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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극복 수기공모전' 대상에 은한기씨 선정 |
| 2008-09-19 09:51:16 |
▶대상:은한기(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금상:정병율(대구시 북구 침산3동) ▶은상:박부호(경북 경주시 황성동), 박해봉(대구시 북구 산격2동) ▶동상:조영재(대구시 수성구 지산1동), 함주희(서울시 강남구 개포동), 김현아(싱가포르 Block 207D), 정혜란(경북 경산시 정평동) ▶장려상:황보성애(경북 의성군 단북면), 조소정(대구시 북구 관음동), 황화식(대구시 달서구 신당동), 김배규(경남 진해시 자은동), 차문희(강원도 춘천시 퇴계동), 이우하(대구시 북구 동변동), 조기현(대구시 수성구 파동), 손점희(대구시 남구 봉덕3동), 이순복(대구시 동구 용계동), 김태숙(대구시 북구 읍내동)
출처 : https://www.imaeil.com/page/view/2008091909512436397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출처 : https://www.imaeil.com/page/view/200810021049278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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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극복수기 당선작] 새로운 삶을 위하여 | ||||||||||||||||
항상 영업에 대해선 자신감이 있었고, 대구`경북 지역을 책임지는 지점장이 되기 위해 노력하던 나에게는 더욱더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지점장이 되기 위해 이직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부도가 난 회사를 인수하여 크게 키울거라는 경영자의 말만 믿고 2006년 3월 회사를 옮겼지만, 자금사정으로 제품생산이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월급도 처음엔 80%가 지급되더니, 그마저도 50만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모기업인 ACTS의 경영권이 넘어가고 이텍스제약도 흐지부지되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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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극복 수기 당선작] 무궁화 꽃을 떠올리며 금상/정병율 | |||||||||||||||||||||||
아닌 게 아니라 나는 공사장에서 일한다. 소위 말하는 막일을 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마치는 시간이 일정치가 않았다. 아내는 아직도 내가 그전 직장에 다니는 줄 안다. 아무래도 아내는 근로조건과 월수입도 꽤 괜찮은 데를 자기남편의 평생직장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 기대를 저버리기 싫은 까닭에 나는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거짓말이나 일삼고 있다. 공사장의 잡부일은 고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출처 : https://www.imaeil.com/page/view/200810090648364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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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극복수기] 은상 '가을이 익는 들녘에 서서 ' | ||||||||||
내가 태어나고 자란 부산을 떠나와 천직처럼 생각하고 몸담았던 대구의 첫 직장서 명예퇴직한 것이 1998년 2월. 그 후 몇 군데 더 직장생활을 하며 마지막 직장이 됐던 한국언론재단서 퇴직한 것이 2002년 12월 말. 말이 좋아 명퇴지 정리해고나 다름없었던 서너번의 퇴직으로 누적된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마지막 퇴직을 꼭 1주일 앞두고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으니 겨우 50대 초반의 나이 때부터 반신불수가 된 육신을 부둥켜안고 살아온 지도 어언 6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2002년 12월 23일. 평생 잊을 수 없을 그날은 무척 추운 날이었다. 강권에 따라 사표는 이미 반년 전에 제출하였고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다시는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는 몸이 된다는 강박관념에 정말 치밀어 오르는 어떤 분노와 절망감으로 몸이 훨훨 타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출처 : https://www.imaeil.com/page/view/2008102309462386501 실업극복 수기 당선작을 뽑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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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와 경남행복내일센터는 20일 “경상남도 중장년 인생 2막 성공 수기 공모전 수상작으로 전두만씨의 ‘인디언 기우제를 아시나요?’ 등 7편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출처 : https://www.hani.co.kr/arti/area/yeongnam/1109356.html
면접 기회는 좀처럼 잡기 힘들다. 그마저도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 일쑤. 열심히 살아온 인생인데 뭐가 잘못된 걸까. 그 해답을 스스로 찾을 수 없다면,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한 단계다. 이에 재취업 상황별 전문 컨설턴트들의 이야기를 통해 중장년 구직자의 행태를 짚어보고, 그 해결점을 모색해보려 한다. ‘시니어 잡:담회(Job:談會)’ 그 마지막 순서는 ‘취업 후기 편’이다.
