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강(8)
김 헌 일
"헤이, 데어릭. 지금 어디 있어? 빨리 대답 해. 내가 멋진 케이크를 가져왔어. 아직 따끈하고 향긋한 커피도
한가득 가져왔다구. 빨리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가 먹어치울 거야. 자네, 미스터 킴과 내가 뜨거운 커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지? "
그러나 데릭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지질 않았다. 워키토키도 싸아 하는 잡음만 무심히 실어올 뿐, 맑고
다소 톤이 높은 데릭의 음성은 가져다주질 않았다. 그러나 아직 낙담할 단계는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하였다. 빙하는 아직도 수 시간의 거리에 있었다. 데릭은 아마도 자동차를 타고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갔을 것이었다. 그런 다음 66 이라는 숫자가 커다랗게 쓰여진 노란 색 오토바이를 타고 베이커 산기슭을
돌아 그가 그렇게도 가보고 싶어했던 빙하로 달려나갔을 것이었다.
알라스카 대륙 건너편 대서양의 북쪽 해안에까지라도 이어져 있을 것 같았던 길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나고
말았다. 그것은 본시 누가 사람의 통행을 위하여 특별히 닦아놓은 도로가 아니었고, 나무와 풀과 웅덩이와
돌 등이 마구 뒤섞이어 널브러져 있는 지표면 가운데 비교적 장애물이 적은 평지에 불과했으므로 애당초
기대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퉁탕거리는 자동차에 4 킬로미터쯤 몸을 부딪치면서 달려온 우리는 또다시 회색 물결이 오구탕을 치며
흘러내리는 크닉강의 한 지류와 만나게 되었다. 강폭은 아까의 것보다 좁아 보였으나 물살이 훨씬 거세었고
수심도 깊었다. 아무래도 자동차로는 더이상 나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우리가 차를 세운 곳은 키 작은 갈참나무로 둘러싸인, 제법 큰 집을 한 채 지을 만한 너비의 평지였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서 다시금 지형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한결 가까워진 산들이 우리의 어깨를 스칠 듯
지나가고, 담황색으로 그윽하게 불타는 숲은 무서우리 만치 고요했다. 어느새 날이 활짝 개어서 만년설을
뒤집어쓴 거친 봉우리들에서 쟁겅쟁겅 햇살이 부러지는 소리라도 들려올 듯 하였다. 그리고 듬쑥듬쑥
돋아난 잡초더미 사이로 면도날처럼 시린 빛을 내쏘며 뻗쳐있는 강물 위로 또다른 산맥 하나가 빙하가 있는
쪽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선 빙하가 보이지 않았다.
데릭은 분명 우리의 왼쪽편 산줄기를 타고 빙하가 숨겨져 있을 남쪽 숲을 향하여 떠나갔을 것이었다. 나는
그가 사라져갔을 내륙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겨갔다. 거기 어디에서 우다타타 요란한 폭음을 울리며 데릭의
오토바이가 불쑥 튀어나올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이어지는 것은
두터운 정적뿐이었다. 귀를 의심케 하는 철저한 정적 속에, 일만 이백여 피이트 베이커 산의 정상에 거대한
구름이 이제 막 그 산의 봉우리에서 뿜어져나온 듯한 자태로 걸려 있었다. 하늘은 청아한 담청색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한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을 지도 모를 잔인성을 내포하고서도 티없이 맑고 아름답기만
하였다.
