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장미(36)
김형엽
봉석이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말을 건네기가 어려웠다.
다른 거래처의 사람들과 정신없이 계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머뭇거리다가
다시 소파로 가서 앉아 다른 잡지책을 펼쳤다.
그렇게 또 한시간이 흘러 갔다. 이제 거래처의 사람들도 10 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 그래.. 이왕지사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마지막 사람 끝날때 까지 기다려 보자. )
5 시가 되어서야 그녀는 마지막 거래처 사람에게 수표를 건네주고는 허리를
제끼고 커다랗게 기지개를 폈다. 그러다 소파에 앉아 있는 봉석을 발견하고는
얼른 손으로 벌어진 입을 막았다. 봉석이 멋쩍게 웃으며 창구 앞으로 다가갔다.
" 누구시죠. "
봉석은 여자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마음 한 구석으로 서운하게 생각했다.
" 가야무역에서 왔는데 아까 금액이 틀린다고 해서 기다리고 하지 않았습니까. "
" 어머... 그렇지요. "
그제저야 그녀는 가야무역의 서류를 책상에 그대로 넣어 둔것이 생각났다.
" 어머 어쩌지요. 미안해서.... "
" 괜챦으니 어서 확인을 해 주십시요. "
그녀는 급히 서랍에서 가야무역의 서류를 꺼냈다.
" 정말 죄송합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요. "
그녀는 인사를 꾸벅하고 일어나서 창구 밖으로 나가 담당과장에게로 갔다.
봉석은 또 다시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담당과장과 그녀는 연신 캐비넷에서
여러개의 화일을 꺼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녀가 다시 창구안으로 들어선 것은 꼭 한시간이 지난 6 시였다. 봉석이 창구앞으로
다가서려고 했지만 그녀가 서류와 수표를 들고 창구밖으로 나와 봉석에게 다가왔다.
" 미안해서 어떡하지요. 저희 직원이 육자를 영으로 착각을 하여 육백만원의 착오가
생겼습니다. 내일 다시 수표를 발행하여 드리며 안 되겠습니까 ? "
봉석은 그녀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그녀의 미모에 또 다시 감탄을 했다.
"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지요. 내일 다시 받으로 오지요. 몇시쯤 오면 되나요. "
" 오전 10 시... 아니요. 제가 오늘 너무 기다리게 했으니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갚을 겸 점심시간이 어떻겠습니까 ? "
봉석은 그녀의 뜻밖의 말에 놀라며 속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 좋습니다. 그럼 내일 12 시 정각에 이리로 오겠습니다. "
" 아닙니다.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구요 1 층에서 전화를 주세요. "
그러면서 그녀는 메모지에다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서 봉석에게 건네 주었다.
봉석은 그녀의 메모 용지를 받아 가볍게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가 준 메모 용지를 펼쳐 보았다.
메모 용지에는 여자 특유의 글씨체로 "유 영옥" 이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 유 영옥.. 그래 이건 하늘이 준 기회다.... 내일 12 시... )
봉석은 뛰는 가슴을 억제하지 못하며 좋아 했다.
드디어 그 다음날.
봉석은 그녀의 회사에 정확히 5 분전 12 시에 도착했다. 잿빛 양복에 환한
색깔의 넥타이를 단정히 맨 모습이 누가봐도 깔끔하게 보였다. 봉석은 곧
공중전화앞으로 가서 전화번호를 천천히 눌렸다. 신호음이 두번 울리고 나자
상대편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 안녕하십니까. 경리과의 유 영옥입니다. "
순간 봉석은 숨이 막혀 말이 안 나올것 같은 착각을 느꼈지만 조그맣게 헛기침을 한후
입을 열었다.
" 안녕하세요. 저 가야무역에서 온 .... "
봉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했다.
" 어머. 오셨군요. 일층인가요. "
" 네. "
" 기다리세요. 지금 내려 가겠습니다. "
그녀가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지만 봉석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잠시후 그들은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렇게 처음 만난것을
계기로 봉석은 끈질기게 그녀에게 접근을 했다. 매일같이 퇴근 후
안산에서 서울로 그녀를 만나러 다녔다.
그렇게 육개월간의 데이트 끝에 그 해 겨울 봉석은 그녀의 마음을 허물기
시작했고 그녀도 봉석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망설이지 않고 양 부모들에게 인사를
하고 드디어 금년 3 월에 결혼을 했다. 봉석은 그간 자기가 모아 놓았던 돈과 회사에서
일부를 융자 받아 지금 살고 있는 27 평의 상아 아파트를 그들의 보금자리로 마련하고
여수에 계신 어머님을 모시려고 했지만 끝내 봉석의 어머니는 여수에서 여생을
보낼것을 고집해 둘 만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었다.
( 그런데.. 이제 신혼생활 4 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을 당하다니... )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녀는 누워있는 사내를
바라 보았다. 사내는 팬티만 걸친채 작게 코를 골고 있었다.
( 나쁜 자식... 저 놈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
그녀는 한숨을 내 쉬며 다시 하늘을 바라 보았다. 비는 이제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비가 그친 것을 보고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졌다. 밖으로 나가서 이번에는 산으로
오르지 않고 마을 반대편 쪽으로 내려 갔다. 마을쪽으로는 온통 바위였지만
반대편으로는 하얀 모래사장으로 이루워 졌다. 그녀는 절뚝거리며 백사장을 걸었다.
모래가 밟히는 촉감이 그녀의 맨발을 간지럽혔다. 물 가까이 가자 파도에 밀린 물이
발에 와서 닿았다. 시원한 느낌이 발끝에서 부터 가슴까지 파고 들었다.
바다를 바라 보았다.
멀리에서는 아직도 파도가 거세었다.
( 저 놈의 파도만 가라 앉아도 배가 움직일 수 있을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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