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강(7)
김 헌 일
약 한 시간을 퉁탕거려 숲을 헤매고 난 뒤, 갑자기 시야가 툭 틔어지며 하늘이 나타났다. 하늘은 두터운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음에도 퍽 시원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오른편으로는 추게취 산맥의 험준한
봉우리들이 용트림을 하며 남쪽을 향하여 줄달음을 치고 있었고, 반대편에도 베이커 산을 비롯 깎아지른
준령들이 허리에 거친 암벽이며 깊은 골짜기들을 드러낸 채 구름 위로 솟아있었다. 그 사이 드넓은 평원
위엔 야생제라늄이며 매발톱꽃 털갈래나무 오이풀들이 만발하여, 보라색 주홍색 노랑색 또 붉은 색으로
점점이 빛나고 있었고, 그 너머에 우리의 목적지인 크닉 빙하가 희무끄레한 자태로 낮게 엎드려 있었다.
길은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의 발길을 난데없이 나타난 회색의 물줄기가 가로막고 있었다. 회색의 강. 바로
저 건너 빙하에서 발원하여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숲길을 숨 죽여 흐르는 크닉강이었다. 강은 저만치
푸르죽죽한 바위로 형성된 절벽을 휘돌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높다란 절벽 위엔 크리스마스 트리를 닮은
침엽수들이 빼곡이 서 있었는데, 거의 수면까지 이어져 내려온 이끼와 풀 그리고 나무들의 조화가 수려하다
못해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사방은 죽은 듯 고요했다. 자동차의 시동마저 꺼버리자 세상의 소리란 소리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따금 자갈을 굴리는 물결 소리만 가냘프게 들려올 뿐이었다. 턱없는 무게로 잦아든 정적
탓이었을까? 갑자기 인생사가 아득하게만 여겨졌다. 나의 뇌리 속에서 세상이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고아, 노인, 살인혐의자의 죽음, 삶, 시간, 고독… .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말끔히 꺼져가버리고 이제 모든
것이 새롭게 존재하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정결하고 숭고하면서도 신비하기 그지없는
세상. 눈앞의 광경은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는 아쉬운 꿈에서 깨어나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아직은 해가 남아 있었고, 그러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야 했다. 눈앞에 폭 20 미터의 강줄기가 가로질러 있고 서쪽은 절벽으로 막혀
있었다. 강하류를 향하여 무작정 내려가 본다 해도 쓸모 없이 버려진 이 강에서 다리 같은 게 찾아질 리
만무였다. 우리는 행여나 하는 마음에서 준비해 온 지도를 펼쳐 보았다. 거기엔 노란 빛깔의 바탕색 위에
붉은 줄로 길다랗게 그어진 하이웨이 또 촘촘하게 쓰여진 산의 이름과 그 옆에 산의 높이를 알리는 7633,
8020 하는 식의 숫자 그리고 엷은 하늘색으로 널따랗게 표기된 빙하지대만 어지러이 보여올 뿐이었다. 지금
우리의 발목을 움켜잡고 있는 크닉강의 형체를 가느다란 실선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울창한 숲이며 암벽이며 골짜기들은 철저히 무시되어 있었다. 지도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구불구불 이어져 온 길은 분명 여기에서 뚝 끊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작정 강속으로 기어 들어가라는 심술궂은 암시처럼 여겨졌다.
" 헤이 미스터 킴. 길이 어딘가에 있긴 있을 거야. 저길 봐. "
그때까지 마도로스 파이프를 빡빡 빨아대고만 있던 로버트가 문득 손을 들어 강건너 야트막한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언덕 가운데의 빛깔이 다른 곳과 다른 것 같았다. 그곳은 이상스럽게
맨들거리는 듯 했고 다른 어느 쪽보다 좀더 뽀얗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무엇인가 무거운 것이
살포시 밟고 지나간 것만 같은 느낌이 일었다. 그랬다. 희미하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 사람의 자취였다. 길은
정말 물 속으로 나 있었다.
빙하 부근의 강은 대개 얼음이 녹아 흘러내린 물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래서 수온은 얼음만큼이나
낮았고 물의 깊이나 물살의 세기 혹은 방향이 기온에 따라 달라졌다. 지금이 오후 두 시 반이니 수심은 한껏
높아져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기온이 낮은 새벽녘이나 밤이면 수심은 형편없이 낮아질 것이 분명했고
어쩌면 강바닥이 드러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면 전혀 다른 곳을 흐르던 물줄기가 어떤 이유로 해서
이리로 휘어든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물의 깊이를 재어볼 심산으로 주먹만한 돌멩이를 주워 강 한가운데로 던져 보았다. 수면에 커다란
파문을 남기고 돌멩이는 사라져 갔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으로 깊이를 헤아려 볼 재간이 없었다. 우리는 차에
올라 허리까지 오는 고무장화를 옷 위에 끼어 신고 물 속으로 기어들었다. 순식간에 장화는 탄력을 잃고
가죽처럼 뻣뻣해 졌고 하반신을 얼얼하게 만든 냉기가 머리털까지 쭈뼛이 올라왔다. 거센 물살이 재빠르게
달려와서 우리의 다리통을 휘어 감고 끌어가려는 통에, 어질어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물은 허벅지까지 차 올랐다. 제 아무리 차체가 높고 강력한 힘을 가진 트럭이지만 그것을 타고 물을
건너기가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행여 회색빛 뿌연 물 속에 도사리고 있을 지도 모를
웅덩이며 바위덩어리를 더듬더듬 살피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길을 건너가야 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우리는 차로 돌아왔다. 로버트는 자동차의 키를 힘주어 돌렸고 이어 엔진음이 그 안에 내재한 강력한 힘을
암시하듯 골짜기에 나지막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 고우 ! "
로버트가 주문처럼 그 말을 외우고 난 뒤,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곧바로 첨벙 하고 차체가 물 속에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쉴 사이 없이 자동차의 철판을 때리는 물살 소리가 요란스러이 날아왔다.
