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당신의 인생이 곧 소설입니다 [2012.10.15 제931호]
[알림] 제4회 손바닥문학상 공모
‘평범한 사람들의 글쓰기’를 응원하는 <한겨레21> 제4회 손바닥 문학상 공모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적은 논픽션도 응모 가능… 작은 손바닥 부문은 없애
     
어머니는 항상 “내 인생이 그대로 소설 한 권”이라시곤 합니다. 과연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에는 소설 부럽지 않은 긴박감과 애환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어머니, 진짜 그게 문학이 못 될 게 뭐간데요.

왜 노동현장의 체험은 위장취업한 르포작가, 아니면 몇 시간 가서 받아적은 기자의 입을 통해 전해질까요. 고딩이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을 말’이라는 구분 없이, 욕까지 섞은 생생한 말투로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그들을 좀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20대 청춘은 왜 특별히 뛰어나거나 죽을 만큼 힘들 때만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그 사이 무한히 많을 고민을 섬세하게 받아적어줄 사람, 바로 ‘당사자’가 아닐까요.

제4회 손바닥 문학상에서는 당신의 경험이 그대로 문학이 됩니다. 픽션·논픽션이라는 구분이 없습니다. 문학적 성취가 높은 작품, 체험의 희소성과 경험의 핍진성이 높은 작품 모두 손바닥 문학상 안에서 함께합니다. 체험을 소설로 만들어도 좋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실감나게 살려주어도 좋습니다. 물론 어머니의 인생도 소설이 됩니다. 남의 인생에 부러 위장취업할 필요 없이 여러분 자신, 가장 잘 아는 친구·가족을 손바닥 문학상에 풀어놓아 주세요.

역대 수상자 및 수상작
제1회 대상 신수원 ‘오리 날다’, 가작 한혜경 ‘인디안밥’
제2회 큰 손바닥 대상 김소윤 ‘벌레’, 가작 기민호 ‘구민을 위하여’ 작은 손바닥 가작 윤희정 ‘방문’
제3회 큰 손바닥 대상 김정원 ‘너에게 사탕을 줄게’, 가작 이보리의 ‘인형의 집으로 어서 오세요’, 이도원 ‘가난한 사람들’
작은 손바닥 대상 전구현 ‘랩탑’, 가작 최호미 ‘나는 외롭지 않다’

공모 안내
대상 논픽션·픽션 불문 동시대 사회적 이슈를 주제나 소재로 한 문학글
분량 200자 원고지 50~70장
응모요령 한글이나 워드파일로 작성해 전자우편(
palm@hani.co.kr)으로 접수
마감 11월11일(일요일) 밤 12시
발표 11월26일(월) 발행되는 938호(12월3일자)
문의
palm@hani.co.kr 전자우편으로만 받습니다.
상금 및 특전 대상 300만원, 가작 100만원
수상자는 일정 기간 <한겨레21> 필자로 기용됩니다.


*2·3회에서 운영된 ‘작은 손바닥’ 부문은 올해 공모하지 않습니다.


기획연재 - 손바닥문학상
제4회 손바닥문학상 -‘나’를 꼬아 논픽션이 픽션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당신의 인생이 곧 소설입니다
너에게 사탕을 줄게랩탑
사회적 무의식이 고인 손바닥들을 읽다세번째 손바닥, 지금 만나러 갑니다
좋은 것은, 짧다면, 두 배로 좋다손바닥 안에서 소설적 도약을 이루다
벌레노량진 공시촌 블루스

이 더럽고 치사하고 아름다운 세상이여 [2012.12.03 제938호]
[알림] 제4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작 발표
팍팍한 현실이 한몫한 파란만장한 이야기 담은 총 167편의 응모작
당선작은 김민의 <총각슈퍼 올림>, 가작은 윤성훈의 <황구>
        
총 167편이 도착했습니다. 지난해 ‘큰 손바닥 부문’의 84편보다 두 배 가까운 응모 편수입니다. <한겨레21>은 ‘문학상’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소설(픽션) 외에 논픽션까지 분야를 확대했습니다. 소설로 꾸밀 필요도 없이 그대로 소설이 되는 삶을 들려달라는 거였지만, 현실이 한몫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신용불량자 이모만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생활비가 없어 ‘십만원’을 대출하고 노심초사하는 사연을 들었습니다(<부팅>). 좀비가 돼가는 인턴사원 9개월째의 삶도 어쩌면 현실일까요(). 피부가 좋아진다며 퐁퐁을 받아 얼굴에 바르는 할머니는 날마다 죽기를 기대합니다(<구원>).

디테일한 묘사로 박진감 넘치는 글이 많았습니다. 인건비 절감을 이유로 상담원이 판촉원이 되어야 하는 전화상담원의 세계는 ‘미스터리 박스’를 여는 기분이었으며(<미스터리 쇼퍼>), 건강보험 청구가 금지된 복제약 사용 건을 심사하는 심사원의 삶 또한 분명 일을 해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집행관>). 유기농 심사는 이런 식으로 받는 것이구나 신기하기도 하고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심사받는 날>).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에서 많은 목숨이 떨어져내렸습니다. 취직 카페의 발랄했던 운영자 ‘영자’씨는 몇 번의 실패 끝에 다리에서 떨어졌고(<중력>), 고등학생이 응모한 글에서는 왕따를 당하던 감수성 강한 친구가 가을의 은행잎처럼 졌습니다(<은행나무>). ‘주독야경’하던 후배가 냉매가스에 질식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월량대표아적심>).

여전히 희망은 있습니다. 네팔인 이주노동자와 연애하다 지금은 그 나라를 이해하려고 비정부기구(NGO) 단체 활동을 나가 있는 여자분이 남자친구 처지에서 쓴 ‘연애기록’을 보내주셨습니다(<나는 네팔인 그녀는 한국인>). 경남 밀양 송전탑 투쟁 현장을 찾아가 싸우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르포도 도착했습니다(<보라마을 이야기>). 어릴 때 헤어진 어머니를 만나는 것을 꺼리는 조카에게 ‘만나는 보라’며 “엄마가 되어줄게”라고 읊조리는 고모를 만났습니다(<고모>).

예심은 <한겨레21> 이제훈 편집장, <한겨레> 24팀 안수찬 팀장, <한겨레21> 구둘래·남은주·신소윤 기자가 나눠 읽었습니다. 추려서 19편이나 결심에 올렸습니다. 결심에서 전 <한겨레> 논설위원·에세이스트 김선주, <한겨레> 최재봉 기자,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당선작과 가작을 뽑았습니다.

당선작은 김민의 <총각슈퍼 올림>입니다. 가작은 윤성훈의 <황구>입니다. 수상작 전문과 심사평, 수상 소감은 다음주(939호)에 공개됩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응모해주신 여러분, 90도로 감사드립니다.


황구 [2012.12.17 제940호]
제4회 <한겨레21> 손바닥문학상 가작
        
어릴 적, 동네 어귀에 자그맣게 흐르던 개천이 있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서 꼭 한 번은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개천은 정말 볼품없이 작은 물줄기였다. 개천 곳곳에는 색이 바랜 잡초가 제멋대로 자라서 무성했고, 동네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온갖 쓰레기를 처음에는 숨기듯이 버리다가 곧 아무렇게나 버려두곤 했다. 여름이 되면 쓰레기가 썩는 냄새 때문에 학교 가는 길이 고역이었다. 어느 날 개천 쓰레기 더미가 쌓인 곳에 개 한 마리가 자리를 잡았다. 어디서 온지 알 수 없는 떠돌이 개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기 싫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다 보면 꼭 한 번씩 그 개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작고 야위었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노란 털을 가진 개. 그야말로 황색 개, 황구였다. 아침에 학교 갈 때는 보이지 않다가 저녁때만 되면 나타나서 쓰레기를 뒤지며 사람들 눈치를 살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작고 약한 것들은 곧잘 그것보단 조금 더 센, 하지만 결국 약한 것들의 표적이 되곤 했다. 개천 위 길가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개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흔한 풍경이었다. 그 정도 폭력은 너무도 흔해서 그것이 폭력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조그만 짱돌에서 시작한 돌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개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꼬리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잔뜩 말려 있었고 온몸의 털은 곤두섰다.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대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돌을 피하던 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곳까지 몰렸다.

동네 골목대장 같은 목소리 큰 아이가 자기 머리통만 한 돌을 던졌다. 결국 개는 갈비뼈 어딘가에 돌을 맞았는데 자지러지는 비명이 발작적으로 터져나왔다. 동시에 아이들 입에서도 웃음소리가 발광적으로 튀어나왔다. 입에서 눈으로, 콧구멍에서 귓구멍으로, 가슴팍에서 모든 가죽 껍데기에서 웃음이 쏟아져나왔다. 그러곤 더 큰돌을 들어 개의 머리에 조준했다. 개는 비명을 지르다 한쪽 구석에서 있던 나를 보았다. 동시에 아이들의 눈도 내게 향했다. 갑자기 더 큰 웃음이 나를 향했다.

휙 돌아서 집으로 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온 사위를 물들였고 모든 사물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선혈과도 같은 핏빛이 달려가는 내 그림자와 접붙여졌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비명도 이어졌다. 모퉁이를 돌아 골목길로 들어서자마자 집까지 뛰어갔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돌아보면 개의 눈이 바로 뒤에 붙어 있을 것 같았다. 대문을 밀치고 들어가 곧장 방에 누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숨이 막혀 갑갑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이불을 벗어던지려고 해도 이불은 떨어지지 않았다. 천근에 가까운 무게로 나를 눌렀다. 소리를 지르려 해도 이불 속 어둠이 입을 잡고 열지 못하게 했다. 어둠은 점점 커져가서 입의 형상이 되어갔다. 황구의 입이다. 한쪽 머리가 터진 채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내 눈 앞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커다란 입이, 커다랗고 검은 입이 나를 핥는다. 그것을 피해보려 하지만 조금씩 끌려갔다. 허우적대며 끌려갈 뿐이다. 그대로 커다란 입에 빨려 들어갔다. 꿈이란 걸 알면서도 꿈인지 확신할 수 없는 꿈속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러다 눈이 번쩍 떠졌다.

한참을 눈만 말똥말똥하게 뜨고 천장만 바라본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근육통이다. 천장엔 아무런 무늬조차 없다. 천장을 뚫고 방들을 지나 옥상 너머 하늘을 상상해본다. 온통 희뿌옇다. 석 달째 편의점 야간 알바는 낮과 밤의 감각을 없앴다. 점장은 교대 시간을 줄여준다고 했지만 오히려 오늘은 오전 10시가 되어야 퇴근할 수 있었다. 커튼을 쳐도 한낮의 햇빛은 얇은 천을 뚫고 들어온다. 피곤해 눈이 감겨도 쉽사리 잠은 오지 않는다. 결국 몸을 일으켜 일전에 사둔 검은색 도화지를 사다가 창문에 붙인다. 아주 좁은 틈으로도 빛은 새어 들어온다. 감은 두 눈 사이로도 얇은 빛이 파고든다. 그래도 잠을 청해본다. 자야 한다. 잔다. 자자.

얼마나 지났을까. 벨 소리가 머리맡에서 울려댔다. 엄마다. 액정을 멍하니 쳐다만 본다. 휴대폰은 춤을 추면서 한 바퀴 돌아간다. 춤은 멈추지 않는다. 몇 시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간신히 전화를 받자마자 왜 이리 전화를 안 받니, 집에는 언제 오니, 너 일은 잘되고 있니, 아버지도 예전 같지 않다, 졸업은 언제 하니, 절대로 대기업에 가야 해, 라는 말이 쏟아져나온다. 대화가 아닌 대사다. 엄마라는 배역을 맡은 배우처럼 항상 이렇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느리게, 빠르게, 엄격하게, 흐느끼듯, 심각하게 톤을 바꿔가며 대사를 읊는다. 일방적인 통화가 끝나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일할 시간이다. 편의점, 자취방, 쪽잠. 이 수레바퀴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질문은 쌓여가지만 대답을 찾을 수 없어 결국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여름의 야간 편의점 알바는 쉽지 않다. 술집 알바도 겸하기 때문이다. 야외 테이블에서 술 마시는 손님이 늘어갈수록 소주병, 맥주캔 따위를 치우는 시간도 길어진다. 치우는 일은 어렵지 않은데 반드시 하루에 한 번은 술 취한 놈들이 시비를 걸었다. 욕먹는 거야 그냥 참고 넘어갔지만 뒤통수를 맞기도 할 땐 분노보다 지쳐간다. 점장은 무조건 네가 참아,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기계처럼 술병의 바코드를 찍을 때 어, 너 여기서 일하냐. 별로 친하지도 않은 기껏해야 몇백 명이 모이는 개강 총회에서 술 한두 번 같이 먹었던 선배였다. 힘들겠다.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은데, 여기보다 벌이 더 좋은 알바자리 하나 소개해줄까? 이제는 만성이 된 피로감 때문인지, 아까 먹은 유통기한 지난 김밥 때문인지 심장이 벌렁거렸다. 귓바퀴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석 달만 하면 등록금 1년치는 물론 더 잘 버티면 조그만 사업도 하나 할 수 있을 정도의 목돈을 만질 수 있다고 한다. 조심스레 불법적인 일이냐고 물으니 선배는 곧장 불같이 화를 냈다. 합법적인 일이라고 한다. 몸만 멀쩡하면 대한민국 대학생 남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한몫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했다. 그는 한턱 쏜다며 날 억지로 데려간 삼겹살집에서 바짝 구워진 고기 한점 한점 집어먹을 때마다 합법을 강조했다. 삼겹살 기름으로 반짝거리는 입술은 계속 쉬지 않았고 ‘돈은 그렇게 벌어야 해’라고 주문을 외우는 듯했다.

그가 소개해준 자리는 경비업체 용역이었다. 기본적인 업무는 말 그대로 교대로 경비를 서는 것뿐이었다. 하루에 기본 수당은 15만원 이었지만 그건 원청에 해당하는 경우고 제일 큰 경비업체에서 하청을 준 것을 다시 재하청을 준 갑을병정, 정의 위치였던 우리에겐 온갖 수수료를 제하고 8만원이라고 했다. 다른 일 없이 24시간 맞교대로 경비를 서기만 하는 일에 8만원은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다음날, 편의점 월급이 들어왔는지 현금인출기로 확인했다. 교대하러 10시30분에 온 점장에게 오늘부로 알바 그만둔다고 말했다. 개새끼, 소새끼, 말새끼 온갖 새끼들이 나오다가 시급 올려준다며 인생치사하게 살지 말라고 한다. 심장이 쿵쾅쿵쾅 울렸다. 머릿속에 여러 새끼들이 떠다녔다. 안녕히 계세요. 뒤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휴대폰 전원을 끄고 달렸다. 심장이 아파왔다. 심장 끝부분이 콕 콕 찔리는 듯했다. 내가 나쁜 놈이다. 오늘은 내가 나쁜 놈 역할을 한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역을 하려다 보니 이렇게 심장이 아픈 것이라 생각했다. 길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의 눈빛이 나를 비난하는 듯했다. 나를 피해서 걸어가는 듯했다. 아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처음엔 다들 마약이라도 하나 생각했다. 다들 하나같이 눈빛은 흐리멍덩하고 꿈을 꾸는 듯 잠을 자는 듯했다. 자세히 보면 그냥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이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 억지로 자야 했고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배가 알려준 주소대로 사무실을 찾아갔다. 별다른 인사나 소개도 없이 곧장 주차장의 승합차로 향했다. 흰 셔츠와 잘 다린 검은 바지를 입은 나와 똑같은 차림의 남자들을 만났다. 서로 뭔가 어색한 눈빛을 교환하며 승합차에 탔다. 몇 년 전에 산 구두가 맞지 않아 발가락을 계속 압박했다. 한참을 가다 서다 한 차는 강남 어딘가의 빌딩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리자 멀리서 선배가 웃으면서 손짓했다. 오늘은 일단 하루 정도 다른 곳으로 지원 나가는 일이라고 옆에서 선배가 설명해줬다. 일하기 전에 대기하는 곳이라며 여러 대의 관광버스를 가리킨다. 버스에 올라타니 우리와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 사람들이 창가에 붙어 눈을 감고 있다. 처음엔 다들 마약이라도 하나 생각했다. 다들 하나같이 눈빛은 흐리멍덩하고 꿈을 꾸는 듯 잠을 자는 듯 아무것도 안 하는 듯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자세히 보면 그냥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이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 억지로 자야 했고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잠자코 몇 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자니, 아니 사실 몇 분일 수도 있다. 버스 안에서의 시간이 제멋대로 한없이 길게 늘어졌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의 비율은 점점 올라갔다.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그것보다는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찾아왔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사람 많은 곳, 특히 밀폐되었다고 느껴지면 이산화탄소가 거품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거품이 한없이 커져가서 나를 감싸고 결국에는 깔아뭉개며 짓이겼다. 실제로 그런 적은 없었지만 거품이 나를 덮치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잠깐 버스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딱 봐도 팀장급처럼 보이는 사람이 버스에 올라왔다. 돼지새끼들 이제 일어나, 긴장해라. 바로 투입된다. 바로 옆에 있던 청년의 머리통을 퍽 소리 날 정도로 세게 내리치며 그는 계속 소리쳤다. 모두 어리둥절해 버스에서 내리니 그 앞에는 붉은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다. 같은 색의 머리띠를 한 사람들이 춤추고 있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깃발이 물고기가 되어 허공을 유영했다. 물속에서 춤추며 헤엄치고 있다. 검은색과 붉은색의 대비가 거리를 가득 메운다. 큰 소리가 들린다. 여러 가지 함성이 뒤엉킨다.

확성기가 울린다. 정당한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용역깡패, 물러가라. 불법적인 용역깡패는 당장 사라져라. 용역깡패는 불법이다. 용깡놈들 너거들은 양심도 없느냐. 용깡, 용깡, 무슨 새로 나온 과자 이름인 줄 알았다. 정신 못 차리고 뒤에 어정쩡 서 있을 때 팀장의 한바탕 욕설이 우리들로 하여금 저절로 대열을 만들게 했다. 이열 종대로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이들이 섰다. 뭔가 모를 긴장감이 목을 마르게 했다. 땀이 연신 흐르는 얼굴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앞만 바라본다. 그럴 때 머리 위로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대로 밀어버린다. 명심해, 우리는 사 측에서 합법적으로 관리를 위임받았다. 저들은 불법노조, 불법 빨갱이들이야. 밀어, 밀어버려. 대신 다치면 너네 손해다.

뒤에서 밀고 앞에서 밀고, 옆으로 갔다가 우르르 몰려가서 붉은 머리띠 한 사람을 들었다. 선배가 소리친다. 한쪽 다리 들어. 밖으로 내보내. 정당한 권리를 막지 마라, 이 깡패 새끼들아. 이 개 같은 용깡놈들.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진다. 때리지 마. 손대지 마.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차피 이 새끼들 아무것도 못해. 어떻게 이렇게 서로 모순된 말들이 부딪치고 있을까. 순간 편의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익숙한 곳이 그리워진다. 붉은 물고기는 그들이 모여 있는 바닷가로 내던졌다. 나와 선배는 열심히 물고기들을 내던진다.

“네가 먹는 것이 곧 너다.” 유통기한 지난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먹을 땐 꼭 한 번쯤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해장국을 먹고 있다. 24시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빨갛고 뜨거운 이 탕이 곧 나다. 뭐가 뭔지 모를 시간을 보내고 간신히 먹는 이 한 그릇이 나다.

비가 그쳐간다. 한여름의 소나기였다. 선배와 지쳐 있는 내 곁으로 팀장이 다가왔다. 네가 데려온 놈 오늘 열심히 하더라. 다른 애들보다 조금 더 챙겼다. 앞으로도 우리 잘해보자. 팀장은 내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파이팅을 외친다. 선배가 옆에서 수고했다며 봉투를 건넨다. 두툼함이 느껴진다. 확인해보지도 않고 누가 볼세라 땀 냄새 잔뜩 밴 바지 안쪽의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넣는다. “네가 먹는 것이 곧 너다.” 언제인가 수강 신청을 실패해 아무 생각 없이 들었던 교양수업 중에 들었던 어떤 철학자의 말이다.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유통기한 지난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먹을 땐 꼭 한 번쯤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해장국을 먹고 있다. 24시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빨갛고 뜨거운 이 탕이 곧 나다. 뭐가 뭔지 모를 시간을 보내고 간신히 먹는 이 한 그릇이 나다. 고추인지 캡사이신인지 모를 시뻘건 게 둥둥 떠다니다가 훌훌 넘어간다. 속이 뜨겁다. 열이 순식간에 올라온다. 캡사이신 덕분에 위는 피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봉투에는 하루 일당 12만원이 들어 있다. 2만원은 1천원짜리 스무 개였다. 그중 한 장은 심하게 찢겨서 스카치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나가면서 그 한 장을 중간에 섞어서 냈다.

우리 팀장, 김 프리는 자신을 꼭 김 프리라고 부르게 했다. 프리, 에프, 아르, 이, 이. 얼마나 좋으냐. 자유, 김 프리는 정말로 프리한 게 좋다고 했다. 얼굴선도 고왔고 몸도 날렵한 그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친형한테 하듯이 자신을 프리하게 하라고 자주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오래 있었던 동생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형, 담배 한 대만요. 처음 온 신입이 저런 말을 했다가 하루치 일당 대신 주먹세례를 받고, 욕은 세트로 받으며 쫓겨났다. 발길질은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옵션이었다. 요즘 새끼들은 다 저래, 하나같이 다 돌대가리야, 머리 없어? 어? 그런 거야? 너도 그러냐? 사실 김 프리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며 흥분할 때는 하청을 준 업체에서 입금이 원활히 되지 않을 때다. 그러다 김 프리와 눈이 마주쳤다.