출처 : https://bravo.etoday.co.kr/view/atc_view/14670
한국고용정보원, 워크넷 활용 취업성공 수기 당선작 공개
12.28 (별첨) 2023년 취업성공수기(한국고용정보원).pdf
12.28 한국고용정보원, 워크넷 활용 취업성공 수기 당선작 공개(한국고용정보원).pdf
출처 : https://www.korea.kr/briefing/pressReleaseView.do?newsId=156608124
100세 시대,준비 없는 노년을 맞을 순 없죠
최귀옥 57세·(주)P서비스
57세의 여성 세탁부. 대규모 세탁 서비스 공장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인물이다. 그런데 ‘전직 은행원’이라고 하면 보는 눈이 조금 달라진다. 게다가 남편과 두 아이까지 모두 번듯한 직장인이라면, 의아한 눈길은 더욱 많아진다. ‘그런 사람이 왜?’ 최귀옥 님의 답은 명쾌하다. “다가오는 100세 시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요?”
이제 다시 시작이다
갑작스러운 한파 때문에 행인들의 발걸음마저 뜸해진 어느 날의 저녁 무렵이었다. 입김을 호호 날리며 자택 근처의 한 카페에 들어서니 먼저 와 있던 최귀옥 님이 환한 얼굴로 맞아준다. “죄송해요. 밤 9시나 되어야 퇴근을 하기 때문에 회사 근처에서는 뵙기가 어려워서….”사흘 일하고 하루 쉬는 일정. 아침 7시 40분에 출근해서 저녁 9시가 되어야 끝나는 빡빡한 근무다. 게다가 평생 ‘사무직’ 일만 했지, 순전히 몸을 써서 하는 일은 생전 처음이다. 하지만 최귀옥 님의 얼굴에서는 ‘힘들다’라는 하소연보다는 ‘이제 다시 시작이다’ 하는 의지가 훨씬 크게 묻어나왔다.최귀옥 님은 결혼 전까지 지금은 우리은행으로 이름이 바뀐 상업은행에서 6년 6개월 간 행원생활을 했다. 은행원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은행의 꽃이라 불리는 창구 업무를 주로 맡았고, ‘친절한 은행원상’을 받았을 정도로 능력과 서비스정신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소위 ‘경단녀’(경력단절여성)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 작은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나이가 되니까 슬슬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초등학교 과학 조교로 취업이 되어서 7년간 일을 했다. 과학 조교가 하는 일은 과학 실습교재 구입과 과학 실습 보조 역할이다. 그리고 서울시청 정보통신과, 교통상황실, 농수산과 등에서 계약직으로 꾸준히 일을 하며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고, 작은 중소기업에서는 경리업무를 맡아 3년 동안 일했다.