우리는 트럭으로 돌아가 짐칸에 실린 로버트의 청색 오토바이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로버트의 집에서
준비해 온 샌드위치와 커피로 요기를 한 뒤, 오토바이를 끌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물살이 예상보다
거세어서 몇 차례 얼음물에 떠내려 갈 뻔도 했지만, 다행히 별탈 없이 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우리는 곧 숲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달려나갔다. 능숙하게 오토바이를 모는 로버트의 우람한 등뒤에 나는
몸을 웅크리고 달라붙어 있었다. 오토바이의 파열음이 쉴 사이 없이 귀청을 쓸어갔고, 수만 개의 가느다란
실처럼 변해버린 땅이 코를 베어갈 듯 낮게 스쳐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달려갔다. 굴곡이 심한 산길이긴 했지만 그런 대로 달릴 만 하였다. 너비도 충분해서 아까 두
번째의 강을 무사히 넘어서기만 했더라면 자동차로도 편히 갈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벌써 어둠이 괴괴히
고여 들기 시작하는 어웅한 숲에서 곰이라도 한 마리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우리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우뚝 멈추어서고 말았다. 길의 한가운데까지 물이 들어와 고여 있었다. 우리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앞을 살폈다. 처음에 일 미터 남짓한 길을 메울 정도에 불과했던 물은 곧 거대한
물줄기와 이어져 있었다. 수면 위로 풀들이 비죽비죽 솟아있고 그다지 크지 않은 바위의 밑동이 조금씩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보아 수심은 별 것이 아닌 듯 했다. 그리고 어디에서 물길이 막혔던지 흐름도 거의
없었다. 아마도 산 위에서 조금씩 흘러내리던 물이 갈 길을 잃고 그냥 고여 버린 듯 했다.
왼쪽으로 솟아있는 산등성이는 저물어 가고 있는 태양 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에 눈이 부셔서 산이 온통 소리 없이 타오르는 듯 했고 그 타오르는 불길은 호수를 반쯤이나 적시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서로이 통하는 것일까? 나는 문득 평화로움이 가슴에 충만해 옴을 느꼈고, 그 가득한 행복감
속에서 까마득히 잊혀졌던 내 나라 땅 한 귀퉁이의 모습을 상상해 내고 있었다. 소담스런 갈대꽃과 황금
물결이 일렁이는 너른 들판. 야트막한 동산엔 붉은 감이 주렁주렁 열리고, 해 지는 저녁이면 아련히 울려
퍼지는 교회당 종소리에 눈물이라도 한 움큼 흘려낼 법하던 곳. 이것이 소위 감정의 유희라는 것일까? 나는
가장 이국적인 풍광 앞에서 가장 토속적인 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이라도 울어대고픈 심경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슴 한 구석에서 번져오는 아릿한 아픔을 느꼈다.
그것은 향수였다. 느닷없이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고, 아내의 구질구질한 잔소리들이며 별 것도 아닌
가락동 내 집 앞의 너저분한 풍경들이 아련한 그리움 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재빨리 그
하잘것없는 상념들을 씻어내 버리고 말았다. 아직도 이곳 미국에의 잔류는 내가 고려하고 있는 선택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단 철수를 하기로 작정하였다. 이제 곧 완연한 어둠이 내릴 것이었고 어차피 오늘의
일정은 내일에 있을 본격적인 수색작업의 전초전에 불과한 것이었다.
우리가 실컷 담배를 빼어 물고 나서 돌아설 즈음의 일이었다. 이미 어둠에 익숙해 진 나의 눈으로 우리가 서
있던 곳의 뒤쪽 숲에서 이상한 물체가 감지되었다. 침묵의 경연을 벌이듯 묵묵히 서 있는 전나무 숲
가운데에서, 낯익은 사각의 물체가 더욱 짙은 어둠을 뒤집어쓰고 웅크려 있었다. 나는 그것의 정체를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데릭의 시볼 트럭이었다. 그것은 마치 피로에 지친 나머지
나무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었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우리는 긴장된 마음으로 그것에 다가갔다. 지나치게 고요한 숲속 분위기 탓이었을까? 그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데릭의 시체가 발견될 지도 모른다는 방정맞은 생각이 온몸에 짧은 소름을 끼얹으며 지나갔다.
데릭은 그곳에 없었다. 청색과 하늘색으로 반씩 나뉘어 칠해진 차체며 내가 이따금 앉아 초콜릿이며
과자부스러기를 주워 삼키던 조수석 시트의 뜯어진 비닐 자국이며 기름때가 묻어 반들반들해 진 핸들은
예전 그대로였다.
차문을 흔들어 그것이 잠겨져 있음을 수 차례 확인하며, 나는 희망 섞인 생각에 잠겼다. 잠겨있는 문은 그가
언젠가 돌아와 그것을 다시 열리라는 분명한 의지의 표상처럼 보여졌다. 어느 순간 그는 다시 돌아와 마치
세상의 문을 열 듯 그것을 열어 제킨 다음,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 우리를 위하여 맛있는 피자를 구워줄
지도 몰랐다. 사실 그의 요리 솜씨는 일품이었다. 그는 특히 고기를 잘 구웠고 지난번엔 날 위하여 끓는 물에
쌀을 부어서 밥처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나는 그의 한 마디를 기억해 내고 말았다.
