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장미(77)
김형엽
같은 시각.
사내는 서울역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왔다. 검은 양복차림에 검은 가방을 들고
얼굴에도 역시 검정색 썬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사내는 천천히 택시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기고서 몇명되지 않은 줄 뒤로 섰다. 빈차가 많았기에 별로 기다리지 않고 택시에
올랐다. 약 50 살은 되어 보이는 운전수가 운행하는 개인 택시였다.
" 어디로 모실까요 ? "
운전수는 백밀러로 뒤에 탄 사내를 쳐다보며 공손히 행선지를 물어 왔다.
" 아.. 미안하지만 야외로 좀 나가고 싶은데 갈 수 있습니까 ? "
차는 천천히 택시 정류장을 빠져 나갔다.
" 어디를 가시려고 합니까 ? "
" 예. 팔당을 지나 양평으로 갔으면 좋겠는데요. "
" 양평까지요.... "
운전수의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우며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 보았다. 사내는
곧 지갑을 꺼내더니 만원권을 꺼내었다.
" 이거 10 만원 입니다. 적다면 더 드릴수도 있습니다. "
사내가 건네주는 돈의 액수를 보자 운전수는 금방 표정을 바꾸더니 사내로 부터 돈을
건네 받았다.
" 예.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편안히 쉬십시요. "
" 그럼 부탁합니다. "
사내는 몸을 깊숙히 의자속으로 밀어 넣고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차는 순조롭게
서울역을 벗어나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시내를 빠져 나가는데 조금 지체하더니
망우리를 지난 차는 거의 100 키로 이상의 속력을 내고 달렸다. 사내는 여전히
시선을 창 밖에서 돌리지 않았다.
( 피노키오가 현재 별장에 없다. 일단은 잘 되었지만 만약에 놈이 다시 오늘이나
내일중에도 별장으로 오지 않는다면... 내일까지는 피노키오를 제거하고 모레 물건을
받아 처분하고 이 한국을 떠나야 할텐데.... )
사내는 창밖의 하늘을 쳐다 보았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지만 하늘 멀리
동쪽으로부터는 커다란 먹구름이 조금씩 밀려오고 있었다.
( 차라리 오늘밤과 내일 비가 왔으면 좋으련만.... )
사내는 다시 머리를 차 시트속으로 기대며 눈을 감았다. 차는 시원하게 달려
구리시를 넘어 어느새 팔당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내는 앞에 앉은 기사가 무슨소리를 하는것 같아 눈을 떴다.
( 아..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군. )
사내는 몸을 조금 일으켰다.
" 나를 불렀습니까 ? "
운전수는 고개를 돌려 사내를 쳐다보았다.
" 양수리 다리를 넘었습니다. 어디로 가실건가요. "
" 아. 그래요. 그럼 적당한 곳에 세워주시요. "
"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 아니 괜챦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식당앞에서 세우십시요. "
차는 제법 큰 한식집 앞에서 멈추었다. 운전수는 사내가 나오기도 전에 먼저
내려 뒷문을 열어주었다.
" 감사합니다. "
" 아닙니다. "
운전수는 정중히 인사를 한 후 다시 차에 올랐다. 차가 출발하자 사내는
식당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자 종업원이 입가에 웃음을 띄우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 조용한 방 있오. "
" 혼자이십니까 ? "
" 음.. "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저를 따라 오십시요. "
사내는 여자 종업원의 뒤를 천천히 따라 후미진 곳에 조용하고 아늑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 이 쪽 방으로 드시지요. "
종업원이 문을 열어주자 사내는 신발을 벗은 후 방으로 들어섰다. 곧 이어 종업원도
따라 들어섰다. 얼굴에 약간의 주근깨가 있는 종업원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메뉴판을 들고 사내에게 다가갔다.
" 여기는 무엇을 제일 잘하지. "
사내는 메뉴판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채 물었다.
