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옥을 알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녀의 사회생활은 활달했고 그 활달함 속에는 성공적인
현대여성에서 느껴지는 화사함이 스며 있었다. 그녀는 내게 엉뚱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어떤 때는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지극한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얼떨떨한 기분에 그것을 그냥 지나쳐 버리곤
했다.
그때까지 나는 얄따란 꺼풀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그녀의 힘겨운 과거와 현재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사정을 알기 시작한 것은 미국으로 온 지 일년쯤 지나서 였다.
" 지난 일요일, 봉천동에 있는 시고모 댁에 다녀오던 길이었어요. 밤이었지요. 집에 거진 다 와서 찻길
한가운데 개가 한 마리 서있는 거예요. 남편이 달려가면서 몇 번 크락션을 눌렀어요.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이 개가 그 자리에 서서 꼼작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남편은 갑자기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어요. 그냥 막
달렸지요. 그래서 나는 옆 차선으로 비켜 갈래다 보다 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무어라고 입에 담지 못할
쌍소릴 해대면서 그대로 개를 받아버리는 것이었어요. 나는 깜짝 놀라면서 뒤를 바라봤어요. 개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죽어 넘어져 있었어요. 나는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어요. 그때 우리 애도
차안에 같이 있었단 말예요. 그 애도 그걸 다 봤죠. 준호씨. 어쩌면 좋아요. 무서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
그 전화가 있고 나서 몇 달이 흐른 뒤, 수옥은 자신의 이혼 소식을 알려왔다. 위자료를 두둑이 거머쥔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수옥은 전화번호를 바꾸고 집을 이사해 버렸으며 하던 일도 지금의 일로
바꿔버린 뒤였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기가 무섭게 우리는 차에서 기어 나왔다. 새벽안개가 부드럽게 대지를 감싸고 있었고
두터운 서릿발 아래서 풀잎들이 싱싱하게 생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싱그러운 대기를 폐부 깊숙이
호흡하며 나는 무엇인가 두려운 것에서 풀려난 듯한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지난밤 내내 온몸의 근육은
여지없이 구부려지고 뭉쳐진 채 단 한 군데도 빠짐없이 아려왔고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든 마음은 썩어
문드러진 걸레조각처럼 금방이라도 가닥가닥으로 찢겨져 나갈 듯 하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던 악몽.
나는 쇠똥이 올라앉은 갓난아이의 민둥머리를 보게 되었고, 자는 듯 죽어 있던 노파의 작은 어깨와,
당혹감과 부끄러움에 슬픔조차도 느낄 겨를이 없던 중년 여인의 시퍼런 눈두덩을 보았으며, 개의 선혈과
수갑을 찬 채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꿈많은 21 세의 안경잡이, 그리고 벌거벗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수옥의 모습과 돈을 아끼느라 전화선을 뽑아버린 아내의 표정 없는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한 노인의 얼굴도
보게 되었다.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살이 한 시대의 수난사를 연상케 하던 그 얼굴은 뜻밖에도 연전에
돌아간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제 해사한 밝음이 다시 찾아와 온갖 어둡고 불길한 것들을 저만치 몰아내고 있었다. 사위는
여전히 고요한 채 였지만, 그 고요함도 어젯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온몸의 근육에서 생기를 되찾아 내고, 어지러이 남아 있는 지난밤의 화톳불 자리를 이따금 바라보며, 어둠과
밝음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로버트의 오토바이 꽁무니에 올라앉았다. 아침의 활기 찬 분위기 탓이었는지, 우리는 데릭이
분명히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 찬 결론을 아침식사 중의 가벼운 토론에서 맺어냈었다. 우리의 짐작대로라면
그는 이곳에서 약 20 킬로미터 떨어진 크닉 빙하를 왼쪽에서 가로질러, 그 건너 가네트 산 옆 골짜기
알리예스카 숲 어디엔가에 은신해 있을 것이었다. 우리가 그런 결론에 도달한 연유는 고장이 났던지
휘발유가 바닥이 났던지 해서, 그가 오토바이를 움직일 수 없었을 거라는 가정에 있었다. 아무런 탈것이
없이 이 길을 다시 돌아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빙하 건너편 숲에는 곰사냥을 나온 사냥꾼들이
기거해 있을 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의 움막엔 어느 정도의 비상식량이며 땔감이 비축되어
있을 것이었다. 설사 움막을 발견치 못한다 해도 추위가 비교적 덜한 숲이라면, 수십 발의 총탄과 총을 가진
그가 적당히 먹을 것을 구하고 추위를 피해 가며 살아 있으리라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숲길을 달려갔다. 숲이 너무나 빨리 우리의 귓불을 스쳐 가는 바람에, 아무리 보아도
그것이 그것인 흐릿한 슬로우 비디오의 한 장면을 대하는 듯 하였다. 그것은 숲이 아니라 나무 형태로 된
수많은 어둠과 그 사이에 점점이 박힌 작은 빛들로 이루어진 길고도 긴 그림자였다. 하늘은 여전히 안개가
자욱한 상태였다. 그 한가운데로 햇살이 터지려는지 그 부분만 동그랗게 연두색으로 빛나고 였었다.
