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극복 수기공모전' 대상에 은한기씨 선정
2008-09-19 09:51:16

▶대상:은한기(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금상:정병율(대구시 북구 침산3동) ▶은상:박부호(경북 경주시 황성동), 박해봉(대구시 북구 산격2동) ▶동상:조영재(대구시 수성구 지산1동), 함주희(서울시 강남구 개포동), 김현아(싱가포르 Block 207D), 정혜란(경북 경산시 정평동) ▶장려상:황보성애(경북 의성군 단북면), 조소정(대구시 북구 관음동), 황화식(대구시 달서구 신당동), 김배규(경남 진해시 자은동), 차문희(강원도 춘천시 퇴계동), 이우하(대구시 북구 동변동), 조기현(대구시 수성구 파동), 손점희(대구시 남구 봉덕3동), 이순복(대구시 동구 용계동), 김태숙(대구시 북구 읍내동)


출처 : https://www.imaeil.com/page/view/2008091909512436397


실업극복 수기 당선작을 뽑으면서…

매일신문사와 (재)대구직업전문학교가 공동으로 실시한 ‘실업극복 논픽션 수기공모전' 응모작은 모두 93편으로 대구와 경북, 서울, 강원도, 경남 등 전국 각 시군은 물론 해외에서 응모한 작품도 있었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응모자도 많았고 나이도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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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극복수기 당선작] 새로운 삶을 위하여
 
 
 
 
1997년 8월부터 제약영업을 한 나에게 실업이라는 시련이 닥칠지 몰랐다.

항상 영업에 대해선 자신감이 있었고, 대구`경북 지역을 책임지는 지점장이 되기 위해 노력하던 나에게는 더욱더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지점장이 되기 위해 이직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부도가 난 회사를 인수하여 크게 키울거라는 경영자의 말만 믿고 2006년 3월 회사를 옮겼지만, 자금사정으로 제품생산이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월급도 처음엔 80%가 지급되더니, 그마저도 50만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모기업인 ACTS의 경영권이 넘어가고 이텍스제약도 흐지부지되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출처 :  https://www.imaeil.com/page/view/2008100206493787997


[실업극복 수기 당선작] 무궁화 꽃을 떠올리며
금상/정병율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종종걸음으로 나는 집으로 향한다. 퇴근시간에 맞추다 보니 노상 밖이 컴컴해져서야 대문 앞에 들어서게 된다. 오늘도 아내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더운 날씨에 돈 버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는, 인사도 포함되어 있었을 터.

아닌 게 아니라 나는 공사장에서 일한다. 소위 말하는 막일을 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마치는 시간이 일정치가 않았다. 아내는 아직도 내가 그전 직장에 다니는 줄 안다. 아무래도 아내는 근로조건과 월수입도 꽤 괜찮은 데를 자기남편의 평생직장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 기대를 저버리기 싫은 까닭에 나는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거짓말이나 일삼고 있다.

공사장의 잡부일은 고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출처 : https://www.imaeil.com/page/view/2008100906483641896


[실업극복 수기 당선작]나는 더 일하고 싶었다
은상/박부호
 
 
 
“박 이사 회사 사정상 용퇴를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라는 회사의 김 감사님 제안이었다. 아니 사퇴종용 아닌 바로 해고 통지였다.

이럴 수가 IMF 당시 휘몰아치던 감원 및 구조 조정이 바로 내게로 향한 것이다. 막상 내게로 향한 사약을 받고나니 정말로 눈앞이 캄캄하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감사님이나 사주(使嗾)를 한 임 사장님이 지난 10년 넘은 세월의 동고동락한 날들과 공로를 뒤로 하고 원망스러웠다.

“알겠습니다” 하곤 3층 사장실을 나와서, 2층의 내 책상으로 와서 의자에 앉으려고 하니 맥이 빠졌다. 정신을 차려야지 하면서 조용히 차를 몰았다.

내가 여유 시간이 있으면 즐겨가는 금오산(金鰲山)으로 향했다. 삼릉앞 주차장에 차를 두고 마냥 계곡을 따라 올랐다.

출처 :  https://www.imaeil.com/page/view/2008101606472786474


[실업극복수기] 은상 '가을이 익는 들녘에 서서 '
 
 
 

내가 태어나고 자란 부산을 떠나와 천직처럼 생각하고 몸담았던 대구의 첫 직장서 명예퇴직한 것이 1998년 2월. 그 후 몇 군데 더 직장생활을 하며 마지막 직장이 됐던 한국언론재단서 퇴직한 것이 2002년 12월 말. 말이 좋아 명퇴지 정리해고나 다름없었던 서너번의 퇴직으로 누적된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마지막 퇴직을 꼭 1주일 앞두고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으니 겨우 50대 초반의 나이 때부터 반신불수가 된 육신을 부둥켜안고 살아온 지도 어언 6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2002년 12월 23일. 평생 잊을 수 없을 그날은 무척 추운 날이었다. 강권에 따라 사표는 이미 반년 전에 제출하였고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다시는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는 몸이 된다는 강박관념에 정말 치밀어 오르는 어떤 분노와 절망감으로 몸이 훨훨 타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출처 : https://www.imaeil.com/page/view/2008102309462386501

실업극복 수기 당선작을 뽑으면서…


출처 : https://www.imaeil.com/page/view/2008100210492781881

경상남도와 경남행복내일센터는 20일 “경상남도 중장년 인생 2막 성공 수기 공모전 수상작으로 전두만씨의 ‘인디언 기우제를 아시나요?’ 등 7편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출처 : https://www.hani.co.kr/arti/area/yeongnam/1109356.html브라보마이라이프

[시니어 잡:담회④ 후기편] 재취업 성공하면 끝? “생존 전쟁 시작”

기사입력 2023-07-13 08:29 기사수정 2023-07-13 08:29


면접 기회는 좀처럼 잡기 힘들다. 그마저도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 일쑤. 열심히 살아온 인생인데 뭐가 잘못된 걸까. 그 해답을 스스로 찾을 수 없다면,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한 단계다. 이에 재취업 상황별 전문 컨설턴트들의 이야기를 통해 중장년 구직자의 행태를 짚어보고, 그 해결점을 모색해보려 한다. ‘시니어 잡:담회(Job:談會)’ 그 마지막 순서는 ‘취업 후기 편’이다.