10개월 동안 쉬면서 느낀 것은, 다시 일해야 한다는 것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최귀옥 님이 지금 직장으로 옮기기 전까지 일했던 곳은 ‘천주교 인천교구청’. 신부님을 보필하는 업무를 3년 7개월 동안 하다가 올해 1월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만두고 말았다. “몸이 안 좋았어요. 갑상선 쪽에 갑자기 혹이 생기더니 점점 커지더라고요. 병원에 갔더니 갑상선낭종이라고 하더군요. ‘암’은 아니었지만, 몸이 불편해서 계속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딸과 아들, 남편도 휴식을 권했다. 따지고 보면 결혼과 육아 때문에 쉬었던 기간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일을 놓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도 ‘아들 딸 좋은 직장 다니고 있고, 남편도 돈 잘 버는데, 이제 그만 쉴 때도 됐다’고 권했다. 결국 최귀옥 님은 생애 처음으로 10개월이라는 긴 휴식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못해봤던 것도 실컷 했다. 국내 여행은 물론, 딸과 함께 동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성당 봉사활동도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했다. 그렇게 마음 푹 놓고 쉬니까 갑상선낭종도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 휴식이 보약이었다. “그런데 10개월 동안이나 쉬니까 몸이 근질근질해지더라고요. 제가 원래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게다가 이제는 100세 시대잖아요. 아직 환갑도 안 됐는데 이렇게 손 놓고 앉아서 노년을 맞이하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장년일자리희망넷과의 만남
그녀는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운영하는 장년일자리희망넷과 만났다. “처음 장년일자리희망넷을 발견했을 때는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어요. 아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자리 소개 좀 시켜줘라’ 하면서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제 나이 또래 사람들이 갈 만한 일자리 정보가 가득했거든요. 이력서 쓰기, 면접 요령 등 취업에 필요한 각종 정보와 자료도 많았죠. ”하지만 나이’라는 걸림돌은 예상보다 훨씬 큰 장애물이 되었고, 취업의 문은 좀처럼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장년일자리희망넷을 통해 꼭 일하고 싶은 회사가 눈에 띄었다. 급한 마음에 담당 기관인 노사발전재단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만난 컨설턴트가 바로 해당 기업을 담당하던 노사발전재단 서울서부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서울서부센터) 권혜영 차장이었다. “본래 권혜영 차장님은 기업 담당자였는데, 제가 그 회사에 취업을 하고 싶다고 하니까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그쪽 담당자와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제 취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주었습니다. 이렇게 제 상황에 맞춰서 직접 상담도 하고 취업을 위해 나서주니까 ‘나 혼자가 아니구나’ 하면서 뭔가 기댈 곳이 생긴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최귀옥 님이 꼭 일하고 싶었던 곳은 국내 항공사에서 나오는 시트와 무릎담요 등의 각종 세탁물을 다리고 관리하는 회사였다. 평생 해왔던 사무직은 아니었지만, 1~2시간 정도 초과 근무를 하면 월 200만 원 정도의 급여가 보장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권 차장님을 통해 이력서를 넣고 나름 희망을 갖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익숙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동안의 제 이력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죠. 그런데 막상 돌아온 대답은 ‘정년이 3년도 채 남지 않아서 채용이 어렵다’ 하는 것이었죠. 역시 ‘나이’ 때문에 안 되는구나, 하고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절당한 회사를 직접 찾아가 재취업 성공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권 차장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어렵지만 새로운 일자리를 좀 찾아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런데 권 차장이 뜻밖의 권유를 해왔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아직 정년까지는 몇 년의 기간이 남아 있으니 회사를 직접 방문해서 취업에 대한 의지와 그동안의 경력을 설명해주면 의외의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조언이었다. ‘57세’라면, 사실 어떤 회사에서도 흔쾌하게 취업을 받아들일 나이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수 있는 나이는 아니라는 뜻. “속으로는 ‘직접 찾아간다고 해서 별다른 효과가 있을까?’ 하는 망설임은 있었지만 권 차장님의 격려에 용기를 냈죠. 언뜻 차장님의 말씀에서 ‘여러 번 권유를 해봤는데 나이 때문에 다소 망설이는 것 같기는 해도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더라’ 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거든요.”그렇게 스스로 용기를 내서 찾아간 곳이바로 김포공항 인근에 있는 ㈜P서비스였다. 당시 인사 담당 상무는 서류심사에서 떨어진 사람이 직접 본사까지 찾아온 열정에 감탄을 하고 시간을 내어 면접을 봐주었다. 그리고 최귀옥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류를 다시 꼼꼼히 살펴본 다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재원’이라는 평가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여기서 꼭 일하고 싶어요” 하는 최귀옥 님의 이야기에 “저도 꼭 뽑고 싶어요” 하고 화답을 해주었다. 결국 인사 담당 상무는 최귀옥 님에게 집에서 먼 본사가 아니라 비교적 가까운 다른 곳을 추천해주었다. “제가 전화를 해놓을 테니 가서 제 이름만 대면 됩니다” 하면서…….
