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네이버캐스트

이자겸

 

 

각 지역 호족들을 규합해 개국한 고려는 중기로 접어들면서 지방 호족과 중앙 관료와의 세력 다툼 속에서 점차 문벌귀족사회로 변모해갔다. 중앙의 문벌 귀족들은 기득권 유지, 확장을 위한 주효한 방편으로 혼인관계를 이용했는데 그 중 가장 매력적인 혼인 상대는 왕실이었다. 왕실의 외척이 되어 왕을 쥐락펴락하는 위치에 있던 몇몇 가문은 가히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권력을 구가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외척가문인 인주이씨 가문의 이자겸(李資謙, ? ~1126)은 왕좌를 찬탈할 야망까지 품을 만큼 그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고려중기 막강 외척가문 인주이씨

고려 중기 딸을 낳았다 하면 모두 궁중으로 들여보내, 가문의 권세를 드높였던 외척 집안으로서 인주이씨의 역사는 고려 현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현종이 거란의 침입에 공주로 피난갔을 때 공주 절도사였던 김은부가 세 딸을 바쳐 모두 왕후로 만든 것이 인주이씨 가문이 등장하게 된 계기였다. 김은부의 아내가 인주이씨 이허겸의 딸이었는데, 외손녀가 셋이나 왕후가 되자 외척집안의 후광은 인주이씨 집안에까지 미쳤다. 인주는 지금의 인천지역으로 인주이씨는 인천이씨 혹은 경원이씨라고도 불린다. 외손녀들이 왕실과 결혼함으로써 이허겸은 인주이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때마침 왕후들의 외사촌이 되는 이자연(이허겸의 손자) 또한 그 능력이 출중하여 인주이씨 가문의 행운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자연은 22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뽐냈고, 그에 더하여 가문의 후광을 업고서 승승장구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였다. 이자연은 모처럼 잡은 가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현종의 아들 문종에게 세 딸을 모두 시집보냈고, 그중 인예왕후는 순종·선종·숙종·대각국사 의천 등을 낳으며 친정의 권세를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 순종과 선종의 왕후들도 모두 인주이씨로 인주이씨 가문의 영향력은 선종의 아들 헌종에까지 미쳤다. 어린 헌종의 즉위 이후 삼촌이었던 계림공(훗날 숙종)과 인주이씨 이자의(이자연의 손자)와의 권력 다툼에서 이자의가 패하면서 인주이씨의 세력은 잠시 주춤하는 듯했지만, 숙종의 아들 예종이 인주이씨 이자겸의 딸을 왕비로 맞으면서 인주이씨 가문은 다시금 외척가문으로 재기할 기회를 얻었다.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

자신의 딸을 예종의 왕후로 들여보내기 전 이자겸에게도 한때 서러운 시기가 있었다. 그의 여동생 장경궁주가 순종의 제 3비로 들어갔다가 순종이 요절하여 석 달 만에 청상과부가 된 후, 궁노와 간통하는 바람에 폐비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이자겸은 관직에서 쫓겨나고 집안 전체가 불명예스러운 궁지에 몰렸다. 거기다가 이자의(이자겸의 4촌)가 숙종과 대결하다가 패하면서 한때 인주이씨 가문에 위기가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자겸의 둘째 딸이 예종의 왕후로 들어가 원자(훗날 인종)를 낳으면서 이자겸을 비롯한 인주이씨는 다시금 권력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예종은 생전에 외척의 발호를 상당히 경계하였기 때문에, 이자겸은 예종시기에는 그다지 큰 힘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1122년 예종이 위독해지자 당시 14세의 어린 왕자였던 인종은 자칫하면 나이 많은 삼촌들에게 왕좌를 빼앗길 위기에 놓여 있었다. 앞서 헌종과 숙종 대에 삼촌 숙종이 왕위를 찬탈한 일도 있었던 고려왕실이었기에, 예종의 총애를 받았던 한안인 등 신료들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 어린 인종보다는 예종의 동생 중 한 명이 왕위를 계승할 것을 바랐던 것이다. 위태로운 처지의 인종을 도와 예종이 동생들보다 어린 아들 인종을 선택하게 한 이자겸은 예종이 죽은 후 인종이 즉위하자 정권을 독차지하였다. 이자겸은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셋째, 넷째 딸을 나란히 인종과 결혼시켰다. 인종에게 이자겸의 딸들은 이모였다. 아무리 근친결혼이 성행했던 고려왕실이라 하더라도 이모와의 결혼은 상당히 무리한 결혼이었다. 그러나 이미 권력에 눈이 먼 이자겸에게 도덕이나 예법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면서 장인 자리까지 차지하고 나이 어린 임금을 등에 업고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정적을 제거하고 임금을 깔보다

