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단일 국가로서의 역사가 짧다고 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강력한 왕권 국가의 기틀을 확립해 나갈 때 이 나라는 중세 대부분의 기간을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제후국과 공국, 주교령으로 나뉘어 살아왔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커다란 지붕 아래 있었을 뿐, 법률도 달랐고, 화폐도 제각각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분권(分權) 시스템은 유럽의 다른 지역들보다 훨씬 자유로운 정신적 분위기를 형성했다. 다양한 주장을 담은 책을 인쇄할 수 있는 기술이 독일에서 맨 먼저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루터가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소리 높여 반박할 수 있었던 것도 독일이었기에 가능했다.
17세기 유럽을 뒤흔든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1618~1648)'은 평화 협상이 열려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끝났는데요. 이 전쟁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된 최초의 국제 전쟁이라고 불려요.
30년 전쟁은 가톨릭을 지지하는 신성로마제국과 개신교를 따르는 국가들의 충돌로 시작됐어요. 1618년 '프라하 창문 밖 투척 사건'이 전쟁의 촉매제 역할을 했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보헤미아 지역에는 개신교도가 많았지만, 가톨릭을 믿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고 있었어요. 17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교적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보헤미아인들의 불만이 커졌습니다.
의도했든, 아니든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개인주의와 근대화의 씨앗을 뿌렸다. 2017년은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을 촉발(1517년 10월31일)한 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해서 독일관광청은 2008년부터 2017년까지를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루터 10년’으로 정했다.
중세 독일의 역사적 실체는 매우 복잡하다. 19세기에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주도 아래 '독일제국'으로 통일되기 전까지 중동부 유럽에는 크고 작은 정치 단위 수백 곳이 난립해 있었다. 예수가 생전에 신고 다니던 샌들을 보관하는 프륌 수도원공국(Fürstabtei Prüm) 같은 작은 나라부터 작센이나 바이에른 같은 대규모 공국까지 각국의 규모나 성격이 천차만별이었다.
가장 선진적인 헌법으로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시초로 꼽히는 바이마르 공화국은 왜 히틀러로 귀결됐는가. 제왕적 대통령의 욕망, 가치를 저버리고 세(勢) 불리기에만 여념 없었던 우파, 붕괴한 사법시스템이 낳은 참사였다고 미국 뉴욕시립대 역사학과 교수는 진단한다. 원제 ‘민주정의 죽음(The Death of Democracy)’이 드러내듯 이 책은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년) 민주주의 붕괴에 대한 사례 연구다. 저자는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종말은 갈수록 음모론과 비합리성에 치우치는 문화 속에서, 나치가 엘리트들의 복잡한 이기주의와 결합한 결과”라고 본다.
안내자는 30년 가까이 영국 국립미술관과 대영박물관 관장을 지낸 닐 맥그리거다. 그는 베를린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비를 보며 그 실마리를 발견한다. 수도 한복판에 수치스러운 역사를 담아 기념비를 세우는 나라는 독일뿐이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추모비 외에도 뮌헨 개선문은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당시 프랑스 편에 서서 같은 독일 민족을 공격했던 바이에른 군대의 배신을 담은 것이다. 부끄러운 역사조차 분명히 밝히고 이를 단호히 질책하며 미래로 이끄는 자세야말로 독일이 다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물론 중책을 맡게 된 배경이다.
교황청, 성당 증축하려 면벌부 팔자 루터가 반박문 발표해 개혁 시작
교황청 지배 벗어난 신교도 급증, 유럽 전체로 신교·구교 갈등 번져
30년 전쟁 후 종교의 자유 획득… 중세 막 내리고 근대가 시작됐어요
15~16세기 무렵 오랜 시간 막강한 힘을 휘두른 교회와 성직자들이 부패하면서 부정 축재를 일삼고 황제·군주와 결탁해 농민들을 착취하는 일이 흔해졌어요. 그러자 이를 비판하는 사람도 하나둘 늘어났답니다. 법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신부가 된 루터도 그중 하나였지요. 당시 교황청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증축하고자 사람들에게 면벌부(2003년 7차 교육과정 개편으로 '면죄부'가 '면벌부'로 바뀜)를 팔았어요. "면벌부를 산 사람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지옥에 가는 벌을 받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며 신도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인 것이죠. 보다 못한 루터는 면벌부를 파는 교황청과 로마가톨릭교의 문제를 지적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였답니다.
