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처럼 살리라

    
    겨울부두는 고드름처럼 차갑다. 아무리 내복을 입고, 방한복으로 중무장해도 동장군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오돌오돌 떨게 한다. 현장생활 25년에 나이도 쉰 살이 넘다 보니 한 해가 다르게 추위를 더 탄다. 더구나 부둣가의 화물을 덮은 시트가 날리고, 앙상한 나뭇가지도 흔들릴 만큼 고추바람이 부는 날이면 두 눈에는 눈물이 샘솟듯이 줄줄 흘러내린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게까지 흐르지 않았다. 노안으로 인한 생리적 현상이고, 수술하면 괜찮다지만 추하고 싫은 모습이다. 그러지 않아도 자꾸 후배들에게 ‘좌상님’ 소리를 듣던 터라 짐짓 “겨울 항구는 정말 쓸쓸하단 말야”라 너스레를 떨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보지만 그들을 속일 수 없다. 일에 대한 욕심과 정열이 남 못지 않다고 자부하지만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겨울이 오기 전 이미 지난 여름부터 ‘세월의 흔적’에 대한 조짐이 주위에 생겨났다. 특히 내 나이와 비슷한 수령의 자귀나무가 능소화와 같이 태풍 ‘루사’로 인해 중동이 부러진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 자귀나무는 어릴 때부터 변함 없는 모습으로 마치 우리 집 수호신처럼 대문 옆에 우뚝 서서 위용을 뽐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능소화 때문에 평생을 짓눌려 살아야만 했다. 능소화 줄기가 밑동부터 흡반처럼 잔뿌리를 내려 자양액을 흡수해 잎과 꽃을 피워댔으니 자귀나무인들 무슨 힘이 남아 있었겠는가.
    유난히 능소화를 좋아하셨던 아버님은 집 주위 곳곳에 이 나무를 심었다. 처마 기둥을 타고 올라가 지붕 위를 붉게 수놓은 것도 있고, 지붕 보다 한참 더 높게 치솟은 참죽나무를 타고 올라가 불기둥을 이룬 것도 있고, 일부러 죽인 향나무의 마른 가지를 감싸 화환처럼 보이는 능소화도 있다. 이 중에서 나는 자귀나무와 더불어 꽃 피우는 능소화를 으뜸으로 쳤다. 우산살처럼 사방으로 고르게 잘 뻗은 가지를 휘감아 80여일 동안 꽃을 피우고 질 때면 장관이었다.
    꽃잎이 아니라 적황색 화관이 통째로 시도 때도 없이 통꽃으로 툭툭 떨어졌다. 그 수도 한 두개가 아니라 매일 떨어진 만큼이나 수많은 꽃망울이 터트려졌다. 특히 장마가 시작되면 이 꽃 자살극은 절정에 다다랐다. 불꽃같은 삶을 견디다 못해 비 핑계를 대고 동반자살을 해 대문 언저리에는 늘 붉은 꽃시체가 그득했다. 자귀나무 꽃과 잎은 수줍음과 부드러움이라면 능소화는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정열 그 자체였다.
    지금이야 소심하고 감성이 무딘 사람으로 변했지만 젊었을 때는 그 장관에 동화되어 나도 모르게 ‘내 저 능소화처럼 짧고 굵게 멋진 삶을 살리라’라 작심한 때도 있었다. 낙화된 꽃도 화려하고 요염조차 했지만 전혀 천박하게 보이지 않았다. 능소화는 내 젊은 날의 꿈 자체였다. 그러나 고향 붙박이로 살며, 직장생활과 한 가정의 가장이 되자 시나브로 그 꿈은 두더지 집처럼 마음 속 깊이 감추어져 버렸다. 대신 이상하게도 능소화의 화려함에 황홀해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귀나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일까. 매년 되풀이되는 자살극 행사에 귀찮은 듯이 청소부와 장의사가 되어 통꽃시체를 빗자루로 쓸고 삼태기에 담아 거름에 버릴 뿐이었다. 또 혼자서 못서는 능소화, 뭔가 버팀목이 있어야 제 꽃을 피우는 걸 괘씸하게 여겼다. 그래서일까. 화려함 속에 숨어 제 속이 썩는 줄 모른 체 살아가는 자귀나무를 나도 모르게 닮아갔다. 자귀나무가 제 스스로 공을 감추고 능소화를 떠받쳐 살아왔듯이 나 또한 가족의 버팀목이 된 걸 자부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쉰밥’ 할 때 그 쉰 살이 넘은 것이다. 자식들은 대처로 제 살길 찾아 떠났고, 아내는 나보다 컴퓨터 게임을 더 좋아하고, 젊은 직장 동료들과 상사는 나 를 고리타분한 좌상으로 취급해 늘 홀로 된 기분이다. 게다가 점점 추위는 더 타고, 바람에 눈물이 마를 날 없는 몸이 되고 보니 어찌 부러진 자귀나무가 남의 일 같으랴. 자귀나무를 닮으며 지낸 세월이 이제 와서는 후회막급이다.
