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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2 대한민국 편지쓰기 대회
대회기간 2012-05-01 ~ 2012-05-31 조회수 17013
첨부파일  2012 대한민국편지쓰기 대회.hwp



아이티투데이

우본, ‘2012 대한민국 편지쓰기’ 대회 개최
정경미 기자  |  belle@ittoday.co.kr
승인 2012.04.30  

   
▲ 우정사업본부가 가정의 달을 맞이해 편지쓰기 대회를 개최한다.
우정사업본부(본부장 김명룡)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2012 대한민국 편지쓰기’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 대회는 국민정서를 함양하고 편지쓰기 문화의 저변 확대를 위해 우정사업본부가 2000년도부터 개최해온 대한민국 최고의 편지쓰기 대회다. 부모님·스승님·친구 등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에게 그동안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참여는 손편지로 응모하는 방법과 인터넷편지로 응모하는 방법이 있으며 5월 31일까지 응모하면 된다.

손편지는 응모부문·성명·주소·전화번호를 적어‘서울중앙우체국 사서함 8666호 편지쓰기담당자 앞’으로 우편으로 보내고, 인터넷편지는 인터넷우체국(www.ePost.go.kr) 맞춤형편지를 이용하면 된다.

특히, 인터넷우체국 맞춤형편지를 통해‘편지쓰기 대회’에 응모한 편지는 받는 사람에게도 발송된다.

작품 분량은 A4용지 또는 편지지 3장 이내이고, 응모부문은 초등부(1~3학년, 4~6학년 별도부문),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로 구분되어 있다. 응모부문별로 대상·금상·은상·동상 등 총 525명을 선발해 시상한다.

각 부문별 대상 1명에게는 지식경제부장관 상장과 트로피, 상금이 주어진다. 많은 편지를 응모한 학교와 우수 지도교사에게는 상장과 상금이 주어지며, 최우수 학교 2개교를 선정하여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을 수여한다.

입상작 발표는 7월 2일이며, 시상식은 7월 12일 포스트타워(서울중앙우체국)에서 열린다.


** 지난 수상작품들(일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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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 ////////////

