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길어 오르는 샘
우편함앞에서 설레는 마음을 가져본 지가 오래다. 예전엔 도시의 삭막함을 대변하는 것 중 하나가 스텐레스 우편함이었다. 적어도 작년까지는 정말 그랬다. 건물 입구마다 대국을 앞둔 바둑판처럼 삭막히 늘어 서 있는 획일적 칼라의 스텐레스 우편함. 좀더 다정한 색감으로 눈길을 끌 수도 있겠지만 하루의 오차도 없이 꽂히는 납부고지서 말고는 뜯어보지도 않고 분리수거함에 들어가는 각종 홍보물들이 주류를 이루는 현실에서 애절한 마음으로 기다려지는 그런 우편함의 애수는 추억에서나 찾아 볼 일이었다.
그런 우편함에서 오늘도 행복을 끌어올리시는 분이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삶의 존재가치를 매일 그곳에서 길어올리시는 분. 애인의 편지를 기다리는 그런 한시적인 울렁거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오늘을 버틸 수 있는 기쁨이 그곳에 있기에 가슴벅찬 기다림으로 우편함을 여시며 하루를 시작하시는 분. 바로, 폐암으로 투병중이신 우리 어머니이시다. 지난해 겨울부터 자녀와 손자들의 일기가 매일 어머니 아파트 우편함으로 배달되고 있다. 4남매중 3남매가 출가하여 5명의 손자,손녀를 두셨으니 총 12명의 가족일기가 매일 번갈아가며 분주히 배달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나이 마흔둘에 어머니는 우리집의 실질적인 가장이 되셨다. 간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연로하신 시부모님과 어린 4남매의 양육을 고스란히 홀로 지셨다. 오직 시부모님 모시고 자녀교육밖에 모르셨던 어머니께서 병든 시부모님 수발들며 4남매 모두 대학교육을 시키시기까지의 곤한 삶은 이미 인공관절로 대체되어 있는 어머니의 다리와 지문을 찾아 볼 수 없이 반질해진 손바닥이 그 고된 시간들을 대변하고 있다.
작년 봄은 40년 가까이 모셨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차례로 돌아가시면서 40년간의 며느리생활이 마감하던 해였다. 남들은 이제 좀 자유로와 지셨겠다고 그동안 수고했다고 격려하시며 어깨를 두드리시는데도 어머니는 좀 더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목놓아 우셨던 그런 어머니시다. 그런 어머니께서 갑자기 빠지는 체중을 이상히 여겨 건강검진을 받으신 후 손에 쥐게 된 것이 폐암진단서였다.
애써키운 자녀들의 안정된 삶을 바라보시며 이젠 며느리신분에서 벗어나 섬김을 받으셔야 할 바로 그 시간에. 그것도 10분이내의 거리로 옹기종기 모여살던 4남매가 갑자기 흩어살게 된 시점에서의 일이었다. 갑자기 홍콩지사로 발령이 나 온 가족이 홍콩으로 이사를 간 오빠의 가정과 회사이전으로 지방근무를 하게 된 막내남동생 때문에 무척이나 허전했던 작년 봄은 유난히도 꽃샘추위가 오래갔다. 어머니곁에는 장녀인 나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여동생 뿐이었고, 늘 함께 했던 4형제가 난생처음 뿔뿔이 흩어지게 된 묘한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맞게 된 어머니의 일은 그래서 더더욱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다.
어떻게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지 몇날 며칠을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물었다. 제발 꿈이길 바라며 아침을 맞으며 외면하고 싶던 숱한 시간들. 그 순간들이 이내 절규에서 감사로, 울부짖음에서 기쁨으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믿음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족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 사랑에 대한 믿음, 서로를 부둥켜 안고 흔들리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가족간의 믿음. 우리는 현실을 순응하며 하나님께서 하실 일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어머니 소식에 홍콩에서 뛰어나온 오빠도, 휴가를 제출하고 엄마 곁에 머물던 나와 동생들도 어머니의 말씀 한마디에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너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애미가 기쁘게 지낼 수 있는 길이고, 너희들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픔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나는 이미 내 몸안에 이상이 있음을 알았단다. 하지만 나로인해 너희의 앞길을 막지않으려고 홍콩으로 이사간 후, 그리고 창원으로 짐을 옮긴 후 병원을 찾았던 거란다. 내 마음을 안다면 너희들이 자랑스럽게 너희 일터에서 자리매김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구나 ”
그 말씀 한마디에 우리 형제들은 우리들이 지켜야 할 위치로 돌아갔다. 어머니의 기쁨이 되고 어머니의 자랑스러움이 된다면 그 고통을 혼자감수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지켜보고 싶으셨던 그마음을 가슴에 새기고 더욱 열심히 일하기로 울며 다짐하였다. 끝까지 어머니의 삶이 후회없으시도록 시간시간을 보람되게 생활하자고 서로를 격려하며 위로하였다.
각기 다른 우리삶의 터전에서 어떻게 어머니와의 하루를 1년처럼 보내고 1년을 10년처럼 의미있게 보낼 수 있을까? 그런 고민에서 시작된 것이 가족일기였다. 순간순간 느끼는 사랑과 어머니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그날의 일기로 작성하여 우리 온 가족 12명이 어머니께 교대로 마음의 편지를 발송하기로 한 것이다. 아주 사소하지만 회사에서 있었던 맛나는 이야기, 그날 읽은 책과 말씀에서 얻었던 소중한 느낌들, 손자, 손녀 녀석들의 학교에서의 실수담에 이르기까지 가족일기의 내용은 다양하고도 풍성하였다. 어머니는 매일 가족들의 일기를 읽으시며 감동도 받으시고 폭소도 터트리시며 1년같은 하루를 보내고 계신다.
아직 글을 못쓰는 내 둘째딸은 하트그림 하나로 사랑을 고백한다. 교편생활로 살림에 익숙치 못한 홍콩의 새언니는 녹두부침개의 요리비법을 편지로 의뢰하여 전수받기도 한다. 매일 보는 나와 여동생 또한 예외없이 마음한편을 일기에 적어 우편함에 넣고 출근한다. 우표가 없어도 발신지가 정확히 적혀있지 않아도 이제 어머니는 눈을 감고도 누구의 편지인지를 아신다. 성격급한 남동생의 우표는 항상 삐딱하게 붙어있고 센스있는 여동생은 마른 꽃잎하나라도 붙여놓고 손자손녀들은 두툼한 도화지인 줄 훤히 아신다.
매일 발송되는 그 편지들을 읽고 또 읽으며 그림 하나에서 하루종일의 기쁨을 발견하고 진통제 먹는 시간마져 까마득히 잊어버릴만큼 어머니는 기쁨과 감사로 그 시간에 몰두하고 계신다. 병원에서 비숫한 시기에 진단을 받았던 환우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셨지만 어머니는 기적처럼 1년넘은 이 시간에도 작년 봄 들여놓은 철쭉 꽃 화분에 물을 주시며 답장 쓸 고민에 빠져있으시다. 손녀보다 못한 필체라고 푸념도 하시며....
적어도 내게있어서 우편함은 이제 더 이상의 삭막함이 아니다. 더 오랜시간 나의 손때가 묻혀야 하고 어머니의 손때가 필요한 행복을 길어오르는 기쁨의 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