출처 : https://bravo.etoday.co.kr/view/atc_view/14670

https://www.korea.kr/

한국고용정보원, 워크넷 활용 취업성공 수기 당선작 공개

12.28 (별첨) 2023년 취업성공수기(한국고용정보원).pdf

12.28 한국고용정보원, 워크넷 활용 취업성공 수기 당선작 공개(한국고용정보원).pdf

출처 :  https://www.korea.kr/briefing/pressReleaseView.do?newsId=156608124

2015년 중장년 재취업 우수 사례 : 

100세 시대,준비 없는 노년을 맞을 순 없죠

                최귀옥 57세·(주)P서비스 

57세의 여성 세탁부. 대규모 세탁 서비스 공장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인물이다. 그런데  ‘전직 은행원’이라고 하면 보는 눈이 조금 달라진다. 게다가 남편과 두 아이까지 모두 번듯한 직장인이라면, 의아한 눈길은 더욱 많아진다. ‘그런 사람이 왜?’ 최귀옥 님의 답은 명쾌하다. “다가오는 100세 시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요?”

이제 다시 시작이다

갑작스러운 한파 때문에 행인들의 발걸음마저 뜸해진 어느 날의 저녁 무렵이었다. 입김을 호호 날리며 자택 근처의 한 카페에 들어서니 먼저 와 있던 최귀옥 님이 환한 얼굴로 맞아준다. “죄송해요. 밤 9시나 되어야 퇴근을 하기 때문에 회사 근처에서는 뵙기가 어려워서….”사흘 일하고 하루 쉬는 일정. 아침 7시 40분에 출근해서 저녁 9시가 되어야 끝나는 빡빡한 근무다. 게다가 평생 ‘사무직’ 일만 했지, 순전히 몸을 써서 하는 일은 생전 처음이다. 하지만 최귀옥 님의 얼굴에서는 ‘힘들다’라는 하소연보다는 ‘이제 다시 시작이다’ 하는 의지가 훨씬 크게 묻어나왔다.최귀옥 님은 결혼 전까지 지금은 우리은행으로 이름이 바뀐 상업은행에서 6년 6개월 간 행원생활을 했다. 은행원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은행의 꽃이라 불리는 창구 업무를 주로 맡았고, ‘친절한 은행원상’을 받았을 정도로 능력과 서비스정신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소위 ‘경단녀’(경력단절여성)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 작은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나이가 되니까 슬슬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초등학교 과학 조교로 취업이 되어서 7년간 일을 했다. 과학 조교가 하는 일은 과학 실습교재 구입과 과학 실습 보조 역할이다. 그리고 서울시청 정보통신과, 교통상황실, 농수산과 등에서 계약직으로 꾸준히 일을 하며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고, 작은 중소기업에서는 경리업무를 맡아 3년 동안 일했다. 

10개월 동안 쉬면서 느낀 것은,  다시 일해야 한다는 것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최귀옥 님이 지금 직장으로 옮기기 전까지 일했던 곳은 ‘천주교 인천교구청’. 신부님을 보필하는 업무를 3년 7개월 동안 하다가  올해 1월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만두고 말았다. “몸이 안 좋았어요. 갑상선 쪽에 갑자기 혹이 생기더니 점점 커지더라고요. 병원에 갔더니 갑상선낭종이라고 하더군요. ‘암’은 아니었지만, 몸이 불편해서 계속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딸과 아들, 남편도 휴식을 권했다. 따지고 보면 결혼과 육아 때문에 쉬었던 기간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일을 놓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도 ‘아들 딸 좋은 직장 다니고 있고, 남편도 돈 잘 버는데, 이제 그만 쉴 때도 됐다’고 권했다. 결국 최귀옥 님은 생애 처음으로 10개월이라는 긴 휴식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못해봤던 것도 실컷 했다. 국내 여행은 물론, 딸과 함께 동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성당 봉사활동도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했다. 그렇게 마음 푹 놓고 쉬니까 갑상선낭종도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 휴식이 보약이었다. “그런데 10개월 동안이나 쉬니까 몸이 근질근질해지더라고요. 제가 원래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게다가 이제는 100세 시대잖아요. 아직 환갑도 안 됐는데 이렇게 손 놓고 앉아서 노년을 맞이하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장년일자리희망넷과의 만남

