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장미(113)

                                                     김형엽

    " 그럼 그 때까지 눈좀 붙여도 되지요. "
   " 그래. 눈을 좀 붙여. "
   나영은 눈을 감았다. 차를 타고 이 곳까지 와서 조금전 긴장된 시간의 연속으로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사내는 상자을 열어 봉투의 숫자를 확인하고는 자신의 가방을 열어 옮기기 시작했다.
   봉투를 다 옮기고 나서 가방을 잠갔다. 가방이 열리는지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나서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한쪽 구석에 세워났다.
   ( 이제 처리만 하면 끝난다. 오늘밤 일단 장 조영 그 자를 만나 일부를 처리한 후 나머지는 내일과 모레 모두 처리하자. 그리고 그 다음날 서울을 떠나는 거야. )
   사내는 그대로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 서울에 온지 벌써 다섯달이 다 되어 가는군. 이번에는 너무 오래 서울에 머물렀어. 이번에 돌아가면 몇년동안은 오지 말아야지. )
   사내도 눈을 감았다. 둘은 그렇게 조금씩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양평의 양지병원에 도착한 최 반장과 유 형사는 끝내 황 필두와의 면담을 이루지 못했다.
   중환자실에 있던 황 필두는 아직도 혼수상태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였다는 병원측의 강경한 반발도 있었지만 실제로 황의 모습을 본 최 반장은 황에게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황은 온몸을 붕대로 감고 있었다. 머리에서 시작해서 배 밑까지 온통 붕대로 감싸고 있었고 겨우 눈과 코, 그리고 입만 숨을 쉴수 있도록 열어 논 상태였다.
   최 반장은 집요하게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에게 상처에 대해서 물었지만 뾰족한 답변을 들을수가 없었다.
   의사에 말에 의하면 층계에서 구르면서 뒤머리가 조금 터지고 앞면에 찰과상 그리고 옆구리 뼈에 금이 갔다고 하면서 현재 머리부분이 큰 충격을 받아서 의식이 완전히 돌아온 상태가 아니라는 설명이었지만 최 반장은 의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미 황의 부하들에게 엄청난 압력을 받은 모양이었다.
   최 반장과 유 형사는 일단 병원에서 나와 밤사이에 폭력배들이 싸웠다는 곳을 양평 관할 수사관의 도움으로 찾아갔다. 산등성이를 따라 조금 올라가자 곧 밤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과수원이 나타났다. 최 반장과 유 형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 반장님. 이것 보세요. "
   유 형사가 먼저 무엇을 발견했다. 유 형사가 발견한 것은 칼이었다. 칼은 칼날과 손잡이 길이까지 약 20 센티정도의 길이였는데 칼날이 반쯤은 밤나무속에 박혀 있었다.
   유 형사는 힘을 주어 칼을 뽑아냈다.
   " 여기는 아주 심하군. "
   최 반장은 잡풀이 조금씩 솟아오른 땅바닥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 무엇이 있습니까? "
   유 형사가 최 반장 곁으로 다가가서 땅바닥으로 바라보았다. 땅바닥에는 붉은 피자국들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 대단했을 것 같은데요. "
   " 그랬을거야. "
   최 반장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 조금 더 내려가 보지. "
   최 반장은 담배연기를 내 뿜으며 밤나무 숲을 내려갔다.
   얼마쯤 내려가자 유 형사가 또 하나의 물건을 발견했다.
   " 저것 좀 보세요. "
   유 형사는 손가락을 물건을 가리키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 곳에는 밤나무줄기에 체인이 감겨있었다.
   최 반장은 직감적으로 체인을 이용하여 철조망을 뛰어 넘은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철조망 너머로 키가 큰 갈대숲을 보고는 황의 부하들이 그 자를 놓쳤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 어떻게 생각하세요. "
   " 자네 생각은 어때. "
   유 형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 글쎄요. 싸움은 격렬하게 한 것 같은데 정말 황의 부하들과 그 자가 싸운건지는 알 수가 없겠는데요. "
   " 그건 이미 밝혀졌네. 어제밤에 당직이었던 간호사에게 슬쩍 물어보았지. "
   " 무엇을.... "
   " 밤 깊은 시간에 서너명의 남자들이 피투성이의 몸으로 병원으로 몰려 왔다는 거야.
   그들중 몸이 성한 사내들은 황의 병실로 들어갔고 부상당한 사내들은 간단한 응급처리 후에 다시 병원을 빠져 나갔다고 하더군. 아마도 한 병원에 몰려 있는것이 안 좋다고 생각하고 황을 제외한 부하들은 다른 병원으로 옮긴 것 같아. "
   " 음.. 그렇다면 확실하군요. "
   최 반장은 피우던 담배가 다 타들어가자 다시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 그 자는 어떻게 됐을까요? "
   " 이 체인을 보게. "
   최 반장은 나무가지에 걸려 있는 체인을 손으로 잡았다.
   " 그리고 저 앞의 철조망이 있지. 저 철조망을 그냥 뛰어서 넘기는 불가능 하겠지. "
   유 형사는 체인과 철조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철조망을 뛰어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
   " 그렇다면 자네가 이 체인을 붙잡고 한번 넘어보게. 현재 지면이 45 도 정도 경사가 졌으니까 체인만 꼭 붙들고 탄력만 준다면 자네도 넘을 수 있을걸세. "
   유 형사는 체인과 철조망을 다시 한번 쳐다보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 체인을 두 손으로 힘차게 잡았다. 그리고 최대한 뒤로 물러섰다가 힘차게 발을 차며 체인에 매달렸다.
   바람소리를 내며 유 형사의 몸이 체인에 매달린 채 그네 타듯 날아올랐다. 그러다 철조망을 넘자 힘차게 몸을 퉁기며 앞으로 밀었다. 체인은 다시 뒤로 물러갔지만 유 형사의 몸은 그대로 철조망 바깥으로 사뿐히 넘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