'독수리주막'과 붙어있는 비텐베르크 양조장(Brauhaus Wittenberg)과 호텔은 원래 독립된 두 건물이었다. 마르크트 7번지에 있는 호텔 건물은 1480년에 지어진 맥주집을 가진 여관이었고 지금도 같은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맥주집이 바로 마르틴 루터가 단골이었다는 ‘검은독수리’ 자리이다. 당시에 주인은 마르틴 루터를 위해 지정석을 준비해두었다 한다.
마르틴 루터의 위대한 여정 ④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처음부터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다. 전 유럽을 뒤흔들어 놓으리라 의도했던 것도 아니고 예상한 것도 아니다. 비텐베르크 성교회(Schlosskirche Wittenberg) 대문에 대자보를 붙이는 것은 자주 발생하는 일이었으므로 루터가 95개 조로 구성된 반박문을 붙인 것이 즉시 주목받은 것은 아니다. 또 라틴어로 썼기 때문에 교수나 수사들만 읽을 수 있어서 그 파급이 즉시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어로 번역된 인쇄본이 퍼져나가 평신도들이 읽을 수 있게 된 이듬해 초가 되어서 대중적인 반향이 시작되었다.
중세 인간은 편안했다. 세계의 의미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신은 절대적이고 선과 악은 교회가 규정했다. 그러나 루터 이후에 상황은 바뀌었다. 구원의 확신은 교회가 아니라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문제가 되었다. 신은 존재하지만 침묵하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드디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햄릿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하나님 앞에 서서 루터가 외쳤던 “주여, 여기 제가 서 있나이다”라며 죽음을 무릅쓴 루터의 결단은 세상을 바꾸었지만 인간 모두가 루터가 될 수는 없었다. 바뀐 세상에서도 결단할 수 없는 대다수 인간은 불안과 우울에 빠졌다. 근대 지식인의 초상이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그린 인간의 모습이다.
이때 브란덴부르크의 군주는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1620 ~1688년)이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이미 '대선제후(Great Elector)'라 불린 위대한 리더였다. 낭트의 칙령 폐지로 프랑스에서 내쫓기기 시작한 위그노들은 보잘것없는 난민이 아니라 유럽 최고의 지식과 기술을 가진 엘리트 집단이었다. 유럽의 변방에 위치한 척박한 나라 브란덴부르크의 군주로, 평생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꿈을 품고 질주했던 대선제후에게 이들은 소중한 자산임이 분명했다. 그는 위그노들에게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제도적, 물질적 특혜를 제공했다. 예배를 프랑스어로 드릴 수 있는 권리와 위그노만의 교회 설립까지 약속했다.
브란덴부르크 공국(公國)의 작은 수도였던 베를린은 1701년 프리드리히 1세가 프로이센 왕국의 초대 왕으로 즉위해 왕국 수도로 선포하면서 유럽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우뚝 섰다. 베를린의 약진엔 선진 기술을 지닌 외국 인재를 적극적으로 유치한 프로이센 제왕들의 노력이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공국 말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공은 프랑스가 신교도 위그노들을 탄압하자 그들에게 특별 대우를 약속하는 칙령을 반포하며 이민자 유치에 나섰다. 염색·섬유 분야 수공업자였던 위그노들을 불러들인 선택은 베를린을 유럽 섬유 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게다가 위그노가 들여온 커피와 정원 문화 덕에 베를린은 '북쪽의 아테네'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문화와 예술이 융성하고 축제와 여흥도 발달했던 당시 영국 귀족들은 고대 스파 도시 바스의 펌프 룸에 모여 온천수를 마시고 사교계 활동을 했다. 바스에는 사교계의 주인으로 불리던 '보(Beau, 멋쟁이) 내시(Nash)'가 있었는데, 그는 1704년부터 약 반세기 동안 바스 사교계의 주인 격인 '마스터 오브 세레머니(Master of Ceremonies)'로 활약하면서 스스로를 '바스의 왕'이라 칭했다. 당시 서울은 소설에 푹 빠져 있기도 했다. 규방 처자들은 물론 임금과 비빈까지 소설에 재미를 붙여 책을 빌려주는 산업이 발달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688. 8.14~1740.5.31)는 1713년부터 1740년까지 프로이센의 2대 국왕으로 재임했다. ‘군인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독일인의 특성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강한 책임감, 정확성, 행정 규정의 엄격한 준수를 든다. 이러한 특성은 프로이센 시대의 관료제와 상비군 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관료제와 상비군 제도는 프로이센을 강하게 만든 2대 요소다. 이 제도를 정착시킨 사람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이다.