그녀는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운영하는 장년일자리희망넷과 만났다. “처음 장년일자리희망넷을 발견했을 때는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어요. 아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자리 소개 좀 시켜줘라’ 하면서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제 나이 또래 사람들이 갈 만한 일자리 정보가 가득했거든요. 이력서 쓰기, 면접 요령 등 취업에 필요한 각종 정보와 자료도 많았죠. ”하지만 나이’라는 걸림돌은 예상보다 훨씬 큰 장애물이 되었고, 취업의 문은 좀처럼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장년일자리희망넷을 통해 꼭 일하고 싶은 회사가 눈에 띄었다. 급한 마음에 담당 기관인 노사발전재단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만난 컨설턴트가 바로 해당 기업을 담당하던 노사발전재단 서울서부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서울서부센터) 권혜영 차장이었다. “본래 권혜영 차장님은 기업 담당자였는데, 제가 그 회사에 취업을 하고 싶다고 하니까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그쪽 담당자와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제 취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주었습니다. 이렇게 제 상황에 맞춰서 직접 상담도 하고 취업을 위해 나서주니까 ‘나 혼자가 아니구나’ 하면서 뭔가 기댈 곳이 생긴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최귀옥 님이 꼭 일하고 싶었던 곳은 국내 항공사에서 나오는 시트와 무릎담요 등의 각종 세탁물을 다리고 관리하는 회사였다. 평생 해왔던 사무직은 아니었지만, 1~2시간 정도 초과 근무를 하면 월 200만 원 정도의 급여가 보장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권 차장님을 통해 이력서를 넣고 나름 희망을 갖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익숙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동안의 제 이력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죠. 그런데 막상 돌아온 대답은 ‘정년이 3년도 채 남지 않아서 채용이 어렵다’ 하는 것이었죠. 역시 ‘나이’ 때문에 안 되는구나, 하고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절당한 회사를  직접 찾아가 재취업 성공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권 차장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어렵지만 새로운 일자리를 좀 찾아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런데 권 차장이 뜻밖의 권유를 해왔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아직 정년까지는 몇 년의 기간이 남아 있으니 회사를 직접 방문해서 취업에 대한 의지와 그동안의 경력을 설명해주면 의외의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조언이었다. ‘57세’라면, 사실 어떤 회사에서도 흔쾌하게 취업을 받아들일 나이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수 있는 나이는 아니라는 뜻. “속으로는 ‘직접 찾아간다고 해서 별다른 효과가 있을까?’ 하는 망설임은 있었지만 권 차장님의 격려에 용기를 냈죠. 언뜻 차장님의 말씀에서 ‘여러 번 권유를 해봤는데 나이 때문에 다소 망설이는 것 같기는 해도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더라’ 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거든요.”그렇게 스스로 용기를 내서 찾아간 곳이바로 김포공항 인근에 있는 ㈜P서비스였다. 당시 인사 담당 상무는 서류심사에서 떨어진 사람이 직접 본사까지 찾아온 열정에 감탄을 하고 시간을 내어 면접을 봐주었다. 그리고 최귀옥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류를 다시 꼼꼼히 살펴본 다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재원’이라는 평가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여기서 꼭 일하고 싶어요” 하는 최귀옥 님의 이야기에 “저도 꼭 뽑고 싶어요” 하고 화답을 해주었다. 결국 인사 담당 상무는 최귀옥 님에게 집에서 먼 본사가 아니라 비교적 가까운 다른 곳을 추천해주었다. “제가 전화를 해놓을 테니 가서 제 이름만 대면 됩니다” 하면서…….

엄마 출근시켜주는 딸  밥 차려주는 신랑

이처럼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를 온몸으로 보여준 최귀옥 님은 이제 막 한 달째 근무를 하고 있다. 아침 7시 40분까지 출근해서 잔업까지 처리하면 보통 저녁 9시쯤 되어야 일이 끝난다. 3일 일하고 하루 쉬는 방식이라 그동안 해오던 성당 일도 예전처럼 하기가 어렵고, 생전 처음 해보는 몸 쓰는 일이라 아직은 적응도 제대로 못한 상태지만 이 역시 삶에서 한 번은 겪고 넘어가야 할 산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힘들죠. 상무님 덕분에 집 가까운 곳으로 배치를 받았지만, 대중교통으로 다니려면 1시간 넘게 걸리거든요. 다행히 딸아이가 아침마다 저를 먼저 출근시켜주는 덕분에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에요. 저 힘들게 일한다고 신랑이 밥도 해주고, 저녁마다 상을 차려주고 그러니까 오히려 더 좋아진 점도 있네요. 하하하.”    동유럽이며 일본이며 호주까지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준 착한 딸이다. 한 달째 집안 살림도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오히려 자신을 도와주려 애쓰고 있는 신랑과 아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크다. 새벽잠 줄여가면서 출퇴근을 시켜주는 딸에게 무엇보다 감사한다는 최귀옥 님. 물론 무엇보다 고마운 분은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도전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서울서부센터 권혜영 차장이라고 강조한다.  사실 최귀옥 님은 지금 상당한 고민 중이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지만,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여러 모로 조건이 달라서다. “본래 5시 반 퇴근인데, 그게 제 맘대로 안 되네요. 잔업을 하다 보면 늘 저녁 9시나 되어야 끝나거든요. 일이 힘든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데, 제 생활이 아예 없어지는 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어렵게 들어왔기 때문에 끝까지 버텨야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과연 이것이 최선일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하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다시 권 차장님과 상의를 해봐야죠.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는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거예요.”

실패는 있어도 포기는 없다

최귀옥 님은 중장년 재취업에 있어서 구직자의 적극적인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좋은 사례다. 인터뷰 내내 최귀옥 님이 강조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이 든 여자들이 재취업하기가 더 힘든 상황인 것 맞아요. 하지만 용기를 가지고 직접 부딪쳐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서류만 내놓고 기다리지 말고 전화라도 한 통 더 해보라는 거죠. 그러면 반응이 오더라고요. 취업으로 바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

어려움에 처한 회사 내 힘으로 살려내겠습니다

            옥종석 46세·(주)성신ENC 

잘 알려진 영어 속담 가운데 ‘A willing burden is no burden.’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말로 하면 ‘자진해서 지는 짐은 무겁지 않다’는 뜻이다. 회사 상황이 어려움에도 옥종석 님을 선택한 성신ENC와 회사가 어려운 줄 알면서도 기꺼이 입사를 결정한 옥종석 님은, 어찌 보면 회사의 재도약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파트너다. 하지만 그 짐은 결코 무겁지 않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하고 있는 중 

듬직한 체구에 사람 좋은 웃음. 성신ENC 사옥 마당에서 만난 옥종석 님의 첫인상이다. 한때 보험영업으로 톱을 달렸던 힘이 어쩌면 바로 저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먼저 식사부터 하고 말씀 나누실까요?”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인근에 있는 몇 개의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마치 ‘구내식당’처럼 운영하는 곳이었다. 성신ENC의 마크를 단 사람들과 함께 몇몇 회사의 로고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이 바로 공단이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는 풍경 속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출근한 지 이제 3개월째 접어드네요. 바로 엊그제 입사한 것 같은데, 벌써 겨울이라니……. 본래 해외 영업을 맡기로 하고 입사를 했는데, 지금은 국내 영업을 비롯해서 가리는 일 없이 다 하고 있습니다. 경력직이긴 하지만, 신입이니까 네 일 내 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옥종석 님이 성신에 입사하기 전 직업은 ‘보험영업맨’. 한때는 월 4,000만 원씩 ‘입금’을 했을 정도로 잘 나가는 영업맨이었다. 꽃피는 봄날처럼 좋은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갑작스러운 부친의 ‘폐암 선고’였다.  

