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18문학상 공모
2013년 5·18문학상 공모
5·18기념재단은 민주·인권·생명·평화·대동세상을 열망하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모두가 한 마음으로 꽃을 피워 올린 '오월정신'의 아름다움을 기리며 담아내는
참신하고 의욕적인 문학작품을 공모합니다.
특정한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주제로 응모한 작품도 환영합니다.
많은 응모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제 : 자유이되 오월정신을 추구하는 작품
공모부문 : 시·소설·동화
자격 : 미등단 신인(해당 부문 기성문인은 장르가 다를 경우 '미등단 신인'으로 인정)
접수기간 : 2013. 03. 04 ~ 2013. 04. 12
접수방법 : 카페 또는 우편접수 (둘 중 택일)
1) 카페를 통해 접수하실 분께서는 3월 5일부터 접수
www.518.org -> 상단메뉴 참여마당 -> 5·18문학상 공모 신청을 통해 응모
바로가기
http://www.518.org/ease/application.es?mid=a10511000000&list_no=12
2) 우편접수 : 3월 4일부터 접수
(우502-260)
광주광역시 서구 내방로 152(쌍촌동) 1층 5·18기념재단 5·18문학상 담당자 앞
=> 마감일 도착분에 한함
문의 교육문화팀 문학상 담당자 박지선 062-360-0534로 연락부탁드리겠습니다 :)
** 2012년 수상작
[시] 오월 외 5편 이병일
오월
누이야, 혁명을 절규나 침묵으로 해석하지 말자 군인들 팔뚝에 돋은 힘줄이 도드라진 오월, 죽음을 탁발하는 누이들의 행렬이 길을 메웠다 그때 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무릎은 깨져 피가 별처럼 고이고, 군화는 내 머리통을 밟고 지나가는데
구름이 해를 가리던 낮에 큰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목적 없이 와불이 되었다 돌멩이와 풀은 어둠과 햇빛과 상관없이 어둑어둑해지고 죽음은 살덩어리로 발견되었다 커튼이 쳐진 방 안의 귀머거리들은 큰 죽음을 모른다 작은 죽음도 잘 모른다
지평선의 목구멍에 걸린 해는 극락강 수면에 일몰의 저녁을 토해낸다, 알 수 없는 곡소리가 들리고, 구불구불한 강을 따라 노 젓는 시간만이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이름 없는 무덤을 찾아간다 큰 느티나무 그늘 아래, 작은 팽나무 아래의 새들이 퍼덕거리지 않는다 군인들은 계속 행군 중이고, 저녁의 낯이 새파랗게 질려간다
그러나 더 이상 밀려가는 벼랑이 없는 나는, 뱀눈그늘나비의 춤을 빌려와서 꿈을 꾸고 있는 세상이 있다고 믿기로 했다 내 몸에서 그림자가 엎질러진 날이기도 했고 꿈을 벗으려고 하면 총 맞은 자리에서 묽은 피가 왈칵 쏟아지는 오월이기도 했다.
공포의 축제
해와 달이 겹쳐질 때 공포가 온다
공포는 제 몸을 찢어 적막을 빚는다 적막은 북극곰의 꿈처럼 사납고, 뒤통수도 없이 아가리만 빛나고, 불현듯 핥을 듯 말듯 입맛을 다시는 영(靈)이 되었다
저승사자의 삿갓에 묻은 어둠이 아슬아슬 녹아내리는 묽은 한낮, 혼자 밥 먹는 식탁의 접시는 입을 적하니 벌리고 있다――허기와 허영으로 가득 찬 터널의 세계가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얼굴이 꽃처럼 찢어지는 불행을 즐기자 까마득히 보이지 않는 비명을 찾아나서는 보물찾기 여행을 하자 전생과 후생 사이의 악몽으로 잠시 널브러져 있자 작둣날 위에 올라 황홀하게 홀리는 춤의 세계로 떠나도 무방하다고 해두자
여전히 해는 없고 달도 없다 무심히 옆구리를 찌르고 가는 공포가 칼날만큼 차갑다 눈앞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고압전류의 더운 숨을 엿본 적이 있다――사육장에서 나온 똥개들이 양수 터진 흑염소의 피비린내를 맡았는지, 송곳니가 곤두서게 되었다 그렁그렁한 눈이 먼데를 더듬는 흑염소, 이승 한켠 바라보다가 저승으로 간다 맨드라미꽃밭 불타듯 버글버글 피는 저 불한당의 주린 입들에서 괴성이 쏟아진다 그날이후 나는 만져지지 않는 기억들을 공포의 축제라고 불렀다 맑은 날이었지만 염소에 뜯긴 풀잎들도 다시 자라나는 생의 기미를 엿보게 되었다
마그마
총성을 결국 음악으로 듣는다,
나는 총알의 까맣고 붉은 흔적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은 한 가지 사건을 덮으려
모든 것을 속였다 군인들은 우리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적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기 위해
꼿꼿한 각오와 거룩한 혁명을 위해
차라리 목숨을 내던지겠다는 생각에 젖었으나
조금도 흥분하지 않았다
적에게 눈멀어 있던 날들이 지나가자
나는 죽어 있음이 살아 있음으로 여기게 되었다
두 눈이 들고양이의 푸른 눈동자로 빛났지만
도망가는 군인들이 초록 거품을 게워낼까봐
멱살을 잡던 숨이 지쳐 꽃잠에 빠져 들까봐
혹여 無等山이
내 이름을 불러보지만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까봐
오래 된 미래 속에서
나는 뿔을 세우고 돌진하는 야크의 꿈을 빚었다
그 꿈으로 당돌하고 황홀한 죽음을 맛봐야 했다
그때 내 모든 신경의 열기가 마그마로 분출될 수 있다면
꺼멓게 짓밟히고 있는 머리통을 덮어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적과 싸우다 나오는 길에
서로가 흘린 핏자국을 죽어라 쳐다보고
이성을 되찾기 전,
몸 아픈 건물들이 폭삭 주저앉아버리는
봄날을 기억하지 말자
그날엔 살고자 하면 죽었고, 죽고자 해도 죽었다
사랑과 자유조차 몸 밖으로 도망가는 하루였다
그때 나는 들끓는 죄를 가진 마그마로 굳어버렸다
혁명의 축제
우리는 별들의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누군가 새벽의 밀고를 자행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탱크 위의 군인들이 우리를 정물화로 여겼다면, 그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하지만 일요일의 공화국은 잠수함 속만큼 팽팽하고, 우리가 사수한 시청 위의 옥상은 전투 경험 없는 박명의 별로 가득합니다. 어둠을 젖은 눈으로 응시하며 우리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투쟁과 혁명의 내부 속으로 발사한 총알의 머리통 짜개는 소리를 듣습니다. 검은 수염이 하얗게 변해가듯 혁명은 나를 두고 멀어져갑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우리들은 혁과 명의 신열을 음미하네 군화발자국에 입맞춤하러 나온 우리들의 식모, 누이들은 안개에 묻어 빛나는 사랑과 공포에 눌려 흙의 얼굴로 찢어지네
꽃의 군인들이 주둔하는 곳에서 저항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검은 눈을 뜨고 흰 뺨 위로 얼룩지는 기면 소리를 듣습니다. 저 광주천 위에 뜬 별들이 우리들의 눈물이 건조된 것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나를 적출하려는 꽃의 군화들을 격파하기 위해, 나는 고백하는 굴복으로 즐거워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망치를 들고 기꺼이, 이 혁명의 축제 속에서 나를 견디기 위해 나를 던집니다. 혼자 듣는 죽음은 내 몸속에서 조용한 패배의 운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절명의 시제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를 위해 태어나는 절명이 있다는 걸 아는지?
오늘도 누군가는 추락을 위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영원한 죽음을 위해
초대장도 없이 단 한번 뿐인 청혼을 하려
드넓은 허무와 접한 시간 속으로 모여들었다
호기심의 눈밭에는 발자국들이 얼음의 冠이 되어 빛나지만
아직도 운명을 점치는 태양의 눈동자는 철거되지 않았다는 거
기민한 자는 낭가파르바트의 바람이 견고한 화폭인 줄 알았으나
오로지 새의 이름으로만 통행이 시작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한 계절을 열고 다시 한 계절을 닫아가는 시간
발이 딛는 얼음의 사금파리들이 갈증의 몸을 깊이 찌르고,
절명은 우연히 별처럼 달고 다닌다는
심장 속으로 방문했다
발목으로 산의 기운을 모으는 절박한 세르파* 족속의 새는
그해 여름, 아주 잠깐 최후의 추억을 맛보기 위하여
절명의 시제에게 청혼 하였다지
칼날 능선 맨 위쪽에 있거나 아래쪽에 있는
새의 몸 밖 벼랑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누구도 답해주지 않는 함구의 풍경으로
최초의 울음을 찾아주는 기미의 순응자를 유혹하고 있다
오늘도 녹슨 나침반이 떨리듯 다시 얼어버리는 새의 눈꺼풀은
번쩍번쩍 빛나는 노을 속에서
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곳을 생각에 잠긴 척 보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차디찬 고요를 빳빳하게 간직하고 있다
* 산악인 고미영의 별명.
저승으로 가는 유서
이 세상 비밀을 탐지하는 꽃이 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전,
과거와 미래의 진실이 내려앉는다
오월의 햇빛이 가시지 않는 탓이다
베레모를 쓴 조용한 봄이 와서 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고 했다 푸른 제복을 입은 사나이들이 지프차에 싣고 가 강간을 했고 참호 속에 묻었다고 했다 그때 은사시나무 잎에 이는 바람이 그걸 보고 은박지처럼 떨었다고 했다 급기야 박새와 곤죽박이는 비명과 함께 똥오줌을 지렸고, 낮달은 눈을 질끈 감았다고 했다
나는 큰 길의 햇빛 속에서 죽음을 배웠다 누이의 증오는 적을 맞아 싸우라는 자명한 진리가 되지 못했다 이젠 뼈와 살이 으스러진 혁명은 모가지 툭툭 꺾는 동백나무 숲에만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죽음이 독버섯처럼 숨어 자라는 광주에서
피안을 찾는 무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인내와 용기는 죄 없는 말만 골라서
적에게 불굴의 고투가 담긴 밀지를 보냈겠지만
땅에 넘어진 자는 그 땅을 짚고 일어서지 못했다
백골이 된 나는 영원히 몸이 피로할 것이기에
군용 트럭이 보이는 네거리에서
호화로운 화관을 짓는 민들레꽃이 되었다
오월의 햇빛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분명한 사건들을 기록했다
그걸 저승으로 가는 유서로 사용하게 되었다
2012년 문학상 수상자(시부문)
이름: 이병일
1981년 전북 진안출생
2007년 계간 《문학수첩》시부문 신인상과 2010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수상소감문
찔레꽃그늘에 앉아서 나를 솎아내고, 앵두나무그늘 접어서 나를 섞어보고, 나는 나를 방정식으로 풀어보듯, 그렇게 하염없이 앉아서 초록이파리가 빽빽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쓰는 시가 허구의 세계지만 그 안에는 허황되고도 아름다운 것들이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향 진안에 내려가서 부족한 일손을 돕다가 앞 산 넘어온 비를 바로 마중 나가는 뒷산의 그림자와 젖은 빗방울이 발밑의 묵묵한 목숨들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 작은 날숨들이 만들어낸 오월의 들녘 속에서 5.18문학상의 수상소식을 들었습니다.
작년 시월에 사내아이를 얻었습니다. 가장으로서 아이와 아내에게 좋은 선물 하나 해줄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이는 지금 말문을 트기 위해 옹알이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 잘 합니다. 어쩌면 저는 지금 시에게 말문을 트기 위해, 시에게 가기 위한 배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세상에 나와서 호기심을 갖듯이 그런 눈빛으로 사물들에게 사랑의 말을 걸어볼까 합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의 아내 이소연과 아들 이서진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세상의 여리고 작은 사물들의 비애를 꿰뚫어보는, 그런 촉이 예민한 시인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설] 최면치료사 박상혁
최면치료사
나치의 생체실험 중 최면에 관한 이야기이다. 최면을 걸기 전에 피실험자에게 지금 하는 실험은 동맥을 절단한 후 인간이 얼마 만에 죽는지 연구하는 것이라고 알렸다. 그리고 최면을 건 후 동맥을 잘랐다고 거짓말을 했고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처럼 물방울 소리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실제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당신 앞에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문이 열리고 당신은 안으로 들어갑니다. 심호흡을 하고 공기를 맡아봅니다. 은은하고 기분 좋은 향기가 가득 합니다.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엘리베이터의 1층 버튼을 누릅니다. 10층에서 1층으로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갑니다. 1층은 아주 따뜻한 곳입니다. 어둠은 구름처럼 당신을 포근하게 감싸줄 것입니다. 이제 불이 들어오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빨간 불이 천천히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봅니다. 몸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9층을 지나고 있습니다.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8층을 지나고 있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점점 더 퍼지고 있습니다. 7층에 도착합니다. 긴장이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온몸에 있는 근육은 완전히 이완되었습니다. 6층, 5층을 지나고 있습니다. 깊이, 더 깊이 가라앉습니다. 2층입니다. 이제 당신은 더 할 수 없이 편안합니다.
당신은 혼자이며 아무도 당신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당신에게 가장 평화로운 장소입니다. 따뜻한 물이 발밑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어깨 위에 놓인 당신의 짐을 내려놓습니다. 당신은 너무나 홀가분해서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10층에 올라오면 의식을 찾게 되고 당신은 편한 기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활력이 넘치고 모든 걱정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제 엘리베이터에 오릅니다.”
처음에 김씨는 천수의 말에 반신반의했다. 최면치료. 생소한 것이기도 했고 그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천수를 통해서 행해진다는 것이 도무지 신뢰가 가질 않았다. 천수가 굿 역시 일종의 최면요법이라고, 특별한 기술 없이도 누구나 가능하다고 설명한 후에도 김씨는 미심쩍었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는 곧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말 그대로 넋이 나간 상태에서 무엇을 치료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 때문에 김씨는 눈감고 자신에게 집중해보라는 천수의 말에 그냥 웃기만 했다.
천수는 책에서 본 몇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실 끝에 동전을 매달고 움직이거나 촛불을 들여다보게 했지만 의심 많은 김씨에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는 이완최면유도를 시작했다. 단조로운 목소리로 오랫동안 말하자 김씨는 잠에 빠지듯 마침내 최면에 걸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완전히 10층에 도착하자 김씨는 아주 달콤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두 시간 만에 일어난다. 눈을 뜬 김씨는 너무 좋은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천수 자신도 조금 놀란다. 실험적으로 책에 나온 예문을 짜깁기하여 만들어낸 유도술이 어머니에게 나름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며칠 간, 단조롭지만 딱딱하지 않게 말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기쁨과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천수를 들뜨게 한다.
“기분이 어때?”
“글쎄다. 아주 좋아. 뭔가 후련하기도 하고. 기억나진 않지만 너무 좋은 꿈이었다.”
“그건 꿈이 아니라 바로 최면이에요.”
천수는 신나 하며 말한다. 하지만 김씨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눈치다. 대신 천수의 밝은 모습이 나쁘지 않을 뿐이다.