로버트는 액셀레이터를 눌러 자동차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물이 깊어지자 자동차 본닛 너머로 튀어 오른
물살이 앞 유리창을 여지없이 때려왔다. 자동차는 웅웅거리는 거친 숨결 속에 스스로 속도와 힘을 조절하며
조금씩 나아갔다. 차 밑바닥은 벌써 문짝을 스며든 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만약 여기에서 자동차가 서
버린다면 큰일이었다. 우리에게 물 속에 갇힌 자동차를 끌어낼 완력이 있을 리 만무였고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걸어서 되돌아 갈 수도, 그렇다고 데릭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갈 방법도 없었다. 물소리는 끓어오르는
듯 따들싹했고 우리가 반드시 건너가야 할 강줄기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어금니에 힘을 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오 제발, 하느님!
" 미스터 킴. 이건 오하이오에 있던 어릴 적 내 집의 사진이야. 여긴 이층이지. 이쪽 복도 끝에 내 방이 있고,
그 곁에 형 마이크와 지금 하와이에 살고 있는 누이 케이트의 방이 있었어. 이 문은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쓰시던 침실 문이지. 집이 몹시 컸었어. "
데릭은 자신의 낡은 사진첩을 들여다보길 좋아했었다. 혼자서 들여다보길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시큰둥하게 앉아있는 날 끌어당겨서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해대는 것도 좋아했다.
" 이층 내 방 침대에선 히아신스와 팬지꽃이 피어있는 정원이 훤히 내려다 보였어. 내 꿈이 뭔지 알아? 빨리
돈을 벌어서 지금 누군가 낯모를 사람이 차지하고 있을 이 집을 도로 사는 거야. 음 그렇지. 기어이 되찾고
말 거야. "
그의 결심은 진심인 듯 했었다. 그는 얼음덩이가 엉켜 붙어 있는 추게취 산맥의 봉우리들이 차갑게
비춰지고 있는 유리창을 한동안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고 나서 말을 이어갔다.
" 아래층 거실엔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어. 멋진 그림이었지. 제목이 뭐였더라? 그래, 황혼의 설경이었어.
모조품이긴 했지만 유명한 모네의 그림이었지. 땅엔 안개가 지펴있고 눈발이 얼어붙어 있었어. 잎이 다
떨어진 나무가 몇 그루 서 있고 화면을 가로지르며 강이 흘렀는데 거기엔 붉은 황혼이 녹아 있었어. 눈
사이엔 파릇파릇 풀이며 이끼 같은 게 보이고, 주황색 태양이 뉘엿뉘엿 대지를 넘어 가고 있는데 그 모습이
일품이었지. 하늘은 온통 노랑색 연두색 붉은 색으로 뒤범벅이고 말야. 난 그 그림을 보며 성장을 했었지.
그런데 미스터 킴. 난 요즈음 이곳 알라스카의 벌판엘 나갈 때마다 그 그림을 연상하곤 해. 드넓은 황무지에
강과 호수가 있고 풀과 나무 그리고 숲 거기에 안개나 눈보라가 내려. 어쩌다 눈 위에 비춰지는 태양 빛이나
안개 속의 낙조를 보면 정말 옛날 생각이 간절해. 사실 나는 그냥 산엘 가는 게 아냐. 난 집엘 가는 거야.
벌판엘 나가면 난 거기에서 내 집을 느껴. 이상도 하지. 어릴 적엔 그림을 보면서 내가 크면 꼭 이런 곳엘
가봐야지 했는데 이젠 완전히 거꾸로 됐어. "
귀청을 쓸어내 버릴 듯이 들려오던 물살소리가 급격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참으로 힘겨웁게 우리는 강의
건너편으로 올라설 수가 있었다. 우리의 자동차가 탄탄한 맨땅 위로 사뿐히 기어올랐을 때, 로버트는 핸들을
두들기며 부라보를 외쳐 대었고, 평소 감탄사를 발하거나 기쁘거나 즐거운 일에 괴성을 질러대는 일에
익숙지 못한 나도 무어라 외마디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길은 누군가가 우리를 위하여 일부러 그렇게 뽑아놓은 듯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울퉁불퉁하기 그지없고
군데군데 구덩이 파여져 있는 흙길이었지만 우리는 데릭이 숨어 있을 지도 모를 크닉 빙하나 아니면 그
너머까지도 단숨에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쌍안경을 들어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고
로버트는 운전 중에 소형 무전기를 꺼내어 부지런히 데릭을 불러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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