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씨의 "모랫말 아이들"은 제목부터가 눈설고 생소하다.
    읽어보니 아마 "모래마을 아이들"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작가의 고향마을은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둑이 있으며 둑 아래에는 모래와 숲이 우거져 있는 곳이다.
    마을이름은 그러한 작가의 어린 시절의 공간적 배경으로부터 유래했으리라.
    강에는 꼼배 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꼼배는 각설이다. 꼼배는 함경도에서 피난 온 뚱뚱한 과부와 혼인하게 된다.
    장터에서 거지부부는 아내가 노래하고 꼼배는 구경군들이 떨어뜨리는 동전을 거두어드린다.
    각설이부부는 식사 시간이면 정확하게 함께 와서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린다.
    꼼배는 동네 아이들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며, 그 집아이 이름을 불러대며 밥을 구걸한다.
    
    아마 꼼배는, 나의 여의도 근무시절에 점심 시간이면 회사동료들과 자주 가던 중국집 "왕자각" 의 주문 받던 종업원처럼, 기억력이 좋은 작자였는 모양이다.
    그 종업원은 거의 동시에 들이닥치는 손님들의 주문을 한꺼번에 머리 속에 넣어두고는 주방에 가서 전달하고 정확하게 식사를 가져왔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사장이었다.
    
    동네아이들이 들쥐를 잡기 위해 쥐불놀이를 하느라 갈대밭을 태우던 날, 거지움막에서 큰불을 발견한 거지아내는 공포에 휩싸여 온몸으로 불을 끄기 위해 불 붙은 갈대 위를 뒹굴어댄다.
    그 바람에 심한 피부 화상으로 인해 숨구멍이 막혀 목숨을 잃게 된다.
    그녀에게는 화재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아픈 기억이 있어서 불을 보자 지나치게 반응했던 것이다.
    갓난아기와 아내를 잃어버린 꼼배는 동네사람들을 향해
    "야 이놈들아, 느이만 사람이냐, 느이만 사람이야?"하며 절규한다.
    꼼배 다리는 꼼배가 마을을 떠나기전에 혼자힘으로 만들어 놓은, 마을사람에 대한 밥값이었다.
    
    어느날 한국전쟁 중에 화염방사기로 인해 심한 화상을 입어 얼굴이 괴물처럼 변한, 상이용사가 애인을 찾아 마을에 불쑥 나타난다.
    모랫말 아이들은 국원이 큰누나인 그녀가 결혼했음을 말해주지만, 상이용사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아마 너희가 작은 누나랑 착각했을 거라며.
    애인을 찾아가는 길에 우연히도 두 사람은 마주친다. 먼저 알아차린 상이용사는 애써 흉칙한 얼굴을 돌려버린다. 국원이 큰누나는 치마를 나풀거리며 남편에게 가는 길이다.
    멀어져 가는 도중에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상이용사를 보는 듯 하더니 이내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상이용사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외국 소설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한 여인이 전쟁에 나가는 애인에게 옷핀을 소중히 간직하라며 주었다.
    병사는 전쟁 중에 한쪽 다리가 절단된 상이용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모랫말 아이들"의 상이용사와 심정이 같았을 것이다.
    목발을 집고 휘청거리며 걸어가는 병사의 한쪽 바지 가랭이가 바람에 마구 휘날린다. 한쪽 다리가 없다는 사실을 자꾸 알려주려는 듯이.
    그는 괴로와 한다. 도저히 애인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는 애인이 준 옷핀을 만지작거린다. 불현듯 병사는 깨닫는다. 애인이 옷핀을 준 까닭을.
    병사는 볼썽사납게 바람에 휘날리는 바지 가랭이에 옷핀을 끼운다.
    그러자 이전보다 바람에 덜 휘날렸다. 이제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애인은 이미 이런 상황까지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사는 힘이 난다.
    그러나, 만지작거릴 입가리개조차 없는 우리의 상이용사는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모랫말 아이들"에는 그밖에도 슬픈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사실주의 소설을 많이 써온 작가가 왜 이토록 슬프고도 매력적인 인물들을 소설 속에 담아 간장처럼 더 삭히지 않았을까 의아했다.
    그랬다면 김원일의 "마당깊은 집" 같은 분위기의 뛰어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무리 사실에 기반을 두더라도, 소설은 일단 허구(fiction)로 받아들일 테니 독자들에게 줄 감동의 열손실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어쩌면 그래서 작가는 잡문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필 형식을 선택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구성상에 명확치 않은 부분들이 더러 눈에 띄였는데 흠이라면 흠일 수 있겠다.  예를 들면,  꼼배 아기가 죽은 정확한 시점이나 이유에 대해 명확치 않다.
    천재적인 작가가 수 년간 세상에 격리되어 지낸 바람에 대단한 필력에 굳은 살이 생긴 탓일까?
    아뭏든 책내용과 잘 어우러지는 삽화를 보는 재미도 솔솔한 좋은 책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