로마 누마, 獨 프리드리히 2세… 개인적 성품·취향 한계 넘어서 공적 역할과 책무 성공적 수행
宋나라 양공 같은 리더는 개인 도덕률에 빠져 본분 잊고 조직을 파탄·혼란에 빠뜨려
현대 독일의 시발점이 된 원형(原型)은 동유럽 변방에 있던 프로이센 공국이다. 프로이센을 국가로 도약시킨 주인공은 프리드리히 2세(1712~1786)인데 그는 왕자 시절 국정(國政)에는 관심 없고 예술과 철학에 빠진 감수성 풍부한 문학청년이었다. 엄격한 부왕(父王)이 군대식 규율과 가혹한 훈련을 강요하는 걸 견디다 못해 해외 도피를 감행했다가 실패했다. 자신은 유폐되고 동행한 친구는 참수형을 당했다. 이런 고난은 역설적으로 그가 주어진 운명을 깊이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
프리드리히가 왕위에 오른 그해 10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인 카를 6세가 죽었다. 남자 상속인이 없었기 때문에 대공녀 마리아 테레지아(Theresia·재위 1740~1780)가 영지와 작위, 권리를 모두 상속받았다. 500년 합스부르크 역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탁월한 전략적 안목의 소유자였던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의 국제적 지위를 바꿔놓을 절호의 기회임을 직감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 가운데 가장 산업이 발달하고 부유하며 전략적 요충지인 슐레지엔을 노렸다.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2세,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병으로 사망… 이후 20년 가까이 황제 자리 비어
"새 황제 빨리 뽑아라" 교황 통보에 선거권 가진 제후들이 회의 열어 합스부르크 가문 루돌프 1세 선출
◇신성로마제국의 기원
고대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무너진 뒤 서유럽은 오랫동안 분열의 시대를 보냈습니다. 7~8세기에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유럽 세계를 공격했고요. 이런 위기 상황에서 프랑크 왕국의 유능한 신하였던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슬람의 침공을 막아냈어요. 서유럽 세계의 영웅이 된 카롤루스 마르텔은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차지하게 되었지요. 나아가 카롤루스 마르텔의 권력을 이어받은 아들 피핀은 강제로 왕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답니다.
피핀에 이어 왕이 된 카롤루스 대제(742~814년)의 활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였어요. 그러자 교황은 카롤루스 대제를 '서로마제국의 후계자'이자 '로마제국의 황제'로 지목하였습니다.
[여행속으로 자연속으로] 오늘날의 독일 밑거름이 된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와 상수시 궁전
김광철 주주통신원 입력 2018.12.27 09:56 수정 2018.12.27 14:27
유럽 최강의 군대를 키우고 여러 차례 침략 전쟁을 일으키면서 문화 발전에 기여했던 임금
알프스 이북의 중부 유럽은 신성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렇다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제후들이 통치를 하는 제후 연방국가와 같은 느슨한 형태의 황제국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힘이 약하던가, 특정한 지역 제후 중에서 야심가가 나타나서 주변국들을 정복하던가, 왕위 계승 문제를 가지고 시비가 일어난다든지 하면 힘 있는 왕국이나 제후국들은 전쟁을 일으켜 해결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갔다. 그런 역사 속에서 유럽의 왕실들과 힘 있는 제후국들 중에는 혼인 관계를 맺으며 합종연횡을 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유명인 중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만큼 걸출한 ‘안티팬’도 없었다. 그가 직접 쓴 <안티 마키아벨>은 제목부터 노골적이다. 이 책은 <군주론>과 똑같은 순서와 체계로 구성되어 각 장에서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를테면 <군주론> 17장에는 “사랑받기를 갈구하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낫다”는 주장이 나온다. 반면 <안티 마키아벨> 17장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어떤 왕이든 백성의 공포심 위에 군림하는 것이 유일한 정책 목적이라면 결국 겁쟁이와 노예들 위에 군림하게 될 뿐”이라며 “군주의 선함은 결코 단점이 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왕세자 시절부터 계몽군주가 되겠다고 다짐한 프리드리히 2세는 냉혹한 마키아벨리즘 정치학을 극도로 혐오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입력 : 2020.05.06 03:00
18세기 프로이센 왕국의 3대 국왕
동유럽 '슐레지엔' 지역 차지하려 오스트리아와 대규모 전쟁치러
1763년 승리했지만 국토는 황폐화
아메리카 대륙 신작물이었던 감자 적극적으로 보급하며 식량난 개선
◇8년간 치러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01년 독일 북부 지역에 세워진 프로이센 왕국은 제2대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 대규모 상비군과 관료제를 기반으로 유럽의 강국으로 발돋움합니다. 그의 아들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을 더욱 부강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즉위하자마자 영토 확장에 집중합니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가 탐냈던 땅이 있는데요, 폴란드와 체코에 걸쳐 있는 '슐레지엔' 지역입니다. 슐레지엔은 석탄·철·납 등 광석이 풍부해 역사상 지배권 분쟁이 잦았던 지역이에요. 당시 슐레지엔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어요.