 제목 [일반부/대상] 제12회 전국 편지쓰기대회 일반부 대상】
수상자 백우수
 할아버지께.
 새벽을 맞아 펜을 들었습니다. 벌써 네 시군요. 일찍 잠드셨던 당신께서 다시 한 번 깨실 시간입니다. 오늘도 당신은 벽을 더듬어 화장실로 가시겠죠. 조용히 변기 커버를 올리시고는 늘어진 성기로 오줌을 누실 겁니다. 당신의 오줌은 변기에도 묻고 플라스틱 발판에도 묻겠죠. 오줌이 힘없이 떨어져 묻는 소리는 저를 향한 물음입니다.
제가 집에 들를 때마다 당신께선 내가 도울 일이 없냐고 물으십니다. 저는 그 물음이 어떤 뜻인지 압니다. 당신 도움없이 잘 살고 있냐는 거겠죠. 제가 대답이 없으면 당신은 힘든 일 없냐고 다시 물으십니다. 저는 잘 지냅니다. 그것 외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당신이 주는 생활비가 제게는 풍족합니다.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밥을 먹어도 남습니다.
 할아버지. 돈 보다는 당신의 마음이 제게 더 큰 힘이 됩니다. 일전에, 제가 잘 드리지 않던 전화를 불쑥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단지 목소리가 너무나 듣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그날 제 기분은 정말 이상했습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너무 부담되었습니다. 거창하게 살기 싫다,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게 아니라 단지 제 두 어깨가 버거웠습니다. 오랜 친구도 있고 기댈 애인도 있지만 모두, 언제가 제 곁을 떠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대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언제고 나를 훌쩍 떠나지 않는 사람 당신. 저는 웃으며 당신에게 “네, 잘 지내요.” 라고 말했지만 당신이 “언제고 힘든 일 있으면 말해라”라고 대답했을 때 저는 가슴에 주먹만한 돌 하나가 얹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제가 당신의 마음을 잊고 살았을까요. 왜 화장실 발판에 묻은 오줌을 훔치며 얼굴을 찌푸렸을까요. 할아버지, 저는 마음이 아플 때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곤 합니다. 그 날의 당신은 제게 뜨거운 소나기와도 같았습니다. 요즘 당신의 눈이 말라가고,  그래서 당신이 자꾸만 안약을 넣고, 새벽에 집안에 울리는 당신의 오줌소리가 약해지는 걸 느낄 때 저는 눈앞이 한없이 아득해집니다. 자꾸 ‘언젠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섬을 좋아하십니다. 저 때문에 산다는 말을 자주 하시는 한편 떠나고 싶다는 말도 같이 하시곤 합니다. 섬. 제가 아는 당신은 섬처럼 외로운 분이십니다. 당신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질 못하십니다. 저를 키워주신 이십 년간 당신은 바다에 외롭게 뜬 섬이었고 저는 그 곁에 머무는 작은 섬이었습니다. 저 역시 제부모님 일을 생각하면 괴로웠습니다. 몇 번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죽은 다음날 아침에 밥상을 차리고 저를 깨우러 방에 들어오실 당신을 생각하니, 수저통에 꽂힌 수저 두 쌍 중 한 짝이 영영 필요 없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차마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저보다 더 큰 섬입니다. 당신은 저를 손대지 않고도 곁에 두십니다. 안개 낀 날 저수지로 떠났던 당신과의 마지막 여행을 기억합니다. 저수지 근처의 식당에서 당신은 제게 막걸리를 따라주셨습니다. 저는 당신이 다시 술을 드신다는 생각에 슬퍼져 더 일부러 더 많은 양을 받아 마셨습니다. 저는 축축한 안주를 한입 먹고, 당신께도 술을 조금 따라드렸습니다. 당신은 예전보다 술에 많이 약해지셨죠. 창밖에 안개는 겉히질 않고 있었습니다. 저와 당신은 막걸리 두 주전자를 비웠습니다. 마지막 잔을 비우신 당신은 불콰해진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떠나고, 나도 떠나야지.“ 저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그것은 긍정이 아니었으나 저는 주기 탓에 당신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 당신은 술에 이끌려 사셨습니다. 한 번 술을 드신 다음엔 이틀이고 삼일이고 쉬지 않고 계속 잔을 드셨습니다. 비교적 시골에 살았던 때라 저는 어린 나이로도 술심부름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매번, 둘레가 제 손 너비보다 더 컸던 그 막걸리를 사들고 집으로 향하면서 저는 술 공장이 전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이 술에 취해 계실땐 소풍 도시락도 혼자 싸야 했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릴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호통을 치시던 당신의 취기 낀 목소리가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당신은 제게 한 번도 손찌검을 하신 적이 없군요. 당신께는 술을 드셔야할 만한 어떤 괴로움이 있었을겁니다. 너도 떠나고 나도 떠나야지. 저는 그렇게 말씀하시던 당신의 그 목소리가 아직 잊히지 않습니다. 제게 호통 치신던 그 큰 목소리 대신 아주 나지막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도 떠날 것이고 저도 떠나야하겠죠. 하지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직 홀로 서는 일이 두렵습니다. 분명 버거운 하루하루를 꾸려나가게 될 겁니다. 당신이 없을 때 제게 위안이 될 만한 그 무언가가 제게는 절실합니다. 위안, 그렇습니다. 그것도 다만 위안일 뿐이겠죠.
 할아버지. 늘 곁에 있고 싶습니다. 당신이 벽을 더듬어 화장실로 갈 때 저는 발밑에서 미등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의 몸을 챙기는 것도 버거워진 당신께, 쪼르륵 가만히 떨어지는 오줌소리를 들으며 어느 날엔가 가만히 우셨을 지도 모를 당신께 힘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께도 힘든 세상이라는 것을 성인이 되어서야 느꼈습니다. 신화 속에서 지구를 떠받드는 그 남자의 두 어깨도 질 수 없는 짐이 바로 한 사람을 책임지는 일이겠죠. 삼십 년 먹게 앓고 계신 병이 있느데도 저를 뒷바라지하시는 당신께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이젠 같이 걷자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당신께 전화를 드릴 겁니다. 당신께서는 말씀하시겠죠. “힘든 일 없이 잘 지내니?” 하지만 저는 오늘도 이렇게 밖에 대답하지 못할 겁니다. “네 할아버지.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애교 없는 스물한살짜리 손자를 이해해 주세요. 대신 주말에 집으로 가서 이제 다 자란 제 두 팔로 꽉안아 드릴께요. 할아버지
2011. 05. 26 백우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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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반부/대상] 【제12회 전국 편지쓰기대회 고등부 대상】
수상자 이유리
 포근한 봄기운이 풍기는 5월, 오죽헌 옆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니 배롱나무 꽃이 피어난 게 보였어요. 바람결에 잎이 간지럼을 타 붉게 물든 모습이 엄마를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언제나 소녀같이 수줍게 웃는 엄마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요.
늘 가까이 있어도 쉽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사람. 엄마에게 편지를 쓰기위해 펜을 들었지만 펜을 쥐었다가, 내려놓기를 수 없이 반복했어요. 그 흔한 어버이날에도 쪽지 한 장 없이 지나치던 제가 편지를 적기 직전까지도 많이 망설여졌어요. 어떤 말을 써내려가야 할지 떨리기도 하고 가슴이 자꾸 먹먹해지는 것 같아요. 빈 종이에 제 마음을 다 그려 낼 수 있을지...
 11살,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었던 것 같아요. 엄마가 아빠와 가족 몰래 큰 빚을 지게 되면서 제겐 불행이 시작되었어요. 그건까진 정말 남부럽지 않을 만큼 행복한 집이였는데 우리 집은.
 매일같이 카드회사에서 걸려오는 엄마를 찾는 전화, 늦은 밤 집에 찾아와 엄마를 찾는 낯선 사람들까지 어린 내겐 한 순간, 한 순간이 두려움의 그림자였어요. 늦게까지 일하시는 아빠와 고등학생 언니들은 밤늦게 집에 들어오고, 엄마는 어디 있는 지도 잘 모르겠고. 매일같이 아무도 없는 빈집에 있는 게 너무 싫었어요. 저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되는 것 같아 힘들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자고 있는 날 아무 말 없이 감싸안아주는 엄마가 있었기에. 그러던 중 가족들이 엄마가 빚진 것을 알게 되고, 더 이상 이 괴로움을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되었지만 괴로움은 몇 배로 커져 가족 모두에게 큰 고통이 되었어요. 매일 술로 괴로움을 달래는 아빠와 눈물만 흘리는 엄마 사이에서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방안에서 큰 소리가 오가며 이혼하자고 싸우시는 부모님의 소릴 들으며 숨죽인 채 조용히 눈물 흘리다 잠드는 것.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그 후 며칠, 몇 달 엄마와 싸우시기만 하던 아빠는 큰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간다고 했잖아요. 어린 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아빠를 떠나보냈어요. 의도치 않았지만 우연히 언니들이 하는 애길 듣게 되었는데 어린 ‘나’ 때문에 이혼 할 수 없었고, 가족을 위해 큰 돈을 벌어야했던 아빠는 도망치듯 중국으로 떠난 걸 알게 된 순간 또 한 번 가슴 아픈 큰 상처가 되었어요. 근데 이 사실 조차 아무런 표현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슬퍼할까봐.
 아빠가 그렇게 중국으로 떠나고 3년을 매일같이 밤늦게까지 일하는 엄마를 보며 가슴이 부서질 듯 아팠어요. 그 나이에 여태까지 아무 것도 해본 적 없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어요. 남의 집에서 파출부로 일하는 엄마. 엄마로써, 여자로써 집안 살림하는 것도 힘들텐데 남의 집에 가서까지 또 일을 하는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근데 철부지 중학생 이였던 저는 집안 형편이 짜증나고 이해 할 수 없어서, 힘든 세상살이에 지쳐 집으로 들어오는 엄마에게 이유 없는 투정과 잦은 짜증을 부렸죠. 그런데도 언제난 받아주고, 말없이 제 두 손을 감싸주시는 엄마의 넘치는 사랑을 모른척하고 저는 더욱 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반항하기 바빴어요. 항상 밤 늦게까지 일만 하다 들어오는 엄마의 빈자리는 제겐 너무 큰 어두움이자 빈자리를 채우고자 그랬던 것 같아요. 넉넉하지 못한 용돈과 갖고 싶어도 뭐 하나 제대로 살 수 없던 집, 이렇게 만든 엄마가 너무 미웠어요. 아빠에 대한 애절함과 그리움이 엄마에 대한 더 큰 원망으로 바뀐 것 같아요. 저에겐.
 그러나 엄마의 넘치는 사랑을 알면서도 마음과는 다르게 점점 삐뚤게 행동하는 내 자신이 너무 미웠어요. 근데도 엄마는 내 마음을 다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항상 그 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계셨어요.
 어느 날 설거지 하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수척해진 몸과 언제난 예뻤던 엄마의 얼굴에는 눈에 띄게 늘어난 주름밖에 안보이더라고요. 얼굴의 주름은 나이를 먹은 흔적이라고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니까 그 흔적들 하나, 하나가 다 제가 엄마한테 드린 근심과 상처뿐인 것 같아 죄송했지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모했어요.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미안함 때문에.
 결국 저는 이 모든 걸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어요. 아무도 알지 못하게. 시간이 흐르고 기숙사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엄마와 얼굴 마주할 시간조차 거의 없었잖아요
 같은 집에 살고 있지만 늘 어색하고, 불편하게만 느껴지던 엄마에게서 벗어나고자 기숙사 학교에 오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느껴지는 건 이상하게도 엄마의 빈자리와 감사함 뿐이였어요.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모든 걸 혼자해내야 했기에 처음엔 양말 빨래하는 것조차 너무 힘들고, 몸이 약해 자주 아프던 저는 엄마에게 응석부리고 싶었고, 따뜻한 품이 그리울 때가 많아 남몰래 울기도 하고, 잠을 자기 전에 눈을 감으면 언제나 떠오르는 보고 싶은 엄마 얼굴을 떨쳐내기 위해 밤새 뒤척인 적이 많았지만 그럴수록 꾹 참고 집에 연락조차 잘 안하게 되더라고요. 혹시라도 제 투정에 괜한 걱정하실까봐.
 그러다가 엄마의 생신 날 엄마에게 전화를 했잖아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감사하다고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항상 외로웠다고 겨우 한 마디 전할 수 있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울음소리에 한 참을 가만히 서있어야 했어요. 엄마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어도 엄마가 참 미웠지? 다 알아 그 어린나이에 누구보다 마음이 뭉그러지고 다쳤을 너 일텐데 아무표현도 하지 않고, 항상 눈치만 보는 너를 생각하면 엄마가 가슴이 너무 아파 유리야.  밉겠지만 엄마를 용서해 줘” 라며 눈물로 용서를 구하는 목소리에 저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어요. 가슴이 저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어요. 저도 그동안은 엄마를 미워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엄마의 사랑은 그대로 이더라고요. 조금이라도 전화하는 목소리가 달라지면 밥은 잘 먹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안 좋인 일 있는 거 아니냐며 걱정하시던 엄마에게 괜한 짜증만 부리고 전화를 끊은 뒤 죄송함과 감사함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저는 어쩔 수가 없나봐요.
 저는 엄마를 사랑해요. 단 한순간도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걸 알았어요. 그건 엄마가 단 한순간도 날 향해 품은 사랑이 변치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저한테 용서 같은 거 구할 필요 없어요. 엄마가 나한테 마음으로 애기를 했을 때 다 느낄 수 있었어요.
 전기는 전선을 통해 흐르듯이 엄마의 사랑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느껴졌으니까.
엄마의 넘치는 사랑에 항상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해 가슴이 뭉클해져요. 꺾여버린 꽃처럼 아플 때도 쓰러진 나무처럼 초라할 때도 언제나 저를 믿어주고 거친 손이지만 언제나 따스하게 제 손을 감싸주는 엄마가 있기에 정말 행복해요.
 엄마 사랑합니다.
2011년 따스한 봄,
엄마를 끝까지 사랑하지 않을 줄 알았던 딸 유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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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일반부/금상] 【제12회 전국 편지쓰기대회 일반부 금상】
수상자 유지호
 “오실 땐 단골손님 안 오실땐 남인데 무엇이 안타까워 기다려지나... 오늘 밤도 기다려지는 아- 단골손님 그리워라 단골손님.”
어머님, 어머님에게 단골 손님은 누구였는지, 왜 그렇게 서럽도록 기다리고 계셨는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해마다 이맘 때 쯤이면 짙어가는 녹음을 바라보며 어머님께서 즐겨 부르시던 노랫 소리가 제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옵니다. 어머니께서 저희와 이별을 한 날이 그러니까 스승의 날이었지요. 그래서인지 당신의 외동딸은 교직 생활을 줄 곳 하면서 지난 10년 동안은 스승의 날만 되면 어머니가 그리워 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지냅니다. 아마도 그것은 사랑하는 아이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선생님, 스승의 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더없이 아늑하고 따뜻했던 어머니의 품속이 그리워 눈물짓고 있는 듯 합니다. ‘엄마, 고마워요. 엄마, 행복했어요. 엄마하고 지낸 40년의 시간이...... 그리고 너무 보고 싶어요’ 마음 속에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북받쳐 옆에서 지켜보는 제 마음도 많이 아파옵니다.
 어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전화를 받고 부평 성모병원으로 달려 갔을때만해도 큰 일 아니겠으려니 했습니다. 포장으로 판매되는 사골국을 드시고 가벼운 배탈이 난 정도라 안정과 휴식을 취하면서 치료를 받으면 곧 나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에 가족 모두가 안심을 하고 있었지요. 어머니 께서도 별 일 아니라고 손을 홰홰 저으시며 괜찮다고 하셨으니까요. 병원에 입원을 하고 계시면서도 언제나 저희들을 먼저 걱정하셨던 일 생각나시죠. 혼자 있어도 된다고, 출근하려면 빨리 들어가서 쉬라는 말을 입에 달고 계셨잖아요. 외손주를 맡아서 키우시랴, 주말이면 장사를 다니시랴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사신 그 의미를 못난 사위는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불편하다고 투덜거리고 때로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 어머님 가슴에 못을 박기도 했던 그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르곤 합니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어머니께 얹혀서 지낸 시간들이 저희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저희 곁에 없으셨습니다.
 주말이 가까워 오면 어머님 방에서 들려오는 덜그럭 소리아 함께 심장 뛰는 소리가 집 안 가득했습니다. 한 주간 저희들 치다꺼리하시면서 외 손주 돌보시느라 지친 몸임에도 토요일과 일요일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장사를 다니셨잖아요 덜그럭덜그럭 밤 새 들리는 소리에 때로는 신경이 예민해져 저희 집에 묶여 온갖 일을 다 하시는 노고는 이해하지 못한 채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데 우리 어머님은 쉬는 날만 다가오면 저러시니 이거 피곤해서 죽겠구만’이라는 독백을 하면서 짜증섞인 표정을 지어도 어머니께서는 늘 웃기만 하셨지요
 어머니, 그것은 어머니께서 마른 나뭇가지에 싹을 틔우고 자식들이 가는 길에 무더기무더기 꽃망울을 터뜨리기 위해 덜그럭 덜그럭 거리던 것이었음을 알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처진 오른쪽 어깨에 메고 다니시는 화장품 가방 가득 살아온 생애의 소금기 머금은 아픈 기억이 줄줄이 매달려 있던 것을 그때는 왜 그렇게 몰랐을까요. 가방이 펼쳐질 때마다 꽃피는 계절이 아닌데도 꽃망울 활짝 열려 마을 여인들의 얼굴에는 꽃들이 밝은 웃음 입에 물로 피어났습니다. 어머님께서 걸어오신 그 길은 신기내린 비장함이 묻어 범접하기 어려운 신성한 길이었습니다.