    차라리 능소화처럼 살았더라면 이런 자괴감은 생기지 않을 것 아닌가. 능소화는 말 그대로 하늘()을 능멸하듯이(凌) 위로만 기어올라 피는 꽃이다. 구차하게 살지 않고 절정에서 죽어버리니 하늘조차 거스르는 오기의 꽃이다. 이런 능소화를 닮으려 했던 나는 눈에 번쩍 뜨일 여자가 아니면 결혼을 안하겠다고 객기부릴 때가 있었다. 부모님은 애가 타 먼 친척까지 총 동원해 내 중신을 부탁했다. 그 중 실낱같은 인연으로 부산까지 가 맞선을 보았다. 부산아가씨도 답례 조로 어른을 모시고 강원도까지 찾아왔다.
    그 때가 겨울이었다. 양가 어른들은 마치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듯 방안에서 혼사품 문제로 떠들썩했다. 강원도 총각과 부산아가씨는 양지바른 처마 밑에서 어색한 몸짓으로 황량한 겨울 들판을 바라봤다. 한참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나는 말문을 트느라 대문간의 잎 하나 없는 자귀나무와 능소화를 가리키며 “저 나무들 엄청 삭막하지요?”라며 먼저 말을 건넸다. 발끝으로 땅바닥을 툭툭 치던 부산아가씨가 닭똥 같은 눈물을 갑자기 뚝뚝 흘리더니 “저 예, 이렇게 먼 곳까지 와 살 자신이 없는 거라 예.” 라며 도리머리를 했다.
    이 때였다. ‘이 아가씨는 나와 영 아니야’라며 시큰둥하게 여기던 내 눈에 갑자기 연모의 콩깍지가 씌워지는 게 아닌가. 그녀의 젖은 말투와 눈물에 그만 빠져들어 능소화를 핑계 대며 구애를 하고 말았다.
    “여서 거까지 멀지요. 하지만 말요, 먼 게 뭔 대수요. 지금은 겨울이지만 금세 봄이 오고 여름이 오는 게 아니요? 그 때 되면 아가씨 마음이 달라질 거요. 저 메마른 능소화 줄기에서 새순이 돋고 등불 같은 꽃이 피고 통꽃으로 툭툭 떨어지는 장관을 본다면, 아가씨가 살아왔던 부산은 단지 추억 속으로 사라질 게 틀림없을 거요.”
    “그라면, 그 능소화 필 때 선을 보시지, 와 이리 추운 겨울에 보능교?”
    부산아가씨는 나의 열정적인 구애를 끝내 거절했다. 이 일로 충격 받은 나는 내 분수를 깨닫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재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부산아가씨를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 마치 내 젊은 날을 보상받으려는 듯이 떠올리는 게 객쩍다. 더군다나 고추바람 탓에 흘리는 눈물과 부산 아가씨가 흘렸던 눈물을 연관시키는 자체가 주책바가지다. 그러나 겨울 능소화에 대한 은밀한 비밀 때문에 나는 또 다른 비밀을 꿈꾸고 있는 건 틀림없다.
    그건 부러진 자귀나무와 능소화를 새롭게 짝지어 주자는 계획이다. 여태껏 중동이 부러진 자귀나무가 볼썽사나웠지만 밑동을 베어버리지 않았다. 그냥 뒀더니 싹이 트고 세끼손가락 만한 가지가 여러 개 뻗었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그 중 건실한 것만 남기고 나머진 솎아 줄 생각이다. 워낙 밑동이 튼튼하니 한 해만 지나면 제법 굵게 자랄 것이다. 이 놈과 외롭게 건들거리는 능소화 가지를 당겨 서로 짝을 지어주면 마치 신혼부부 같지 않겠는가. 나의 25년 직장생활은 부두였다. 화물을 선적한 배는 하역을 하고, 공선인 배가 접안하면 화물을 선적했다. 산모가 진통 끝에 아기를 낳듯이 수많은 배에 공들여 선적하고 하역하여 떠나보냈다. 항구는 늘 배를 기다린다. 항구처럼 기다림이 내 몸에 베어있다.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봄을 은밀히 기다린다.
    능소화는 구중궁궐에 어울리는 요염한 꽃만은 아니다. 생명을 중시 여기는 지혜로운 꽃이다. 제 꽃가루가 사람 눈에 들어가면 해롭다는 것을 아는 터라 맑은 날이면 오히려 시들해진다. 다섯 장의 꽃잎을 따로 따로 보내는 게 아니라 꼭 장마철에 비를 머금고 통꽃으로 낙화한다. 쉰 살 나이 타령이나 하고, 어줍은 신세 타령이나 하는 사람에게 능소화는 능멸할 것이다. 지혜를 짜내 성숙된 정열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한 자에게 화사한 미소를 보낼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