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라 노 키요모리

타이라 노 키요모리
평점 7.0 / 10
방송국 및 방영시간
NHK 일요일 20:00
장르
일본드라마
국가
일본
현재
2012.01.08~2012.12.23 방송종료
연출진
후지모토 유키 (극본), 시바타 타케시 (연출) 

 

헤이안 시대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키요모리가 세토나이의 해적을 퇴치했던 젊은 시절을 중심으로 '귀족 체제'를 무너뜨리고 '무사 시대'를 연 키요모리의 일생을 그린 드라마.


http://ibooklove.dothome.co.kr/zbxe/506490 

타이라 노 키요모리 (平清盛)(일본 TV 대하드라마 50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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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책사랑

 

타이라 노 키요모리 (平清盛)(일본 TV 대하드라마 50부작)
 
1-1 回, 1-2 23 45 6 7 8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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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차방송일부제목기행시청률
제1화2012년 1월 8일 두 명의 아버지이쓰쿠시마 신사(히로시마 현 하쓰카이치 시)17.3%
제2화2012년 1월 15일불량배 코헤이타이와시미즈하치만 궁(교토 부 야와타 시)17.8%
제3화2012년 1월 22일겐페이의 도련님이세헤이시 발상전설지(미에 현 쓰 시)17.2%
제4화2012년 1월 29일궁궐의 급습뵤도인(교토 부 우지 시)
도쿠죠쥬인 터(교토 부 교토 시)
17.5%
제5화2012년 2월 5일해적 토벌와다 신사(시가 현 나가하마 시)16.0%
제6화2012년 2월 12일서해의 해적왕다다노우미(히로시마 현 다케하라 시)13.3%
제7화2012년 2월 19일빛나지 않는 그대스미요시 타이샤(오사카 부 오사카 시)14.4%
제8화2012년 2월 26일송전과 내대신구시다 궁(사가 현 간자키 시)15.0%
제9화2012년 3월 4일두 이단아호쥬지·호쥬지 릉(교토 부 교토 시)13.4%
제10화2012년 3월 11일노리키요, 지다쇼지지(교토 부 교토 시)
요시노 산 사이교안(나라 현 요시노 정)
14.7%
제11화2012년 3월 18일원령의 눈물로쿠하라미쓰지(교토 부 교토 시)13.2%
제12화2012년 3월 25일숙명의 재회호콘고인(교토 부 교토 시)12.6%
제13화2012년 4월 1일기온 난투 사건야사카 신사(교토 부 교토 시)11.3%
제14화2012년 4월 8일이에모리 궐기쿠마노 본궁 대사(와카야마 현 혼구쵸)13.7%
제15화2012년 4월 15일폭풍 속의 일문곤고부지(와카야마 현 고야 정)12.7%
제16화2012년 4월 22일아버님, 안녕히온도 해협(히로시마 현 구레 시)11.3%
제17화2012년 4월 29일헤이지의 동량쓰루가오카하치만 궁(가나가와 현 가마쿠라 시)13.9%
제18화2012년 5월 6일탄생, 고시라카와 천황엔코지(기후 현 오가키 시)13.5%
제19화2012년 5월 13일도바인의 유언안라쿠쥬인(교토 부 교토 시)14.7%
제20화2012년 5월 20일전야의 결단아쓰타 신궁(아이치 현 나고야 시)11.8%
제21화2012년 5월 27일호겐의 난다카마쓰신메이지(교토 부 교토 시)10.2%
제22화2012년 6월 3일승리의 보상고후쿠지(나라 현 나라 시)
쇼고쿠지(교토 부 교토 시)
11.0%
제23화2012년 6월 10일숙부를 베다후나오카야마공원(교토 부 교토 시)11.6%
제24화2012년 6월 17일키요모리의 대 승부다자이후 천만궁(후쿠오카 현 다자이후 시)12.1%
제25화2012년 6월 24일끝나지 않은 꿈지오마에 신사(히로시마 현 하쓰카이치 시)10.1%
제26화2012년 7월 1일헤이지의 난쿠마노 나치 대사(와카야마 현 나치카쓰우라 정)
쿠마노 하야타마 대사(와카야마 현 신구 시)
13.2%
제27화2012년 7월 8일숙명의 대결고넨지(교토 부 교토 시)11.7%
제28화2012년 7월 15일벗의 아들, 벗의 아내오오미도지(아이치 현 미하마 정)11.2%
제29화2012년 7월 22일시게코의 혼례쇼렌인(교토 부 교토 시)10.7%
제30화2012년 7월 29일헤이케 납경쓰즈오카 신사(가가와 현 사카이데 시)11.4%
제31화2012년 8월 5일이즈의 유배인구시다 신사(후쿠오카 현 후쿠오카 시)7.8%
제32화2012년 8월 19일백일의 태정대신히루가지마 공원 (시즈오카 현 이즈노쿠니 시/이토 시)10.7%
제33화2012년 8월 26일키요모리, 오순 연회온도 해협(히로시마 현 기타히로시마 정/구레 시)9.3%
제34화2012년 9월 2일시라카와인의 전언카모 신사(효고 현 다쓰노 시)11.1%
제35화2012년 9월 9일나의 도읍, 후쿠하라유키미노고쇼 구적비(효고 현 고베 시)10.5%
제36화2012년 9월 16일거인의 그림자이쓰쿠시마 신사(히로시마 현 하쓰카이치 시)10.1%
제37화2012년 9월 23일전하 승합 사건니야쿠이치 신사(교토 부 교토 시)10.5%
제38화2012년 9월 30일헤이케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 구라마 사(교토 부 교토 시)14.3%
제39화2012년 10월 7일우사기마루 무념구라마데9.7%
제40화2012년 10월 14일덧없는 노래히라노 신사 (교토 부 교토시)9.6%
제41화2012년 10월 21일주사위의 향방이즈산 신사 (시즈오카 현 이즈노나라시)7.9%
제42화2012년 10월 28일시시가타니의 음모교토부 교토시8.9%
제43화2012년 11월 4일층성과 효도의 모습으로조라쿠사(교토 부 교토 시)10.2%
제44화2012년 11월 11일그 곳의 전망교토 부 교토 시10.4%
제45화2012년 11월 18일모치히토의 격문요시쓰네 사당(이와테 현 히라이즈미 정)7.3%
제46화2012년 11월 25일요리토모 거병아라타 하치만 신사 (효고 현 고베 시)10.3%
제47화2012년 12월 2일숙명의 패배하치만 신사 (시즈오카 현 시미즈 정)10.8%
제48화2012년 12월 9일환상의 도시도다이지 (나라 현 나라 시)10.4%
제49화2012년 12월 26일주사위가 끝날 때효고 현 고베 시9.2%
최종회2012년 12월 23일놀기 위해 태어났느냐아카마 신궁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 시)9.5%
평균시청률 12.0%(시청률조사 : 관동 지방 비디오서치)


