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다리
육민애
아프다. 낯모르는 여자가 아파트 계단에서 일어나더니 나의 뺨을 때렸다. 찰싹 소리가 아파트 한 동을 울릴 만큼의 진동이 공기를 타고 벽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저 아프다는 생각만이 멍하게 어둠을 잡아먹고 있었다. 눈을 흘기며 나를 보고 있는 이 여자는 처음 본 얼굴이었다. 하얀색 점퍼에 노란 스웨터를 받쳐 입고 검정색 짧은 미니스커트 아래 부츠도 아닌 운동화도 아닌 여름 샌들이 새빨갛게 칠한 그녀의 발톱 사이에서 삐죽 인사를 했다. 긴 생머리를 하나로 단단히 말아 묶고 동그란 눈에 하얀 피부가 예쁘다는 인상을 주는 그녀의 입에선 뜻 모를 소리만 나왔다. “그 사람 돌려놓으세요!” “네?” “하선주 씨 맞죠?” 여자는 내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힘을 주어 나의 눈을 응시며 말하고 있었다. 선생님이란 호칭이 따로 돌아 이름만 불려 본지 오래라 내 이름이 어색했다. “맞는데 전 그 쪽을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 사람이라니… 전 미혼이에요. 사람 잘못 찾아 왔나 봐요.”, 내 말이 끝나자 여자는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 “이상준 씨 알죠?” ‘하… 이상준이라…’, 툭 하고 지난 기억이 흔들거렸다. 주춤거리며 발걸음을 떼자 머리 위의 등이 환하게 나와 이 여자를 무대 가운데로 불러 조명을 비춘 듯 했다.
그 남자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나의 첫 남자였다. 대학 신입 시절 나에게 시를 읽어 주며 나의 몸을 탐닉했던 그 남자. 시어 하나 하나가 흩어져 방 안을 돌고 돌아 그와 나의 온 몸을 타고 넘어 골목 담장을 넘어 저 멀리 별과 달을 좇아 어둠을 헤맸다. 사랑이 무엇인지, 남자가 무엇인지 모를 그저 처음이란 설렘에 여러 밤을 지세우고 일 년 반이나 질질 끌려 다닌 아픈 내 청춘이었다. 하숙방 사이 허름한 여관의 하얀 침대커버에 번져버린 내 처녀성이 현실이라면 사랑은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냉장고와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미리 여러 가지 반찬을 해 정성스럽게 접시에 놓일 때도 있을 반찬들의 저장고 냉장고 말이다. 쉰내 나는 반찬과 싱싱한 과일들 혹은 어머니가 담아 놓은 철 지난 김장 김치를 보관하는 냉장고처럼 말이다. “학교 선배인데요. 지금은 연락을 안 해요. 지금은 남보다 못할걸요.”, 아는 사람정도로 말을 해버리자 내 처녀성이 가벼워져서 순간 울적해 졌다. 여자가 나의 당황한 얼굴을 알아챌까봐 서둘러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내 얼굴로 집안의 공기와 밖의 공기가 뒤섞이며 꽉 낀 바지가 터지듯 굉한 소리가 밀려나왔다. “저... 갈 데가 없어요.”, 현관으로 들어서려는데 여자의 목소리에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뒤돌아보니 트렁크 가방이 우두커니 그녀의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래도 모르는 사람을 집 안으로 들일만큼 나는 정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없다지만 언제부터인가 아니 사회생활의 체계가 몸에 붙으면서 사람과의 관계가 상하 혹은 좌우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매일 신문과 방송을 통해 들려오는 이웃사촌의 이야기도 예전의 정이 넘나들던 때가 아니었다. 어려운 경제적인 환경 속에 생활 범죄가 급증하고 사기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오늘이다. 아는 사람도 조심할 판에 초면의 그 여자를 단지 갈 곳이 없다는 이유로 내 집에 들일 이유가 없었다. 따스한 공기가 몸을 휘감으니 뺨이 아렸다.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간단하게 냉찜질을 만들었다. 시계를 보니 여덟시가 조금 넘었다. 혼자 늦은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오전 열한시쯤 같은 문학 동문인 선생님의 북카페에 다녀오느라 간단하게 요기만 하고 하루 종일 커피와 씨름했더니 싸하게 배가 고팠다. 냉장고를 이리저리 뒤적거리다 유통기한이 하루도 채 안 남은 우동이 손에 잡혔다. 2인분이었다. 배고픔으로 치자면 3인분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자의 시린 발이 자꾸 마음의 허기를 불러일으켰다.