한 대 맞을까봐 움츠리고 있는데 머리를 쓰다듬는다. 너 생긴 거하고는 다르게 오래 버틴다. 돈 많이 필요한가 보다, 열심히 해. 그러다 보면 언젠가 인생에 꽃핀다. 그때까지 뒈지지 말고 말없이 도망가지 말고 잘해. 그렇게 말하며 멀어져갔다. 너 의외로 인정받나 보다. 김 프리 옆에 딱 붙어다니는 똘마니가, 그를 보면 딱 똘마니란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딱 전형적인 똘마니의 모습이다. 어쨌든 김 프리가 의외로 자상한 말을 했다고 놀랐는지 말을 걸어온 것이다. 한번 시작한 그의 수다는 멈추지 않았는데 그는 김 프리를 보자마자 저 사람이 내 운명이란 예감이 있었다 한다. 이런 얘기를 대기시간 때마다 떠들어댔고 심지어 현장에 투입되어도 했다. 심지어 대치 중일 때도 귀에 대고 소곤소곤거렸다. 결국 그의 말에 의하면 김 프리는 거의 맨주먹으로 이 바닥에서 지금의 위치까지 오른 신화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비범한 인물이었다. 업계에서 독립해서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다른 프리 팀과 프리 팀들을 흡수하고 헤쳐나가면서 그가 보여주는 절묘하고 아슬아슬한 협상 능력과 거리낌 없는 폭력에 일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범죄의 역사에서 분명히 작더라도 하나의 축을 담당할 것이라는 확신을 그의 주변 모두에게 갖게 했다. 나는 센 놈이다, 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다니는 그 였다.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나갔다. 통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쌓이는 돈만큼 그만큼의 용기도 생겨났고 달라져가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뭐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그저 희망이, 작은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나도 언젠가, 어디에선가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늦게 출발한 시합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 다른 사람들과 같이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 어느 날, 김 프리가 환한 얼굴로 와서는 비수기인 겨울이 오기 전에 돈 되는 재개발구역에 투입된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밖에 없는 동네라고 한다. 그냥 조심히 들어서 옮기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이번엔 원청에서 아주 두둑하게 보수 책정을 했다고 한다. 다른 프리팀과의 경쟁에서 우리의 김 프리가 그 일을 따낸 것이다. 우린 운이 좋다. 선배가 중얼거렸다. 이건 확실히 큰돈 된다. 김 프리가 모두를 돌아보며 외쳤다. 모두 같이 환호했다.

김 프리는 그때부터 열심히 준비했다. ‘스펙’ 쌓기 위해 온다는 지방의 경호학과 학생들도 동원했다. 경호학과 학생들은 이런 재개발 구역에서 용역 알바 한 것이 취업할 때 훌륭한 경력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용, 호랑이, 곰, 뱀, 봉황들이 나타났다. 온갖 동물들이 으르렁거렸다. 등과 팔에 목에 새겨진 그것들이 소화기와 각목을 든 이들과 함께 들썩였다. 기와가 널브러져 있고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다. 시뻘건 페인트칠이 이곳엔 아무도 있으면 안 된다고 증명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있다던 그곳엔 마스크 낀 사내도 아주 많이 있었다. 선배가 옆에서 저놈들 조심해, 라고 귀띔했다. 엄폐물이 세워져 있고 그곳에서 볼트가 날아왔다. 화염병도 날아오고, 욕도 날아오고, 벽돌도 간간이 날아왔다. 그런 대치가 계속되다 갑자기 군화 소리가 들리고 전경들과 경찰들이 뒤에 몇 겹으로 섰다. 순간 놀랐지만 김 프리가 무전기를 들고 있는 경찰 간부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둘은 큰 소리로 웃고 간부는 김 프리의 어깨를 친밀하게 두들긴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한참 얘기를 나누던 김 프리가 돌아와서는 얘들아, 우리 오늘도 돈 열심히 벌자, 자본주의 만세, 라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다 같이 따라서 웃었다. 그때 선배가 다가와서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팍을 보여줬다. 3천만원, 1천만원짜리 수표 세 장이었다. 나 그동안 정말 열심히 했다.

이거, 이 돈 부적 삼아서 오늘로 이 일 마무리지으려고 한다. 오늘 일끝나면 어머니랑 조그만 가게 하나 알아보려고, 고생 많이 하셨거든 우리 엄마. 우리 오늘 열심히 하자. 이따 일 끝나고 내가 거하게 술 한잔 살게. 선배는 환하게 씩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희망에 가득 차서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저렇게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희망이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것이다. 희망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 어떤 아저씨가 사제로 만든 화염 방사기를 휘두르면서 위협한다. 그러자 용 문신을 한 어떤 이가 등의 용 문신을 꿈틀거리며 소화기를 쏘아댔고 호랑이 문신은 각목을 던진다. 죽창이 답례로 날아온다. 그 뒤로 볼트와 너트가 새총에 끼워져 날아온다. 내 옆에서 할머니 어깨를 잡아끌던 동료가 머리에 너트를 맞았다. 악 소리와 함께 피가 주르륵 흘러나온다. 김 프리가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전경이 군화로 땅을 쿵쿵거리며 찼다. 방패를 두들기며 온 사위를 그들의 소리로 가득 차게 한다. 정신없이 움직이는데 누군가 목을 잡아 끌어당긴다. 선배였다. 일단 뒤로 빠지자 한다. 위험하다고, 상황이 너무 안 좋다고.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턱 부분에 내 주먹만 한 너트가 와서 박힌다. 그 장면이, 그 공간이 순간 흐르면서 천천히 퍽 하는 소리와 동시에 선배가 풀썩 쓰러진다. 뒤를 돌아보니 어떤 할머니는 우산 끝으로 동료의 눈을 찌르려 한다. 그가 우산을 빼앗아 얼굴을 가린 채 때린다. 누군가 사진을 찍고 있다. 찍혔을까. 보너스가 나온다고 했다. 내일까지 철거 완료하면 보너스가 나온다고 했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동네에 살던 작은 개가 달려들었지만 볼품없는 개는 누군가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진다. 그 녀석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소리는 모든 곳에 넘쳐나고 숨이 막혀온다. 이산화탄소는 거대한 거품이 되어 하늘에서부터 나를 짓이겨간다.

선배의 축 늘어진 몸을 부여잡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전경들이 벽을 만든다. 그들의 그림자로 사방이 어두워진다. 저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선배의 벌어진 품속에서 지갑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이 모르게, 절대로 내가 아닌 것처럼 지갑에 손을 올린다. 지갑 뒤로 선배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닌 척 지갑을 갖고 뛰어갔다. 저 멀리 김 프리가 보인다. 반사적으로 죽자 사자 뛴다. 넘어졌다. 일어났다. 쫓겨났다. 걸어갔다. 밀려났다. 움직였다. 숨이 찼다. 땀이 났다. 다시 뛴다. 소리 지른다. 쪽잠을 잔다.

영원 갔던 잠 속에서 눈을 떴다. 사방에는 소주병이 굴러다녔고 과자 부스러기들이 머리카락에 엉겨붙어 있다.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자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다. 어제에 이어 시뻘건 고춧가루가 떠다니는 매운탕을 떠먹는다. 머리를 울려대고 생선 비린내가 확 콧속을 파고든다.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쏟아져 나오려고 해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걸 그대로 게워낸다. 게워낼 게 없어져도 한참을 변기를 붙잡고 앉아 있다. 화장실 문에 농장일 할 사람 급구, 휘갈긴 글씨가 눈길을 끈다. 일을 하면, 무슨 일이든지 하면 아무 생각도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식당집 주인 아주머니는 이 농장은 바다를 떠나 산속으로 꽤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두 번의 버스를 갈아타는 동안 아침 일찍 출발했던 길이 어느새 저녁 무렵이다. 인적도 없고 농장으로 가는 길은 엉망이다. 아주 드물게 있는 안내 표지판이 아니었다면 그냥 돌아갔을 것이다.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계속 길을 걸었다. 철망으로 된 문이 나왔다. 자물쇠가 걸려 있어 약간 흔들어보자 개들이 짖어댔다. 수십 마리의 개들이 동시에 짖어댔다. 고요한 산속에서 울림은 더 커져갔다.

개들의 소음 속에 사람의 소리도 조그맣게 들렸다. 누구야. 어떤 놈이야. 날카로운 말투에 놀라 어물거리며 간신히 말한다.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기에 왔는데요. 그거 붙여놓은 지가 언젠데.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 이런 일 할 수 있겠어. 영감이 알아서 처리해.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사내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사람이 같이 나왔다. 중년의 사내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차를 몰고 사라진다. 영감이라 불린 사람이 자기를 관리인이라 부르라며 따라오라고 한다. 그 와중에도 개들은 짖어대는 걸 멈추지 않는다. 관리인이 쇠꼬챙이를 들고 나오자 그제야 한 마리씩 조용해졌다가 작은 개 한 마리가 끝까지 멈추지 않는다. 우리 안으로 쇠꼬챙이를 찔러넣는다. 그러자 산속 농장에 고요가 찾아왔다. 일단 자고 내일부터 일하자. 창고 같은 곳에 담요 하나 던져주면서 관리인은 사라졌다. 창고에서는 개 냄새와 개털, 처음 보는 온갖 도구들이 뒤엉켜 있다. 그래도 이상하게 대충 정리한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스르륵 찾아온다. 몇 달 동안의 불면증이 무색하게 잠이 쏟아진다.

근데 투견에서 진 개는 그냥 버려져. 보신탕도 되지 못해. 바깥, 인간 세상하고 똑같지. 한 번 싸움에 진 개는 영원히 진 거야. 다시 이길 가능성은 없어. 너나 나처럼, 나나 너처럼 영원히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도망만 치다 어딘가에 나자빠져서 죽고 말겠지.

개 짖는 요란한 소리에 정말 오랜만의 달콤한 잠에서 깨어났다. 밖으로 나오자 관리인이 아직 있었느냐는 눈으로 쳐다본다. 일은 쉬웠다. 때 되면 개들에게 밥을 챙겨주면 되는 일이었다. 밥 주는 시간 말고는 개들의 짖는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각각의 소리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처연하기도 했고, 무섭게 혹은 무서워하며, 밥 먹을 때 말고는 소리가 그치는 일은 없었다. 관리인이 쇠꼬챙이로 철창을 두드릴 땐 산속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일을 한 지 며칠이 지났을까. 관리인이 밥을 먹다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점차 그 눈빛을 견디기 힘들어질 때 그가 말했다. 여기서는 두 종류 개가 키워진다. 투견하고 보신거리지. 그러고는 한참을 말없이 밥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근데 투견에서 진 개는 그냥 버려져. 보신탕도 되지 못해. 바깥, 인간 세상하고 똑같지. 한 번 싸움에 진 개는 영원히 진 거야. 다시 이길 가능성은 없어. 너나 나처럼, 나나 너처럼 영원히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도망만 치다 어딘가에서 나자빠져서 죽고 말겠지. 관리인이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할 때 농장 주인이 찾아왔다. 개들을 꺼내서 따라오라고 했다. 잔뜩 경계한 개 두 마리를 끌고 주인과 관리인을 따라가자 여러 가지 기구들이 보였다. 그러자 개들이 낑낑거리며 힘을 주며 버텼다. 아무리 목줄을 잡아당겨도 소용없다. 주인이 몽둥이로 개들을 후려친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개들은 한사코 기구 근처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관리인이 개 한 마리의 목줄을 작은 컨테이너 벨트 같은 것에 연결한다. 그리고 스위치를 누르자 벨트가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헬스장의 러닝머신처럼 개는 달리기 시작했다.

개는 벨트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몸부림을 시작했다. 필사적이다. 미친개처럼 사방으로 몸을 뒤틀었다. 관리인은 익숙한 듯 몽둥이로 갈비뼈 부근을 사정없이 내리친다. 개는 흰자위만을 드러냈고 침이 튄다. 다른 개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훈련을 한다. 맞은 곳에서 피가 나온다. 관리인이 녹색 페인트 같은 것을 마구 뿌린다. 약이야. 너도 이렇게 해. 관리인이 내게 통 하나를 건넸다. 녹색의 약품을 발랐던 상처에는 다시 피가 나와 녹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다. 하루 종일 개를 바꿔가면서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됐다. 개들은 짖었고, 체념했다가 다시 짖었다. 멈추지 않는 벨트 위의 개들처럼 내 눈도 풀려갔다. 그런 내게 관리인이 자그맣게 귓속말했다. 벨트 위에서 뛰는 개가 불쌍해? 그래도 그놈들이 한 번이라도 크게 이기면 대우받는다. 언제까지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 번도 못 이겨보고 보신거리가 되는 것보다야 낫지.

그 뒤로 나를 잊고 열심히 일을 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일을 했다. 다시 하루하루 진부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며칠 동안 이곳에 있었는지, 몇 년이 지난 건지 알 수 없다. 시간관념이 점점 사라진다. 시간을 알고 싶어 항상 품 안에서 만지작거렸던 휴대폰을 꺼낸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전원을 켠다. 삐 하는 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개들도 조용했다. 한참 같은 순간이 지나고 문자가 왔다는 알림음이 계속 울린다. 스팸과 광고. 고시원 월세, 엄마의 돈 내놓으라는 문자가 차례대로 왔다. 저주의 말들이 차근차근 다가왔다. 나를 걱정하는, 나를 찾는 연락은 없었다. 그리고 전화가 왔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망설이다 결국 귀에 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선배였다. 너이 새끼, 언젠가 전화 될 줄 알았다. 너 거기 어디냐, 좋은 말로 할 때 말해라. 내가, 너 꼭 찾아낸다.

농장에는 철창이 많았지만 가장 깊숙한 곳의 철창에는 자물쇠가 여러 개 달려 있었고 그 굵기도 엄청났다. 하루는 관리인에게 그 철창 우리에 대해 묻자 화를 벌컥 냈다. 신경 꺼. 너 따위가 들여다볼 것이 아냐. 한참의 침묵 후에 관리인은 횡설수설하듯 읊조렸다. 저건 사람을 먹는다. 사람만을 먹어. 사람을 먹기 전에는 죽지도 않아. 절대 죽지 않지. 사람을 먹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 먹힌 사람은 다시 저놈이 된다. 저놈은 그런 놈이다. 죽기 위해 먹는다. 벗어나기 위해 기다린다. 저주, 한마디로 저놈은 저주야. 가까이 가지 마.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한 관리인의 말이었다. 그러곤 한참을 잊고 지냈다. 세상의 목소리에, 내가 두고 온, 끝까지 외면하고 싶던 목소리 때문에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그 철창 안이, 그 안이 너무도 궁금해졌다.

때마침 관리인이 개들 줄 먹이가 없다며 텅 빈 짬통을 들었다. 통을 싣고 트럭에 오른다. 엔진의 요란한 소리가 산자락을 때린다. 비가오기 시작한다. 더욱 커지는 빗소리에 엔진 소리는 곧 묻힌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웃자란 잡초들 사이의 좁은 산길은 곧 진흙탕이 되었다. 굉음과 빗소리가 섞인다. 길에는 깊게 파인 구덩이가 생겨났다. 구덩이가 생기는 것보다 더 빨리 빗물로 채워졌다. 작은 호수들이 생겼고 금세 연결되어 큰 호수가 되어갔다. 그러곤 늪이 된다. 진흙은 장화 밑바닥에 달라붙는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더욱 내린다. 빗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숲 속 한가운데에 나는 장화를 신고 엉거주춤 서 있다. 한 발짝 움직이자마자 미끄러져버린다. 넘어질 뻔했지만 다른 발로 중심을 잡는다. 빗물이 눈 속으로, 귓속으로 스며든다. 가만히 서 있다가 땅을 향해 몸을 맡긴다. 진흙탕 물이 튀어올랐다가 온몸을 향해 달려든다. 저절로 눈이 감겼고 찰나의 순간 동안 눈물이 나온다. 눈썹에는 누런 물이 묻어 있고 역시 찰나의 순간에 빗물에 의해 씻겨나간다.

몸을 일으키자 개들이 보인다. 철창 우리들이 더욱 가까이 다가와있다. 더 큰 비가 올 것 같다고 저 멀리서 관리인이 소리치는 것이 어렴풋이 들려온다. 꿈결인가. 길게 자란 잡초들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빗방울은 땅에 흡수되지 못하고 튀어 올라와 나를 공격한다. 비를 피하려고 움직이지만 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신에 달라붙는다. 철창 안은 어떻게 생겼나. 오히려 지금 이곳보다 아늑하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개보다 못한 놈이다. 철창에 갇힐 자격도 없는 놈이다. 우리의 자물쇠들을 하나씩 풀기 시작한다. 개들이 한 마리씩 나오며 나와 같이 비를 맞는다. 수십 마리의 개들이 내 주변에 모인다. 순간 따뜻하다는 생각이 든다. 손을 내민다. 따뜻함을 더 느끼고 싶다. 개들이 점점 더 몰려든다. 손가락을 물린다. 하나도 아프지 않다. 아무런 고통도 없다. 나는 애초부터 여기에 없다. 나는 한 번도 어느 곳에 있었던 적이 없다. 번개가 내리친다. 천둥이 친다. 농장의 모든 개들이 나에게 달라붙어 있다. 개들과 교감할 수 있어 기쁘다. 개들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이빨이 내게 박힌다. 내 피가 그들에게 뿌려진다. 그리고 세찬 비에 곧바로 쓸려 사라진다. 천천히 가장 깊은 곳의 철창으로 걸어간다. 개들도 따라오다가 하나둘 물러났다.

자물쇠 하나를 푼다. 두 번째 자물쇠는 길고 무거운 쇠사슬로 묶여 있다. 하나하나 인내심을 가지고 풀어나간다. 저 깊은 곳에서 푸른빛이 보인다. 개의 안광이다. 커다란, 정말로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크기다. 마지막 자물쇠를 풀고 철창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을 뻗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팔을 흐느적거린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휘두른다. 퍼덕거린다. 손가락 끝에 차가운 것이 느껴진다. 침 같은 것. 차갑고 끈적끈적한 침. 손가락 한 마디씩 먹혀간다.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자 내 몸에서 털이 나기 시작한다. 뼈가 바스러지고 있다. 갑자기 이빨이 커다랗게 쑥 자라난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햇빛이 났다. 빛이 나를 지나 철창 안을 비춘다. 마침내 가장 깊은 철창 안이 보인다. 나는 잠시도 쉬지 않고 소리를 지른다. 우리 가장 깊은 어둠속에서 내가 소리를 지르고 있다.

나는 잠시도 쉬지 않고 비명을 질렀다. 멈추지 않고 계속 소리친다. 목이 아플 정도로 길게 울부짖는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돌 던지기를 계속한다. 시큼한 하천의 냄새가 밀려 들어온다. 간절한 울음에도 상관없이 돌은 날아온다. 눈을 감았다 뜨자 집채만 한 돌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그 돌은 더욱 커져서 지구보다 더 커진다. 지구보다 더 커진 돌은 곧바로 우주보다 더 깊고 더 검으며 더 거대한 것이 되어 다가온다. 너무도 두려워 눈길을 돌리자 개천 위에 아이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눈이 마주치자 그 아이는 많이 놀랐는지 곧바로 뒤돌아 마구 달리기 시작한다. 아이의 발자국 소리가 크게 개천을 따라 울린다. 계속해서 울린다.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멀리멀리 퍼져나간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제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윤성훈

기획연재 - 손바닥문학상
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황구
총각슈퍼 올림언젠가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오
글이 가본 적 없는 삶의 현장이 더럽고 치사하고 아름다운 세상이여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제4회 손바닥문학상 -‘나’를 꼬아 논픽션이 픽션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
당신의 인생이 곧 소설입니다너에게 사탕을 줄게


전광판 인간 [2013.12.09 제989호]
[손바닥문학상] 제5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작
   싸이월드 공감 
배우가 극중 여자에게 예쁘다고 하는 말은 거짓이다. 전광판에 [너! 못생겼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여자의 눈에는 전광판이 보이지 않지만 관객은 전광판을 보고 깔깔거릴 수 있었다. 원장님의 특별 지시로 서울 대학로의 연극을 보러 갔었다. 연극의 제목은 ‘전광판 인간’이었다. 녹색말을 먹으면 몸이 초록색으로 변하는 물벼룩처럼, 생각이나 느낌이 가슴팍에 달린 전광판에 드러나, 속마음을 속일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돌아오는 길에 승합차에서 원장님과 기사 아저씨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사 아저씨는 자기 아내의 가슴팍에도 전광판이 달려서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봤으면 좋겠다고 했고 원장님은, 죽을 때까지 같이 살 사람인데 관심을 갖고 살피다보면 언젠가 전광판이 짠 하고 나타날 거라고 했다. 원장님은 전시장 한 곳을 들러서 가자고 했다.