http://blog.naver.com/intotheself/220932626420

타이라노 키요모리

역사 문화 미술 이야기

도라에몽 다섯번째 인물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이다.이름이 낯설다면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이라고 하면 쉽게 기억이 날 수 있을 것이다.그런 모노가타리 처음 들어본 사람이라면 헤이안 시대 말기에 무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태정대신 자리에 오른 인물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사.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말까지 700년간 일본의 정치를 담당한 사무라이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헤이안 말기이다.

그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앞에서 후지와라의 전성기를 이야기했다.섭관정치가 계속 되려면 전제가 있다.후지와라 가문의 딸이 꼭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것 그것만큼은 권력으로 보장할 수 없지 않은가


드디어 어머니가 후지와리씨가 아닌 천황이 등장한다.시라카와 천황.그는 아들에게 천황자리를 일찍 물려주고 원을 설치한다.상황으로 물러나서 유유자적 자연을 즐기는 생활을 원하는 것이냐고? 천만의 말씀.번잡한 일을 떼내고 뒤에서 정치를 좌지우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시라카와 상황때부터 정치가 이원화된다.원에서 실시하는 정치를 원정이라 하는데 이 때부터 가마쿠라 바쿠후가 성립되는 시기까지를 원정기라고 부를 정도이다.여기서 의문이 생기지 않는가.천황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시라카와가 상황이 되고 나서부터 이원화한 정치로 파벌이 생긴다.원정파와 천황파로.시라카와 상황이 원에서 정치를 할 때 막강한 힘이 있었으나 마음대로 할 수 없던 것이 세 가지였단다.하나는 유명한 절의 승병들이 끄떡하면 교토에 나타나 강소하는 것.승병이란 스님이 무장한 것을 말한다.스님이 무장이라니.당시 사원세력이 커지다 보니 세력 다툼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큰 절에서 무술이 가능한 사람을 뽑아서 싸움을 벌렸으니 이들을 스님으로 대접하는 것은 곤란하겠지?