천수는 김씨에게 조금 더 공부해서 지병인 관절염을 치료해주겠다고 말한다. 김씨는 별 기대는 없었지만 기특한 마음에 천수의 어깨를 쓰다듬어 준다. 낮에 너무 곤하게 잤던지 김씨는 밤이 되어도 좀체 잘 수가 없다.
김씨는 아홉 시 반에 맞춰 간신히 밖으로 나선다. 전날 초저녁에 깨어난 후로 새벽 동이 틀 때까지 뒤척였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이들 생각에 김씨의 걸음이 바쁘다. 겨울철엔 시장에서 유통되는 물량이 많지 않아 김씨처럼 날품을 파는 사람들은 설 대목 전까지 실직상태나 다름없다. 할인매장이나 대형 슈퍼가 들어선 후로 철에 상관없이 깔끔하게 포장된 야채를 살 수 있어서 가게를 두고 도매를 겸하던 사람들도 한가하긴 마찬가지이다. 부쩍 추워진 탓에 늦은 오후 몇 시간만 반짝하고 말뿐이다. 김씨는 시장 여자들이 요즘 매일같이 모이는 나주 상회로 분주히 발걸음을 옮긴다.
지난 밤 천수는 잠들지 못하는 김씨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김씨는 몇 번이고 주책없다며 이야기를 중단했다. 천수 역시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었지만 김씨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들이 왠지 낯설었다.
김씨가 나간 방에서 천수는 어제 밤 그녀에게 들은 자료를 이용하여 본격적인 최면치료 암시문을 만든다. 김씨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되돌아가서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한 다음 은유적인 암시문을 주입하여 근본적인 고통의 뿌리는 캐내는 것이다. 천수는 문장을 한 줄 한 줄 완성하는 동안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최면은 사실 인간에게 매우 친숙한 상태이다. 지루한 연설을 들을 때에 느끼는 혼몽함이나 단조로운 길을 운전하면서 목적지를 잊는 것은 최면 상태의 무수한 예 중 하나이다. 나른한 몽환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최면치료란 그러한 몽환상태를 유도한 후 잠재의식 속에 강렬한 암시를 심어주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암시에 의해 행동을 제어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비흡연자다, 나는 적당한 양의 음식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따위다.
TV를 보다가 우연히 최면에 대해서 알게 된 천수는 서점에서 최면요법에 관한 책을 샀다. 그리고 그곳에서 삶의 패턴을 바꾸는 간단한 암시뿐 아니라 오래된 고통이나 과거로부터의 불합리한 고리를 끊는 치료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며칠째 그 책을 보며 치료법을 연구하는 중이다.
방에 누워 책을 보는데 현관문에서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천수는 몸을 일으킨 후 부엌으로 간다. 층계참에서 신발을 벗는 김씨의 동작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낀다. 그게 뭐야, 하자 김씨가 뒤에 감추었던 상자를 내민다.
“안 사겠다고 맘먹고 가도 꼭 이렇게 사분다. 내일부턴 정말 안 가야 쓰것다.”
김씨는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며 염치없다는 듯 말한다. 천수는 부러 밝은 목소리로 한번 더 뭐냐고 묻는다. 김씨는 부엌 좁은 틈에 앉아 상자를 푼다. 무뚝뚝하게 생긴 적외선치료기가 꺼내어진다.
중소기업이나 덤핑, 광고비 절약 운운하며 시장 입구에 있는 건물의 지하에서 선물을 나눠주기 시작한 것은 십일 월 말이었다. 김장이 끝나고 한가해진 시장 여자들이 오가면서 18개 들이 화장지나 원적외선 냄비 세트를 타 날랐다. 김씨도 지난 해 가게를 그만 둔 나주댁을 따라 그곳에서 몇 차례 조악한 물건들을 받아왔다. 나주댁은 김씨가 십 년 가까이 일해 온 나주 상회의 주인 여자였다. 예닐곱 살 위 연배인 그녀는 배추장사로 자식들 모두 여의고 이젠 골병들었다며 지난 여름 가게를 팔았다. 배추 냄새에 신물이 난다고 했지만 심심하면 시장에 나와 사람들과 노닥거리며 소일하는 중이었다. 그런 나주댁에게 중소기업 행사는 휘젓고 다니기 그만인 곳이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열댓 명의 여자들이 그곳을 드나들었고 김씨 역시 그 속에 포함되게 되었다. 처음에 김씨는 선물 나눠주면서 사람을 모으고, 시끄러운 음악에 맞춘 노래자랑 따위로 혼을 빼놓은 다음 달콤한 말로 물건을 파는 그곳의 풍경에 기가 찼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여. 그렇게 공짜로 준 것들은 어디선가 다 남겨 먹겠지.”
가루비누와 다시마 따위를 받아온 어느 날 김씨는 천수에게 들리도록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며칠 동안 혼자 약수터에 다녔다. 몇 해 전부터 겨울이 되면 시장 여자들과 함께 산에 다녔었다.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일하는 탓에 모두들 무릎이 시원찮았고, 등산이 좋다는 말에 너도나도 산을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시장 여자들 열 중 아홉은 중소기업 박람회에 드나들었으므로 김씨는 자꾸만 소외되어갔다. 이번엔 상품으로 무엇을 주었는지 매일같이 보고해주던 나주댁의 전화마저 뜸해지자 김씨는 속이 상했다. 며칠 후 김씨는 나주댁에게 돼지 뼈 싸게 사는 곳을 묻는다며 전화해놓고, 공짜나 좀 받고 말지, 했다.
김씨가 자신의 말대로 공짜에 대한 비용을 치른 것은 딱 보름 만이었다. 옥이 들어 있다는 베개 세트를 사 가지고 온 것이다. 천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잘했다고 했지만 김씨는 자꾸만 변명을 했다.
“우세스럽게 자꾸만 사라고 하잖아. 남 눈치도 있고 해서 제일 싼 걸로 샀다. 너도 목이 자주 아프잖니. 이거 베고 자면 싹 낫는다고 하더라.”
그리고 또 며칠 동안 김씨는 물건을 샀으니까 당분간 맘 놓고 상품을 받아와야 한다며 그곳으로 갔다. 그렇게 한 며칠 화장지나 섬유 유연제를 타오더니 이번엔 꽤 값나가는 물건을 사버린 것이다. 김씨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천수의 얼굴을 본다.
천수는 어머니가 당신 스스로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먹는 것 역시 언제나 천수를 위한 것일 뿐이다. 가끔씩 어지럼증을 느꼈지만 그때마다 순대국을 사먹었던 것이 고작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은 약값이나 순대국처럼 언제나 최소의 양이었다. 천수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늘 김씨에게 미안해하는 것 역시 이것 때문이다. 징역살이를 하듯 세상을 살아가는 어머니 김씨가 불쌍하기도 하고 자신의 존재가 죄스럽기도 하다. 때문에 천수는 적외선치료기 이상 되는 물건을 사왔다고 하더라도 어머니에게 잘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씨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래서 자꾸 아들의 눈치를 살핀다. 천수가 박스 안쪽에 들어있던 설명서를 꺼낸다.
“이거 어떻게 쓰는 거야?”
천수가 묻자 김씨는 그때서야 활기를 되찾는다. 삼단으로 움직이는 머리를 적당한 위치에 고정시킨 다음 세 개의 단추를 눌러 시간과 세기와 전원을 조절한다. B5 크기의 사용설명서 안에는 말 그대로 만병통치의 효과가 부위 별로 적혀있다.
“물리치료 받으러 가면 이거 20분 쬐어 주고 4천 원 씩 받아가잖니. 여름 되면 매일같이 치료받으러 가는데 그러면 그것보다 싸겠다 싶어서 샀다. 너도 가슴이랑 목 쬐어서 좋고 말야.”
천수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도 안다. 김씨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아플 때에야 겨우 한번씩 물리치료란 것을 받는다. 물리치료사는 꾸준히 치료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했지만 김씨는 매번 치료를 중단했다. 시큰한 파스가 그런 김씨의 몸에서 떨어질 날이 없다. 천수의 생각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씨는 목을 길게 빼 보이며 시범을 보인다. 적외선에 비친 김씨의 목과 가슴이 붉게 물든다.
“이제 당신의 목과 어깨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팔은 이제 움직이지 못합니다. 들어보려 해보세요.”
밤이 되었을 때 천수는 김씨를 편히 눕게 한 후 다시 최면을 건다. 천수의 주문에 팔을 움직이려 하는지 김씨의 얼굴이 찡그려진다. 하지만 몸은 이미 천수의 최면에 의해 효과적으로 통제 당하는 중이다. 천수는 김씨의 얼굴을 본다. 몇 번의 심호흡 뒤로 숨이 얕아졌고 얼굴 근육은 모두 느슨하게 풀어졌다. 최면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제 잠재의식 속에 암시를 주입하면 된다.
“당신은 지금 어릴 적 뛰어 놀던 동산에 와있어요. 연이 날고 살이 흰 아이들이 뛰어다닙니다. 이곳에서는 배고픈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들 보송보송한 얼굴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 행복한 아이들 틈으로 걸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김씨의 표정이 한없이 온화해진다. 천수는 목소리 톤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달력 뒷면에 적어둔 암시어들을 힐끗거린다. 더듬거리거나 말이 막히면 최면에 방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다가가자 아이들이 모여듭니다. 포근한 햇살이 당신의 이마 위로 엷게 퍼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새소리처럼 부드럽게 당신의 귀속으로 스며옵니다. 구름 속을 걷는 것처럼 당신은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땅은 푹신푹신해서 당신의 무릎에 어떠한 충격도 주질 않습니다. 당신은 건강한 스무 살 적 몸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천수는 잠시 멈칫 한다. 말이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를 느리게 반복한다. 직접적인 암시의 내용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할 심상이 너무 산만해졌고, 결정적으로 기억한다, 따위는 너무나 복잡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수는 갑작스레 튀어나온 스무 살 시절의 표현을 연결시킬 만한 암시어를 찾느라 뜸을 들인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김씨의 20년 전의 기억 중에서 행복이나 포근함으로 떠올릴 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천수는 하는 수 없이 이 부분을 얼버무린다.
“그리고, 당신의 주위에 모여든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손에 쥐고 온 풍선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이들이 손을 내밀고 기다립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은 행복과 충만한 감사로 가득 차있습니다. 당신은 풍선을 하나씩 꺼내어 아이들 손에 쥐어줍니다. 풍선은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배추처럼 생긴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무처럼 희고 긴 풍선입니다. 헬륨 가스를 넣은 풍선은 너무나 가볍습니다. 하나씩 풍선을 쥔 아이들의 몸이 사뿐하게 떠오릅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얼굴 가득 자애로운 미소가 퍼집니다.”
김씨의 눈꺼풀이 REM 현상처럼 파르르 떨린다. 가장 순수한 의미로서의 행복이 그녀의 얼굴에서 떠오른다. 그런 김씨의 얼굴을 보며 천수 역시 기분이 좋아진다. 음식에 대한 암시로 옮겨갈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두기로 한다. 원래는 신경성 소화불량도 함께 치료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김씨의 표정은 너무나 만족스런 것이어서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제 천천히 그곳을 나옵니다. 그곳으로 갔던 계단이 옆에 보입니다. 그 계단은 열 개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계단 끝에는 포근한 침대가 놓여 있습니다. 당신은 가볍게 발을 움직입니다. 계단에 다 오르면 당신은 곧장 침대에 누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깊고 달콤한 잠을 잘 것입니다. 자, 준비가 되었으면 첫 번째 계단부터 오르기 시작합니다. 되돌아옵니다. 아홉 번째 계단을 딛습니다. 한 칸씩 올라갈수록 당신은 고향에 다녀온 듯 행복한 피로감에 젖어들 것입니다. 여덟 번째 계단으로 올라섭니다.”
김씨는 잠에 빠진다. 천수는 두 번째에 불과했지만 오늘 것은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난 밤 조사한 것이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천수는 김씨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시골집 앞 신작로가 보이던 언덕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초등학생이 되기 전 천수 역시 김씨와 함께 가본 적이 있지만 기억나지 않는 곳이었다. 김씨는 사과나무가 있던 그 언덕을 말하는 동안 천수 아버지를 생각했다.
천수 아버지를 만난 건 김씨의 나이가 열아홉 되던 해였다. 중신 놓던 여자가 광주서 일하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그를 소개했다. 그의 본가는 김씨네 옆 마을이었고 그는 신작로를 걸어 김씨를 만나러 오곤 했다. 최저생계비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4만원 남짓한 돈이었지만 월급날이 되면 그는 륙색 가득 생과자나 과일을 담아왔다. 김씨의 어린 동생들은 사람들의 흡족한 미소 속에서 그를 자연스레 형부라고 불렀다. 그런 때면 그의 너벳벳한 얼굴이 붉게 상기되곤 했다. 79년 봄에 김씨는 혼인신고를 하고 그를 따라 광천공단 옆 월세 방에 자리를 잡았다. 투명한 하늘이 푸른 이마 위에 머물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김씨에게 허락된 행복은 1년에 불과했다. 벽돌공장에서 일하던 그와 이듬해 5월에 태어날 아기는 누렇게 익어 가는 들판처럼 김씨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 해 겨울조차 김씨의 행복을 방해하지 못했다. 바깥세상에선 누군가가 죽고, 군인들이 위원회를 만들고, 젊은이들이 잡혀갔지만 김씨에겐 그저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더 갖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들렸을 뿐이었다. 자신처럼 애초부터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아니 어쩌면 신경 쓰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일일지 몰랐다. 집 근처에 있던 어느 야학의 강학들이 심상치 않은 세상에 대해서 말하거나, 도청과 광주역에서의 함성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거나,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좁은 골목으로 지나갈 때에도 김씨와 그녀의 남편은 아기가 입게 될 배냇저고리를 보며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 김씨의 방문을 부수고 쳐들어온 것은 천수가 태어난 지 열흘만의 일이었다.
멀리서 가물가물하게 들리던 총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방향에 상관없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끔씩 총알이 기왓장을 깨고 천장에 들어가 박히기도 했다. 공장에 가봐야 한다며 일어서는 남편을 잡아야 했다. 세상은 둔한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격류에 휘감기고 있었다. 주먹만한 크기의 우박이 쏟아지던 것 같던 이틀의 시간이 지나자 정적이 감돌았다. 수건을 동여맨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지나다녔다. 눈이 큰 사람들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주검을 수습하는 울음소리가 안개처럼 공기 중으로 떠다녔다. 다음 날 남편은 공장에 가보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요란한 총소리가 도시 전체에서 울렸다.
천수는 곤하게 잠든 김씨의 얼굴을 본 후 일어나 문 쪽으로 간다. 안방 문을 열면 왼쪽으로 길게 싱크대와 가스렌지와 냉장고가 늘어서 있고, 좁은 통로 끝에 두 개의 낮은 계단 위로 철제문이 달려있다. 그리고 좁고 긴 부엌 맞은편에 화장실이 있다. 천수는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어 마신 후 층계를 오른다.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소매와 목둘레의 틈으로 사납게 파고든다. 차고 깨끗한 하늘엔 상현달이 외롭게 떠있다. 담배에 불을 붙인 천수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해 연기를 내뿜는다. 어디선가 새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달동네의 밤을 차지한 고양이들이 영역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시궁쥐와 족제비, 고양이가 경쟁적으로 쓰레기봉투를 찢는 소리도 이곳에서는 낯설지가 않다. 거의가 이주한 윗동네는 내년 봄에 재개발이 시작된다고 했다. 천수는 깊이 연기를 빨고 고개를 든다. 천천히 연기를 내뱉는데 불룩한 가슴이 잠시 들썩인다.