 어머니, 시집살이의 고단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벌말에 가실 때에는 얼어붙은 한겨울에도 온 몸으로 흙냄새, 칼바람을 피부 깊숙이 받아들이며 일찍이 사별한 남편의 체취를 만나는 신념으로 거침없이 달려가셨지요. 남편의 몫까지 자식들에게 챙기려 한 여름에도 댕볕을 피할 그늘조차 없는 벌판을 땀방울로 온 몸을 물들이며 다니시던 일도 떠오릅니다. 한없이 펼쳐진 김포 평야의 알곡이 그림 속의 떡으로만 보이는 생계의 아픔에도 울퉁불퉁한 길을 오직 한 마음으로 40년이 넘도록 달리셨습니다. 자라나는 삼남매의 희망통로를 설계하고 있으셨던 것이지요.
 어머니를 뵈러 병원을 드나들면서 어머니께서 살아오신 굴곡진 삶이 떠올라 이제부터라도 어머님의 마을을 좀 더 헤아려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님께서는 중환자실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저희들은 어머니께서 당을 앓고 계신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지요. 결국은 그것이 화근이 되어 합병증세로 이어져 끝내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님,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기며 떠나셨을 어머님의 눈물어린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 듬직한 사위의 모습 한 번 못 보여 드리고 ‘백년 손님’이나 운운하면서 지낸 자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지금의 저희에게 있어 어머님의 빈 자리가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 것은 어머님께서 베푸셨던 무한한 신뢰의 힘이었음을 알기에 더욱 더 그립고 보고 싶어집니다.
 어머니의 친정, 이화리로 장사를 가시는 날은 어린 아이처럼 부풀어 서다니시던 일 기억나시죠. 하얀 배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하여 이화리(梨花里). 그 곳으로 가실 때에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하얀 배꽃보다 흰 미소가 연신 피어 오르곤 했습니다. 오고가는 길목마다 어머님의 어릴적 손 때묻은 꽃들이 피어나 오랜 시간 동심으로 머물던 생각 날리며 나오는 길을 못내 아쉬워 하시던 그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 한 폭의 그림으로 제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어머님의 발길 닿는 곳마다 수도 없이 만나는 돌부리쯤은 훌쩍훌쩍 뛰어 넘으셨잖아요. 저녁 무렵에야 헐렁해진 화장품 가방 속 가벼워진 마음만큼 빨간 글씨로 깨알같이 적힌 외상장부 헤아리는 재미에 꽃구름 하늘아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던 어머니의 모습을 저는 보았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그토록 아끼고 사랑해 주던 외손주들은 잘 자라났습니다. 영신이는 어머님께서 일일이 챙겨주신 그 정성이 씨앗이 되어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해 어머니께서 못다 이룬 꿈을 자신이 이뤄보겠노라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영찬이는 다른 또래의 아이들보다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이 마음이 드셨던지 어머님께서는 특별히 더 좋아하셨지요.그 녀석도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의 외동딸은 꿋꿋하게 교직 생활을 하면서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40년이 넘도록 달리며 쌓아올린 돌탑, 형님들 또한 그 어떤비, 바람에도 꺽이지 않는 믿음의 버팀목으로 뿌리를 깊이 내리며 어머니께서 보시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 당당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즐겨 부르시던 반가운 ‘단골 손님’으로 발길 닿는 곳마다 연지곤지 찍어 형형색색 꽃들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시면서 주술의 꽃 덤불을 가득 싣고 폐달을 밟으신 그 길이 저희들의 앞 길을 열어주기 위한 오르막길이었음을 알고 그 깊은 뜻을 헤아리며 마음에 새겨 봅니다. . 고된 언덕마루, 주술사처럼 살아오신 정성에 성황당 산신령도 어머님에게 만큼은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자전거 한 대에 몸을 의지하고 황혼의 가방이 홀쭉해야 미소가 풍선처럼 부풀었던 지난 날, 덜그럭덜그럭 그 신비의 소리 지금도 들리는 듯 방문을 열면 어머니께서는 저를 바라보며 방긋 웃고 계시는 걸요. 그 때의 정성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 열매를 맺는 지금, 오늘 아침도 경대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는 어머님의 딸을 보면서 화장품 가득 가방을 메고 나가시는 그때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즐겨 부르시던 ‘단골손님’을 오늘은 제가 한 번 불러 들여 볼게요. “오실 땐 단골손님 안 오실 땐 남인데 무엇이 안타까워 기다려지나...... 오늘 밤도 기다려지는 아- 단골손님 그리워라 단골손님.”
 어머님게서는 제 마음 속에 언제나 계시면서 가는?한 단골손님이십니다. 오늘 따라 어머니가 유난히 보고싶어지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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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일반부/금상] 【제12회 전국 편지쓰기대회 일반부 금상】
수상자 김명희
 어머니!
 어제까지나 열정적이고 힘차게 사실 것 같았던 어머니께서도 어느 덧 70을 넘기시고 지난 5월 22일에는 아버지와의 결혼 50주년을 맞이하셨습니다.
 저도 어느 덧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서서, 어머니의 지나 온 삶을 가만히 돌이켜봅니다.
어릴 적 사고로 한쪽 팔을 잃고 한평생 오른 팔 하나로 오남매 뒷바라지와 시댁 시중, 아버지 시중으로 늘 분주했던 삶을 말입니다.
 불구인 어머니가 며느리로 들어온 사실에 불쾌해 하시며 모진 시집살이를 시키셨던 할머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니까’ 하시며서 늘 보살펴드리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극진하게 봉양하셨던 모습은 지금도 제 가슴에 남습니다. 철 없던 어린시절에는 어머니를 구박하고 때리고 굶기는 할머니가 밉고, 그렇게 온갖 설움과 냉대를 당하면서도 순순하게 며느리의 도리와 역할을 다하는 어머니의 순종도 싫었습니다. 할머니께서 젊으실 땐 어쩔 도리가 없다지만, 나이 많고 드시고 힘이 없어졌을 때는 한번 대꾸도 해보고 큰소리도 칠 수 있으시련만, 사시사철 늘 홀로 계신 할머니를 걱정하시고 변함없는 효(孝)를 실천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결국 스스로 뉘우치시고, 어머니께 모질게 굴었던 부분을 보상이라도 하시려는 듯 저희 오남매의 크고 작은 일을 돕고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펴 주셨지요. 결국 사랑의 힘이 승리한 것입니다.
 해마다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살을 에는 듯한 엄동설한이 다가오면 어머니께서는 큰 들통에 떡국을 가득 끓여 가까운 구치소를 방문하여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시면서 그들과 연말연시의 아쉬움과 희망을 같이 나누셨지요. 집안 살림이 그다지 넉넉한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그들을 찾아가 베풀고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불평이 일기도 하였지만 어른이 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모든 베풂과 나눔이 덕이 지금이 저희 오남매가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명석한 두뇌와 지혜를 갖추신 어머니였건만 ‘장애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가정과 사회에서 몸소 겪어내야 했던 차별과 냉소의 설움을 생각하시고는 스스로 ‘장애우의 어머니’이기를 자처하여 힘이 닿는 대로 장애인들의 복지와 처우개선을 위하여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관련 기관과 후원회, 인권보호단체 등을 찾아다니시면서 애쓰신 세월이 30여 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주면의 반대와 훼방꾼들도 많았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바르고 참다운 세상을 열어가는 일에 전념하고 헌신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세상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실천적인 믿음과 그 깊은 마음의 소원을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지난 5월 22일, 결혼 59주년을 맞이하신 부모님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직장의 일과 교회 일로 함께 하지 못하고 돈만 보내드려서 너무 죄송하였습니다. 한번쯤 나무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시련만,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만도 고맙다’ 하시면서 가까운 친척들을 불러 기쁨을 함께 하여 주심으로 자식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자식들도 다 중년에 접어들어 각자의 직장과 가정과 사회에서 제 역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모든 자식 걱정 다 내려놓고 편안히 쉬실 수 있는 시간이 되었건만, 당뇨라는 몹쓸 병은 어머니를 마구 공략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께서는 15년 전, 뇌출혈로 쓰러지셨던 휴유증과 고혈압으로 그나마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의 도움없이는 하루도 살아가실 수가 없는 어린아이 같은 몸이 되셨습니다. 워낙 까다로운 입맛을 지니신 분이라 하루 하루 식단과 반찬에도 신경을 쓰셔야 하고 아버지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보호하고 관찰하시느라 힘드실텐데도 자식들 앞에서 전혀 내색 않으시고 묵묵히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시는 모습, 존경하고 감사합니다.
 부유한 가정의 셋째 딸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으셨던 어머니께서 6·25전쟁 당시 외할아버지를 북한 괴뢰군의 총살에 잃으시고 외할머니를 따라 피난길에 올라 힘들고 어려운 유년기를 보내신 어머니. 한참 예민할 시기에 한쪽 팔이 불구의 몸이 되는 난관에 부딪쳤음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생의 자리를 놓지 않으시고 배움의 길을 꿋꿋이 걸으신 어머니, 대학을 졸업한 후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지만, 순탄하지 못한 결혼생활과 시댁의 모진 박대 속에서도 5남매의 어머니 역할과 착하고 어진 며느리 역할을 거뜬히 해내신 어머니. 물론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신 외할머니께도 효성이 지극한 딸이셨지요.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힘든 상황에서 늘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돌아보시며 평생 소외되고 약한 자들의 버팀목과 대변인의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 지금도 교회와 사회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봉사하시면서 몸을 괴롭히는 병마조차 친구 삼아 긍정의 힘으로 밝게 살아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이 작은 편지지에 힘껏 크게 그려보려고 노력했으나 이 짧은 필력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미사여구로 꾸며보려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변죽만 두드리다가 지면이 다하였습니다.
 저는 아직 부족함이 많은 딸이요, 실수가 많은 철없는 아내이며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부족한 엄마입니다. 하지만 제 안에서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열정과 긍정의 힘만큼은 어머니께서 원천적으로 제게 부어주신 힘이기에 그 힘으로 이 험한 세상을 넉넉히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에 있을 적부터 하나님 앞에서 이 딸을 바르고 굳센 신상의 사람으로 키우겠다고 서원한 모태신앙의 힘으로 저는 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7년의 평교사 시절을 보람 있게 마무리하고 교감으로 첫 발령을 받았을 때 어머니께 안겨 드린 ‘교감 임명장’을 큰 보물인 양 가슴 가득 받아들고 환히 웃으시던 어머니. 한 장 종이에 불과한 그것을 거실에 활짝 펼쳐 놓으시고 평생의 보람으로 간직하시는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 가르침이 헛되지 않도록 이 부족한 딸도 더 열심히, 더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힘쓰겠습니다. 이 땅의 꿈나무들을 바르게 양육하고 소중한 ‘한 사람’으로 세워가는 일에 남은 교직생애를 다 바치겠습니다. 어머니는 제 생애의 위대한 멘토이십니다.
 어머니께서도 남은 생애, 주님 안에서 부디 행복하고 내내 건강시기를 기도하고 소원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내 어머니!
2011년 오월의 마지막 날
큰딸 명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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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
 제목 [일반부/대상] 제 11회 편지쓰기대회 - 일반부 대상
수상자 임영자
사랑하는 어머니께.
어머니, 글도 모르시는 당신에게 40년 만에 처음으로 글을 드립니다.
어머니, 어머니란 이름만 입속으로 되 내어도 가슴이 미어지고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어 홀로 가슴을 움켜쥡니다. 슬픔이 나의 생활이 되어버린 요즘 이 딸이 한 평생 걸을 수 없듯이 당신 또한 잃어버린 기억을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도 서럽고 서럽습니다.
어머니, 당신에게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감사의 시간이 저에게 얼마나 더 허락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당신이 이승을 떠나는 그 날까지 아니 하나님께서 제 생명을 걷어 가시는 순간까지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어머니, 조금 전 당신은 귀저기 갈기를 완강히 거부하시며 아직 조금 남아있는 한쪽발의 힘으로 마구 발길질을 하시며 발버둥을 치셨지요. 그런 당신을 소아마비로 양쪽다리를 못 쓰는 저의 몸으로 한참을 실랑이 하고 나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발버둥 치시던 당신이 이 딸과 실랑이하기도 지치셨는지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벽에 기대앉아 주름으로 거북이 등처럼 되어버린 당신이 너무도 작아져버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왠지 모를 서러움이 복받쳐 주르르 눈물이 볼을 타고 떨어졌습니다. 저의 서러움 토해내는 소리에 주무시는 줄 알았던 당신이 휑하니 깊게 패인 눈을 뜨시며 깜짝 놀라 물으셨죠?  “아가, 왜 울어? 걷고 싶어서 우는 거니? 아가 울지 마라 내 다리 빌려 줄 테니 울지 마라. 네가 울면 이 할미 가슴이 너무 아파 죽겠어.” 하시며 연신 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언제 감춰뒀던 것인지 침대 매트 밑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제 입속에 넣어주셨지요.
가엾은 당신, 이 세상 어느 부모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지 않은 분 없겠지만 당신은 정말 열심히 사셨습니다. 그런 당신이기에 이 딸의 가슴이 더욱 아프고 서럽습니다. 12년을 중풍으로 누워있던 남편과 소아마비로 걷지 못하는 딸을 키우며 당신은 열 손가락을 몇 번을 꼽았다 펴야할 정도로 안 해본 장사가 없으셨지요. 그 세월 동안 당신이 겪어온 삶의 힘겨움을 어찌 제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병석에 계셨던 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떠나시고 저는 착한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저는 남편과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그동안 너무도 힘겹게 살아오신 불쌍한 당신께 정말 효도 많이 하자고요. 그러나 당신의 고생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낳은 딸아이가 백혈병으로 죽음의 문턱을 수 없이 드나들었고, 오랜 세월 병원에서 지내야했기에 그 세월동안 당신은 걷지 못하는 딸 대신 잠시도 바닥에 누워 있지 않는 손녀를 등에 업고 허리뼈가 물러나는 줄도 모르고 지내셨습니다. 회생이 힘들겠다는 의사 말에 어머니 당신은 내 목숨 거둬가고 우리 손녀 살려달라고 병실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셨습니다. 그날의 당신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옵니다. 그런 당신의 눈물겨운 간병 덕으로 저의 딸은 그 무서운 병마에게 이겨 지금은 건강한 대학생이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당신 귀에 입을 대고 “할머니 사랑 한다.” 라고 속삭이는데 야속한 당신은 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시는지요?
저를 20년을 업어 키우셨고 당신 몸보다 더욱 커버린 이 딸을 업고 세상구경 시켜 주신다고 남산이며 장충단공원도 수없이 가셨습니다. 어머니, 생각나세요? 당신과 제가 40년을 살고 있는 우리 동네에 매봉 산 이란 이름의 산이 있는 것, 과히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인데 봄이면 유난히도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곤했지요. 살을 에는 추운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벌거숭이산은 노란 개나리꽃으로 옷을 입고, 군데군데 진달래와 벚꽃이 어우러지면 이 세상 그 어떤 솜씨 좋은 화가가 그 풍경과 같은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제 나이 예닐곱 살 때부터라 생각됩니다. 어느 봄날 외출했다 돌아오신 당신이 다짜고짜 저에게 등을 업히라고 하셨습니다. 푸른 산이 아닌 노란 산을 구경시켜주신다며, 온 산이 노란 개나리꽃으로 덥혀있는 것을 당신 혼자만 보고, 걷지 못해 늘 방에서 세월 보내는 딸이 당신은 안타까우셨던 거지요. 그런데 평소에는 저를 잘 업으셨던 당신이 그 날은 어찌 된 일인지 대문 밖에서 몇 발자국 걷더니 무엇엔가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저는 이마를 다쳐 많은 피를 흘렸고, 당신은 피를 흘리는 저를 부둥켜안고 “미안해, 미안해” 하며 우셨습니다. 저는 상처의 아픔보다 어린나이에 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복받쳐 서럽게 울었지요. 어머니와 저는 그렇게 길바닥에 주저앉아 얼마를 많이 울었던가요?
