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장미(123)

                                                     김형엽

   " 좋습니다. 평일이라 차가 막히지 않을 것 같으니 가겠습니다. "
   " 고맙습니다. 르네상스 호텔앞에서 사람을 하나 더 태울 것입니다. "
   " 예. 다 왔습니다. 저 앞의 사거리에서 우회전 하면 바로 호텔입니다. 저.. 요금은 어느정도... "
   기사가 말끝을 흐리자 피카소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서 한웅큼을 뽑아냈다.
   " 이정도면 되겠습니까? "
   기사는 뒤에서 사내가 건네주는 돈을 한 손으로 받았다. 대략 뭉치로 보아서 30 만원은 되 보였다. "
   " 어이쿠. 이렇게나 많이 안 주셔도 되는데... "
   기사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모퉁이에서 차를 돌렸다.
   호텔앞에서 한 여인이 배냥처럼 생긴 가방을 손에 쥐고 서 있었다. 바로 송 나영이였다.
   " 저기 서 있는 여자를 좀 태웁시다. "
   " 알겠습니다. "
   택시가 송 나영 앞에 멈추자 피카소는 뒤문을 열어주었다.
   " 어서 타. "
   송 나영은 피카소를 확인하자 미소를 지으며 차에 올라탔다.
   " 자. 이제 갑시다. "
   " 예. "
   기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돈을 챙기고 차를 몰았다.
   " 어디로 가요. "
   나영은 의아스런 표정으로 피카소를 바라보았다.
   " 고향으로. "
   " 고향이라니요? "
   " 가 보면 알아. 가방은 잘 챙겼지. "
   나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내에게 바싹 몸을 기대었다. 피카소는 오른팔을 들어 나영을 감싸 안았다.
   나영은 사내의 성격을 나름데로 알기 시작했다. 사내가 자기가 하는일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말라고 했던 말을 가슴 깊이 되새기면서 절대로 같은 질문을 두번씩 하지않았다. 무작정 사내를 따라 식당에 얘기도 하지않고 나온 그녀로서는 지금 곁에 있는 이 사내외에는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영은 사내가 무슨일을 하던지 또 어디를 가던지 자신만 데리고 간다면 그것으로 모든것을 만족하기로 했다. 나영은 사내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늘 식당안에서 움직이던 그녀로서는 오늘 많은 여행을 한 셈이었다. 그리고 모두 처음 밟아보는 땅, 처음으로 들어간 레스토랑 및 호텔, 모든것이 생소하였기에 그 만큼 긴장감도 컸던 그녀였다.
   " 잠 좀 잤어. "
   " 아니요. "
   " 왜? "
   " 그런 호텔은 처음이였어요. 너무 으리으리해서 방안 구경하고 그리고 창 밖으로 서울 구경도 하느라고 정신 없었어요. "
   " 그랬어. "
   " 그리고 욕실도 너무 멋있어서 목욕도 또 했어요. 이상한 크림도 섞어가면서. 내몸에서 향기나지 않았요. "
   나영은 사내에게 몸을 바싹 밀착시켰다.
   " 흠. 그래 좋은 향기가 나는군. "
   피카소는 나영에게 나즈막하게 얘기하면서 나영의 등을 끌어안았다.
   나영은 고개를 들어 사내를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사내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택시는 도심을 빠져나오면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차가 구리 신갈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금방 속도계가 100 키로를 넘었다. 조금씩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 한바탕 세차게 쏟아 부겠군. "
   기사는 혼자 중얼거리며 백밀러를 통해 뒤좌석의 사내와 여자를 보았다.
   사내는 처음부터 검은색 썬글라스를 끼고 있었기에 눈을 떴는지 안떴는지 알수가 없었지만 여자는 사내의 품에 안긴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두운 택시안에서 유난히 여자의 다리가 눈부시게 빛났다. 기사는 백밀러를 돌려 뒷좌석의 신경을 끄기로 작정하고 앞만 열심히 보고 속력을 냈다. 평일이라고는 하지만 비 때문에 길이 미끄러우면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르니까 느슨할 때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려는 마음이었다. 차가 속력을 내자 나영은 더욱 사내에게 파고 들었다. 어두운 택시안에는 가끔 반대편에서 오는 차의 불빛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갈 뿐 뒷좌석에서 무슨일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차는 어느새 이천과 여주를 지나서 곧 영동고속도로로 진입을 얼마 남기지 않았다.