“작년(2014년) 3월에 부산에 계시던 아버님이 동아대병원에서 폐암 말기 선고를 받으셨어요. 마침 어머니도 몸이 안 좋았고, 나머지 형제들도 아버님을 모시고 다닐 상황이 안 되었죠. 다행히 보험 영업은 ‘개인사업자’니까 비교적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제가 아버님을 모시고 다니기 시작했죠. 그러다 동아대병원보다는 국립암센터가 더 나은 것 같아서 아버님을 인천 저희 집으로 모시고 일산 암센터를 다니시게 했죠.”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 만난 노사발전재단 인천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안타깝지만 옥종석 님의 부친은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제야 비로로 정신을 차리고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보니 이미 대부분의 고객이 떠난 뒤였다. “원래 보험이 고객의 마음을 잡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1년 가까이 아버님 병수발 드느라 고객관리에 소홀했더니 거의 다 떠나고 말더라고요. 섭섭하지는 않아요. 당연한 일이니까. 그렇잖아도 대면 영업에 지쳐서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하던 차라, 이참에 차라리 직업을 바꿔야겠다 하고 결심을 했죠.”    제일 먼저 시도한 일은 ‘기사자격증 따기’였다. 본래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비교적 취업이 쉬울 것 같은 전기기사자격증에 도전해서 올해 5월에 취득에 성공했다. 하지만 막상 자격증을 따고 보니 생각처럼 취업이 쉽지 않았다. 어느덧 45세에 접어든 나이도 걸림돌이 되었지만, ‘현장 경험’이 없다는 게 큰 걸림돌이 되었다. “당당하게 자격증을 따고 나서 전기기전이나 전기기사 자리를 찾아서 여러 번 취업 시도를 했죠. 그런데 어디를 가나 ‘경험’이 문제가 되더군요. 게다가 막상 취업이 된다 하더라도 생각보다 열악한 처우 조건이 마음에 걸렸어요.”그렇게 취업 전선 앞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노사발전재단 인천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인천센터)를 알게 되었다. 옥종석 님이 먼저 손을 내민 게 아니라 인천센터에서 먼저 이메일을 보내왔던 것이다. 곧바로 회원 가입을 하고, 담당 컨설턴트와 수시로 연락하면서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고급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한편 인천센터에서 하는 재취업 관련 특강도 열심히 듣고, 항상 두 귀와 두 눈을 재취업 정보에 열어두었다. 그러다 한명진 담당 컨설턴트로부터 굿 뉴스가 날아들었다. 인천센터와 남동산단이 주최하는 채용박람회가 열릴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채용박람회에서 만난 인연 성신ENC 

“사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여러 군데의 채용박람회를 다녀봤지만 큰 소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참여를 고민했죠. 그런데 한명진 컨설턴트님 얘기를 들어보니 이번 박람회는 기존 박람회와 조금 성격이 다른 것 같더라고요. 남동공단에 위치한 50여 개의 업체들이 모여서 주로 40~50대의 중장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박람회라는 거예요.”의구심을 말끔히 털어낸 옥종석 님은, 컨설턴트의 조언에 따라 이력서와 각종 증명서 등 서류들을 꼼꼼히 챙겼고, 면접을 대비한 예상 질문들까지 뽑아보며 열심히 준비했다. 드디어 D-Day가 다가왔다. “말끔한 면접 복장으로 박람회장으로 향하던 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까 제가 지원하는 ‘해외영업’ 분야에서 현장 면접이 가능한 업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성신ENC가 마침 해외영업 파트의 과장을 채용한다고 해서 1번으로 면접을 봤는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열정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1주일 후 임시 합격이라면서 최종 사장님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온 경험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옥종석 님과 새로운 인연을 맺은 성신ENC는 15년 이상 압력솥 내솥 제품에서는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기업이다. 한때 연 매출을 200억 가까이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꾸준한 매출을 올리던 OEM의 매출이 급감하면서 자가 모델 상품을 출시했는데, 전문 영업조직의 부재로 고전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지방대의 한계 딛고 삼성전자 입사

