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강(2)
김 헌 일
석달 전 서튼에서의 일이었다. 그곳은 거친 풍파를 일으키며 평원을
달려온 탈키트나 산맥이 마타누스카 계곡에 이르러 우뚝 멈추어선, 험준한
실은 구릉지대였다.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산에 있던 탄광에서 석탄을
차들이 줄을 이었다는, 울퉁불퉁한 흙길을 따라 두 시간을 기어오른 우리는
산의 중턱 어디쯤에서 차를 세웠다. 그곳에선 마타누스카 계곡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쌍을 이룬 절벽이 산맥의 허리를 단숨에 잘라내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굽이쳐 흐르는 곡선의 그 거대한 유연함이라니…. 꼬집어
말하면 아득한 옛날 빙하가 스쳐지나간 자국에 불과한 저것이 왜 이토록
숭고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기만 하였다.
우리가 서있는 곳의 뒤쪽엔 낭떠러지가 병풍처럼 우리를 막아서고 있었다.
절벽이라고 하기엔 경사가 좀 완만했고 그냥 언덕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급하고 험한 그런 곳이었다. 맨손으로 기어오르기에도 만만치가 않았다.
장작불에 구운 소시지와 빵으로 점심을 때운 나는 소화도 시킬 겸 그곳엘
올랐었는데, 정상에서 내려다본 광경이 제법 아찔하였다. 내려올 땐
다리가 사정없이 후들거려 아예 엉덩이를 땅에 대고 직직 끌며 기어
내려와야 했다.
데릭은 우리가 차를 세워놓은 평지에서 오토바이 타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자갈과 고랑 그리고 억센 나무뿌리들로 더욱 험난해 진 좁은 길을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깊은 산중의 적요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발작적인
금속성 파열음 그리고 그가 온몸을 던져 즐기고 있는 파격적인 속도는
삶에 대한 그의 도전적 자세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그는 요란스럽기 짝이 없던 질주를 멈추고
우리가 있는 평지의 한 끝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는 차분한 손놀림으로
그때까지 끼고있던 검정색 색안경을 벗어 윗호주머니에 접어 넣었다.
그리고 헬멧의 턱끈을 조였다. 십여 초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때까지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던 데릭은 액셀레이터 손잡이를 매섭게 잡아닿겨 엔진을
빠른 속도로 공회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어딘지 모르게 결연함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목에 걸려 있던 카메라를 빼내어 그를 향해
치켜들었다.
순간 그의 한쪽 발이 땅을 슬쩍 박차는가 싶더니, 그 육중한 오토바이가
화살처럼 가볍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란한 폭음과 함께
그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너무나도 빨리 다가와서 내가 초점을
채 맞추기도 전에 카메라의 뷰화인더는 은빛의 금속살이 휘어질 듯
돌아가고 있는 바퀴 모습으로만 가득차게 되었다. 다음 순간 엄습해
온 의아함과 두려움 속에 나는 얼른 카메라를 제치고 말았다.
어이없게도 그는 절벽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언덕에 박치기라도 해 보려는 짓인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오토바이를 타고 언덕을 기어오르려는 기세였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 터무니없는 시도였다. 나는 그 벼랑의 위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맨손으로 기어오르기도 쉽지 않던 그것이
무게가 백 킬로그램이 넘는 육중한 쇳덩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길
리가 없었다. 가파른 벼랑길에 납작하게 매달릴 수 있는 장치라도
달고있다면 몰라도 턱없이 크기만 한 고무바퀴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을 뒤엎고, 그는 단숨에 벼랑의 8부 지점까지 달려
올라갈 수 있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 그의 오토바이는 더이상 나아가질 못하고 기력이 다해
비칠거리고만 있었다. 액셀레이터를 거칠게 잡아당긴 탓에
꽁무니에선 허공에 비질을 하듯 연기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오토바이는 한치도 더 기어오를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균형을 잃고 쓰러져 이십 여 미터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릴 듯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는 쓰러져버릴 듯한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워
곡예를 부리듯 아래로 내려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 평지에 내려와
일이 분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는, 절벽을 향해 다시금 치닫기 시작했다.
" 당장 그만 둬, 이 미친 녀석아. "
나는 그렇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나의 외침이 그의 귀에 닿을
사이도 없이, 그는 이미 벼랑의 중턱을 지나가고 있었다. 가슴을 밟고
지나가듯 요란한 오토바이의 엔진음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이
위태로운 자태에 오금이 다 저려왔다.
몇 차례의 아슬아슬한 위기 끝에 그는 아까의 그 곡각지점을 무사히
통과하여 언덕마루에 올라설 수가 있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까마득히 여겨지는 언덕마루 위에서 드넓은 허공을 배경으로
우뚝 서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는 그의 모습이 검정 실루엣으로
비쳐왔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가혹한 모험에 마냥 매달리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저
좋아하기 때문에 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에베레스트를 두 번이나
정복한
어느 등산가의 말처럼 정복 후에 느껴지는 짜릿한 성취감에 온통 마음이 팔려서 무자비하게 자신을 혹독한
위험의 상황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데릭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데릭에게서 변화가 느껴지던 것은 한달 전 어느 날부터 였다. 그날은 몹시 추웠고 비가 축축이 내리던
을씨년스런 날이었다.
" 앗!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죽었어. "
항공기 탑승구 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서울의 본사에서 온 서류뭉치를 사무실로 옮겨가기 위해
대합실을 걸어가고 있던 데릭과 나는 서류뭉치를 내던지고 급히 비행기로 달려갔다. 비행기의 출입구
오른편 조금 뒤쪽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필리핀 출신 기내청소부 리사와 태국 여자 밤비 그리고 숯검뎅이
같이 철저하게도 시커먼 피부색을 가진 흑인 로렌스 그 밖의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동양계 여자 승객과 통하지도 않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려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한 노파가 시트에 몸을 묻고 자는 듯 누워 있었고 그 곁에 눈언저리를 유난히 시퍼렇게 칠한 사십대 초반의
여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나는 첫눈에 그들이 한국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필리핀인 대만인
타이인 멕시코인 - 온갖 인종의 틈바구니에서 나를 발견한 여인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경상도 지방의
투박한 억양이 여인의 말씨에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 울 옴만데예 죽기 전에 고향 땅을 꼭 한번 밟아봐야겠다꼬 부득부득 우기는 통에 길을 나섰다가 이리
됬심더. "
뜻밖에도, 노파의 딸임직한 그 중년여인은 공연한 소동을 일으켜 죄송하다는 투로 말을 하고 있었다.
하여튼 미국과 한국을 잇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곳 앙커리지 공항엔 이런 죽음이 흔했다. 그들은
모두 고향을 찾아가다가 죽어갔다. 도대체 고향의 무엇이 그들을 유혹하여 사람들을 어둠과 추위 속에
암울한 고도처럼 떠있는 이곳 앙커리지에서 생을 마치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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