전시장 내부는 조용했다. 많은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벽면마다 새로운 벽이 튀어나와 있는 구조여서 미로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전시된 사진들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세계인들의 생활상이 담겨 있었다. 흑백사진이라 인물들의 모습이 낯설어 무척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아프리카의 난민, 돌을 채취하는 어린이들, 전쟁에 지친 젊은이들의 모습이었다. 내가 탄 휠체어를 밀어주던 기사 아저씨는 놀랍다는 듯, ‘세상에!’란 말을 반복하며 관람했다. 감상을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인데, 나에게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저만치 서 있는 원장님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지구상에는 힘들게 사는 이들이 정말 많은 것 같다”는 말을 건넸다. 원장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음 사진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내 가슴팍에 걸린 전광판으로 [맞아요! 아저씨! 그런 것 같아요!]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내겐 전광판도 없을뿐더러, 아저씨는 내가 뭔가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심지어 손가락까지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상지원으로 돌아가는 길, 기사 아저씨가 원장님에게, 은정이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왜 데리고 왔냐고 물었다. 혼자 두기 그래서 데리고 왔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덧붙였다. 은정이가 아무것도 모르는지, 뭔가를 아는지 아무도 모르지 않냐고.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는 것은 그저 우리의 짐작일 뿐이라고 했다.

내게 있어 이 세상은, 활발히 움직이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훌륭한 전시장이다. 그렇게 된 지는 19년이 되었다. 사실 그건 태어난 지 19년이 되었다는 뜻이고 내가 세상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하고, 나의 정체성을 관람자로 규정지은 지는 10년가량 되었다. 9살까지의 삶은 내 기억에 없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이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했을 땐 이미 많은 것이 늦은 상태였다. 나는 상지원이란 곳에 있었고, 사회복지사들이 나를 돌보고 있었다. 전광판처럼 생긴 네모난 텔레비전을 통해 세상을 구경하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블랙>이라는 인도 영화에서, 말도 못하고 들을 수도 없는 시각장애아가, 손으로 만졌던 물렁한 액체에 ‘워터’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감격처럼, 나도 내가 존재하는 세상에 정자와 난자가 있고, 양수가 있고, 탄생이 있고, 가족이 가족을 버릴 수도 있으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나를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구경꾼의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내 전광판에는 숱한 말들이 쓰여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들어왔다. 요즘 들어 살이 많이 빠져서 오늘따라 말라 보이기까지 한다. 얼굴은 초췌한 반면 눈은 울었는지 퉁퉁 부어 있다. 목에 걸친 분홍색 앞치마에는 아이들을 씻기거나 먹이면서 묻었을 비눗물 자국과 김칫국물 얼룩이 선명하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내 머리통을 한 대 후려갈기더니 텔레비전 앞에 앉아 리모컨으로 채널을 빠르게 돌렸다.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이 없는지 텔레비전을 끄고 다가와, ‘씨발!’ 하고 조용히 속삭였다. ‘존나 짜증나!’라고 좀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내 머리통을 한 번 더 세게 내리치고는 방을 나갔다.

그녀의 나이는 27살. 집은 인천. 가족은 아버지 한 명이다. 평소 멋 부리기를 좋아하고 화려하게 화장하는 것을 즐긴다. 상지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한 지는 4년 정도 되었고, 그사이 그만둔다고 사직서를 냈다가 번복하기를 반복했다. 내가 있는 건물인 소망동의 4호실을 맡은 그녀가 주로 하는 일은 밥 먹이기, 청소하기, 아이들 씻기기 등이다. 그녀가 즐거운 표정으로 일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사회복지사들과 희희낙락 즐겁게 수다 떠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출근 시각을 지키지 못해 매번 지각했다. 퇴근 시각이 되면 하던 일도 마무리하지 않고 화장부터 진하게 했다. 근무할 때 입은 흰 티와 검은 바지, 분홍색 앞치마를 내팽개치고, 입고 왔던 미니스커트와 가슴 윤곽이 드러나는 쫄티로 갈아입고 잽싸게 나갔다. 다른 사회복지사들은 그녀가 없을 때 흉을 자주 봤다. 그녀가 잘리고 새로 사람을 뽑았으면 좋겠다고


상지원은 서울 노원구에 위치한 중증장애시설이다. 지적장애, 지체장애, 다운증후군, 복합장애아들이 소망동에 있고 마당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희망동에는 간혹 짐승처럼 울어대는 자폐아들이 거주한다. 4호실 아이들 장애의 특징을 텔레비전을 통해 배웠고 힘겹게 외워두었다. 미성숙한 뇌의 비진행성 손상으로 야기된, 운동과 자세의 장애. 나를 비롯해 이 방의 아이들은 딱딱해진 육체의 형무소에 갇혀 산다. 가끔 상상하곤 한다. 쇼생크 교도소의 벽을 숟가락으로 파서 도망쳐나온 그처럼 나도 육체로부터 탈출을 도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척수가 있는 험하고 어두운 길목을 따라 손톱으로 야금야금 파여진 척추의 구멍을 통해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것이다. 자유로워진 나의 영혼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짙은 화장을 하고 나간 그녀의 뒤를 쫓는 일이다. 노원구에서 인천까지면 꽤 먼 거리인데 지하철에서 주로 무엇을 하는지, 그의 집은 어떻게 생겼고, 혼자 있을 때는 무엇을 하는지, 남자친구와 있을 때만큼은 해맑게 웃는지 확인하고 싶다. 영혼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몸까지 자유로워진다면 분위기 있는 근사한 커피숍에 앉아 그녀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맞장구를 쳐주고 싶다.

잠을 자던 5살짜리 뇌성마비 아이, 성일이가 눈을 떴다. 먹고 자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방 아이들. 본능대로 먹고, 기계처럼 잠을 잘 뿐이다. 성일이가 일어났다는 것은 점심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녀와 다른 사회복지사 한 명이 큰 쟁반에다 밥과 컵, 물병과 양치 세트를 들고 들어왔다. 맨밥에 당근·오이·호박·시금치 등의 삶은 채소를 다져넣고 달걀을 푼 다음, 참기름을 넣어 비빈 비빔밥이 이곳 장애아들의 주식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먹고 소화하고 싸는 일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주는 일보다 위대한 생존이라면 난 퇴보를 한 셈이다. 내 차례가 되었다. 그녀가 나를 모로 눕히고 내 입에 한 숟가락씩 밥을 넣어준다. 나는 누워도 무릎이 접혀 있다. 등 뒤로 뻗어 있는 팔 때문에 이 방의 다른 아이들처럼 천장을 향해 똑바로 누울 수가 없다.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눈알을 정신없이 굴리며 열심히 씹고 삼키는 나. 밥 먹을 때마다, 날 가졌던 그 여자를 떠올렸다. 그 여자의 젖을 빨아보긴 했을까.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보니 장애아 낳을 확률이 높은 산모는 모체 혈청 태아 검사, 융모막 검사, 양수 효소 검사 등 출산 전 특별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던데, 그 여자는 이렇게 좋은 검사가 있는 줄 알고 있었을까. 만약, 기형아 검사에서 아무 이상이 없어서 날 낳았다면 생후 몇 개월부터 괴물로 변하기 시작했을까. 그 여자는 지금 편안한지 궁금해졌다. 내가 씹고 삼키는 동안, 숟가락에 다음에 먹일 밥을 떠놓고 기다리는 그녀가 회전하는 나의 눈알을 노려보듯 응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1년 전 즈음이다. 의자에 앉아 자다가 나와 똑같이 생긴 아이가 내 몸 안에서 기어나오는 꿈을 꾸고 놀라서 눈을 떴다. 붉은 여명이 어둑한 밤을 몰아내고 있는 시각이었다. 4호실의 아이들은 기척도 없이 자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몸속 은밀한 곳, 길고 어두운 구멍에서 뭔가 질척한 것이 흘러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혹 꿈에서처럼, 나와 똑같이 생긴 아이가 기어나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아이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다시 집어넣어야 할까를 상상했다. 아이가 나오기 전에 염산이라도 마셔 녹여버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다가 갑자기 얼마 전에 본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바람나서 딴 남자를 따라가는 주제에 그것도 양심이라고 아직 어린 딸을 위해 생리대를 한 박스 사주고 가던 여자.

가끔 상상하곤 한다. 쇼생크 교도소의 벽을 숟가락으로 파서 도망쳐나온 그처럼 나도 육체로부터 탈출을 도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척수가 있는 험하고 어두운 길목을 따라 손톱으로 야금야금 파여진 척추의 구멍을 통해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것이다. 자유로워진 나의 영혼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짙은 화장을 하고 나간 그녀의 뒤를 쫓는 일이다.

“은정이가 생리를 하나봐, 어떡해!”

목욕을 시키기 위해 기저귀와 팬티를 벗기던 그녀가 기겁을 했다.

“기저귀 갈아주는 것도 힘든데, 한 달에 한 번씩 이걸 어떻게 뒤처리해주냐고, 미치겠네!”

나도 사람이라고 설마 생리를 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그 단어를 듣자 소름 끼치도록 두려웠다. 초경, 피, 여자, 강간, 임신, 기형아…. 소용돌이치던 내 눈알이 N극과 S극이 만났을 때처럼 ‘착!’ 하고 멈췄고 때마침 눈 주위를 씻기던 그녀의 시선이 화살처럼 내 눈에 꽂혔다. 흠칫 놀란 그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녀가 같이 목욕을 시키던 1호실 사회복지사에게 물었다.

“은정이, 뇌병변 맞지?”

“어, 1급이잖아, 이 정도면 특특특 1급인 셈이지.”

“뇌병변이면 머리부터 맛이 간 거잖아. 전신마비가 뇌기능 이상 말고 다른 원인도 있나?”

“없지. 그렇다고 뇌의 전부가 파괴된 건 아니지 않을까?”

생리. 나를 가두고 있던 감옥의 새로운 변화였다. 딱 붙어버린 허벅지와, 종아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퍼진 채 접힌 무릎이 내 하반신이다. 단 한 번도 서보지도, 걸어보지도 못한 내 하체. 상반신은 더 압권이다. 양팔은 새가 비상하기 위해 뒤로 날개를 활짝 펼친 것처럼 등 뒤로 쭉 뻗은 모양을 하고 있다. 머리는 목을 기준으로 30도 정도 기울어져 있고, 입술 역시 삐뚤다. 눈알은 초점 없이 미친 듯이 돌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 눈을 피한다. 정면으로 볼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를 새롭게 인식했을 때, 놀랐을 때, 무엇보다 내 뜻과 의지를 선명하게 밝히고 싶을 때 눈알이 일순간 멈춘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텔레비전으로 이 세상을 배우고, 알아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목욕을 다 시킨 그녀가 나를 4호실로 옮기고 내 앞에 전신거울을 세우고 말했다.

“한번, 봐.”

어딘가에서 숨죽이고 살면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래그래 네 말이 맞아!’ 하고 맞장구쳐주고 있을 ‘아빠’란 사람이, 꽁꽁 언 저수지에서 썰매를 탄 나를 뒤에서 힘껏 밀어준다면 거울에 비친 이 모습으로 씽씽 달리지 않을까? 내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집요하게 내 눈알을 관찰하며 한참 동안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너, 내 말 다 들리지? 너, 정신은 멀쩡하지?”

그날 이후,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더 이상 밥만 축내는 식충이로 취급하지 않고 ‘사람’으로 대접해줬다. 아직은 일방적이긴 해도 첫 소통의 감격을 준 그녀가 나를 의식하고 처음으로 한 행동은 뜻밖의 것이었다. 점심 먹은 뒤, 2시부터 4시까지는 낮잠 시간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4호실에 들어와 방문을 잠그고 이상한 짓을 했다. 이 방의 아이들은 점심을 먹은 뒤 2시경이 되면 알람을 맞춰둔 로봇처럼 잠이 들었다. 잠이 별로 없는 나는 그 시각, 꺼진 텔레비전에 비친 나의 실루엣을 쳐다보며 침묵의 시간을 견디곤 했다. 그녀가 처음 그 행위를 할 때는 도무지 무슨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지 속으로 손을 넣고 미간을 찌푸린 채 뭔가에 집중하더니 ‘아버지!’ 하고 읊조렸다. 그 행위가 끝나면 내 쪽으로 와서는 ‘미안’ 하고 나갔다.

어느 날은, 나를 앉혀놓고 실눈으로 째려보며 말했다.

“너, 여기 어떻게 왔는지 알아? 원장님이 그러는데, 니네 부모가 여기다 버리고 갔대. 니 부모는 니가 여기에 있는 걸 안다는 얘기지. 원장님한테 물어보니까, 니 부모는 한 번도 여길 찾아온 적이 없대. 어디서 얘길 들으셨는데, 널 버리고 나서 딸을 둘인가 낳고 아주 잘 살고 있대. 널 이렇게 낳은 건 니 부모들인데, 책임도 안 지고 지네들끼리 하하호호 하는 거 생각하면 열받지 않니? 아니다, 그보다 니가 이런 몸으로 태어난 게 원통해죽겠지? 1호실 정민호 알지? 얼마 전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음료수 캔처럼 굴러다니는 애. 민호는 말이라도 하고, 발가락이라도 쓰잖아. 넌 어째 아무것도 못하는 애로 태어났니? 난, 말이야, 널 보면 내가 얼마나 행복한 인간인지 깨닫고 매일매일 감사하게 돼. 난 걸을 수도 있고, 먹고 싶은 것을 골라서 먹을 수도 있고, 사랑도 할 수 있고, 여행도 갈 수 있어. 와~ 누군가를 약 올리는 게 이런 재미구나, 스트레스가 다 풀린다. 내 직업이 정말 스트레스가 많거든. 대부분의 시간을 너 같은 비정상을 보면서 사는 게 얼마나 고역인데. 아! 살 것 같다. 누구나 이렇게 쏟아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데, 그럴 대상이 없어. 왜냐면 사람들은 다 가식적이거든. 속 이야기를 안 하거든. 흉잡힐까봐.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남의 이목이거든~!”

그녀는 거의 빠지지 않고 낮잠 시간마다 나를 찾아왔다. 문지방 옆에 정물처럼 앉아 있는 나를 텔레비전 화면 가까이 끌어다놓고 포르노를 틀어놓거나, 따가운 햇볕이 방 안 깊숙이 들어온 지점에 앉혀놓고 내 눈동자가 멈추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관찰했다. 내 윗도리를 벗기고 가슴을 만지거나, 내 팔에 빨래를 널어놓기도 했다. 기울어진 내 머리를 억지로 세우려고 힘을 주기도 하고, 자기 머리카락을 뽑아 내 콧구멍을 간질이기도 했다. 자고 있는 성일이를 깨우고는 일으켜 니은자로 앉혔다. 몸을 못 가누는 성일이는 이내 칼등으로 세워진 낫처럼 쿵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내 눈알이 멈추는지 확인하면서 그 행동을 반복했다. 웃는 표정으로 안면근육이 마비된 성일이는 디딜방아처럼 쿠쿵, 팍, 쾅, 효과음을 내며 넘어졌다. 그녀가 물었다.

“내가 성일이 괴롭히면 어때? 마음 아파? 너도 감정 있어?”

나는 그녀가 궁금했는데, 그녀는 내게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사실 사람들의 ‘생로병사의 비밀’보다 ‘희로애락의 비밀’이 알고 싶었다. 사지 멀쩡해서 감사하다는 그녀가 느끼는 행복감, 도대체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최근 나는 그녀의 진짜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일주일 전, 오전 10시경. 청소 시간이라 소망동에서 생활하는 모든 장애아들이 거실로 불려나오거나 끌려나와 자기들만의 몸짓과 괴성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때, “보라, 이년 어딨어!” 소리치며 험상궂은 남자가 들어섰다. 억센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고, 자글자글한 주름이 많았다. 낡고 허름한 베이지색 면바지에 가로줄 무늬가 들어간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의 머리는 산발이었다. “보라, 너 어딨어! 빨리 못 나와!” 고성이 계속되자 다운증후군 아이들 중 어린 애들이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다.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1호실을 청소하던 사회복지사가 뛰어나와 “무슨 일이시죠?” 하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남자는 “필요 없고! 보라, 이년 여지. 나오라고 그래!” 하면서 처음보다는 더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4호실에서 그렁그렁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공포에 떠는 얼굴로 걸어나왔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남자의 종아리에 매달렸다.

“잘못했어요!”

“니년이, 애비 돈줄을 막아? 돈 내놔!”

남자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녀가 뒤로 자빠지자 남자가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이때 민호가 남자의 발치까지 최선을 다해 굴러가 입으로 바짓가랑이를 물고 흔들었다. 흠칫 놀란 남자가 징그러운 벌레를 떼어내듯 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그 바람에 민호가 패브릭 소파 쪽으로 나가떨어져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고 둥근 베개처럼 뒹굴었다. 그녀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서 남자의 어깨를 뒤로 밀치며 소리쳤다.

“그래! 내가 카드 다 막았고, 돈 다 숨겼어! 내가 돈 버는 기계야? 내가 당신 도박 돈 대주는 돈줄이냐고!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여기서 나가! 당장 나가, 경찰 부르기 전에! 나가라구! 아악!”

누가 알렸는지, 현관문으로 원장님이 들어섰다. 여스님이신 원장님은 흥분한 그녀의 두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침착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표정을 보이고는 남자를 향해 낮은 톤으로 점잖게 말했다.

“아버님, 사무실에 가서 말씀하시죠. 아시겠지만, 이곳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달리 매우 예민합니다. 안정이 필요한 아이들이구요. 사무실 한쪽에 자리를 마련했으니 그쪽으로 가서….”

남자는 원장님의 권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말 잘했네, 여기 애들? 이 병신들이 뭘 알아? 당신, 이 애들 장사해서 한 달에 얼마나 벌어? 어마어마하게 벌지? 기부금과 후원금이 장난 아니라면서? 그 돈 어디다 빼돌리는 거야? 내가 다 조사해봤어, 당신 재산이 수십억이던데, 우리 딸아이 하루 14시간씩 근무해서 벌어오는 돈이 얼만지 당신, 잘 알지? 그렇게 부려먹고, 꼴랑….”

그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원장님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풀고 제발 그만하라고 외치며, 남자의 손목을 잡아당기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사라진 그녀는 그날 상지원에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원봉사자가 먹여주는 점심을 먹었고, 낮잠 시간엔 나를 가장 괴롭히는 고문기술자 ‘시간’과 마주해야 했다. 그녀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너만 보면 재수가 없어! 넌 사람한테 받은 상처가 없잖아. 너한테 일어난 일이 사람의 사악함, 그것도 나를 가장 사랑해야 하는 사람의 사악함 때문에 일어난 건 아니잖아. 네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나에게는 숱하게 일어났어, 아버지가 친딸을 건드리는 게 뭔지, 니가 알아?”

3일 만에 출근한 그녀의 얼굴은 형편없었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움푹 들어가 꺼져 있었고 짙은 그늘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눈은 포식자에게 잡힌 동물의 눈처럼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씻기기 위해 소매와 바짓단을 걷어 올렸을 때, 군데군데 검고 푸른 멍 자국이 넓게 퍼져 있는 것이 보였다. 1호실과 3호실 사회복지사가 나누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가 상지원을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원장님이 만류했다고 한다. 1호실 사회복지사는 그녀의 아버지가 원장님에게 그녀를 자르면 가만 안 두겠다고 협박한 것 같다고 추측했다. 낮잠 시간에 그녀를 기다렸다. 내가 그녀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성일이가 까무룩 잠에 빠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방문 손잡이의 잠금 버튼을 누르고 문을 잠갔다. 발을 쭉 뻗어 이제 막 잠들려는 아이들을 한쪽 구석으로 몰더니 나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넓게 펴 내 얼굴을 거칠게 때렸다.

“난, 너만 보면 재수가 없어! 넌 사람한테 받은 상처가 없잖아. 너한테 일어난 일이 사람의 사악함, 그것도 나를 가장 사랑해야 하는 사람의 사악함 때문에 일어난 건 아니잖아. 네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나에게는 숱하게 일어났어, 아버지가 친딸을 건드리는 게 뭔지, 니가 알아?”

그녀가 발로 나를 걷어찼다.

“엄마가 바람나서 집을 나갔어. 남자가 더 좋아서 딸까지 버리는 거지. 술로 지내던 아버지가 날…. 넌, 부모란 작자들이, 너처럼 삐꾸가 아닌데도 지 자식을 버리거나, 욕보이거나, 이용한다는 거 모르지? 넌, 그래도 널 내다버린 부모를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나? 넌, 고장 난 인간이니까, 쓰레기니까….”

그녀가 기울어진 내 목을 강제로 꺾었다.

“도박에 미친 아버지는 날 술집에 보내려고 했어. 겨우 고등학생인 나를…. 난 아버지를 피해 가출했고, 공동체라는 곳에서 고아처럼 먹고 자야 했어.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아르바이트를 해 졸업하고 취직을 했는데 그 인간이 귀신같이 찾아냈어!”

그녀가 나를 발로 세차게 밀어, 머리가 장롱 하단 모서리 부분에 처박혔고 얼굴이 바닥에 쓸렸다. 내 양발과 두 팔이 천장을 향해 솟구쳤다.

“아버지가 날 가두고 때렸어! 난 매일 맞고 살아, 맞기만 하면 좋게? 내가 버는 돈은 아버지 빚 갚는 데 한 푼도 안 남기고 꼴아박히고 있어. 이제 아버지 빚은 내가 평생 갚아도 못 갚을 지경이 됐어.”

