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장미(111)
김형엽
시간이 흐르자 나영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맺혔다. 나영은 이마에 땀을 한손으로 훔치면서 몸에 감았던 타올마저 벗어 던졌다. 조금전 욕탕에서 찬물로 시원하게 씻어냈던
몸이 다시 끈적끈적한 땀방울로 뒤범벅이 되고 있었다. 그건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단단한 근육질이 육체가 바늘이 들어갈 때마다 조금씩 꿈틀거리면서 요동을 쳤다. 그바람에 사내 역시 온 몸이 땀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영은 마지막 매듭을 짓고 실을 입으로 끊고 나더니 그대로 사내옆으로 쓰러졌다. 거친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사내의 손이 끈적끈적한 나영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 잘했어. 정말 잘했어. "
나영은 울고 있었다. 사내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졌다.
나영은 몸을 일으켜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사내는 천천히 일어나 상처 부위를 살펴보고 나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길게 들이 마셨다가 천천히 내 뿜었다.
나영은 젖은 수건을 들고 나와 사내의 얼굴과 몸에 있는 땀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 다시 감아야지요. "
" 내가 할 테니까 가서 땀이나 닦아. "
나영은 다시 욕실로 들어가 찬물이 담겨져 있는 욕탕으로 들어갔다.
사내는 풀었던 천을 다시 몸에 감으면서 시계를 보았다.
(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군. )
사내는 일어나서 창가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많게는 네다섯, 적게는 둘씩 짝을 지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혼자 다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사내는 담배를 맛있게 피워가며 앞으로의 일에 대한 구상을 하는지 묵묵히 밖을 주시했다.
유 영옥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한 마음이 더해 갔다.
그녀는 피카소로 부터 전화를 받은 후 물건들을 가방에서 꺼내 상자속에 넣고 예쁜 포장지로 포장도 마쳤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케이크 같은것이 들은 선물상자로 보였지만 내용물이 무엇인지 아는 그녀로서는 그것이 선물상자로 보이지 않았다.
만약에 나가다가 느닷없이 형사와 마주쳐서 속 내용물을 보자고 하면 꼼짝없이 그녀는 마약 취급자로 쇠고랑을 차게 될 것이다. 형사가 자기집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녀는 초조한 심정으로 상자와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창가에 살며시 몸을 숨기며 밖을 내다보는 동작을 되풀이 하였다.
다행히 밖에는 자기를 감시하는 눈이 없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천천히 토해냈다.
( 마음을 편하게 갖자. 이제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이다. 이 물건만 전해주면 더 이상의 괴로움도 필요 없다. )
그녀는 최종적으로 몸을 살펴보았다.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티와 바지를 매 만졌다.
( 됐어. 이제 가는거야. )
그녀는 핸드백을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왼손으로 상자를 들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가벼워보였지만 상자는 묵직했다.
그녀는 거실을 거쳐 대문을 힘차게 열었다. 샌들을 신고 거실을 한번 쭉 흩어보고 나서 문을 닫아 잠그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곧 따가운 햇살이 그녀의 온 몸을 비추었다. 햇살에 비친 그녀의 하얀티가 더 눈부시게 희게 보였다.
마침 아파트 단지로 들어왔던 택시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택시를 세우고 뒷 좌석으로 올라탔다.
" 어서오십시요. "
50 이 넘은 듯한 나이의 운전수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 상록수 역으로 가 주세요. "
" 네. "
택시는 곧 아파트단지를 미끄러지듯 빠져 나갔다. 조금 지나자 승용차가 택시를 따라나갔다.
상록수역은 10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요금을 지불하고 나서 사람이 많은 의류상가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미행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그녀는 일부러 복잡한 의류상가로 들어가서 후문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의류상가에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녀는 사람들 틈을 헤집고 나가면서도 가끔씩 의식적으로 뒤를 쳐다보았다. 얼마를 빠져나가자 출구가 보였다. 그녀는 상자를 반대편 손으로 옮겨들면서 상가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옆의 건물들의 간판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상록수 제과점이 눈에 들어왔다.
