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남해유배문학 작품상 공모
글쓴이 하희숙 번호 : 3 조회수 :238 날짜 :2009.10.16
첨 부
경상남도 남해군은 한국 고전소설의 대표 작가 김만중선생을 비롯하여 자암 김구, 약천 남구만, 소재 이이명, 후송 유의양, 태소 김용 등의 유배객들이 주옥 같은 문학작품을 남긴 유배문학의 성지입니다. 그 외에도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정쟁의 희생양이 된 수많은 유배객들의 한이 서린 고장이기도 합니다. 남해군과 남해문화원에서는 내년에 준공될 남해유배문학관과 노도 문학의 섬 조성사업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남해유배문학작품상을 공모하오니 많은 응모 바랍니다.
1. 모집개요
- 응모기간 : 2009. 10. 1 ~ 11. 10(40일간)
- 응모대상 : 전국 대학생 및 일반인(기성작가도 응모 가능)
- 모집부문 : 단편소설 1편 이상
- 원고분량 : 원고지 100~120매 내외
2. 시상내역
- 대 상 1명 : 상패 및 300만원
- 우 수 1명 : 상패 및 200만원
- 장 려 1명 : 상패 및 100만원
- 입 선 8명 : 상장 및 각 50만원
- 수상자발표 : 2009. 11. 20. 남해문화원 홈페이지(www.nhcc.or.kr)
- 수상자시상 : 2009. 12. 5. 10:30 남해문화체육센터 공연장
3. 응모요령
- 이메일 접수시 원고와 사진을 첨부화일로 송부해야 한다.(접수확인 전화 요망)
- 응모작품은 반드시 미발표작이어야 하며 반환하지 않는다.
- 성명, 연락처, 학력, 경력, 저서 등은 별지로 작성하여 첨부한다.
- 모든 수상작의 저작권은 3년간 남해문화원에 귀속된다.
4. 보낼 곳
- 경상남도 남해문화원(이메일 접수 : siin-0718@hanmail.net)
- 문의전화 : 055-864-6969
5. 작품소재 예시
- 남해로 유배온 인물과 그 주변의 내용을 역사소설로 구성할 수도 있으며,
김만중의 『구운몽』 재구성한 최인훈의 『광장』처럼 남해에 유배온 이들의
작품을 현대소설로 재구성하는 것도 가능.
- 조광조와 도학정치를 펼치다 남해로 유배온 자암 김구의 삶과 문학
- 자암 김구의 13년간 남해 유배생활 중 남해향사들과의 교유
- 서포 김만중이 남해로 유배되는 과정과 효자로서의 남해에서의 삶
- 서포 김만중이 남해에서 사씨남정기 등 문학작품을 써야 했던 동기와 생활
- 소재 이이명이 묵호룡의 고변으로 역적으로 몰려 사사된 사건
- 약천 남구만, 소재 이이명, 후송 유의양, 태소 김용과 남해유배생활
- 임영대군과의 사랑이 발각되어 남해로 유배온 가야지
- 홍길동을 도와주다 남해로 유배되는 엄귀손과 얽힌 내용
- 이시애의 동생 이종금의 남해유배생활 중 절의
- 소현세자의 셋째아들 경안군 남해 유배와 관련
- 남해에서의 유배생활이 아니라도 그들이 남해로 유배온 사건을 중심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유배로 마무리 하는 것도 가능
※ 남해의 유배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남해문화원 홈페이지 참조하고
위의 예시 외에도 남해로 유배온 적객들에 대한 내용으로 작품 응모
남해군 · 남해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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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 김만중, 남해유배문학상으로 부활한다. | ||||
유배문학의 섬, 남해 제1회 남해유배문학 단편소설 공모 상금 천만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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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군은 유배문학의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 인프라 구축을 위해 내년 5월 중에 준공될 남해유배문학관 조성사업에 발맞춰 남해유배문학 단편소설을 공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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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포 김만중,1689년부터 3년간 남해 노도섬에서 유배생활 뒤,55세로 생을 마감(1637~1692) |
특히 서포 김만중은 한글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라는 불후의 걸작을 남긴 한국 3대 고전문학가로 유명하다. 한국소설의 피폐기에 교산 허균의 홍길동전을 이어받아 실학파 소설가의 거두 연암 박지원을 있게 한 한글소설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주인공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서포는 남해에서 평론집이라 할 수 있는 ‘서포만필’을 완성하고 수많은 시편들을 지어 남해를 유배문학의 섬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바탕을 닦았다.