그녀가 자기 발을 내 엉덩이에 얹고, 세게 밀었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정수리 부분이 수차례 장롱에 부딪혔다.

“넌, 걸어다니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은 다 행복한 줄 알지? 사는 게 형벌인 나 같은 사람도 있어!”

그녀가 발로 나를 옆으로 넘어뜨리려는 순간, 밖에서 민호 목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발로 잠긴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선생님, 여기 계세요? 원장님이 사무실로 오시래요!”

그녀가 나의 옆구리를 발로 있는 힘껏 밀었다. 옆으로 넘어지자 장롱 맨 가장자리에 길게 세워져 있던 옷걸이가 쓰러져 내 몸을 덮쳤다. 좀 전에 그녀가 아이들을 발로 쭉 미는 바람에 다른 아이들 틈에서 비스듬히 누워 있던 성일이가 잠에서 깨어 웃는 얼굴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이후 3일간, 나와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오전에 하지 못했던 청소를 하기 위해 사회복지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오전에 그녀가 원장실로 불려갔다고 한다. 그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원장님과 자주 면담을 하는 눈치였다. 이번엔 심하게 다툰 모양이었다. 짐작하기를 좋아하는 1호실 사회복지사는, 그녀가 드디어 잘린 것 같다고 했고, 옆에 있던 3호실 사회복지사는, 원장님이 그녀의 아버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것 때문이라고 했다. 원장실에서 나온 그녀가 주방 식탁에 엎드려 한참을 우는 바람에 청소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4호실과 거실을 청소하기 위해 왔다갔다 하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은 좀 전에 밥을 먹이며 내 눈을 노려보듯 응시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뭔가를 결심한 듯 사기충천해 보였고, 심지어 씩씩해 보이기까지 했다. 청소가 끝나자 네 명의 사회복지사들은 자기가 담당하는 아이들을 한 명씩 소속된 방으로 옮겼다. 덩치가 가장 큰 나는 맨 나중에 옮겨진다. 내 주변을 맴돌던 민호마저 발가락으로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을 끄고 들어갔을 때, 그녀가 한쪽에 세워진 휠체어를 펼쳤고 다른 두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나를 앉힌 뒤, 아무 말 없이 현관문을 나섰다.

나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온 그녀는 휠체어를 밀며 마당을 한 바퀴 돈 후에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상지원은 산 중턱을 깎아 건축되었기 때문에 언덕에 위치했다. 정문을 나서면 포장된 도로가 나오는데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다. 외진 곳이라 사람들의 발걸음도 뜸했다. 그녀가 말했다.

“은정아? 이 비탈길, 속 시원하게 내려가보고 싶지 않니?”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멈춰선 그녀는 휠체어를 앞으로 밀었다, 뒤로 당겼다 하면서 가속을 붙이기 위해 반동을 줬다. 휠체어가 그녀 쪽으로 당겨졌을 때 등 뒤로 뻗은 팔을 이용해서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나의 손은 공허하기만 했다. 휠체어가 그녀의 몸에 부딪히나 싶더니 다시 앞으로 확 밀렸을 때 그녀가 손잡이를 놓았다. 어떻게 하든 그녀의 옷자락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내가 붙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휠체어에 앉은 나는 미끄럼 방지를 위해 홈이 파인 우둘투둘한 포장도로를 따라 덜덜거리며 내려갔다. 내 눈알이 바늘에 찔린 듯 놀라서 정지했고, 내리막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정신없이 찾았다. 오른쪽으로 약간 휘어진 경사로 끝에는 시내버스들이 다니는 차로가 있었다. 휠체어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내려갔다. 비틀어진 머리, 뒤로 뻗은 팔, 비굴하게 꿇려 있는 무릎. 어딘가로 돌진하기 위해 태어난 몸처럼, 내 몸은 지금의 하강과 무척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휘날려 시야를 가리기도 했다. 내려가는 데 속도가 붙을수록 내 몸은 휠체어에서 분리되려 했다. 이번에는 발바닥을 이용해 휠체어의 각 옆면에 몸을 붙여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휠체어에서 벗어나 거친 노면을 따라 구른다면? 차들이 다니는 대로까지 굴러간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끝장? 이렇게 끝장? 처음으로 ‘벼랑’이라는 지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살고 싶었다. 공허한 내 손 못지않게 발도 허무하긴 마찬가지였다. 난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과속방지턱이었을까, 쿨렁하고 바퀴가 뭔가에 세게 부딪혔고 내 몸은 공중으로 붕 솟아올랐다. 스키점프를 하듯 활강하는 나. 나의 전광판에 [그래도 한 명쯤은]이란 붉은 문구를 피 토하는 심정으로 썼다.

나풀나풀거리는 노란 나비가 큼지막하게 박힌 하얀 원피스를 입고 4호실을 나섰다. 성일이와는 이미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하고 나오는 길이다. 길고 좁은 복도를 지나 거실에 서서 한 바퀴 빙 돌았다. 원피스가 나팔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활짝 펴졌다. 거실과 연결된 주방에 처음으로 들어가봤다. 사회복지사들이 늦은 점심을 먹고 있다. “은정아, 오늘 기분 좋아 보이는구나, 어디 가니?” “네~, 약속이 있어요!” 나는 유쾌하게 대답을 하고 나와, 2호실과 3호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한창 낮잠 중인 아이들 볼에 일일이 입맞춤을 했다. 마지막으로 1호실로 들어가 민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 손은 더 이상 밭고랑을 갈 때 쓰는 농기구처럼 흉측하거나 뻣뻣하지 않았다. 1호실 방을 나와, 다시 거실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고 하이힐을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마당을 지나 정문을 통과하고,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와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자바 칩 프라푸치노’를 주문했다. 음료를 받아들고, 햇볕이 잘 드는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가벼운 발걸음의 행인들을 내려다봤다. 고개를 들어 실내를 둘러봤다. 저쪽에서 걸어오는 하얀 여자. 엄마 같은데…, 엄마 같아…. 나라고 엄마가 쉽게 용서되는 건 아니야…, 그래도 보고 싶어…. 기대감에 부풀어 언젠가 그녀가 맛보라며 입에 넣어준, 처음으로 맛보았던 커피 음료를 빨대로 쭉 빨았다. 하얀 여자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였다.

정신이 들었다. 입 안에 침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가 고여 있는 것 같았다. 무심한 내 몸뚱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감각하게 길 위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언덕에서 그녀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얼굴을 하고 나를 향해 최선을 다해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못되고 추한 그녀, 쌍스럽고 악랄한 그녀, 그러나 한없이 가여운 그녀.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언니, 괜찮아?]

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내 곁으로 왔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내달렸는지 가쁜 숨을 연신 내뱉었다. 헉헉대며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에 대고 있어 처음으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행성처럼 돌아가는 내 눈동자에 붉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이 사진처럼 박혔다. 그녀는 한참 숨을 고르고는 울먹거리며 나를 일으켜세우고 말했다.

“널 죽이고 싶었어! 니가 싫어! 널 보면 나를 보는 거 같아. 넌 왜 이렇게 태어나서 이 지경으로 살고 있는 거야!”

나는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 검지를 뻗어 그녀의 허벅지를 긁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 휠체어를 바르게 고정하고 “뭐야? 너 손가락 움직여?” 하며 나의 열 손가락을 하나씩 테스트했다. 나는 검지를 계속 꼼지락거렸다.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을 폈고 나는 거기다 이렇게 썼다. 살어.

그녀가 주저앉아 내 허벅지를 잡고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나는 눈알을 굴리며 그녀의 절규를 가만히 들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우리 뒤로 차량들이 지나가는 소리와 행인들의 수군거림이 들렸지만 그녀의 울음소리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녀가 내 마음처럼 울고 있었다.

울음을 그친 그녀가 지나가는 이의 도움으로 나를 휠체어에 태우고, 있는 힘을 다해 밀어올렸다. 힘겹게 나를 마당 중앙에 데려다놓고, 구석에 있는 수돗가로 가서 꼭지를 틀고 호스를 든 채 솟구치는 수돗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 후에, 소망동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물이 든 유리컵과 숟가락, 물수건을 가지고 나왔다. 물수건으로 내 입가를 닦아준 뒤 숟가락으로 물을 떠서 내 입에 넣어줬다. 의식을 치르듯 조용조용 행하던 손놀림을 끝내고 휠체어를 마당 한편에 있는 벤치를 향하게 해놓고 자신은 그 벤치로 가서 앉았다. 그녀가 나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앙다무는가 싶었던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얼굴도 일그러졌다. 속울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무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향한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조금씩 떨리는 그녀의 몸. 벤치 가장자리를 잡았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때, 그녀의 전광판에 불빛이 들어왔고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쇳소리를 내며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몸부림을 쳤다. 소리 없이 흐느끼던 그녀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휠체어를 천천히 눕히며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하늘 본 지 오래됐지?”

내 시야에 파란 하늘이 들어왔다. 나는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 검지를 뻗어 그녀의 허벅지를 긁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 휠체어를 바르게 고정하고 “뭐야? 너 손가락 움직여?” 하며 나의 열 손가락을 하나씩 테스트했다. “오른손 검지 하나는 확실히 움직이는구나, 왜 몰랐을까” 했다. 나는 계속해서 검지를 꼼지락거렸고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할 말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검지를 계속 꼼지락거렸다.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을 폈고 나는 거기다 이렇게 썼다. 살어. 그녀는 내가 쓴 글자를 인식하더니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동글동글한 눈물이 맺혔다.

서주희


제6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작 [2014.12.08 제1039호]
[손바닥문학상]
   
■ 환호하고 토해내는 시간 속에서

당선작 <춘향이 노래방> 김광희

‘위닝 일레븐’이라는 축구게임을 종종 한다. 팀을 고르며 서로의 근황을 묻고, 골을 넣으면 상대방을 향해 소리친다. 경기가 끝나면 담배를 함께 태우며 농담을 나눈다. 그게 뭐라고 일주일에 몇 시간씩은 꼭 했다. 이유가 뭘까? 돌아보니 그렇게 시끄럽게 환호하며 안에 있는 것들을 토해내는 시간은 그때뿐이었다. 회사를 다녀보니 그랬다. 살아보니 그랬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그런 시간조차 부재했으리라. 15년도 넘게 지하에서 취객들을 맞이하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매일 밤 남의 고성방가를 듣는 건 어떤 느낌이었을까? 또 그 사람들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아 새벽마다 마이크에 대고 울부짖었을까? 무엇을 그렇게 토해내고 싶어서?

이것은 나의 어머니와 그들의 이야기다. 팔리지 않는 골동품처럼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온 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어쭙잖은 글솜씨로 감히 그녀의 무게를 가늠코자 했던 내게도 수고했다 다독여본다. 가능성을 믿어준 <한겨레21>에도 고개를 숙인다. 앞으로도 정진하겠다. 소설이든, 위닝 일레븐이든.

■ 움켜쥔 내 손바닥 안에 있던 사건들

가작 <문 밖에서> 이채운


회사일로 심란해 있던 밤, 손바닥문학상 수상 소식은 제게 한 줄기 단비 같았습니다. 그동안 손바닥을 펴볼 여유조차 없이 살았거든요. 얼마나 꼭 쥐고 있었던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손금도 몇 줄 더 생겼습니다. 이 소설은 <한겨레21>을 만나기 전까진 움켜쥔 제 손바닥 안에 있던 절대 잊을 수 없는 실제 사건들이었습니다. 단신으로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우리들 삶의 이면이었습니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 쓰면서 이쪽이나 저쪽, 어느 쪽 세상에서든 힘겨운 삶을 짊어진 그분들 영혼이 평안하기를 빌었습니다.

옹이로 박혀 있던 사연들을 풀어놓는 데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꿈만 꾸어왔던 글쓰기,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제가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준 언니와 형부 그리고 조카 부부와 아기들, 모두 사랑하고 사랑합니다.

■ 문학이 사회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가작 <아무것도 몰라> 장희원

‘시간 때우지 마라.’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버지는 늘 시간을 때운다고, 현실도피밖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문학이 사회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사람에게 끌리고 사회는 점성이 있는 것처럼 서로 뭉치고 흩어집니다. 그 속에 모두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그 이야기들을 다 건드려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손바닥문학상’은 누구나 다 ‘써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꼭 어떠한 권위의식이나 높은 위치 따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앞으로 끝까지 놓치지 않고 문학과 사회의 간극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더 치열하게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획연재 - 손바닥문학상
아무것도 몰라춘향이 노래방
제6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작참혹한 현실에서 빚어낸 구원의 순간
당신에게 보내는 ‘황홀한 응원’이 가을, 당신이 꽃피울 이야기들
‘당신의 발견’을 기다립니다상상하라, 심연을 보라, 불안에 지지 말라
쉽게 쓰는 세상, 쉽게 쓰이지 않는 글쓰기를차별과 편견 없이 들어줍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아무것도 몰라 [2014.12.15 제1040호]
[손바닥문학상] 제6회 손바닥문학상 가작
   
나는 모른다. 내 입에서 나는 구취와 살집이 붙은 내 뒷모습, 주름이 헐거워져 자주 벌어지는 항문 따위를 나는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무심코 거울을 자주 보게 된다. 그사이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모르는지 알게 된다. 나와 마주하는 사람이 얼기설기 남은 내 머리털을 보며 ‘불쌍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쪼그라든 고환을 볼 때마다 아내가 흠칫거리는 이유를, 그리고 어느덧 다 큰 딸은 자신만의 말(言)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요컨대, 나는 모르는 게 많은 사람이다.

나는 모르는 게 많지만 슬프지 않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약속과 사고(事故)와 당신들이 오고 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손에 쥔 게 없다. 가끔 길을 걷다 나와 같은 빈손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이 당신이든, 누구든 나는 그저 물끄러미 빈손을 바라본다. 고개를 올리는 순간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당신을 마주하게 될 것을, 나는 안다.

내 딸처럼 사람들은 말을 만들어낸다. 도시의 숨은 곳곳에서 각자의 말들이 작게 부르르, 부르르 떨고 있을 상상을 하면 어쩐지 덩달아 몸이 떨리곤 했다. 저기 나무의 싹이 나려다 얼어버린 잎에도, 그리고 그 나무 아래 횟집 수족관 안 돔에도 각자의 말이 있을 것 같다. 물고기가 똬리를 틀며 말을 뱉어내는 순간, 비릿한 내가 코를 찌를 것 같다.

예쁘게 나온 초밥을 연신 찍어대는 선을 보며 뭐하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선은 식탁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 자판을 꾹꾹 눌렀다. 자기가 찍은 사진을 올리는 듯했다.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든 선이 만든 말은 그렇게 둥둥 도시 어딘가에서 떠다닐 거였다. 나는 선의 정수리를 보며 묵묵히 초밥을 씹었다. 구청장이 된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매일 구청에 나와 사람들과 점심 한 끼 먹는 것이 내 일이 될 줄도 몰랐다. 고만고만한 작은 지방시지만 그래도 구의 장인 만큼 내 어깨에 무언가 묵직하게 얹혀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저 선임을 ‘본’ 것밖에 없었다. 근무시간에 자고 있는 선임의 벌어진 컴컴한 입안과 진득하게 묻어나온 침 따위를 봤다. 선임은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영민한 아이 같았다. 실제로 그는 키가 작아 아이 같기도 했다. 허가를 받으러 온 건설업자들에게 받은 배즙이나 도라지즙 같은 것을 쪽쪽 빨아먹으면서 발을 까딱까딱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왠지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약삭빠른 사람답게 그는 무언가 받아먹고 또 받은 걸 쓸 줄 알았다. 도저히 허가를 내릴 수 없는 건물자재나 크기, 공유지 침입 같은 것이 쉽게 이뤄졌다. 실제 측정보다 작게 그려진 설계도를 보면서 나는 묻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는 늘 사람이 모였다. 어느 날 그가 부인이 아닌 여권과에 있는 여자의 손을 잡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을 볼 때도 있었다. 나는 ‘보는’ 사람이지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선임은 어느덧 알아주는 인사가 됐다. 작은 키에 맞지 않게 배가 나오고 재규어 랜드로버를 몰고 다녔다. 그가 지방선거에 나왔을 때도 나는 그에게 투표했다. 시장이 된 그와 고운 그의 아내가 나에게 밥을 사기도 했다.

“고마워.”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입에서 단내가 났다. 그는 나를 구청장으로 지목했다. 나는 얼떨떨하게 발령받았다. 아내는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갓 고등학생이 된 딸도 잠시였지만 날 보는 눈빛이 달랐다. 한참 지랄을 하던 딸이었다. 빤한 반항과 빤한 상처들이 오고 갔다. 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새끼였다. 내가 잘나서 된 게 아니었다. 누구나 그랬다. 모두들 선임이 뒷돈을 받고 공정하게 일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굳이 선임이 아니어도 그랬다. 누군가는 몰래 예산을 훔쳤고 청소를 하지 않았고 회식에서 도망갔다. 서로 부적절한 애인이었고 늙은 부모를 길에다 버렸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 거대한 관대 앞에서 나는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홀로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입을 벙긋거린다. 말하고 싶다. 평생 이 자리에 앉아보기만 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눈 같다. 거대하고도 툭 튀어나온 동공. 팽창된 눈알은 뒤룩뒤룩 여기저기를 본다. 홍채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며 조리개를 맞춘다. 부푼 눈알은 시큰한 듯 몸을 떤다. 나는 끔뻑거린다.

밥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선은 영양드링크와 초콜릿을 함께 내왔다. 드시면서 하세요, 라고 말하는 선이 밉진 않다. 하지만 저 깊이, 아랫배에 주먹만 한 돌 하나가 박혀버린 것 같다. 대장에서 꼼짝도 못한 채 장을 막아버려 그 주위에 흐르지 못한 음식물이 썩어갈 것 같다. 나는 썩은 물이 고인 장을 생각하면서도 초콜릿을 집는다. 선은 내 딸보다 여섯 살이 많다. 처음 봤을 때 선은 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근사근한 성격이 딸과는 달랐다. 이것저것 챙겨주기를 좋아하고 꼼꼼하기도 했다. 복사기에 종이가 떨어지지 않게 항상 종이를 채우고 할 필요가 없는 비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늘 웃는 낯으로 사람을 대했다. 민원봉사과에서는 그녀가 찾아오는 손님들을 붙잡고 수다를 떤다고 흉을 봤다. 시간이 많고 사람이 고픈 노인네들이 찾아와 하루 온종일 앉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녀는 그런 노인들의 말상대를 했다. 나는 내 딸이 그랬으면, 싶다. 적어도 웃는 낯으로 나를 봤으면 했다. 딸은 소파에 앉아 아내가 깎아준 과일을 먹고 있는 나를 보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배 봐. 먹고 싶어?”


“….”

“존나 똥 같아.”

딸은 소리 나게 방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멍하니 사과를 찍은 포크를 든 채 내 배를 내려다봤다. 여러 겹 접힌 것도 아닌 커다랗고 둥그렇게 동선이 있는 배였다. 아이를 품은 산모처럼 나는 둥근 배를 끌어안고 있었다. 정말 딸의 말대로 길가에 개가 누고 간 대변이라도 된 것 같았다.


“고마워.”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입에서 단내가 났다. 그는 나를 구청장으로 지목했다. 나는 얼떨떨하게 발령받았다. 아내는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갓 고등학생이 된 딸도 잠시였지만 날 보는 눈빛이 달랐다. 한참 지랄을 하던 딸이었다. 빤한 반항과 빤한 상처들이 오고 갔다.


딸의 말대로 살 좀 빼야 할까, 라고 묻는 말에 선은 아뇨, 귀여우세요, 하고 배시시 웃었다. 전 좀 살집 있는 남자가 좋던데…. 얼핏 예전 어렸을 때 본 딸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조그만 도시다. 그렇고 그런 상가가 있고 사람들이 있다. 도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리된 노선을 심어주었다. 잘 구획된 4차선 도로와 코너에서 우리는 어느 일정한 동선을 갖게 됐다. 우리는 그것에 안심했다. 왜 이곳에서 살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저 나는 살았다. 자연스럽게 아내를 만났고 아이가 생겼다. 사람을 먹여살리는 것은 꾸준하고도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는 벌어진 입안으로 무수히 음식들을 넣었다. 매끼 밥을 짓고 김치를 담그고 고기를 구웠다. 정말이지 나만 해도 끊임없이 먹었다. 자박자박하게 조린 돼지갈비나 씹히는 맛이 좋은 오이소박이, 갓 구운 과자나 케이크, 미어터지게 속을 넣은 오징어순대…. 딸은 새가 모이를 받아먹듯 입을 더욱 벌리고 더 달라고 애를 썼다. 무심코 아내가 여섯 살 된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내는 물 만 밥 위에 잘게 자른 김을 얹어 먹였다. 아이는 빼꼼히 입만 벌릴 줄 알았다. 그러곤 씹지도 않은 채 얼른 삼키고는 아내의 손을 뚫어지게 봤다. 무서웠다. 아내가 미처 다시 숟갈을 푸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제야 조금, 사람을 먹여살리는 일에 대한 무게가 느껴졌다. 갑자기 밥을 삼키는 목구멍이 콱 줄어드는 듯했다. 모두들 그럴 터였다. 도시의 곳곳에서 그렇게 살아갈 거였다. 질름거리며 파지를 줍다, 종이가 날아가 아… 하고 입을 벌릴 노인이 있을 수도, 같은 반 친구에게서 뺏은 패딩 점퍼를 입어보면서 가슴 떨리게 좋아할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 집 앞, 아파트 상가에서 불콰한 얼굴을 가진 취객들이 침을 튀겨가며 말하는 모습을 본다. 튀긴 닭을 앞에 두고 그들은 할 말이 많은 듯 번들거리는 입술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과 같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말을 섞고 싶었다. 신랄하게 아무 말이나 내뱉고 싶다. 나는 혀뿌리를 꾹 눌러 참는다.