또 하나는 당시 들불처럼 번지던 도박.마지막 하나는 가모가와의 시도 때도 없는 범람이었단다.

승병에 대한 대책.원을 지키기 위한 호위병으로 등장한 것이 무사이다.그들은 지방에서 장원을 둘러싼 보신책으로 무장한 사람들인데 자신들의 위세를 늘리기 위해 천황가에서 분가한 인물들을 우두머리로 모신다.그 중 하나가 타이라.다른 하나가 미나모토.발음은 타이라를 헤이케 미나모토를 겐지라고도 읽어서 복잡하다.헤이케 모노가타리란 바로 타이라 가문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무사가 처음 교토로 불려올 때만 해도 귀족들에게 천대를 받았다.그들에겐 발언권도 없었다.다만 호위무사에 불과했던 것이다.그러나 상황이 일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1156년 호겐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호겐의 난이란 연호가 호겐인 해에 발생한 난인데 무슨 사연이길래 역사에 무사가 정식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을까?

천황.상황.법황이란 명칭을 주목하자.법황이란 상황이 스님이 되면 부르는 명칭이다.상황이 왜 스님이 되냐고? 당시 불교는 일본에서 중요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고 천황.상황 법황순으로 가는 것이 코스로 비칠 정도였다.법황이라고 절에서 수련만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법황이 되면 불교세력을 등에 업는 효과도 있었다.


1156년 도바법황과 그의 아들 스토쿠 상황사이에 후계자를 둘러싼 충돌이 있었다.스토쿠 상황은 아들을 천황으로 세우려 했으나 도바법황은 스토쿠의 동생을 천황으로 세웠다.그가 고시라카와 천황으로 헤이안 말기까지 정치일선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이 시기가 궁금하다면 대하드라마 요시츠네가 도움이 된다.

상황측과 천황측의 갈등과 더불어 후지와라 가문의 후계문제까지 겹쳐 편을 짠 싸움이 벌어진다.싸움이라 해도 황족과 귀족이 직접 나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무사들끼리의 대리전 양상이었다.이 싸움에서 타이라와 미나모토가 편을 갈라 싸운게 아니었다.같은 가문 사이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삼촌과 조카가 편이 나뉘어 싸웠다.이 때 고시라카와 천황편을 든 대표적 인물이 니나모토노 요시토모와 타이라노 키요모리였다.


승리는 고시라카외 천황편으로 돌아갔다.문제는 포상이었다.활약이 두드러졌던 요시토모보다 키요모리의 출세가 두드러진 것이다.불만에 찬 요시토모가 일으킨 난이 3년후 발생한 헤이지의 난이고 이 때도 키요모리가 승리한다.미나모토 가문의 무사들은 죽거나 몸을 숨긴다.다행히 이 때 목숨을 건지고 이즈로 유배가게 되는 아들 요리토모.그가 가마쿠라 바쿠후를 세우게 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을 거치며 타이라 가문의 출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심지어 타이라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1167년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무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태정대신이 되고 일문의 사람들이 천황앞에 앉을 수 있는 귀족으로 승격한다.그러자 그들은 귀족문화에 동화되며 지방의 무사들과의 연대를 소홀히 하게 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영화는 계속 될 수 있을까?태정대신이 된 그는 딸을 천황에게 시집보내고 딸이 낳은 외손주를 어린 나이에 천황으로 밀어올린다.세상은 마치 타이라가문의 세상이 된 듯 돌아간다.그의 힘을 빌려 호겐의 난에서 이긴 고시라카와는 이제 법황이다.둘 사이의 유대는 금이 가고 법황은 타이라를 타도할 음모에도 가담하나 고발자가 나와 실패하고 만다.