" 예. 정식이 아주 잘 나온다고 여러 손님들께서 말씀하십니다. "
" 정식이라... 그럼 정식을 가져오고.. 메운탕과 소주도 한병 주시요. "
" 알겠습니다. 누가 더 오시지는 않을건가요. "
" 나 혼자 먹을 것이오. "
" 알겠습니다. 곧 올리겠습니다. "
종업원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내는 안경을 벗어
식탁 위에 놓고 밖을 내다 보았다. 창 밖으로 북한강 줄기가 한 눈에 들어왔다.
( 음.. 좋은 경치군. )
노크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지만 사내는 여전히 밖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잠시후
문이 열리며 종업원이 들어섰다. 종업원은 들어서자 또 다시 공손히 인사를 한 후
식탁 위에 들고 온 반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러가지의 반찬이 식탁위를
채워 나갔지만 사내는 아랑곳 없이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반찬은 상당히 많았다.
여러가지의 나물은 물론이고 생선조림, 쇠고기 무침등 거의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종류가 다양했다. 여자 종업원은 식탁을 다 정리하고 나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종업원이 나가자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식탁으로 옮겼다.
( 음. 상당히 푸짐하군. )
사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주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그리고는 소주잔을
입에 대어 한 모금 마시고는 여러가지 반찬중 제일 먼저 고등어 조림을 먹었다.
( 이 곳에서 피카소의 별장까지는 택시로 15 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있는 거리다.
오늘밤에 정찰을 완전히 끝내고 내일밤에 일을 마쳐야 한다.... )
사내는 시계를 한번 쳐다 보았다가 술잔에 남은 술을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잔을
내려놓고 또 한잔의 술을 채울때 밖에서 조그맣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 들어오시오. "
방문이 열리고 여자 종업원이 들어섰다. 종업원은 상 가운데 가스렌지를 올려 놓고는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위에 냄비를 살짝 올려 놓고는 방문을 닫았다.
" 이게 매운탕이오. "
사내가 냄비를 가리키며 종업원을 쳐다보았다. 얼굴에 약간의 주근깨가 옥의 티로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얼굴이었다.
" 예. 그렇습니다. "
종업원은 사내의 맞은편에 무릎을 공손이 붙힌채 앉아서 매운탕의 두껑을 열고는
국자로 다듬기 시작했다.
" 무슨 고기가 들었오. "
" 쏘가리 매운탕입니다. "
" 쏘가리라... 민물고기에서는 최고급이군. "
" 예. 요즈음은 고기 구하기도 힘들다고 합니다. "
종업원은 매운탕을 다듬으면서 사내에게 대답을 할때는 고개를 조금 들어 사내의
시선을 바라보았다.
" 아가씨. "
" 저는 송 나영 입니다. 미스 송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
" 아. 그래요... 그래 미스 송. "
" 예. 말씀하십시요. "
" 근처에 좀 조용하고 아담한 방이 있는지... "
" 주무실 방을 찾는 건가요 ? "
" 그렇소. "
"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조용한 호텔이 하나 있습니다. "
" 아. 그래. "
사내는 술 한잔을 그대로 마셨다. 그리고는 잔을 종업원에게 권했다.
" 자. 미스 송 한잔 하겠오. "
" 아.. 안됩니다. 근무 시간에는 절대로 마실 수 없습니다. "
사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머뭇거리자 종업원은 국자를 냄비위에 살며시 놓고는 몸을
일으켜 사내곁으로 다가 갔다.
" 대신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
" 흠.. 미안하오. "
" 괜챦습니다. "
종업원은 무릎을 끓고 천천히 사내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서 맞은편으로
가려고 할때 사내의 손이 발목을 잡았다.
" 헉.. 왜 이러십니까 ? "
종업원의 몸이 약간의 경련을 일으켰다.
" 오늘밤에 같이 지내고 싶소. 영업이 몇시에 끝나지요. "
" 하지만... "
종업원도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사내는 천천히 발목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그러자
종업원은 빠르게 사내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아 익어가는 냄비를 뒤섞으며 가스렌지의
불을 줄였다.
" 나가서 조용한 방을 예약해 놓으시오. "
" 아.. 알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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