" 난 열네 살이 되면서부터 혼자 살았어. 그야, 내 새아버지가 날 싫어했기 때문이었지. "
그는 자신에게 요리 솜씨가 붙게된 경위를 그렇게 설명하곤 했었다.
우리는 곧바로 우리들의 자동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왔다. 어둠이 짙어져서 사방천지가 지독한 암흑으로
휩싸인 뒤였다. 우리는 모닥불을 지피기 위하여 손전등을 켜들고 나무를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불을 피우는
일은 내가 맡았다. 그것은 아까 데릭의 차를 발견한 뒤로 부쩍 심해진 그에 대한 생각 때문인지도 몰랐다.
데릭은 불을 잘 피우지 못했다. 엄청나게 큰 통나무를 두서너 개 걸쳐놓고 휘발유를 끼얹어 성냥을 그어
대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휘발유의 요란한 불길이 사그라지고 난 뒤 남는 것은 통나무의 두터운 껍질에
남은 작은 그을음 자국뿐이었다. 요리하는 것 빼고 그 작자는 한마디로 손재주가 없는 친구였다.
나는 로버트가 가져다준 날렵하게 생긴 도끼로 나무를 잘게 빠개었다. 잘게 부수어진 조각에서부터 제법
굵은 나무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포개어 쌓은 다음 휘발유를 끼얹었다. 그리고 인디언 천막 모양으로 쌓여진
나무토막 한가운데에다 불씨를 던져 넣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사위가 한순간에 밝아졌다. 숲이 성큼
다가왔고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던 주위가 순식간에 떠올라 너울너울 소리 없는 춤을 추기 시작했으며, 길게
늘어진 우리의 그림자가 저 멀리 산맥의 봉우리에 닿을 듯 하였다.
우리는 불에 구운 소시지를 빵에 싸서 먹었다. 그러나 입만 부지런히 오물거릴 뿐, 여전히 침묵한 상태였다.
우리의 침묵은 데릭에 대한 좋지 못한 예감에서 연유한 것일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해도
우리는 침묵을 피할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사위가 너무 적막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정적에 기가 질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적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숲에서 가득가득 날아왔고 아득한 어둠 너머에
도가 튼 선승(禪僧)처럼 앉아 있는 높다란 산봉우리에서도 날아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 자갈 풀포기
골짜기 언덕 그리고 사람을 두엇 집어삼킨 귀신 들린 방죽 같은 검고 깊은 하늘에서도 그것은 날아들고
있었다. 소리가 없는 세상의 괴이함이라니. 소리가 없다는 것. 그것은 분명 굉장한 두려움이었다.
적막감에 견딜 수가 없었던지 로버트는 총을 들고일어나 숲에다 대고 총을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그가
쏘아댄 발작적인 총소리는 착 가라앉은 천지를 단숨에 뒤흔들며 숲과 골짜기를 향하여 날아갔다. 그리고 매
총성의 뒤를 이어 싸아싸아 하는 금속성 여음이 골짜기를 씻어 내리며 아득히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 소리는
그때까지 잠들어 있던 산령(山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일어나, 우리를 향하여 일시에 내지르기 시작한
야유의 소리만 같았다.
로버트가 돌아와 앉자 우린 또다시 두터운 침묵에 휘말려 들었다. 나는 무릎에 턱을 괴고 빨려들 듯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옥의 밑바닥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저런 것일까? 날름날름 혀를 내밀고 있는
수천 가닥 불길 위로 티보다 작은 불씨들이 튀어나와 아픈 듯 몸을 비틀며 춤을 추다가 하나씩 둘씩
허공으로 흩어져 가고 있었다.