그런데 보험영업맨 출신이 해외영업을 지원했다?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드는 순간, 옥종석 님이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제가 사실은 ‘영어’로 원어민들과 프리토킹이 가능합니다. 군 제대하고 한 2년간 빡세게 공부한 덕분이죠. 해외유학이나 어학연수는 한 번도 안 가보고 순수 국내에서만 공부해서 토익 850점대를 올렸습니다. 지금이야 이 점수가 별것 아니겠지만, 1997년 당시에는 제법 엄청나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어쩌면 지방대 출신이 삼성전자에 입사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영어실력을 인정받은 게 아닌가 싶네요.”그러고 보니 옥종석 님의 첫 직장은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기업, 삼성전자의 연구원이었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이 한 자리에 머물기보다는 끊임없이 도전을 하는 성격이었던 덕분에 사내 마케팅 팀 지원자를 모집할 때 응모해서 당당하게 자리를 옮겼다. 연구원으로 4년, 마케팅 분야에서 3년, 그렇게 삼성전자에서만 7년을 일했다. “연구원은 한 분야만 파니까 시장 보는 눈이 좀 부족하잖아요. 그런데 마케팅 팀은 시장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서 참 부럽더라고요. 그런데 때마침 사내 인력으로 마케팅 팀을 뽑는다니, 얼른 나섰죠. 경쟁률이 10대 1이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제가 뽑혔어요.”그렇게 시장을 보는 눈을 익히고 나니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2004년 과감하게 삼성전자에 사표를 내고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어요. 온라인으로 주문을 받아서 사진을 인화해주는 사업이었는데, 전국 어린이집 졸업 앨범 만들어주는 회사랑 연결이 된 덕분에 사업을 크게 벌였죠. 기계도 들여놓고, 직원도 7~8명씩 두고…… 그런데 결국은 그 회사에서 7억 가까운 돈을 받지 못하면서 부도가 나고 말았죠. 그렇게 생긴 빚이 자그마치 4억이었어요.”결국 모든 사업을 접고, 2006년 12월 한화생명(당시 대한생명)에 입사했다. 그리고 2년 동안 미친 듯이 일해서 4억 원의 빚을 다 갚았다. 다행히 2009년부터는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줄 수 있게 되었고, 한때 월 4,000만 원의 수입을 올릴 정도로 톱을 달리기도 했다. 그러다 부친의 폐암 선고와 함께 보험영업맨도 접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사실 성신ENC의 상황은 썩 좋지는 않다. 해외영업을 맡기 위해 입사를 했지만, 바이어를 새로 발굴하는 등의 일은 단시간에 되는 게 아니다. “입사할 때 이미 알고 있던 상황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회사의 재기가 곧 나의 재기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자진해서 지는 짐은 무겁지 않다’는 영어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저를 통해서 회사가 살아나고 분위기도 좋아진다면 그보다 더 보람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흔히 위기가 곧 기회라고 하지 않던가. 옥종석 님은 성신ENC 입사를 새로운 기회로 바꾸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다. “사실 저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이 있었죠. 하지만 인천센터와 한명진 컨설턴트님과의 만남 덕분에 그런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재취업의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고 포기했다면 이런 기회를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는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중학교 2학년 딸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끝까지 기회를 만들어나가겠다고 다짐하는 옥종석 님은, 지금도 재취업을 위해 마음 졸이고 있을 구직자들에게 경험에서 우러나는 조언을 남겼다. “구직자들은 병을 고치러 병원에 온 환자와 같습니다. 센터와 컨설턴트는 그런 분들을 마음으로부터 보듬어주는 의사와 같은 존재죠. 그래서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문자도 보내주고 의논을 해주니까 ‘나 혼자가 아니구나. 나 혼자의 싸움이 아니구나’ 하는 용기가 생기게 되는 거예요. 여기 말고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센터와 컨설턴트님을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그러면 반드시 원하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합니다.”

   진영배(49세, (주) 신한방 지원팀 전기엔지니어)

이제 우리사회도 더 이상 종신고용이 보장되는 사회가 아닌 지 오래다. 수시로 이루어지는 기업의 구조조정 탓에 젊음을 바쳐 일 해온 직장을 하루아침에 떠나게 되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니다. 진영배님도 25년 동안 몸담았던 회사에서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막막한 절망 속에서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의 ‘개인별 맞춤 전직지원서비스’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한 그의 두 번째 인생.

눈물을 머금고 떠나온 회사

지난 7월말 진영배님은 전주페이퍼라는 제지회사의 공무팀 전기파트에서 퇴직했다. 이십대 초반부터 만 25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잃게 된 것이다. 구조조정계획은 한 달쯤 전에 갑작스럽게 알려졌다. 그 이전에는 단 한 번도 회사를 떠난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가족 이외에는 회사가 전부였다. 가족의 생계도 물론 걱정이었지만, 내 집처럼 여겼던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그러나 결단해야만 했다. 회사의 형편이 어려워 구조조정을 한다는 마당에 앞날이 창창한 젊은 후배들을 남겨두고 선배들이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막상 퇴직을 결심하고 나니 막막했다.  “너무 암담할 뿐이었죠. 하루빨리 새 직장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도무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더군요.” 그러나 마냥 그렇게만 있을 수는 없었다. 가족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금까지 사는 동안 늘 그의 든든한 벗이자 후원자였던 아내, 초등학교 5학년과 중학교 3학년 아직 어린 두 아이. 가족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나는 해낼 수 있다’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의 ‘전직지원서비스’컨설팅, “눈높이를 낮추세요.”

진영배님이 노조위원장의 소개로 알게 된 노사발전재단 전북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전북센터)를 찾아간 것은 퇴직중 얼마후인 지난 8월초였다. 그곳에서 모윤이 컨설턴트를 만나 1대1상담을 받게 되었다. 모윤이 컨설턴트는 우선 그에게 자신의 퇴사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일부터 시작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언을 해주었다. “눈높이를 낮추셔야 합니다. 그동안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고 중년의 나이에 새로 직장을 물색하다 보면, 회사의 규모나 본인의 직급, 급여 등 모든 면에서 마음에 차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받아들일 수 있어야 새 직장을 얻을 수 있습니다”전직지원서비스 컨설팅은 경력진단,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 작성법, 희망직무분석 등으로 진행되었다. 자문 받은 대로 이력서에는 공무전계팀에서 25년간 전기 분야의 경력을 쌓아온 것을 강조하였다. 전문경력이라 어느 회사에 가서라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부각했다. “쉰이 다 된 나이에 30년 만에 이력서를 쓰려니까 쉽지 않더군요. 처음에는 이력서가 너무 엉성했는데, 모윤이 선생님과 상담을 통해서 제대로 된 이력서를 준비할 수 있었죠. 구직 컨설팅이라는 게 이래서 꼭 필요하구나 하고 실감했습니다.”전북센터에서 구직서류작성과 면접요령 등에 대해 컨설팅을 받고 재취업을 위한 구직활동을 열심히 한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로부터 꿈에도 기다리던 합격통보를 받았다.