천수는 방으로 들어와 잠 든 김씨 앞에 앉는다. 신음소리로 채워지곤 했던 김씨의 꿈이 오늘은 놀라울 정도로 평온하다. 어머니에 대한 치료. 천수는 삼십여 년 동안 자신이 해온 일 중에 가장 보람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등학교 2학년 골수결핵으로 곱사등이가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이다. 목 바로 아래부터 시작된 골관절의 변형으로 인해 그의 키는 백삼십 센티미터에서 멈추었다. 나비의 날개처럼 연약한 가슴뼈는 앞으로 심하게 튀어나왔고 비정상적으로 길어져버린 팔은 쓸모없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김씨의 희망 없는 노동이 시작되었다.
천수는 노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오른 손으로 자신의 왼 팔을 만진다. 퇴화된 근육에 덮인 얇은 뼈가 잡힌다. 오른 손으로 힘껏 감싸본다. 하지만 왼쪽 팔에서는 그다지 압박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김씨의 뭉쳐진 어깨를 풀어주기에도 모자란 힘일 뿐이다. 팔을 뻗어 김씨의 굳은살로 채워진 손을 만진다. 천수는 김씨의 울퉁불퉁한 손을 만질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언젠가 김씨는 마늘을 싸게 넘겨받아 시장 입구에서 좌판을 벌인 적이 있었다. 하지가 되기 전에 마늘을 사서 저장해 놓았다가 그 해 김장할 때 사용하기 때문에 때를 맞춰 도매상으로부터 뗀 것이다. 하지만 김씨의 생각처럼 팔려주질 않았다. 비닐 천위에 쌓아둔 마늘이 썩어 가는 것을 애타게 지켜봐야 했다. 보다 못한 김씨는 마늘 대를 떼고 비닐에 싼 후 집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마늘을 다듬어서 김치공장에 싸게라도 넘겨야 했다. 그 날 천수는 김씨를 도와 하루 종일 마늘 껍질을 벗겼다. 김씨가 장갑을 끼라고 했지만 천수는 듣지 않았다. 어머니를 위해 이 정도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썩어 가는 마늘을 조금이라도 더 건지려면 둔한 장갑으로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되었다. 검은 비닐로 두 봉지 정도 다듬었을 때 천수는 엄지손가락이 아프기 시작했다. 해 놓은 것의 두 배는 족히 남았으므로 천수는 김씨에게 아프단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장갑을 끼었지만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눈치를 챈 김씨가 아플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쉬라고 했다. 천수는 끝까지 도와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날이 되자 손가락 전체에 불이 붙는 듯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몇 개의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졌으며 결국 살갗이 벗겨졌다. 일주일가량 천수는 오른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원래 그런 거다.”
아파하는 천수를 보며 김씨가 귀엣말처럼 중얼거렸다. 천수는 그때 어머니가 한 이 말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원래 그래, 노동이란. 노동이란 제 몸을 변형시키지. 휘어지게 하고 불거지게 해. 그렇지만, 아프고 굳어지게 만드는 일이지만, 아침이면 다시 일어나 그 빌어먹을 일을 해야 하는 것. 그게 바로 노동이야.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날 이 후 천수는 김씨의 손을 볼 때마다 부끄러웠다. 뜨거운 냄비 손잡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쥐는, 관절마다 불거져 나온 어머니의 거칠고 못생긴 손은 노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늘 괴롭혔다.
그때부터 천수의 가슴에 삶에 대한 두려움과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뜻이 너무 높아서 노여움을 샀다던 자신의 이름에 대한 원망과 함께였다.
天壽. 하늘처럼 귀한 목숨이라고 이름을 지었던 아버지를 천수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로부터 두 살 되던 해, 그러니까 81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가끔 화순에 있는 외할머니나 작은 이모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아주 짧은 얘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 자꾸만 어디론가 숨었다는 것, 가끔씩 발가벗고 거리를 돌아다녔다는 것, 그리고 그러다가 광주 공원에서 차에 치어 죽었다는 것이 천수가 들은 아버지의 전부였다.
손을 매만지는데 김씨가 몸을 뒤척인다. 천수는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둔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김씨는 가뿐해진 기분으로 아침상을 차린다. 천수가 일어나 어때요, 하고 묻자 최면치룐가 뭔가 신통하다, 하고 대답한다. 김씨가 고통스러워하던 관절염은 실제적인 염증과 더불어 심리적인 지배를 받는다. 20년 동안 시장 바닥이나 길거리에 앉아 배추와 무를 다듬어왔던 그녀에게 무릎의 통증은 곧 지나온 삶에 대한 무의식적 환기이다. 운명에 대한 무기력한 인정이고 배설할 곳 없이 쌓아왔던 회한이기도 하다. 이런 김씨의 내면에 다른 방식의 이미지를 심어 주는 것, 그러니까 삶의 지긋한 동반자였던 배추와 무에 가볍고 경쾌한 심상인 풍선을 매달아 잠재의식 속에 넣어주는 것, 그래서 더 이상 고통과 삶 자체를 연결시키지 않고 오히려 물리적인 통증까지 덜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최면치료인 것이다. 천수는 자신이 정말 근사한 최면치료사가 된 듯 흐뭇하다.
아침을 먹은 김씨는 오전 내내 지난 한 달간 받아온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화장지와 섬유 유연제, 감식초와 식용유 등속이 싱크대 선반과 장롱 위와 화장실 귀퉁이에서 나와 안방 한가운데에서 봉분처럼 쌓인다. 여러 차례 돌아보고도 빠트린 물건이 없나 한 바퀴 더 둘러본다. 그리고 노트를 꺼낸 후 영수증처럼 맨 왼쪽부터 물품과 수량과 추정가격을 적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화장대 서랍에서 계산기를 꺼낸 후 그것들을 모두 더한다. 여러 차례 검산을 해보지만 적외선치료기의 가격에 비해 턱없이 적은 액수다. 김씨는 자발없이 저지른 자신의 행위가 아무래도 마뜩찮다. 김씨의 마음을 알아챈 천수는 맨솔래담 로션을 가슴에 바르고 치료기 앞에 앉는다. 그리고 연해 시원하다고 말한다.
물건들을 치운 김씨는 약수를 뜨러 나간다. 이번엔 다행히도 김씨처럼 쓸모없는 물건을 들여놓고 후회하던 여자가 한 둘 생겼다. 김씨가 나가자 천수는 다시 달력을 꺼내어 뒷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천수는 놀이터에 나간다. 암시문은 다 썼고 늘 그렇듯 쌀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시간이 몸을 간지럽게 했다. 놀이터 구석에 앉아 햇볕을 쬐는 것은 천수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다.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가 지친 몸으로 겨울을 견디고 있다. 천수는 구부정한 어깨를 두꺼운 털외투 속에 감추고 놀이터 안쪽으로 걸어간다. 늘어뜨린 팔은 시계추처럼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듯 힘없이 흔들린다. 의자에 앉아 담배를 꺼낸다. 노파가 겨우 굴러가는 유모차에 종이박스를 몇 장 싣고 놀이터 쓰레기통을 뒤진다. 노파가 사라지자 놀이터는 적요해진다. 이따금 유치원생을 태운 봉고차나 생선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면서 소리를 낼뿐이다. 천수는 거푸 두 대의 담배를 피우고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삼거리 언덕길을 내려가면 버스가 다니는 2차선 도로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천수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김씨가 일하는 재래시장이 있다. 시장을 지나쳐서 오른쪽 언덕을 넘으면 다시 출발했던 삼거리로 올 수 있다. 이것은 천수가 자주 걷는 길이다. 천수는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린 후 언덕으로 내려간다.
초등학교 긴 담을 걷는데 맞은편에서 또래의 사내가 온다. 천수의 마지막 학력이 된 중학교의 동창생이다. 둘 사이의 거리가 긴장감 속에서 점점 좁혀지더니 허탈할 정도로 빨리 지나쳐버린다. 천수는 물론 그 사내 역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다. 천수는 언제부턴가 동네에서 마주치는 아는 얼굴은 외면하기 시작했다. 그의 의지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적응한 것일 뿐이다. 불편한 과거를 대하는 듯 난감해하는 표정을 상대방의 얼굴에서 읽는 것은 언제나 씁쓸하다.
함께 어울려 다녔던 친구들은 그들 부모의 손에 의해 천수로부터 멀어졌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천수에 관련된 어떠한 이해도 구하지 못했다. 그들의 부모는 천수를 나쁜 병을 옮기는 벌레처럼 여기는 듯했다.
병신이라는 표현 속에서, 병신이라고 내뱉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천수는 자신과 타인의 관계의 방식을 깨달았다. 이동권을 얻기 위해 버스와 휠체어에 쇠사슬을 감는 어떤 장애인에게 뭇사람이 던지는 냉소는 천수로 하여금 모든 희망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천수는 자살을 시도했다. 주위의 시선에 상관없이 담담하게 살아갈 자신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 몸에 난 눈들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응급실에서 의식을 찾았던 천수는 손목에 감긴 두툼한 붕대와 잠든 어머니의 얼굴에 난 눈물 자국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도 귀한 게 목숨이다. 그렇게 함부로 버려선 안 돼. 너 죽으면 나도 죽는다.’ 종지 만한 그릇에 담겨있던 밥을 입에 넣어주며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며 천수는 죽지 않겠다고, 아니 적어도 수면제를 먹거나 손목을 긋는 방식으로 죽진 않겠다고 다짐했다.
김씨는 일일 드라마가 끝나고 난 후 다시 천수의 목소리에 이끌려 고향 집 앞 신작로가 보이던 언덕으로 돌아간다. 천수는 이번에 치료 외에 다른 걸 묻는다.
“당신은 풍선을 나눠주고 빈손입니다. 몸이 가볍고 날아갈 듯합니다. 당신은 이제 혼자입니다. 어디든 당신의 의지로 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미래에 대한 어떠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당신의 미래는 천천히 번져오는 따뜻한 햇살처럼 그렇게 오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당신은 더욱 행복합니다. 옆에 누군가 보입니까?”
“응, 누가 서있구나. 날 내려 보고 있어.”
“누굽니까? 알아볼 수 있어요?”
“최씨야. 날 태우고 어디론가 가고 있어. 리어카에.”
김씨는 잠꼬대하듯 약간은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한다. 김씨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난다. 천수는 조금 놀라며 계속 묻는다.
“어디로 가나요?”
“몰라. 모르겠어. 하지만, 행복하구나.”
계단을 통해 최면에서 깨어난 김씨는 이번엔 곧바로 잠들지 않는다. 최면 중에 나눈 대화를 기억하는 김씨는 자신이 꺼내어 놓은 최씨 때문에 약간 당혹스럽다. 천수의 표정이 굳어진다. 언젠가 김씨에게 희망에 대해서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김씨는 그저 작은 가게 하나 얻어서 천수와 함께 늙어 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얼핏 최씨 얘기를 하다가 중단했다. 최씨네 같은 가게.
“엄마.”
“왜?”
“과일가게 절름발이 최씨 말한 거야?”
“으응...”
김씨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천수는 마음 한구석이 저리다. 짐짓 김씨에게 화를 내본다.
“엄만 나 보면서 질리지도 않았어? 왜 하필 그런 사람이야.”
“그런 소리 마라. 그 사람도 참 안됐더라.”
소방관으로 일하다 실족하여 다리를 잃었다던 그는 얼굴 반쪽이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천수는 집으로 올라오는 언덕길에 있는 그의 가게를 생각한다. 한때 김씨는 그 가게 앞에서 좌판을 벌렸던 적이 있었다. 그때 서로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어머니가 가장 편안하게 느꼈던 언덕이 시골이 아닌 최씨 집 앞일지 모른다. 길거리에 앉아 물건을 팔던 어머니에게 최씨의 가게에서 번져 나오던 불빛은 자신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아늑함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김씨는 난데없이 꺼낸 최씨 이야기가 부끄럽다. 가엾은 남편과 천수를 생각하면 그것은 충분히 불경한 생각이었다. 김씨는 남편을 생각한다. 일주일만에 남편을 찾아낸 곳은 광주 교도소 앞이었다. 산송장이나 다름없던 그를 집으로 데려오는 동안 김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살아있어 준 남편이 서럽도록 고마웠다. 온전한 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는지 남편은 점점 미치광이가 되어갔다. 그리고 화창한 봄날 달리는 차에 뛰어들었다. 김씨가 원망할 수 있는 것은 신이나 운명 외에 없었다.
천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망치듯 올라온 서울은 아이가 딸린 스물다섯의 그녀에게 약간의 호의도 보이질 않았다. 맡겨둘 곳이 마땅찮아서 아이는 늘 김씨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곱사등이인 양 취급했다. 어머니에게 맡기기도 하고, 말귀를 알아듣게 된 후부터는 방에 가두어 키웠다. 일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을 얻고 수시로 들락거리며 돌보았다. 고단한 삶 속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늘 모자랐을 뿐이다.
김씨는 천수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금처럼 되진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가까이에서 돌보았다면 아이의 근력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에 의심을 했을 것이다. 유난히 칭얼거리는 아이의 호소에 귀 기울였을 것이고, 무엇보다 영양이 풍부한 음식과 애정을 주었을 것이다.
김씨는 조심스레 한숨을 내쉰 후 눈을 감는다.
천수는 잠이 오질 않아 다시 밖으로 나간다. 이제 곧 서른셋이 된다. 최씨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 옆에 어머니를 세워본다. 상상 속에서 어머니가 수줍어하고 최씨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후 그런 어머니를 바라본다. 고개를 돌린 탓에 그의 얼굴은 깨끗하고, 둘은 대체로 잘 어울린다. 천수는 자신의 모습을 그 사이에 끼우려 하다가 이내 그만 둔다.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천수는 자신이 김씨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 등에 달린 혹처럼 천수 자신은 어머니 등에 달린 그것이라는 생각이다. 자꾸 눈물이 나와 서있기가 힘들다. 천수는 조야한 차양 밑에 앉아 짐승처럼 울기 시작한다. 한 무리의 고양이가 다가와 그를 바라본다.
방으로 들어가 김씨 옆에 눕는다. 서늘한 바람 냄새에 김씨가 기척을 한다.
“울었니?”
“아니.”
“자거라.”
음울한 천수의 울음소리를 귀 밝은 김씨는 이미 들었다. 돌아누우며 김씨가 나지막하게 말한다.
“걱정 마라. 난 아무 데도 안 간다...”
천수는 기쁘다. 과거는 물론 숨겨진 욕망까지 상대의 최면 속에서 꺼낼 수 있는 훌륭한 최면치료사가 되었다. 의지나 믿음처럼 정신적인 힘을 이용하여 태도나 마음가짐을 긍정적으로 개선시키는 것만으로도 삶은 많이 달라진다. 이것은 최면에 대해 천수가 내린 정의이다.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었지만 이젠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고, 또한 그 일을 제법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 김씨가 약수를 뜨러 가자 천수는 다시 바빠진다. 오늘 해야 할 최면은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독창적인 것이다. 보고된 바는 있지만 형식면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 영혼을 치료하는 최면치료사에게 가장 영광스런 일이다.