인종 즉위 후 이자겸의 전횡을 [고려사]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자기 족속을 요직에 포열하고 관작을 팔았으며, 당인을 많이 심어 스스로 국공이 되고 예우를 왕태자와 같게 하며, 그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고 내외가 하례하는 글도 전(箋)이라 칭하게 하였다. 여러 아들이 다투어 제택(第宅)을 지어 가로에 잇닿았고, 권세가 더욱 성하게 됨에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져 사방에서 선물이 모여들어 썩어가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나 되었다. 남의 전토를 강탈하고, 그 종들을 내놓아 차마(車馬)를 노략하여 자기의 물건을 수송하니 주민들이 모두 수레를 부수고 소, 말을 팔아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러한 이자겸의 작태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예종에게 총애를 받았던 신료 한안인이었다. 한안인은 이자겸이 조회에 잘 나오지 않고 주요 국사를 집에서 처리하며, 뇌물을 받고 관직을 남발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평소 한안인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자겸은 한안인을 역모죄로 몰았다. 한안인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자주 회동하는 것을 빌미 삼아 예종의 동생 대방공 왕보를 임금으로 추대하는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이자겸은 한안인을 귀양길에 암살하고 그와 관련한 사람들 50여 명을 유배하거나 벼슬에서 내쫓아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한안인을 제거한 이후에는 그를 싫어하는 예종 대의 여진정벌의 공신 최홍재 등을 욕지도로 유배 보내 중앙 권력무대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확고하게 권력 기반을 구축한 이자겸은 조선국공(朝鮮國公)이라는 책봉을 인종에게 강요하였고, 조서에 이름을 쓰지 않고 경으로 부르지 않게 하는 특혜를 받아내기도 하였다. 실제로 이자겸은 인종을 손가락질로 부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외손자이자 사위이기는 하나 한나라의 국왕을 손가락으로 부른다는 것은 신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집에 의친궁 숭덕부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생일에 ‘절’을 붙이는 것은 왕이나 태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었다. 이자겸의 방자함이 여기까지 이르자 김부식 등이 반발하여 이를 공식화시키는 것은 무산되었지만 실제로 이자겸 본인이나 그에게 아부하는 자들은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외교에서도 이자겸의 전횡은 끝이 없었다. 그는 사사로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는 등 국왕처럼 행동하였다. 또한 자신을 스스로 지군국사라고 칭하기까지 하였다. 지군국사란 국사를 처리하는 직책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금나라가 강성해지자 다른 신하들이 금과 사대관계를 맺는 것을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정적을 모두 제거한 이자겸은 자기 마음대로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군신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이자겸의 난, 십팔자득국설

인종은 이자겸의 방자함이 도를 넘자 아무리 외할아버지이며 장인이더라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청년으로 성장한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를 계획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인종은 지녹연?김찬?오탁 등과 모의하여 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할 것을 지시하였다. 궁궐을 장악한 인종 측은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 등을 죽이고 기선을 잡는 듯하였다. 그러나 척준경이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공격함으로써 인종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척준경은 예종 때 여진 정벌에 공이 있던 무신으로 이자겸과는 사돈지간이었던 탓에 이 무렵 이자겸의 권세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성품이 단순했던 척준경은 아들과 동생이 살해당하자 분노하여, 왕의 말을 무시하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화마를 피해 나오는 인종 측의 인사들은 모두 척준경에 의해 살해당했고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 감금되었다.