집에 들어왔는데도 딸은 내 쪽을 보지도 않은 채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내는 딸의 그런 태도를 알면서도 못 본 척했다. 아이는 무슨 말을 찍어내는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자판을 꾹꾹 눌러댔다. 아내는 피곤하죠, 하고 가방을 받는다. 어차피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내의 얼굴이 잠깐 묘했다. 아내도 자기만의 말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낮 동안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이불을 빨고 침대 밑에 깊숙이 청소기를 넣어 먼지를 없앤다. TV를 보거나 장을 볼 수도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를 학원에 바래다주고 내가 입을 옷을 다린다. 그리고 어쩌면 젊은 애인을 만날 수도 있다. 그의 손을 꼭 잡거나 그가 하는 말에 귀기울이려고 그쪽으로 몸을 튼 아내를 상상해본다. 아내는 대낮에 속절없이 그와 살을 섞는다. 서로의 귓가에 부는 입김, 아내가 꽉 움켜잡는 그의 엉덩이 근육…. 화가 난다거나 아내를 탓할 마음은 없다. 다만 서로가 열심히 살을 섞고 있을 때 불쑥 들어온 내가 미안해질 것 같다. 그녀와 그가 안타깝게 잡은 손이나 희부옇게 빛나는 벌거벗은 몸을 보면서 나는 숨죽인다. 이윽고 그가 깊은 숨을 토해낸다. 나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준다.

소파에 앉자, 딸은 힐끗 나를 보더니 더럽다는 듯 나에게서 멀찍이 떨어진다. 아내는 그런 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빨래를 갠다. 이 모든 것과 상관없다는 듯 아내는 우아하게 보송보송하고 하얀 옷들을 개킨다. 순간 울컥 아내가 진짜 바람이라도 피운 것처럼 아내를 노려봤다. 그녀는 접은 수건들을 차곡차곡 올린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아내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말한다. 선임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말에 나는 의아했다. 아내는 이제 막 접은 수건들을 제자리에 놓기 위해 일어선다.

“일 때문이래요. 당신이랑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봐요.”

아내는 선임에게 언제나 고마워했다. 명절 때마다 꼬박꼬박 차갑게 냉장한 신선한 쇠고기나 볕에 잘 말려 포장한 홍삼 같은 것들을 보냈다. 한번은 선임의 집에 김장을 도와주러 간 적도 있었다. 그의 아내와 일하는 도우미들까지 함께 했다고는 하지만, 한눈에도 선임의 아내는 멀찍이서 그들이 일하는 요량을 보기만 했을 것 같았다. 아내는 몇 번이나 그녀가 고마워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바쁜 철이잖아요, 손이 부족하다고요. 아내는 힘없이 웃으며 누웠다. 그러고는 사흘 동안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하고 몸살을 앓았다. 며칠 감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와 푸석푸석한 볼을 보며 나는 시집살이 하냐고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물기 없는 아내의 몸에 조금도 닿고 싶지 않았다.

구청은 짜임새 있게 돌아간다. 날실과 씨실처럼 촘촘히 얽히고설켜 꽉 엇물려 있다. 기획예산과에서 1년 예산을 정하고 그 안에 계획을 세운다. 승용차 요일제를 정하고 구정 홍보를 한다. 재무과에서 관리를 하고 복지를 위해 학습교육원을 세우고 도로를 정리한다. 그리고 도시의 상하수도를 위해 설치를 하고 주민에게 문서를 발급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피부에 와닿진 않았다. 이런 것 없어도, 사람들은 각자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도시에 한두 개 새로운 공원을 조성하지 않아도, 멍청하게 번호판에 있는 숫자가 짝수인지 홀수인지를 정해 차를 몰게 하는 것도 부질없어 보였다.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 밖을 보면 우리들은 알아서 잘 산다,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하고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꼭 필요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구획과 구획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없애고 수도에서 선선한 물이 나오게 하는 모든 것들이 당연했다. 나는 가끔 상상했다. 도시에 치우지 않은 쓰레기들 위로 들끓는 파리떼와 벌레들이 하늘에 드글드글 기름 낀 것처럼 날아가는 모습, 지면 아래로 매끄럽게 돌지 않는 수도와 검붉은 녹물을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도시는 죽어가는 생선처럼 비릿해질 거였다. 하지만 이런 씨실과 날실 속에도 빈틈은 있다. 내가 할 일은 없었다. 나를 포함하지 않은 열한 명이 각자 알아서 자기가 할 일들을 했다. 내 일은 명목상 감사담당뿐이었다. 계획 승인과 조직 관리를 위해 날아오는 종이에 사인을 하는 게 다였다. 나는 그냥 멀거니 바라봤다. 이 모든 것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선임은 자네 얼굴 보기가 힘들어, 하고 웃었다. 그러곤 내 말을 듣기도 전에 자기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수화기 너머 그의 더운 숨이 느껴지는 것 같아 불편했다.

“많이 바쁜 것 같아.”

아닙니다, 하고 대꾸했다. 그러곤 차분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건물이 들어설 거야.”

규모가 꽤 큰 걸로 알고 있어. 자네 구에 들어설 건데… 한번 만나고 싶군. 나는 묵묵히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아는지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리자 투실투실한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은 게 보였다. 벌겋게 조그만 점들이 털 사이로 따다닥 돋아났다. 징그러웠다.

시끄럽다. 사무실 바깥으로 난처한 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러시면… 안 되는데. 무슨 일인지 보기 위해 문을 열자, 웬 할머니가 눈물을 찔끔찔끔 짜고 있는 게 보였다. 남자 직원이 완강하게 할머니의 팔목을 붙잡는다.

“팔지 마세요, 이런 것.”

그는 고갯짓으로 그녀가 갖고 있는 봉투를 가리킨다. 할머니는 손에 쥔 검은 봉투를 더욱 꼭 끌어안는다. 선이 안된 얼굴로 할머니에게 말을 건넨다. 할머니 원래 아무 데서나 파는 거 아니에요. 할머니는 겁먹은 얼굴로 선과 남자 직원을 번갈아 본다. 그러곤 알겠다고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한다. 검은 봉투가 바스락거린다. 선은 신고가 들어오면 어쩔 수 없다고, 거듭 설명한다. 남자 직원이 할머니를 모시고 나간다. 나는 서둘러 뒤따라나간다. 남자 직원이 일부러 굳은 얼굴로 한 번 더 주의를 주고 간다. 저, 잠시만. 그녀는 잔뜩 굽은 어깨로 뒤돌아본다. 봉지 좀 볼 수 있냐는 말에 그녀는 숙제를 덜한 아이가 검사받듯 봉투를 조심스럽게 연다. 대추다. 이거 2천원어치만 살 수 있을까요, 란 말에 그녀가 반색한다.

“달고 단단해.”

“그리고 시원하고 맛있어.”

그녀는 뿌듯하게 자부심 섞인 얼굴로 대추를 다른 봉지에 담아 건넨다. 양이 많다.

선은 내가 들고 온 대추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곤 빠득빠득 씻어 그릇에 담아 모두가 먹기 좋게 휴게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선은 참 단단하네요, 하면서 대추를 집는다. 나도 덩달아 대추를 집어 한입 문다. 달다.

아내는 선임이 무슨 일로 전화했는지 궁금해했다. 잘 지내신데요? 이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내는 답답해했다. 안부도 좀 묻고 그쪽이 연락하기 전에 연락했어야 하는 거라고 했다.

“고마워해야 해요.”

사람은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요, 아내는 볼멘소리로 타박했다. 그녀의 성화에 별거 아니라고, 그냥 큰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답했다. 그녀는 잘됐네요, 하고 답했다. 이 기회에 집값이 올랐으면 좋겠어요. 아내의 눈이 잠깐 희망에 번득거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요의가 느껴졌다. 나이를 먹을수록 소변이 더 자주 마려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소변을 눌 때마다 허리춤까지 오는 찌릿하고 싸한 한 줄기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화장실 문을 열었다. 딸이 몸을 씻고 있었다. 뿌연 김 속에서 몸의 곡선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물줄기 소리에 문이 열린지도 모르고 아이는 고심하는 얼굴로 몸을 씻었다. 꼼꼼하고도 차분하게. 그것은 어느 단계가 있는 듯했다. 팔과 겨드랑이, 허리춤까지 아이는 차근차근 거품을 묻혔다. 봉긋 솟은 젖가슴과 부푼 엉덩이, 그리고 앙증맞게 그 자리에 있는 털…. 아이는 다리까지 모두 꼼꼼하게 거품칠을 하고 나서야 나를 봤다. 아이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나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딸의 벗은 몸을 본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나쁜 짓을 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딸이 아닌 이제 막 망울을 터뜨리려는 식물을 본 것 같았다. 벌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 내쉬는 꼴이 부끄러웠다. 아이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나왔다. 사과를 해야 했다. 딸은 내 쪽을 홱 지나쳤다.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에 투둑 떨어졌다. 나는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고 단지 오줌이 마려웠을 뿐이라고 얘기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아… 어… 요야…. 간만에 부르는 딸의 이름이 낯설었다. 요!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딸이 신경질적으로 돌아봤다. 딸이 벌게진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미안하다.”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요는 입 모양으로 시발, 하고 웅얼거렸다. 그러곤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요가 말한 시발은 시발시발시발시발 하고 귓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어느새 오줌은 마렵지 않았다. 대신, 딱딱하게 굳은 조그만 돌이 요도에 콱 박혀버려 다시는 나올 거 같지 않았다.


요의 싱싱한 몸과 달리 내 몸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것 같았다. 배만 단단하고 둥그레었다. 배를 눌러보면 살이 차올라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았다. 축 늘어지고 주름진 고환이 징그러웠다. 나는 몸을 갖고 있어, 부끄럽다는 듯 움츠렸다. 거울에 비춰 살펴보니 곳곳에 튼 살이 있었다. 나는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는 대놓고 나를 피했다. 딸과 아무 말이나 했으면 싶었다.


구에서는 더 이상 건물이 들어설 수 없었다. 선임은 더 살이 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단단하고도 하얗게 건강한 빛이 나는 몸이다. 늘어지고 기름 낀 내 몸과는 달랐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했다. 나는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한다. 선임은 소파에 앉고는 다리를 벌린다.

“건물이 꽤 커.”

그는 대강의 구조를 설명한다. 총 24층짜리야. 이 구를 떠나 시에서도 그 정도의 건물을 보기 힘들었다. 그는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언뜻언뜻 튀기는 침이 느껴지면서도 나는 티를 내지 않는다. 지하로 다섯 층을 내고 그중 지하 1층은 고급 스파가 들어선다. 전반적으로 대리석으로 코팅한 느낌의 인테리어를 내고 1층에는 T사의 빵집과 외국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이 들어온다. 각각 26평과 67평씩, 빵집과 레스토랑치고 꽤나 큰 실평수다. 2층에는 전통 한정식, 3층, 4층에는…. 대강 들어가는 업종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다채롭고 월세를 꼬박꼬박 잘 내는 업종으로 꽉꽉 채웠다. 스크린골프, 노래방, 유료 어린이 놀이시설, 전시장…. 병원만 빼고 다 들어가네요. 선임은 입맛을 다신다. 그 점이 아쉽네. 치과나 피부과, 성형외과가 들어간다면 건물가는 더 높아질 거였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이 구에 그런 것을 세울 땅이 없다. 나는 잘 정비된 도로와 구획들을 떠올리며 고민했다.

“공립유치원 쪽이야.”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슬쩍 내 눈치를 본다. 건물을 세우는 D사가 그쪽 땅은 다 샀는데 공립유치원을 침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에 있는 유일한 유치원이었다. 해마다 사람들은 아이를 낳았다. 조금 있으면 시 인구가 50만 명이 넘어갈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서류상에는 없는 아이들도 드글드글할 거였다. 부모들은 상대적으로 사립보다 싼 공립에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유치원인데도 대학 합격자 예비 순번처럼 숫자를 매겼다. 내 딸도 이 유치원을 나왔다. 언뜻 저 멀리서, 어린 요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 나를 보고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어떻게….”

선임은 운영 문제를 얘기해 유치원을 밀겠다고 했다. 그건 그가 알아서 위쪽과도 얘기를 끝낸 모양이었다. 그는 내 승인만 기다린다는 듯 빤히 내 얼굴을 본다.

말이 돌았다. 도시에 갑자기 큰 건물이 들어설 거라는 걸 알 사람은 알았다. 선은 인터넷 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했다. 커다란 복합상가 조형도를 내걸고 D사는 광고를 했다. 시의 경제가 활성화될 거라는 의견도 있었고 환경단체 쪽이 반발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유치원을 언급하지 않았다. 포털 사이트에서 시의 이름을 검색만 해도 연관검색어로 건물이 나왔다. 선임은 승인할 수 없다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구에 있는 하나뿐인 유치원이라는 말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그는 듣지 않았다.

“개새끼.”

그는 씹어뱉듯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다리가 달달 떨렸다. 선임은 지나가는 똥개 보듯 나를 봤다. 그는 잊은 듯했다. 그동안 철철마다 아내가 부쳤던 선물들도, 시장이 되기 전 그의 비리를 말하지 않았던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굴었다. 사람은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해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듯 편안한 얼굴로 나중에 다시 보지, 하고 내 어깨를 짚었다.

어린 요만 한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인사를 한다. 조그만 손이다. 내 손바닥의 반도 안 되는 꼭 들어오는 손. 부모들은 이제 일하러 나가는 사람의 피곤이 숨어 있는, 하루를 각오한 얼굴이다. 그래도 새끼의 인사에 웃는다. 아이들은 아이답게 자신을 향해 웃는 모습에 속는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노래를 부르고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다. 아이들의 볼은 발갛고 터질 것 같다. 자기들끼리 단순하게 똥, 오줌, 방귀라는 말에 숨넘어갈 듯 웃어댄다. 그때 갑자기 지붕이 내려앉는다. 아이들은 기겁하듯 소리를 지른다. 엄마! 피곤한 웃음으로 인사하던 엄마를 있는 힘껏 부른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석면 가루가 부옇게 날린다. 떨어진 전등에 다리가 달궈진 아이가 비명을 지른다. 부연 공기 속에서 어슴푸레 밖이 보인다. 추가 계속 벽을 친다. 벽을 뚫고 비죽 솟아난 벽 철심에 아이의 눈이 찔린다. 투둑 하고 터져버린 눈알에 아이는 어? 하고 어리둥절해한다. 그러곤 아픔이 느껴지는 듯 눈 쪽에 손을 갖다 댄다. 벌겋게 벌어진 배의 상처 안을 들여다보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도 있다.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말캉말캉한 어린아이의 내장을 생각하자 눈이 질끈 감긴다. 아빠 살려줘. 어린 요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

“세우지 않을 거야.”

내 말에 선은 네? 하고 의아해했다. 그런 것, 필요 없어. 선은 이상하다는 듯 내 얼굴을 살핀다. 토지·건설 쪽 사람들한테도 허가하지 말라고 얘기할 참이었다. 개가 되려고. 나는 조용히 웃는다.

요의 싱싱한 몸과 달리 내 몸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것 같았다. 배만 단단하고 둥그레었다. 배를 눌러보면 살이 차올라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았다. 축 늘어지고 주름진 고환이 징그러웠다. 나는 몸을 갖고 있어, 부끄럽다는 듯 움츠렸다. 거울에 비춰 살펴보니 곳곳에 튼 살이 있었다. 나는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는 대놓고 나를 피했다. 딸과 아무 말이나 했으면 싶었다. 딸은 뚱한 얼굴로 TV를 보고 있다. 요? 나는 겁이 난 듯한 목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아빠 잠바 좀 줘. 요는 못 들은 척 TV 채널을 돌린다. 용돈 좀 주려고 그래. 그제야 아이는 일어나 옷방으로 간다. 잠바 왼쪽 주머니에 지갑이 있어. 옷방으로 간 요를 향해 힘주어 말한다. 그래도 내 말을 듣는 것 같아 기분이 나아진다. 잠시 후 요는 오른손에 무언가 꼭 쥔 채 나온다.

“이게 뭐야, 아빠?”

요는 손에 쥔 자신의 팬티를 건넨다.

“이게 뭐냐고!”

아이는 하얀 팬티를 내 얼굴을 향해 집어던진다. 이 변태 새끼야! 훔쳐보니 좋든? 좋아? 아이는 악에 받쳐 어쩔 줄 모른다. 요는 나를 할퀴기 위해 덤빈다. 아내가 시끄러운 소리에 무슨 일이냐며 나온다. 아빠 잠바 주머니에 내 팬티가 들어 있었어, 엄마. 요는 엄마를 보자 더욱더 소리를 높인다. 변태 새끼! 요는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듯 분에 못 이겨 다시 나에게 덤빈다. 아내가 재빨리 요의 손목을 움켜쥔다. 그만해라.

“아빠한테 그만해.”

아내는 화가 난 듯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어디 누가 아빠한테 그러냐. 그리고 차분히 아이를 다독인다. 빨래 돌리다가 잘못 들어간 거야. 아님 엄마가 실수로 정리하다 어쩌다 들어간 거다. 딸은 엄마의 손을 가볍게 툭 치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에 집어던진 요의 팬티를 줍는다. 하얀 천에 조그만 분홍 리본이 달려 있다. 하루 종일 잠바 주머니 안에 딸의 팬티를 넣고 다닌 꼴이다.

“이리 줘요.”

아내는 잔뜩 동그랗게 구겨진 아이의 팬티를 가져간다.

선임의 전화에 나는 망설임 없이 나왔다. 집에선 아무도 나와 말을 섞고 싶어 하지 않았다. 딸과 아내를 볼 때마다 분홍 리본이 조그맣게 달린 팬티가 떠오를 것 같았다. 도시의 밤은 쌀쌀했다. 그래도 집 안의 공기보다 나았다. 아파트 단지 앞에 서 있자, 선임의 차가 왔다. 나는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이미 취했는지 술 냄새가 조금 났다.

“D사에서 보고 싶어 해.”

그는 한번 만나보는 것도 좋을 거라고 했다. 그러곤 눈을 감고 이내 코를 골았다. 기사는 등을 조금 더 젖혀도 된다고 했다. 나는 기사의 말대로 조금 더 등을 눕혔다. 덩달아 깜박 잠이 들었다.

선임과 내린 곳은 웬 집이었다. 도시의 외곽인 듯 한적한 시골이었다. 개 짖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D사 사람이 사는 곳입니까? 이 물음에 선임은 낄낄 웃었다. 아무도 안 살아. 들어가지. 겉의 모습처럼 집 안도 신경 쓴 태가 났다. 천장을 높게 짓고 일부러 맞춘 듯 따뜻한 색으로 집을 꾸몄다. 협탁 위에 있는 전등이나 커튼 같은 것들도 일일이 색감과 재질을 고려해 맞춘 듯했다. 집 안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중 안면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없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들 선임과 친해 보였다. 도지사와 그의 일을 맡는 변호사는 나를 보자마자 반색했다. 깍듯하게 인사하는 내 모습을 보곤 우스운지 선임처럼 낄낄댔다. 여섯 명이 모두 앉게끔 소파는 길고 컸다. 협탁 위에는 이미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마시게. 누군가 나에게 권했고 나는 주저 않고 마셨다. 시원하면서 썼다. D사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내 손을 꼭 쥐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간만에 잡는 사람의 온기에 울컥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시장님이 자주 말씀해주셨습니다. D는 다시 나에게 술을 권했다. 사람들은 벌건 얼굴로 악을 쓰고 침을 튀겼다. 모두 얼굴에 기름이 번들거리고 눈동자에 희뿌연 막이 낀 것 같았다. 얼마 만에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활어처럼 신랄하게 혀를 움직였다. 혀의 돌기가 바싹 일어난 것 같았다. 내가 던진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 맞은편에 앉은 도지사는 숨을 헐떡이는 바람에 앞의 술잔을 엎질렀다. D는 약속이 있는 듯 시계를 자꾸만 쳐다봤다. 멀찍이 떨어진 선임과 D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사람들은 모르는 척 다시 술잔을 돌리기 바빴다. D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D사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나와 내 손을 꼭 쥐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간만에 잡는 사람의 온기에 울컥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시장님이 자주 말씀해주셨습니다. D는 다시 나에게 술을 권했다. 사람들은 벌건 얼굴로 악을 쓰고 침을 튀겼다. 모두 얼굴에 기름이 번들거리고 눈동자에 희뿌연 막이 낀 것 같았다. 얼마 만에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활어처럼 신랄하게 혀를 움직였다.