송나라와의 무역으로 경제력을 확보했던 타이라가문.키요모리는 지금의 고베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일문을 끌고 갔다.그러나 오랜 수도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은 사람들의 저함감은 컸다.이주하고 나서 자연재해가 빈발하자 천도 계획은 불발로 끝난다.게다가 원인 모를 병으로 키요모리는 고통스럽다.이 때 그도 역시 불교에 귀의.일문의 영화를 빌며 불경 사경작업에 돌입한다.헤이케 납경이라고 알려진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불경을 바친 곳이 그 가문의 신사라는 점이다.신도와 불교의 습합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헤이지의 난때 일문을 배반하고 타이라 가문에 붙었던 인물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였다.그는 이후 타이라 가문과 더불어 살아갔지만 아무래도 주변에서 맴돌 수밖에.그런 와중에서 아들이 타이라 가문에세서 수치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모치히토 친왕을 찾아간 그는 헤이케 토벌의 명령을 내려 줄 것을 간청한다.친왕의 서신을 받은 그는 구석 구석 숨어 있던 미나모토 일족에게 서신을 전한다.미나모토 일족과 그동안 설움을 느끼던 무사들의 결합으로 1180년 겐페이 전쟁이 발생한다.왜 겐페이냐고? 겐지와 헤이케 첫자를 딴 이름이다.

이 전쟁이 발생한지 1년후 이즈에서 거병한 요리토모의 목을 내 무덤에 바치라고 유언을 남기고 키요모리가 죽는다.키요모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요시츠네를 통해서였다.요시츠네가 주인공이다 보니 키요모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아무래도 부정적인 것이 많았다.그러나 역사로 접근하다 보니 평가할 부분도 많았다.일본 고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고 그 시대를 깊이 이해하려면 통과해야 할 인물이기도 하다.


** 타이라 노 키요모리│모든 등장인물

 ** 잡동사니의 역사이야기 ::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타이라노 키요모리

 

http://blog.daum.net/jahun10/16505864
일본역사의 정리노트<6> 중세 헤이안~ 카마쿠라

제 2 부 중세

시라카와 천황이 원씨와 평시의 무사단을 이용하여 왕의 궁전을 지키게 하여 셋간 정치를 하는 귀족들을 배제하고 왕권에 의한 새로운 院政정치(인세이 세이지, 원정정치)를 행하였다. 그 후 미나모토(原)씨와 다이라(平)씨의 대립을 거쳐 平氏가 세력을 잡고 있다가 平氏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무사들을 동원한 原 賴朝(미나모토요리토모)가 동생 義經(요시쯔네)를 시켜 다노우라(壇ノ浦. 지금의 시모노세키시)에서 멸망시키고 마침내 미나모토 요리토모(原 賴朝)가 가마쿠라(鎌倉)에 바쿠후(幕府)를 연다. 무사는 전국에 지토(地頭)로서 파견되어 부임지인 장원이나 고쿠가령(國街領) 등지에서 착착 기반을 다졌다. 일본 역사상 드물게 나타나는 외국침략, 다시 말해 몽골의 침략 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무사정권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고대부터 계속된 천황가와 그를 둘러싼 귀족들로 구성된 조정이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하였던 것이 아니며, 여전히 바쿠후와 협조하면서 정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요리토모의 사후 北條時政(호우죠도끼마사)에 의한 집권정치(싯켄정치)를 하면서 권력을 휘둘러 폐해가 심해졌다. 이에 고다이고천황이 주도한 막부타도운동은 말하자면 협조체제의 파탄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의 新政은 당시 사회의 요구와 맞지 않았으며, 결국 무사들의 불만을 등에 업은 아시카가다카우지(足利尊氏)가 무로마치(室町) 바쿠후를 열게 된다.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이 아닌 새로운 천황을 옹립하는데, 이로써 고다이고 천황의 南朝와 아시카가씨가 옹립한 고묘(光明)천황의 北朝로 황통이 분열하였다.