찰싹, 남자의 큰 손이 내 뺨과 허공에서 춤을 췄다. 그 소리는 박자를 맞춰가며 빈 강의실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조개마냥 남자의 꽉 다문 입 사이에서 피가 베어 나올 듯했다. 나는 눈을 꼭 감은 채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길 주문처럼 외웠다. “너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아?” “...” “다른 남자랑 밥을 먹는 건 괜찮아. 그런데 니가 왜 밥값을 계산해?” 맞은 이유가 남자 후배 밥값을 계산해서란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조선팔도도 아닌 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사는 나는 순종적이고 복종적인 그의 여자여만 했다. 그는 미안하다며 두 팔로 나를 안아 그의 품에 나를 가두었다.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이제 그를 안지 반년, 그의 손자국이 몸에 남은 지 한 달. 웃는 얼굴이 부드럽고 맑아 보는 여자마다 눈길을 주는 호감형의 그였다. 일명 요즘 트렌드인 꽃미남이었다. 같은 과 혹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는 이상적인 커플이었으며 그의 선택을 받는 나는 축복받은 여자였다. 내 어깨의 검은 그림자는 그의 미소에 가려져 낮에도 밤에도 발바닥에 숨어 있었다. 그의 몸이 나를 탐하고 지친 밤의 피로가 겹쳐지면 그제서야 편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발바닥에 붙은 그림자였다. 그 날은 학기 종강 파티가 있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올 수 있던 날이기도 했다. 술잔이 오가며 짙은 농담에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화장실을 찾아 잠시 밖으로 나왔다. 참았던 소변이 시원하게 변기를 향해 아우성을 쳤다. 그리고 일행들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내 손이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지저분하게 흩어져있는 신발이 눈에 거슬렸던 것이었다. 제 짝을 찾아 선, 후배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 그러다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다문 그의 입술이 순간 가리비보다 더 크게 보였다. 나는 웃는 눈빛 사이로 흐르는 냉기에 오한이 들었다. 방금 시원하게 소변을 보고 온 내 방광이 덜덜 떨려 다시금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종강이 아쉬웠는지 그와의 이별을 예감했는지 파장을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부슬비가 내렸다. 일행과 헤어지며 일일이 웃음으로 대하던 그가 나와 단둘이 있자 말이 없어졌다. 그러다 그는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어둠을 가르며 한 마디 했다. “횡단보도까지 내가 먼저 가면 너는 오늘 죽는 날이다.”, 히죽거리며 새벽길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발바닥에 붙은 어둠을 온 몸에 끌어 당겼다. 나는 가파른 내리막 길 끝에서 붉은 빛을 깜박이며 옆으로 서 있는 신호등까지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어둠에 갇힌 술기운에 비틀거리는 몸을 뒤로하고 뛰었다. 신호등에 다다라서 뒤를 보니 그는 먹이를 낚는 호랑이처럼 어슬렁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길 끝 막다른 골목에 같은 동기가 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술을 마시던 그녀의 하숙집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내 심장을 조이는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온 몸을 감던 어둠은 발바닥에 붙다 못해 제 모습을 잃은 채 존재감도 없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집을 향해 뛰었다. 뛰고 숨을 헐떡이고 뛰고 또 숨을 헐떡이며 쓰러질 듯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다.