D와 함께 웬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익숙하다는 듯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여자들은 모두 외투 안에 입었다고 하기 힘든 옷을 입고 있었다. 몸매를 강조하기 위해 스판덱스 소재의 달라붙는, 민소매에 짧은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술잔을 받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마다 검은 레이스가 달린 속옷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여자의 젖가슴은 탄력적으로 보였다. 아예 속옷처럼 란제리 차림인 아가씨도 있었다. 앞섶에 있는 끈만 풀면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바라보기에도 민망한데 사람들은 모두 당연하다는 듯 하나씩 짝을 지었다. 내 옆에도 검은 원피스 차림의 아가씨가 앉았다. 여자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D는 손님이 왔으니 다시 모두 마시자고 했고 사람들은 잔을 채웠다. 나도 떨리는 손으로 옆의 아가씨가 내미는 잔에 술을 따랐다. D는 한쪽 구석에 있는 노래방 기기를 틀었다. 큰 벽면 TV와 바로 연결돼, 화면에는 열대의 섬과 파릇파릇한 야자수, 색색의 빛을 내는 물고기들이 파란 화면에서 헤엄쳐 다녔다. 누군가가 아가씨의 어깨를 감쌌고 까르륵거리는 여자의 높은 웃음소리가 났다. 내 옆에 앉은 아가씨는 얌전하게 술을 마시고 회를 씹었다. 그러곤 차분히 내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선과 동갑인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요처럼 앳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오물오물 안주를 하나씩 집어먹고는 맛있네요, 하고 중얼거렸다.

선임은 노래를 부르면서 같이 춤을 추는 아가씨를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가 여자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이미 다 벗은 아가씨도 있었다. 홀딱 벗은 그녀는 남자의 무릎 위에 앉아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는 그래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덥석 그녀의 젖가슴을 잡았다. 도지사는 반대로 자기가 다 벗은 채 여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부푼 그의 성기가 덜렁덜렁거렸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아가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신물이 올라왔다.

어떻게 거길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D가 걱정스레 괜찮냐며 차를 불러준 것과,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준 여자의 손길이 기억났다. 시큼한 토 냄새도 맡았고 벽에 기대 그들을 멍하니 바라본 것 같기도 하다. 아내는 차가운 손으로 이마를 짚어줬다.

“그가 당신을 데려왔어요.”

아내는 정신없어하는 나에게 조금 더 자라고 했다. 당신이 나가고 나서 요를 혼냈어요. 그녀는 이불을 덮어주면서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당신에게 대들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미안하대요. 나는 감기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건물의 승인 허가가 떨어졌다. 유치원이 문을 닫는다고 하자 하루에도 민원 전화가 몇십 통씩 걸려왔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바로 옆 구에 있는 유치원에 등록했다. 그 구의 유치원 통학버스가 오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기본 공사가 시작됐다. 튼튼하게 콘크리트를 바르고 붉은 철심을 곳곳에 박았다. 선임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도시에 바람이 불었다. 그 때문에 마치 술렁거리는 듯한 파도처럼 보인다. 도시는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커다랗고 몸이 둔한 짐승이 움직이기 위해 숨을 내쉬는 것 같다. 건물을 두고 사람들은 숙덕거렸다. 갑자기 이렇게 큰 것이 들어올 리 없어. 우리 애 멀쩡히 다니다가 옮겼잖아. 건물주가 시장이래…. 실제로 이런 말들이 귀에 들어오는 듯했다. 누구는 조그만 구에 그래도 이런 게 들어서면 먹고살기 좋겠지, 하고 얘기했다. 각자의 말이 있는 거였다. 그래도 건물은 이 모든 것과 상관없다는 듯, 견고하게 올려졌다.

아이는 그제야 내 말이 들린 듯 뒤돌아본다. 아이가 흠칫 몸을 움츠린다. 컴퓨터 화면에는 플레이어가 돌아가고 있다. 갈색으로 꾸며진 집 안이다. 저기, 내가 보인다. 화면에는 내가 요의 이름을 부르면서 여자의 팬티를 입에 물고 있다. 입에 문 천 쪼가리 때문에 요의 이름은 묘나 오처럼 들리기도 한다.


말은 돌고 돌아 퍼진다. 사무실에 앉아 멍하니 인터넷 뉴스를 본다. 아나운서가 결혼을 하고 30대 백수가 라면을 사러 갔다, 슈퍼에 난 불을 껐다. 나는 뚱한 얼굴로 이것저것을 클릭한다. 그때였다.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에 D가 떠올랐다. 무심코 본 D의 이름은 둥둥 떠다닌다. 검색어 순위가 자꾸 올라가는 게 신경이 쓰였다. D의 이름을 클릭하는 순간, ‘D업체의 성접대’ ‘비디오’ 가 주르륵 나온다. 그중 하나를 누른다. 시에 건설 허가를 받기 위해 D업체는 업자들과 변호사, 고위 간부들을 불렀다. 그들은 D업체 쪽이 마련한 초호화 별장에서 여성들과 살을 섞었다. 이를 촬영한 비디오를 갖고 있으며 거기엔 적나라하게 그들의 살덩어리와 질펀하게 젖은 몸들이 나온다…. 한순간 멍해졌다. 뒤에 서늘한 기운이 닿는다. 심장이 갑갑했다. 홀딱 벗은 도지사와 여자들이 떠오른다. 술에 취해 서로를 끌어안고 비비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것은 사람이기보다는 마치 짐승이 서로의 체취를 맡고 소리 높여 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멀찍이 그들을 ‘본’ 것밖에 없다. 나는 커다란 동공처럼 눈알이 되어 기억하겠다는 듯 찬찬히 그들의 얼굴만 훑어봤다. 답답하다. 선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10분 단위로 D와 관련된 뉴스가 올라온다. 별장 안 모습부터 체위까지 묘사했다. 붉은 커튼이 쳐져 있었고 안에는 노래방 시설부터 사우나, 골프연습장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여자는 약을 먹은 듯 풀어진 눈으로 카메라를 보고 히죽히죽 웃어댔다. 비디오는 모두 벗은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갑자기 뒤쪽에서 여자가 그를 끌어안고 그는 노래를 부르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인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 얼추 읽어도 이상야릇한 상상력만 불러일으켰다. 누군가는 직접 이 비디오를 봤다는 거였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기가 겁이 난다. 그 비디오 안에 있을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각해본다. 저녁이 될 동안 나는 나가지도 않고 꼼짝없이 앉아 계속해서 글을 봤다. 문장도 아니고 단어도 아닌, 말들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떠돌아다녔다. 발정난 개새끼들이라고도 했고 ‘헐 대박’ 같은 말도 보였다. 고위층의 성 스캔들이라는 이런 자극적인 사건이 찌라시일 뿐이라는 말도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저기 67페이지부터 1페이지까지 차근차근 읽는다. 그 자리에 없던 A차관의 실명이 거론되기도 했고 변태적인 성 취향까지 낱낱이 묘사하기도 했다. 간부 중 하나가 여자의 팬티를 입에 문 채 엉엉 울기도 했다고 했다. 문득 선임이 생각난다. 그가 내 옆에 있던 아가씨를 데려간다. 아가씨는 당혹스럽다는 듯 내 쪽을 본다. 나는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는 딸의 이름을 부르며 술에 취해 눈물을 흘린다. 묘, 묘 하고 우는 그의 모습에 내 딸 요와 이름이 비슷해 가슴이 뭉클하다. 선임은 딸아이의 속옷을 주머니에 넣은 건 자기가 아니라고 했다. 여자는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다정스레 위로해준다. 그러다 갑자기 팬티를 벗어 내려 그의 손에 꼭 쥐어준다…. 실제로 선임이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도 나처럼 빨래를 돌리다 잘못 들어간 딸아이의 속옷 때문에 아이와 한바탕했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말들은 찢어지고 찢어져 날카롭게 보인다. 씨바새끼들 다 쳐죽여야 해, 같은 말 따위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말들은 많지만 피부에 와닿지 않아, 무게가 없어 보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불쑥, 내 이름이 떠올랐다.

사무실에서 나오자 선이 휴게실 탁자 위에 놓아둔 접시를 집는 게 보였다. 대추는 썩을 대로 문드러져 물렁해져 있었다. 그 위로 초파리들이 맴을 돌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물렁해진 대추에서 물이 질질 흘러나왔다. 썩은 음식물처럼 거북하기도 했고 단내가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선은 내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투명인간 취급했다. 대추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상태로 썩어버렸다. 선은 망설임 없이 휴지통 안으로 대추를 접시째 버렸다. 그러곤 나에게 인사 없이 퇴근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나왔다. 나는 보는 사람답게, 이 모든 것을 본다. 도시는 또 한 번, 소란스럽게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 못한 말이 몸 안에 돌고 돌아 식도를 건드리고, 위장을 툭툭 칠 것 같다. 그 진동이 우우- 하고 울 때마다 외로워진다. 나는 아니라고, 안 그랬다고, 이 모든 것들과 상관없다고 소리치고 싶다. 이번만큼은 말하고 싶다.

집 안은 조용하다. 이 모든 것과 상관없다는 듯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다. 아내가 깨끗하게 정돈해놓은 거실과 안방, 부엌의 식탁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에 안심한다. 아내는 저녁을 먹기 위해 아이를 부른다. 요, 하고 부르면서 아내가 정신없이 바쁘게 밥을 푸고 반찬을 꺼내는 모습이 좋다. 이 모든 것들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면 싶다. 아내는 중간중간 일을 하며 ‘요? 요?’ 하고 아이를 부른다. 아이는 나오지 않는다. 딸과 아내와 마주 앉아 같이 저녁을 먹으면 이 모든 일이 끝날 것 같다. 내가 부를게. 딸의 방문이 열려 있다. 요? 나는 아이를 부른다. 딸은 정신없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요, 밥 먹자.”

아이는 그제야 내 말이 들린 듯 뒤돌아본다. 아이가 흠칫 몸을 움츠린다. 컴퓨터 화면에는 플레이어가 돌아가고 있다. 갈색으로 꾸며진 집 안이다. 저기, 내가 보인다. 화면에는 내가 요의 이름을 부르면서 여자의 팬티를 입에 물고 있다. 입에 문 천 쪼가리 때문에 요의 이름은 묘나 오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는 다급하게 여자의 옷을 벗긴다. 터질 것 같은 둥근 배를 가진 나와 늘씬하고 하얀 여자는 서로 급하게 살을 섞는다. 여자의 숙인 허리 위로 내 모습이 찍힌다. 나는 속옷을 입에 문 채 눈물을 질질 흘린다. 신음인지 괴성인지 ‘묘, 묘’ 하고 운다. 그와는 다르게 여자는 차분한 얼굴로 담담하게 카메라 앵글을 바라본다.

“아빠, 이게 뭐야….”

“대체 뭔데?”

“이게….”

“…뭔데?”

요는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요의 벌어진 입안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 나는 담담히 화면을 바라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아무 말이나 하고 싶어 ‘아’ 하고 입을 벌린다. 내 잃어버린 말들이 도시의 곳곳에 흩어져 작게 파르르 파르르 떨릴 것 같다. 화면에는 커서가 내 말을 모두 받아적겠다는 듯, 갓 태어난 아이의 심장처럼 발딱발딱 뛰고 있었다.

장희원,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한겨레21

손바닥문학상

손바닥을 기다립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글쓰기를 응원하는 <한겨레21> 제8회 손바닥문학상 공모, 마감은 11월20일까지

제1132호
등록 : 2016-10-10 17:54 수정 : 2016-10-10 17:58

손바닥만 한 나뭇잎이 어깨에 툭 떨어졌습니다. 서늘해진 바람에 실어 보낼 이야기가 없는지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것 같습니다. 마음속에 담아뒀던 말들이 무르익는 계절입니다. 네, <한겨레21>은 올가을에도 어김없이 평범한 사람들의 글쓰기를 응원하는 이야기 잔치를 벌입니다. 제8회 손바닥문학상을 공모합니다.

<한겨레21> 손바닥문학상에는 우리와 가장 맞닿아 있는 사회 이슈를 바탕으로 한 글들이 쏟아집니다. 지난해 손바닥문학상 심사를 맡은 소설가 전성태씨는 “여느 문학상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소재들이 이 문학상의 미덕”이라고 썼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날것의 목소리가 펄떡입니다. 지난해에는 불안한 주거, 세월호 참사,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 노인의 성과 고독, 가정폭력, 잿빛 청춘, 성소수자 혐오 등의 이슈가 소설이 되어 <한겨레21> 뉴스룸에 도착했습니다.

공모자들이 눈여겨본 사회문제는 다른 여러 창작자들에게도 이야기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서울 종로 일대에서 노인들을 상대하며 생을 이어가는 65살 ‘박카스 할머니’(윤여정)를 주인공으로 합니다. 영화 <부산행>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전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는 순간을 그렸습니다. 영화 <터널>은 대형 참사, 무책임한 정부 관계자와 책임자를 그리며 관객에게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소설가 김탁환은 세월호 사건의 충격을 고스란히 소설로 옮긴 <거짓말이다>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한 해가 지났다고 도통 소재가 줄어든 것 같지 않습니다. 쓸거리가 넘쳐 슬픈 시대입니다. 손바닥문학상은 논픽션과 픽션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동시대 사회적 이슈를 주제나 소재로 한 소설을 보내주셔도, 지금 여러분이 있는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는 논픽션 르포를 보내주셔도 좋습니다. 꼭 무겁고 진지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쁜 일상을 좇다 놓치기 쉬운 생의 기쁨과 슬픔 사이의 결들을 일기처럼 써주셔도 좋습니다. 다만 문학의 목소리를 빌려,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해주세요.

‘세상과 때로 악수하고 때로 뺨을 후려치는 문학을 기다린다’는 손바닥문학상의 취지를 올해도 이어갑니다. 마감은 11월20일 밤 12시까지입니다. 앞으로 한 달여, 꼭 쥔 주먹 속에 숨은 이야기들을 손바닥 위에 펼쳐주세요.

■ 공모 안내

대상  논픽션·픽션 불문 동시대 사회적 이슈를 주제나 소재로 한 문학글


분량  200자 원고지 50~70장

응모요령  한글이나 워드파일로 작성해 전자우편(palm@hani.co.kr)으로 접수

[제8회 손바닥문학상 공모]_제목_응모자 이름 형식으로 전자우편 제목 작성

응모자 연락처 필히 기재

마감  11월20일(일요일) 밤 12시

발표  12월19일(월) 발행되는 제1142호(12월26일치)

문의   palm@hani.co.kr (전자우편으로만 받습니다)

상금 및 특전   대상 300만원, 가작 100만원

*수상자는 일정 기간 <한겨레21> 필자로 기용될 수 있습니다.


■ 역대 수상자 및 수상작

제1회  대상 신수원 ‘오리 날다’, 가작 한혜경 ‘인디안밥’

제2회  큰 손바닥 대상 김소윤 ‘벌레’, 가작 기민호 ‘구민을 위하여’, 작은 손바닥 가작 윤희정 ‘방문’

제3회  큰 손바닥 대상 김정원 ‘너에게 사탕을 줄게’, 가작 이보리의 ‘인형의 집으로 어서 오세요’, 이도원 ‘가난한 사람들’, 작은 손바닥 대상 전구현 ‘랩탑’, 가작 최호미 ‘나는 외롭지 않다’

제4회  대상 김민 ‘총각슈퍼 올림’, 가작 윤성훈 ‘황구’

제5회  대상 서주희 ‘전광판 인간’, 가작 황병욱 ‘민트와 오렌지’, 이슬아 ‘상인들’

제6회  대상 김광희 ‘춘향이 노래방’, 가작 이채운 ‘문 밖에서’, 장희원 ‘아무것도 몰라’

제7회  대상 성해나 ‘수평의 세계’, 가작 최예륜 ‘림천여인숙 살인사건’, 이유경 ‘정당방위’

*4회부터는 작은 손바닥 부문은 공모하지 않습니다.



 한겨레21

손바닥문학상

어두운 시대를 비추는 손거울

제8회 손바닥문학상 대상 수상작 ‘치킨런’, 가작 ‘자작나무 숲의 온도’ ‘산청으로 가는 길’
어두운 세상에서 격렬하게 버텨내는 사람들의 이야기, 300여 편 응모작

2016년 12월2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제8회 손바닥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정영무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 박호연 가작 수상자, 이항로 대상 수상자, 김혜인 가작 수상자의 시아버지 강대희씨, 최재봉 심사위원, 김현대 한겨레신문사 출판국장, 안수찬 <한겨레21> 편집장(왼쪽부터). 김진수 기자

손바닥문학상 본심을 심사하고 나서 32편 생생한 문학적 보고서를 읽었다는 보람과 피로가 밀려왔다. 일부를 보았던 예심작의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심작 32편, 예심작 300여 편이 선택한 인물, 소재, 주제, 분위기, 결론은 현장성에 바탕해 ‘어쨌든 결국’ 지금 여기의 사회를 말하고 있었다. 도드라진 주제는 청년 실업, 노인 문제, 질병과 우울증, 성소수자 차별, 전염병 위기 등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300여 명 필자가 손바닥으로 움켜쥐고 손가락으로 풀어낸 세계는 어두웠다. ‘아, 세상이 이렇게 어두워졌구나. 지금 우리가 이토록 어렵구나.’ 잠시 쉬어서 머리를 식혀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대부분 지친 인물들은 전통적 방식으로 저항하진 않았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격렬하게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삶의 끝자락에서 피어오르는 유머와 희망이 예년보다 옅어져 있었다.

응모작들은 누군가를 비난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보다 ‘그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나’ 이해하려 애썼다. 처연하고 비루한 우리들을 이해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문학의 본질에 충실한 작품이 많았다. 수준도 고르게 높았다. 예년보다 훨씬 많은 32편의 본심작을 추릴 만큼 버리기 아까운 작품이 많았다.

고르게 좋은 작품들

다만 아쉬운 점은, 심사위원 모두가 이론의 여지 없이 최고로 뽑을 작품은 눈에 띄지 않았다. 심사위원 3명은 각자 다섯 작품을 추천했는데, ‘치킨런’이 공통분모로 뽑혔고 ‘자작나무 숲의 온도’도 대체로 언급됐다.

이항로씨의 대상 수상작 ‘치킨런’은 문학적 완성도가 높았다. 다른 작품에 견줘 문장이 단단했고, 흐름도 재빨랐다. 몇 개의 장면을 전환하듯이 풀어간 이 작품은 살아 있는 가족을 선택하기 위해 살아 있는 노모를 버려야 하는 중장년 남성을 쫓아간다. 예전 같으면 평생 직장이었을 곳에서 밀려나 치킨 배달을 하는 그의 하루는 ‘20분 제한’에 쫓기는 ‘치킨런’이고, 그의 인생도 현재의 가족과 키워준 어머니 사이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치킨런’이다. 멀리는 대책 없이 고령사회로 달려가는 우리 사회도 위험한 ‘치킨런’의 상태다. 이렇게 다층적 구조에 아르바이트 청년과 교감, 외면하는 형제자매 같은 설득력 있는 인물들이 더해진다. 실직과 질병 그리고 배달 같은 소재가 다소 전형적이란 평가도 있었지만, 작품의 흡입력을 심사위원 모두 높이 샀다.

김혜인씨의 가작 ‘자작나무 숲의 온도’는 소재부터 눈에 띄었다. 기후관측을 공부하는 유학생 주인공이 시베리아에서 북한 출신 건설인부 석이 아저씨를 만나는 설정은, 지금껏 한국 문학에서 보기 어려웠던 이야기다. 머나먼 곳에서 머나먼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만나서 만드는 온기는 칼바람 같은 정치와 체제의 위협을 이기지 못한다. 이 작품은 한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슬픔을 눈보라 쌓인 광막한 시베리아의 풍경처럼 쓸쓸하게 그려낸다. 유학생과 아저씨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불명확하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현실의 설정과 환상적 이미지를 적절하게 결합한 작품으로 평가됐다.


또 다른 가작 박호연씨의 ‘산청으로 가는 길’은 새로운 연애담으로 읽힌다. 연애는 일대일 배타적 관계라 믿었던 여성이 가벼워서 좋았던 만남을 통해 ‘폴리아모리’(Polyamory·다자연애)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담겼다. 폴리아모리를 주장하는 대학강사의 논리가 ‘바람둥이의 가면’을 넘어서는 설득력을 얻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여성 화자의 선택이 더욱 치열했다면 더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다. 폴리아모리를 모티브로 삼았지만, ‘산청으로 가는 길’은 평범한 한 사람이 대안적인 세계를 만나서 매력을 느끼고, 동행하는 이야기로 확장된다.

유머와 희망이 살아나기를

당선작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본심작도 있었다. 불법 광고물을 수거해 생계를 잇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당신의 박제품’은 현장성을 치열하게 담은 작품으로 평가됐다. 우리가 아는 대립 구조 너머의 이야기는 새로웠다. 그러나 문장과 구조의 완성도가 아쉽다는 지적이 나왔다. 감염병 재난 상황을 통해 사회적 낙인과 감시의 문제를 극화한 ‘포지티브’도 주목을 끌었다. 읽기에 따라서 후천성면역결핍증(HIV), 민주주의 문제까지 은유한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이야기 구조가 새롭지 않다는 반론이 나왔다. 이 밖에 ‘여학생 팬티 도난 사건’ ‘그냥, 궁금하지 않아서’도 수상작 후보로 거론됐다.