** 프로이센 성장사 "300여 개로 찢어졌던 그들! 어떻게 세계 최강이 되었나?" [세계대전 프리퀄①] 역전다방 157회ㅣ국방홍보원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15] 보이시나요, 이 동화같은 도시의 세 남자 꿈이
조선일보
인스브루크=송동훈 문명탐험가
입력 2018.10.18 03:01 | 수정 2018.11.01 03:37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 가면 세 개의 꿈을 기억하세요
'합스부르크(Habsburg).'
1493년 오랜 기다림 끝에 가문을 일으켜 세울 사람이 나타났다.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Ⅰ·재위 1493~1519). 그는 허울뿐이던 황제의 나라 오스트리아를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로 만들 터였다. 그런데 그의 주무대는 빈이 아니었다. 알프스 산골짜기에 있는 작은 도시 인스브루르크였다.
유럽의 근대사, 세력지도를 바꾼 전쟁이 보오전쟁(1866년)과 보불전쟁(1870∼1871년)이다. 프로이센이 강국으로 떠오르고 독일 통일을 목전에 두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방해를 시도했다.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이어 프랑스까지 격파했다. 유럽의 강자가 바뀌었고, 프로이센은 거침없이 내달려 독일 통일을 완성함으로써 더 강한 국가가 되었다.
덕분에 1880년대 중반이 되었을 때, 독일은 본토의 산업 생산량만 놓고 보면 어느덧 유럽 제일의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1888년, 온건한 자유주의자인 2대 카이저(Kaiser) 프리드리히 3세(Frederick III)가 재위 99일 만에 급서하고, 아들 빌헬름 2세(Wilhelm II)가 새롭게 보위에 오르자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불과 29살에 황제가 된 그는 아버지와 달리 상당히 야심만만하고 군국주의적인 인물이었다.
독일의 빌리 뮌첸베르크(Willi Münzenberg·1889~1940)는 오늘날에는 거의 잊힌 인물이지만 전간기(戰間期·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거대한 좌파 미디어 조직가였고 프로파간다(선전·선동)의 귀재였다. 최근 한 역사가는 그에게 ‘마르크시스트 루퍼트 머독’이라는 별명을 부여했다. 그는 정치 프로파간다를 위해 신문, 잡지, 영화, 연극 등 각종 미디어를 종합적으로 사용한 최초 인물이며, 많은 지식인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도록 유도했다. 그가 나치의 프로파간다 전문가 괴벨스보다 한 수 위였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성을 지은 루트비히 2세는 1864년, 열아홉 나이에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독일 지역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되면서 바이에른은 자율성을 잃고 왕의 지위 또한 상징적인 수준으로 축소됐다. 루트비히 2세가 중세 기사의 전설을 주제로 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과 ‘탄호이저’에 걷잡을 수 없이 매료된 건 필연이었다. 백조가 끄는 배를 타고 나타나 공주를 구하는 신비로운 기사 로엔그린은 자기 정체를 밝혀야 하는 순간에 멀리 떠나야 했다. 죄를 뉘우쳤지만, 오직 죽은 다음에서야 구원을 받은 기사 탄호이저의 절망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속수무책으로 사라져 가는 바이에른 왕국을 위한 애가(哀歌)와도 같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시에서 벌어진 활발한 교류를 언급한다. 18세기 베를린에서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신교도들과 유럽에서 모여든 유대인들 역시 프로이센 왕국의 자랑스러운 국민이었다. 장다르메마르크트 광장에서 대칭을 이루고 있는 두 개의 돔 중 하나는 기존 베를린 시민인 루터파 신교도를 위한 교회,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민인 위그노파 시민을 위한 교회로 이방인에 대한 관대함을 상징한다.