남북조를 통합한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는 무로마찌 바쿠후를 안정시키는데 성공하나, 유력한 가신 집단의 협조가 붕괴되면서 바쿠후 권력은 곧 동요하였다. 1467년에 일어난 오닌(應仁)의 난으로 전국이 전란에 휩싸이고, 이윽고 각지에서는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가 일어나 점차 지배권을 확대해 나갔다. 센코쿠다이묘의 領國을 분코쿠(分國)라고 하는데, 그들은 자신들만의 분코쿠법을 가지고 분코쿠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운영하는 하의 국가를 이룬다.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에서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로 이어지는 전국평정과정에서 이들에게 가장 큰 과제는 각지의 센코쿠다이묘를 어떻게 자신들의 지배하에 둘 것인가 였다.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정권의 최대 유력인사였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기가하라(關가原)전투에서 승리한 해는 1600년, 이때 마침내 일본사회의 분열이 종식된다.

일본역사의 흐름

헤이안시대(왕조, 귀족정치, 겐지/헤이시 상쟁)->헤이시 정권->가마쿠라바쿠후(무인정치, 겐지(미나모토요리토모) ->켄무신정(왕의 친권정치, 고다이고 천황)->무로마치바쿠후(아시카가다카우지)->쇼쿠/호우정권->토쿠가와바쿠후(에도)->메이지->다이쇼->쇼와->헤이세이

鎌倉時代 : 鎌倉幕府 源賴朝(미나모또노 요리또모)가 세운 幕府)를 세운 1192년경부터 1333년경 까지의 약 140년간

室町(무로마찌)時代 : 足利尊氏(아시까가 타까우지)가 정권을 잡고 室町에 막부를 두었든

시대. 1336~1573

모모야마시대 : 1573~1603

막부의 역사

후지와라의 셋칸정치->시라카와천황의 인세이정치->미나모또(源, 세이와 천황계)씨와 타이라(平, 칸무천황계)씨의 대립->호오겐의난(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가 스또꾸 상황측의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賴長)측을 습격하여 상대방을 몰락시키는 난, 타이라씨승리), 헤이시의 난(고시라까와 상황파에 대한, 천황파의 쿠데타)->헤이시의 번영(고시라까와 상황이 平淸盛를 압박하자 1179년 쿠데타를 일으킨다). 및 몰락->源平내란 ->1192 미나모또 요리또모의 가마꾸라 바쿠후->北條時政(호우죠도끼마사)에 의한 집권정치(싯켄정치)->1321 고다이고천황의 친정시도(켐무신정), 무사들의 불만 및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반역->남북조시대(북조 : 고묘천황,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옹립, 남조 : 고다이고 천황)->1336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무로마찌 바쿠후 시작->전국시대(1467 오닌의 난 시작, 1491~1573년간의 약 100년간의 시대, 오닌의 난(10년) 이후 센코쿠 다이묘들 간의 세력 확장전쟁 후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까지의 시대) ->1573 오다노부나가의 바쿠후 시작->1582 혼노사(아께치 미쓰히데의 반란)의 변으로 사망->1590 하시바히데요시(토요토미히데요시)의 통일->1598 히데요시 사망->1600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쓰군의 승리->1603 토쿠카와 이에야쓰에 의한 에도 바쿠후 시작 -1867년 타이세이호칸에 의한 막부 몰락

제 1 장 헤이안에서 카마쿠라로

1. 시라카와 원정

院(인) : 양위한 천황(상황) 또는 출가한 상황(법황)들의 御所

院政(인세이) : 攝關家에 의한 정치형태를 부정하고 皇家 중심의 정치형태. 受領國司(즈료오 코쿠시)를 둠.

白河(시라까와)천황이 1086년에 아들 堀河(호리카와)천황에게 양위한 뒤에도 계속 정무

정무를 보았는데 이것이 원정이라는 새로운 정치 스타일이었다.

천황중심의 일원적인 지배체제로는 현실사회를 이끌 수 없었기에 상황으로 남아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천황과 상황이 상호 보완 하면서 천황 권력을 구성한 것.

이때부터 셋칸정치에서 원정정치로 변화하여 이후 헤이시(平氏)가 1185년 멸망할 때까 지 인세이기(院政朝)라 한다.

興福寺(코오후꾸지)

우지데라(氏寺) : 우지(氏, 藤原氏)의 발전을 기원하고 조상의 명복을 비는 사원.

