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강(3)
김 헌 일
아직 입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공기에서의 주검을 처음으로 대한 데릭에게 이번 사건은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노인의 죽음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 대개 이런 노인들은 인생 황혼의 나이에 자식들을 따라 미국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야.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들에겐 이상한 기질이 있어. 바로 향수라는 거지.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겐 일종의 병이랄 수도
있어. 해를 거듭할수록 도를 더해 오는 향수에 시달리다가 죽을 날이 가까워 평생 소원이던 귀향길에 나선
거야. 늙은 그들에게 돈이 있을 리가 없고 밤낮으로 돈벌이에 바쁜 자식 내외의 허락을 받아내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잖아? 죽기 전에 고향땅 한번 밟아보고 싶다, 뭐 그런 거지. 그러나 이미 기력이 쇠잔한 몸이
긴 비행기 여행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흔히들 죽어 가는 거지. 어쨋든 저 노인도 반쯤은 소원을 이룬 거야.
이제 고향땅에 묻힐 수가 있게 되었으니까. "
이것이 내 설명의 요지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의 그 말에 녀석의 마음은 작지 않은 동요를 일으켰던 모양이었다. 말대꾸를 하는
녀석의 파르스름한 눈동자에 물기가 설핏 비쳐오는 듯 했으니 말이었다.
" 참으로 이상해. 나중에 우리 식구들도 그렇게 될까? 나의 아버진 지금 카리브 해의 한 작은 섬에 살고있어.
버어진 아일랜드의 아름다운 풍광에 흠뻑 빠져서 말야. 내 어머닌 오하이오 주에 있어. 그들은 내가 열두 살
때 이혼을 했지. 그리고 나의 형은 미시건, 누나는 하와이에 살고 있고 난 여기 알라스카에 있어. 우린 벌써
십오 년 째 만나지 못하고 있어. 물론 이따금 서로 전화를 하지. 사진을 주고받기도 해. 그런데 우리가 다시
만날 수가 있을까? 아니야. 그러기엔 우린 너무 바빠. 사실 돈도 부족하고. 하지만 누가 알아? 만약에 신이
돕는다면…. "
그렇게 말하는 데릭의 시선은 코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어둠을 향하여 무심히 걸쳐져 있었다. 정말 지독한
어둠이었다. 어둠은 일만 이천 피이트 높이의 스파산(山)과 하루에 두 번 어김없이 찾아드는 거대한 해일로
유명한 쿠크만의 턴어게인 협곡 그리고 한낮 같으면 우리의 귀볼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쌩하고 들려올
듯한 험악한 츄게취 산맥의 웅자(雄姿)를 깡그리 빨아 삼키고 있었다.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싱크대로 갔다. 대충대충 쌀을 씻어 일인용 전기밥솥에 부어넣고
플러그를 꽂았다. 이제 곧 저것은 자발스런 소리를 내며 끓어오를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급유호스를
얌전히 물고 서있는 고물 자동차 신세가 되어야 한다. 문득 외로움이 느껴졌다. 지금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지독히도 하기 싫어하던 공부를 가지고 티격태격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자꾸만
엉덩이를 뒤로 빼는 아이들을 눈에 불을 켜고 닦달을 하고 있을 것이고, 아이들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앉아, 써지지 않은 글씨를 종이를 찢어낼 기세로 박박 써대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잠을 자고 있을까 ? 이럴
때 데릭이라도 있었으면…. 도대체 이 자식은 어딜 가서 꿈적도 않는 거야.
나는 문득 그가 여태껏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꼈다. 사실 나는 예정대로 귀국을 하느냐
이곳에 그냥 눌러앉느냐를 가지고 은근히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그냥 눌러앉는다는 것은 적어도 당분간은
불법체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불법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길을 다닐 수가 있고 방을 얻어 살
수도 있으며 군소 업체에 취직도 가능하였으니 말이 좋아 불법체류지 그다지 별스런 일도 아니었다.