그 다음 날부터 당신은 혼자 산에 올라가 노란 개나리 한 움큼에다 진달래 몇 송이를 섞어 꺾어 와서는 꽃병대신 우리 집 마당에 놓여 있는 자그마한 항아리에다가 꽂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길 산에 꽃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카시아 꽃이 피면 꽃을 따와서는 먹어보라고 성화도 하셨고, 봉숭아꽃이 피면 그 꽃을 따다 아주까리 잎으로 손톱을 감싸 물도 들여 주셨지요. 첫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조그마한 계집아이에게 첫서리가 내릴 때 까지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씀도 해주시며……. 개나리가 피었던 산에 나무들이 빨갛게 고운 빛으로 옷을 갈아입으면 그 나무 잎을 주워와 고이고이 책갈피에 끼워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어머니, 당신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유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제 삶의 이정표이자 수호천사였습니다. 저는 문득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이 저를 평생 걷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대신 어머니라는 이름의 수호천사를 보내 주셨다고. 산은 그렇게, 어머니 당신이 이 딸을 사랑하는 표현의 산이었습니다. 당신의 눈물과 기쁨이 묻어 있는 산, 꽃을 꺾으러 산에 오르실 때 당신이 느꼈을 그 슬픔의 깊이를 천금 만금보다 더 귀한 저의 두 아이의 어미가 된 지금에서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꽃을 꺾어 산자락을 내려오시며 이 딸이 꽃을 보고 즐거워 할 것을 상상하며 당신이 맛보았을 기쁨 또한 크셨을 겁니다. 어머니, 당신의 기쁨과 한이 서려있는 매봉산을 저는 영원히 제 가슴속 사진첩에 보물처럼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저는 그런 당신이 늘 태산처럼 느껴졌고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제 삶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주시리라 믿고 또 믿었습니다. 당신에게 있는 것 다 주고도 더 못주어 늘 가슴 아려하셨던 당신, 내 어머니, 그랬던 당신이 너무도 힘겨웠던 지난 세월을 잊고 싶으셨는지 지금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셨습니다.
아직 한참 사실 연세에 치매라는 병마 앞에 젖먹이 어린 아이보다 더욱 나약한 모습으로 이 딸의 억장이 무너져 천길 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하십니다.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은 당신을 모시고 사위가 벌써 7년째 이 병원 저 병원 ?아 다니지만 조금도 차도를 보이지 않아 저를 너무도 슬프게 합니다. 몇 개월 전에는 당신 다니시는 병원에서 다시 한 번 정밀 검사를 받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입원해 여러 검사를 받았지요. 입원해 계시는 중에 당신의 일흔일곱 번째 맞으시는 생신이었습니다. 생신 날 미역국도 못 드시고 병원에 계시는 당신을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쇠고기 조금 넣고 미역국을 끓여 남편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당신이 입원해 계신 병원으로 갔었습니다.
그날은 당신이 받은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엄마 저 왔어요. 엄마가 제일 사랑하는 딸 저요.” “뭐라고? 우리 딸이 왔다고, 내 딸은 하늘나라에 있는데 그 먼데서 뭐를 타고 왔어?” 하시며 연신 딴소리만 하셨지요. 당신은 이 딸에게 언니라고 부르기도 하시고, 이모라고 부르기도 하시더니 나중에는 어머니라고까지 호칭을 하셨죠. 당신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이 밀려와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당신은 링거 줄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하시며 당신의 한 많고 서러웠던 일생을 필름처럼 되감았다 풀었다 하셨습니다.
의사가 저희 부부를 잠깐 보자고 해, 왠지 모를 불한을 느끼며 담당 의사 방으로 갔습니다. 의사가 너무도 가볍게 하는 말이 “할머니는 노인성 치매가 아니라 오른쪽 뇌에 종양으로 인한 치매십니다.” 의사의 조금은 무책임하게 들리는 그 말에 저는 “아니에요.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선생님 다시 한 번만 더 검사해 주세요. 정말 우리 어머니가 뇌종양이라면 어서 수술해 주세요.” 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저에게 의사는 “할머님은 연세도 계시고, 이미 왼쪽 뇌도 많이 상해 수술이 어렵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아도 6개월 이상은 견디기 힘드실 것 같네요.” 저는 두 손을 모으고 눈물로 애원했습니다. “선생님, 제발 도와주세요. 저 이대로 우리 어머니 떠나시게 하면 안돼요. 도저히 그럴 수는 없어요. 신장도 이식하고, 눈도 이식하고, 간도 이식하는데 왜 뇌는 안 돼 나요? 저의 뇌 우리 어머니께 이식해 주세요. 사람이 달나라도 가고, 동물도 복제하며 인간까지도 복제한다고 떠드는 이 시대에 어떻게 우리 어머니 머릿속에 있는 조그마한 혹 하나 떼어내지 못 한단 말에요? 말도 안 되잖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부모의 도리가 있다면 자식 또한 자식의 도리가 있잖아요. 저 우리 어머니께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아요. 이대로는 정말 안돼요.” 하며 울부짖었지요. 의사는 저의 이런 절규에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저었습니다. 저는 의사의 방을 무슨 정신으로 나왔는지 모르게 나와서는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병실 복도에서 엉엉 통곡했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서러움을 토해낸 뒤 어머니 당신 계시는 병실로 갔습니다.
붉게 충혈 된 저의 눈을 보신 당신은 음료 캔 하나를 건네시며 “이모, 걷고 싶어 또 울어? 이모가 울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 제발 울지마, 울지마” 하시며 저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당신 입으신 환자옷소매 끝으로 연신 닦아주셨지요. 그런 당신 앞에서 복받치는 서러움을 목구멍이 아프도록 꾸역꾸역 삼키는 저에게 간병하시는 아주머니 위로 하며 하시는 말씀이, “너무 속상해 하지 말아요. 그래도 어머님 정신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세요. 의사만 보시면 손을 붙들고 우리 딸 다리 고쳐달라고 때를 쓰기도 하시고, 병원에서 휠체어 탄 사람을 보면 우리 딸 휠체어니까 망가지지 않게 조심해서 타라고 어찌나 당부를 하시는지 몰라요.” 아주머니의 그 말에 저는 어금니가 아프도록 참고 있던 서러움을 결국 터뜨리며 오열하고 말았지요. 저의 그런 통곡에 너무 당황스러워하는 당신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저는 지금까지의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 몸속에 있는 눈물을 모두 다 쏟아버리려는 듯 말입니다.
저는 가슴속에서 간절히 두 손을 모았습니다. 자리에다 대소변을 보아도 좋고, 저를 견딜 수 없이 힘들게 해도 좋으니 제발 어머니가 제 곁에 살아만 계셔달라고, 어머니 당신이 제게 주신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사고.
병원에서 더 이상 손쓸 게 없다고 해 당신은 퇴원 하셨지요. 그리고 당신을 병원에 그대로 계시게 하고는 저의 마음이 도저히 편치가 않아 힘들어도 제가 당신 곁을 지켜 드리고 싶었습니다. 집으로 오신 당신은 40년을 살아온 이 집을 너무도 낯설어하시며 집에 가자시며 막무가내로 조르십니다.
어머니, 저는 지금까지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제 삶 자체를 장애를 갖고 살았거나 제 삶이 힘겹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가장 축복의 선물이 저의 생명이라 믿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몹쓸 병을 앓으신 뒤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밖으로만 나가자 시는 당신을 밖에 모시고 갈 수 없어 저에게 꼬리표처럼 붙어 있는 장애가 너무 서럽고 자꾸자꾸 원망스럽습니다. 어쩌다 휠체어를 타고 당신과 밖에 나가면 우리 모녀를 보며 주위 사람들의 알 수 없는 연민의 눈빛과 끌끌 혀 차는 소리는 저의 귀에 참을 수 없는 고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 자신조차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중증의 장애인 처지에 치매와 중풍까지 앓으시는 당신을 간병하기가 너무도 힘에 겨워 문득문득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제가 요즘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줄 모르시지요? 자꾸자꾸 망가져 가는 당신을 보면 슬프고 몸은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지만 마음은 하염없이 평화롭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시니까요.
지금 당신은 모든 기억을 잊고 젖먹이 어린 아기 모습으로 당신 분신이었던 이 딸마저 못 알아보시고 언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줌마라고 부르기도 하는 기막힌 현실이지만, 당신의 병명이 뇌종양에서 혈관성 치매로 바뀌었으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어머니, 저의 지금 소망은 제 인생에서 5년 아니 10년쯤 깎아서 당신에게 드릴 수만 있다면 하는 소망입니다. 어머니. 세상 사람들이 말합니다. 당신이 앓고 계시는 치매라는 병은 단란한 가정을 파괴시킬 정도로 무서운 병이라고요. 그래요 치매 정말 무섭고 힘겨운 병임이 틀림없어요. 하지만 몇 개월에 한번쯤 가족을 알아보시고 누구 아니냐고 당신이 물으시면 우리가족 모두는 이 세상에서 천금만금을 얻은 것 보다 더욱 행복하고 감사하답니다.
어머니, 저녁에 귀가한 사위가 당신 귀에다 입을 대고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해” 하며 수없이 속삭이고, 핸드폰 바탕화면에 장모님의 무표정한 모습을 사진 찍어 담아 넣고 다니는 사위에 눈물겨운 사랑과 전국중고생 자원봉사대회에 뽑혀 상금 200만원을 받아와서는 그 돈을 몽땅 할머니 맛난 것 사드린다고 말하는 저의 아들, 호세아의 효도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도 너무도 감사하고 또 감사하니까 오래오래 저희들 곁에 계셔주세요.
어머니, 먼 훗날 제 삶 끝자락에 섰을 때 저 스스로에게 어머니께 못해드린 효도 후회 없도록 저 정말 어머니께 잘해드리리 다시 한 번 약속드리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어머니, 당신에게 처음 드리는 이 딸의 편지 비록 눈으로는 읽지 못하셔도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어머니,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 딸임을 영원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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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일반부/금상] 제 11회 전국편지쓰기대회 - 일반부 금상
수상자 한재우
새벽을 깨우는 새의 지저귐과 안개를 가르는 전투화의 울림은 어제와 다름이 없는데, 오늘 아버지께서는 마지막 출근을 하십니다. 서른 해 동안 보아왔듯, 아침은 항상 정신없이 바쁜 것을 잘 알면서도 조금 전에 일부러 전화를 드린 것은, 마음만이라도 고향집 현관에 서서 아버지를 배웅하고 싶었던 까닭입니다. “괜찮다. 잘 다녀오마.” 말씀은 평소와 같았지만, 숨길 수 없는 휑한 아쉬움이 수화기 언저리에 맴돌았습니다. 퇴임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못난 아들의 죄송스러움을 덜어주려 아무 내색하지 낳으시는 아버지. 그 깊은 속마음으로도 차마 다 가릴 수 없는 서운한 심경을 어찌 모를 리 있겠는지요. 스물아홉 해를 사는 동안 한 번도 편지를 드리지 않은 불효한 자식, 어색하지만 제 마음을 오롯이 담고 싶어서 이렇게 투박한 펜을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격려와 관심을 받으며 학창시절을 보냈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학에 합격한 스무 살 무렵까지 아버지께 저는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고, 힘든 일상도 견뎌내시게 했던 활력소였지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짊어진 고된 하루를 겨우 내려놓으시고도, 제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종알거리며 아버지께서는 지친 기색 없이 웃으며 들어주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구해오셨고, 어려운 일이라 해도 싫은 표정 한번 없으셨습니다. 제가 여덟 살 때 였던가요. 온 세상은 서울올림픽으로 들떠 있고, 아이들은 ‘겜보이’라 불리는 전자게임기에 환호할 무렵, 저도 하나 갖고 싶다 조르자, 시험에서 전 과목 백점을 맞으면 사 주겠다고 흔쾌히 약속하셨지요. 만 원짜리 지폐 열한 장을 꾹꾹 눌러가며 내시고는 책가방만한 상자를 손에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한 달 일하시고 받은 돈임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하지만 스무 살이 훌쩍 넘고.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던 고시공부에서 연거푸 실패를 거듭하면서 철없는 아들이 유일하게 드릴 수 있었던 ‘희망’이라는 효도도 점차 빛을 잃어갔습니다. 수업과 공부에 대한 재잘거림이 사라진 저를 보면서 얼마나 기운을 잃으셨을지. 그래도 “네가 힘들지. 나는 괜찮다.”고 항상 말씀하시면서 오직 제 걱정 뿐이셨지요.
F학점 세 개가 박힌 학사경고가 날아왔을 때도 꾸중은커녕, 오히려 힘내라며 등을 도닥여 주셨습니다. 시험을 망치고 허연 얼굴로 귀가 했던 날, 좋은날이 오면 쓰려했던 것이라며 장롱 깊숙이 넣어둔 귀한 술을 꺼내 격려해주셨던 아버지, 당신의 인내는 끝이 없는데 못난 자식은 매양 실망만을 드렸습니다.
몇 년간의 고시공부를 접고 입대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던 지난겨울 어느 밤을 기억합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처음으로 대포 집을 찾았었지요.
죄송스러움에 울먹이는 술잔을 가운데 놓고 이제 그만두고 싶다고, 다른 것을 하고 싶다고 그리 이야기를 꺼냈었습니다. 저의 이십 대를 고스란히 바쳤고, 그것은 아버지의 삶은 온전히 쏟아 부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기에 입을 열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절망에 가까운 실망을 어찌 감당하실지, 그만두고 이유를 과연 납득하실지,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단 한마디의 질책이나 호통도 없이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야지. 부모 걱정은 하지마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습니다. 차라리 화를 내셨다면, 실망했다고 말씀하셨다면 그렇게 가슴이 북받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서른 해를 하루같이 공장의 한 구석에서 일하시면 자식만을 바라보셨는데 얼마나 기대가 높았으며 또 얼마나 낙심이 크실지. 말씀하지 아니하여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 날 아버지께서는 아무 일 없는 듯 자리에 누웠지만, 끝내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셨지요, 세월이 얼마나 지나야 그 밤 깊게 패인 상심의 주름을 펴 드릴 수 있을지 죄송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착잡한 심정은 옷장 속 깊숙이 다른 짐과 함께 정리해 넣어두고, 손 흔드는 아버지를 뒤로 한 채, 저는 훌쩍 논산으로 왔습니다. 동기들 보다 십년 가까이 늦은 나이, ‘노약자’라는 말을 들어가며 정신이 혼미할 때까지 매일 흙바닥 위에서 뛰고 또 뛰었지요. 처음 맞닥뜨리는 힘든 환경 속에서 가장 그리웠던 것은, 초코파이도 술도 아닌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소반에 둘러 앉아 밥을 먹고, 개천가를 산책했던 숱한 일상들. 훈련소의 거친 밥과 딱딱한 잠자리에도 감지덕지 하면서, 제가 스물아홉 해 동안 당연하게 여기며 누려온 많은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다시 밖에 나가면 평범한 순간들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겠다고 끊임없이 되새겼습니다.
그리고 ‘한 끼 밥’을 준비하려 불덩이 같은 솥을 낑낑대고 옮기던 삼복더위의 어느 날, 문득 그 ‘소중한 일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제가 한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아버지의 등에 손가락을 들고 업힌 채 거친 일 한 조각하지 않고 편히 지내왔다는 생각이 셔츠를 가득 적셔 채찍처럼 온 몸을 휘감았을 때, 아버지, 저는 죄송스러움과 감사함으로,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어쩌면 인과관계를 보다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께서 제 몫의 고생까지 모두 짊어져 온 까닭에 오늘까지 제가 살아왔음을 잊고 산 저는 나이를 먹었어도 여전히 철부지였던 것입니다.
철없는 자식을 위해 반평생을 온전히 바치신 아버지. 그 밤 “너는 그 동안 부모에게 모든 만족을 다 주었어.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제가 드린 것은 아버지가 보여주신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인내의 크기에 터럭만치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제는 제가 한 걸음씩 보답할 차례입니다. 아버지의 발바닥만큼 딱딱하게 굳고 모나려면 아직도 가야할 길이 얼마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단단히 묶은 전투화 안에서 제 발도 조금씩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 보람되게 군 생활을 하며 인내와 성실을 힘줄마다 새기고, 이를 디딤돌 삼아 훗날 정말 빛나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 단단한 나무는 성장이 더디고 늦게 피는 꽃은 귀하기에 사랑받습니다. 아버지께서 평생을 일군 땅에서 아름드리나무와 만개한 꽃이 무성한 숲을 이루는 것을 반드시 보여드리겠습니다. 부디 몸과 마음 모두 오래도록 건강하십시오.
오랜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 출근길.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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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반부/금상] 제 11회 전국편지쓰기대회 - 일반부 금상
수상자 남현경
아버지, 햇살이 주렴처럼 쏟아집니다.
이 시간이 되면 아버지는 막개바다 잔잔한 물결 위를 유영하시겠지요? 오래되어 낡았지만 아버지 몸의 또 다른 한 부분처럼 친숙한 복만호를 타고 말입니다.
노안으로 점점 흐릿해지는 시력이지만 아버지는 저 바다 수심의 모든 것을 다 보십니다. 봄 도다리는 어느 지점에서 서식하며, 놀래미는 해저의 어떤 물길을 따라다니고, 붕장어가 헤엄치는 길목을 족집게처럼 알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그 눈길로, 그 혜안으로 바다의 물길을 빠짐없이 모두 보십니다. 그 눈빛으로 여섯 자식들 뒷바라지 하시며 평생을 어부로 사셨습니다.
아버지.