   나영은 사내의 품 속에서 뒤척이다가 이내 잠이 들었는지 곧은 숨소리를 내 쉬면서 사내의 하반신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움직이지 않았고 사내는 그런 나영의 등을 토닥 거리면서 어둠이 깔리는 밖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비방울이 굵어지면서 온 대지는 축축히 젖어들고 있었다.
   이 희진은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과 호프집에서 맥주도 마시고 노래방에 들어가 마이크를 잡고 열심히 소리도 지르고 난 후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가고 있는 중 이었다.
   우산을 쓰기는 했지만 작고 바람까지 불어 겨우 상체만 막을뿐 짧은 스커트 밑으로 늘씬하게 뻗은 다리에는 온통 비로 젖어 있었다. 어둠속에서 희진이 입고 있는 흰색의 원피스는 유난히 눈에 띄었고 우산속에 숨겨진 얼굴 또한 눈부시게 하얀 계란형의 모습으로 이지적인 느낌을 주었다. 희진은 시계를 바라보면 발걸음을 재촉했다.
   ( 10 시가 넘었네. 어머니가 걱정 하시겠네. )
   희진의 걸음은 더 빨라졌다. 희진이 살고 있는 집은 시내에서 좀 외진곳에 떨어져 있어서 마을버스가 30 분 간격으로 운행을 하고는 있었지만 밤 늦은 시간에는 그나마 운행시간도 잘 지켜지지 않았기에 5 분쯤 기다리다 버스를 포기하고 걸어 가기로 작정하였다. 도로의 좌우로는 파란 벼들이 바람에 휘날리었고 가끔씩 개구리의 울음 소리만 들리뿐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희진은 무섭거나 두려움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벌써 이 곳에서 10 여년을 넘게 살았고 또 무수히 걸어다녔던 길이었기에 이렇게 우충충한 날씨인데도 공포심은 느끼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때마다 하이힐이 시멘트 도로와 맞 닿으며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비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조화를 맞추며 깊은 정적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차 소리가 들리면서 희미하게 불빛이 두개 보였다.
   ( 이제 버스가 나가는 군. 걸어오기를 잘 했어. 이제 다 왔어. )
   마을버스는 빠르지 않은 속도로 희진과 교차하면서 시내쪽으로 빠져 나갔고 희진은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우산을 들어 올리며 마을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몇채의 집들이 희미한 불빛을 반사시키며 쏟아지는 비 속에서 모습을 들어내었다.
   ( 다 왔군. 어서 가자. )
   희진은 어렴풋이 마을의 집들이 보이자 긴장이 풀리면서도 발걸음에는 힘에 솟았다.
   그 때 차소리가 나면서 또 하나의 불빛이 보였다. 승용차가 한 대 마을쪽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희진은 그저 차 한대가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차를 지나쳤다. 그런데 갑자기 승용차가 멈추면서 앞자리에서 사내가 내렸다.
   희진은 갑작스런 사태에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느새 자신의 복부에 커다란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사내의 주먹이 희진의 복부에 가 있었다.
   " 아 -- "
   짧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면서 희진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면서 흔들거리자 사내가 몸을 부축하면서 뒤 좌석으로 옮겼다. 곧이어 뒤 좌석의 문이 열리더니 또 다른 사내가 희진을 붙잡으며 차에 실었다. 차는 곧 시내쪽으로 빠져나갔다. 도로에는 희진이 쓰고 있던 우산만이 바람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뒤좌석에 앉아 있던 사내는 희진이 매고 있던 가방을 열어 거꾸로 들었다. 그러자 가방속에 내용물이 모두 사내의 무릎위에 쏟아졌다. 손수건을 비롯하여 책과 조그만 화장품병과 함께 작은 지갑이 전부였다. 사내는 지갑을 열어 주민등록증을 꺼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