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장미(23)
김형엽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 작업복을 살펴 보았다. 그건 녹색의 무늬가
섞여있는 군복이었다. 그녀는 사내가 대체 무슨일을 하려고 이런 곳까지 왔는지
불안하면서도 궁금해 졌다. 사내는 바지를 벗어 버리더니 곧 군복으로 갈아 입었다.
" 배고프지 않아. "
사내가 그녀에게 다가섰다.
" ...... "
" 조금만 기다려. 내가 먹을 것을 구해 올 테니까. "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을 그대로 둔채 사내가 동굴 입구에 나무가지를 조금 밀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다시 동굴 입구를 막아 버렸다.
사내가 나간 후 조금 지나 그녀가 일어섰다. 동굴 입구로 가서 나무가지를 밀어
보았다. 그러나 쉽게 밀리지 않았다. 나무가지들이 덩굴로 묶여 있어서 그녀의 힘으로는
흔들거리기만 할 뿐 밀려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포기하고 물이 고여있는 호수로 갔다. 손을 물에 집어 넣어 물을 묻혔다.
물은 상당히 차거웠다. 그녀는 물 묻은 손으로 이마며 얼굴에 물을 묻혔다. 더위가
조금은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이 사내의 가방과 벗어놓은
옷가지로 향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사내의 가방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그러나 그 가방을 열지는 못했다. 이번에 사내의 상의를 집어 들고 안 주머니를
살펴 보았다. 지갑의 촉감이 느껴졌다. 살짝 주머니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지갑을
꺼내었다. 지갑을 열자 오른쪽에는 만원권의 지폐와 수표들이 가득했다. 오른쪽으로
주민등록증이 보였다. 그녀는 유심히 살펴 보았다.
" 유 상철..... 57 년 4 월 14 일생.... "
그녀는 이름과 생년월일을 숙지하고 나서 다시 지갑을 원상태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다가 반대편 주머니에서 수첩 같은것이 있어 꺼내 보았다. 그건
여권과 작은 메모수첩이었다. 그녀가 여권을 펼치자 거기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
" 진 달호... 이 여권의 사진과 주민등록증의 사진은 똑같은데..... "
그녀는 여권의 이름이 진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수첩을 펼쳤다.
그러나 수첩에는 아무런 글씨도 써있지 않았다. 이름도 없이 전화번호만 하나 적혀 있었다.
그녀는 자기의 가방을 열어 펜을 꺼내 그 전화번호를 자기의 수첩에 적었다.
그리고나서 사내의 옷을 다시 제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겼다가 다시
내쉬면서 물가로 갔다. 두 손으로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셨다. 갈증이 한꺼번에
가시는 것 같았다. 사내만 없었다면 물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멍한 상태로 바닥을 쳐다보았다.
(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나야 한다. 이런 무인도 같은 섬에서 죽는다면 그건
정말 너무도 허무할 뿐아니라 이런 곳에서는 시체도 발견되지 않을거야... 그래.
살아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해.... )
그녀는 자기 스스로를 위하고 안정 시켰다. 그리고는 남편 조 봉석의 얼굴을 그렸다.
어느 새 눈물이 맺혀 뺨위로 흘러 내렸다. 무릎을 포개고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조금씩 들썩 거렸다.
얼마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시선을 동굴 입구로 가져갔다. 이윽고 나무가지가 조금 밀려 나는듯 하더니만
사내가 들어섰다. 사내의 한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온 몸이
전부 젖어 있었다. 사내가 동굴 입구를 막고서 그녀에게 다가서더니 봉지를 내려 놓았다.
" 그것으로 적당히 요기를 해 두어. "
그녀는 사내가 온통 젖은 것으로 보아 밖에 비가 내릴거라고 생각 했다.
" 비가 오면 내일 배가 올 수 없쟎아요. "
" 걱정하지마. 많이 내리는 비가 아니니까 배가 움직이는데는 지장이 없어. "
사내의 말을 듣고도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사내는 젖은 옷을 모두 벗어 버렸다.
순식간에 알몸이 되자 그녀는 시선을 땅바닥으로 내렸다. 사내는 곧 바로 호수로
뛰어 들었다. 그녀는 초조해 졌다. 언제든지 사내는 자기에게 달려들수 있다고
생각이 들자 점점 불안한 마음이 그녀의 가슴을 조여 왔다.
" 그렇게 앉아 있지만 말고 더우면 이리 들어와. "
그녀는 사내의 말이 끝나자 마자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을 하면서도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사내가 호수에서 걸어 나왔다.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서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후퇴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그녀의 앞에 사내가 버티어 섰다. 위로 힘껏 솟아오른 사내의
그것이 그녀의 얼굴앞에 나타났다. 반사적으로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사내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 나도 난폭하게 당신을 다루고 싶지 않아. "
" ....... "
" 어차피 오늘밤엔 같이 지내야 하쟎아. 나를 화나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어. "
그건 부탁과 협박이 뒤섞인 어조였다. 사내가 다시 돌아서서 호수에 몸을 담갔다.
그녀는 슬픔이 가슴 밑바닥에서 부터 올라오고 있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사내가
갖다놓은 봉지로 눈이 갔다. 말린 고기가 서너마리 들어 있었다. 아마도 섬
주민들이 말리려고 보관중인 고기를 훔쳐 온것 같았다.
( 이걸 어떻게 먹을려고 가져왔지. )
그녀의 망설이는 표정을 본 사내가 물에서 나와 상자속에서 무엇인가 꺼내왔다.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그것은 좌우로 흔들렸다. 사내가 꺼낸것은 뜻밖에도 버너였다.
사내는 곧 불을 지피더니 쇠고창이에 고기를 매달았다. 그녀는 사내의 그런 동작을
보면서 많이 해 보던 솜씨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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