작년에 인터넷 가족카페를 열었습니다. 카페이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막개 복만씨네’로 지었습니다. 막개 복만씨와 연남씨는 우리들의 대들보이며 지붕이었습니다. 그 아래 오순도순 살아온 세월이 녹록치 않기에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 나누는 얘깃거리도 많습니다. 아버지 맏아들이 올리는 사진을 통하여 우리는 고향에 자주 갑니다. 원하는 시간이면 어디든 있더라도 접속이라는 방법으로 고향바다를 만납니다.
메인창이 뜨면 막개바다가 그림처럼 떠오릅니다. 하섬과 푸른 물결이 어부의 노래와 더불어 그세 갯내음을 풀어낼 것 같습니다. 며느리와 손주들도 동참하는 가족카페는 언제까지나 문을 열어 막개 복만씨를 기억하고 막개바다를 만나리라 싶습니다.
아버지.
얼마 전에 약국에 들렀다가 새로운 귀지파개가 나왔기에 사 두었습니다.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지갑의 한 구석에 보관하고 있는데 찾아가 뵐 짬이 마땅치 않네요. 봄볕이 자글자글 쏟아지는 창가에서 아버지 머리를 제 무릎에 올리고 귀지를 파 드리고 싶습니다. 귀지 파 드리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우리아버지, 손톱이랑 발톱 깎아 드리는 것을 좋아하시는 우리아버지, 자식들이 팔과 다리를 주물러 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아버지. 아참, 예전에는 약주 드시는 것을 엄청 좋아하셨던 우리아버지, 한 평생 여섯 자식 사랑을 한 결 같이 간직하시는 우리아버지.
아버지.
저도 이제 상갓집 출입이 잦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엊그제에도 고향 동창생이 모친상을 당했습니다. 모인친구들이 한 마디씩 하더군요. 아직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겠지요. 막내인 친구들은 예전에 부모님을 여의었고, 양친이 생존해 계신 친구들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살아계시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어렸을 때는 언니나 오빠가 있는 친구들을 무지 부러워했었는데 지금은 그 친구들이 저를 부러워한답니다. 맏이니까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만큼 길지 않냐구요.
아버지.
고맙습니다. 저희랑 오랜 시간 함께 계셔 주셔서요. 일흔을 훌쩍 넘기셔도 여전히 건강하시고 부지런하셔서요. 새벽마다 물길을 따라 선착장에 나가시고 가끔은 복만호를 타고 바다에 나가주셔서요. 씨실과 날실로 떠 올리는 그물코를 정확히 헤아려주셔서요. 예전의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이웃들이 주문하는 어장그물을 만들어주셔서요. 안산 텃밭에 여전히 고추모종을 내시고 호박을 심어주셔서요. 실하고 튼튼한 무를 키우시고 가뭄에는 물을 주면서도 배추를 키우셔서요. 세상에서 제일 싱싱하고 맛있는 생선회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요. 막개 연남씨를 언제나 아껴주시고 농담으로 웃겨주셔서요. 고향바다의 지킴이처럼 그 곳에 서 계셔서요. 여섯 자식 모두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게 기도해주셔서요. 부락의 노인 회장으로 이웃들 챙기는 기력 잃지 않으셔서요. 손주들 이름 만날 때마다 불러주시며 총기 잃지 않으셔서요.
막개 복만씨, 여전히 정정하신 늙은 어부, 영원한 등대, 그런 우리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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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반부/금상] 【제12회 전국 편지쓰기대회 일반부 금상】
수상자 김명희
어머니!
어제까지나 열정적이고 힘차게 사실 것 같았던 어머니께서도 어느 덧 70을 넘기시고 지난 5월 22일에는 아버지와의 결혼 50주년을 맞이하셨습니다.
저도 어느 덧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서서, 어머니의 지나 온 삶을 가만히 돌이켜봅니다.
어릴 적 사고로 한쪽 팔을 잃고 한평생 오른 팔 하나로 오남매 뒷바라지와 시댁 시중, 아버지 시중으로 늘 분주했던 삶을 말입니다.
불구인 어머니가 며느리로 들어온 사실에 불쾌해 하시며 모진 시집살이를 시키셨던 할머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니까’ 하시며서 늘 보살펴드리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극진하게 봉양하셨던 모습은 지금도 제 가슴에 남습니다. 철 없던 어린시절에는 어머니를 구박하고 때리고 굶기는 할머니가 밉고, 그렇게 온갖 설움과 냉대를 당하면서도 순순하게 며느리의 도리와 역할을 다하는 어머니의 순종도 싫었습니다. 할머니께서 젊으실 땐 어쩔 도리가 없다지만, 나이 많고 드시고 힘이 없어졌을 때는 한번 대꾸도 해보고 큰소리도 칠 수 있으시련만, 사시사철 늘 홀로 계신 할머니를 걱정하시고 변함없는 효(孝)를 실천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결국 스스로 뉘우치시고, 어머니께 모질게 굴었던 부분을 보상이라도 하시려는 듯 저희 오남매의 크고 작은 일을 돕고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펴 주셨지요. 결국 사랑의 힘이 승리한 것입니다.
해마다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살을 에는 듯한 엄동설한이 다가오면 어머니께서는 큰 들통에 떡국을 가득 끓여 가까운 구치소를 방문하여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시면서 그들과 연말연시의 아쉬움과 희망을 같이 나누셨지요. 집안 살림이 그다지 넉넉한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그들을 찾아가 베풀고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불평이 일기도 하였지만 어른이 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모든 베풂과 나눔이 덕이 지금이 저희 오남매가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명석한 두뇌와 지혜를 갖추신 어머니였건만 ‘장애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가정과 사회에서 몸소 겪어내야 했던 차별과 냉소의 설움을 생각하시고는 스스로 ‘장애우의 어머니’이기를 자처하여 힘이 닿는 대로 장애인들의 복지와 처우개선을 위하여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관련 기관과 후원회, 인권보호단체 등을 찾아다니시면서 애쓰신 세월이 30여 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주면의 반대와 훼방꾼들도 많았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바르고 참다운 세상을 열어가는 일에 전념하고 헌신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세상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실천적인 믿음과 그 깊은 마음의 소원을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지난 5월 22일, 결혼 59주년을 맞이하신 부모님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직장의 일과 교회 일로 함께 하지 못하고 돈만 보내드려서 너무 죄송하였습니다. 한번쯤 나무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시련만,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만도 고맙다’ 하시면서 가까운 친척들을 불러 기쁨을 함께 하여 주심으로 자식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자식들도 다 중년에 접어들어 각자의 직장과 가정과 사회에서 제 역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모든 자식 걱정 다 내려놓고 편안히 쉬실 수 있는 시간이 되었건만, 당뇨라는 몹쓸 병은 어머니를 마구 공략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께서는 15년 전, 뇌출혈로 쓰러지셨던 휴유증과 고혈압으로 그나마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의 도움없이는 하루도 살아가실 수가 없는 어린아이 같은 몸이 되셨습니다. 워낙 까다로운 입맛을 지니신 분이라 하루 하루 식단과 반찬에도 신경을 쓰셔야 하고 아버지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보호하고 관찰하시느라 힘드실텐데도 자식들 앞에서 전혀 내색 않으시고 묵묵히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시는 모습, 존경하고 감사합니다.
부유한 가정의 셋째 딸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으셨던 어머니께서 6·25전쟁 당시 외할아버지를 북한 괴뢰군의 총살에 잃으시고 외할머니를 따라 피난길에 올라 힘들고 어려운 유년기를 보내신 어머니. 한참 예민할 시기에 한쪽 팔이 불구의 몸이 되는 난관에 부딪쳤음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생의 자리를 놓지 않으시고 배움의 길을 꿋꿋이 걸으신 어머니, 대학을 졸업한 후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지만, 순탄하지 못한 결혼생활과 시댁의 모진 박대 속에서도 5남매의 어머니 역할과 착하고 어진 며느리 역할을 거뜬히 해내신 어머니. 물론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신 외할머니께도 효성이 지극한 딸이셨지요.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힘든 상황에서 늘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돌아보시며 평생 소외되고 약한 자들의 버팀목과 대변인의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 지금도 교회와 사회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봉사하시면서 몸을 괴롭히는 병마조차 친구 삼아 긍정의 힘으로 밝게 살아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이 작은 편지지에 힘껏 크게 그려보려고 노력했으나 이 짧은 필력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미사여구로 꾸며보려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변죽만 두드리다가 지면이 다하였습니다.
저는 아직 부족함이 많은 딸이요, 실수가 많은 철없는 아내이며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부족한 엄마입니다. 하지만 제 안에서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열정과 긍정의 힘만큼은 어머니께서 원천적으로 제게 부어주신 힘이기에 그 힘으로 이 험한 세상을 넉넉히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에 있을 적부터 하나님 앞에서 이 딸을 바르고 굳센 신상의 사람으로 키우겠다고 서원한 모태신앙의 힘으로 저는 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7년의 평교사 시절을 보람 있게 마무리하고 교감으로 첫 발령을 받았을 때 어머니께 안겨 드린 ‘교감 임명장’을 큰 보물인 양 가슴 가득 받아들고 환히 웃으시던 어머니. 한 장 종이에 불과한 그것을 거실에 활짝 펼쳐 놓으시고 평생의 보람으로 간직하시는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 가르침이 헛되지 않도록 이 부족한 딸도 더 열심히, 더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힘쓰겠습니다. 이 땅의 꿈나무들을 바르게 양육하고 소중한 ‘한 사람’으로 세워가는 일에 남은 교직생애를 다 바치겠습니다. 어머니는 제 생애의 위대한 멘토이십니다.
어머니께서도 남은 생애, 주님 안에서 부디 행복하고 내내 건강시기를 기도하고 소원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내 어머니!
2011년 오월의 마지막 날
큰딸 명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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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반부/대상] 제24회 가을맞이 편지쓰기대회 - 일반부 대상작
수상자 김병규
인내를 먹고 살아온 나의 수호천사, 조인순 여사에게
나의 평생 동지 조인순 여사!
지겹던 병상생활에서 퇴원하던 날, 심한 풍랑에 회오리치던 집안을 굳건히 지켜온 당신의 노고에 감사하며 이 편지를 쓰오. 당신은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나를 의연하게 지켰고, 부서진 허리뼈의 통증을 호소하던 나를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주었지요. 수술 뒤 미동도 할 수 없을 때 간병하던 당신의 마음은 강철보다 더 강했고 당신의 손길은 비단결보다 더 부드러웠어요. 간병 50여일, 당신은 좁디좁은 간병인 자리에서 앉아 졸거나 오그리고 누워 날밤을 보내며 나를 보살폈지요. 힘겨워하던 당신을 아랑곳 하지 않고 나는 통증만 호소했지요. 그 힘겹던 순간에도 환자에게 이롭다는 간식거리를 챙겨 우리 입원실 여섯 명의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던 당신의 손이 천사의 손처럼 아름다워 보였어요. 당신의 정성어린 간병에 통증이 완화되고 통원치료를 권하는 주치의의 의견 따라 퇴원을 했지요.
집으로 온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말끔히 정돈된 집안, 내 글방은 병실로 꾸며져 있었지요. 뒤란 꼬마농장에는 어느 새 파종했는지 하얀 무가 통통하게 자라고 있고, 땅심(地力)을 높이려고 퍼다 놓은 황토가 겨우내 외양간에서 받아놓은 퇴비장만큼이나 수북이 쌓였더군요. 삼복더위에 1㎞ 거리가 넘는 병원을 오가며 간병하던 당신이 어느 틈에 그렇게 일을 했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삶에 몸부림친 당신의 의지 앞에 나는 부끄럽기 그지없었다고.
스물세 살 곱던 당신을 부부라는 인연으로 만나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면서 오늘까지 왔지요. 험난한 세상 살아갈 준비도 없이 결혼하여 신혼살림이란 둥지를 틀었습니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시작한 결혼생활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맨손으로 살아갈 길을 찾았습니다. 고향 떠난 사람의 집과 잡초 우거진 논밭을 전세로 얻어 농사를 시작했지요. 유복한 집안의 둘째딸로 태어나 일을 모르고 자란 당신의 곱던 손은 닳아빠진 갈퀴처럼 앙상했지요. 그러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나를 따라준 당신이 고맙기 그지없었습니다.
조인순 여사!
우리는 4,000평이 넘는 농토에 희망을 걸고 밤을 낮삼아 일을 했지 않소. 땀 흘린 대가는 해마다 풍년 농사였고, 불어나는 살림에 보람을 찾았지요. 고달픈 농군의 삶에서도 네 자식을 얻었습니다. 농사에 힘겨워 자식들을 보살피는 일에 소홀했으나 아이들이 잘 자라주었지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모두 상을 받아올 때 우리 부부는 얼마나 행복했습니까? 당신도 그때가 기억나지요?
우리 부부가 성실히 살아오는 동안 고향사람들의 사랑과 신뢰를 얻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나에게 변산 농업협동조합 조합장의 큰 책임을 맡겨주었습니다. 내가 조합장이 되었을 때 당신은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당신의 격려는 나에게 용기와 큰 힘이 되었지요. 나는 성공한 조합장이 되려는 욕심으로 온갖 정력을 다 쏟아 부었지요. 집안일은 모두 당신에게 맡기고 조합 일에만 밤낮으로 매달렸지요. 당신은 공직자의 아내로서 최선을 다한 줄 압니다.
아이들이 모두 전주로 유학하여 자취를 했지요. 당신은 매주 200리 길을 오가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었죠. 집안일도 모두 당신의 몫이었고요. 합숙하며 밤낮으로 일하던 20여 명의 조합 직원들의 찬거리까지 챙기던 당신이었어요. 당신이 그 무거운 짐에 눌려 쓰러질 때 나는 앞이 캄캄했지요. 미움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라는데 나는 조합 일에 정신이 팔려, 당시의 고통엔 관심조차 없던 게 사실이었소. 당신이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날 때 얼마나 감사했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조합장이던 내가 무고를 당하여 검찰에 불려 갈 때, “당신의 결백은 하늘이 알 테니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라며 격려하던 당신의 위로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지요. 당신의 내조가 나에겐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땀의 대가는 분명하여 조합은 영세조합에서 성장자립조합으로 승격되었지요. 내가 농협중앙회장의 표창을 받아오던 날, 당신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지요.
안일한 생활과 행복을 멀리한 채, 모진 세월의 아픔을 참아온 당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니 가슴이 뭉클하오. 당신이 걸어온 고난의 길을 거름으로 철없던 자식들이 바르게 자라서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소? 모두 당신의 강철 같은 모성애의 결과라 믿으오.
나와 만나 46년, 그 긴 세월의 강물에는 잔잔하고 아름다운 그리움이 있었고, 태풍 몰아치던 사나운 풍랑도 있었지요. 때로는 질병과 싸우고 가난과 힘겨루기 할 때도 있었지요. 그때마다 흔들리는 나에게 당신의 격려는 큰 힘이 되었다오. 고난을 인내로 몰아내자 부르짖던 당신의 절규가 지금도 생생이 떠오르는 구려. 당신은 정녕 내 가슴속에 숨겨둔 보석 같은 사람이오. 긴 세월의 강을 건너 우리도 어느새 황혼의 들녘에 서 있구려. 당신의 곱던 얼굴에 패인 골 깊은 주름살은 우리 가정을 지킨 영광의 계급장이오, 당신의 하얀 머릿결은 바르게 자란 자식들이 달아준 훈장이라 여기시구려.
인생은 무엇을 했느냐보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지 않던가요? 우리가 비록 밑바닥 인생길에서 고난의 터널을 거쳐 왔지만 바른 길을 걸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남에게 조그만 피해도 주지 않고 정직하고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믿소. 이 모든 영광이 인내를 먹고 살아오며 나를 지켜준 당신의 덕이요.
내가 젊은 시절 당신에게 약속한 것이 하나 있지요. 아이들 기르고 가르친 뒤에는 우리 부부가 나란히 배낭을 짊어지고 팔도강산 유람이나 실컷 다니자는 약속 말이오. 이제 내가 완쾌되면 그 약속을 꼭 지키리다. 내가 건강을 회복하여 그 약속을 지키는 날, 우리가 부부로 오랜 세월을 살면서 하지 못했던 ‘당신을 사랑합니다!’란 그 한마디를 분명히 해 드리리다.
                                      2009년 10월 17일
                                    당신의 평생 동지 김병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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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일반부/금상] 제24회 가을맞이 편지쓰기대회 - 일반부 금상작
수상자 박인재
사랑을 꽃피우고 있는 내 딸 상희에게
