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강(1)
김 헌 일
데릭으로부터는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차를 몰고 험준한 탈키트나 산맥을 따라
늘어진 하이웨이로 사라져 버린 지 닷새 째였다. 그의 낡은 시볼 트럭엔 곰도 쓰러뜨린다는 4.2 구경
매그넘 소총과 커피를 가득 담은 보온병이며 비상식량 그리고 양말 나침반 후라쉬 쌍안경 등이 가득
실려 있었다.
닷새 전 이른 아침. 이젠 고질병처럼 되어버린 불면증에 밤새껏 시달리다가 새벽녘에 이르러 살그머니
잠에 들었던 어느 시각이었다. 요란스레 단잠을 깨우며 전화벨이 울렸다. 데릭의 전화였다.
" 헤이 미스터 킴, 지금 나 떠나려는 참야. 크닉 빙하로 말야. 강을 건너서 베이커 산의 기슭을 따라
오토바이를 타고 빙하까지 갈 거야. 아주 힘든 모험이 될 거야. 물론 조금 위험스럽기도 하겠지. 그렇지만
그게 즐거움 아니겠어? 빙하에 올라서면 그 광경을 사진으로 찍어서 너에게 줄 거야. 킴에게 아주 멋진 귀국
선물이 되겠지."
수화기에서 쏟아져나온 그의 말을 무심히 귓구멍에 흘려 넣던 어느 순간, 아직 잠에 취해 몽롱한 나의
뇌리 한 구석에 작은 불씨 하나가 따끔히 날아드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머리맡의 담배를 찾았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행동에 옮기고 마는 그의 집념에 대한
감탄과 이러다 녀석이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겠구나 하는 일종의 위기감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내가 여느때와는 달리 이번 모험에 따라나서지 않은 것은 표면적으론 얼마 남지 않은 귀국날짜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사그라지지 않는 바로 그 께름직한 두려움 탓이었다. 녀석을
따라다니다 보면 언제인가 기어코 일을 당하고 말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그것이었다. 얼음과 잡목과
늪으로 뒤덮인 북쪽 내륙을 향하여 네 시간이나 달려가 몇 줄기 강과 여울을 건너고 사십 마일이나 되는
숲길을 헤쳐가야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자동차가 고장나거나
눈구덩이에 빠질 우려도 있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숲에는 곰이나 늑대 같은 맹수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이를 찾아 눈을 부라리고 있을 것이 뻔했고,
이미 빙점을 넘어버린 기온은 더욱 깊은 나락을 향하여 곤두박질을 쳐갈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설사
그 빙원(氷原)에 이른다 한들, 산맥을 이루고 있는 얼음덩이와 혹독한 냉기 뿐 거기에 목숨을 걸고
달려들 만한 어떤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귀국이라는 확실한 즐거움을 눈앞에 둔 나는
영하 40 도의 한겨울에 런닝셔츠 바람으로 지내도 좋은 훈기로 가득 찬 내 방에서, 할 일 없으면
낮잠이나 자는 쪽을 택했던 것이었다.
나는 시장기를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벌써 정오가 가까워 있었다. 어제 오후 회사에서 돌아온 후
여태껏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런 깨달음이라도 되는 듯이 뇌리에 떠올랐다. 삼년 여
미국생활에서 가장 어설픈 일이 식사 문제였다. 손수 밥을 지어야 한다는 일도 귀찮았지만 소리 하나
나지않는 빈방에서 벽을 상대로 앉아 급우를 받고있는 자동차처럼 무감각하게 숟가락질을 해 대어야
한다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이곳에서의 나에게 먹는다는 일은 오직 살아 부지하기 위한 일로만 그
의미가 축소되어 있었다. 즐거움이라든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상에서 느껴지는 푸근함 그리고 오순도순
대화가 영그는 오붓함 같은 것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쪽을 향해 열린 유리창은 언제나처럼 드넓은 하늘의 모습을 조용히 투영해 내고 있었다. 그것을 따라
더듬더듬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인가 고국의 내 집 앞 골목에 이르고 말 하늘. 나는 그것이 내 고향과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음미하며 창가로 다가갔다. 하늘의 가장자리는 푸르스름한
구리녹빛이었고 지평선에 맞닿은 부분은 지금쯤 아시아 대륙의 동쪽 바다 위로 머리를 내밀기 시작할
태양의 잔영을 받아 연노랑 빛으로 살보드랍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연녹색의 구름이 수많은 골과
구릉을 이루며 하늘의 넓이를 강조하듯 아득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수많은 황금빛 가루로 변하여 허공에 흩어져가기 시작한 구름의 산맥 어디쯤에서 데릭의 모습이 다시금
솟아났다. 그가 돌아와야 할 날로부터 사흘이 지나 있었다. 자식이 기어이 어디서 길을 잃고 헤매다
눈 속에 파묻혀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드넓은 광야 알라스카에서 한 인간의 죽음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울창한 가문비나무 숲에서 나뭇가지 하나가 뚝 꺾어져 내리는 것이나, 한낮의
샛강을 한가로이 유영하던 연어가 곰의 쇠스랑 같은 발톱에 채이어 저 세상으로 떠나버리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데릭 그 자식도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슨 까닭에선지 생명을
건 모험에 가혹하게 자신을 몰아만 갔다. 자신이 어떤 위험에 직면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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