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장미(76)
김형엽
잠시 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송 경사는 전화를 받고 곧 주 형사에게 눈짓을 했다.
주 형사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송 경사 곁으로 가서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 여보세요. "
" ...... "
" 황 필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
갑자기 주 형사의 얼굴에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 그래... 잘 감시하면서 따라 붙게. 그리고 수시로 연락을 하고... "
그 즈음 최 반장은 서류를 모두 읽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황 필두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 음.. 강 형사와 김 형사가 수고가 많군. 집에도 못 들어가고... 자 다시 소파로
가서 앉지. "
세 사람은 또 다시 소파에 모여 앉았고 송 경사는 안스런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안산 상록수 아파트 단지내 놀이터에는 뜨거운 한 여름의 날씨에도 상관없이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모여서 이것저것 놀이기구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렇게 천진스럽게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 영옥은 두 팔을 치켜 올리며 커다랗게
기지개를 폈다.
( 아이들의 노는 모습은 언제보아도 지겹지가 않아. )
그녀는 다시 한번 작게 하품을 하며 커텐으로 창문을 가리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 어머.. 벌써 1 시가 다 되어가네. )
그녀는 천천히 거실을 거쳐 주방으로 갔다.
( 밥 생각은 없고....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을까. )
가스렌지의 불을 지피고 적당량의 물을 넣은 작은 냄비를 올려놓았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식탁위에 놓고 라면 한봉지를 뜯었다.
( 이이가 오늘도 늦을건가. 벌써 3 일째 계속 야근인데.. )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전화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렸다. 몇번의 신호음이 울리더니
상대방에서 소리가 들렸왔다.
" 안녕하십니까. 가야 무역의 조 봉석입니다. "
" 저야요. "
" 아. 당신... 웬일이야. "
" 점심식사는 하셨어요. "
" 그래. 조금전에 먹었어. 당신은 ... "
" 라면 끓이고 있어요. "
" 왜 라면을 먹어. "
" 오늘도 늦을 건가요. "
" 그렇지. 그리고 삼일후에 또 다시 일본을 가야돼. "
" 그 얘기는 어제밤에 와서 해쟎아요. "
" 그랬나. "
" 그럼 오늘도 12 시나 되야 들어오겠네요. "
" 그럴것 같아. 내가 저녁때 전화 할 께. "
" 알았어요. "
그녀는 맥없이 전화 수화기를 내려 놓고 다시 거실로 나갔다. 냄비의 물이
끓고 있었다. 그녀는 라면을 꺼내어 냄비속에 넣었다. 금방 먹을수 있을
정도로 끓었다. 냄비를 식탁위에 내려 놓고 조금씩 젓가락으로 라면을 들어 입에
넣었다. 절반 정도를 먹고나서 젓가락을 식탁위에 내려 놓았다.
( 너무 더우니까 라면도 별 맛이없네. )
그녀는 더 먹는것을 포기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서는 그대로
침대위로 무너졌다. 짧은 치마가 침대와 함께 출렁거리며 미끈한 다리를
그대로 노출시켰다. 그렇게 엎드려서 눈을 감으려던 그녀가 옷장을 보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옷장으로 다가가서는 옷장문을 열었다.
옷장안에는 많은 옷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그녀는 정리되어 있는 옷들을
한쪽으로 밀고는 깊숙히 숨겨져 있는 가방을 꺼내었다. 침대위에 앉아
가방을 열었다. 가방속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있는 비닐봉지가
가득차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 분명히 마약이야... )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 벌써 열흘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까지 나타나지도 않고 .... 틀림없이
이 물건을 찾으려 올텐데.... )
그녀는 악몽이라도 생각나듯이 더욱 몸이 떨려왔다.
( 그 날로 끝냈어야 하는건데... 이 물건을 가져 오지 말았었야 했던것을... )
가방을 다시 챙기고 옷장속 깊숙히 밀어 넣고는 다시 침대위로 쓰러졌다.
졸음이 쏟아지는지 그녀는 두눈을 손으로 비비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내와 지낸 무인도에서의 3 일간이 마치 영상화면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왜 이렇게 허전한 것일까... 그 사내와 같이 있던 시간이 악몽처럼 느껴지지
않아지는 이유가 뭘까 ? )
그녀는 침대위에서 몸을 뒤척거렸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조금만 욕망이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조금씩 올라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잠을 자려고
애를 썼지만 쉽게 잠들지도 못했다. 그 때였다.
" 따르르릉 .... 따르르릉..... "
침대 머리맡에 있던 전화가 조그맣게 울렸다. 그녀는 몸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않고
엎드린채로 몸을 움직여 손을 뻗어 수화기를 잡았다.
" 여보세요. "
" ..... "
상대방으로 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조금 짜증스럽게 얘기했다.
" 여보세요. "
" ..... "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 별 미친자식아냐. 전화를 걸었으면 얘기를 해야 할 거 아냐. )
그녀는 다시 머리를 침대에 묻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전화를 쳐다 보았지만 손으로 들지는 않았다. 전화벨소리는
계속해서 울렸다. 7 - 8 회 정도 신호음이 울린 다음에야 그녀는 수화기를 잡았다.
" 여보세요. "
짜증스런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 나요. "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 누.. 누구세요. "
" 그 동안 잘 지냈오. 이제야 연락을 해서 미안하오. "
그녀는 몸이 굳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목소리 조차 나오지 않았다.
" 내가 맡긴 물건을 찾을려고 하오. "
" ...... "
" 내 말 듣고 있는 거요. "
그녀는 커다랗게 숨을 몰아 쉰후 입을 열었다.
" 드... 듣고 있었요. "
" 이틀후에 내가 그리로 가겠오. "
" 이 곳으로 온다고요. "
" 그렇소. "
" 안돼요. 집으로 오지 마세요. "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얘기를 했다.
" 그러면.. "
" 어딘지 얘기를 하세요. 내가 갖고 나가겠어요. "
" 음. 좋소. 그럼 이틀후에 내가 다시 전화하겠오. "
사내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 놓지도 못하고 멍한 상태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 드디어 나타났어. )
그녀는 거실로 나가서 냉장고의 물통을 꺼내 유리잔에 가득히 부웠다. 그리고는
단숨에 한컵을 다 마시고 또 따랐다. 천천히 식탁으로 걸음을 옮기고 의자에
앉아서 이번에는 조금씩 마셨다.
( 신고만 할 수 있다면...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간의 일들이 모두 밝혀지고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신고를 할 수는 없어... 그냥 물건만 주면 되는거야.
사내는 분명히 이 나라를 떠난다고 했으니까... 그 자가 이 나라를 떠나면
아무도 모르는 거야. 봉석씨도... 그리고 어머님도... )
그녀는 컵에 남아있던 물을 모두 마셔버렸다.
( 나만이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야..... 누구에게도 얘기 할 수 없어... )
그녀는 고개를 끄떡거리다가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가 침대위로 엎드렸다.
가슴 한 구석이 텅빈것같은 느낌속에 알수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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