촛불과 함께 뜨거웠던 제8회 손바닥문학상 공모가 끝났다. 올해는 유난히 죽음의 그림자가 작품마다 어른거렸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무언가의 끝에 왔음을 암시하는 징후로 읽혔다. 촛불 이후 유머를 잃지 않고 희망이 살아나는 손바닥문학상을 기대할 수 있을까. 2017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대상  ‘치킨런’  이항로  수상  소감

당신께  씁니다

김진수 기자
어릴 적부터 추위는 견디지 못했습니다. 더운 건 어떻게든 참아내도, 한기가 온몸에 달라붙을 때면 감각이 무뎌지고, 의욕도 같이 얼어붙었습니다. 온도는 생각지 않는 사람들. 무언가에 집중해 나아가는 사람들에겐 온도는 상관이 없겠지요. 제가 쓰는 글의 근본은 그들에게 있습니다.

지금과 비슷한 날씨였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들은 게. 불길 속에서 피어오르던 꽃상여와 그날 내렸던 눈송이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눈빛과 내 손 위에 얹힌 당신의 손을, 아직 잊지 못합니다.

막내아들 부부의 다툼이 있던 그해 명절. 다른 식구 차에 실려온 막내손주를 보고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 순 없습니다. 그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과정이라도 되는 양 스윽 건너다보았습니다. 그러곤 친척들 몰래 쥐어준 몇만원. 그냥, 그게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당신과 저의 다른 이름인 부모님.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끝까지 쓰겠습니다.

심사위원 최재봉·안수찬·신윤동욱, 대표집필 신윤동욱


 한겨레21

손바닥문학상

치킨런

제8회 손바닥문학상 대상작

제1143호
등록 : 2016-12-28 14:51

올해의 손바닥문학상 열기는 ‘역대급’이었다. 제8회 손바닥문학상 공모전에 예년보다 두 배 이상 많은 300여 편의 작품이 도착했다. 함께 뜨거웠던 촛불집회가 제기한 문제가 손바닥문학상 응모작에도 새겨 있었다. 세월호 참사, 권력 전횡, 청년 실업과 고령화, 감시와 처벌, 혐오와 차별 등 다양한 주제를 담은 작품이 마감 직전까지 쏟아져 들어왔다.

올해 예심에는 <한겨레21> 기자 10여 명이 총출동해 응모작을 나눠 읽었다. 예심에서 추린 32편 작품을 본선에 올렸다. 본심은 외부 인사를 모셨던 예년과 달리, 손바닥문학상 취지에 오래 공감해온 한겨레신문사 기자들이 맡았다.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 안수찬 <한겨레21> 편집장, 신윤동욱 <한겨레21> 지성팀 기자가 심사위원으로 12월7~8일 두 차례 본선 심사회의를 했다. 심사숙고 끝에 이항로씨의 ‘치킨런’이 대상작으로 선정됐고, 김혜인씨의 ‘자작나무 숲의 온도’와 박호연씨의 ‘산청으로 가는 길’이 가작으로 뽑혔다.

‘치킨런’은 실직한 장년의 아들이 거동을 못하는 어머니를 혼자 모셔야 하는 상황을 다룬다. 노모와 함께 쓰러져서, 실직과 함께 벼랑 끝으로 떠밀린 한 가장의 선택을 그린 작품이다. ‘자작나무 숲의 온도’는 적막한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이전과 다른 남북한의 만남, 탈북민과 조우를 다룬다. ‘산청으로 가는 길’은 일대일 연애관계를 넘어선 폴리아모리(Polyamori·다자연애)를 주제 삼았다.

올해의 수상자 면면도 예년과 달랐다. 이항로씨는 현역 군인이고, 김혜인씨는 미국 뉴욕에서 글을 쓰며, 박호연씨는 전북 무주에 귀촌해 살고 있다. 다양한 수상자들의 면모가 10년을 향하는 손바닥문학상에 관심 가지는 이들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시상식은 12월2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 8층 대표이사실에서 열렸다. _편집자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잘 지내니

한참 동안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다 전송 버튼을 누른다. 타들어가던 담뱃재가 운동화 위로 떨어진다. 남은 꽁초를 비벼 끈다. 오토바이에 실려 있던 치킨을 꺼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다. 수리 중인 엘리베이터가 보인다. 변수다. 인부 한 명이 멋쩍은 웃음을 내보이며 말한다. 오늘은 걸어가셔야 해요. 벌써부터 무릎이 시큰거린다. 숨을 가다듬고 계단을 뛰어오른다. 11층까지 올라가려면 조금 더 서둘러야 하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잠시 멈춰 호흡을 고른다. 누군가 가슴을 옥죄는 것 같다. 발걸음을 떼어 계단을 오른다. 배달을 시킨 호수의 문 앞으로 뛰어간다. 초인종을 누르니, 바가지머리 남학생이 나온다. 웃는 얼굴의 남학생이 무언가 앞으로 건넨다.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스톱워치가 보인다. 시간은 이미 20분을 지났다. 남학생이 내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낚아채듯 가져간다. 문이 닫히고, 정적이 온몸을 감싼다.

느끼한 기름내가 콧속으로 끼쳐온다. 민머리의 사장이 손을 내민다. 아무것도 건네주지 않자, 사장의 고함이 귀청을 때린다. 몇 번째야 허씨, 정신 차리고 살어! 아들뻘 되는 애도 잘만 하는데. 이래서 늙은이는 쓰면 안 돼. 월급에서 깎겠다는 사장의 말이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곡조를 바꾸는 사장의 잔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퍼진다. 자리에 앉아 있던 수혁이 사장을 흘낏 바라본다. 빨리 다음 배달 가! 사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리자, 수혁이 헬멧을 쓴다. 치킨을 들고 나가는 수혁의 뒤를 따라가지만, 괜찮다는 눈인사가 돌아온다. 오토바이에 오른 수혁이 도로 저편으로 점을 그리며 사라진다. 사장의 눈총이 느껴진다. 바닥에 앉아 담배를 태운다. 비둘기들은 고개를 처박으며 무언가를 쪼아 먹는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린다. 메시지를 확인하지만, 기대한 소식은 아니다. 9월15일 저녁 8시 동명고등학교 27회 동창회. 가을 햇볕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졸음이 밀려온다.


아내와 이혼한 지난해 겨울부터 지금의 가을까지 치킨런에서 일하며 깨달은 바 한 가지는 사계의 계절 중 가을이 가장 배달하기 좋은 날씨인 점이다. 신호가 막힘없이 뚫린다. 가을밤의 선선한 기운이 뺨에 닿는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 뒤 치킨을 들고 뛰기 시작한다. 고소한 치킨 냄새가 엘리베이터 안에 가득 찬다. 도착했다는 알림이 들리고, 문 앞으로 달려간다. 벨을 누르니 정갈한 인상의 여자가 나온다. 여자의 허리춤을 붙잡고 있는 조그만 남자아이가 보인다. 진짜 빨리 오네요. 여자의 손에서 건네진 지폐를 받는다. 꾸벅 인사를 한 뒤 뒤돌아 나온다.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등을 타고 넘어온다. 땅거미의 흔적이 아파트 복도를 수놓는다.


가게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수혁의 모습이 보인다. 허공을 휘젓던 수혁의 시선이 나와 마주친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혁이 꾸벅 인사한다. 수고하셨습니다. 눈으로 인사한 뒤 안으로 들어간다. 손을 내미는 사장 앞으로 배달비를 건넨다. 주방에 들어갔다 온 사장이 잔뼈로 튀긴 통닭을 쥐어준다. 가게 안을 빠져나온 뒤 집을 향해 걷는다. 가을의 밤공기는 차다.

개미굴같이 이어진 다세대주택 골목이 보인다. 전봇대에 맺힌 불빛은 곧 꺼질 것처럼 깜빡거린다. 건물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간다. 노파의 냄새가 반지하 철제문을 비집고 풍겨나온다. 손에 들린 치킨 또한 온기를 잃은 지 오래다. 문을 열자 고릿한 똥내가 코를 찌른다. 가슴속에 있던 화가 잔뿌리를 뻗치며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보일러를 튼 뒤 노파가 있는 방문을 연다. 누워 있던 노파가 고개 반쪽을 들어 나를 본다. 이내 고개를 떨구는 노파. 방은 노파가 지려놓은 냄새로 가득하다. 여름이 지났지만 노파의 악취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진다. 한구석에 치킨을 던지고 이불을 들춘다. 검붉은 똥물이 기저귀를 비집고 나와 요를 적셨다. 신경질적으로 내복을 벗긴다. 깡마른 노파의 다리 사이로 기저귀가 빠져나간다. 몇 가닥 남아 있지 않은 헐벗은 거웃이 눈에 들어온다. 초경을 끝낸 소녀의 그것도 노파와 비슷할 것 같다. 전기장판을 빼내고 요를 잡아당긴다. 차가운 방바닥에 맨살이 닿은 노파가 신음을 내뱉는다. 수건으로 노파의 몸 곳곳을 닦는다. 화장실로 가 온수를 튼다. 물 위로 수건을 던지자 검붉은 기운이 빠져나온다. 노파의 미약한 신음이 들린다. 주먹을 다잡는다. 차라리 노파는 정신을 잃고서 어린애가 되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맨정신이 오히려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노파 또한 나의 밑을 닦아주던 시간이 있었을 테다. 밭농사를 마치고 돌아와 내가 지린 똥을 맨손으로 닦아내고, 말려놓은 기저귀 천으로 아랫도리를 감쌌겠지. 배가 고파 울어젖히면, 멍울이 만져지는 가슴을 드러내 젖을 물렸을 테고. 당신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작물이 없었던 것처럼 나의 몸 또한 당신의 손길을 타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해 두해 자라나는 내가 당신의 기쁨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당신은 나에게 그렇지 않다. 깨끗이 쳐내고 싶은 존재일 뿐이다. 나는 당신이 아니다.

물 위로 수건을 던지자 검붉은 기운이 빠져나온다. 노파의 미약한 신음이 들린다. 주먹을 다잡는다. 차라리 노파는 정신을 잃고서 어린애가 되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맨정신이 오히려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미음을 들고 안으로 들어간다. 노파의 몸을 모로 눕힌다. 졸음에 겨운 눈빛이 보이지만 아랑곳 않고 수저를 넣는다. 입가 사이를 비집고 흘러내린 미음이 베개에 떨어진다. 뭉텅이로 빠져 있는 백발이 보인다. 숟가락으로 노파의 이를 툭툭 두드리자 그제야 꿀컥 삼킨다. 노파가 한 그릇을 다 비운 뒤에야 등 뒤로 간다. 힘을 주어 어루만지고, 두드린다. 트림을 토해내는 노파. 내의를 벗긴다. 앙상하게 마른 등과 둔부 곳곳에 피어 있는 욕창이 보인다. 분홍 속살을 드러내는 상처 위로 베이비파우더를 바른다. 하얀 가루가 공기 위로 떠오른다. 노파를 바로 눕히고 이불을 끌어올린다. 노파가 눈을 감자 잠시 뒤 미약한 숨소리가 밀려나온다. 듬성듬성 남아 있는 뒤통수가 보인다. 당신이 평생 일군 업의 결과가 이런 것인가 생각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구석에 놓인 치킨 몇 조각을 뜯고 매트리스에 눕는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온몸을 덮는다. 핸드폰을 확인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하루의 피로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류처럼 퍼진다.


누군가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옆구리에서 다리로 이동한다. 눈을 떠 이불을 들추자 무릎 위로 더듬이를 늘어뜨린 바퀴벌레가 보인다. 등허리에서 시작된 소름이 머리를 찌른다. 잡으려고 일어나자 순식간에 방구석에 있는 장롱 틈으로 숨는다. 어둠에 잠긴 단칸방이 보인다. 곰팡이가 핀 벽은 박제된 화석 같다. 꿈이라 믿고 싶지만, 안착된 현실이다. 노파는 아직도 꿈결을 헤매는지 호흡조차 들리지 않는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두 눈이 크게 뜨인다. 출근시간인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방문을 연다. 그제야 반지하 창문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보인다. 어둠에 잠긴 노파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노파의 낮은 숨결이 목덜미를 잡아채는 것 같다.

시간에 겨우 맞춰 가게로 들어간다. 흘겨보는 주인의 눈초리가 느껴진다. 주방에 있던 수혁이 꾸벅 인사한다. 주인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자 수혁이 포장된 치킨봉지를 내 앞으로 내민다. 잔소리를 피하게 해주는 수혁만의 방법이다. 헬멧을 쓰고 밖으로 나간다. 뙤약볕이 따갑게 쏟아져내린다. 오토바이를 탄 뒤 도로에 오른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린다. 액정 속 메시지를 본 후 가슴 한켠이 뜀박질하기 시작한다. 기다리던 메시지가 왔다. 다음날 저녁에 보자는 딸애의 연락이다. 가속페달을 조금 더 세게 밟는다.

배달에서 돌아온 후 사장에게 사정을 말하니 월급에서 제외하겠다는 말로 답한다. 수혁은 내가 해야 하는 배달만큼 더 달려야 한다. 수혁에게 지폐 한 장을 건네자 웃는 얼굴로 사양한다. 아무리 배달을 돌고 돌아도, 뛰고 또 뛰어도, 발걸음이 가볍다. 황혼을 알리는 노을이 질 무렵, 오늘 하루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노파가 떠오른다. 원체 입이 짧은 사람이지만, 무엇 하나 들어가지 않았으니 곯은 배만 웅크리고 있을지 모른다.

한기가 뺨을 때린다. 방문을 연다.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노파가 보인다. 노파의 입으로 바투 귀를 갖다 댄다. 아침보다 낮아진 숨소리가 미미하게 들린다. 볼을 건드리자 낮게 눈을 뜬 노파가 나를 본다. 이내 눈이 감긴다. 부엌으로 가 주전자에 물을 데운다. 물 끓는 소리가 집 안 가득 퍼진다. 컵에 뜨거운 물을 담아 방으로 향한다. 한 숟가락씩 천천히 목구멍 너머로 넘겨준다. 노파의 눈꺼풀이 사르르 풀린다. 주방 바닥에 놓여 있던 믹서에 미음과 시금치를 넣고 돌린다. 물을 넣어 저어준다. 노파를 모로 눕힌 뒤 또다시 수저질을 반복한다. 정신을 차린 노파가 나를 바라본다. 소눈망울 같은 시선을 피하고 기저귀를 벗긴다. 먹은 게 없어서인지 나온 것 또한 없다. 아기오줌 같은 검붉은 설사만 남아 있다. 몸을 닦고 새 기저귀로 갈아입힌다. 노파를 바로 눕힌 뒤 매트리스에 눕는다. 내일의 바람결은 조금 더 포근했으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있어 노파가 쓰러졌다. 매서운 동풍이 부는 날이었다. 서릿발 맞은 보리를 고르기 위해 산에 올라가던 길, 한파를 맞고 고스란히 엎어졌다. 맨손으로 육남매를 키운 여인의 결말이라 부르기엔 가혹한 처사였다. 형제들은 가슴 아파했지만, 먼저 나서는 이는 없었다. 병실 침대 위로 누운 노파를 두고 침묵이 감돌았다. 그나마 먹고살 만한 게 성근이잖아. 부탁 좀 할게. 큰누나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아내가 손등을 꼬집었다. 몸의 반쪽이 굳은 노파가 나를 건네 봤다. 다른 아이들보다 늦둥이인 나를 더 챙겼던 노파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겠어요. 아내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노파의 주름진 손만 눈에 들어왔다.

노파는 한 그릇도 채 비우지 않고 입가를 다문다. 입꼬리의 반쪽은 탈을 쓴 것처럼 말려 올라가 있다. 늦게 들어오니까 마저 드세요. 앙다문 노파의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깊은 잠에 빠지듯 눈을 감는 노파. 개수대에 그릇을 놓고 밖으로 나선다. 약속시간까지 두 시간 남짓 남았지만 미리 가 있기로 한다. 벽공을 지나온 바람이 머리칼을 스친다.

카페 안 대학생들을 보니 아이들이 떠오른다. 올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도 저만큼 자랐을까. 간간이 아내에게 안부를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주홍빛 노을이 창을 뚫고 떨어진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누군가 콕콕 심장을 찌르는 것 같다. 차임벨이 들릴 때마다 입구를 바라본다. 그때 한 쌍의 남녀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아이들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시선이 마주친다. 표정 없는 아이들이 내 곁으로 다가온다.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단발이던 딸애는 허리까지 머리를 길렀고, 아들은 그새 안경을 쓰고 있다. 어느새 아이들은 내 키를 넘고도 한 뼘 더 자랐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아이들이 자리에 앉는다. 엉거주춤 따라 앉는다. 아들이 음료를 주문하러 간 사이, 엄마는? 띄엄띄엄 묻자, 딸애는 답이 없다. 정적만이 맴돈다. 아들이 돌아오고, 굳게 닫혀 있던 딸애의 입이 열린다. 엄만 아직 준비가 안 됐나 봐요. 노파가 누워 있는 방문을 보고 한숨만 내쉬던 아내의 모습이 파문처럼 일렁이다 사라진다. 안경을 추켜올린 아들이 연이어 말한다. 그래도 유학 마무리까지 보태주셔서 감사해요. 다른 회사 취직하신 거예요? 아들의 시선이 내가 입은 양복으로 향해 있다. 잠잠히 고개만 끄덕인다. 옆에 있던 딸애의 입가에 미소가 생긴다. 그러면 아빠 문제없어요. 할머니만 어떻게 맡겨보세요. 고개를 드니 빤히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있다. 현기증이 인다. 송장처럼 누워 있을 노파의 모습이 보인다. 침묵을 지키자 아이들의 입이 연이어 열린다. 엄마 고생한 거 알잖아요. 큰아빠들 힘들다고 해도 딱 잘라 말하세요. 찻잔의 손잡이만 매만진다. 아이들은 입을 다문다. 딸애의 말이 귓전을 울린다. 아무튼 할머니랑 살 순 없어요. 정리하시고 연락 주세요.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파도처럼 빠져나간다. 빈자리 위로 주홍빛 노을이 내려앉는다.


암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개미집으로 들어선다. 전봇대의 불빛은 꺼져 있다. 딸애의 입에서 나온 정리한다는 말의 의미를 되짚는다. 아이들의 시간 속 내가 없었던 자리를 더듬어보지만, 무엇을 놓고 온 건지 알 수 없다. 층계를 내려가 문을 연다. 오늘도 어김없이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날이 지날수록 고약해지는 것 같다. 가슴이 사레에 들린 것처럼 답답하다. 주먹을 쥐어 쳐보지만, 응어리는 조금 더 단단해진다. 누워 있던 노파가 눈언저리를 치켜떠 나를 본다. 멍하니 바라보니 노파가 먼저 시선을 피한다. 노파의 한쪽 손이 꿈틀거린다. 자리에 앉아 노파의 눈을 마주 본다. 이번에도 노파는 눈초리에서 벗어난다. 두 손을 들어 노파의 얼굴을 바로잡는다. 부러 눈길을 따라잡는다.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큼지막한 눈자위로 물기가 맺힌다. 우우. 짐승의 소리가 비뚤어진 입을 헤집고 나온다. 노파의 이마 위로 얼굴을 맞댄다. 당신을 어쩌면 좋을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집에 노파를 데려온 후부터 아내의 몸은 삭정이처럼 말라갔다. 내가 회사에 가 있는 동안 그 사람도 지금 내가 보내는 시간을 건너온 거겠지. 자신의 어미도 아닌 이의 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닦고, 또 닦았을 것이다.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면 웅크리고 자는 아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요양원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때마다 젊었을 적 노파의 모습이 떠올랐다. 봄이면 내 손을 잡고 산에 오르고, 여름이면 나를 업고 냇가로 갔던 노파. 노파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내 곁으로 걸어와 개나리 꽃봉오리를 건네주곤 조용히 미소지었다. 노파의 미소가 내게 쥐어준 개나리처럼 환히 빛났다. 도랑에서 가재를 잡아 노파에게 넘겨주면, 새끼가재는 다시 강물로 되돌려보냈다. 소리치며 가르치는 대신 오감으로 알려주었다. 잔가지처럼 뻗쳐나오는 노파의 지혜에 놀랄 때마다, 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없이 웃었다.


가을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신호는 좀체 바뀌지 않는다. 20분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청신호로 바뀌고 모퉁이를 돌아 단지 안으로 들어간다. 치킨을 꺼내들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간신히 시간을 맞출 것 같다. 배달을 시킨 호수로 뛰어가니 눈에 익은 현관문이 보인다. 바가지머리 남학생의 집이다. 초인종을 누른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배달 왔습니다. 텅 빈 복도 가득 목소리가 울린다. 잠시 뒤 스르르 문이 열린다. 여학생의 얼굴이 문틈으로 빼꼼히 나온다. 씻고 있는데 소리치면 어떡해요. 말을 끝마친 여학생이 앞으로 무언가 내민다. 21분을 지나고 있는 스톱워치다. 고개를 들어 가만히 얼굴을 본다. 눈치를 살피던 여학생이 눈길을 피한다. 뭐해 시발. 문 뒤편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린다. 저번에 보았던 남학생이 나온다. 아저씨 시간 지났잖아요. 온몸을 훑어내리는 남학생의 눈을 빤히 쳐다보자, 기다란 손이 뻗쳐온다. 봉지를 잡은 손을 떨쳐낸다. 아나 존나 짜증 나네. 남학생의 목소리가 한층 더 올라간다. 그냥 다른 거 먹자. 여학생의 주춤거리는 말이 귓바퀴에 파고든다. 순식간에 문이 닫힌다. 핸드폰이 울린다. 처음 보는 번호가 액정 위로 떠오른다. 귓가에 핸드폰을 갖다 대자 낮은 어조의 음성이 들린다. 성근이 핸드폰 맞습니까. 대답을 하지 않자 뒷말이 재빨리 이어진다. 허성근 나다 나 동명고 이호철. 땅딸막한 몸집에 새우눈을 지닌 까만 얼굴의 소년이 머릿속에 스친다. 호철은 잘 지내냐는 말을 시작으로 오늘 동창회에 꼭 나오라는 말을 덧붙인다.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자, 호철의 말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네 소식 다 들었다. 해줄 얘기 있으니까 꼭 나와라 성근아.


