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장미(118)

                                                     김형엽

    영옥은 주 형사의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것 마저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의자에 앉아 식탁위로 두 팔로 기대면서 자신의 몸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 괜챦으시겠습니까? "
   주 형사는 영옥과 떨어지면서 조그맣게 물었다.
   영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식탁위에 놓여진 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물은 영옥의 목덜미를 타고 가슴으로 까지 들어갔다. 티의 일부가 물에 젖었다.
   주 형사는 영옥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안타깝고 자신이 너무 강하게 밀어 붙인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자신이 잔인하다는 생각도 했다. 이제까지 여러 수사를 하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이유는 영옥의 모습 그 자체가 너무 아름다웠고 매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물을 두어모금 마신 영옥은 정신이 드는지 눈동자가 다시 촛점을 찾기 시작했다.
   주 형사는 더 이상 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의자에 다시 앉아 식
   탁위에 놓여진 귀고리를 비닐봉지에 넣었다.
   그 때 영옥이 몸이 일으켰다. 주 형사는 영옥이 또 다시 쓰러질까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쳐다보았다. 그러나 영옥은 쓰러지지 않았다. 발걸음에는 힘이 없어 보였지만 천천히 한발자욱씩 규칙적으로 옮겼다. 영옥은 몇 병의 양주병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대를 열더니 그 중에 하나를 꺼내고 잔도 두 개 꺼내었다.
   ( 아니 술을 .... )
   주 형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영옥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옥은 양주병과 잔 두 개를 들고 천천히 식탁으로 돌아와 앉았다.
   " 한 잔 하시겠습니까. "
   영옥은 주 형사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주 형사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자신의 잔에도 가득히 채웠다.
   " 이러지 마십시요. 부인. 자포자기 하시면 안 됩니다. "
   " 자포자기요? "
   영옥은 고개를 들고 주 형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앞에 놓인 술 잔을 그대로 들이켰다. 작은 양주잔에 가득 채워졌던 술은 영옥의 입을 타고 몸 깊숙히 들어갔다.
   " 부인. "
   주 형사가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을때 영옥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 말 하겠어요. 모든지 다 말 할께요. 그 대신... "
   영옥은 또 다시 주 형사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주 형사는 영옥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지금 영옥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도 알았다.
   " 알겠습니다. 모든것은 반드시 비밀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절대로 부인께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겠금 하겠습니다. "
   영옥은 주 형사를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 그런데 혹시 남편께서 돌아 올 시간이 되지 않았습니까? "
   영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오지 않아요. "
   영옥은 또 다시 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모금만 마시고 다시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 그 자.... 아까 형사님께서 'A' 라고 호칭한 그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한 보름쯤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그래요. 7 월의 마지막주 금요일이었어요.
   그 날 남편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게 되어 늦게 귀가하는 날 이었어요. 자정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기에 방의 창문을 통해 아파트단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쯤 지나서 승용차가 한 대 단지로 들어왔어요. 30 대 중반의 남자와 20 대 초반의 두 남녀가 내리더니 처음에는 말다툼을 하는 것 같더니만 순간적으로 어둠속에서 무엇인가 번쩍이더니 이내 여자가 남자의 품으로 넘어졌어요.
   순간 나는 놀라서 들고있던 커피잔을 떨어뜨리고 그 소리에 그 남자와 나는 얼굴이 마주쳤어요. "
   영옥은 다시 술 잔을 입에 대어 한 모금 마셨다. 주 형사는 영옥의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보면서 수첩에 간략한 내용을 적었다.
   " 그 날 밤은 곧 남편이 귀가하여 아무일 없이 잠이 들었지요. 나는 남편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어요.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무턱되고 얘기하는 것이 싫었어요.
   다음날 나는 남편이 출근한 후 두 남녀가 차를 세워놓고 서 있던 곳으로 가 보았었요. 혹시나 핏자국이라도 있는지 가 보았지만 그런것은 전혀 없었어요.
   다만 그 귀고리가 바닥에 있었어요. 하도 예쁘고 특이하게 생겨서 갖고 있었지요. 나는 아무일도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잊어 먹었어요.
   토요일이라 남편이 일찍 퇴근했지만 그날로 부산 출장을 가게 되었어요. 남편이 출장을 떠나고 텅빈 방에 혼자 남게 되었는데 누가 찾아왔어요. 바로 'A' 그 자 였어요. 그는 교묘하게도 전화를 고장나게 만들었다가 전화수리공 차림으로 집에 찾아왔어요.
   나는 아무 생각없이 고장난 전화를 고치기 위해서 문을 열고 그 자를 방으로 들였어요. 그것이 실수였어요. 뒤늦게 그 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지난밤에 보았던 얼굴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
   영옥의 몸이 또 다시 떨려왔다. 그러자 또 다시 잔에 남겨진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 천천히 드십시요. 독한 술 입니다. "
   " 괜챦아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형사님도 좀 드세요. "
   영옥은 다시 자신의 빈잔에 술을 따랐다. 주 형사도 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독한 양주는 금방 온 몸을 자극하였다.
   " 그 'A' 라는 자는 아마도 그 날 나를 죽이려고 왔던것 같아요. 그러나 나를 죽이지 않았어요. 왜 죽이지 않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어요. 다만 그 자는 .... "
   영옥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렸다.
   주 형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 말씀하시기 곤란한 얘기는 하지 마십시요. "
   주 형사는 그 자를 원망하면서 앞에 놓인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다 털어 넣었다.
   " 그래요. 그 자는 나를 철저히 유린했었요. 그 자는 나의 남편이 출장간 사실도 알고 왔었요.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
   영옥은 마침내 소리내어 오열하기 시작했다. 식탁에 엎드리는 바람에 술병과 잔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 형사는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나 술병과 잔을 집어 들어 다시 식탁위에 올려놓았다.
   영옥의 울음소리는 억지로 참으려고 해서 그런것인지 고르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더 처절하고 슬프게 들렸다. 주 형사는 자신의 의자에 다시 앉았다. 영옥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마음껏 울게 내 버려 두는것이 더 나을듯 싶었다.
   영옥은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다시 영옥이 고개를 든 것은 20 여분 지나서였다. 영옥은 잠시 주 형사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남편이 알게되는 것이 두려웠어요. 다행히도 우리 부부는 별 이상없이 지냈어요. 그리고 'A' 도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았어요. 그런데... "
   영옥은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주 형사는 영옥의 눈동자가 조금씩 풀려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그건 정말이지 우연이었지만 내겐 너무 큰 고통의 시간이었어요. 항공기만 이용하지 않았어도, 아니 여수에 내려가지만 않았어도 다시는 그 자와 만나지 않았을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