 

이자겸을 제거하려던 인종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자겸이 오히려 승기를 잡게 된 것이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인종은 한때 왕위를 이자겸에게 넘기겠다고 조서를 내렸다. 너무나 바라던 일이었지만 이자겸은 주변의 반발이 두려워 감히 이를 받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반납하였다, 대신 그는 임금을 압박하고 나라의 모든 일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다. 나라의 모든 것을 장악한 이자겸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절을 인종과 같이 받는 등 가히 왕과 같은 권세를 누렸다. 또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민간에서 떠도는 십팔자득국설을 믿고 스스로 왕이 될 것을 언제나 획책하였다.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이란 십팔자(十八子) 성씨 즉, 이(李)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도참설이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인종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인종을 독살하기 위해 독약을 넣은 떡을 올리기도 하고 독이 든 약사발을 바치기도 하였는데 인종은 이러한 암살의 위기를 이자겸의 4번째 딸이자 자신의 2번째 왕후의 도움으로 번번이 넘길 수 있었다.

 

 

척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을 내치다

이자겸의 핍박 속에서 기회를 노리던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벌어진 틈을 이용했다. 척준경은 원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우연한 기회에 숙종의 눈에 들어 무신이 된 인물이었다. 성품이 거칠고 단순하기는 하나 올곧은 면이 있었고, 다혈질이지만 왕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인종은 이런 척준경의 성질을 이용하였다. 앞서 이자겸의 셋째 아들인 이지언의 종이 척준경의 종에게 척준경이 궁궐에 방화하고 인종에게까지 화살을 날린 것은 죽을죄라고 비난한 일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척준경은 이자겸 일파가 죄를 자신에게만 뒤집어씌운다고 생각하고 분노했다. 척준경의 분노를 들은 이자겸은 화해를 청했지만 척준경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기회를 노린 인종은 최사전과 김부일을 척준경에게 보내 그의 충성심에 기대 설득하였다. 이자겸 측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데다가 왕에 대한 충성심이 다시금 일어난 척준경은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올렸다. 어차피 이자겸의 난은 척준경의 군사력에 힘입어 성공한 반란이었다. 이자겸에게서 척준경을 분리시켜 왕이 이를 접수하면 이자겸은 추풍낙엽의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1126년 이자겸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오려 하자 인종은 급히 척준경에게 이자겸을 제거하라는 서신을 보낸다. 왕의 명령을 받든 척준경은 궁궐로 들어가 인종을 호위한 뒤 김향?이공수와 함께 이자겸의 군사들을 제압했다. 대세가 기울었음을 안 이자겸은 소복 차림으로 인종 앞에 나왔으며, 곧 영광으로 유배되었다. 이자겸의 자식들과 부하들 역시 귀양 보내졌으며 왕비의 자리에 있던 두 딸은 대궐에서 쫓겨났다. 이자겸이 몰락한 사실을 안 백성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로써 인종은 권신 이자겸을 몰아내고 왕의 권위를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한편, 척준경은 이자겸을 몰아낸 공으로 한동안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다음 해 정지상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암타도에 유배되었다. 그 뒤 인종으로부터 사면을 받았으나 몇 년 후 병사하였다.

 

 

귀양지에서 임금에게 바친 굴비

영광으로 유배된 이자겸은 영광 법성포의 특산물인 건조한 참조기 맛에 반해 이를 인종에게 진상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건조 참조기에 굴비(掘非)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식탁에 오르는 바로 그 굴비이다. 이자겸이 이 건조 조기에 굴비(掘非)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비록 귀양살이를 하고 있지만 절대로 굴복하거나 비굴하게 꺾이지는 않겠다는 소리였다. 이후 이자겸은 영광으로 유배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 인종은 이자겸이 죽은 뒤 이자겸의 아내, 즉 자신의 외할머니 최씨를 다시 불러들였으며, 혈연을 생각하는 뜻에서 이자겸을 검교 태사 한양공으로 추증하였다. 내친 두 왕후도 비록 왕후의 자리에서는 쫓아냈지만 죽을 때까지 융숭한 대접을 했다고 한다. 이자겸의 난은 흔히 고려 중기 문벌 귀족의 권세가 정점을 찍은 사건이라고들 평한다. 이자겸의 난은 문벌귀족들의 전성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쇠락을 부추기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인종 대의 묘청의 난이나 의종 대의 무신의 난은 이 이자겸의 난에서부터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 사회변화에 대한 요구에서부터 발생한 사건들이었다. 