천수는 낡은 카세트를 꺼내고 화장실에서 양은 물동이와 PET병을 준비한다. 문구용 칼로 병 바닥에 틈새를 만든다. 그리고 물을 채워서 팔 높이로 들어본다. 링겔처럼 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바닥에 양은 물동이를 대자 제법 큰 소리가 난다. 천수는 시험 삼아 그 소리를 녹음해본다. 잡음에 섞여 분명하진 않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물소리란 걸 금세 알 수 있다. 끈으로 병을 묶어 문간에 달아매고 물동이를 밑에 댄다.
천수는 이제 암시문을 적기 시작한다. 궁극적인 목표가 분명한 탓에 어렵지 않게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상상력 또한 충분하다. 천수는 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다. 이제 준비는 완벽하다. 물동이와 병을 깨끗이 치운 천수는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에 누워 긴장을 푼다. 카세트를 작동시키자 미세한 잡음과 함께 자신의 목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권위를 담은 채 흘러나온다. 말과 말 사이, 기계 음과 목소리 사이로 한 방울 한 방울 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천수는 눈을 감고 그 소리에 집중한다.<박상혁. 200×86>
2012년 문학상 수상자(소설부문)
<약력>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무료한 학창시절을 거쳐 1992년 건국대학교 축산가공학과에 들어갔지만 뒤늦게 글쓰기를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뜨거워지는 것은 많았지만 어떤 회사에서 오래, 묵묵히 일했고 최근 그만두었다. 지금은 오리섬에 앉아 먹고 살 일을 고민하는 중이다.
수상자소감문
때때로 울컥, 가슴을 치미는 것 때문에
흐르는 강물 위에 돌을 던지던 시절은 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너무 늙어버렸다.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는 나도 마흔 살.
전에는 원망이 많았다. 세상도 그랬고 부조리도 그랬고 폭력도 그랬다. 분노가 쌓일 때면 거리를 달렸고 돌을 던졌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누군가 날 원망하는 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도 이제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어르신들 죄송합니다) 살았지만 아직 부끄러운 것이 너무 많다. 어제 전화를 받고서도 수상소감을 적지 못한 이유다. 확인전화를 다시 받고서야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커서가 계속 깜박이며 무엇이든 뱉어낼 것을 강요하는 통에 등 떠밀리듯 글을 쓴다.
십년 넘게 다닌 회사를 때려치우고 후배가 와서 놀라던 사무실에서 처음 한 일은 모니터 옆에 노자의 글을 써 붙인 것이었다.
就能濁以靜之徐淸 누가 혼탁한 세상에서 고요에 처해 주변을 맑게 할 것인가.
탁한 물을 맑게 하는 일은 고요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이 글귀는 마흔을 넘겨 분분해진 마음을 적잖이 다스려주었다.
장사꾼이 권력을 잡으니 세상이 온통 돈 놀음이다. 욕망이나 이기심은 교환가치의 명목으로 떳떳하게 뒷짐을 진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했을 법한 일들을 요즘은 아무렇지도 않게, 크게 웃으며, 보란 듯이 벌인다. 언론에 나오는 힘센 사람들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사회적이고 미시적인 문화가 된다. 인간관계의 인간화, 나눔의 가치, 인간의 존엄성, 공동체를 지향하는 삶. 이 돈 안 되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끼리끼리 돈 안 되는 문학밖에 없다. 그래서 문학은 황홀하며 매력적이다.
늦게 글쓰기를 욕망한 나는 그래서 문학청년 시절이 없다. 한때 룸펜으로 살며 압축적인 진통을 겪기도 했지만 인생에서 지름길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게 고작이었다. 삼십대 틈틈이 쓴 글들을 얼마 전에 쭉 읽어보았다. 대체로 무거운 결말이어서 그날 내내 우울했다. 그러고 보니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엔 글을 안 썼던 것 같다.
가슴을 치미는 것이 없어 강물을 봐도 돌을 집어 들지 않는 나이다. 하지만 아직 던지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둔 돌이 하나 있다. 오늘 그 돌을 꺼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동화] 까만콩
까만콩
나는 까만콩이다. 어디에 굴러가도 모를 만큼 작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굴마저 콩자반처럼 까무잡잡하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날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뭘 먹고 이렇게 안 컸니?”
오늘도 똑같은 말을 두 번이나 들었다. 너무 화가 나서, 머리에 싹이 돋을 지경이다.
더 화가 나는 건, 내가 버려졌다는 거다. 우리 아빠로부터!
아빠가 재혼을 하면서 나를 외갓집에 맡겼으니, 버려진 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외갓집엔 엄마도 없다. 엄마는 나를 낳다가 하늘나라로 떠난 지 오래니까. 그래서 나는 엄마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가끔 엄마에 대해 묻기라도 하면, 아빠는 버럭버럭 불뚝성부터 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빠 몰래, 이불 속에 숨어 불러보았다.
“엄마…….”
엄마에 대한 추억은 이것뿐이다. ‘엄마’라는 말은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생각만 해도 두 볼이 저절로 발개졌으니까.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당당히 외쳤다.
“그 아줌마는 우리 엄마가 아니야!”
결국 나, 까만콩은 외갓집이 있는 시골에서 살게 되었다. 마을버스라도 얻어 타려면 한 시간은 족히 기다리는, 외삼촌 말대로라면 파리똥만한 마을에서.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파리똥만한 마을도 좋고, 틀니를 컵 속에 뱉어놓는 외할머니도 좋다. 머리를 박박 깎고, 경운기를 오토바이마냥 몰고 다니는 노총각 외삼촌도 좋다.
그런데 단 하나! 이모만큼은 싫다. 지나다닐 때마다 이모를 쏙 빼닮았다는 소리를 듣는 건 더욱 더 싫다. 그래서 나는 이모를 볼 때마다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도대체 어느 별에서 온 거냐고!
이모는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신는 신발을 싫어한다. 운동화건 구두건 신겨 놓으면 무조건 맨발이 된다. 돌이며 자갈, 심지어 깨진 항아리 조각에 찔려 발바닥에 피가 나도 맨발로 다닌다. 덕분에 외할머니는 신발을 들고 이모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모는 며칠에 한 번씩 새 신발을 사야만 했다. 나는 졸라대도 안 사주는 새 신발을!
게다가 이모는 정말 빠르다. 구름을 타고 다니는 건 아닐까, 의심할 만큼.
이모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니기 바쁘다. 역시나 맨발로!
그래서 이모의 발톱은 거의 다 빠져버렸다. 저번 주에는 십 키로는 떨어진 이웃 마을에서 연락이 왔다. 이모가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다고.
외할머니는 안 되겠다며, 이모의 한쪽 손목을 끈으로 묶었다. 나머지 한쪽 끝은 외할머니의 허리에 칭칭 동여맸다. 어쩌다 마을 앞 구멍가게에 가더라도 이모랑 같이 다녔다. 그러다가 외할머니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이모는 화를 내며 거위처럼 꽥꽥 소리를 질렀다. 온 마을이 떠나가도록!
사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모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나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이모는 침이 흐르는 입술을 내 얼굴에 갖다 댔다. 도장이라도 찍겠다는 듯, 쪽쪽거리는 통에 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악!” 내 비명 소리에 놀란 이모는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몸을 웅크리더니,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빌었다.
“군인아저씨, 제발 때리지 마세요! 살려주세요!”
이모는 날 보며 뒷걸음질 쳤다. 내가 때리지도 않았는데, 잘못했다며 싹싹 빌었다. 나는 엉엉 울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까만콩은 눈물을 잘 참는다. 숨을 십 초만 안 쉬어도 눈물이 쏙 들어가니까. 이런 이모가 함께 산다는 걸 알았다면, 아예 오겠다고 하지도 않았을 거다.
내 특기는 공부할 때 ‘두 눈에 불 켜기’다. 수업 시간 동안 선생님이랑 칠판만 보이는 희귀한 시력을 가졌다. 이 학교로 전학 온지 정확히 일주일 째 되던 날이었다. 그 날만큼은 눈앞에 선생님 대신 이모가 보였다. 아무리 눈을 비벼대도 이모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모는 헐크처럼 나를 향해 뛰어왔다.
“숨어! 민주야, 숨어! 지금 밖에 나가면 안 돼! 총 맞아, 다 죽어!”
이모는 내 목덜미를 잡고 책상 밑으로 끄집어 내렸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알았다. 이모는 힘까지 헐크를 닮았다는 사실을! 친구들까지 모조리 책상 밑으로 밀어 넣었으니까. 수위 아저씨가 출동하지 않았다면, 선생님마저 책상 밑에 웅크려야 했을 거다.
이모는 그렇게 내 친구들도 빼앗아 갔다. 공부를 잘 한다고, 피아노를 잘 친다고 나를 좋아하던 친구들은 한 순간 싹, 사라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이렇게 묻기 바빴다.
“너희 이모 미쳤지?”
나는 학교에서 더 이상 똘똘이 까만콩이 아니다. 외톨이 까만콩이 됐다. 전교생 일곱 명 중에 외톨이 한 명은 맘 편히 숨을 곳도 없다. 등에 큼직한 이름표를 달고 사는 거랑 똑같으니까. 이름표에는 언제나 ‘외톨이’라고 적혀 있다.
“이모랑 같이 살아야 돼요? 아프면 병원에 입원해야 되잖아요. 외할머니도 이모 때문에 못 살겠다면서요. 외삼촌은 이모 때문에 술만 먹잖아요! 나도 이모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요!”
내가 소리치자, 이모는 바닥의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가렸다. 외할머니는 휴우, 한숨을 내쉬더니 이모의 어깨를 철썩철썩 때렸다.
“그러게, 학교에 왜 갔어! 연화야, 왜 그랬니. 왜! 잠깐 졸았더니 고새를 못 참고. 에그.”
“민주, 너! 이모한테 그러면 못쓴다. 넌 그러면 안 돼!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혼쭐 날 줄 알아라.”
외삼촌은 버럭 화를 내더니,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이 부서질 듯 쾅, 소리를 냈다.
외삼촌이 나한테 화를 내다니! 몰래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갔을 때도, 외삼촌은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머리에 꿀밤을 때리며 미안해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조카한테 용돈도 안주고. 민주야, 앞으로는 아빠라고 맘 편히 생각해. 외삼촌이 깜박해도 꼭 용돈 달라고 해. 약속!”
외삼촌은 언제나 내 편이었다. 오늘처럼 날 쏘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울컥, 서러운 마음이 치솟았다. 나는 일부러 외삼촌 앞에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받으면 큰 소리로 물을 셈이었다.
‘아빠! 언제 데리러 올 거야!’
하지만 아빠의 핸드폰은 전원이 꺼져 있었다.
큰 일 났다! 이모가 사라졌다!
집에 오자마자, 외할머니가 펑펑 울며 말했다. 외삼촌도 옆집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시내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경찰 아저씨는 한 마디 말로, 외할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실종’이라고. 경찰 아저씨는 이모의 인상착의를 수첩에 적었다.
‘이름 : 오연화. 긴 단발머리. 코 옆에 점. 정신 장애.
얼굴은 검은 편. 키가 작고 이목구비는 또렷함.
나이: 44세.
실종 당시 옷차림 : 흰색 반팔, 꽃무늬 고무줄 치마. 맨발.’
경찰 아저씨는 무전기로 다른 경찰들에게 이모의 모습을 전했다. 나는 경찰 아저씨에게 더 말해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뚜렷한 이목구비’ 대신 ‘늘 침을 흘리고, 턱받이 수건을 하고 있음’이라고 고쳐야 한다. ‘사탕만 주면 달려옴’, 혹은 ‘헐크처럼 힘이 셈’ 등의 특징이 다 빠졌다.
하지만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경찰 아저씨랑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그 길로 화장실로 달려가 숨어 버렸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이모를 찾지 못했다. 외삼촌은 이모의 사진이 커다랗게 실린 전단지를 시내에서 천 장이나 만들어 왔다.
전단지에는 화장을 한 젊은 이모가 담겨 있었다. 지금처럼 긴 단발머리에 얼굴도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었다. 이모는 늘 슬퍼 보여야 한다. 이모를 생각하면 겁에 질린 눈동자가 먼저 떠오를 만큼.
그런데 전단지 속의 이모는 활짝 웃고 있었다. 둥근 눈웃음이 나랑 비슷해 보였다.
이 전단지로 이모를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내 눈에는 활짝 핀 꽃과 시든 꽃처럼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그 긴 세월동안 사진 한 장 찍어놓은 게 없으니, 휴.”
외삼촌은 눈을 감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외할머니는 전단지 속의 이모 얼굴을 백 번, 아니 천 번쯤 쓸어내렸다.
“이렇게 고왔는데. 우리 연화가, 이렇게 고왔는데…… 대체 어딜 간 게야!”
외할머니는 전단지를 이모라도 되는 양 껴안고 흐느꼈다. 나는 외삼촌과 함께 경운기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외삼촌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며, 전단지 한 뭉치를 안겨주었다. 나는 행여나 친구들이 볼까봐 고개를 푹 숙였다.
“한 번 보시고, 꼭 연락주세요. 사례하겠습니다.”
외삼촌은 허리를 굽히며 전단지를 나눠주었다. 나는 외삼촌 옆에서 전단지만 만지작거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사래를 치거나, 전단지를 받자마자 내팽개쳤다. 이모 얼굴이 구겨져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말 그대로, 화가 폭발할 것 같았다. 구겨진 전단지 때문이 아니다. 빗방울이 섞인 바람 때문에 콧물이 줄줄 흘렀기 때문이다. 이 날씨에 내가 전단지까지 돌려야 하다니!
감기라도 걸리면 나만 손해다. 외할머니는 병원에 보내주는 대신, 지독하게 매운 생강차를 끓여줄 게 뻔했다. 파뿌리가 둥둥 떠 있는 생강차 말이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그 때 머릿속에서 반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외삼촌! 저는 저 끝에서 돌릴게요.”
내가 가리킨 곳은 반대 방향이었다. 외삼촌은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겠네. 우리 민주가 대견하구나. 암, 그래야지.”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전단지를 끌어안고, 재빨리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외삼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전단지를 나눠주는 척 길에다 몇 장씩 뿌리며 걸어갔다. 그래도 전단지는 줄어들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쓰레기통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집 오토바이에 실린 커다란 양동이가 보였다. 다 먹고 난 그릇을 싣고 오는 통 같았다. 나는 그 속에 전단지 뭉치를 집어넣었다. 남들은 까치발로 점프까지 하는 내 모습을 보고, 농구라도 하는 줄 알았을 거다. 오랜만에 속이 다 후련했다. 이왕 시내에 나온 김에, 게임이나 한 판 할 생각이었다. 나는 피시방으로 뛰어갔다.
몇 시간이나 게임을 했는지 모르겠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거리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외삼촌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주머니에 외삼촌이 준 용돈이 두둑하게 들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간신히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올 수 있었다.
외삼촌은 마당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문 모습으로.
“민주, 너!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외삼촌의 목소리는 어두운 마당에 쩌렁쩌렁 울렸다. 개들이 컹컹 짖었다. 마당의 닭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내가 막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할 때였다. 외삼촌은 고추기름이며 자장이 잔뜩 묻은 전단지 뭉치를 내 앞에 던졌다.
“이럴 거면 아빠한테나 가!”