없다. 그녀가 없었다. 지금쯤이면 집에 들어와 있어야 할 그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멀리 골목길을 따라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나는 원룸 구석 어둠에 몸을 감추고 떨리는 몸을 꼬옥 안았다. “누구세요? 어! 선주야?”, 그녀였다. 떨리는 몸을 다독이는 그녀의 손이 너무나 따뜻해서 왈칵 눈물이 났다. 일 년 넘게 그와의 일이 포도송이 보다 더 많은 알들이 줄타기를 하며 부슬비와 함께 내렸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그녀가 가만히 듣고는 옷을 벗어 보라고 했다. 형광등 아래 알몸을 드러낸 내 몸에 나보다 더 서럽게 그녀가 울었다. 다음 날, 그와 나 사이는 소문과 진실 사이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는 그 날 이후 나와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얼굴만 알고 지내던 같은 과 선배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녀는 당찬 성격에 어느 남자 선배와도 대적할 배짱을 가진 여장부였다. 한참을 내 얼굴만 보던 그녀가 가만히 나를 안아주며 말을 꺼냈다. “사실, 너 보다 먼저 내가 그 선배랑 사귀었었어. 마지막에는 칼 들고 집에 찾아오더라.”,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네???” , 그녀의 첫 말에 놀라움이 뒤이어 배신감이 꿈틀거렸다. 그에 대해 알면서 모른 척 한 그녀가 미웠다. “그 선배 밖에 안 보이던 너에게 그리고 그 선배의 이미지와 내 말에 사람들이 듣기나 했겠니. 니가 참 대단하다. 앞으로 조심하고 잘 싸웠다.”, 빙그레 그녀가 웃었다. “네.”, 맞는 말이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 사람 밖에 안 보였다. 눈에 콩 깍지가 씌여 그 사람이 세상의 중심으로 느껴졌던 나였다. 그게 사랑이었는지, 호기심이었는지 지금도 가물가물하다. 단지 지금은 아픔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일이 있고 그 사람이 어떻게 졸업을 했는지 나는 어떻게 학교생활을 했는지 내 남은 학창시절의 기억이 뭉둥그려져 있었다. 나는 학사 과정을 무사히 이수를 했고 연습장에 끄적이며 적던 시나 소설을 신춘문예에 응모를 했다. 그리고 졸업하고 일 년 만에 등단이라는 크나큰 선물을 받았다. 지금은 작가라는 이름으로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한국 문인협회에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뭉둥그려진 학창시절처럼 남자의 존재도 뭉둥그려져 남보기 좋게는 독신주의 여작가였다.
자동차 경적 소리보다 크게 울려 퍼지는 현관 벨 소리에 들고 있던 얼음주머니를 떨어뜨렸다. 인터폰을 확인하니 여자였다.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에 어둠이 가득했다. 이미 겪어 본 나의 직감에서인지 나는 여자를 말없이 집 안에 들였다.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보니 여자의 배가 볼록 튀어 나왔다. “사실… 임신 5개월 접어들었어요.”, 나의 눈길을 느꼈는지 말로 시선을 가로챘다. “저녁은요?” “아직이에요.”, 여자는 아까의 당당함 과는 달리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우동 괜찮아요?”, 나는 여자에게 물으며 가스렌지에 물을 얹었다. “네.” 그 남자의 옛 여자와 현재의 여자가 식탁을 마주하고 우동을 먹고 있었다. 지난 시간의 빈 여백은 ‘후루룩’ 소리에 이어지는 듯 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는 침실에 그녀는 거실에 각 자 잠을 청했다. 거실 불이 꺼지는 소리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화장실 안에서 전쟁이 터졌는지 변기 물이 거칠게 잠을 깨웠다. 거실에 나가보니 그녀가 없었다. 화장실 불이 휜하게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변기를 양손에 잡고 신성한 의식을 행하듯 구토를 하고 있었다. 남성의 다리 사이를 애무하듯 느리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구토를 했다. 나는 얼른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가스렌지에 주전자를 얹어 연하게 보리차를 끊였다. 언제 나왔는지 여자가 식탁 의자에 앉아 빙그레 웃고 있었다. “언니 집에 온 것 같아요. 아니면 친정집이라든지요.” “...” “그 남자는 당신 때문에 변했대요.” “네?” “그 남자는 당신 때문에 사랑을 알았고 당신 때문에 사랑에 무감각하대요. 그를 변화시킨 당신을 꼭 보고 싶어서 왔어요. 당신 팬이라며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당신을 찾았어요.” “전 이제 그 선배랑 아무 상관없어요.” “전요. 고아에요. 이 세상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 사람만이 유일한 가족이고 이제 태어날 우리 아기 콩이가 두 번째 가족이에요. 저 어디에서 왔는 줄 알아요? 저기… 강원도 촌에서 왔어요.” “…” “당신이 떠나고 그 사람은 농사를 배웠대요. 그리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저를 만났고요. 