그렇게 얼마를 달려가니 널따란 평지가 나왔다. 도대체 이놈의 숲은 그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길인가 하면
흥건한 물이었고 물인가 하면은 느닷없는 벌판이고 골짜기였다. 풀 포기 하나 돋아나 있지 않은 벌판에
난데없이 모래가 그득하고 그 한가운데 Y 자 형태로 물길 자국이 잡혀 있었다. 전엔 이곳이 제법 큰 규모의
물길이 합쳐지던 지점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오토바이를 세웠다. 동쪽으로 거대한 벽면처럼 솟아 있는 베이커 산의 옆구리에 깊은
골을 내며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길다란 밧줄을 하나 늘여 놓은 듯 폭은 매우 좁았고 길이가
수백 미터는 되는 폭포였는데 그 꼭대기에서 누군가가 거대한 주전자로 한줄기 물을 줄줄 부어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런데 골짜기 밑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우람한 물소리가 제법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도
또렷이 들려왔다.
우리는 그곳에서 훨씬 가까워진 크닉 빙하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빙하가 뿜어내고 있는 냉기 탓이었는지,
그곳엔 더욱 많은 구름이 고여 있었다. 거대한 산맥과 숲으로 둘러싸여진 그 한가운데 낮게 엎드린
희무끄레한 자취. 빙하는 구름과 맞닿아 있어, 흡사 구름 속으로 막 피어오르고 있는 짙은 안개더미처럼
보였다.
거기 어디에 데릭이 있을 것이었다. 도대체 저기에 무엇이 있기에 사람을 그다지도 유혹하였단 말인가?
나는 문득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노파를 떠올리었다. 고향은 저토록 신비한 것인가?
신비한 것은 고향으로 통하는 것일까? 그리고 아버지는 그것 때문에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가슴에 파묻고
한평생을 살았던 것일까?
아버지에겐 손가락이 두 개가 없었다. 아버지가 젊었을 적, 왼쪽손 새끼손가락과 약손가락을 일본땅
북해도에 두고 왔다. 아버지가 그곳으로 징용을 간 것은 대동아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북해도의 꽁꽁
얼어붙은 광산에서 땅을 파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었다. 처음엔 하루 열두 시간쯤 파던 것이 전쟁이
깊어지면서 스무 시간 가까이로 늘어났다. 먹는 것이라곤 소금에 절인 주먹밥 두 덩이였고,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 속에 입을 것이라곤 한 여름에 입던, 해진 작업복뿐이었다. 그것을 두세 겹 껴입고 그 모진 추위를
버텨내야 했다. 거기에서 동상이 걸렸었고 결국 손가락을 잘라내야만 했다.
그러나 진정 견딜 수 없던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고향 생각이었노라고 했다.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미어져서, 고향이 있는 서남쪽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거길 바라보노라면 ' 이눔아. 지금 어디
있단 말이냐. ' 하는 할머니의 울부짖음 소리가 귀에 우렁우렁 들려오는 듯 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다 해방이 되었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밟아볼 수 없을 것 같던 고향으로 아버진 돌아왔다.
그러나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 진 고향에서 아버지를 맞은 것은 말이 없는 한 쌍의 무덤이었다. 아버지가
징용에 끌려간 이듬해 할아버지가 문득 세상을 떠났고,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남편마저 잃은 할머니도
비바람이 몹시도 불어 제키던 어느 날 홀연히 저승으로 떠나고 만 것이었다.