나는 순간 두 귀가 먹먹해졌다. 깊은 물에 빠졌을 때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꾹 참은 눈물이 목 뒤로 넘어갔다. 눈물은 한약처럼 쓴 맛이 났다.
“내가 무슨 택배 상자예요? 어른들 맘대로 보냈다, 받았다 하냐고요!”
나는 따따부따 외쳤다. 외삼촌은 내 말을 듣기 싫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넌 그러면 안 돼! 저, 괘씸한 녀석.”
외삼촌은 전단지를 다 닦을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나는 발끝으로 더럽혀진 전단지를 멀찍이 밀어냈다.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
‘조카라고 다 참아야 돼? 이모가 미워. 이모가 다시 안 왔으면 좋겠어.’
나는 찬 바닥에 엎드렸다. 몸을 잔뜩 웅크렸다. 이럴 때 엄마가 있었다면, 날 안아줬을 텐데. ‘민주야, 기운 내. 괜찮아.’ 라고 위로해주면서.
며칠 뒤, 전단지를 본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차역에서 이모를 봤다는 사람이 둘 이나 있었다.
“기차역? 아니 거길 왜…….”
“어머니, 혹시 거기 아닐까요? 연화가 갈 만 한 곳은.”
외삼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외할머니는 한동안 멍하게 서 있더니, 방으로 들어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얘야, 가자! 연화가 기다리잖니. 빨리 옷 입어라.”
외삼촌은 바로 택시를 불렀고, 우리는 모두 함께 집을 나섰다. 외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짚었다. 외삼촌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외삼촌, 어디 가요? 이모가 어디 있는 줄 알고 가요?”
“가보면 안다. 민주야.”
외삼촌은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외삼촌의 손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기차에 타자마자, 나는 멀미를 했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난 걸까.
“민주야, 일어나라. 광주에 다 왔다.”
외할머니가 나를 깨우며 말했다.
거짓말처럼, 그 곳에 이모가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 속에서 잿빛 누더기가 된 옷을 걸친 이모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맨발의 이모는 짚더미처럼 그곳에 앉아 있었다. 중앙로 거리는 몰려다니는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이모가 투명한 벽이라도 되는 듯, 피해서 빙 돌아나갔다.
“연화야!”
외삼촌이 달려가서 이모를 껴안았다. 외할머니는 이모를 향해 달려가다가 자꾸만 넘어졌다. 나는 옆에서 외할머니를 부축하느라 진땀이 흘렀다.
이모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나도 모르게 코를 움켜쥘 때였다. 이모는 외할머니를 보더니, 똑같은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명자 언니랑 두부 사러 나왔는데…… 총! 총이다! 군인 아저씨, 난 잘못 없어요! 나쁜 짓 안 했어요! 으앙!”
이모가 도로 한 가운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우리를 쳐다보았다.
“엄마, 명자 언니 여기서 죽었다! 저기! 총 맞아 쓰러졌잖아! 나, 대신 빵! 가슴에 맞고 죽었어!”
이모는 외할머니의 품에 안겨 부들부들 떨었다. 외할머니는 괜찮다며 이모를 다독였다. 외삼촌은 이모를 들춰 업었다. 이모가 등 뒤에 업혀서 훌쩍거렸다.
“오빠! 빨리 집에 가. 문 잠그고 꼭꼭 숨어.”
“그래, 연화야. 그래.” 외삼촌은 아이를 어르듯 이모를 얼러대며 걸어갔다. 가는 길에 횃불이 장식된 둥근 조각이 세워져 있었다. 조각 앞에서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철판 위에 글씨들이 빼곡 새겨져 있었다.
‘5.18 사적지’
나는 비문을 한 글자씩 따라 읽었다.
‘이 곳은 5.18 민주 항쟁 때,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을 향해 최초로 발포했던 곳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모가 아프게 된 이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에 있는 작은 여관에서 잠을 잤다. 이모는 자면서 큰 소리로 코를 골았다. 외할머니는 이모의 손목에 끈을 묶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외삼촌이 자꾸만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민주야, 자니?”
“잠이 안 와요. 저, 외삼촌! 이모는 언제부터 저렇게 아팠어요?”
“저렇게 심해진 건 벌써 십 년이 넘었지. 민주야. 우리, 그동안 너무 떨어져 살았지? 꼭 이산가족처럼.”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요?”
내 말에 외삼촌은 후후, 웃었다. 외삼촌은 드문드문 말을 이어갔다.
“사실 민주가 와서 같이 산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지 뭐냐. 민주가 모든 걸 알고 온 걸까, 아니면 아직도 민주에게는 다 비밀인 걸까, 싶어서.”
‘나에게만 비밀이라니?’ 뜬금없는 소리에 놀라 외삼촌을 바라보았다. 외삼촌은 스탠드를 켰다. 어슴푸레한 빛 아래, 외삼촌의 까칠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 모든 일은 이십 년 전, 이 곳 광주에서 시작됐다.”
외삼촌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민주야, 언젠가는 전부 다 말해주려고 했어. 그 날이 바로 오늘인가 보구나.”
외삼촌은 꾹 다문 입을 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외삼촌의 깍지 낀 손이 자꾸만 떨렸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 말이다. 군인들이 몰려왔구나. 권력에 눈이 먼 군인들이 제멋대로 나라를 잡고 흔들 때였지.”
외삼촌은 목이 메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 친구들이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외쳤다. ‘독재는 물러가라! 민주주의, 만세!’ 나는 그 때 열일곱. 광주일고에 다니는 까까머리 일학년 학생일 뿐이었어.”
나도 모르게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외삼촌의 눈시울은 금세 붉어졌다.
“발포! 누군가의 한 마디에 총질은 시작됐지. 자유를 외치는 대학생들을 향해! 그건 잔인한 사냥이었어. 모조리 죽이기 위한 사냥!”
외삼촌은 주먹으로 눈시울을 훔쳤다.
“시민들이 말리자, 사냥꾼들은 무작정 쏘아댔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머리 위에, 아기를 안은 엄마의 등 뒤에, 학생들의 가슴 위에 총구를 겨누고 쏘았지. 내 어깨에도 그 날의 상처가 있구나.”
외삼촌은 옷을 걷어 어깨를 불빛에 비췄다. 밤톨만큼 움푹 파인 상처가 드러났다.
“이 상처도, 그 날의 기억들도 영원히 남아 있을 거다.”
“외삼촌, 이모도 그 때 다친 거 맞죠?”
“그랬지. 옆집 새댁을 따라서 두부 사러 간다고 나갔다가, 총을 든 계엄군과 마주친 거야. 그 어린 게 말이다.”
외삼촌은 잠든 이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모가 이불을 차냈다. 외삼촌은 이불을 여며주며 말했다.
“민주야, 이모가 창피하겠지만…… 네 나이에 그런 일을 겪었다고, 그래서 아프다고 한 번만 생각해 주겠니.”
“외삼촌…….”
“내 동생은 겁에 질려 있었어. 옆집 새댁이 자기 대신 총에 맞았다며, 벌벌 떨었지. 그 후로 몇 년 동안 늘 옷장 속에 숨어 살았어. 우리는 견디다 못해, 광주를 떠났지.”
“우리 엄마는요? 그 때 몇 살이었어요?”
외삼촌은 대답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외삼촌! 왜 다들 내가 엄마 이야기만 꺼내면 싫어해요? 네?”
“그래, 민주야. 잘 들어라. 이제부터 네 엄마 이야기를 해주마.”
외삼촌의 눈시울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처음으로 듣는 엄마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 동생은 오랫동안 힘들어 했다.”
외삼촌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외삼촌 동생이라면, 우리 엄마요? 아니면 이모 말이에요?”
외삼촌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외삼촌이 왜 뜸을 들이며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빨리 엄마의 이야기를 해주기만을 바랐다.
“연화도…… 남들처럼 결혼을 했지. 그 때까지 우리는 병이 곧 낫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결혼하고 첫 해 만에 예쁜 아이를 낳았어.” “이모가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고요?”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외삼촌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주 작은 아이였다. 엄마가 아파서 세상에 일찍 나온 아이. 엄마를 닮아 유달리 얼굴이 까맣던 아이.”
외삼촌의 말을 들을 때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왔다. 더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이 먹구름처럼 밀려왔다.
“그러니까요. 이모 이야기 말고요, 우리 엄마 이야기 해주세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방 안은 전기 흐르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다.
“아이는 연화를 닮아서 작고 귀여웠어. 사람들에게 까만콩이라고 불릴 만큼.”
“외삼촌!”
나는 낮게 소리쳤다. 외삼촌은 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연화는 건강이 더 나빠지기 시작했어. 아이도 못 알아볼 만큼 말이야. 우리는 간절히 빌었다. 너 만큼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자라는 걸 바라지 않았어. 네 아빠도 그러길 원했지.”
“비겁해요. 겁쟁이! 내가 볼 땐 우리 가족 모두 다 겁쟁이예요!”
나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았다. 외삼촌은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나는 외삼촌의 어깨에 기대어 울었다. 내 눈물이 외삼촌의 상처 속으로 스며들 때까지.
“네 엄마다, 민주야. 단 한 번이라도 엄마라고 불러줄 수 있겠니?”
외삼촌은 이모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이모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우리 엄마 아니에요! 그냥 이모일 뿐이에요.”
“휴, 그 시절은 아직도 잔인하구나. 누구보다도 너에게…… 가장 큰 아픔을 줬으니.”
외삼촌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찾던 엄마가 우리 이모였다니! 외삼촌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민주야, 편안한 요양소가 있다고 해서, 알아봐 뒀다. 더 이상 힘들어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너도, 네 엄마도 말이야.”
나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외삼촌은 따라 나오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외삼촌이 날 붙잡았다면, 아마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을 테니까.
내일은 엄마가 병원의 요양소로 떠나는 날이다. 외할머니는 그 전에, 우리가 꼭 한 번 들러야 할 곳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광주의 망월동에 있는 ‘5.18 국립 민주묘지’에 도착했다. 외삼촌은 그 당시,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고 알려주었다. 손에 사탕 봉지를 든 이모가 비석 사이를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줄지어 서 있는 까만 비석들 사이로, 화병마다 흰 국화꽃이 꽂혀 있었다. 외삼촌의 얼굴은 자라난 수염으로 덥수룩했다.
“그 사람도 우리처럼 아프고 힘들까요?”
나는 외삼촌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외삼촌은 먼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누구 말이냐?”
“군인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한 사람이요.”
“그 사람…… 아, 그래. 그 사람은 지금도 잘 살고 있구나.”
외삼촌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사람이 미워요! 이모 앞에서, 우리 가족 앞에서 빌었으면 좋겠어요. 잘못했다고!”
외삼촌은 대답 대신 쓸쓸하게 웃었다.
“후후, 그래. 모두가 그렇게 원할 거다. 하지만 지금 그 사람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외삼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몇 몇 비석 앞에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눈물을 닦은 손수건으로 비석을 닦았다. 상처 입은 얼굴을 닦아내듯이.
외할머니가 서 있는 비석 앞으로 갔다. ‘김명자의 묘’라고 적힌 비석 옆에 면사포를 쓴 여자 사진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글씨를 읽었다.
‘여보, 우리 아기와 함께 천국에서 편히 쉬어요. 곧 만납시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외할머니는 새로 사온 곰 인형과 장난감 자동차, 한 꾸러미의 과자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새댁! 우리 왔어. 이 아이가 연화 딸이야. 꼭 한 번, 인사라도 시켜주고 싶었어. 저기, 자네가 지켜준 연화도 왔지 않나.”
외할머니는 사진의 뿌연 먼지를 닦아내며 말했다. 나는 국화꽃 한 송이를 사진 옆에 내려놓았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이모가 한쪽 발을 들고, 깨금발로 콩콩 뛰어왔다.
천구백팔십년 오월, 전라도 광주에 총소리가 울리기 전.
나처럼 작고 까만 열두 살의 모습으로.
“엄마!”
나는 엄마의 손목을 잡았다.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옷소매로 끈적이는 엄마의 입가를 닦아냈다. 엄마는 둥근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가지 마.”
나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말했다.
“병원에 가지 마.”
이제야 엄마를 찾았잖아. 엄마를 숨어서 부르지 않아도 되잖아.
우리도 행복해 져야지, 응? 엄마…….
2012년 문학상 수상자(시부문)
[약 력]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월간문학 동화부문 신인상.
아동문예 동시부문 신인상.
수상소감문
주인공 까만콩은 상처투성이 아이입니다.
행여나 얕보일까 자신의 상처를 아무렇지 않은 척, 남의 일처럼 말하는 열두 살의 여자아이입니다.
하지만 까만콩이 지닌 상처의 뿌리는 견고하고 깊게 뻗어있습니다.
삼십여 년 전, 오월의 광주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오월민주항쟁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대학 도서관에서 무심코 펼쳐든 5.18 사진집. 그 속에 고스란히 찍혀있는 광주의 참상은 교과서로 배운 단정한 어휘들로는 설명될 수 없는,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던 군부의 광기였습니다.
‘용서를 해줄 사람은 있건만,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 없다.’는 글귀를 접한 날, 공교롭게도 5.18의 강제 진압을 미화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렇듯 긴 세월이 지나도록, 아물지 못한 상처는 이제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5.18 당시 열두 살이었던 엄마의 상처가 갓 열두 살이 된 딸, 까만콩의 삶 속에 고스란히 전가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행복해 져야지, 응? 엄마…….’
까만콩의 독백은 모두를 향한 절실한 다짐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0년 수상작
[시 당선작]반 지하식물의 겨울눈 외 4편(최일걸)
반 지하식물의 겨울눈
굳이 방사선 연대측정법에 따른
지구 연대기 도표가 아니어도
겹겹의 지층을 이룬
반지하의 어둠 속에 묻혀 있으면
고생대 양치식물이 원시림을 구축한다
만약에 침묵의 석탄기 숲이 없었다면
빙하기보다 더 혹독한 오늘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적당한 가열과 가압작용을 받아 생성된
흑갈색 가연성 암석이 이 밤을 덥히고 있지만
퇴적된 날들에 매몰된 일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광맥을 찾고 있다
꿈은 쉽게 채굴되지 않고
허기는 단속반처럼 기세등등한데
돌아누울 틈조차 없는 일가족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칼잠은 더욱더 날을 번득이며
무허가의 밤하늘에 무수히 칼금을 긋는다
어린 아들의 칭얼거림에도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일가족의 잠은
문틈으로 스며드는 연탄가스를 적당량 흡입하자
고요한 식물의 꿈이 되어
갱도보다 깊은 서로의 속을 헤아리며
겨울눈을 틔우려고 단단히 오므리고 있다
내 생에 탄광촌
도대체 수직 갱도는 주민들 가슴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던 걸까
미소만 빼고 모든 게 시커먼 탄광촌,
하얗다는 것만으로 이적 표현물이 되는 그곳에서
흰 눈마저도 귀순용사처럼 새까맣게 쏟아져 내렸다
탄가루가 날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막장에서
아버지들이 산업역군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땅벌 같은 아이들은 저마다 탄맥을 찾아 수직 하강했다
세상의 모든 레일은
오직 탄광으로 향할 거라고 믿던 아이들은
일찌감치 캄캄함에 익숙해졌다
갱도는 38선처럼 철통같았기에 자주 무너졌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들킨 것처럼 숨죽여야 했고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이는 속죄양이 되어
탄광촌을 떠나야 했다 마을에 남겨진 아이들은
떠난 아이에 대한 기억을 탄 더미에 파묻곤
시커멓게 흐르는 시냇물에 손을 씻었다
폐광 이후, 사람들은 흑백의 기억을 지우고
총천연색 삼차원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 누구도 무너진 갱도에서 구출되지 못했다
아직도 나는 후미진 골목에서 연탄재를 만나면
들킨 것 같아 함부로 걷어찬다.