이번 제1회 남해유배문학 단편소설 공모는 남해로 유배 온 인물의 삶과 유배생활 등 남해유배와 관련된 작품 소재이면 가능하다.
유배문학 공모부문은 단편소설 1편 이상으로 원고지 분량 100~120매 내외로 전국 대학생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며 기성작가도 공모 가능하다. 응모작품은 미 발표작으로 모든 입상작의 저작권은 3년간 남해문화원에 귀속된다.
유의할 점은 단편소설 1편 이상으로 원고ㆍ사진을 포함하여 남해문화원 이메일(siin-0787@hanmail.net)로만 접수를 받는 것이다. 접수기간은 10월 1일부터 11월 10일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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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포 김만중 선생의 유배 초옥 <한글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라는 불후의 걸작을 남긴 한국 3대 고전문학가이자 홀어머니를 지극하게 섬겼던 효자이며 소설로써 나라를 바로 잡고자 했던 충신이었다>라고 안내문이 쓰여 있다. |
입상작은 오는 11월 20일 남해문화원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되며 자세한 사항은 남해문화원(www.nhcc.or.kr ,055)864-6969)으로 문의하면 된다.
서울문화투데이 경남본부 홍경찬 기자 cnk@s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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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모개요
○ 공모기간 : 2009. 10. 1 ~ 11. 10(40일간)
○ 공모대상 : 전국 대학생 및 일반인(기성작가 공모도 가능함)
○ 공모부문 : 단편소설 1편 이상(원고분량 100 ~ 120매 내외)
2. 시상
○ 대상 1명 : 상패 및 300만원
○ 우수 1명 : 상패 및 200만원
○ 장려 1명 : 상패 및 100만원
○ 입선 8명 : 상장 및 각 50만원
○ 수상자 발표 : 2009. 11. 20 남해문화원 홈페이지
○ 수상자 시상 : 2009. 12. 5 10:30 남해문화체육센터 공연장
3. 공모요령
○ 이메일 접수시 원고와 사진을 첨부 파일로 송부해야 한다(접수확인 전화요망)
○ 응모작품은 반드시 미발표작이어야 하며 반환하지 않는다.
○ 성명, 연락처, 학력, 경력, 저서 등은 별지로 작성하여 첨부한다.
○ 모든 수상작의 저작권은 3년간 남해문화원에 귀속한다.
4. 보낼 곳
○ 남해문화원(이메일 siin-0787@hanmail.net) 연락처 055-864-6969
제1회 남해유배문학 작품상 공모 심사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남해유배문학 작품상 공모 심사결과
구 분 |
성 명 |
제 목 |
비 고 |
최우수 |
윤정아 |
벗에게 부침 |
충북 청주시 |
우수 |
김미숙 |
가야지 |
경남 남해군 |
장려 |
이숙영 |
주연지 |
충북 청원군 |
입선 |
윤혜영 |
난곡사와 내인생의 짧은난곡 |
서울 동작구 |
입선 |
홍재선 |
화전 김구 |
대전 서구 |
입선 |
하태무 |
신선의 섬, 꽃밭에서 놀다 |
경남 사천시 |
입선 |
정옥희 |
섬에서 부르는노래 |
경남 남해군 |
입선 |
육민애 |
꿈을 꿔 드립니다 |
경남 양산시 |
입선 |
박필우 |
샌님이 남쪽으로 간 까닭 |
대구 남구 |
심사위원 : 소설가 한승원 , 진주교육대학교 송희복 교수 , 중앙대학교 이승하 교수
○ 시상식은 2009. 12. 19. 14:00 남해문화체육센터 공연장
※ 수상자는 13:30 까지 참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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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를 빛낸 인물:
옛날에는 사진기가 없어서 사진이 없습니다.초상화가 있는 것은 올려드립니다.
(남해를 빛낸 인물)
1.김구 (1488~1534)
본관 광산
호 자암 ·삼일재
별칭 자 대유, 시호 문의
주요저서 《자암문집》
주요작품 《이겸인묘비》 《자암필첩》 《우주영허첩》 등
본관 광산. 자 대유. 호 자암 ·삼일재. 시호 문의. 1507년(중종 2) 생원 ·진사에 모두 장원을 하여 시관을 놀라게 하였다. 151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고, 1515년 부수찬, 1519년 부제학에 승진되었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 ·김정 등과 함께 투옥되고 개령(경북 김천)에 유배되었다가, 남해에 안치되었다.