이슬이 내렸던지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였다.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도 한풀 기세가 꺾이어 시들해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자동차 안으로 들어와 잠을 청하기 시작하였다. 로버트는 운전석 옆 유리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조수석 아래의 비좁은 공간으로 그 큰 몸집을 가까스로 구겨 넣고 있었다. 곁에서 보기에
그 모양이 여간 불편하지가 않았다. 몸이 불편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엉덩이를 시트 끝에 걸치고
몸을 최대한 일자로 편 채 슬리핑백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내내 자동차 엔진을 돌려
히터를 틀어놓아야 했다. 밖엔 온도가 얼마나 될까? 쓸데없는 생각에 매달리며 나는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띄여진 시선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그러나 한밤중 알라스카의 깊은 산중에서
대하는 하늘은 예사로운 하늘이 아니었다. 그것은 침묵과 어둠의 거대한 웅덩이였다. 그리고 무엇인가
거대한 힘에 의하여 우리는 그 암흑의 심연 한가운데로 조금씩 빨려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철저한
무(無)의 늪. 이놈의 어둠 속에선 시간도 흐르지 않는 것일까? 정말 이제 우리는 다시는 빛을 대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우우우우 - .
그 어느 때였다. 어둠을 뒤집어쓰고 장승처럼 서 있는 솔송나무 가지 사이로 늑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다지 멀지않은 숲에서 였다. 질식할 듯한 정적 속에 느닷없이 들려온 늑대의 울음소리는 가슴에 야릇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소름이 끼치듯 뼈에 사무친 고독감이었으며, 용광로와 같이 두터운 옹벽으로
철저히 차단되고 감추어진 열정이었다.
두려움 속에 나는 잠을 재촉하였다. 내가 꿈을 꾼 것이었을까?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잘 계시는
걸 아니까 자꾸 전화하지 마세요. 국제전화 한 통화에 얼만지나 아세요? 그리고 언젠가 한번씩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여러 목소리와 함께 수옥의 축축한 음성이 스산한 나의 흉중으로 날아들었다.
- 준호씨, 나 지금 발가벗고 있어요. 내 몸에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았단 말예요.
한때 나를 강렬한 성적 욕망으로 끌고 들어갔던 그 소리는 극에 달한 절망의 소리였다. 더이상 어찌 해 볼
수 없는, 이제 막 스스로를 파멸시켜 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위기에 찬 절규였다. 도대체 인간의 절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쩌면 인간은 자신의 끈질긴 생명력 속에 절망이라는 것도 함께 키워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옥에겐 돈이 많았다. 그녀가 항상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볼품없이 허름한 손가방에는 시퍼런 만원 짜리
지폐가 다발로 넣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소망하던 행복은 별로 채워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북녘 땅에서 온 피난민이었다. 고향에 살처럼 아까운 옥답을 내버려두고 쫓기듯 떠나야 했던
그들은 분을 삭이지도 못한 채 찢어지는 가난 속에 일찌감치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일가붙이 하나 없는
타관에서 수옥은 혼자가 되었다. 국민학교를 근근히 마친 그녀는 많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왔다. 그때부터 안해 본 짓이 없었다는 그녀의 말대로 험난한 도시생활이 시작되었다. 술집을
차렸었고 관광안내원 자격증을 따 일본인 관광객을 끌어 들였고 일본인 상대의 여자 장사도 해보았다.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진 것은 여러 번이었고 형무소 신세를 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러는 동안 제법 돈이 모아졌고 결혼도 하였다. 상대는 그녀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동갑내기 사내였다.
딸도 하나 생겼고 그럭저럭 생활의 기틀이 잡혀가는 듯 싶었다. 그녀는 열심히 돈을 벌어 모았다. 사고뭉치
막내 시동생을 그녀가 그렇게도 되어보고 싶어했던 대학생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장손인 남편을 대신하여
시댁의 생활비며 온갖 대소사를 치러 내었다. 충청도 산골인 남편의 고향에선 효부가 났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작지 않은 액수의 돈을 절에 시주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돈은 그녀의 행복을
지켜주는 훌륭한 버팀목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건달이었다. 아무런 직업도 가지지 않았고 아내가 벌어들인 돈으로 자가용을 몇 번씩
갈아치웠고 골프를 하러 다녔다. 그리고 슬금슬금 여자 꽁무니를 뒤쫓아 다니기 시작하였고 그 현장을
수옥에게 들켜버린 후 주먹질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날로 포악해져 갔다. 포주질이나 해먹는, 집도 절도
없는 년. 나중엔 그것이 남편이 그녀를 지칭하는 유일한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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