자위적 발포
몽정을 할까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대청마루에서 뒤척이다가
잠결에 귓속말로 들었다
엄마와 이모는 머리를 맞대고
봄밤의 정적을 깨물며 속삭였다
총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어김없이 탄알은 서늘한 등짝에 박혔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구멍 숭숭 뚫린 밤하늘을 끌어당겨
하얗게 질린 얼굴을 덮었다
꿈속에서 엄마는 내 시신을 찾아 헤매 다녔다
끝끝내 들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물보다 진한 정액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희멀건 정액으로 얼룩진 팬티를
옷장 깊숙이 감췄으나
자꾸 발기하는 사타구니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끊임없이 나를 검열해야 했고
문득문득 불심검문에 걸려들었다
불순하게 발기하는 날들,
잔혹한 폭력을 상상하며 자위행위를 했다
자위적 발포인 양 정액을 쏟아내고
백기를 펄럭이듯 화장지로 훔치면
움츠러든 사타구니는 시무룩했지만
사정권에서 벗어난 것처럼 안심이었다
비릿한 생을 발칙하게 창밖에 내다 건
꽃들이 한꺼번에 떨어져 내렸다.
딱지치기
쉽게 접혀지지 않는 날들이었다
통일달리기처럼 지루하게 반복되는 시간을
억지로 구겨 손바닥으로 꾹꾹 누를 때마다
바드득 어금니를 갈며 밤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밥상을 뒤집어엎는 일로 하루를 마감했다
나는 국물을 뒤집어쓴 채
달력에 남아 있는 날들을 몰래 들춰봤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재빨리 뜯어낸 달력이
딱지가 되어 빳빳하게 날을 세우면
나는 치기배처럼 후미진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세상은 거대한 정화조였다
그래도 걸러지지 않는 불순물 같은 아이들은
쉽게 엉켜 정치판모양 딱지치기를 했다
도대체 무엇을 뒤집어엎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나가떨어지기 일쑤였고
허망하게 뜯겨나간 일기장은
배설의 흔적을 지웠다
위인전 책 표지를 뜯어 딱지로 접으며
내일을 기약해 보려 했지만
쌀자루까지 탐욕의 눈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보도블록으로 일으켜 세운 세상
밤이 깊도록 사내는 보도블록을 깔고 있다
그의 길은 해체된 지 오래,
낮에 엉망이 된 보도블록을 파헤칠 때 사내는
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아픔에
완강하게 버텨온 어깨를 허물 수밖에 없었다
들쭉날쭉한 보도블록은 행인들의 발을 잡아채기도 하고
밟을라치면 지뢰처럼 행인에게 물폭탄을 퍼붓기 일쑤,
조각조각 흩어진 날들을 짜 맞추는 사내의 손놀림은
꼼꼼하고 세심하다 조각과 조각 사이에
끈끈한 온정을 덧바르고 한 치의 틈도 허용치 않는다
그는 길과 불화했던 걸음걸음을 되밟는다
보도블록을 땅바닥에 있는 힘껏 내동댕이쳐서
그 잔해로 벌였던 투쟁의 날들,
이제 그는 자신이 허공에 내던져야 했던
젊은 날의 고뇌와 열정의 부스러기를 모아
걸음과 길의 합일점에 찾고 있다
사내의 어깨 위에서 밤하늘이 자꾸 칭얼거린다
누군가에겐 보도블록이 빛이 된다는 걸 알기에
그는 한 조각도 소홀함이 없이 모자이크한다
사내의 긴 궤적을 쫓아
별똥별이 급하게 밑줄을 그었다
[소설당선작] 알터에고(Alter Ego) (성민)
알터에고(Alter Ego)
성 민
오늘도 ‘알터에고’는 보이지 않았다. 예시장으로 들어온 마필관리사들 중에 사내의 모습이 보였지만 사내가 고삐를 쥐고 있는 말은 알터에고가 아니었다. 먼 곳을 바라보던 녀석의 두 눈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깊고 투명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두운 눈은 사내의 이마에 있는 상처를 떠오르게 했다.
탕!
경주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렸다. 게이트가 열리자 열두 마리의 경주마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기수를 태운 말들이 획 획 바람을 가르며 아득한 주로를 달려갔다. 우우우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오월이건만 날씨가 을씨년스럽고 황량했다. 황사는 모든 걸 뒤덮고 있었다. 경주로 뒤편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의 능선은 물론, 실시간으로 변하는 대형 전광판의 숫자와 경주마의 마번(馬番)까지 모든 걸 집어삼켰다가 다시 흐릿하게 모습을 토해내곤 했다. 어디선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무덤처럼 보이는 경주로 뒤쪽의 산에서 나는 소리 같기도 했고 그의 몸 안에서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짐승의 신음처럼 기묘한 울음소리가 그의 귓전을 떠돌았다.
3번마 ‘하늘의 빛’이 경주로 맨 앞을 질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를 1번마 ‘미드필드’가 추격하고 있었다. 기수들이 말의 속력을 내기 위해 채찍을 휘둘렀다. 1번마가 거의 1마신 차이로 3번마를 앞서서 달리자 선두를 놓치지 않으려는 3번마 ‘하늘의 빛’이 그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달려갔다. 관람대의 사람들이 흥분에 휩싸여갔다. 선행마들의 말발굽에서 튕겨 나오는 모래를 뒤집어쓰면서 추입마들이 무서운 속도로 그 뒤를 추격했다. 거친 황사로 뿌옇게 앞이 가려진 상태에서 말발굽소리만 요란하게 경주로 바닥을 울리며 들려왔다. 전광판 위에서 춤추듯 점멸하던 숫자들이 사방으로 번지면서 퍼져나가더니 갑자기 수많은 나비가 되어 날아왔다. 허공으로 빨려 들 것처럼 날갯짓을 하던 나비들이 그의 앞에서 툭, 아래로 떨어졌다. 나비의 등엔 핀이 꽂혀 있었다. 예리한 흉기가 그의 등을 쑤시고 들어오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머리를 뒤흔들며 주위를 바라보았다. 나비는 보이지 않았다. 말들이 다시 한 무더기로 뭉쳐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추입마의 뒷발에 선행마의 앞발이 얽혀드는 듯 하더니 말들이 동시에 몸을 비틀거렸다. 기수들이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다가는 가까스로 다시 고삐를 잡고 질주했다. 착순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말들이 동시에 결승선을 향해 달려왔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다. 흥분에 휩싸인 군중들이 서로 자기가 배팅한 말이 일등이라며 외치고 있을 때, 전광판 위로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는 말들이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었다. 착순을 판정하기 위해 설치된 고속착순 카메라는 달려오는 말들의 차이를 1/100초까지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정밀했다. 뒤늦게 추격해온 1번마 미드필드가 3번마와 한 코 차도 안 되는 차이로 앞서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었다.
손에 쥔 마권을 구기며 그는 터벅터벅 관람대를 내려갔다. 속이 부대끼며 허기가 져오기 시작했다. 그는 매점을 향해 걸었다. 마른 빵을 사서 간단히 끼니를 때우다 보니 생목이 올라왔다. 주머니에서 소주를 꺼내 입안으로 들이붓자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까지 거른 위장이 요동치며 찌르르 아픔이 느껴졌다. 그는 먹던 빵을 가방에 구겨 넣고 경기장 트랙 안쪽 공원으로 향했다. 관람대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가족 단위 소풍객들과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람들과 성장을 한 채 서로 손을 잡고 걷는 젊은 남녀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 모습을 마주쳐도 이제 그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느새 오십이었다. 군 제대 후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은 그가 요양원을 드나들다가 마지막으로 그곳을 나왔을 때 그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그를 보며 가슴앓이를 하던 어머니는 이미 숨졌고 그의 집 역시 오랜 병치레로 날아갔다. 도로변의 잡초를 뽑는 공공근로를 거쳐 새벽마다 인력시장에 나가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몸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퇴짜를 받았다. 어느 날 그는 일자리를 얻지 못한 동료들과 어울려 경마장에 갔다. 그때 그는 수많은 인파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당에서 과천 행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길은 자동차의 행렬로 꽉 차 있었고 경마장 입구는 마치 천국이라도 되는 양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몰려든 것처럼 붐볐다. 주변이 탁 트인 그곳에서 그는 모처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지막 직선 주로가 끝나면 사람들은 전광판의 배당을 보며 쾌재를 부르기도 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 역시 그랬다. 바람에 갈기를 날리며 질주하는 ‘알터에고’를 보았을 때 답답했던 가슴이 확 뚫리며 등의 통증이 사라졌다. 그날 그는 이만 원 어치 마권을 샀고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이백만원에 가까운 거금을 벌어들였다. 알터에고에게 배팅한 마권이 적중했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 후로 그는 늘 이곳을 찾아왔다. 그러나 처음과 같은 횡재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줄곧 이곳을 찾았다. 꼭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주로를 따라 질주하는 말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앞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면 그가 낯선 곳에, 지금 여기와는 전혀 다른 곳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장외객석으로 올라가 실내를 둘러보았다. 뿌연 담배연기가 가득 고여 있는 곳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다음 경기의 선전을 기대하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출처가 불확실한 온갖 소문들이 난무했다. 그곳은 우승과 관련해 조금이라도 미리 정보를 캐내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또다시 음악이 흘러나왔다. 다음 경기에 등장하는 출주마들이 폐쇄회로화면을 통해 소개되고 있었다. 여전히 알터에고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부상이 회복되지 못한 탓일까. 벌써 몇 달 째 녀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혹 진입악벽으로 인해 퇴출된 건 아닐까? 언젠가 발주대 앞에서 번번이 진입을 거부하는 녀석의 등 위에 사정없이 채찍이 내리친 적이 있었다. 그날 채찍을 피해 발주기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던 녀석이 갑자기 주로의 중반쯤에서 다리가 꺾이며 주저앉았다. 관람대 여기저기서 왜 하필 자기가 찍은 말이 넘어지냐며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 역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알터에고는 그가 배팅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리를 절뚝이며 끙끙대는 모습을 본 순간, 고통이 그의 가슴을 찌르며 전해졌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는데도 녀석의 눈에 가득 고여 있는 눈물이 그의 시야로 들어왔다. 어디서 본 것일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는 언젠가 그런 눈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 눈빛이 그림자처럼 그의 주위를 배회했다. 밤이 되어 불을 끄고 누우면 어두운 허공을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그를 쳐다보았고, 눈을 감으면 몽롱하게 피어나는 꿈처럼 그의 의식을 두드렸다. 그럴 때면 뿌옇게 안개가 끼어있는 듯한 그의 머리에 찰칵 불이 들어오며 무엇인가 떠오르다가는 다시 사라졌다.
진입악벽이 있기는 했지만 알터에고는 뛰어난 경주마였다. 앞 몸집이 발달하여 가슴이 넓고 무릎 아래 관 부분과 긴 앞다리가 균형을 이루며 항상 일이착을 다투는 명마였다. 다른 서러브렛(through bred)종처럼 알터에고 역시 경주를 위해 철저히 개량된 품종이었다. 초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자라나던 말들은 이곳으로 팔려와 경주용으로 길러지면서 매일 주로를 달리고 출전하고 입상을 해야 했다. 경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그들은 거세가 되기도 했고 눈 주위에 가리개를 착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소리 없이 사라지곤 했다. 경마장에 있는 천 사백 마리 경주마 중 해마다 이백 마리 정도가 퇴사했다. 공식적으론 일 년간 오착 안에 든 적이 없으면 경주부적격마로 판정되어 암말은 번식용으로, 수말은 승용이나 교육마로, 또 일부분은 폐사되거나 말고기로 팔려나갔다. 경주마 한 마리쯤 죽어나가는 것은 경마장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경마장에 모여든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번 빠져들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절대 그만둘 수 없어.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마권을 사기 위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대열에 합류한 그 역시 가슴이 설레었다. 열기에 사로잡혀 무엇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껍데기뿐인 자신이 아직은 살아있다는 생각과 함께 어떤 의지가 솟구쳤다. 하지만 술에 취한 채 아무 생각 없이 장내를 떠도는 사채를 끌어 쓴 게 화근이었다.
오월 말일까지야. 그때도 어기면 네 몸뚱이를 갈아버리겠어. 독사처럼 눈을 부라리던 사채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조금만 더 상환기간을 늦춰달라고 요구하자 사채꾼은 다짜고짜 하얀 종이를 내밀었다. 신체포기각서였다. <기일 내에 채무를 변제하지 못할 경우 내 몸을 마음대로 해도 좋으며 장기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 기일이 바로 이달 말까지였고 오늘은 경마가 열리는 오월의 마지막 마요일이었다.
굵은 모래알갱이가 섞인 바람이 그의 얼굴로 와서 부딪혔다. 흠칫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자 황사로 뒤덮인 뿌연 하늘이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눈 안에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버석거렸다. 눈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모래가 와르르 쏟아져 나올 것처럼 온 몸이 버석거렸다. 망각 속에서 벌써 삼십여 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에게 기억이란 모래처럼 버석거리며 알알이 흩어져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그가 견디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인지도 몰랐다. 때때로 그는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에 놀라며 거울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면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반쯤 입이 벌어진 남자가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멍하니 허공을 향해 있었고 마권을 쥐고 있는 손은 수전증환자처럼 떨리듯 움직였다. 무엇인가가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때로 조각난 퍼즐처럼 낯선 장면들이 떠오르곤 했다. 낮은 담장을 따라 만들어진 화단에는 꽃이 피어있었고 나비가 날아다녔다. 한 소년이 나비를 잡아 양 날개 사이의 몸통에 핀을 꽂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름 방학이 끝나면 소년은 나비의 표본을 상자에 담아 학교에 가져갔다. 선생님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했다. 그 소년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그리고 대학에 진학했던 과정은 꿈결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그 후 소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는 지금도 확신할 수가 없다. 누군가 총을 들고 자신을 쫓아오는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예리한 핀으로 등이 찔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알맹이가 쑥 빠져나가버린 것 같은 그를 어머니는 울면서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그의 증세는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다소 증세가 완화되었을 때 그는 동네에 있는 작은 출력소에 취직을 했다. 그 해 먼 친척의 소개로 결혼을 했고 이듬해 아이를 낳았다. 그의 어머니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당에 있던 꽃들이 다시 피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복사기 앞에 서있다 보면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에 머릿속이 이글거렸고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머리가 아파왔다. 그는 참을 수 없는 두통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때로 폭발하듯 분노가 일었다. 그럴 때면 자기도 모르게 행동이 난폭해졌다. 어느 날 네 살 난 아들이 총을 쏘며 노는 걸 보았을 때 그의 머릿속이 갑자기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아들의 온몸이 멍투성이로 변해있었다. 그날 이후 그의 오른 손, 특히 두 번째 손가락이 심하게 저리며 무엇인가를 세게 누르며 잡아당긴 기억이 그를 사로잡았다. 한동안 나아진 듯했던 등의 통증이 다시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나 항불안제를 투여 받았지만 약을 먹지 않으면 항상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의 머리를 짓누르는 강박과 환각은 결국 퇴사와 이혼으로 그를 내몰았다.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의 집 마당에 피어있던 꽃들이 다시 시들어갔다.