낯선 환경, 낯선 동료들에 의한 스트레스

진영배님은 지난 10월부터 새 직장으로 출근하고 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변화된 환경,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근무시간이 힘들었다.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25년 동안 한솥밥을 먹으면서 피붙이처럼 지내던 사람들로부터 혼자 떨어져나와 있다는 고립감을 견뎌내야 했다.
전에 다녔던 회사는 국내 굴지의 제지회사로서 대기업이었다. 새로 다니게 된 회사도 대기업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여러 가지 환경이 예전 회사만 못한 것도 사실이다. 급여도 두 배 가깝게 차이가 난다. 이런 변화는 경제적인 궁핍함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상실감도 뒤따른다. 아이들은 커나가고 생활비와 교육비 부담은 늘어만 가는데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러니 아내와 아이들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새 일터에서 일구는 새로운 희망 

겪지 않고 불과 두 달 만에 이만한 직장을 얻어 이만큼 잘 적응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간다. “구조조정으로 인한 퇴직은 저와 가족들에게 분명히 시련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저 자신이 지난 몇 달 동안 더 단단하게 성숙해진 것 같습니다. 이제 앞으로 어떤 일을 겪더라도 이겨낼 자신 있습니다.”변함없이 그에게 힘이 되어주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도 빼놓지 않는다. “저 못지않게 어려울 텐데 힘든 내색하지 않고 잘 견뎌내 주고 오히려 저의 재취업을 마음을 다해 격려해주는 아내와 아이들이 제 희망입니다.”진영배님의 씩씩한 새 출발을 응원한다. /


고민은 적당히, 행동을 해야 할 때 !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박혜연

구직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누구나 불안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나, 나에게 맞는 자리가 있을까,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고민도 많아지겠죠. 물론 어느 정도의 고민은 필요합니다. 후회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요인을 신중하게 따져 보고 생각해 봐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것은 문제가 됩니다. 고민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죠. 적당한 고민, 그리고 행동이 뒷받침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60대 ㅇㅇ님은 오랫동안 자영업을 운영하다 경기침체로 폐업정리를 하시는 중에 센터에 방문하셨습니다. 힘겹게 일궈 낸 사업을 하나씩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라 심신이 지치셨을 것입니다. 지친 마음에, 방문 초기에는 센터 서비스를 포함하여 정부 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도 보이셨습니다. 방문하는 기관들의 서비스 내용은 내가 기대하는 수준에 못 미치고, 오랜만에 마주하게 되는 취업 시장은 어려운 것 투성이었습니다. 다시 재창업을 해야 할까, 취업을 하는 것이 맞을까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민 중에, 일단 평소보다 시간은 많으니 취업이든 창업이든 한 달 동안 관련된 강의를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니 요즘 중장년층이 많이 취득한다는 자격증 몇 가지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자격증 취득 즈음에 다시 상담 요청을 하셨습니다. 준비한 자격증 중 요양보호사 쪽으로 취업을 고려하는데, 구직기술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구직활동의 기본인 이력서부터 준비했습니다. 요양보호사 경력이 없었기에, 기존의 경력과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30여년 현장에서 대인업무를 한 점, 제조업체를 운영하며 기계 및 설비 다루는 일이 가능한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업종은 다르지만 사람을 상대한다는 점이 연결고리가 될 수 있고, 보통 요양기관은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업무(시설관리)가 가능하다는 것 역시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자격증을 준비하며 치매 쪽에 관심이 생겨 3개월 정도 관련 센터에서 자원봉사한 경험을 덧붙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내가 특별히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적절하게 연결하여 준비하였습니다. 면접도 마찬가지로 경쟁력 있게 준비하였고요. 상대가 우려할 수 있는 부분(나이, 자영업 운영 경험 등)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답변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근 지역 기관을 타겟으로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 탐색까지 계획하였습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구직활동을 한 지 이 주 정도 지났을 때, 취업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전략을 세운대로 온라인 및 오프라인을 탐색하고 세 곳에 지원하였는데, 세 곳에서 모두 입사제의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본인의 강점을 잘 활용하여 전략을 세우고 준비하고, 구직활동 또한 적극적으로 하셨기에, 빠른 시일 내 좋은 결과를 이루셨다고 생각합니다. ㅇㅇ님도 분명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화도 나고 계속해서 고민이 늘어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ㅇㅇ님은 계속해서 행동하셨습니다. 여러 기관 및 지인을 통해 조언을 구하고 계획과 행동을 보완해 가셨습니다. 그렇게 원하는 결과를 이루셨지요. 구직활동 상황에 어느 정도 고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행동이 따르지 않은 고민은 의미가 없습니다. 고민은 적당히,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 과정이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저희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용기 있는 청춘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마계희

2014년 12월초 진행된 [00 명예퇴직자 재도약프로그램] 사전오리엔테이션을 통해 고객님을 처음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오리엔테이션 시간에는 별말씀도 없으셨고 궁금한 질문도 없으셨습니다. 제 얘기도 듣는 둥 마는 둥 “신청서나 쓰겠다.”고 하셔서 저도 퇴직 동료분들과 함께 재도약프로그램을 신청하시나보다 했습니다. 

재도약프로그램 시작 당일, 뜻밖의 한파에 재도약프로그램에 참여하신 분들은 사전신청에 비해 단 6명으로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이 정도 인원으로 집단프로그램을 끌어나가는 것이 가능할까,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끌어낼까, 혹시나 더 참여해 주실 분들이 오고 계시진 않을까, 등줄기에 땀까지 흐르던 제 기우를 해결해 주신 분이 바로 조ㅇㅇ 고객님이셨습니다. 첫 만남과 달리 센터에 들어서자마자 밝은 목소리로 먼저 인사하시며 당일 프로그램 참여자가 적은 것에 대해 같은 00기업 출신으로 미안하다며 오히려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잔잔한 감동과 함께 용기가 생겼습니다. 

6명 소규모로 진행된 재도약 프로그램은 뜻밖의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여섯 분이 강의흐름에 맞춰 누구라 할 것 없이 적극 참여하시며 발표를 하셨고 진행하는 컨설턴트들 역시 강의시간에 1:1 질의응답과 개개인의 사례접목을 이끌어낼 만큼 3일간의 교육이 말 그대로 명예퇴직 후 재도약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구직 전략과 다양하게 일하는 방식을 접할 때에는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집중력을 보이셨습니다. 