" 어찌 햇살이 그렇게도 고왔겠냐. "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와 처음 조부모의 무덤을 찾던 순간을 그렇게 회상하곤 했다. 나란히 서있는 두
개의 무덤 위로 쏟아지던 햇살이 바로 그렇더라는 말이었다. 어쩌면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채, 보내버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좋은 세상으로 가길 바라는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출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은 통한과 포한이 진 그리움을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려 했었던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아버지는 또 한차례 고향을 버려야 했다. 그때 터진 동족간의 전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40년 세월이 지나도록 지척에 있는 북녘땅 고향을 한번도 찾아가 보지 못한 채, 아버진 세상을 영영
하직하고 만 것이었다.
길은 Y 자 형태의 물길 가운데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또다시 오토바이를
굴려가기 시작하였다. 나는 반드시 데릭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물 속에서 길을
찾아내었던 것처럼, 숲은 넓어도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한 곳은 한 길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제법 먼길을 달려온 탓이었는지 오토바이의 엔진음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꼭 병든 짐승의 거친 숨소리만
같이 들려왔다. 그렇다고 오토바이가 고장날 기미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느껴진 것은 오토바이는
이미 그냥 기계덩어리가 아니라 우리의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오지(奧地)에서 그것은 아주
헌신적이고 사려 깊은 친구였고 은인이었다.
갑자기 인간이 그리워졌다. 무차, 밤비, 로렌스, 바야니, 빅터. 삼년을 내리 대하
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낯선 구석이 가시지 않던 그들의 거친 얼굴들이 더할 수 없이 다정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화하지 마세요. 요금이 얼만지나 아세요? 어쩌면 아내의 그
말은 사랑과 믿음의 또다른 형태인지도 몰랐다. 난 돈을 몰랐다. 십년이 넘는 직장생활에서 월급 봉투 한번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돈에 풍족해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몹시 가난했었다. 날은 져서 사방에
어둠이 짙어만 오는 데 저녁쌀 봉지를 쥐고 들어오실 아버지는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배고픔의 고통보다도
그것을 자각한 정신의 아픔이 더 컸다.
- 학생들은 이번 학기 등록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더이상 우리 학교에서 공부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제
집에 돌아들 가세요.
내가 중학교 1 학년 때였다. 각 반에서 차출하듯 불려 나온 여섯 명의 학생들을 세워놓고 그토록 인자해
보이시던 교장선생님은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돈이라는 것을 무서워하였고 증오하였다. 그런 나를
대신하여 아내는 각박한 현실의 삶을 짊어지고 나선 것이었다.
- 아빠. 오늘은 내 생일이여요. 돈도 많이 들 건데 엄마가 초코케이크를 사 주셨어요. 그런데 그걸 먹다가
아빠 생각이 나서 막 울었어요.
내가 없는 사이에 생각이 멀쩡한 어른처럼 되어 버린 일곱살박이 막내아이의 편지 한 구절이었다.
도대체 인간이 인간을 미워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인간은 그저 단순한 존재함만으로 상대방의 고독감을
씻어주는 신비한 존재였다. 막힌 곳에 길을 내어주고 죽어 가는 이를 살려내며 헐벗은 이를 보살펴 주는
것도 인간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은인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인간 속에서 절망을 느끼고 인간을 피해
도망을 다니며 마침내 인간세계를 저주하며 사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본래의 모습인 것처럼 되어 있었다.
길은 바퀴가 반쯤이나 푹푹 빠지는 진탕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걸었고 로버트는
오토바이 위에 올라앉아 두발로 얼음을 지치듯 밀어가며 조금씩 기어나갔다. 덩치는 황소 만한 녀석이
장난감 같은 오토바이에 앉아 벌이고 있는 어린아이 재롱 같은 몸짓이 우스꽝스러웠다. 더구나 머리엔
귓바퀴 위에 은색 날개가 달린 장난감 모자 같은 헬멧이 얹혀져 있고 불룩이 튀어나온 배꼽 아래 대검이며
온갖 잡동사니가 주렁주렁 매달린 혁대가 간신히 채워져 있었으며 등에는 끝이 뭉툭한 엽총이 가로질러
매어져 있었으니, 영락없이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 개구쟁이 모습이었다.