처음에는 그렇게 순하고 귀티 나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할까 걱정 됐어요. 그런데 하더라고요. 모내기도 하고 경작도 하고 밭도 메고요. 하얗던 그의 피부가 이젠 흙보다 더 구릿빛이에요.” “좋은 사람이네요. 그런데 저를 왜 찾아 왔어요?”, 나는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를 좋은 사람처럼 둘러말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벌이 되어 침을 쏴댔는지 가슴이 아렸다. 여자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술 마시면 참 이상해졌어요. 지킬 박사와 하이든처럼 변했어요. 그 다정하던 사람이 울다가 땅을 치다가 가슴을 치길래 말렸어요. 그리고 왜 그러냐고 했더니 내 따귀를 때리더라고요. 울면서요. 그리고는 미안하다며 밤새 저를 안았어요.”, 그러곤 또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잠결에 당신 이름을 부르며 울더라고요. 맞아도 오뚜기처럼 일어나서 묻고 또 묻다 당신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나의 몸에 든 멍만큼 그의 가슴에 든 멍을 안아 주려고 살고 있어요. 당신의 이기심에 비웃다가 한 대, 당신의 무심함에 비웃다가 또 한 대. 멍이 가시는 날이 없었어요.”, 여자와 그 남자의 싸움 원인이 나라는 말에 억울하다는 생각에 울음이 쏟아졌다. “난 그 남자 때문에 더 이상 남자에게 안기지 못해요! 알아요? 내가 그 사람을 보듬지 않고 떠났다고 절 타박 하시는 거에요!”, 내 목소리가 이웃집 벽 사이로 스며들어 아파트 벽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네!”, 그녀의 대답이 당돌했다. “막상 따지려고 왔는데... 지난 기억에 아파하는 건 그 남자뿐만이 아닌 것 같아서 조금은 안심했어요. 당신 집에 들어서니 너무 건조했거든요. 방마다 집안 구석구석 마다 메마른 공기가 가득했어요.”, 여자는 내 옆에 다가와 내 손을 자신의 배에 올려놓았다. 배가 꿈틀댔다. “지금 콩이가 열심히 뱃속에서 축구를 하고 있나 봐요.”, 여자의 배에 가만히 귀를 가져다 댔다. 따뜻했다. 그리고 작은 생명체가 꿈틀댔다. 나는 그 생명체에 기대어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그 날 밤, 여자와 나는 거실에서 두 손을 꼭 잡고 잠이 들었다.
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 부은 눈 사이로 여자의 얼굴이 클로즈업 됐다. 시계를 보니 오전 아홉시였다. 여자는 얼른 일어나라며 나를 재촉했다. “언니. 목욕탕에 가요.” 낯모른 여자를 집에 들여 재웠는데 이제 그 여자는 목욕탕에 가자며 내 팔을 흔들었다. 밖에 나가도 화장실 때문에 고생을 하던 나였다. 처음 가 본 곳이나 비위생적인 화장실에서는 참다 집에 와서 해결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동네 목욕탕이라니, 나는 손사레를 쳤다. 여자는 내 손을 잡고 나를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목욕 가방을 흔들며 함께 가자고 했다. 여자는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내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여자의 부탁이 간절했는지 아니면 여자의 재촉이 어지러웠는지 나는 트레이닝복에 점퍼만 걸치고 여자의 뒤를 따랐다. 이 동네로 이사 온지 3년이나 되었는데 아파트 단지 뒤에 목욕탕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알았다.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애용하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성큼성큼 목욕탕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여자의 뒤만 쫓자니 부끄러웠다. 막상 목욕탕에 가까워지니 더 심한 부끄러움이 온 몸을 감쌌다. 여자 앞에 알몸을 드러내고 등을 내밀어야 할 상황이 코앞에 다가 왔다고 머릿속에서 적신호가 깜박였다. 여자는 나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서둘러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훌러덩 옷을 벗었다. 그녀의 몸이 형광등 빛에 곡선을 그리며 드러났다. 불쑥 튀어 나온 배는 그녀는 몸에 작은 무덤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하필 그 작은 생명체가 무덤처럼 보인 것은 그녀의 젖가슴이 만들어 내는 곡선 때문일까. 두 개의 무덤 뒤에 볼록 다음에는 불쑥 튀어 나올 무덤. 나는 되도록 천천히 옷을 벗었다. 점퍼를 벗고 양말을 벗고 막 바지를 벗으려는데 그녀가 형광등을 뒤로 하고 먼저 탕으로 갔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이른 아침이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로 탕이 만원이었다. 여자가 한 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라야 샤워기 하나에 앉은뱅이 의자 두 개를 가져다 놓았다. 나는 우선 의자를 닦고 바가지를 닦고 세숫대야를 닦았다. 그리고 몸에 비누칠을 했다. 여자가 머리를 감는 동안 얼른 뜨거운 탕에 몸을 담갔다.
