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장미(121)

                                                     김형엽

   " 글쎄요. 그 건 아마 불가능할 것 입니다. 오늘 제가 부인을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다시 부인을 찾아오는 일은 하지 않을 것 입니다. 혹시 전화는 올 수 있겠지요. 당분간 부인의 전화를 저희가 도청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수사관을 항상 아파트 근처에 잠복시켜 부인의 신변을 보호 하겠습니다. 부인께서는 평소처럼 그렇게 생활하십시요. "
   영옥은 모든것을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 형사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9 시가 가까와지고 있었다.
   " 너무 늦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협조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면 이리로 전화를 주세요. "
   주 형사는 명함을 꺼내 식탁위에 내려놓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영옥이 식탁에 손을 짚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려하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주 형사는 천천히 다가가서 영옥을 부축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 자. 출입문까지만 부축하겠습니다. 대문을 잠그셔야 하니까요. "
   주 형사는 영옥의 어깨를 감싸면서 천천히 출입문으로 향했다.
   " 남편께서는 늦으시는군요. "
   " 남편은 오지 않아요. 일본에 출장을 갔어요. "
   " 그러셨군요. "
   " 네. 원래는 내일 출발이었는데 회사 사정상 하루가 앞 당겨졌어요. "
   " 그럼 문단속 잘 하셔야지요. "
   주 형사는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어서 문을 닫고 안에서 잘 잠그세요. "
   " 안녕히 가세요. "
   곧 대문은 닫히고 안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주 형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조금전 영옥을 부축하면서 느끼었던 촉감이 아직도 그의 온 몸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현관을 나오자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비가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주 형사는 하늘을 한번 쳐다본 후 손을 벌렸다. 금방 빗방울이 머리와 어깨, 그리고 손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많이 쏟아지는 비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하얀 연기가 어둠속에 뿌리는 빗 속으로 흩어졌다.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전 자신이 빠져 나왔던 아파트 창문으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영옥이었다.
   영옥은 주 형사와 눈이 마주치자 곧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곧 사라졌다.
   주 형사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자신이 주차 해 놓은 차가 보였다.
   조금씩 내리는 비에도 어느 새 주 형사의 옷은 젖여가고 있었다.
   차에 시동이 걸리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차는 곧 아파트단지를 빠져나갔다.
   영옥은 침대에 엎드린 채 울고 있었다. 모든것이 다 끝난 것 같은 허탈감이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한 쪽 구석으로는 모든것을 다 털어났다는 생각에 후련함도 있었다.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영옥은 얼른 몸을 일으키더니 욕실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 우욱 --- "
   노폐물이 입에서 쏟아져 나와 변기통으로 들어갔다. 서너번을 꺽꺽 거리더니 배를 움켜 잡으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영옥은 샤워기를 돌렸다. 변기통에 물 내려가는 소리와 동시에 샤워기에서도 차거운 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영옥의 온 몸에 쏟아졌다.
   영옥은 쏟아지는 물을 맞으면서 옷을 벗어 던졌다. 중심이 잘 잡히지 않아 비틀거렸지만 곧 알몸이 되었다. 가슴밑으로부터 무엇인지 모를 시원함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편안한 자세로 두 다리를 뻗어 누웠다.
   따뜻한 물이 조금씩 욕탕을 채우기 시작했고 그녀는 두 눈을 감은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잠이 들어가고 있었다. 물이 욕탕을 넘쳐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채 욕실 밖으로 내민 얼굴만 가끔씩 속이 쓰리진 인상을 지었다.

    서울 시내는 퇴근길이 넘으면서 곳곳에서 밀려 나온 차들로 도로를 꽉 메웠다.
   영동대교 위에는 양쪽 도로가 거의 차량으로 꽉 메워져 오가는 차들이 모두 거북이 운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교 밑으로 흐르는 한강의 물줄기는 대교위에서의 북새통 따위는 아랑곳 없이 잔잔하기 그지 없었다.
   강남의 대 도시는 어둠이 깔리면서 수많은 오색등이 거리를 밝히면서 퇴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다른 술집들의 간판보다도 크기나 모양이 특별한 것이 있었다. "붉은 장미" 의 간판이었는데 그건 누가 보아도 룸 싸롱이라는 알 수 있었다. 룸 싸롱 앞에는 두 명의 웨이터가 좌우로 정복을 한채 서 있으면서 들어서는 손님이 있으면 허리를 90 도 꺽으면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모범택시 한 대가 천천히 들어섰다.
   모범택시는 정확히 "붉은 장미" 의 술집 앞에 멈추었다. 택시가 서고 잠시 후 뒷문으로 한 사내가 내렸다. 중절모를 깊숙히 눌러 쓰고 검은 썬글라스에 쓰고 있어 사내의 표정이 읽어지지 않았다. 또 사내의 손에는 검정색 가방을 들고 있었다.
   웨이터들은 사내의 움직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곧 택시는 도로로 빠져나갔다.
   사내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붉은 장미"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웨이터들은 직감적으로 손님이라고 느끼고 허리를 굽히며 입구로 들어서는 사내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 어서오십시요. "
   사내는 한 손으로 중절모를 매만지면서 좌우의 웨이터를 바라보았다.
   " 이 곳의 사장이 장 조영씨 맞나? "
   웨이터들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중 오른쪽에 있던 웨이터가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사내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