엄마 출근시켜주는 딸 밥 차려주는 신랑
이처럼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를 온몸으로 보여준 최귀옥 님은 이제 막 한 달째 근무를 하고 있다. 아침 7시 40분까지 출근해서 잔업까지 처리하면 보통 저녁 9시쯤 되어야 일이 끝난다. 3일 일하고 하루 쉬는 방식이라 그동안 해오던 성당 일도 예전처럼 하기가 어렵고, 생전 처음 해보는 몸 쓰는 일이라 아직은 적응도 제대로 못한 상태지만 이 역시 삶에서 한 번은 겪고 넘어가야 할 산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힘들죠. 상무님 덕분에 집 가까운 곳으로 배치를 받았지만, 대중교통으로 다니려면 1시간 넘게 걸리거든요. 다행히 딸아이가 아침마다 저를 먼저 출근시켜주는 덕분에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에요. 저 힘들게 일한다고 신랑이 밥도 해주고, 저녁마다 상을 차려주고 그러니까 오히려 더 좋아진 점도 있네요. 하하하.” 동유럽이며 일본이며 호주까지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준 착한 딸이다. 한 달째 집안 살림도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오히려 자신을 도와주려 애쓰고 있는 신랑과 아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크다. 새벽잠 줄여가면서 출퇴근을 시켜주는 딸에게 무엇보다 감사한다는 최귀옥 님. 물론 무엇보다 고마운 분은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도전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서울서부센터 권혜영 차장이라고 강조한다. 사실 최귀옥 님은 지금 상당한 고민 중이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지만,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여러 모로 조건이 달라서다. “본래 5시 반 퇴근인데, 그게 제 맘대로 안 되네요. 잔업을 하다 보면 늘 저녁 9시나 되어야 끝나거든요. 일이 힘든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데, 제 생활이 아예 없어지는 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어렵게 들어왔기 때문에 끝까지 버텨야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과연 이것이 최선일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하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다시 권 차장님과 상의를 해봐야죠.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는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거예요.”
실패는 있어도 포기는 없다
최귀옥 님은 중장년 재취업에 있어서 구직자의 적극적인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좋은 사례다. 인터뷰 내내 최귀옥 님이 강조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이 든 여자들이 재취업하기가 더 힘든 상황인 것 맞아요. 하지만 용기를 가지고 직접 부딪쳐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서류만 내놓고 기다리지 말고 전화라도 한 통 더 해보라는 거죠. 그러면 반응이 오더라고요. 취업으로 바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
어려움에 처한 회사 내 힘으로 살려내겠습니다
옥종석 46세·(주)성신ENC
잘 알려진 영어 속담 가운데 ‘A willing burden is no burden.’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말로 하면 ‘자진해서 지는 짐은 무겁지 않다’는 뜻이다. 회사 상황이 어려움에도 옥종석 님을 선택한 성신ENC와 회사가 어려운 줄 알면서도 기꺼이 입사를 결정한 옥종석 님은, 어찌 보면 회사의 재도약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파트너다. 하지만 그 짐은 결코 무겁지 않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하고 있는 중
듬직한 체구에 사람 좋은 웃음. 성신ENC 사옥 마당에서 만난 옥종석 님의 첫인상이다. 한때 보험영업으로 톱을 달렸던 힘이 어쩌면 바로 저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먼저 식사부터 하고 말씀 나누실까요?”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인근에 있는 몇 개의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마치 ‘구내식당’처럼 운영하는 곳이었다. 성신ENC의 마크를 단 사람들과 함께 몇몇 회사의 로고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이 바로 공단이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는 풍경 속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출근한 지 이제 3개월째 접어드네요. 바로 엊그제 입사한 것 같은데, 벌써 겨울이라니……. 본래 해외 영업을 맡기로 하고 입사를 했는데, 지금은 국내 영업을 비롯해서 가리는 일 없이 다 하고 있습니다. 경력직이긴 하지만, 신입이니까 네 일 내 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옥종석 님이 성신에 입사하기 전 직업은 ‘보험영업맨’. 한때는 월 4,000만 원씩 ‘입금’을 했을 정도로 잘 나가는 영업맨이었다. 꽃피는 봄날처럼 좋은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갑작스러운 부친의 ‘폐암 선고’였다.