그 남자와의 마지막 만남은 삼자대면이었다. 남자와 나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넘어 라디오 방송까지 타게 되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술안주도 되었다가 동기나 선배들의 시나 소설 귀퉁이를 차지하는 소재도 되었다. 나는 그 뒤로 사람을 더욱더 조심하게 되었다. 내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빈 강의실을 되돌아 나오던 나의 그림자는 밝은 비체서 발바닥에 붙어 있었다. 시간은 약이 되지 못했다. 삼자대면은 그런 나를 보다 못한 동기가 청한 그 남자와의 결판이었다. 학교 앞 카페를 약속 장소로 잡았다. 그 곳은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아늑한 의자가 손님을 맞았다. 구수한 원두 향이 손님들 자리마다 머물러 시간을 잊게 했고 급경사 계단에 다다라서야 현실의 냉혹함을 깨우쳐 주었다. 교내 사람들은 그 계단을 일명 구름다리라고 불렀다. 하늘과 땅 사이를 이어 주d는 하얀 구름. 그러다 바람이 지나치거나 달님이 몸을 숨기면 어김없이 천덕꾸러기가 되어 비를 내리고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치는 구름 말이다. 남자는 먼저 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청했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내 귀를 타고 들리는 소문에 지난 주말, 남자는 자취방에서 자살기도를 했었다고 했다. 나는 그의 손목에 감긴 하얀 붕대에 아찔해졌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며 그동안의 내 아픔을 주저리주저리 커피향에 실어 그에게 말했다.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다짐을 해달라는 나의 말끝에 그가 가방에서 연습장을 꺼냈다. 그리고 이렇게 적어서 나의 손에 쥐어 주고는 구름 계단으로 사라졌다. ‘나 이상준은 하선주와 아무 사이도 아니며 곁에 가지도 않겠습니다.’, 그의 이름 옆에는 멋진 사인까지 곁들여 써져 있었다. 정체모를 웃음이 콧등을 치고 달아났다.
“언니!”, 옆을 보니 여자가 다가와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무덤 세 개가 물에 잠겼다. ‘무덤이 물에 차면 조상 대대로 안 좋다는데…’, 괜한 생각이 물보라를 일으켰다. 여자와 나는 나란히 앉아 때를 밀고 서로의 등을 밀어줬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나서인지 몸이 개운했다. 목욕탕을 나서자, 갑자기 밀려든 허기와 겨울바람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자와 나는 해장국 집에서 남은 피곤을 녹이고 허기를 달랬다. 개운함은 집에 들어서자 나른함으로 바뀌었다. 나는 점퍼를 아무렇게나 벗어 놓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여자의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가 자장가가 되어 단잠의 문을 두드렸다.