00기업에서 23년간 총무/회계 등 행정업무를 주로 담당했던 조ㅇㅇ 고객님은 지난해 4월 명예퇴직 후 다방면으로 구직활동을 실시하셨고, 수차례의 채용박람회는 물론 고용센터 뿐만 아니라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일자리센터까지 여기저기 일자리 기관을 거치셨던 터라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도 겉포장만 요란하고 거기서 거기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대기업 퇴사임에도 불구하고 재취업이 되지 않자 급한 마음에 건설현장 일용직까지도 해보신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도약프로그램을 마치며 조ㅇㅇ님은 명예퇴직 후 스스로 열심히 했다고 여겼던 그동안의 구직활동에서 잘못된 점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력서도 없이 구경 가듯 채용박람회에 갔던 일, 이력서만 올려 두면 구인기업에서 연락이 올 거라고 여겼던 진정성 없는 온라인채용사이트 이용, 총무·회계 23년을 근무하고서도 경력기술은 커녕 업무성과 한줄 기록하지 않았던 이력서, 나이 때문에 이젠 취업도 어렵다며 불평만 했던 시간을 스스로 돌이켜 보셨습니다. 

그렇게 조ㅇㅇ님의 구직활동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재도약프로그램 참여 후 이력서를 수정하여 워크넷을 통해 장년인턴취업지원사업에 지원을 하셨고 며칠 뒤 장년인턴 합격통보를 받으셨습니다. 지금까지 해 오셨던 경력과는 달리 장년인턴으로 생산기술을 새롭게 배우며 군포에서 화성까지 출퇴근을 하고 계십니다. 

대기업 명예퇴직 후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뛰어드는 용기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서운 한파를 뚫고 3일간 낯선 기관에서 재도약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용기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23년간 해왔던 일을 접어두고 장년인턴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기술을 배우겠다며 지원하는 일 또한 용기입니다. 용기 있는 청춘, 곧 중장년입니다.  /


요양보호사를 꿈꾸다가 어린이집 할아버지로!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최진숙

지금 이순간도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선생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어미오리와 새끼오리들의 모습과 같은, 본인 손주보다도 더 귀여운 아이들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다는 분. 아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본인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고 힘찬 발걸음으로 매일 어린이집으로 일찌감치 출근을 하게 된다는 백삼권 선생님을 소개해 드립니다. 

한 직장에 28년간 시설관리 업무를 담당하며 로비에서 어르신이나 장애인을 보면 먼저 다가가서 요구사항을 알아보고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여 해결해 드릴 때 행복감을 느끼고, 그럴 때 마다 정년퇴직 후에 사회에 봉사를 하며 작은 경제적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생활해 오셨다고 한다. 

정년퇴직을 앞두고는 ‘일등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일등이 될 수 있다’는 속담과 같이 취업을 할 수 있다면 어떤 직업이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구직활동을 할 수 있는 인터넷 구직사이트, 노인 관련 취업사이트, 관공서 취업사이트 등 다양한 경로를 메모하며 나름 구직을 위해 노력을 많이 하셨다. 그리고 퇴직과 동시에 먼저 본인을 사회에서 시험하고 싶어 다중이용시설의 청소업체에 바로 취업하여 쓰레기를 수거하여 분리하고 주차장에서 빗자루질도 하셨는데 제주지역 특성상 좁은 지역이라 지인을 많이 만나는 게 불편하기도 했다고 한다. 직장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또다시 실업상태로 돌아와 멍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셨다고 한다.

실업급여수령을 위해 제주고용센터를 방문하던 중 노사발전재단 제주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제주센터)를 들르시게 되었다. 구직신청서 작성과 면담을 통해 백삼권 선생님의 열정과 여유 있는 성품을 알 수 있었다. 

상담 후 전직방향을 재설정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우선 제주센터에서 주관하는 ‘시선을 사로잡는 이력서 작성법’ 등 전직지원서비스 교육과정을 7회 참석하였으며, 취업알선도 모바일 문자로 5~6회 제공하였다. 그리고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 클리닉을 진행하였다. 때마침 삼화주간노인복지센터에서 요양보호사를 채용한다고 하여 이력서를 제출했다. 면접 후 합격이 되셨지만 본인이 남성 요양보호사가 여성을 케어 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다며 기업에 정중히 거절하고, 계속하여 채용정보 제공과 함께 정서지원 상담을 진행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전직 방향을 본인이 아이들도 좋아하시고 시설관리도 가능하다고 하여 노인복지시설이 아닌 어린이집 쪽으로 잡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뜻을 이루었다. 백삼권 선생님은 본인과 같은 장년실업자는 취업사이트나 구인광고를 통한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며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만이 구인 회사와 구직을 하고자 하는 중장년 구직자를 연결하여 경력과 적성에 맞도록 맞춤형 일자리 알선을 해주는 곳이라고 하셨다.

오늘도 백삼권 선생님은 개구쟁이들이 맘껏 떠들며 놀다가 “안녕하세요” 하며 배꼽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무엇을 더 해 주어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며 즐겁게 일을 하고 계신다. 백삼권 선생님은 취업 성공 사례, 모범 사례로 중장년구직자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며, 추후 구직자 대상 특강 시 취업사례 강사로 초청하고 싶다.  /


자신감, 그리고 도전하는 용기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김성수

제가 경북동부경영자협회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컨설턴트로 일을 한지 3년이 다 되어갑니다. 중장년 고객 분들과 상담을 통해 느꼈던 점은, 회사사정이나 고객 분의 상황변화로 중간에 실직하신 분들과 정년퇴임을 하시고 다시 일자리를 찾는 분들,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 같습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한다.’ ‘공과금 등 세금이 밀려서 당장 일을 빨리 구해야 한다.’ 거나, ‘등산도 한 두 번이고 친구들 만나는 것도 매양 똑같으니 그 이후 할 일이 없어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는데 너무 힘들다.’는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한편 40대나 50대 초반 중년 여성고객 분들은 가장으로서 어느 정도 가족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급여조건을 찾으면서도 출퇴근이 일정한 업체를 원하셨습니다. 

2015년 5월 6일 컨설팅 상담해 드린 만 43세 여성고객분은 건설회사에서 3년 정도 일을 하셨고, 컴퓨터 관련 업체에서 판매 및 경리 업무를 하셨습니다. 두 명의 자녀가 있으신데 막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어서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부모님의 손길이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분은 맞춤형 교육생 분으로 새로 바뀐 회계프로그램을 배우기 위해 다시 배움의 기회를 갖고 3개월 동안 아이가 학교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계획으로 우리 협회에서 주관하는 맞춤형 ERP(인사/정보/물류관리) 물류교육과정을 시작하셨습니다.