귀국은 확실히 좋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지난 봄 국민학교에 입학한 막내아이놈이 그리웠고 어근버근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던 아내와의 관계도 새롭게 가꾸어 갈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가락동 집 앞에 서
있던 프라타나스 나무들이며 언제나 전구가 깨어져 있던 외등 그리고 골목 입구의 현대 약국이며 수목
갈빗집 그리고 이따금 아이들에게 끌려가 색종이 같은 것을 사주던 짱구 문방구점도 정에 겨웠다. 더 이상
밥을 해 먹을까 라면을 끓일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지 않아도 좋았고 친구들과 시원시원하게
한국말을 해 가면서 소주 한 잔 들이킴도 좋았다. 정말이지 영어라는 건, 그럭저럭 의사소통이나 해 가면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영 체질에 맞지 않았다. 영어에 시달리고 들볶인 나머지 영어로 잠꼬대를 하는 건
보통이었고, 엉겁결에 무슨 일을 당하여 아이고! 라고 하거나 빌어먹을! 하면서 놀라지 못하고 룹스! 하고
버럭 소리를 질러대어 놓고는 황당해 하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귀국 후 기껏해야 사나흘이나 이어질 안도와 환희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또 엄청난 스트레스와
불안 또 회의에 골머리를 썩혀야 할 것이었다. 어느 것도 옛날과 변함이 없는 상태에서 아내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언쟁을 벌일 것은 아무래도 불 보듯 뻔했고, 여우같은 상사의 눈초리 속에서 동료들과 피곤한
신경전을 벌여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또 길바닥의 극심한 교통체증이며 무질서 혼란은 또 어떨는지….
그것에 비하면 여긴 새로운 가능성의 땅이었다. 하루하루 생활의 어설픔 속에는 그래도 설렘이 서려있고,
지금까지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내 삶을 완전히 새롭게 꾸며갈 완벽한 기회가 내게 주어져 있었다.
이곳에의 잔류는 확실히 고려해 볼 만한 선택이었다. 물론 이주에 성공하면은 아무래도 유형지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곳 알라스카를 떠나 본토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이런 일에 정통한 변호사 켄 골드만과도
이미 줄을 대어놓고 있었다. 나는 지금 결단을 내려야 하였다. 그러나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데릭이 나의 이
중요한 시간에 구멍을 내고 말았다. 그가 사라져 버렸음을 깨닫고 난 후, 나의 신경은 온통 그의 실종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는 나의 절친한 친구였고 조언자였으며 혹시 있을지도 모를 나의 이곳 이민 생활을
위해서도 퍽 중요한 존재였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순간 내 온몸의 구석구석에서 세포들이 반짝 깨어 일어나는 듯한 환희가 느껴졌다.
나는 날쌔게 몸을 날려 탁자 위에 있는 전화기로 다가갔다. 먹이를 채는 독수리의 날갯짓이 이보다도 더
재빠를까?
동시에 내 사고의 밑바닥에선,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전화를 걸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여러 명의 얼굴들이
불같이 떠오르고 있었다. 데릭일까? 그자가 집에 돌아왔을까? 그건 아닐 것이었다. 녀석의 집에 확인을 한
지 이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럼 누구? 사무실? 아니면 변호사 골드만 뚱보 그 작자 ? 그 맨 마지막에
아내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아직 이곳에의 잔류 문제를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의사에 전혀 반하게 될 지도 모를 내 가슴의 비밀 때문이었는지, 그녀와 한번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망이 짧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일 리가 없었다. 아내는 내가 여기에 있던 삼년 동안 한번도 스스로 전화를 해오지 않았다.
그녀라고 내가 그립지 않을 리는 없을 것이었다. 문제는 턱없이 비싸게 나오는 국제전화 요금에 있었다.
그녀에게 돈은 무엇보다 소중했다.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상대가 누구이든 좋았다. 그와 말을 나누며 이 암울한 침묵과 단절의 늪에서
잠시나마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 나예요. "
태평양을 건너오느라 커다랗게 부풀려져 흡사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그 소리의 주인공은 한동안 전화가
뜸하던 수옥이었다. 돈을 벌기 위하여 안해 본 일 없이 다 해 봤다는, 그리고 그 결과 지금 역삼동에서
자그마한 여성 전용 헬스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강수옥. 그녀는 한국을 떠나는 내게, 언제이든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해도 좋다는 제안을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 준호씨, 지금 여긴 새벽 한 시예요. 거긴 몇 시죠? "
그녀는 언제나 대화의 첫머리에 시간을 물어왔다. 삼년 내리 바다를 건너 전화를 해 온 그녀가 이곳의
시간을 모를 리 없었지만 수옥은 언제나 그랬다. 그것이 내겐 그녀가 나와의 괴리를 확인해 보는 행위로
여겨졌다. 우리의 시간이 서로 어긋나 있는 것처럼 그녀와 난 처해 있는 삶의 모습이나 환경이 여러모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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