나와 남자는 지난날의 그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환하게 웃는 내 얼굴이 남 같다.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나는 무조건 웃고 미소를 머금는다. 향긋하고 달콤한 원두커피 향이 코를 간지러웠다. 파란 하늘이 어둠이 수를 놓고 별이 반짝이는데도 그들의 이야기의 웃음꽃은 메마르지 않는다. 시시콜콜한 학교 얘기와 의미 없는 그의 시어가 시간을 메우고 내 얼굴에 웃음을 번지게 한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그와 내가 구름다리에 서 있다. 갑자기 그가 구름다리 아래로 뛰어내린다. 나는 허공을 쥐어 잡다가 계단을 내려온다. 내가 밟은 계단은 시꺼먼 재가 되어 내 뒤를 바짝 쫓아온다. 나의 길을 재촉했다. 그가 떨어진 자리에 붉게 예쁘게 핀 능소화 한 송이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능소화를 들어 향기를 맡았다. 내 눈에서 피눈물이 나왔다. 너무 새빨간 색에 놀라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눈을 닦고 또 닦았다. 멀리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소리에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밖은 이미 어둠에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메마른 목을 달래러 냉장고 문을 더듬었다. 물을 마시고 바라본 거실의 공기가 달랐다. 여자가 없었다. 화장실이며 다용도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관을 찾아봤다. 여자의 샌들이 없었다. 쪽지 한 장도 없었다. 정말 그 여자가 다녀갔는지 흔적도 없었다. 단지 쓰레기 통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우동 봉투만이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또 다시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횟수에 비례해 그녀의 새빨간 발톱이 시리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낮에 이모가 주선한 선자리가 있었다. 이제 내 나이 서른을 꽉 채운 것도 모자라 계란 세 개를 더해야 했다. 누구를 만나 사랑을 하고 학을 접고 일기장에 그의 이름을 꽉 채울 나이는 한참 지났다. 영글어 가는 나의 글과는 달리 나의 마음은 한 여름의 땡볕에 놓인 아이스크림 마냥 시간에 녹아 들어갔다. 이제 사랑이란 말이 모래보다 더 서걱거렸다. 선 본 남자의 인상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만나는 평범한 남자였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았고 소위 말하는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집안도 모나지 않았으며 그만하면 괜찮은 조건의 남자였다. “사랑을 믿나요?”, 막 스테이크를 자르려는데 남자가 처음 한 질문이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치로 긴 침묵을 깨고 나온 ‘사랑’이란 말이 와인 잔을 타고 돌다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글쎄요.” “좀 의외인데요. 시적 감성이 풍부하셔서 운명이나 사랑 같은 걸 믿을 줄 알았거든요.” “그쪽은요?”, 그를 나의 사형대에 세워 재본다. “글쎄요. 그 쪽 하기 나름이에요.”, 그는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남자에게 나는 어떤 여자로 비춰졌을까. 나는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고 헤어지며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하는 맞선의 코스를 제대로 이행하고 늦은 귀가를 했다. 인터넷에 올린 한 신문사의 연재소설을 확인 할 겸 신문을 뒤적거리다 불쑥 그 남자가 튀어 나왔다. 새로 나온 책 소개 코너에 그의 이름 석 자가 적힌 책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더욱더 놀란 일은 책 제목이 ‘구름다리’였다. 책 표지에는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아이를 사이에 두고 환하게 웃으며 감자를 캐고 있었다. 그의 일상을 담은 에세이집이었다. 그의 감자밭에는 수많은 무덤이 굴러 다녔다. 남자의 팔에 갇힌 엄마 무덤, 애기 무덤이 흰빛으로 웃고 있었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 선 본 남자에게 주말 약속을 잡아볼 요량으로 문자를 넣었다. 문자 전송 화면이 뿌옇게 흐려져 흰빛으로 주변을 물들였다. 어느 순간, 내 방 침대를 타고 능소화가 피고 졌다. 나는 얼른 떨어진 능소화를 집어 꽃향기를 맡았다. 내 눈은 고요한 어둠으로 뒤덮이고 나의 숨소리는 거칠게 벽을 타고 별을 쫓았다. 나는 선 본 남자의 사타구니에 고개를 파묻고 나의 변기를 부여잡던 여자처럼 성스런 구토를 반복적으로 그리고 느리게 느리게 하고 있었다. 저 멀리 구름다리가 펼쳐졌다. 그리고 아득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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