설천면 노량리 남해 충렬사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높이 2m, 넓이 90㎝, 두께 25㎝의 비가 있는데 이 비가 바로 남해찬가라고 할 수 있는 유명한 「화전별곡」을 읊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김구 선생 적려유허비이다. 유학자이며 정치가이기도 했던 자암 김구 선생이 서원을 지어 후진들에게 예절과 학문을 가르쳤다고 적어놓았다.
김구는 조선 중종 14년인 서기 1519년 기묘사화 때 남해로 유배되어 1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조선 4대 문인 중의 한 사람으로 벼슬은 홍문관 부제학까지 지냈다.
1531년 임피(전북 군산)로 옮겼으며, 1533년 풀려나와 고향 예산에 돌아가 이듬해 죽었다. 글씨에 뛰어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서울 인수방에 살았으므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라고 한다. 선조 때 이조참판이 추증되고 예산의 덕잠서원, 군산의 봉암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자암문집》, 작품에 《이겸인묘비》 《자암필첩》 《우주영허첩》 등이 있다.
2.김만중 (1637~1692)
본관 광산
호 서포
별칭 자 중숙, 시호 문효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남해 유배문학의 정수를 보여준 서포 김만중. 그는 조선 인조 15년(1637) 충신 김익겸의 유복자로 태어난 김만중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고 수양과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 28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부승지 벼슬에까지 올랐다. 당파싸움으로 서인이 패하자 관직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등용되어 예조참의, 공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임금에게도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서포는 유배를 세 번이나 당한다. 숙종 때 그는 숙원 장씨가 낳은 왕자의 세자 책봉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다시 숙종 임금의 미움을 사서 남해군 상주면 노도에 유배를 오게 된다.
이곳에서 숙종 임금이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은 것을 슬퍼하여 숙종의 마음을 돌리려고 「사씨남정기」라는 소설을 지었다. 그는 끝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숙종18년(1629년), 노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3.윤주선 (1896~1964)
호는 우선. 1896년 9월11일 설천면 문의리 975번지(지금의 왕지마을)에서 아버지 윤창섭과 어머니 박양춘 사이에 삼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전공한 수재로 학식이 깊고 평소 나라사랑의 정신이 투철했다고 한다. 1910년 일제가 강권으로 나라를 빼앗고 폭정을 하게 되자 23세 때인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인근 마을 동지들과 뜻을 모아 때를 기다리던 중, 설천면 남양리 이예모가 하동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남해로 들어오면서 남해만세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선생은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등과 함께 이예모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서 만나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각 마을의 서당 학생들과 인근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4월3일 오후에 윤주순은 시위 군중들과 함께 남양리 노상에 모였다. 이예모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많은 군중들과 같이 남해읍을 향하여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열이 고현면 이어리에 이르렀을 때 고현면장이던 김치관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놀라 이 사실을 경찰주재소에 알리었다. 날이 어두워져서 시위대들은 내일이 읍 장날이라 이를 이용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4월4일 아침 선생은 사전에 약속한 동지들과 장꾼으로 가장하고 읍 장터로 나아갔다. 윤주순은 시위 군중이 1000여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전날 약속한 신호에 따라 태극기를 꺼내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들어가 감금 당한 사람들을 석방시키고 군청, 학교, 금융조합, 우편국 등을 차례로 밀고 들어가 관계 직원들을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하고 경찰 간부들의 모자와 칼을 빼앗아 이를 내동댕이 치는 등 주동적 역할을 하여 민족의 정기를 드높였다.
그는 4월 독립투쟁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해 9월23일 1심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공소를 제기했으나 기각되어, 대구 복심법원에서 굶주리고 매맞는 모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였으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손톱, 발톱이 다 빠지고 보행마저 자유스럽지 못한 불구의 몸이 되어 버렸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일제의 번득이는 감시였다.
그는 은거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광복을 맞이했지만 옥고와 온갖 고문의 여독을 풀지 못하고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1964년 4월13일. 선생의 이런 빛나는 공적을 기려 정부에서는 1982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선생이 서거한지 26년만의 일이었다. 선생의 묘소는 설천면 문의리 산 95-1번지에 있다. 문의 고개를 넘어 노량쪽으로 가다 왕지마을 입구 오른쪽 아래에 있어 비교적 찾아 가기가 쉽다.