사랑과 보람으로 작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내 딸 상희에게 아빠의 마음을 글로 보낸다. 글을 쓸 때는 너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고 너도 아빠의 글을 읽으면서 새로운 정을 느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너는 꿈을 먹는 햇병아리 선생님이다. 네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보통의 아이들과 달리 사랑을 더욱 가득 안겨줘야 하는 장애 아이들이다. 얼마나 힘든 가르침인지 상상만 해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런데도 너는 사랑과 웃음꽃이 피는 은애동산이라도 늘 말했다. 아빠는 흐뭇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지금의 그 마음을 항상 잊지 말고 정성으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 해맑은 아이들은 너희 사랑을 먹고 산다. 사랑을 줄 때는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라야 한다. 더욱 가까이에서 따뜻하고 정겨운 마음으로 사랑을 주어야 예쁘게 자라서 예쁜 열매가 맺히게 될 것이다. 네가 대학을 특수교육과에 가하겠다고 할 때 아빠는 반대를 많이 했다. 너무나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라 너는 절대로 가르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너는 아빠의 우려하는 마음을 보란 듯이 말끔히 씻어버렸다. 물론 즐겁고 보람이 있다고 말을 하지만 어려움이 왜 없겠느냐. 네가 선택한 길이기에 아빠에게 걱정 끼치기 않으려고 마음의 아픔을 참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아비의 괜한 걱정일까?
열심히 가르쳐서 아이들이 하나하나 제 스스로 일어나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의 아픔은 즐거움과 보람으로 가득 차리라 믿는다. 선생님이 먼저 밝고 맑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 네 말대로 너는 잘 생겨서 아이들이 잘 따른 다고 했지만 사랑은 외모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안전하게 꾸며놓았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이들 주변에는 위험한 것이 생기게 마련이다. 남의 귀한 자식들이 다치기라도 한 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느냐. 그것도 보통의 아이들이 아닌 아직 여물어지지 않은 아이들 아니냐. 아무쪼록 한 눈 팔지 말고 내 가족 같이 잘 돌보아야 한다.
햇병아리 선생님 내 딸 상희야!
네가 세 살 때인가 네 오빠의 세 발 자전거 뒤에 타고 놀러 다니다가 발가락이 바퀴에 끼여 다친 적이 있었다. 얼마나 아프다고 울었느냐. 그 때 아빠의 마음도 많이 상했단다. 또 서울에 있는 네 오빠한테 가서 공부하다가 맹장염인지도 모르고 위장약을 먹고 견디다가 안 되어 그 더운 여름에 땀 반 눈물 반으로 집에 와서는 마른 침을 삼키며 ‘아빠 나 아파 죽겠다’며 탈진을 한 것이 기억나지? 서울 간다고 해서 아빠는 심하게 꾸지람을 했다. 그래 중간에 내려오면 또 꾸중 들을까 겁이 나서 차다가 결국 내려왔으니 그동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랬던 네 모습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때 아빠는 말은 안 했어도 마음속으로 많은 아픔이 있었다. 그렇게 아픈데도 참고 견디다가 왔구나 하고 말이다. 그리고 병원에서 오진을 하여 엉뚱한 병이라고 할 때는 엄청나게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그게 복막염이었다. 의사가 수술을 마친 뒤 나오면서 천만다행이라고 했을 때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천만다행이라는 말이 어떻게 지금 의사 입에서 나오느냐고 항의를 했다. 그때 네가 수술을 마친 뒤 내 손가락을 잡자고 했지. 너는 어릴 때 잠이 오면 꼭 내 손가락을 잡았다. 조금 있다가 손가락을 살며시 빼면 금방 눈을 뜨고는 다시 잡았다. 아마 혼자 자는 것이 무서워서 그랬는지 본다. 그런데 다 큰 계집애가 손가락을 잡자고 하니 웃음이 나왔지만 그게 사랑이 통하는 연결선이라고 생각하였다. 네가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 손가락을 자주 잡아 주어라. 그래서 너의 아이들 사랑이 손가락을 통해 전하여 가도록 하여라. 그리하면 아이들이 더 좋아하면서 따를 것이다.
햇병아리 선생님 내 딸 상희야!
아직은 엷디엷은 네 월급으로 대학원 갈 것이라고 저축을 하고 지금도 공부하고 있는 오빠에게 용돈까지 보내주니 정말 장하다. 지난 추석에는 상여금 받았다며 할머니에게 용돈 드리고 아빠와 엄마 선물까지 장만하느라 얼마나 애썼느냐. 할머니는 온통 자랑을 했지. 손녀에게 용돈 받았다고 이웃집 할머니들에게 한 턱 내기도 하였다. 네가 학교 다닐 때 아빠는 용돈 한 번 넉넉하게 주지 못했다. 나 혼자 벌어 네 오빠하고 둘을 대학 보내려고 하니 여유가 없었단다. 너는 그래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충당했다. 그것도 여간 대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옷 좀 사 입고 멋도 부리고 하여라. 옷이 날개라는 옛말도 있지 않느냐.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게 치장하면 아이들하고 함께 어울리기가 불편하고 보기에도 좋지 않다. 하지만 철따라 옷을 사 입고 단정하게 해야 여자로서 품위도 있다. 예쁘게 차려 입고 다니는 여선생님들을 보면 네 생각이 가끔 나고는 하였다.
햇병아리 선생님 내 딸 상희야!
아빠의 부탁이 정말 하나 있다. 그게 뭔지 알겠지? 너와 잘 어울리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결혼은 인륜대사(人倫大事)라 신중을 기해야 되는 것이지만 내년에는 꼭 결혼을 해야 한다. 아빠의 나이가 벌써 예순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 않느냐. 네가 어린애일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결혼할 나이가 되었듯이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갔구나. 아빠의 친구들은 대부분 손자손녀를 보았다. 내가 아마도 제일 늦은 것 같다. 너희 둘을 다 결혼을 못 시켰으니 걱정이 많다. 물론 연세 많은 할머니는 더할 것이다. 여자는 결혼하는 것이 새 꽃을 피우는 것이다. 여자가 결혼할 때는 축의금 봉투에 화혼(華婚)이라고 쓰는 것 보았지? 눈높이를 지나치게만 하지 않으면 네 마음에 딱 맞는 신랑감이 나타날 것이다. 내년에는 아빠가 결혼식장에서 네가 어릴 때 내 손가락을 꼭 잡았듯이 이제는 마지막으로 네 손을 잡고 내 딸 결혼 축하 박수를 받고 싶다. 다행히 너희 학교 교장 선생님이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서른 전에는 모두 다 결혼해야 한다.’고 하였다니 참 고마운 말씀이다.
사랑과 웃음꽃이 피는 은애동산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아이들과 생활하는 내 딸 햇병아리 선생님 상희에게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다. 너도 아빠에게 편지를 한 번 써보아라. 그 순간만은 동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제 가을이 서서히 지나가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감기 조심하여라. 건강해야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다.
                              2009. 10. 28.
                            아빠가 딸 상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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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일반부/금상] 제24회 가을맞이 편지쓰기대회 - 일반부 금상작
수상자 이관희
동서에게
계절은 어느덧 풍성한 알곡으로 채워지는 가을이네. 봄과 여름의 수고로움이 있었기에 탐스러운 열매가 맺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이 가을도 감사하게 되는군.
동서! 그동안도 가족 모두 잘 지냈는가?
자네와 내가 이 집안에 시집을 와서 동서로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어가고 있네 그려. 살아오면서 서운하고 속상한 일도 있었을 테지만 한 번도 내색하지 않고, 명절 때나 대소사에 웃으며 왔다 가는 자네에게 늘 고맙게 생각하였다네. 그러기에 내 스스로가 복이 많은 여인이라 여기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곤 하지. 우리 동서들은 솜씨도 좋고 마음씨까지 착해서 부족함이 많은 이 형님을 탓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지 척척 잘 해낸다고 말이야. 그러면 친구들은 우리 사이좋은 동서지간을 부러워하곤 한다네.
그리고 지난여름에 산삼을 캐서 보내준 얘기를 했더니 의좋은 형제들이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더군. 동서! 이 지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고마워. 지난여름, 서방님하고 자네가 그 귀한 산삼을 캐어서 디스크 파열로 수술을 하고 누워있는 자네 시숙에게 드시라고 소포로 보내왔을 때 가슴이 뭉클하였다네. 동서네도 여러 가지로 어려워서 팔면 큰돈이 되었을 텐데도 팔지 않고 병석에 있는 시숙 생각하고 보내준 고마운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네. 조심스럽게 소포를 열어보니 귀한 산삼이 시동생부부의 정성을 담고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네. 이 귀한 것을 어떻게 먹지하고 많이 망설였다네. 처음 한 뿌리 보낸다고 했을 때는 당연히 아픈 사람 몫이라 생각했는데, 열어보니 세 뿌리가 들어있더군. 자네는 우리 부부 먹고 건강하라고 하였지만 세 뿌리를 보고 잠시 마음이 혼돈이 생기더만.
생전 처음 보는 산삼을 앞에 놓고 생각을 하였다네. 너무나 약한 딸도 먹이고 싶고, 아들도 먹이고 싶고, 자식을 먼저 생각하다가 어머님이 생각나더군. 한 뿌리를 씻어서 가방에 고이 넣고 시외버스를 타고 택시타고 해서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으로 가서 면회 신청을 하니 그 곳 담당 직원이 문을 열어 주며 짜증을 내더군. 이렇게 밤에 찾아오면 다른 분들에게 지장을 준다고. 그래서 사실은 산삼이 생겼는데 밤에 먹어야 효험이 있다고 하고 이 밤이 지나면 내 마음이 변할까봐 어머니 드리려고 왔다고 했더니 짜증내던 직원이 내 등을 다독이며 얼른 드리라고 하면서 칭찬을 해주더군. 또한 어머니께서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참 잘 했다고 생각하였다네. 이 귀한 것을 우리 작은 아들이 캤느냐고 하면서 이것 먹고 불끈 일어나 걸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참으로 맛나게 드시더라고. 그 모습 보면서 정말 힘 내셔서 걸어 다니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더군.
올해로 거동 못하시게 된 세월이 10년째가 되는군. 끝까지 집에서 모시지 못해서 부끄럽네 동서. 하지만 본의 아니게 다리를 다치게 되면서 작년부터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는데, 어머니께서 말동무도 있고 봉사자들이 잘 해줘서 좋다고 하시니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하다네. 어머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을 뵙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고 밤에 핀 들꽃도 더욱 아름답게 빛나 보였다네. 그렇게 먼저 어머님 드리고 오니 가벼운 마음으로 한 뿌리를 딸에게 먹일 수 있었지. 다음날 한 뿌리 싸들고 병원에 있는 남편에게 먹이는 잔잔한 산삼 사건이었다네.
동서! 동서의 큰 사랑에 우리 가정에 웃음꽃이 필 수가 있었다네. 지금은 자네 시숙도 산삼 먹고 빨리 회복하여 하던 일 열심히 하고 있고 우리 영은이도 감기 달고 살더니 산삼 효험을 단단히 보았다네. 이 모두가 자네의 사랑 덕분이라고 생각하네. 동서! 우리 이 사랑 변치 말고 남은 여생, 아름다운 자연만큼 사랑하며 의지하고 사세나. 우리 삼형제 가족 더욱 더 우애 있게 재미있게 살 수 있도록 우리 삼 동서가 노력하자구 동서!
요즘 들어 산에는 가을 옷을 곱게 차려 입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네. 그곳에 한 번 빠져보지 않으려나? 연락 기다리면서 이만 줄이려네. 신종 인플 조심하고 건강히 잘 있게나. 그럼 안녕!
                                2009. 10. 16
                             고마운 동서에게 형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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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반부/대상] 제23회 가을맞이 편지쓰기대회 - 일반부 대상작
수상자 이수정
“어머님, 아버님 전상서”
 지난여름 아이들과 함께 어머님을 찾아 뵌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계절이 가을이네요. 그간 어머님, 아버님께서는 안녕하시온지요? 저와 아이들도 염려해 주시는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여름에 저희가 찾아 뵌 것이 과연 몇 년 만인지? 그새 어머님 머리카락은 완전 백발이 되셨고, 아버님께서는 많이 수척해 지신 것 같아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연로하신 두 분의 모습이 그간 자주 찾아뵙지 못한 저의 불효로 여겨져 죄스러운 마음을 어찌할 바 모르겠습니다.
 아범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간 지 어언 이십년이 다 되었네요. 그 때 제 나이는 겨우 서른 두 살이었고 민이가 여섯 살, 준이가 겨우 네 살이었지요. 이제 저는 오십이 넘었고, 민이는 스물여섯, 준이는 스물넷이 되었네요. 아범의 사고 소식을 처음 접하였을 때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지아비를 지키지 못하고 혼자 남은 제 자신이 어머님 아버님께 너무나 죄스러웠습니다. 비록 아범은 국가를 지키는 군인으로써 훈련도중 사고로 인하여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것이 다 제가 부덕한 탓으로 여겨져 무척 괴로웠습니다.
 어머님 그 때 제가 울면서 어머님께 드린 말씀을 기억하시는지요?
 “아범은 우리 집안의 희망이고 기둥인데 차라리 제가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 같은 존재는 살아 있어도 아무 의미가 없는데 왜 아범이 가고 제가 남아 있는 거죠?”
 어머님 그 때 제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국가에서는 공들여서 키워놓은 유능한 인재를 잃어버린 것이고 우리 집안에서는 집안을 일으킬 똑똑한 아들을 잃어버린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으니까요. 거기에 비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어머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집안이 잘 되려면 여자가 살아야 한다. 남은 아이들을 잘 키우려면 아빠보다 엄마가 더 필요하다.”
 저는 어머님의 그 말씀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극한 슬픔 속에서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지요. 웬만한 시어른들 같으면 이젠 내 아들이 가고 없는데 며느리는 남이라고 생각하고 냉정하게 대할텐데 두 분께서는 저의 친정 부모님보다 더 저를 챙겨 주시고 제 처지를 안타까워 하셨지요. 그 이후로 저는 진심으로 어머님과 아버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제가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그동안 매달 약간의 돈을 부쳐드리는 것과 전화로나마 수시로 안부를 여쭙는 것도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두 분께서는 혼자 남은 제가 조금이라도 마음 불편하지 않도록 부담이 될만한 얘기는 일체 하지 않으셨고 돈도 한사코 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전화로 안부를 여쭈면 언제나 “우리는 잘 지내고 있다. 어린 아이들 데리고 네가 고생이 많구나. 고맙고 또 미안하다.”고 늘 말씀하셨지요. 그 뿐인가요? 매년 보내주시는 고춧가루, 마늘 등 온갖 부식거리를 볼 때마다 어머님, 아버님의 사랑이 듬뿍 느껴져 제 마음이 얼마나 따뜻해지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님, 올해는 민이도 6년간의 의대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인턴생활을 하고 있으며 둘째 준이는 교환학생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 간지가 한 달이 넘었어요. 지난여름에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님, 아버님을 찾아뵌 것은 큰 애가 마침 여름휴가를 받았고 둘째는 미국 들어가기 전에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뵌 것이었어요. 물론 두 분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대전 국립묘지의 아범에게도 들렀어요.
 ‘당신 아이들이 이만큼 자라서 자기들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있어요. 당신도 흐뭇하시죠?’ 아이들이 아버지께 절을 올리는 동안 저는 마음속으로 아범에게 이렇게 말하며 지금껏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아이들이 살아가는 걸 잘 지켜봐 달라고 했어요.
 아범이 그렇게 가고 난 후 저는 결심했어요. 길지 않은 몇 년을 사는 동안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남편으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았기에 이제는 제가 저 하늘에 있는 남편에게 받은 사랑을 갚아야 한다고요.
 그것이 남편에게서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는 제 의무이자 도리라 여겼어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지요. 만일 지금 제 옆에 남편이 살아 있다면 제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하구요. 아마도 그것은 남은 두 아이들을 잘 키워 달라는 것이 아닐까요? 그 다음엔 어머님, 아버님께 잘 해 드렸으면 하는 바람일거예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잘 키우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어요. 어린 민이와 준이에게 항상 말하기를 “저 하늘에서 아버지가 너희들을 지켜보고 계셔. 우리 민이, 준이 공부 잘하고 착하게 잘 지내나 하고 말이야” 다행히 아이들은 저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아버지가 기뻐하실 일만 해야 되겠다며 착하게 잘 자라 주었어요. 어릴 때부터 착하고 그저 아파봐야 감기에 걸릴 정도로 건강하게 자라 준 어머님의 손자들이 이제 다 자라서 곧 사회인이 되려고 해요. 지금까지 한 번도 제 속을 썩이지 않고 몸과 마음이 튼튼한 청년으로 자라 준 아이들이 한편으론 대견스럽고 한편으론 자랑스럽답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 철이 들자 저는 애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어요.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태어난 것에 감사해라. 그리고 이 다음, 사회에 나가 일을 하는 성인이 되었을 때 너희가 받을 것을 사회에 환원해라. 너희보다 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이 사회에, 나아가 국가에 유익한 사람이 되어라.”
 저의 이 말에 “네 어머니, 그럴게요” 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을 볼 때 저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답니다. 이게 다 어머님, 아버님께서 오매불망 손주들 걱정해 주시며 늘 잘 되라고 기도해 주시는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전화로 늘 말씀드렸듯이 부디 두 분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범에게 못다 받은 효도를 손주들에게 많이 받으시기 바래요. 저도 앞으로는 더욱 자주 찾아뵐 것을 약속드리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침, 저녁 쌀쌀한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안녕히 계세요.
      