春日(카쓰까)大社

藤原씨족의 조상신(우지카미 氏神, 수호신)을 모신 신사.

우지(氏) : 고대의 지배계층의 단위, 씨족, 종족

우지이에(氏家) : 조상에 대한 제사와 그를 가능케 하는 家産을 유대로 하여 일상의 기거를 함께하는 사람들의 생활 공동체.

헤이시(平氏, 타이라노)와 겐지(源氏. 미나모토)의 유래

칸무천황(50대)의 증손인 타이라노 타카모찌(平高望)와 세이와천황(56대)의 직손 미나모토 쯔네모토(源經基)이다. 이들은 왕손으로 천황이 내려준 성으로 개명하여 쿄토와 떨어진 장소에서 무력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칸무 헤이시, 세이와 겐지라고도 불리우며 이들이 헤이시와 겐지의 원조이다.

귀족세력의 병폐로 인하여 천황은 귀족세력을 견제하고자 왕손혈통인 이들 무인세력을 등용하게되어 헤이안시대말기에는 이들 두개의 무력집단이 정치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白河(시라까와)천황(1081)때부터 천황의 행렬이 항상 무사들의 호위를 받는 시대가 됨

사라까와천황때 승병이 봉기하여 수도에 진압하는 것을 막았다. 대표적인 것으로 北面

(호꾸엔)의 무사단과 源平(겜베이)무사단이 수도의 무력을 구성하였다.

일본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平氏系와 源氏系가 교체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는 설이 있다.

헤이안(왕조)시대 : 平氏->가마꾸라막부 : 源氏 호우죠우(平氏)->무로마찌막부 : 아시카가씨(源氏)->쑈우/호쿠시대 : 오다씨(平氏) 토요토미씨->에도막부 : 도쿠가와씨(源氏)

2. 토바원정

중세성립기는 우지(氏)가 최종적으로 해체되고 그 가운데에서 이에(家)가 명확한 형태로

분립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이에(家) : 이에란 계급(士族)+신분+봉록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장남(總領息子 소우료무스 코 모든 것을 소유할 아들)의 단독 상속으로 忠을 기본으로 하는 혈연/이해집단으로 영주는 가신이 충성심으로 어김없이 무력제공의무를 이행하는 한, 반대급부로 이에(家) 의 존속을 보장하였다. 이에를 유지하기 위해 혈연이 없으면 시동생, 형수, 사촌간 등 가까운 일가와 결혼하고 성도 바꿔가며 후계자가 된다.

士族집안에서 장남이 아닌 아들이 분가하여 장사를 할 때 시콘쇼사이(士魂商材, 무사 의 정신을 지니되 장사의 재간이 뛰어난 사람)란 말이 있다.

1129년 시라카와 상황이 사망하고 토바(島羽)상황의 원정이 28년간 지속함. 토바상황은 조부 시라카와 상황을 증오함. 스또꾸 천황에 압력을 가하고 후지와라노 타다미찌를 섭관에 임명함으로서 후지와라노 타다자에와 후지와라노 타다미찌의 부자간의 알력을 일으키게 함. 스또꾸 천왕을 퇴위시킴. 훗날 고시라까와 천황을 임명. 스또꾸 상황과 고시라까와 천황의 숙명적인 구도를 만듬. 토바원정기의 특색은 장원정리정책이 현저히 이완되어 장원이 확산됨.

3. 고시라까와, 키요모리, 요리또모

호오겐(保元)의 난 : 1156년 토바상황의 사망 후 고시라까와 천황의 왕위계승 시 대립하고 있던 고시라까와 측의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가 스또꾸 상황측의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賴長)측을 습격하여 상대방을 몰락시키는 난.

헤이시(平氏)의 난 : 1159년 고시라까와 천황이 니죠(二條)천황에게 양위하고 원정을 시작 한 후 상황파와 천황파의 대립에서 천황파가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

호오겐, 헤이시난을 거치면서 겐지(源氏)의 군사력이 해체되고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가 이끄는 헤이시(平氏)의 군사적 우위가 확정된다. 平淸盛은 귀족의 정점에 올라가고 신흥군사귀족인 헤이시 일족의 번영이 이루어진다.