( 저기 있군. )
시계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4 시 30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상록수 제과점 앞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안은 생각보다 넓었지만 사람은 두 테이블에만 앉아있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제과점 안으로 들어섰다.
" 어서오세요. "
카운터에 앉아 있는 여자 종업원의 형식에 가까운 인사를 들으면서 그녀는 실내를 두리번 거렸으나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는 모두 남녀 한쌍씩 앉아 있었고 자신이 찾는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후미진 곳에 앉으며 상자를 옆 의자에 조심스럽게 내려 놓았다. 그러자 곧 아르바이트라는 표찰을 가슴에 단 어린 소녀가 물을 탁자위에 내려 놓으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
" 아. 오렌지쥬스 되지요. "
"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
아르바이트생은 빼어난 여자의 미모에 감탄이라도 한 것처럼 돌아섰다가 다시 한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때 또 하나의 젊은 여자가 제과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 여자는 망설임도 없이 유영옥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영옥은 여자의 옷차림을 보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는 바로 송 나영이었다.
"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앉겠습니다. "
" 예. 앉으세요. "
나영은 앉으면서 앞에 앉아있는 영옥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정말 여자인 자신이 보아도 너무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 정말 대단한 미인이시군요. "
" 고마워요. "
영옥은 앞에 앉은 나영이 이쁘거나 미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청순하고 깨끗한 것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다.
" 어머. 동행이 계셨군요. 무엇을 드시겠어요. 이 쪽분은 오렌지쥬스를 시켰는데."
" 아. 나도 그걸로 주세요. "
" 예. 잠시 기다리세요. "
아르바이트생이 영옥의 앞에 쥬스잔을 내려놓고 돌아서려고 할 때 나영이 종업원을 다시 불렀다.
" 왜 그러시죠. "
" 케이크 대 자로 하나만 포장 해 주세요. "
" 케이크요. 어떤 내용으로 할까요. 생일이면 초도 들어가야 하는데. "
" 내용은 상관없으니까 포장만 예쁘게 해 주세요. "
" 알겠습니다. "
아르바이트생이 멀어지자 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물건은 가져 오셨나요. "
" 예. 여기 있어요. "
영옥은 옆 의자에 놓여있던 상자를 들어 테이블 위로 올려 놓았다. 그러자 나영은 상자를 들어 자기 옆자리에 놓았다.
" 그 분과는 어떤 사이세요. "
" 그 분 이라면.... "
영옥은 긴장하지 않으려고 애써 태연한 자세를 갖추면서 나영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시간에 주 형사는 상록수 제과점 앞의 가로수에 몸을 기댄채 고개를 돌려 제과점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주 형사는 유 영옥이 아파트단지를 빠져 나오면서 이 곳까지 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미행하고 있었다. 어제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외출을 하지 않고 있던 유 영옥이 느닷없이 나오는 바람에 그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그래도 놓치지 않고 따라 붙었다.
( 음. 남자가 아니고 여자인데. 친구인가? ... )
주 형사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지만 유 영옥이 만나는 사람이 젊은 여자라는 것을 알고 적지 않은 실망을 하였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안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 대체 그 상자는 무엇일까? 포장한 것으로 보아서는 무슨 선물꾸러미 같은데... )
주 형사는 신문 판매대에서 신문을 한장 구입했다. 유 영옥이 이미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혹시라도 얼굴이 마주치면 곤란하니까 얼굴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 쓰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내가 있었다. 피카소는 아까부터 창 밖으로 상록수 제과점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음.. 역시 형사 끄나불이 틀림없군. 계집이 경찰에 신고를 했나. 쉽게 경찰에 신고를 할 계집은 아닌데..... )
피카소는 제과점 간판에 붙은 전화번호를 볼펜으로 적었다. 그리고는 전화수화기를 들어 다이얼을 눌렀다. 제과점 안에는 두 여자가 오렌지 쥬스를 다 마시고 이야기를 거의 끝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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