2008년 10월 24일
       둘째 며느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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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일반부/금상] 제23회 가을맞이 편지쓰기대회 - 일반부 금상작 
수상자 한경희
“미지의 인연에게”
 어제는 모처럼 친구 몇이서 가을산행을 다녀왔어요. 곱게 단풍들어 화색이 완연한 가을산은 청량하기 그지없었지만 평상시 운동에 게을렀던 내겐 꽤나 힘에 부치는 산행이었어요. 그래도 절까진 올라가 부처님 전에 합장도 하고 하산길에 들른 까페에서는 국화차 맛도 일품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구미에 맞는 음악들이 살짝 주름간 육십대를 홍안의 처?적으로 데려다 놓는 것 같았어요.
 때마침 들려오는 최양숙의 가을편지,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린 다함께 그 노랠 따라 부르고 있었어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그랬어요. 가을은 누구에겐가 한번쯤은 편지를 받고 싶어지는 계절이기도 해요.
 백설기 같은 흰 봉투에 또렷이 박혀있던 낯익은 필체 그 안의 내용이 뭘까 사뭇 두근거리면서 겉봉을 뜯을 때의 설fp임. 아~ 정이 사랑이 넘쳐나던 구구절절한 사연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과연 언젯적 얘기였던가요?
 시공간을 넘나드는 통신의 혁명은 세상을 몰라보게 발전시켰고 인간을 더 똑똑하게 만들어 주기는 하였지만 대신 이런 감동들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버린 지 오래인 것 같았어요. 하여 난 이 가을 누구에겐가 편지를 쓰기로 작정했답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에요.
 나는 그대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대 또한 날 모르죠.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가장 보고 싶어하고 애타게 기다려 마지않는 이가 바로 당신이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대관절 그대는 누구일까요? 아직은 모르는 채로지만 당신은 내 큰며느리이자 내 아들의 반려자입니다. 대체 어디에 꽁꽁 숨었길래 이리도 나타나길 힘든건가요? 참 야속한 사람이 그대인 것입니다.
 불가(佛家)에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무수히, 혹은 무심코 스쳐 지나쳤을 그대들의 놓친 인연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잠깐 눈멀어 우리 서로를 모르고 있는 미지의 인연이여, 이제 눈을 크게 뜨고 우릴 한번 찾아보아요.
 여기 참 괜찮은 한 남자가 그대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면서 홀로 열심히 살고 있답니다.
 다소 에미스런 허풍을 살짝 얹는다면 그대, 옥체선풍의 외모에다 이지적이고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대표 훈남이지요. 직장에선 꽤나 인정받는 팀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집에선 인정 많고 듬직한 맏자식이죠. 사람이 워낙 반듯하고 착실해서 제 집도 벌써 장만해 놓았고 아마 모르긴 해도 그대와 함께 할 미래에 대한 준비도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 같아요. 아니 대체 뭐가 부족해서 여태껏 장갈 못가고 있는건지 정말 모를 일이에요. 이런 괜찮은 신랑감을 못 알아보는 그대 또한 딱한 사람이긴 매일반이지요. 그럼 어서 오시랄 밖에요. 와서 이 괜찮은 남자와 함께 그간 밑졌던 세월을 보상받으면서 예쁜 아이도 낳아 기르면서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가정을 한번 일궈보지 않으시렵니까?
 한 선남선녀의 아까운 세월들이 정녕 안타깝습니다. 참, 저는 요즘 시쳇말로 동메달감도 못된다는 아들 셋 둔 엄마에요. 둘째와 셋째는 진작에 성가하여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 내외는 비교적 정신이 건강한 편이며, 뭔 상인지 며느리 둘이 은도 동도 아닌 24K 순금덩어리에요. 손주들 재롱에 재미가 쏠쏠하고 큰 자부를 아직 못 본 것 말고는 크게 바랄 것 없는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그 애들의 단란한 가정이 더없이 고마울수록 큰애 옆의 빈 자리는 더욱 또렷이 보여지는게 또 사실이에요.
 이게 다 아직껏 우리 곁에 오고 있지 않은 미지의 인연, 당신 탓입니다. 지난 추석의 에피소드를 들어 보실랍니까?
 차례를 마치고 가족 모두가 맛있게 아침밥을 먹고 났는데 다섯 살짜리 손녀딸이 턱 제 큰아빠 품에 안기더니 느닷없이 이러는 거였어요.
 「큰아빠, 우리 큰엄마 만들어 놨어요? 보구 싶어요. 빨리 집에 데리구 와 봐요오~~.」
 참 요새 애들이라니……. 하고 다같이 배를 잡고 웃었지마는 일순간 낯이 벌개진 아들을 흘깃보며 어쩌나 쬐그만 조카 녀석한테도 저런 말을 듣고 사나 싶어 한편으론 씁쓸했어요. 내달엔 남편이 칠순생일인데 아이들이 나름 거창하게 준비하는 계획들을 한사코 사양했어요. 겉으론 요즘같은 경제 상황에 무슨 칠순잔치냐 손사래를 쳤지만 누구의 마음속에도 딱 한사람. 그대의 빈자리 때문이란걸 모른이는 아무도 없을 거여요. 부모에겐 불효같을 터이고 동생들 보기에 내 아들 심정이 어땠겠나요? 그러니 미지의 인연이여. 어서 우리곁에 오세요.
 자식도 너무 크고 보면 아무리 부모라도 말 한마디 하기가 조심스러운 법.
 「금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결혼은 언제 할 작정이냐? 쌀 고르려다 뉘 고른다는데 대체 언제까지 고르고만 있을거냐?」이런 말들이 목젖까지 올라왔다가도 “에잇, 참자. 괜시리 심정만 건드린 거라면 네 스트레스는 또 어쩔거냐?” 이러면서 침 한번 꿀꺽 삼키는 우리 부모들의 심정을 그대들이 알긴 할까요?
 그대 또한 분명 착한 딸일터, 이제 부모님 속 그만 애태워 드리고 신랑 찾아 우리집으로 냉큼 한걸음에 오세요. 예쁜 조카들이 있고 쌍수들어 환영할 새로운 부모가 있고 무엇보다 그대와 함께할 행복한 미래를 위해 넓은 품을 열고서 고대하는 준비된 신랑이 있는 아늑한 보금자리로 망설이지 말고 오소서.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기원했습니다.
 “하느님! 부처님! 조상님네들, 부디 저와 함께 빌어주세요. 미지의 인연에게 부치는 제 가을편지의 답신이 되도록 빨리 오기를……. 겨울이 오기 전에,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미래의 어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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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반부/금상] 제23회 가을맞이 편지쓰기대회 - 일반부 금상작 
수상자 백혜선
"사랑하는 우리 여보에게……"
 “제임스 사랑스런 나의 작은개~” 라는 노래가사 때문에 내가 늘 놀려댔지만, 지금은 나만의 듬직하고 사랑스런 남편이 된 당신은……. 제임스 리차드 울(James Richard Ull).
 처음인가봐요. 이렇게 당신한테 편지를 쓰는 게……. 연애시절부터, 지금까지 당신한테 정말 나의 마음을 글로써 표현하고 싶었던 적도 많았고,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내 성격대로 이쁘게 편지지도 직접 꾸며서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한국말이 아닌 영어로 내 마음을 표현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아서 편지를 쓴다는 걸 엄두도 내보지 못했어요.
 살면서 한국말이 가지고 있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들로 당신에게 표현해주고 싶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언어라는게 정말 우리가 다르게 생긴 것처럼 너무 달라 서로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더라구요. 그래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만큼 우리의 다른 언어들도 조금씩 이해가 되고 이제는 눈빛만 봐도 서로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넘 닮아버린 우리 부부.
 외국인인 당신과 닮았다는 소릴 들을때면 ‘에이~ 거짓말’ 하면서 흘려버렸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우리의 모습은 어찌나 닮았는지……. 내 낮은 코는 당신의 높은 코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당신 눈은 내 눈처럼 살짝 찢어진 것 같고, 구수하게 ‘여보~~’라고 부르는 소리까지……. 정말 어느 땐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사람 같은 당신…….
 이렇게 되기까지 당신이 날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배려와 노력을 했는지 말은 안했지만 늘 고마워하고 존경하고 있어요.
 영어라고는 학창시절에 배웠던게 다였던 나. 수줍은 미소속에 “Hello.” 한마디하고, 늘 익숙한 “I’m fine thank you and you?” 그 다음부터는 쭉~ 멋쩍은 미소만 주고받았던 우리의 첫 만남.
 당신 역시 혀짧은 발음으로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제임스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의 첫 인사는 국어나 영어교과서 젤 첫 장에 나와 있는 영이와 철수의 대화 문장이 다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도 통하지 않는 언어 속에서도 손짓 발짓 다해가면서 이렇게 결혼까지 해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우리의 아들 제임스 주니어까지 얻었으니 옛말에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한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나네요.
 국경을 넘어 우리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 이제는 서로의 문화와 서로의 나라까지 사랑하게 된 우리. 내가 해주는 김치볶음밥이 젤 맛있다는 당신과 당신이 아침에 해주는 그 느끼한 토스트도 이제는 김치처럼 개운하고 맛있으며 구수하게 느껴지는걸 보면 정말 사랑의 힘이 대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조건 당신하나만 바라보며,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남겨두고 미국에 갈 때도 날 위해 몰래 한국말까지 공부한 당신. 그 덕분에 지금은 어느 정도 한국말로 대화도 가능하고, 영어 못하시는 우리 부모님과도 서슴없이 한국말로 대화하는 당신을 보면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뿌듯한지……. 눈에서 눈물이 핑 돌때가 한두번이 아니였어요.
 미국사람들은 요리를 할 때도 정확하게 그람수를 재고 뭐든지 자로 잰 듯처럼 늘 정확하지만 한국 와이프를 둔 당신이 나의 ‘적당히’라는 말을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제는 제법 내가 “여보~ 적당히 가져다주세요.”라고 말하면, “오케이.” 하면서 적당량을 가져다주는 걸 보면 너무너무 기특하고 사랑스러워 죽겠어요. 살면서 나 역시 영어로 인해 실수도 많았고 웃지못할 해프닝도 많았지만 당신 또한 어려운 한국말 때문에 크고 작은 실수들로 인해 우리 둘 다 울고 웃었던 그 시간들이 이제는 너무나 소중하고 늘 잘하려고 노력하는 당신에게 “잘했군~ 잘했어. 우리신랑 잘했네. 그러니 내 신랑이라지.”하며 노래를 불러줬더니 당신이 무슨 말이냐며 영어로 해 달라고 한 적 있었죠? 짧은 영어실력으로 급하게 “Good job good job good job that’s my husband." 하면서 내가 영어로 노래를 불러줬더니 당신이 배꼽잡고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늘 가정에 충실하고 아빠로서 우리집에 가장으로서 늘 잘하는 훌륭한 남편이라는거……. 나에게는 힘을 실어주기 위해 한국말로 “잘해군, 잘했어. 그러니까 우리 여보지~.”하면서 노래 불러주는 당신……. 오늘은 그런 당신이 더 많이 생각나고 고맙고, 그립네요.
 곧 있으면 이라크로 파병가는 당신이 미국에서 애기랑 둘만 지내는 날 위해 가족들과 지내라면서 한국을 보내줘 이렇게 가족의 품안에서 애기랑 편하게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내 남편인 당신이 있는 집에서 우리 애기랑 같이 있는 게 더 행복하고 빨리 그 시간이 왔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하면서 처음으로 떨어져 있는 이 시간이 당신없이 어떻게 일년이라는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우리의 분신인 제이디랑 함께 늘 당신을 위해 기도하면서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다지지 말고, 건강하게 이라크에서 잘 지내다 오길 바래요.
 씩씩한 군인아저씨 우리여보!!!!!
 전쟁터에 당신을 보내는 내 마음은 무거운 돌덩이를 안은 것처럼 무겁고 불안하지만 나라의 영웅인 군인아저씨 우리여보……. 당신은 나만의 영원한 영웅이자 우리의 아들인 제이디의 영웅이라는 걸 잊지 말고 늘 주님의 보살핌 속에서 기도하며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길 간절히 기도하며 바라며……. 그 날이 빨리 오길 바래요.
 내년 이맘때쯤이면 우리 가족 웃는 모습으로 다시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겠죠. 그때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고스톱도 치면서 우리가족 땀띠가 나도록 꼬~옥 껴안으면서 다시는 떨어지지 말아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늘 당신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서 기도할게요.
 이제는 백혜선이 아닌 혜선 ULL로써 당신의 옆자리를 지키는 내가 처음으로 당신에게 내 마음을 전합니다. 너무나 많은 말들과 아름다운 말들 중에서도 이것보다 더 귀중하고 아름다운 말은 없는 것 같네요.
 사랑합니다. …………….
 사랑합니다. …………….
 I LOVE YOU. …………….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2008년 10월 26일
       당신의 작고 귀여운 와이프 혜선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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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물류지원단 Korea Postal Logistics
  • 입상자 보기
  • 제목 2012 대한민국 편지쓰기 대회
    대회기간 2012-05-01 ~ 2012-05-31 조회수 8932
    첨부파일 편지쓰기대회 입상자 명단(게시용).xlsx 2012 대한민국 편지쓰기 대회 입상자 명단(단체상).hwp 2012 대한민국 편지쓰기 대회 입상자 명단(입선).hwp 2012 대한민국 편지쓰기 대회 입상자 명단(대상-장려상).hwp 입상자 회신용 안내문.hwp