경주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관람대를 빠져나갔다. 환호와 욕설이 그곳을 휩쓸고 지나갔다. 휴지가 된 마권들이 어지럽게 바람에 날리며 돌아다녔고 바닥에는 담배꽁초와 쓰레기들이 널려있었다. 이분 남짓한 경주가 끝날 때마다 그곳은 침략자에 의해 난도질당한 땅처럼 더럽혀졌다. 그는 술병을 든 채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걸었다. 경기장 트랙 오른쪽으로 나있는 곡선주로를 지나 동물병원 쪽으로 가면 마사(馬舍)가 있었다. 경주가 없을 때면 그는 경기장 주변을 걸어 다니며 배회하곤 했다. 그가 술에 취해 마사를 기웃거릴 때에도 사내는 다른 마필관리사들과 달리 그를 경계하지도, 내치지도 않았다. 사내는 하루 종일 시간에 맞춰 먹이를 주고 배설물을 치우며 알터에고를 돌보았다. 언젠가 날이 몹시 더웠을 때 알터에고의 등에 찬 물을 끼얹으며 더위를 식혀주던 사내의 얼굴에서 뚝 뚝 땀방울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자 어릴 적 등목을 해주던 어머니가 떠올라 그는 덥석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때가 꼬질꼬질 끼어있는 수건을 받아들고도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땀을 닦았다. 그는 물끄러미 알터에고를 바라보았다. 깊고 어두운 녀석의 눈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마음에 들어요? 사내가 다가오며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알터에고는 또 다른 나(alter ego)라는 뜻이오. 그만큼 절친한 친구란 뜻이지. 그러니 당신과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요. 사내가 땀을 닦은 수건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사내의 이마에 있는 흉터를 보았다. 탄피가 박혀있는 것처럼 돌출된 부위에는 오래전에 파열된 흔적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뚫어지게 상처를 쳐다보는 그에게 사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오래전 일이오. 하마터면 죽을 뻔 했지.
또다시 쑤셔오는 등을 움츠리며 그는 앞으로 걸어갔다. 인근의 화훼마을로 이어지는 마사의 끄트머리에 알터에고의 마방(馬房)이 있었다. 짙푸른 갈기를 날리며 주로를 질주하던 녀석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알터에고가 한 번만 제대로 뛰어준다면 사채꾼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알터에고의 마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 가면 예전처럼 녀석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앞을 향해 걸어가던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마방은 텅 비어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진 사람처럼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에 서 있었다. 어디선가 사채꾼이 튀어나와 목에 획 칼을 들이댈 것만 같았다. 그는 술병을 꺼내 미친 듯이 입 안으로 술을 들이부었다. 독사처럼 눈을 부라리던 놈이 그의 몸을 휘감으며 달려드는 듯했다. 하릴없이 그는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 경기장으로 향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보였다.
경주 시작 이십분 전을 알리는 글씨가 다시 경주로의 대형 전광판에 떴다. 음악이 울리자 기수를 태운 말들이 예시장으로 들어왔다. 일번부터 십이 번까지 마번(馬番)에 따라 색을 달리한 기수의 모자들이 무지개처럼 나타났다가 황사에 가려 사라지곤 했다. 고삐를 손에 쥔 마필관리사들의 보조에 맞춰 등 위에 마번이 붙어있는 말들이 주로를 향해 걸어갔다. 경마해설자와 아나운서가 출주마들을 소개할 때마다 대형 모니터에 말들이 클로즈업되어 나타났다. 무심코 그곳을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사람들을 헤치며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사내였다. 챙이 긴 모자를 쓴 탓에 사내의 이마에 있는 상처는 보이지 않았지만 사내가 고삐를 쥐고 있는 말은 분명 알터에고였다. 순간 먼 기억 속에서 그를 바라보던 어떤 얼굴이 획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알터에고가 바람에 갈기를 날리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 곳을 보는 것은 멀리 달리고 싶은 마음을 나타내는 거라오. 사내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졌다. 하루에 한번쯤은 고배당이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부상을 당했던 알터에고보다는 트라이엄프가 우승확률이 높겠지만, 알터에고가 제대로 뛰어주기만 한다면 훨씬 더 높은 배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위험부담이 높고 승률이 낮을수록 배당률이 높아지게 마련이었다. 그래야만 끝도 없이 불어나는 사채를 갚을 수 있었다. 마권을 사려는 사람들이 다시 마권구매창구로 모여들었다. 그는 주머니를 다 털어 마권을 구입했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돈 전부였다. 마지막 배팅이었다.
황사로 뒤덮여있던 하늘에 까만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갑자기 해가 사라진 것처럼 경기장 전체가 어두워졌다. 경주 시작 오 분을 남겨두고 마권구매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전광판의 숫자들이 빠르게 변해갔다. 매초마다 급격히 변해가는 배당률을 따라 사람들의 눈동자가 쫓기듯 움직였다. 어느 말에 배팅을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예상지와 전광판과 모니터를 번갈아보며 분주히 움직였다. 경주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파란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주먹을 꽉 쥔 그의 손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나왔다.
탕!
경주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렸다.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경주마들의. 말발굽소리가 산하를 유린하듯 요란하게 들려왔다. 8번마 트라이엄프가 3번, 11번의 선행마를 이끌며 선두로 달리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비쳤다. 8, 7, 4, 3, 32, 325, ・・・・・・. 배당판의 숫자들이 어지럽게 그의 머릿속을 난타했다. 아우성을 치며 불어오는 바람이 경주로 바닥에 깔려있는 모래를 휘저으며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의 귓전으로 거친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뿌연 모래들이 마치 최루탄 연기처럼 그의 시야를 가렸다.
툭, 그의 머리 위로 굵은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우뢰같은 천둥소리와 함께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이 긴 세월을 뚫고 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갈기를 휘날리며 앞을 다투어 질주하는 말들을 보자 그의 다리가 경주마의 다리처럼 앞을 향해 내지르는 것 같았다. 그는 다리에 꽉, 힘을 주며 버티고 서있었다. 말의 격한 울음소리가 마치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처럼 들렸다.
천둥과 폭우에도 아랑곳없이 사람들은 질주하는 말들의 행로를 쫒아 눈동자를 움직였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경주로 위에 뽀얀 비안개를 만들어냈다. 관람대와 전광판이 비에 젖어 번들거렸다. 주로에 물이 괴기 시작했다. 그 위를 경주마들이 허옇게 물을 튀기면서 달려갔다. 알터에고가 트라이엄프의 뒤를 바짝 추격하기 시작했다. 엇갈린 기대에 사람들의 환호성과 욕설이 동시에 쏟아졌다.
곡선주로를 돌아 직선주로를 달려가는 말발굽소리가 밀물처럼 밀려오자 조급해진 사람들이 관람대를 나와 안전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병사들처럼, 처음엔 한 두 명이 앞으로 나서는가 싶더니 점점 그 수가 늘어났다. 그 역시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떨리는 손, 젖어있는 눈, 술에 취해 휘청이며 그는 안전대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 드디어 알터에고가 트라이엄프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번쩍 손을 들어 올려 환호성을 내질렀다. 비로소 사채꾼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승선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괴성을 질러댔다. 기수들이 휘두르는 채찍이 총검처럼 번득였다. 그때였다. 안쪽 주로에서 트라이엄프를 반마신쯤 앞서서 달리던 알터에고가 갑자기 온몸을 비틀며 튀어 올랐다.
안돼!
그가 충격에 휩싸여 절망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질주하던 말들이 진로를 방해받자 제 페이스를 잃고 서로 추돌하기 시작했다.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등 위에서 기수를 떨쳐낸 알터에고가 주로를 벗어나 경기장 바깥쪽으로 내달렸다. 넋이 나간 듯 그 광경을 바라보던 그가 안전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돌아와, 제발!
그는 알터에고를 향해 외쳤다. 넌 경주마야. 채찍에 복종해. 그러지 않으면 누군가 네 등에 총구를 들이댈 거야. 그러니 제발 돌아와, 앞으로 달려가!
그는 계속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안전대를 올라가던 그의 발이 미끄러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다시 일어나 위로 올라갔다. 알터에고는 계속 경주로 바깥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날개가 짓이겨진 나비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날갯짓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 시간 그들의 몸에 꽂혀있던 핀들이 우수수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놀라 다시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나비처럼 알터에고가 온 힘을 다해 앞발을 치켜들고 있었다. 안전대를 넘은 그가 주로를 가로질러 알터에고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사내가 그의 뒤를 쫓았다.
주로에서는 성난 말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뒤늦게 달려오던 말들이 놀라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관성에 충실한 몇몇 말들이 무참히 그를 밀치며 지나갔다. 사내가 다가와 그의 몸을 일으켰다. 환호와 욕설이 관중석에서 쏟아져 나왔다. 돌발변수로 경주를 망쳤다며 환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마권구매창구로 몰려들었다. 안전요원이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구급차의 사이렌소리가 요란하게 그의 귓전을 울렸다.
격렬한 통증이 그의 몸을 훑으며 지나갔다. 그는 눈을 떠 주위를 돌아보았다. 의무실 창 앞에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의 어깨 너머 주로를 정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비는 어느새 잦아들어 있었다.
정신이 드오?
사내가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원망하듯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나를 구했어요?
무슨 말이오. 조금만 늦었으면 당신은 말들한테 짓밟혀버렸을 거요.
어차피 난 죽어야 할 인간이에요.
초점을 잃은 그의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려요. 대체 무슨 일이오?
답답한 듯 사내가 그를 다그치며 물었다.
날 그냥 내버려둬요. 술이나 좀 줘요. 술을…….
체념한 듯 그를 바라보던 사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라고 속이 좋은 건 아니오. 알터에고는 내가 가장 아끼던 말이었소.
더 이상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의무실 안이 환해지며 빛이 들어왔다. 절망한 듯 몸을 웅크리고 있던 그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부신 햇빛이 검은 구름을 가르며 그 사이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빛을 본 적이 있소? 희망을 가져본 적이 있느냐 말이오.
사내가 다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딱 한번 빛을 본 적이 있소. 내 고향에서였소. 그때 그곳은 거리마다 시체가 넘쳐났지. 관이 모자라 긴 상자에 시체를 넣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우린 계속 노래를 불렀어요. 죽음을 앞두고 한바탕 축제를 벌인 거라오.
사내의 말을 듣는 그의 얼굴에 공포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계속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끝까지 총을 잡고 있었소. 그곳을 지키고 있던 건 바로 나 같은 사람들이었소. 힘없고 갈 곳이 없는 사람들. 그때 우린 꿈을 꾸었던 거요. 날이 밝으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그곳에 있었던 거요. 새벽에 총성이 울렸지. 그리고 모든 건 사라졌소.
그가 몸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한 열기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거칠게 질주하는 말발굽소리가 진압군의 군화발 소리로 변해갔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매운 연기가 가득한 캠퍼스에서 도망치듯 군에 입대한 그는 어느 날 트럭에 실려 밤새도록 남쪽으로 내려갔다.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쏘고 싶어서 쏜 것도 아니었다. 시위대의 물결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총성이 들려왔다. 중화기의 발사 소리가 천지를 뒤흔드는 듯했다. 시위대열에서 빠져나온 한 청년이 대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몸을 피했다. 그는 정신없이 청년의 뒤를 쫓아갔다. 그 골목엔 어릴 적 집에서 보았던 것처럼 낮은 담장 아래 화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올망졸망하게 피어있는 꽃들 위로 나비가 날아다녔다. 금세 사라질 것처럼 허공을 떠다니는 나비들이 봄날의 햇살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그때 하늘을 향해 쏘아대는 공포탄 소리가 들렸다. 발포명령을 알리는 소리였다. 총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떨려왔다. 뒤쫓아 온 상관이 그의 등에 총구를 들이대며 말했다. 네가 쏘지 않으면 네가 죽을 것이다! 등뼈를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공포가 그의 몸을 훑으며 지나갔다. 방아쇠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총구 안으로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청년의 주위엔 나비가 날고 있었다. 그는 나비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탕! 탕탕탕탕탕……. 한번 쏘아진 총은 멈추지 않고 계속 쏘아졌다. 허공을 날아다니던 나비들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청년의 머리가 푹 꺾였다. 순간 그의 몸 안에서 무엇인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몸통에 핀이 꽂힌 나비처럼 그의 등에 꽂혔던 상관의 총구가 그의 정신을 앗아가며 아무것도 없는 진공 속으로 몰아넣었다.
으윽. 그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갇혀있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그는 간신히 버티고 서있었다. 알터에고의 눈은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청년의 눈을 닮아 있었다. 청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가슴이 젖어들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사내의 이마에 난 상처를 보며 그가 말했다.
미안해요.
모래처럼 버석거리던 그의 마른 눈가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혹감에 사내는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다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색으로 마번이 찍혀있는 말들이 미친 듯이 주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길들여져 있었어요. 총소리가 나면 무조건 앞으로 달려가는 말처럼.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으며 그가 울음을 터뜨렸다. 마침내 사내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떨며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잠시 후 사내가 떨고 있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내 얼굴을 봐요. 한때 내가 절실하게 꿈을 가졌고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는 증거요. 나도 당신처럼 죽으려고 한 적이 있었소. 모든 걸 잊고 싶었지. 하지만 난 다시 기억하기 시작했소. 바로 이 상처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는 걸 말이오.
술로 채워진 그의 위장이 심하게 부대껴왔다. 그의 내장 깊숙이 박혀있던 고통들이 회오리치며 몸 밖으로 밀려나왔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고 토악질을 해댔다. 사내가 부드럽게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또다시 경주가 시작되는 발포음이 들렸다. 사내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녀석은 더 이상 경주에 설 수 없게 될 것이오. 어쩌면 폐사될 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기가 원한 길을 간 것이오.
그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황사가 걷힌 파란 하늘 아래에서 다시 경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먼 길을 돌아온 자신이 이제야 출발선에 서있는 것 같았다. 기수를 태운 말들이 획 획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주로를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그를 쫓는 사채꾼의 발걸음처럼 그 소리가 그의 귓전으로 달려들었다. 몸 안에 있는 장기(臟器)들이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다시 공포가 밀려왔다.