 

 

 

  1. 척준경(拓俊京, ?~1144년)은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곡산 척씨(谷山拓氏) 가문의 시조이다. 용맹이 뛰어나 여진족 정벌에 공을 많이 세웠으며, 이자겸과 함께 권력을 나눠가지면서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다. 인종의 부추김을 받아 이자겸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위사공신(衛士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곧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암타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후 인종은 척준경을 고향은 곡주로 옮기게 해줬고, 1144년 검교호부상서에 임명했으나 얼마 후 사망하였다.
  2. 한안인(韓安仁, ?~1122)은 고려 중기의 관인으로, 본관은 단주(湍州), 자는 자거(子居)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태자였던 예종을 가르쳤으며, 예종 즉위 후 우부승선을 시작으로 형부상서?예부상서?지추밀원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122년 참지정사 판공부사에 오르고, 인종이 즉위하자 중서시랑평장사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에 의해 역모의 누명을 쓰고 감물도로 유배되었다가 살해당하였다.

 

 

 

김정미/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 등의 책을 썼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http://navercast.naver.com/peoplehistory/koreanhistory/2447

인물사 연표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982년

최승로 시무 28조 건의

993년

서희 강동 6주 확보

997년

천추태후 목종 즉위, 천추태후 집권

1037년

토그릴 베그 셀주크투르크 건국

1018년

강감찬 귀주대첩

1077년

그레고리오 7세 카노사의 굴욕

1063년

왕안석 삼사조례사 설치, 개혁시작

1055년

최충 구재학당 설립

1126년

이자겸 이자겸의 난

1150년

힐데가르트 폰 빙엔 아이빙엔에 대수녀원 축성

1135년

묘청 서경 천도 운동

1152년

프리드리히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위

1145년

김부식 [삼국사기] 완성

1175년

주희 [근사록] 편찬

1170년

정중부 무신정변

1189년

리처드 1세 제 3차 십자군 전쟁

1187년

살라딘 십자군전쟁에서 예루살렘 탈환

1196년

최충헌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시작

1215년

존왕 마그나카르타 승인

1206년

칭기즈칸 몽골제국 수립

1198년

만적 만적의 난

1295년

에드워드 1세 모범의회 성립

1271년

원세조 쿠빌라이 원제국 수립

1274년

충렬왕 여.몽 연합군의 일본정벌

1299년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발간

1299년

오스만 1세 오스만제국 수립

1281년

일연 [삼국유사] 편찬

1304년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집필 시작

1325년

이븐 바투타 이슬람 메카 성지순례

1371년

신돈 역모죄로 처형

해당인물이 포함된 시대의 부분 연표가 기본적으로 보이며, 전체보기를 누르시면 전 시대의 연표를 볼 수 있습니다.
붉은색 표시가 있는 인물을 클릭하면 해당 인물의 스토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인물사 연표 전체보기

 

** [KBS역사저널 그날[438회] 고려거란전쟁 1 - 낙타를 죽인 왕건   2023. 12. 24 일

** [KBS역사저널 그날[439회] 고려거란전쟁 2부 서희, 외교 담판으로 거란을 물리치다   2023. 12. 31 일

** [KBS역사저널 그날[440회] 고려거란전쟁 3부 전쟁을 부른 현종의 즉위   2024. 01. 07 일

** [KBS역사저널 그날[441회] 고려거란전쟁 4부 거란의 2차 침입, 현종의 선택   2024. 01. 14 일

** [KBS역사저널 그날[442회] 고려거란전쟁 5부 이상한 전쟁, 귀주대첩  2024. 01. 21 일

** [쿠릴타이 TV역사팩트 - 900여 외침전쟁 중 유일하게 금나라와는 전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이 게시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