    【 2012 대한민국 편지쓰기 대회 입상자 발표 】

    2012 대한민국 편지쓰기 대회 입상자 명단을 다음과 같이 알려드립니다.

    대한민국 편지쓰기 대회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입상의 영예를 안으신 분들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대회개요

    o 응모기간 : 2012. 5. 1. ~ 5. 31.

    o 응모대상 : 전 국민(초등부 1~3학년, 초등부 4~6학년,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

    o 응모주제 :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부모님, 스승님, 친구 등에게 보내는 편지

    ◆ 입상자 명단 : 붙임 참조

    o 본상 : 911명(대상 5명, 금상 20명, 은상 100명, 동상 120명, 장려상 280명, 입선 386명)

    o 단체상 : 34개(학교 22개교, 교사 12명)

    시상식 안내

    o 일시 및 장소: 2012. 7. 12(목) 11:00, 포스트타워(서울중앙우체국 10층)

    - 지하철 4호선 명동역 4번 출구 또는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

    시상식 대표 수상자로 선정되신 분께는 별도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 지방우정청장상(은상) 및 우체국장상(입선) 수상자는 해당 지방우정청에서 시상계획을 별도 안내해 드릴 예정입니다.

    ◆ 수상자 인적사항

    o 홈페이지에 첨부된 회신용 자료를 다운받거나, 입상자 안내문에 동봉된 회신용 자료에 응모부문, 입상자 인적사항, 상금입금용 계좌번호 등을 작성수 있도록 등기우편이나 팩스·이메일로 보내 주시거나, 전화로 연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입상자 명단 내용 중 수정이 필요한 사항이 있으신 분은 신속하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전화 070-7202-1124~8, 편지쓰기 담당)

    o 장려상이상 입상하신 모든 분들께 본인이나 가족의 사진으로 『나만의 우표』를 제작하여 드릴예정이오니, 희망하시는 분께서는 사진이나 파일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파일로 보낼 경우 : jpg, gif, bmp등 이미지파일(핸드폰 촬영 사진 제외)

    - 사진으로 보낼 경우 : 15× 10Cm이내의 일반사진(원본 사진은 우표제작 후 반환)

    - 나만의 우표 제작용 사진은 파일의 경우 아래 이메일 주소로 발송하여 주시고, 사진으로 보내실 경우 우편으로 발송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반드시 수상부문, 이름을 표기하여 2012. 7. 6.(금)까지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보내실 곳

    o소 : (143-003)서울시 광진구 자양로 73 우체국물류지원단 편지쓰기담당 앞

    o 이메일 : dol8683@pola.or.kr

    o 연락처 : 전화 070-7202-1124, 팩스 02-458-2747


  • 수상작 감상
  • 제목 [일반부/대상] 제12회 전국 편지쓰기대회 일반부 대상】
    수상자 백우수

    할아버지께.

    새벽을 맞아 펜을 들었습니다. 벌써 네 시군요. 일찍 잠드셨던 당신께서 다시 한 번 깨실 시간입니다. 오늘도 당신은 벽을 더듬어 화장실로 가시겠죠. 조용히 변기 커버를 올리시고는 늘어진 성기로 오줌을 누실 겁니다. 당신의 오줌은 변기에도 묻고 플라스틱 발판에도 묻겠죠. 오줌이 힘없이 떨어져 묻는 소리는 저를 향한 물음입니다.
    제가 집에 들를 때마다 당신께선 내가 도울 일이 없냐고 물으십니다. 저는 그 물음이 어떤 뜻인지 압니다. 당신 도움없이 잘 살고 있냐는 거겠죠. 제가 대답이 없으면 당신은 힘든 일 없냐고 다시 물으십니다. 저는 잘 지냅니다. 그것 외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당신이 주는 생활비가 제게는 풍족합니다.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밥을 먹어도 남습니다.

    할아버지. 돈 보다는 당신의 마음이 제게 더 큰 힘이 됩니다. 일전에, 제가 잘 드리지 않던 전화를 불쑥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단지 목소리가 너무나 듣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그날 제 기분은 정말 이상했습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너무 부담되었습니다. 거창하게 살기 싫다,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게 아니라 단지 제 두 어깨가 버거웠습니다. 오랜 친구도 있고 기댈 애인도 있지만 모두, 언제가 제 곁을 떠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대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언제고 나를 훌쩍 떠나지 않는 사람 당신. 저는 웃으며 당신에게 “네, 잘 지내요.” 라고 말했지만 당신이 “언제고 힘든 일 있으면 말해라”라고 대답했을 때 저는 가슴에 주먹만한 돌 하나가 얹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제가 당신의 마음을 잊고 살았을까요. 왜 화장실 발판에 묻은 오줌을 훔치며 얼굴을 찌푸렸을까요. 할아버지, 저는 마음이 아플 때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곤 합니다. 그 날의 당신은 제게 뜨거운 소나기와도 같았습니다. 요즘 당신의 눈이 말라가고, 그래서 당신이 자꾸만 안약을 넣고, 새벽에 집안에 울리는 당신의 오줌소리가 약해지는 걸 느낄 때 저는 눈앞이 한없이 아득해집니다. 자꾸 ‘언젠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섬을 좋아하십니다. 저 때문에 산다는 말을 자주 하시는 한편 떠나고 싶다는 말도 같이 하시곤 합니다. 섬. 제가 아는 당신은 섬처럼 외로운 분이십니다. 당신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질 못하십니다. 저를 키워주신 이십 년간 당신은 바다에 외롭게 뜬 섬이었고 저는 그 곁에 머무는 작은 섬이었습니다. 저 역시 제부모님 일을 생각하면 괴로웠습니다. 몇 번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죽은 다음날 아침에 밥상을 차리고 저를 깨우러 방에 들어오실 당신을 생각하니, 수저통에 꽂힌 수저 두 쌍 중 한 짝이 영영 필요 없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차마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저보다 더 큰 섬입니다. 당신은 저를 손대지 않고도 곁에 두십니다. 안개 낀 날 저수지로 떠났던 당신과의 마지막 여행을 기억합니다. 저수지 근처의 식당에서 당신은 제게 막걸리를 따라주셨습니다. 저는 당신이 다시 술을 드신다는 생각에 슬퍼져 더 일부러 더 많은 양을 받아 마셨습니다. 저는 축축한 안주를 한입 먹고, 당신께도 술을 조금 따라드렸습니다. 당신은 예전보다 술에 많이 약해지셨죠. 창밖에 안개는 겉히질 않고 있었습니다. 저와 당신은 막걸리 두 주전자를 비웠습니다. 마지막 잔을 비우신 당신은 불콰해진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떠나고, 나도 떠나야지.“ 저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그것은 긍정이 아니었으나 저는 주기 탓에 당신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 당신은 술에 이끌려 사셨습니다. 한 번 술을 드신 다음엔 이틀이고 삼일이고 쉬지 않고 계속 잔을 드셨습니다. 비교적 시골에 살았던 때라 저는 어린 나이로도 술심부름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매번, 둘레가 제 손 너비보다 더 컸던 그 막걸리를 사들고 집으로 향하면서 저는 술 공장이 전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이 술에 취해 계실땐 소풍 도시락도 혼자 싸야 했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릴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호통을 치시던 당신의 취기 낀 목소리가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당신은 제게 한 번도 손찌검을 하신 적이 없군요. 당신께는 술을 드셔야할 만한 어떤 괴로움이 있었을겁니다. 너도 떠나고 나도 떠나야지. 저는 그렇게 말씀하시던 당신의 그 목소리가 아직 잊히지 않습니다. 제게 호통 치신던 그 큰 목소리 대신 아주 나지막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도 떠날 것이고 저도 떠나야하겠죠. 하지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직 홀로 서는 일이 두렵습니다. 분명 버거운 하루하루를 꾸려나가게 될 겁니다. 당신이 없을 때 제게 위안이 될 만한 그 무언가가 제게는 절실합니다. 위안, 그렇습니다. 그것도 다만 위안일 뿐이겠죠.
    할아버지. 늘 곁에 있고 싶습니다. 당신이 벽을 더듬어 화장실로 갈 때 저는 발밑에서 미등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의 몸을 챙기는 것도 버거워진 당신께, 쪼르륵 가만히 떨어지는 오줌소리를 들으며 어느 날엔가 가만히 우셨을 지도 모를 당신께 힘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께도 힘든 세상이라는 것을 성인이 되어서야 느꼈습니다. 신화 속에서 지구를 떠받드는 그 남자의 두 어깨도 질 수 없는 짐이 바로 한 사람을 책임지는 일이겠죠. 삼십 년 먹게 앓고 계신 병이 있느데도 저를 뒷바라지하시는 당신께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이젠 같이 걷자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당신께 전화를 드릴 겁니다. 당신께서는 말씀하시겠죠. “힘든 일 없이 잘 지내니?” 하지만 저는 오늘도 이렇게 밖에 대답하지 못할 겁니다. “네 할아버지.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애교 없는 스물한살짜리 손자를 이해해 주세요. 대신 주말에 집으로 가서 이제 다 자란 제 두 팔로 꽉안아 드릴께요. 할아버지

    2011. 05. 26 백우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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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lettercontest.kr/

    description 공모요강file_download 단체 접수 양식 다운로드

    email 응모 부문

    - 초등부(저학년/1~3학년), 초등부(고학년/4~6학년), 청소년(중등), 청소년(고등), 일반

    ※ 초등, 청소년 부분 재학생 또는 동등학력 소지자 참여가능

    email 응모 주제

    - 나에게 쓰는 편지

    # 나에게 보내는 감사와 응원, 다짐을 담은 편지쓰기

    # 미래에 000이 되어있을 나에게

    #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편지쓰기

    예시1) 꿈과 진로, 가족 또는 친구와의 관계 등 고민이 있는 나에게 위로와 다짐, 응원, 감사를 담은 편지

    예시2)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나에게 응원과 격려를 또는 과거의 나에게 위로의 편지쓰기

    <추진배경>

    - 20년도 편지쓰기 공모전의 주제는 “주변의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는 이들을 위한 위로와 응원의 편지”로 편지가 응원문화의 중심으로서 지역사회에 긍정과 온정의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 한편 21년은 코로나19의 장기화로 무엇보다 나를 위한 응원과 위로가 필요한 시기이다. 또한 학생들은 꿈과 진로에 대한 고민, 어른들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현재의 자신에게 응원과 감사 그리고 다짐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 2021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의 주제는 역대 처음으로 “나에게 쓰는 편지”를 지정하면서, 자신을 제일 잘 알고 있는 내가 나에게 쓰는 편지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편지의 온정을 함께 나누길 기대한다.

    email 시상 내역

      구분훈격인원시상 내역
      초등(저학년)
      초등(고학년)
      청소년(중등)
      청소년(고등)
      대상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부문별 1명상장/상금(각 50만 원)
      금상우정사업본부장상부문별 1명상장/상금(각 30만 원)
      은상우정공무원교육원장상부문별 2명상장/상금(각 20만 원)
      동상한국우편사업진흥원장상부문별 2명상장/상금(각 10만 원)
      장려상한국편지가족회장상부문별 2명상장/상품(각 3만 원 상당)
      일반대상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1명상장/상금(100만 원)
      금상우정사업본부장상1명상장/상금(50만 원)
      은상우정공무원교육원장상2명상장/상금(각 30만 원)
      동상한국우편사업진흥원장상2명상장/상금(각 20만 원)
      장려상한국편지가족회장상2명상장/상품(각 3만 원 상당)
      단체우수지도교사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1명상장/상품(30만 원 상당)
      최우수학교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1곳상장/상품(30만 원 상당)
      우수학교우정사업본부장상3곳상장/상품(각 15만 원 상당)

    email 응모 일정

    - 공모기간 : 5. 31.(월) ~ 9. 9.(목)

    - 수상자 발표: 10. 8.(금)

    ※ 표절신고기간은 10. 8.(금) 부터 13.(수) 까지 입니다.

    ※ 공모전 홈페이지(www.lettercontest.kr)

    - 시상식 : 시상식 일자 및 참석자는 별도 안내(11월 중 예정)

    email 작성기준

    - A4크기 편지지 기준 최대 2장 또는 띄어쓰기 포함 글자 수 2,500자 이내의 분량

    email 접수 방법

    - 아래 2가지 방법 중 택1하여 우편 제출

    1) 공모전 홈페이지(www.lettercontest.kr)에서 신청 후 작품 뒷면에 접수 번호 기재하여 발송

    2) 신청서 다운로드 및 작성 후 작품과 동봉하여 제출

    file_download개인신청서 다운로드 file_download단체신청서 다운로드

    - 접수처 : (07245)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중로 83, 5층 「2021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운영본부

    ※ 우편요금 본인 부담, 접수기한 9. 9.(목) 소인분 까지 유효

    email 심사 기준

    - 편지글 형식이 아닌 작품은 제외(시, 수필, 일기, 그림, 진정서, 연설문 등)

    - 작품분량이 현저히 초과되거나 미달된 작품은 제외

    - 대필, 인용 및 모방 편지글 제외

    - 동일 점수 시 편지형식과 작성법 등에 우선한 작품 선발

    - 단체는 참여율, 우수작 출품 등을 고려하여 선정

    email 유의 사항

    - 초등부, 청소년 응모자는 보호자(법정대리인) 성명 및 연락처를 반드시 기입하여야 합니다.

    - 단체(학교 등)참가 시 단체명, 대표자 연락처를 기입하여야 합니다.

    - 접수기한 9. 9.(목) 소인분까지 유효합니다.

    - 우편으로 접수된 편지는 반환 불가합니다.

    - 우편요금 응모자 본인이 부담하여야 합니다.

    - 상금에 대한 제세공과금 (4.4%/21년 1월 기준)은 수상자 본인이 부담하며, 실수령액은 상금의 제세공과금을 공제한 금액에 제공됩니다.

    - 국내외 타 공모전 등에 당선되지 않은 순수 창작품이어야 하고, 표절ㆍ도용ㆍ모방 작품으로 판명될 경우 심사에서 제외됩니다. 수상 이후라도 표절 등 판명 시 수상 취소와 상금 등을 회수합니다.

    - 수상작과 관련하여 저작권ㆍ소유권 등 기타 제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하며, 향후 분쟁 등 법적 분쟁 발생 시 모든 법적 책임은 응모자에게 있습니다.

    - 출품작이 심사기준에 부합하지 않거나, 그 수준이 현격하게 낮을 경우 시상 건수가 축소되거나 시상 내역이 없을 수 있습니다.

    email 문의 사항

    - <2021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운영본부

    Tel : 02-2036-0826

    E-mail : letter@po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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