이에 고시라까와 상황이 平淸盛를 압박하자 1179년 쿠데타를 일으킨다.

1183 源平내란 : 源氏(겐지, 미나모토씨)와 平家(헤이케, 다이라씨)사이의 공방을 말하며

지방에서 시작된 반란군이 정권을 탈취한 것으로 源賴朝(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동 생인 源義經(미나모토노 요시쯔네)과 무사를 집결하여 쿄토를 점령하고 源義經을 시 켜 1185 나가토 단노우라(下關市) 전투에서 다이라(平氏)씨를 멸망시켰다.

요리토모의 源義經에 대한 견제로 동생 源義經이 奧州(오우슈)의 藤原씨로 도망하자 1189년 平泉(히라이즈미)를 거점으로 번영하고 있든 후지와라씨를 멸하고 전국을 통 일한 후 鎌倉(카마꾸라)에 幕府(바꾸후) 설치하고 각 지방에 무사단을 조직함.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다이라씨의 횡포에 대한 천황의 내밀을 받아 무사들을 결집하여 충성한 무사에게 획득한 영지를 나누어주고(御恩, 고온) 무사들은 군주에 대해서 봉 공(奉公)을 맹서하였다고 한다.

이 당시 생긴 말이 있쇼겐메이(一生懸命, 일생 목숨을 걸다, 열심히)란 말이라고 한다.

또한 原氏의 白旗와 平氏의 赤旗가 紅白의 旗의 기원이다.

御家人(고께닌)制 : 御家人 : 將軍과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

鎌倉殿(가마꾸라도노) : 가마꾸라 바꾸후의 수장

守護(슈고) : 國의 군사 경찰권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

地頭(지또오) : 토지관리, 공조와 군량미 징수, 치안유지

原賴朝(미나모또노 요리도모, 1147~1199)

카마쿠라 바쿠후를 열은 사람. 1180년에 헤이시(平氏)타도의 기치로 1985년에 동생 原賴 義經(미나모또노 요시미쯔) 등에 의해 헤이씨를 무너뜨림. 그리고 조정의 허가를 득해 지 배하는 땅에 守護(슈고)와 地頭(지또우)를 설치하여 요리토모의 힘은 전국에 미쳤다.

1192년에 무사의 우두머리인 征夷大將軍(쇼이타이쇼오군)이 되었다.

한국사

918년 왕건의 고려건국

이자겸의 난(1126)

이자겸은 두딸을 에종(1105~22), 인종(1122~46)에 후비로 시집을 보내고 외척으로 권력을 행사하던 중에 인종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한 사건

묘청의 난

스님인 묘청은 서경(평양)으로의 천도설을 주장하여 임원역에 대화궁을 세웠으나 잇단 재해로 천도계획을 취소함에 따라 천도설을 주장하는 반란군과 토벌군(총지휘관 김부식)에 의해 1136년에 진압된 사건. 개경(개성) 세력과 서경(평양)세력의 다툼이었다.

고려에서는 광종(958)이 과거제를 실시하고 성종(982~987)때 유교를 정치에 채용하였으나

무신들의 불만이 많았으며 1차 무신쿠데타의 실패를 거쳐 1170년 의종(1146~1170)때 2차 쿠데타인 정중부의 난 후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 최우 등에 의한 약 100년간의 무신정권이 있었다. 원종(1259~1274)때 왕권 회복

1229. 12 몽고군의 고려침략, 1232 몽고군 재침략 항전. 1258 몽고와 결탁한 국왕파에 의해 무신정권 몰락.

1259(고종46년) 원과 강화조약 체결. 30년 전쟁 마감. 이후 1356(공민왕 5년)까지 원의 간섭이 계속됨.

삼별초 (별초의 의미는 용맹한 군대. 고려무신정권의 좌,우별초, 신의군. 강화도->진도->제주도로 이동)는 강화도에서 항전하다가 1273년 제주도에서 멸망.


** 타이라 노 키요모리 50부작


** 가마쿠라도노의 13인 48부작


** 가마쿠라 & 무로마치 막부(1185~1573)

** [지식트리일본 역사 2부 -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

** [지식트리일본 역사 3부 - 가마쿠라 막부 , 무로마치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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