엣으로 다가와 파도에 쓸려가는 밤바다처럼 고요하게 흔들린다. 피안의 세계를 향해 출구가 보이는 그 길 위에서 보이는 퍼즐이다. 위선도 있었고 부끄러움을 숨기며 살아 온 삶이기에 창피하고 수치스럽다. 무늬 진 세월에서 빛나는 열매도 맺지 못했고, 윤기 난 녹색 잎을 촘촘히 만들어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 못했기에 부끄러운 것이 사실이다. 삶의 마무리도 완전하지 못한 채 죽음도 자신만의 해석으로 변형된 모습만 보이는 것 같다.

이제 나를 흔드는 바람도 오래 머물지 않을 것 같아 자녀들에게라도 말하고 싶다. 그동안 능력이 부족해서 잘 돌보지 못한 잘못에 대해서 먼저 용서를 구한다. 다만 살아온 경험을 되돌아보면 사람 사는 게 별것 아니고, 욕심보다는 마음 편안하게 사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그걸 어머니의 눈빛에서 본 것 같아 전하고 싶다. 어렸을 때 농촌에 살 때 내가 대문 밖을 나설 때마다 어머니는 ‘지금 어데 가느냐?’고 화사하게 웃으셨던 그 아련한 눈빛을 설명하고 싶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그랬다. 평소에 살던 시골집에서 목사의 손을 꼭 잡고 웃으시며 눈을 감았기에 그 모습도 빼놓을 수가 없다. 돌아가신 후 아버지 서랍 속 수첩에서 발견한 내용은 더욱 나를 놀라게 했다. 처음에 검은 글씨로 하나님의 말씀 요한복음 내용을 쓴 건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맨 끝장에 붉은 글씨로 확대해서 쓴 글 내용에서 ‘용서 하세요’ 와 ‘죽어야 합니다.’의 글은 지금도 옹이처럼 무겁게 받아드려 질뿐이다.

우리 아버진 돌아가시면서 상속이란 표현은 안했고 나 또한 나누어 줄 재산도 없기에 할 말은 없다. 자녀들이 알아서 제사 모실 자녀에게 더 선처하고 일부는 형평성에 맞게 해결하기를 바라는데···.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누구나 가을의 누런 들판을 보면 평화스럽고 기쁜 게 사실이라고. 깨달음의 빛과 향기로운 황금들판을 볼 때 스스로 고개 숙여진다고. 형제들 간에도 벼의 황금빛처럼 아름다운 가을을 보려면 서로가 아름다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보듬으며 살아가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지금 생각하면 죽는 일은 현실과 벽을 쌓고 가는 것 일뿐 별 것 아닌 것 같고, 그동안 허무한 삶에서 정직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실천하지 못한 아쉬움만 밀려온다.

 

이제부터 너의 어머니는 내가 간호할 것이고, 본인의 의지로 살기를 바라는데.

 

난 지금 응급실 앞에서 그동안 산과 강을 헤매던 일들이 한곳에 머무른 채 유리벽을 보고 있구나. 죽음은 숨이 끊기는 순간만 의미하지 않아서 내가 여기까지 온 거고 불시에 갈 것도 알기에 그 이상은 믿음만 믿고 판단하고 싶다.

그동안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듯 한줌 모래알 같은 얄팍한 생각으로 현실의 문을 두드리며 정신없이 살았지, 어둠의 섬광 같은 확실한 흐름은 고민하질 않았다. 이젠 죽음 저편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고민하는 순간이다. 어머니의 화사한 눈빛이 또 보인다. 이젠 아버지께서 수첩에 남긴 내용처럼 깔끔한 모습으로 어릴 때 소풍 가듯 그렇게 가야만하지 않을까? 싶다.


2024년 12회 정읍문학상 심사평


2024년 12회 정읍사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4년 12회 정읍사문학상 최우수상 수상작


2024년 12회 정읍사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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