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장미(119)

                                                     김형엽

    " 세상이 넓은 것 같은데도 어떻게 보면 참 좁기도 한 거지요. 저희가 조금만 정보를 빨리 알았어도 부인이 그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실은 저희 수사반 일행도 부인이 배를 타고 떠난 다음 날 돌산방죽에 도착 했었습니다. "
   영옥의 풀린 눈이 잠시 반짝거렸다.
   " 우리는 어떤 무리를 미행하면서 그 곳까지 갔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미행한 조직과 'A' 가 접선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 곳까지 가게 되었지요. 그러나 파도와 비바람이 너무 심하여 우리는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그 들 무리는 그 파도와 비바람 속에서도 배를 타고 바다속으로 들어갔지요. 부인. 'A' 와 간 곳이 어딥니까? "
   " 하지도란 섬 이었어요. "
   " 하지도라. 'A' 와 어떤 무리들이 싸우지 않았습니까? "
   영옥은 모든것을 소상히 알고 있는 주 형사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묻는 것 같군요. "
   "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A' 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으면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영옥은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 왜 그러십니까? "
   " 잠깐만 기다리세요. "
   영옥은 비틀거리면서 방으로 향했다. 급히 마신 술에 조금은 취한 것 같았다.
   주 형사는 식탁위에 놓여진 잔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렸다.
   잠시 후 영옥은 조그만 수첩을 손에 들고 방에서 나왔다.
   " 여기 있어요. "
   영옥은 의자에 앉자 곧 수첩을 펼쳐 보이며 주 형사에게 보여주었다.
   " 하지도의 작은 동굴에 있을때 사내가 동굴을 비운 사이 주머니를 살펴 보았어요. "
   주 형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영옥이 건네 준 수첩을 쳐다보았다.
   " 그 'A' 라는 자는 주민등록증과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이름이 달랐어요. 유 상철은 주민등록증의 이름이고 진 달호가 여권의 이름이었어요. "
   주 형사는 짧은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 유 상철은 이미 신원이 밝혀졌으니 진 달호가 본명이군. 진 달호... )
   주 형사는 영옥의 수첩에 적혀진 이름과 생년월일을 자신의 수첩에 적다가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 이 전화번호는 무엇이지요. "
   " 그 자의 수첩에 적혀있던 것인데 어디인지는 모르겠어요. "
   주 형사는 그 전화번호도 자신의 수첩에 적었다.
   " 하지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
   영옥은 잠시 망설이다가 길게 한 숨을 토해내면서 반쯤 남겨진 잔의 술을 마셨다.
   이제 영옥의 얼굴은 거의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눈도 완전히 풀린 상태였다.
   " 너무 많이 드셨는데 이제 그만 하시지요. "
   " 한 잔만 더 하겠어요. "
   주 형사는 어쩔수 없다는 듯이 영옥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 어쩔수 없이 그 자와 동행을 하게 된 나는 꼬박 2 일을 그 섬에 갇혀 있었어요. 그자는 첫날 어디론가 나가서 한참 후 돌아왔는데 무엇인가 가지고 왔어요. "
   주 형사는 직감적으로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 혹시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
   영옥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 그러면 어떻게 생겼는 지는 보았습니까? "
   영옥이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 하얀 가루였어요. 여러개의 작은 비닐 봉지에 나누어져 있었는데 양이 제법 무거웠어요. "
   " 무겁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부인께서... "
   영옥은 다시 잔을 입에 가져갔다. 다시 눈에 눈물이 맺혔다.
   " 그래요. 바로 그 것이었어요. "
   주 형사는 직감적으로 오후에 영옥이 들고갔던 상자을 생각했다.
   " 그렇다면 오늘 가지고 나간것이.... "
   " 맞아요. "
   영옥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주 형사는 분노하며 식탁을 치면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바로 자신이 보고 있는 앞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주 형사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 신고를 하려고도 생각해 보았어요. 하지만... 할 수가 없었어요. 모든것이 두려웠어요. 그 자의 협박도, 또 모든 사실을 알게 될었을 때 남편의 모습도.... "
   " 아무리 그렇더라고 해도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
   영옥은 어쩔수는 없었다고 했지만 자신이 한 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주 형사는 너무나도 허탈하여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의자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는 영옥의 모습만 바라보았다. 영옥은 완전히 흐틀어져 있었다. 술에 취하고 모든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에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화장과 얼룩져 있었다.
   주 형사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길게 한 모금을 빨고 천천히 연기를 허공으로 날렸다.
   " 혹시 그 제과점에서 만났던 여자가 누군지 압니까? "
   " .... 처음 보는 ... 여자였어요. "
   영옥은 울먹이면서도 대답을 했다.
   " 아까 전화를 받는 것 같았었는데 혹시 이름같은 것도 생각이 나지 않나요. "
   " 아. 그래요. 전화를 받았어요. 카운타에서 어떤 이름을 불렀는데... "
   " 부인. 중요한 것 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
   주 형사는 담배를 연거푸 빨면서 영옥을 바라보았다. 영옥은 두 손을 이마에 갖다 놓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 모르겠어요. 생각이 나지 않아요. "
   " 좋습니다. 그건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 그 'A' 라는 자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 언제였습니까? "
   영옥은 잠시 숨을 크게 내 쉬었다. 붉은 빛의 얼굴이 불빛에 반사되면서 마치 잘익은 사과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