바이에른 오페라, 뮌헨 필, 칸딘스키… 전혜린의 '잿빛 뮌헨'을 뒤집다
[아무튼, 주말]
[김기철의 라르고]
예술도시 뮌헨을 가다
김기철 칼럼니스트
입력 2026.05.09. 00:30
뮌헨에 대한 한국인의 이미지는 전혜린에게 빚진 게 많다. 1955년 뮌헨대 최초의 한국인 여자 유학생으로 온 전혜린은 포플러 나무 우거진 대로변 카페에 앉아 맥주를 들이켜며 보헤미안처럼 자유롭게 청춘을 즐기는 젊은이들을 감성적인 문체로 묘사했다. 1965년 서른한 살 젊은 나이에 떠난 그의 유고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반세기 넘게 베스트셀러가 됐다. ‘뮌헨’ 하면 잿빛 하늘과 음산한 날씨, 자유와 반항적 분위기 가득한 도시가 연상됐을 정도다.
그러나 빌리 브란트 정권의 탄생은 독일 문제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서독의 커진 국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동독을 사실상 협상 상대방으로 인정해 긴장 완화와 인도적 교류를 확대하고자 했습니다. 소련 등 동구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äherung)”를 도모하는 이른바 ‘동방 정책(Ostpolitik)’입니다. 기민당으로부터 반통일의 분단 고착정책이라고 비난까지 받았지만, 브란트는 여전히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기민당과 국민 정서를 고려하고 급격한 변화를 자제했습니다. 1982년 다시 우파 기민당 헬무트 콜 총리로 정권이 바뀌었으나 콜 총리는 동방 정책을 승계해 동독에 대한 지원과 교류를 강화했습니다.
3일에 걸쳐 독일연방의회와 브란덴부르크문 등을 답사한 연수단은 나흘째부터 베를린을 떠나 장벽을 원형 그대로 보존한 옛 동·서독 국경 도시 회텐스레벤, 동독과 소련의 감청 시설이 들어섰던 군사기지였다가 생태 관광지로 바뀐 브로켄산, 동독 체제를 선전하는 국영방송국으로 쓰였지만 통일 후 폐허로 방치됐다가 지금은 통일 교육장으로 활용되는 젠데할레 바이마르, 1989년 동독 전체로 확산한 통일 요구 시위가 처음 벌어졌던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버려진 역의 대변신
'반호프(Bahnhof)'는 독일어로 기차역이란 뜻이에요. 함부르거 반호프는 베를린과 함부르크를 잇는 철도의 베를린 쪽 종착역으로 1846년 문을 열었습니다. 이름은 '함부르거'이지만, 이 역은 베를린에 있어요. 함부르크행 열차가 출발한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기차역으로서의 삶은 그리 길지 않았어요. 불과 400m 떨어진 곳에 더 큰 역이 들어서면서 개장 38년 만인 1884년에 철도역으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말았거든요. 이후 철도 박물관 등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피하진 못했어요. 폭격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된 데다 동독과 서독으로 베를린이 분단되면서 이 역은 비무장 경계 지대 근처에 덩그러니 방치됐어요.
[고영애의 건축기행] 독일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 Hamburger Bahnhof Museum für Gegenwart Berlin
김영회 에디터 + 입력 2024.12.27 06:00 수정 2026.02.09 22:45
주요 컬렉션으로는 1968년 이후 작품 위주로 앤디 워홀, 사이 톰블리, 로버트 라우젠버그, 로이 리히텐슈타인, 안젤름 키퍼, 조셉 보이스, 로버트 라이먼, 존 케이지 등의 세계적인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로 구성된 에리히 막스 컬렉션이 있고, 1980년대 150여 명의 작가들로 구성된 2000여 점의 현대미술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프릭 컬렉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