ERP 맞춤형 과정을 배우면서 기본적인 전산자격증과 ERP 자격증을 취득하셨습니다. 교육을 배우시면서 간담회 형태를 통해 개인 상담도 해드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초등학교 어린 막내 자녀가 있어 먼 거리는 힘들고, 차량이 있으니 가까운 거리로,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사무직을 원하셨습니다.  그래도 프로그램 참여를 통해 자격증을 취득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마음의 여유를 어느 정도 찾으면서 다시 재발돋움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차 동행 면접 시에는 조건이 좋았지만 관련 분야경력 부족과 사용프로그램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 안 되셨지만, 2차 동행 면접 시에는 관련 경력과 사용프로그램에 대한 자신감, 관련 분야 이외에도, 유관 경력과 자격증 등이 합쳐져 합격하는데 상승효과를 보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합격하시는데 더욱 중요했던 건 역시 ‘자신감’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관련 경력 업무였기에 사장님도 일을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 경력자 이셨고 고객님이 성격이 밝고 맞춤형 교육을 받으면서 반에서 반장 역할을 하시면서 반 구성원을 통솔하고 리드할 만큼 적극적이고 추진력이 있고 긍정적인 성격이라서 사장님이 채용하시는데 크게 주저하시지 않으셨다고 생각이 듭니다.

제가 컨설턴트 일을 하면서 중장년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말은 ‘새로운 분야에 대한 새로운 일'도 좋지만, 진입하기 어려운 분야는 과감히 버리고 기존 경력과 새로 얻어진 자격 기능을 가지고 자신감 있게 관련 분야에 문을 두드린다면 연령에 대한 장벽이 높다고 해도 반드시 뛰어 넘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한번 도전해서 포기하지 말고, 다시 조정하고 조율해서 가능성 있는 목표를 세우고 에너지를 쏟으시기를 응원합니다.  /


내가 천사다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이인순

늦가을 오후 거리에 노오란 은행잎이 황금주단을 깔아준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때마침 책갈피에 넣어두었던 영화 티켓 2장이 상봉동 메가박스로 나를 인도한다.  

‘마션’. 오랜만에 위대한 영화를 보고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화성에 홀로 남겨진 NASA 아레스 3 탐사대 마크 와트니의 생존기와 그를 살리기 위한 동료탐사대원들, NASA 연구진, 그리고 전 세계인이 함께 하나가 되어 응원하며 그를 살려내는 감동적인 영화다. ‘포기란 없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야하는 생존 포인트, 생존을 위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주인공처럼 상담사가 소개하려는 최무송 선생님도 그와 닮은 면이 많다. 

40대 중반부터 15년 동안 사업을 하다 IMF로 줄줄이 도산하던 때, 그 역시 그만 쫄딱 망했다. 좌절감에 죽고 싶은 마음 뿐,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돈도 기술도 없어 그 시절 할 수 있는 일이 경비, 청소밖에 없었다. 경비 5년, 청소 10년을 했다. 청소 10년 중 청소반장으로 8년을 하며 1,000여만 원 되는 기계까지 구입했다. 표창장도 받고 성실성을 인정받았지만 나이의 장벽은 어쩔 수 없었다. “건강하다, 젊은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다, 천만 원짜리 기계까지 주겠다.”고 아무리 외쳐도 오라는 곳은 없었다. 최 선생님은 아침 출근하자마자 전화를 한다. 전날 면접 본 이야기, 퇴짜 맞은 이야기 등 본인 노력과 컨설턴트가 소개한 곳에 대해 상세히 확인하고 질문하며 조언을 청한다. 적극적이고 예의바르다. 그리고 또 찾아갈만한 곳을 소개해 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이렇게 족히 30여 곳은 소개한 것 같다. 

찌는 어느 여름날 그의 노력이 안쓰러워하던 차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져 한 취업동아리를 소개해 드렸다. 다녀오셨다. “삼겹살과 냉면, 막걸리 한 사발을 드시며 고용노동부에서 멋진 대접을 받았다.”며 너무도 고맙다 인사하신다. 오전, 오후 일자리를 찾아 소개 하던 차에 방금 나온 영화관을 알선했다. 빨리 찾아가 이력서 지참하여 면접을 보시라고 주선했다. 따르릉~ 퇴근시간 몇 분 전 전화벨이 울린다. 최 선생님이다. 

가능성은 높단다. 면접관은 좋아라 하는데 그 윗분의 허락이 남았다며 가슴을 졸인다. 그리고 다음날, 드디어 합격하셨다. “내일부터 출근한다.”며 환희에 찬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상담사인 나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6월 12일 (주)세안텍스, 상봉동 메가박스 청소직 취업 성공’ 등록을 했다. 그의 나이 75세다. 

건강 조심하시며 잘 적응하시라고 응원드렸다. 마음 한편에선 기쁨과 애잔함이 남아있었다. 그러던 10월 어느 날 퇴근길에 찾아와 미역과 잡곡, 영화티켓 2장을 주셨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극구 사양하지만 생존할 수 있게 도와주었는데 사람이 도리를 모르면 안 된단다. 

알고보니 최선생님은 젊은시절 20여년간 전매서공무원으로 근무한 공직자였다. 나누고 봉사하는 삶이 몸에 밴 분이시며 현재는 원로목사로 교도소 사목봉사 및 전국웅변협회교육국장으로 봉사하며 행복해 하신다. 그의 부친께서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애국지사 집안으로 지난 8.15광복절엔 유족 표창장을 받기도한 훌륭한 분이시다. 

청소일은 누구보다 잘하신다고 베테랑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성자가 된 청소부’를 꿈꾼다. 또한 청소 분야의 전문가로 몇 년 동안 노력해온 에코크린 용역전문업체 사업허가를 받아내셨다. 이제 사업가를 꿈꾸는 노익장을 발휘하고 있다.   

최 선생님을 컨설팅하면서 우리상담사들은 한 사람에게 직업만을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꿈도 함께 찾아주는 멋진 삶의 천사들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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