나는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고개를 돌려대었지만 어느새 그가 눈치를 채고 둥그런 얼굴
가득 미소를 띄워 보이며 더욱 잰 발짓으로 우스꽝스런 몸짓을 해 보였다.
한 시간 남짓 달려간 끝에 우리는 오랜만에 인간의 자취와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검정색 바탕에 노란
글씨로 쓴 경고판이었다. 위험, 건너지 마시오. 그것엔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힌 듯
그곳에서 우뚝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경고판 아래로 칠렁칠렁한 회색 물결이 쿼르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참으로 무서운 기세였다. 우리가 그
동안 숱하게 건너온 크닉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물길이었다. 지도에 나타난 그 강의 이름은 다이아몬드였다.
다이아몬드 강. 처음엔 조금 엉뚱하게 여겨지던 그 이름이 다시 생각하니 그럴 듯 하였다. 굼깊은 산맥과
전인미답의 빙하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이 비경을, 마음껏 거쿠러지고 소쿠라지면서 흐르는 이 강은 가히
뭇강 중에 으뜸이라 할 만 하였다.
빙하는 강 건너 코앞에 얹혀져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거대한 얼음의 산맥이었다. 부피를 가늠할 수 없는
얼음들이 산더미만큼 쌓여서 길다랗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서울의 한강 만한 물줄기가 어느 순간
뚝 하고 얼어붙어 그 위에 얹혀진 느낌이었다. 빙하의 윗부분은 시린 흰빛이었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검정빛을 띄어갔다. 곁으로는 암갈색 주름이 나란히 잡혀져 있었는데, 그 모양이 잠들어 있는 거대한 용을
연상케 하였다.
나는 도저히 데릭이 저것을 타고 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마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높았고 가팔랐으며 수없이 많은 골짜기와 함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 자체가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것보다도 빙하는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을 거꾸로 달려 적어도 수만 년 전의 현장에 와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것을 두려워하기에
충분했다.
데릭은 빙하의 끝에 있는 빙하호로 먼저 가 보겠다고 했었다. 우리는 강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하여도 여기에서 강을 건너기란 불가능하였다. 하류로 내려가면 사정이 좀더 나아질 지도
몰랐다.
우리들의 예상이 옳았다. 삼십 분쯤 내려가자 강물이 세 갈래 지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수십
개의 작은 물길로 흩어져서, 서로이 엇갈리고 가로지르며 바글바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곳에선 물을
건너기가 비교적 수월할 듯 싶었다. 건너야 할 물줄기는 많았지만, 수심이 훨씬 낮아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물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내가 먼저 더듬더듬 얕은 곳을 골라 지나가면 로버트가 오토바이를 몰고
뒤를 따라 왔다. 그러나 결코 얕잡아 볼 일이 아니었다. 물의 깊이는 겨우 종아리를 넘는 정도였지만 물살이
드세어서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발을 물 속에 새로이 내딛을 적마다 마치 거대한
흡입구에 빨려 들어가듯 다리가 사정없이 아래쪽으로 끌려가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였다.
우리는 곧 강이 수십 갈래로 갈라져서 흐르고 있는 그 중심부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선 맨땅이 보이질
않았다. 사방이 물천지였다. 여기에서 콸콸 저기에서 퍼르르 하면서 물줄기는 사정없이 떠내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수천 수만의 적병들이 징을 울리고 꽹과리를 치면서 새까맣게 몰려오는 것과 흡사했다. 물줄기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이 엔굽이치고 나울거리고 하는 통에 아예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두어 발짝 뒤에서 나를 따라오던 로버트가 오토바이 채로 기우뚱 넘어지는가 싶더니 정신없이
떠밀려 가기 시작하였다. 아이쿠, 저런! 나는 내심으로 지른 외마디 비명과 함께 첨벙거리며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참으로 다행히 떠밀려 가던 오토바이의 뒤꽁무니를 붙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반신이 마비되는 충격이 느껴졌다. 얼음물이 허리께까지 올라와 장화 속으로 기어든 것이었다. 로버트는
이미 상체가 온통 물 속에 잠겨버린 뒤였다. 내가 오토바이를 붙잡고 있었음에도 그는 물을 허우적거리고만
있을 뿐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한쪽 다리가 오토바이에 깔려버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