2013년 5·18문학상(제9회) 수상작 발표
2013년 5·18문학상 수상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감사드립니다. 당선된 작가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부문 |
수상작품 |
당선자 |
시 |
서소문 밖 |
김태인 |
소설 |
제비집 |
박탐유(본명 박지희) |
동화 |
그림자가 된 상철이 |
장광균 |
2013년 5월 2일
5·18기념재단
■ 2013년 제9회 5·18문학상 공모결과
부문 |
응모수 |
시 |
163명(845편) |
소설 |
101편 |
동화 |
50편 |
■ 심사위원 : 시 3인, 소설 3인, 동화 1인 총 7인 선정
|
시 |
소설 |
동화 |
예심 |
고재종, 이승철 |
김형중, 공선옥 |
박상률 |
본심 |
정희성 |
현기영 |
박상률 |
■ 심사평
<시부문>
<예심> 고재종
<예심통과작>
1. 차 한 잔에는 외 4편
2. 봄날 버스 외 6편
3. 거울과 소년 외 6편
4. 무간도 외 8편
5. 조롱박이 된 주먹밥 외 6편
모두 163명의 845편의 응모작을 읽었다. 하릴없는 삼류 사랑타령과 열혈청년 기질의 피 튀기는 구호의 숲에서 건져낸 작품은 20여명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들의 수준은 예전보다 기량 면에서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으나 여전히 문제의식 면에선 후한 점수를 줄 수 없었다. 그 중 나는 5편을 주목하였는데, 「아내의 자리」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시선이 너무도 진정스러워 작품을 보다가 하마터면 울 뻔했다. 「광주」는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 십자가여!」 이후 광주를 제대로 그리고 폭넓게 은유화 해내며 큰 감동을 자아냈다. 「점, 구름의 고고학」은 자신의 생은 알지 못하고 "남의 생만 읽을 수 있는 여자" 곧 점치는 여자를 구름의 고고학으로 읽어내는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고독사」는 "한생의 밑바닥을 토해내는 라마승처럼 아무런 남길 것이 없이" 고독사한 사람을 독사와 매칭시켜 팩트와 상상력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 수작이었다. 「사이시옷과 사람 인(人)」은 산동네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며 내는 '파찰음'을 알뜰살뜰 따뜻한 인정의 '접속사'로 이어내는 솜씨가 이미 기성작가 수준이었다. 이 분들은 누구를 뽑아도 괜찮을 수준을 보여주어 작품을 읽는 내내 마음이 설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예심> 이승철
<예심통과작>
1. 봄날 버스 외 6편
2. 일요일 외 5편
3. 치약의 전설 외 5편
4. 꽃샘추위 외 6편
5. 무간도 외 8편
<5·18>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지난해보다 많은 편이어서 좋았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시각이 돋보여 심사자의 마음을 흡족케 했다. 시상(詩想)의 상투성, 단조로움을 벗어난 작품을 찾으려고 했다. 문학은‘언어를 구원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문제는 사물과 현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적 통찰력의 남다름과 언어를 상투화 시키지 않되, 세상 속 비의를 발견케 하는 시적 자세가 중요하다. 또한‘신인'에 걸맞는 패기, 진정성, 세상과의 대결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선정작 5명의 간략한 평은 이렇다. 「봄날 버스 외 6편」은 광주항쟁의 전과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일요일 외 5편」은 일상의 삶과 현대인의 소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치약의 전설 외 5편」은 사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는 발견의 시각을 갖추고 있다. 「꽃샘추위 외 6편」은 치열한 주제의식이 돋보인다. 「무간도 외 8편」은 다양한 시각과 시적 형식의 새로운 시도가 엿보인다.
<본심> 정희성
예심을 통해 올라온 여덟 분의 작품을 일독하고 그중 세 분의 작품 「봄날 버스 외 6편」과 「무간도 외 8편」과 「조롱박이 된 주먹밥 외 6편」으로 범위를 좁혔다. 명색이 5·18문학상이라면 그 명칭에 걸맞는 주제의식에서 자유롭기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시가 반드시 5·18을 소재로 다루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5·18에 광주라는 지역명칭을 얹는 것도 5·18을 협소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5·18은 4·19와 같은 것이지 ‘광주사태’는 아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민중들의 열망’이 담겨있는 작품이면 5·18문학상에 값한다고 보았다.
세 분의 작품 가운데 「봄날 버스 외 6편」은 5·18 당시의 참상을 재구성하는 형식으로 사건을 정밀하게 묘사하고는 있지만 강렬한 시적 감동에는 이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조롱박이 된 주먹밥 외 6편」도 주제의식이 강하고 감정이 잘 절제된 단정한 시였다. 그러나 ‘주먹밥’이라는 이미지가 주제의식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상투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눈에 거슬렸다.
「무간도 외 8편」은 한편 한편이 짜임새가 있고 참신해 보였다. 그 가운데서 「서소문 밖」에 눈이 간 것은 주제와의 관련성이 돋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서소문 밖 순교자 헌양탑 이야기에 주력하면서 그 위에 슬그머니 5·18을 오버랩시키는 수법이 자못 능청스럽다. 이는 5·18을 정면에서 접근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형상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시상(詩想)의 단조로움을 벗어나 시적형식의 새로움이 엿보이고,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적 통찰력이 남달랐다. “누구든 자신의 믿음에 목을 걸 수 있다면....순교가 아닐까”,“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시행은 천주교 순교자만을 겨냥해서 하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본심 심사위원으로서 이 시를 맛있는 시로 보고 당선작으로 추천하며 아직 이름을 모르는 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한다.
<선정작> 서소문 밖 / 김태인 작
<소설부문>
<예심> 공선옥
1. 나는 기억의 해법을 선택했다
2. 발트해의 붉은 숲
3. 오래된 집
4. 새들처럼
5. 1996년 오월의 이야기
좋은 작품이 없는 심사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곤혹스런 일이다. 또한 작가가 자신의 작품 말고 다른 이의 작품을 심사한다는 사실 자체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먼저 그 일,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소위 '심사위원'이 되기도 하고 또 되어야 할 상황이 오는 것이 민망할 일이다. 그런 곤혼스러움, 그런 민망한 마음으로 5·18기념재단에서 보내온 5·18문학상 '심사자료'인 작품들을 읽어보았다. 우선 나는 5·18문학상이라는 이름의 '문학상'에 응모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가 궁금했다. '오월'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각성하면서 5·18문학상에 응모할 글을 써야, 옳은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 말이다. 내가 만약에 5·18문학상에 응모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우선 '광주'에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광주'를 포함한 인간 세상 전반의 비극과 희극을 잊지도 않을 것이다. 적어도 작가라면 '광주'를 이렇게까지 도식적으로, 혹은 이렇까지 단순화시켜서 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또는 사람들에 의해 '광주'가 형상화되는 것들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가 사실 지난 30년 동안 한치의 의식의 발전도 없었던 성 싶다. '광주'는, 혹은 '광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 '슬픔'이나 '고통'의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 한 프레임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결국 돈이 아니라, 고통이나 슬픔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 정도이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인데, 문학에서 고통이나 슬픔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고 결과가 어떻게 드러나느냐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5.18문학상에 응모되어 오는 작품들에서 바로 그 점, 인간 삶 전반의 비극과 희극을 바라보는 글쓴이의 마음이 깊이와 넓이를, 마음 속 시선을 가늠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시도가 굉장히 지난한 일임을 작품들을 살펴보고 알았다. 5·18문학상이 제 유치한 의식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러내는 속된 경연장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로 심사평을 가름하겠다.
<예심> 김형중
1. 발트해의 붉은 숲
2. 7인의 김사장
3. 천 개의 언덕
4. 카메라
5. 제비집
올해 5·18문학상 소설 부문 공모에 접수된 작품은 총 101편이었다. 예년에 비할 때 급격하게 많은 수의 공모자가 작품을 보내온 셈이었고 따라서 심사위원으로서 고무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대만큼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는 않았다. 분량과 문장력에 있어 함량 미달인 작품들을 우선 탈락시켰다. 그리고 지나치게 도식적인 작품들, 가령 80년 오월의 기억을 알려진 사료 몇 가지를 동원해 감상적이고 회고적으로 그린 작품들도 제외시켰다. 5·18이 문학적으로도 여전히 유의미한 사건이기 위해서는 그것의 변주와 계승이 중요하다. 즉 회고와 반추만으로 오월문학이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형식상의 새로움이나 실험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주제에 있어서도 인권 문제, 외국인 노동자 문제, 국제적 연대 문제, 철거민 문제, 청년 실업 문제, 분단 문제 등등, 오월의 정신과 맞닿아 있는 작금의 사회적 이슈들은 다종다기하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심사의 기준은 오월 정신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해 가지는 의의를 새로운 문학적 언어로 적절하게 형상화하고 있는가 하는 점일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이 기준을 충족시킬 만한 작품들이 많지는 않았다.
「발트해의 붉은 숲」, 「7인의 김사장」, 「천 개의 언덕」, 「카메라」, 「제비집」 이렇게 다섯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오를 만했다. 다섯 작품 모두 일정한 습작기를 거친 후의 결과물로 여겨도 될 만큼 구성이나 문장이 다듬어져 있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5·18의 현재화라는 본 문학상의 취지에 나름대로 부합했다.
<본심> 현기영
응모작품은 총 101편이었는데, 그 중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천개의 언덕」 「카메라」 「5월의 이야기」 「7인의 김사장」 「오래된 집」 「새들처럼」 「제비집」 「나는 기억의 해법을 선택했다」 「발트해의 붉은 숲」 등 모두 9편이었다. 이들 중에 우선 다음의 3편을 뽑아놓고 세심한 고려 끝에 「제비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들 3편의 작품은 문학성의 기준에서 본다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막상막하의 기량을 보이고 있다. 일반 문학상이었다면 아마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문학상은 ‘5월의 정신’을 요구한다. 비슷한 문학적 수준이라면, 아무래도‘5월의 정신’을 보다 더 치열하게 반영한 작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5월의 정신’인가? 모집 요강에 ‘민주·인권·생명·평화·통일·대동세상’이라고 적시되어 있지만, 그러한 주제를 담는 그릇은 거시서사, 즉 리얼리즘의 문학일 수밖에 없다. 요즘의 문학 경향을 보면, 일상을 다루는 미시서사가 대세이다시피 되어 있고, 문학상들도 대체로 그러한 문학에 주어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5·18문학상은 반드시 거시서사의 리얼리즘 문학을 옹호하는 상이어야 할 것이다.
「제비집」
이 작품은 중국인 사장이 군림하는 다국적 전자회사의 노사 분규를 다루고 있다. 이 사회의 최대 쟁점 중 하나가 노사분규이므로 그것을 다루는 좋은 문학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아쉽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독자의 흥미를 끌기에는 내용과 표현의 방법이 진부하고 도식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비집」은 우선 읽는 재미가 있다. 경영합리화를 내세운 대량해고 조치에 맞선 노조와 사측에 붙어서 노조에 맞선 구사대의 대립과 갈등의 정황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는데, 주인공이 구사대의 선봉에 선 여성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주인공은 물론 노련한 노조 위원장의 인물 현상화도 잘 되어 있다. 최종의 큰 싸움에서 중상을 입은 주인공은 그제야 자신이 중국인 사장의 꼭두각시임을 깨닫게 되고, 그러한 그녀를 노조위원장이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하는 마지막 장면이 특히 감동적인데, 신파조의 위험을 용케 피하고 있어 반가웠다. 불만을 말한다면 맨 앞부분이 지나치게 환상적으로 처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오래된 집」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행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야산을 깎아 평지를 만드는 공사현장이 무대인데, 파낸 바위들과 싯누런 생흙과 빗물 먹은 진창 속에서 중장비 두 대가 으르렁거리는 그 야성적 분위기가 호감이 간다. 주인공인 굴삭기 운전자와 나중에 성폭행범으로 판명된 덤프트럭 운전자와의 대립구도도 잘 되어 있다. 그러나 어린 여학생의 모습과 행동은 형상화가 잘 안 된 채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단점이었다.
「7인의 김사장」
재개발지역의 세입자 상인들이 벌이는 생존권 투쟁의 현장을 그린 것이 이 소설이다. 주인공 김사장의 성격묘사가 잘 되어있다. 고집세면서도 단순 소박하기 짝이 없어 웃음이 나오는 인물, 이 사회의 전형적 서민의 모습이다. 투쟁 현장이 아주 세세하고 유머러스하게 묘사되어 있어 현실감을 준다. 그러나 결말 부분이 너무 갑자기, 너무 맥없이 처리되어 버린 것이 큰 흠이었다.
<선정작> 제비집 / 박탐유 작
<동화부문>
<예심·본심> 박상률
<예선통과작>
1. 그림자가 된 상철이
2. 학교 가는 길
3. 할머니와 감자꽃
4.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가을
5. 빼앗긴 오월
단편 소설에선 등장인물의 행동을 주로 묘사한 뒤 종국엔 이야기의 반전을 꾀한다. 반전을 통해 독자의 의표를 찌르기도 한다. 장편 소설의 경우엔 단편의 미덕을 취하되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인물 간의 관계에도 초점을 맞춘다. 이 점, 동화도 마찬가지다. 5·18문학상의 동화는 단편을 공모한다. 그러므로 짧은 이야기 속에 등장인물의 행동을 어떻게 묘사 하였는지, 어떤 반전이 숨어 있는지를 눈여겨보았다.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작품은 장편에 해당할 이야기를 단편에 우겨 넣은 경우도 있고, 아예 장편을 보내기도 했다. 1980년의 5월이 있은 지 30년이 훌쩍 지났다. 그래서 그런지 응모 작품들 가운데 많은 경우 주제와 관련성이 적은 게 아쉬웠다. 입담도 좋고 상상력도 좋았지만 5·18동화라 하기엔 어딘지 석연치 않은 작품들이 많았다. 이야기 가운데 1980년 봄이나 5·18이 들어가기만 한다고 해서 5·18 동화가 되는 게 아니다.
「그림자가 된 상철이」는 1980년 5월에 진압군이었던 왕배 할아버지와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주던 상철이 할머니 이야기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그 때 상황을 알려준 게 아니라 그들의 손주에 이르러서 그때의 상황이 어떻게 재현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술만 마시면‘이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일한 사람’이라며 허세를 부리는 왕배 할아버지. 가난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링거주사 같은 걸 놓아주다가 문제가 된 상철이 할머니. 왕배와 상철이 사이의 ‘어린 주먹’ 세계가 작가의 입담에 실려 잘 그려져 있다. 특히 반전 부분이 어색하지 않다.
「학교 가는 길」은 1980년 당시 초등학교(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외삼촌이 머리를 다쳐 지금도 똥오줌을 제대로 가리지 못한다. 그런 삼촌이 혼자 휠체어를 몰고 학교에 다녀오는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학교는 특수학교다. 외삼촌이 외할머니 도움 없이 자립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외할머니가 언제까지나 삼촌 뒷바라지를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할머니와 감자꽃」은 글씨도 씨앗이라는 발상이 좋다. ‘할머니는 감자씨를 쓰고 아빠의 누나는 글씨를 심고….’. 아빠의 누나는 그해 5월 사라져 여직 생사조차 확인 되지 않는다. 감자씨를 심는 할머니처럼 아빠의 누나는 그 모양을 시로 썼다. 그러나 시는 완성되지 않는다. ‘나’는 마침내 시의 마지막 구절을 쓴다. 그렇게 5·18은 세대를 이어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가을」은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작은 시골학교에 부임했다는 선생님의 이야기다. 구조 자체에 약간 상투성이 보이지만 어린 시절로 돌아간 선생님이 광주에서 전학 온‘아리’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자연스레 ‘광주’를 알게 된 이야기다.
「빼앗긴 오월」은 이야기를 엮어가는 입담도 좋고 5월의 전모도 드러난다. 그러나 단편에 담지 않고 장편에 담은 이야기라 아쉬움이 컸다. 커다란 국그릇에 담긴 이야기와 간장 종지에 담긴 이야기는 다르다.
예심을 통과한 5편 가운데 「그림자가 된 상철이」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광주’가 세대를 내려가며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준 점을 높이 샀다.
<선정작> 그림자가 된 상철이 / 장광균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