“작년(2014년) 3월에 부산에 계시던 아버님이 동아대병원에서 폐암 말기 선고를 받으셨어요. 마침 어머니도 몸이 안 좋았고, 나머지 형제들도 아버님을 모시고 다닐 상황이 안 되었죠. 다행히 보험 영업은 ‘개인사업자’니까 비교적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제가 아버님을 모시고 다니기 시작했죠. 그러다 동아대병원보다는 국립암센터가 더 나은 것 같아서 아버님을 인천 저희 집으로 모시고 일산 암센터를 다니시게 했죠.”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 만난 노사발전재단 인천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안타깝지만 옥종석 님의 부친은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제야 비로로 정신을 차리고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보니 이미 대부분의 고객이 떠난 뒤였다. “원래 보험이 고객의 마음을 잡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1년 가까이 아버님 병수발 드느라 고객관리에 소홀했더니 거의 다 떠나고 말더라고요. 섭섭하지는 않아요. 당연한 일이니까. 그렇잖아도 대면 영업에 지쳐서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하던 차라, 이참에 차라리 직업을 바꿔야겠다 하고 결심을 했죠.” 제일 먼저 시도한 일은 ‘기사자격증 따기’였다. 본래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비교적 취업이 쉬울 것 같은 전기기사자격증에 도전해서 올해 5월에 취득에 성공했다. 하지만 막상 자격증을 따고 보니 생각처럼 취업이 쉽지 않았다. 어느덧 45세에 접어든 나이도 걸림돌이 되었지만, ‘현장 경험’이 없다는 게 큰 걸림돌이 되었다. “당당하게 자격증을 따고 나서 전기기전이나 전기기사 자리를 찾아서 여러 번 취업 시도를 했죠. 그런데 어디를 가나 ‘경험’이 문제가 되더군요. 게다가 막상 취업이 된다 하더라도 생각보다 열악한 처우 조건이 마음에 걸렸어요.”그렇게 취업 전선 앞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노사발전재단 인천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인천센터)를 알게 되었다. 옥종석 님이 먼저 손을 내민 게 아니라 인천센터에서 먼저 이메일을 보내왔던 것이다. 곧바로 회원 가입을 하고, 담당 컨설턴트와 수시로 연락하면서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고급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한편 인천센터에서 하는 재취업 관련 특강도 열심히 듣고, 항상 두 귀와 두 눈을 재취업 정보에 열어두었다. 그러다 한명진 담당 컨설턴트로부터 굿 뉴스가 날아들었다. 인천센터와 남동산단이 주최하는 채용박람회가 열릴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채용박람회에서 만난 인연 성신ENC
“사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여러 군데의 채용박람회를 다녀봤지만 큰 소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참여를 고민했죠. 그런데 한명진 컨설턴트님 얘기를 들어보니 이번 박람회는 기존 박람회와 조금 성격이 다른 것 같더라고요. 남동공단에 위치한 50여 개의 업체들이 모여서 주로 40~50대의 중장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박람회라는 거예요.”의구심을 말끔히 털어낸 옥종석 님은, 컨설턴트의 조언에 따라 이력서와 각종 증명서 등 서류들을 꼼꼼히 챙겼고, 면접을 대비한 예상 질문들까지 뽑아보며 열심히 준비했다. 드디어 D-Day가 다가왔다. “말끔한 면접 복장으로 박람회장으로 향하던 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까 제가 지원하는 ‘해외영업’ 분야에서 현장 면접이 가능한 업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성신ENC가 마침 해외영업 파트의 과장을 채용한다고 해서 1번으로 면접을 봤는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열정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1주일 후 임시 합격이라면서 최종 사장님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온 경험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옥종석 님과 새로운 인연을 맺은 성신ENC는 15년 이상 압력솥 내솥 제품에서는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기업이다. 한때 연 매출을 200억 가까이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꾸준한 매출을 올리던 OEM의 매출이 급감하면서 자가 모델 상품을 출시했는데, 전문 영업조직의 부재로 고전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지방대의 한계 딛고 삼성전자 입사