4.창남 윤병호
창남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로, 해방 이후에는 자유당 독재에 항거하여 자유와 민권을 확립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 정치가로, 커다란 족적을 남겨 놓았다.
설천면 문의마을에서 출생,1911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신학문과 일본을 알아야 국권회복을 할수 있다고 자각하고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전문부에 입학했다. 그의 일본 유학은 1909년 보성중학교장 박중화 등 신민회 소속 청년들이 국권회복 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창립 멤버인 남형우 안희제 윤세복 윤지현 김동삼 등과 깊이 사귀게 된데서 비롯한다. 그는 1915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윤상태 서상일 홍주일 등과 함께 국권회복과 단군봉사를 목적으로 조직한 국권회복단에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윤상태 서상일 등 동지들과 경남 창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진동에 있는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조직이 일경에 발각돼 선생과 조직원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창남도 고초를 겪었다. 그는 조직원 16명과 함께 1919년 8월4일 부산 지방법원 예심판정에서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의 비밀거점이던 백산 안희제 선생이 경영하는 백산상회에 깊이 관여하여 백산상회가 주식회사로 전환할 때, 실질적인 운영을 맡기도 했다. 이후 창남 선생의 국권 회복운동은 백산 상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그는 안희제 등 백산 관계자와 영남유지들과는 유대를 강화해 국권의 회복은 먼저 인재양성에 있다고 판단, 뜻을 모아 1919년 11월 기미육영회를 설립하고 애국청년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사업을 하게 된다.
창남 윤병호 선생은 백산 안희제 선생보다 네 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친구처럼 우의가 두터웠으며 신뢰관계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한다. 백산상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대동청년단 단원인데다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거액의 돈을 중국으로 조달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일본경찰이 백산상회의 거래은행이던 조선은행 부산지점,식산은행 부산지점에 압력을 넣어 거래를 중지시켜 버렸다. 그러자 창남선생은 조선은행 부산지점을 찾아가 조선 제일의 무역회사와 거래를 끊는다며 호통을 치고 항의하기도 했다.
창남선생은 불의를 용납지 못하는 성격인데다가 독립운동에 관한 한, 일의 대소를 가리지 않았다. 친일단체인 상애회의 회장이며 친일파의 거두인 박춘금이 총독부의 권력을 업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우리 동포들에게 도항증명서를 한 장에 20원씩 받고 파는 제도를 만들어 동포들을 착취하자,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부산으로 몰려 온 수많은 노동자들과 백산상회 동지들이 제휴하여 「 박춘금 성토대회」를 열고 조선총독부로 항의 방문하여 '도항제'를 폐지시킨 일도 있었다. 또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동포들을 계몽시키기 위한 교육기관의 증설을 역설하여 1926년 말 경상남도 도평의회의 남해군 출신 평의원으로 「일면일교제」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쳤다고 한다.
창남 선생은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 가 조선어편찬회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고 사전 편찬 작업에 적극 참가하였다가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1942년 또다시 구속되어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창남 선생은 광복 직후 경상남도 농상부장을 지냈으며, 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때 고향 남해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집권당인 자유당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당선 뒤 당시 제1야당이던 민주당에 입당한 뒤에는 호헌동지회장을 지내며 독재정권에 맞섰다.
그는 경상남도 농상부장과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주변의 친인척들을 얼씬도 못하게 하여 취직이나 각종 청탁을 멀리 하면서, 선공후사(先公後私)의 공인정신으로 일관하는, 거인의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5.금암 최치환 (1923~1987)
호는 금암, 삼동면 봉화리 내산마을에서 1923년 10월22일 최상용의 3남으로 태어났다. 경기고교를 거쳐 미국 미시간대학과 하버드대학을 수학했다. 6.25때는 영남 최후 방위전선 군경 합동 총사령관을 맡아 공을 세워 태극 무공훈장 등 30여개의 훈장과 포장을 받았다.
그를 청백리의 생활철학을 일관되게 지킨 뛰어난 정치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시경국경, 초대 대통령 비서관을 역임하고 37세의 젊은 나이에 공보실장(현 문화관광부장관)을 맡았다. 이후 조선일보 상담역, 경향신문사장, 대한축구협회장, 미시간대학 한국동창회장 등을 거쳤다.
