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20820/115039780/1
천지인 天地人, 2009
2009년 NHK 대하역사드라마로 히사카 마사시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전국시대 중기부터 에도초기에 걸쳐 살아간 에치고의 명문 우에스기가(家)의 충신 '나오에 카네츠구'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이다.
츠마부키 사토시를 비롯한 아베 히로시, 키타무라 카즈키, 오구리 슌, 나가사와 마사미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
명랑 쾌할하며 다정다감한 성격의 나오에 카네츠구.
노부나가 참살 사건 이후 히데요시가 패권을 쥔 부분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의리를 중요시 하여 자신의 생애를 주군인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위해 전력을 다해 살아간다.
낮은 신분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인정해준 카게카츠에게 은혜를 느끼고 정치 외교적 참모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용모가 수려하며, 애(愛)라는 한자를 투구 앞에 장식한 것으로 유명하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등 권력자들의 싸움은 물론 친구이자 경쟁자인 미츠나리와의 전략 싸움, 세키가하라 전투 등의 볼거리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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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전국시대 지도
http://ja.wikipedia.org/wiki/%E7%9B%B4%E6%B1%9F%E5%85%BC%E7%B6%9A
나오에 카네츠구, (なおえ かねつぐ)
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는 우에스기 데루토라(上杉輝虎. 우에스기 겐신 上杉謙信)의 양자인 우에스기 가게카츠(上杉景勝)를 따라 시동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우에스기 겐신이 죽은 1578년에 일어난 미타테의 난 때는 아버지인 히구치 카네토요(樋口兼豊)와 함께 가게카츠를 따랐습니다.
1580년 8월부터 가게카츠의 중개역 등 측근으로 활동한 내용이 남아있으며 1581년 가게카츠의 측근이었던 나오에 노부츠나(直江信綱), 야마자키 슈우센(山崎秀仙)이 모리 히데히로(毛利秀広)에게 살해되어 나오에 가문의 대가 끊기게 되자 가게카츠의 명에 따라 나오에 노부츠나의 딸과 결혼하여 나오에 가문의 데릴사위로 가문을 잇게 됩니다.
이로써 카네츠구는 에치고 요이타 성의 성주가 되었고 이후 우에스기 가문은 카네츠구와 카노 히데하루(狩野秀治)의 2인이 집정으로 보좌하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들어서고 1584년 말에 히데하루가 병으로 쓰러지자 카네츠구가 내정, 외교 등 대부분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히데하루 사후에는 단독으로 집정이 되었으며 이는 그가 죽을 때 까지 이어지게 되었으며 1586년 상경 중에 가게카츠는 종4위하 좌근위소장으로 승진하게 되었고 카네츠구도 종오위하에 임명됩니다.
1583년에 일어난 시바타 시게이에(新発田重家)의 난 때는 니가타 지역을 둘러싸고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당시 습지대였던 니가타에 내린 호우로 우에스기 군이 패배하게 되었는데 이에 카네츠구는 지류가 그물처럼 얽혀있던 시나노 강의 지류인 나카노구치 강을 막는 등 오늘날 니이가타 평야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이후 시바타 군을 토벌하여 난을 종식시켰습니다.
1588년에는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도요토미의 성을 하사 받아 도요토미 카네츠구가 되었으며 1589년 사도 정벌에 가게카츠와 함께 종군하여 평정 후에 이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1590년에 있었던 오다와라 정벌 때도 가게카츠와 함께 종군하며 간토 지역의 성을 공략했으며 1592년의 임진왜란 때도 가게카츠와 함께 종군했습니다.
이후 카네츠구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에치고 지방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농민들에게 새로운 전답을 개간하도록 장려했는데 이는 현재 이 지역이 쌀의 산지가 되는데 큰 받침이 되었습니다.
또한 산업을 육성하고 상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여 에치고는 우에스기 겐신의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1595년 가게카츠가 히데요시에 의해 에치고, 사도 지역의 금,은광에 대한 관리를 맡게 되자 카네츠구는 이를 직접 담당하게 되었으며 1598년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가게카츠가 에치고에서 아이즈 120만석의 더 큰 영지를 받았을 때 카네츠구는 요네자와 6만석을 받아 총 30만석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다시 부상하게 되는데 당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카네츠구는 이에야스와 대립하게 되었고 여러차례 이에야스의 상경 요구를 거절하여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의 원인이 되는 아이즈 정벌이 벌어지게 됩니다.
가게카츠와 카네츠구는 방어에 부적합한 와카마츠 성 대신에 새로운 성을 짓기 시작했으며 시라카와에서 도쿠가와 군을 요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미츠나리가 군사를 일으키자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의 주력은 아이즈 정벌을 중지하게 됩니다.
이에 카네츠구는 동군에 속한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의 영지인 야마가타를 3만의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게 됩니다.
카네츠구와 요시아키는 쇼나이 지방을 둘러싸고 원래부터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데다가 우에스기 가문의 영지는 모가미 영지에 의해 분단된 형태였기 때문에 이를 물리치려 한 것이었습니다.
우에스기 군은 모가미 군에 비해 8배에 달하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비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고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20일간 발이 묶여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에스기 군은 철군하기 시작했고 추격에 나선 모가미 군과 모가미 군을 돕기 위한 다테 마사무네의 원군과 격전을 벌여 결국 무사히 철군하게 됩니다.
이로써 모가미 군은 쇼나이 지방을 장악하게 되었고 다테 군은 후쿠시마에 침공하게 되는 등 이미 서군이 패배한 상태에서 더 이상 싸워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우에스기 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합니다.
1601년 7월 카네츠구는 가게카츠와 함께 상경하여 이에야스에게 사죄했으며 가게카츠는 요네자와 30만석으로 감봉되는 것으로 용서를 받게 됩니다.
카네츠구는 새로운 토지의 개간을 위해 치수에 힘썼으며 새로운 전답 개발에 노력하여 30만석의 영지를 실제 51만석으로 늘렸으며 마을을 정비하고 광산의 개발을 추진하는 등 요네자와 번의 부흥에 힘쓰게 됩니다.
카네츠구는 우에스기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 간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의 차남 혼다 마사시게(本多政重)를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데릴사위로 받아들였으며 1609년에는 혼다 마사노부의 중재로 10만석에 가까운 역의를 면제 받는 등 우에스기 가문에 공헌하게 됩니다.
혼다 마사시게와 양자 결연이 해소된 이후에도 혼다 가문과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1614년에 있었던 오사카 전투 때도 도쿠가와 군으로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으며 1620년 에도에서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에스기 겐신 [ 上杉謙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