그런데 보험영업맨 출신이 해외영업을 지원했다?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드는 순간, 옥종석 님이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제가 사실은 ‘영어’로 원어민들과 프리토킹이 가능합니다. 군 제대하고 한 2년간 빡세게 공부한 덕분이죠. 해외유학이나 어학연수는 한 번도 안 가보고 순수 국내에서만 공부해서 토익 850점대를 올렸습니다. 지금이야 이 점수가 별것 아니겠지만, 1997년 당시에는 제법 엄청나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어쩌면 지방대 출신이 삼성전자에 입사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영어실력을 인정받은 게 아닌가 싶네요.”그러고 보니 옥종석 님의 첫 직장은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기업, 삼성전자의 연구원이었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이 한 자리에 머물기보다는 끊임없이 도전을 하는 성격이었던 덕분에 사내 마케팅 팀 지원자를 모집할 때 응모해서 당당하게 자리를 옮겼다. 연구원으로 4년, 마케팅 분야에서 3년, 그렇게 삼성전자에서만 7년을 일했다. “연구원은 한 분야만 파니까 시장 보는 눈이 좀 부족하잖아요. 그런데 마케팅 팀은 시장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서 참 부럽더라고요. 그런데 때마침 사내 인력으로 마케팅 팀을 뽑는다니, 얼른 나섰죠. 경쟁률이 10대 1이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제가 뽑혔어요.”그렇게 시장을 보는 눈을 익히고 나니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2004년 과감하게 삼성전자에 사표를 내고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어요. 온라인으로 주문을 받아서 사진을 인화해주는 사업이었는데, 전국 어린이집 졸업 앨범 만들어주는 회사랑 연결이 된 덕분에 사업을 크게 벌였죠. 기계도 들여놓고, 직원도 7~8명씩 두고…… 그런데 결국은 그 회사에서 7억 가까운 돈을 받지 못하면서 부도가 나고 말았죠. 그렇게 생긴 빚이 자그마치 4억이었어요.”결국 모든 사업을 접고, 2006년 12월 한화생명(당시 대한생명)에 입사했다. 그리고 2년 동안 미친 듯이 일해서 4억 원의 빚을 다 갚았다. 다행히 2009년부터는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줄 수 있게 되었고, 한때 월 4,000만 원의 수입을 올릴 정도로 톱을 달리기도 했다. 그러다 부친의 폐암 선고와 함께 보험영업맨도 접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사실 성신ENC의 상황은 썩 좋지는 않다. 해외영업을 맡기 위해 입사를 했지만, 바이어를 새로 발굴하는 등의 일은 단시간에 되는 게 아니다. “입사할 때 이미 알고 있던 상황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회사의 재기가 곧 나의 재기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자진해서 지는 짐은 무겁지 않다’는 영어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저를 통해서 회사가 살아나고 분위기도 좋아진다면 그보다 더 보람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흔히 위기가 곧 기회라고 하지 않던가. 옥종석 님은 성신ENC 입사를 새로운 기회로 바꾸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다. “사실 저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이 있었죠. 하지만 인천센터와 한명진 컨설턴트님과의 만남 덕분에 그런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재취업의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고 포기했다면 이런 기회를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는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중학교 2학년 딸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끝까지 기회를 만들어나가겠다고 다짐하는 옥종석 님은, 지금도 재취업을 위해 마음 졸이고 있을 구직자들에게 경험에서 우러나는 조언을 남겼다. “구직자들은 병을 고치러 병원에 온 환자와 같습니다. 센터와 컨설턴트는 그런 분들을 마음으로부터 보듬어주는 의사와 같은 존재죠. 그래서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문자도 보내주고 의논을 해주니까 ‘나 혼자가 아니구나. 나 혼자의 싸움이 아니구나’ 하는 용기가 생기게 되는 거예요. 여기 말고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센터와 컨설턴트님을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그러면 반드시 원하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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