5, 6, 7, 10, 12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건설분과위원장으로 있을 때는 고향 발전을 위한 일에도 능력을 발휘했다. 남해를 육지와 연결해 놓은 남해대교는 금암 최치환 선생의 노력 덕분이었다. 1987년 5월27일, 6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상야릇한 제1회 남해유배문학상
남해-하동에서 2009/10/13 10:29남해문화원이 총상금 1000만 원을 걸고 전국 대학생ㆍ성인(기성작가 포함)을 대상으로 제1회 남해 유배문학상 '단편소설' 부문을 공모했습니다. 그런데 좀 거시기 합니다. 문학상 공모는 대개 몇 달에 걸쳐 이뤄집니다. 많은 참여를 위해서겠죠.
그런데 남해유배문학상 공모는 제1회인데도 응모 기간이 40일에 불과합니다. 이마저도 최근에야 언론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문학상을 주관하는 남해문화원 누리집에조차 남해유배문학상 공모사업에 대한 자세한 안내가 없습니다. 이상야릇한 문학상 추진입니다.
남해군은 지난 7일 보도자료를 내고 남해 유배문학상 공모사업 추진 사실을 언론 등에 알렸습니다. 내년 5월 준공예정인 남해 유배문학관 조성사업의 기틀을 다지고 유배문학 기반 구축 등을 위해 추진한다고 배경을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자세한 내용은 남해문화원 누리집(www.nhcc.or.kr)을 참고하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12일 오후 6시 현재 남해문화원 누리집에는 이번 공모사업과 관련해 자세한 안내자료가 따로 올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네이버ㆍ다음 등 포털사이트에서 '남해 유배문학상'을 치면 일부 언론의 기사만 검색될 뿐 '작품소재' 등 뚜렷한 공모 기준이 나와있는 자료를 찾을 수 없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걸맞지 않은 홍보인 셈입니다.
작품 공모 기간은 더 이상합니다. 남해문화원이 정한 응모기간은 지난 1일부터 내달 10일까지로 40일에 불과합니다. 이 기간에 원고지 100∼120장 내외의 단편소설을 쓰기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작품 소재가 '남해 유배'와 관련한 제한적이어서 미리 준비해두지 않았다면 응모가 사실상 불가능해 보입니다. 일부를 위한 문학상 제정ㆍ추진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대목입니다. 하동의 토지문학제는 올해 9회째인데도 응모기간이 지난 4월부터 9월까지였습니다.
총상금 1000만 원도 '단편소설' 1개 부문인 것을 고려하면 다른 문학상과 견줘 적은 상금은 아닙니다. 그러나 남해문화원은 대상ㆍ우수상ㆍ장려상 각 1명에게 각각 300만 원ㆍ200만 원ㆍ100만 원의 상금과 상패를, 입선 8명에게 각 50만 원과 상장을 주기로 했습니다. 대개 엄격한 심사를 거쳐 대상 등 1∼2명을 시상하는 다른 문학상과 대비됩니다. 그러면서도 수상작의 저작권을 3년 간 남해문화원에 귀속한다고 덧붙여 적은 상금에 비해 까다롭게 해뒀습니다. 참여하고픈 욕구가 떨어지는 대목이죠.
남해문화원 관계자는 "작품 공모 기간이 길다고 많이 응모하는 것이 아니라는 전문가의 의견 등을 들어 이렇게 정했다"면서 "전국 대학 국문학과와 문인협회, 문학 관련 카페 등에 공문 등을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심사위원회도 명확하게 꾸려지지 않았습니다. 군은 지난 1일 자로 전국 자치단체 등에 공모사업 안내와 홍보 협조공문을 발송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남해는 제주도ㆍ거제도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배지 중 한 곳입니다. 현재 밝혀진 남해 유배객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200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들 중 서포 김만중, 자암 김구, 약천 남구만, 후송 류의양 등은 남해에서 주옥같은 문학작품을 남겼지요. 군은 이런 유배문학을 문화자산으로 삼고 또 전국 유배문학의 중심지가 되고자 남해유배문학관을 짓고 있습니다.
남해유배문학상 제정ㆍ추진은 이런 남해유배문학을 널리 알리기 위한 사업의 하나로 풀이됩니다. 특히 이 사업예산은 지난해 말 편성한 올해 본예산에 이미 편성된 사업이었다고 합니다. 사업준비기간은 넉넉했던 셈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공모사업을 추진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참여할 지, 아니 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 중 남해유배문학상 공모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나 있을지 심히 걱정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