애새끼들이 건방지게 공으로 처먹으려고 해. 사장의 성난 목청이 가게를 울린다. 담배를 태우고 있는 수혁의 곁으로 다가가 주머니에 지폐를 넣어준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수혁을 향해 말한다. 한 번만 더 빠질게 미안해. 수혁이 웃는 얼굴로 다시 지폐를 넘기지만 받지 않는다. 수혁을 따라 주저앉아 담배를 태운다. 연기가 높다란 하늘 위로 피어오른다.

한 번만 더 빠지면 다른 사람 구한다는 사장의 엄포에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선다. 호철의 얼굴만 보고 나오면, 평상시 퇴근시간에 맞춰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동창회 장소인 호프집으로 들어가자 불콰한 술기운이 스친다. 벌써부터 몇몇 이들은 풀린 눈으로 하롱거린다. 호철을 찾는 도중 저만치 가운데에 있던 한 사람이 번쩍 손을 든다. 깔끔한 양복을 빼입은 호철이 보인다. 근처 테이블로 다가가니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고갯짓으로 인사한다. 머리가 하얗게 쇠기 시작한 이들의 중심에 호철이 앉아 있다. 종업원에게 술잔을 부탁한 호철이 내게 먼저 악수를 청한다. 맞잡은 호철의 손에서 묵직한 기운이 실려온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단단한 자신감이 호철의 눈빛에 녹아 있다.

술잔이 놓인 뒤 시작된 대화는 호철의 주도하에 진행된다. 아이들의 교육부터 시작해 집사람과의 잠자리까지. 갖가지 이야기들이 테이블 위 안줏거리로 놓인다. 금테안경을 쓴 남자가 아내의 축 처진 젖가슴만 보면 벌떡거리던 것도 금세 가라앉는다 말한다. 무리의 웃음소리가 세차게 터져나온다. 낄낄거리던 호철이 양복 호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남자에게 건넨다. 야, 우리 가게 놀러 와. 기깔난 년 하나 물어줄게. 다시 한번 웃음이 터지는 가운데 술에 취한 무리 녀석 중 한 명이 입을 연다. 갈보장사 하는 것도 자랑이라고 병신새끼. 호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옆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호철의 눈치를 보며 너도나도 명함을 달라 말한다. 호철이 술잔을 넘긴 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결제를 마친 호철이 내 옆에 다가와 차 앞으로 이끈다. 성근아 타라 집까지 데려다줄게. 한산한 밤의 도로가 드넓은 차창에 펼쳐진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말 많던 호철은 침묵만 지키고 있다. 룸미러를 바라본 순간 호철과 눈이 마주친다. 호철이 굳게 닫힌 입을 연다. 성근아, 우리 학교 끝나고 맨날 당구장 가고 짱깨 먹었던 거 기억나냐.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그때 내가 삑사리 떠도 네가 맨날 쿠션 쳤잖냐. 우리 집 돈 없는 건 어떻게 알고 말없이 밥도 사주고. 난 그때 일 못 잊어. 차 안으로 고요가 감돈다. 호철이 다시 한번 입술을 뗀다. 너희 어머니 아프다는 소식 들었다. 근데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 잠자코 있자 다시 한번 호철의 입이 열린다. 나 우리 어매 죽였다. 고개를 돌려 호철을 바라보니, 한쪽 입꼬리를 올린 호철이 나를 쳐다본다. 기류 속으로 적막이 파고든다.

호철이 다시 한번 입술을 뗀다. 너희 어머니 아프다는 소식 들었다. 근데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 잠자코 있자 다시 한번 호철의 입이 열린다. 나 우리 어매 죽였다.

호철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간단했다. 아픈 어미를 보내주고, 보험금을 타라는 내용. 자신도 그렇게 했다며 고백하는 호철의 눈빛엔 일말의 후회도 보이지 않았다. 병환의 기간이 오래될수록 의심을 사기 적다는 말을 하며, 거짓된 병사를 꾸며내는 방법까지 덧붙였다. 성근아 그거 알지. 들이마시면 목소리 변하는 거. 어머니 계신 방 안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고 헬륨 풀어. 그러곤 밖에서 눈감고 딱 15초만 기다려. 그러면 편안히 가시는 길에 들어선 거야. 나는 괜히 쫄아가지고 한 시간 넘게 못 들어갔는데 그럴 필요 없더라. 빠른 사람은 몇 분 안에 가는데, 어쨌든 20분 안에는 무조건 뒈져. 어린애 같았으면 부검하고 뭐 한다 난리 나지. 근데 보험사나 경찰놈들 살 만큼 산 사람들은 그냥 병사로 처리하대? 여하튼 이게 기똥찬 게 뭐냐면 몸에 흔적도 안 남고 바로 사라지니까 얼마나 좋아. 그저 가시기 전에 맛난 거 사드리고, 좋은 옷 입혀드려. 헬륨 필요하면 얘기하고. 성근이 너니까 이런 말 해주는 거야.

노파의 똥내 같은 은행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온다. 어둠에 잠긴 은행나무가 바람에 나부낀다. 은행잎들이 나풀거리며 노란 불빛을 뿜어낸다. 반지하 계단을 내려가자 문틈에 끼어 있는 종이가 보인다. 노파의 건강검진을 알리는 지물이다. 저번에 받은 게 언제였는지 헤아려보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서니 노파의 신음이 멈춘다. 노파가 있는 방으로 향한다. 식은땀이 맺힌 늙은 얼굴이 보인다. 외투를 벗어 한쪽에 놓아둔다. 감긴 눈은 뜰 기미가 없다. 노파가 이대로 수면 아래로 깊이 침잠하면 어떨까. 손을 들어 노파의 얼굴을 쓸어내린다. 주름진 굴곡이 손끝에 닿는다. 전기장판의 온도를 높인 뒤 노파의 옆에 따라 눕는다. 지독한 구취가 뺨에 닿는다. 우리 둘 모두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 조용히 썩었으면. 노파가 손을 들어 내 볼을 어루만진다. 거슬거슬한 손길이 느껴지지만 보지 않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20분의 데드라인은 올가미로 변해 몸을 옥죈다. 자동차 경적 소리가 온몸을 뒤흔든다. 쉼없이 페달을 밟고, 쉼없이 뛴다. 모퉁이를 돌고, 계단을 오른다. 어쩌면 이건 노파와 나의 게임일지도 모른다. 주사위를 굴려 한칸 한칸 앞으로 나아가지만, 마지막엔 또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무한대의 치킨런일지 모른다. 천장만을 보고 있을 노파의 눈동자, 정리하고 연락 달라는 아이들의 말소리가 가도 위로 포말처럼 떠올라, 귓바퀴를 타고 들어온다. 형제들은 여전히 제 몸 하나 건사하기 급급할 것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속삭이던 호철의 모습이 가을볕에 녹아 부서진다. 내일은 휴무일, 이 게임을 끝내야 할 때가 찾아온 것 같다. 지난번 호철이 건네준 번호를 천천히 누른다.

능력 있고 젊은 신입사원들이 강풍처럼 불어왔다. 늙은 사원들은 힘없이 꺾여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파티션 속 짐을 챙겨 나올 때 돌아보는 이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앞으로 무얼 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마땅한 대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낮잠이 밀려왔다. 해 질 녘 노을이 거실에 잠든 아내의 몸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내는 마른 화초 같았다. 건드리면 푸스스 소리와 함께 부서질지도 몰랐다.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가 꿈속에서 어떤 시간을 유영하고 있을지 가늠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유학이 막바지에 다가오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내가 일어났다. 아내의 멍한 눈빛이 나를 건너보았다. 아내의 푸석한 입술이 열렸다. 그만할래.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내의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고개를 꺾은 아내는 창밖의 어둠만 바라봤다. 끝없이 펼쳐진 암흑이 다가올 내일처럼 보였다. 이미 우리들은 그 속에 잠겨 있는지도 몰랐다. 저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쾨쾨한 날들의 연속일지도, 찌든 시간의 시작일지도, 암담의 끝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분명한 건 눈부신 광명은 아니었다. 겨울의 초입, 노파와 나는 반지하에 들어왔다. 노파는 쓰러진 후 스스로 말을 잃었다. 퇴화된 기관을 버리는 동물처럼. 창문에 부딪힌 겨울바람이 우우 노파의 울음소리를 흉내 냈다.

주방 한구석에 헬륨가스통을 놓은 호철이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인마 잘 생각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마무리 잘하고. 다음 동창회 때 보자. 고개를 끄덕이자 호철이 집 밖으로 빠져나간다. 방문 너머에 있는 노파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다 밖으로 나선다. 노파의 마지막을 위한 준비를 한다. 분홍색 털외투와 전복죽을 산다. 속옷가게에 들러 새 브래지어와 팬티를 마저 장만해 집으로 간다. 발걸음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똑같은 길목을 수없이 돌고 돈다. 미로 같은 모퉁이를 빠져나간 뒤 그때 해도 늦지 않는다. 쉼없이 흐르는 구름을 따라 길을 걷는다. 각도를 바꾼 해가 빠르게 떨어지고, 황혼이 찾아온다. 뛰어놀던 아이들이 엄마손을 붙잡고 돌아간다. 골목을 빠져나온 저녁바람이 온몸을 훑는다. 묵직한 걸음을 떼어 집으로 향한다.

수건으로 마저 물기를 훔친다. 새 속옷과 옷을 입힌다. 주름진 손을 잡으니 노파의 손에 힘이 실린다. 고개를 들어 노파를 본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노파가 천천히 한쪽 고개를 끄덕인다.

방문을 연다. 썩어가는 악취가 얼굴을 덮친다. 노파가 한쪽 고개를 비틀어 나를 본다. 모로 눕힌 뒤 사온 전복죽을 한 수저씩 입에 넣어준다. 노파가 몇 수저 먹지 않고 입을 다문다. 수저로 툭툭 이를 두드려도 소용없다. 입가를 닦아내고 등 뒤로 간다. 한참 동안 어루만지고, 두드린다. 나와 노파 사이에는 정적뿐이다. 낮은 트림이 들리고, 입은 옷가지를 벗겨낸다. 노파의 깡마른 몸이 누렇게 떠 있다. 노파를 등에 업고 화장실에 들어간다. 추위에 드러난 몸이 달달 떨고 있다. 가랑이 품에 노파를 누이고, 식은땀이 굳어 끈적한 몸을 천천히 닦는다. 발가락을 닦고, 종아리를 쓸고, 음부로 향한다. 움찔거리는 노파의 몸. 뱃가죽을 닦고 처진 젖가슴을 문지른다. 젖멍울이 딱딱하다. 인상을 찌푸린 노파가 깊게 한숨을 토해낸다. 머리칼이 죄다 빠진 두상을 거품으로 씻기고, 받아둔 온수를 끼얹는다. 품 안의 굳은 몸이 찻잔 속 꽃잎처럼 스르르 풀린다. 노파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서둘러 물을 끼얹고 노파를 업고 방에 들어간다. 수건으로 마저 물기를 훔친다. 새 속옷과 옷을 입힌다. 주름진 손을 잡으니 노파의 손에 힘이 실린다. 고개를 들어 노파를 본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노파가 천천히 한쪽 고개를 끄덕인다. 순식간에 소름이 돋는다. 밖으로 빠져나와 헬륨가스통을 가져온다. 노파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다. 새어나갈 구멍은 없는지 방을 둘러본다. 창도 없이 벽만으로 가득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가스통의 죔쇠를 천천히 푼다. 치익 소리와 함께 가스가 빠져나온다.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지지만, 쳐다보지 않는다. 밖으로 빠져나와 문을 닫는다. 바닥에 놓여 있던 청테이프를 들어 문틈을 막는다. 20분이면 된다. 20분만 지나면, 이 지겨운 게임도 끝난다.

노파는 눈물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좀처럼 밖으로 내보이는 법이 없었다. 그저 때 되면 논에 나갔고, 밭에 올랐다. 날씨가 화창할 때나 궂을 때나 오늘 같은 내일을 보냈다. 형과 누나들이 좋은 학교에 진학하거나, 사고를 쳤을 때도, 조용히 미소짓거나 침묵만 내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장례식장 한켠에서 묵묵히 담배만 태웠다. 필터 끝까지 재로 변한 줄도 모르고서. 그런 노파의 눈물을 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내가 중학생일 시절, 한겨울 호수에서 친구들과 논 적이 있었다. 여름이면 깊은 수위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테지만, 강철만큼 얼어붙었기에 안심하고 뛰어다녔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 들어선 순간 발이 쑥 빠지며 냉기가 온몸을 감쌌다. 아득한 추위에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집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내 손을 쥔 채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는 노파의 얼굴이 보였다.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보다는 난생처음 보는 노파의 눈물에 당혹감이 밀려왔다. 콧물까지 흘리며 숨이 넘어갈 듯 울었다. 당신에게도 눈물이 있단 걸, 그때 알았다.

노파의 삼일장이 시작됐다. 추석 연휴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소식 없던 형제들이 순식간에 모였다. 20분이 지나, 방문을 열었을 때 노파는 곤잠에 빠진 아이처럼 누워 있었다. 입가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노파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조금 오랫동안, 울었다. 의사는 별다른 말 없이 지병으로 인한 병사라 판명지었다. 보험설계사는 부검 결과가 나온 후 보험금이 지급될 거라 말했다. 병으로 죽었을 때에는 모두 하는 치레이니 걱정 말라 덧붙였다. 영정사진 속 노파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장례식장 바닥만 바라봤다. 가장 연락이 없었던 큰누이는 식이 진행되는 내내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말이 없던 작은형은 자처해 부조계를 맡았다. 육남매 중 유일하게 울음이 나오지 않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상례를 끝마친 조문객들은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보곤 들리지 않게 혀를 차며 지나갔다. 식장 자체가 한 짝의 관이 되는 순간이었다. 건물 앞에서 담배를 태우는 내 옆으로 작은누이가 앉았다. 담배를 꺼내 피우며 입을 열었다. 정신 차려. 엄마 돌아가셨어. 세상에 부모가 죽었는데 울지 않는 자식이 어딨니. 말을 마친 작은누이가 담배를 비벼 끄곤 안에 들어갔다. 저들이 흘리는 눈물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가볍다면 가벼운 것이었고, 무겁다면 무거운 것이었다.

나는 아직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 어째서 마지막까지 말하지 않았는지부터 시작해 사는 게 무엇인지 당신에게서 알고 싶다. 내가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당신에게서 꼭 들어야만 한다.

아내와 아이들이 식장 안으로 들어왔다.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가에 물기가 고여 있었다. 아내가 무너지듯 절했다. 곁으로 다가온 아이들은 내 손을 부여잡았다. 한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난 아내의 얼굴엔 눈물이 그득했다. 아내를 부축하며 데려온 누이들이 입을 열었다. 올케 그러는 거 아니야. 며느리가 이렇게 서럽게 울면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겠어. 고개를 돌려 누이들을 쳐다보니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보험설계사로부터 온 전화였다. 장례식장 뒤로 빠져나가 전화를 들었다. 설계사의 침착한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결과 나와서 연락드렸어요. 예상대로 타살 흔적은 없었는데 눈에 들어오는 게 하나 있어서요. 어머니께서 폐암을 지니고 계셨더라고요. 이미 퍼질 만큼 퍼진 상태였는데 그간 아무 말 없으셨나봐요. 많이 아프셨을 텐데. 보험금 수령은 다음 주 내로 될 거예요. 전화를 끊었다. 가슴 한켠이 홧홧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조그만 불꽃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어디선가 노파의 고약한 악취가 풍겨왔다. 죽어가면서까지 말이 없던 노파 당신을 떠올렸지만, 이내 연기처럼 사라졌다. 누렇게 뜬 노파의 몸, 딱딱했던 젖멍울이 희붐하게 떠올랐다. 어째서 당신은.

깡말랐던 당신은 가벼운 재로 변해 허공에 뿌려졌다.

보험설계사가 들고 온 당신의 부검 사진을 봤다. 유년 시절 당신을 따라 산에 올라 보았던 개나리덤불이 당신의 흉곽 곳곳에 하얀 점으로 박혀 있었다. 삐뚤어진 입을 열어 소리치지 않은 당신의 생각은 무엇이었나 생각해봤지만, 헤아리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당신이 누운 관을 차에 태우고 벽제로 갈 때까지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형제들조차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끌끌 혀를 찼다. 차창 밖 건너가는 풍경을 보며 개나리는 언제 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조금 더 추웠다. 외투를 조금 더 여몄다. 화장터 안으로 들어섰다. 유골을 모두 태우는 시간은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여섯 마리의 치킨을 배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 사람의 생이 정리되는 시간치곤 너무 짧은 게 아닌가. 웃음이 터졌다. 형제들의 눈초리가 나에게로 쏠렸다. 큰누이가 천천히 다가와 입을 열었다. 왜 이제야 우니, 다 끝난 마당에. 고개를 들자 창문에 비친 얼굴이 보였다. 웃는다고 생각했는데, 울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에 되돌아갔다. 많은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조용히 밥을 먹었다. 아이들은 간간이 제 일상을 펼쳐냈다. 딸과 아들이 벌집처럼 펼쳐진 파티션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친다고 생각하니 얹힌 듯 가슴이 답답했다.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맞이한다는 건. 산다는 건 어쩌면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것일까. 조금 더 특별하고, 보다 위로 가기 위해 달렸던 시간들이 숨을 들이마시는 것과 동시에 몸 안으로 들어왔다. 명치 한가운데에 똬리를 틀곤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저 나의 사람과 함께 무사히 오늘을 보내고,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것. 간단해 보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닐까. 문득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희붐하게 피어오른 개나리 같던 그 미소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20분의 데드라인, 치킨런의 게임은 끝난다. 당분간 공원에 나가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경비원이라도 해야 한다. 아이들의 믿음을 위해서라도. 아내가 다려놓은 정장을 입은 채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사장과 수혁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사정상 이번 달까지만 일한다고 말하자 사장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로또라도 됐나 보네 바로 그만둔다 하고. 허씨 나가도 할 사람 많으니까 이번 주까지만 해. 구시렁거리는 사장을 뒤로하고, 수혁이 환히 웃으며 내게 악수를 청한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일 같네요. 말없이 붙잡은 손만 힘을 주어 쥐어준다. 빗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가게 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때늦은 가을비다. 빨리 배달 가라는 사장의 고함이 이어진다. 수혁이 치킨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 한다. 수혁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내젓는다. 방수복을 입은 뒤 수혁의 손에 들린 치킨봉지를 건네받는다. 밖으로 나가자 굵은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도로에 오른다. 만추의 시린 바람이 뺨에 닿는다. 비에 젖은 도로가 미끄럽게 다가온다. 신호가 바뀌고, 앞으로 나간다. 이 정도의 속력이라면 제시간에 도착하고도 남는다. 적신호가 앞을 가로막는다. 사거리에 멈춰 선다.

사람들의 횡단이 끝났지만 좀체 신호가 바뀌지 않는다. 그 순간, 두 눈이 번쩍 뜨인다. 사거리 너머 맞은편 인도로 천천히 걸어가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분홍색 털외투를 입은 백발을 지닌 노파의 뒷모습이 보인다. 혹시 어쩌면. 가속페달을 세게 밟는다. 반대편에서 울린 경적이 귀청을 때린다. 나는 아직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 어째서 마지막까지 말하지 않았는지부터 시작해 사는 게 무엇인지 당신에게서 알고 싶다. 내가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당신에게서 꼭 들어야만 한다. 고릿한 은행 냄새가 코를 스친다. 어디선가 당신의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다. 조금 더 커진 경적이 귓가에 닿는다. 20분의 데드라인. 오늘부로 무한대를 그리던 치킨런의 게임은 끝난다. 빗방울이 눈가를 스쳐 지나간다. 당신을 향해 조금 더, 속력을 높인다.

이항로

 

한겨레21

손바닥문학상

자작나무 숲의 온도

제8회 손바닥문학상 가작

제1144호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이곳은 병원이군요.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가 어렴풋하게 보여요. 병실 안이 환한데도 조금 춥네요. 지금이 무슨 계절이죠? 조금 더 두꺼운 이불을 가져다주세요. 엄마, 내 목소리가 들려요? 추워요. 아주 밝은 빛이 엄마의 윤곽을 마구 뭉개고 있어요. 마치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요. 온 세상이 고요하고 잠잠해요. 보이는 모든 것들이 쉬지 않고 일렁거려요. 무엇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거죠?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내가 얼마 만에 깨어난 거예요? 엄마, 제발 울지 말아요. 이제 괜찮아요.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예요.


시베리아의 이상 저온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네요. 볼륨을 좀 높여주세요. 맞아요. 저곳이 내가 있었던 곳이에요. 한극, 추위의 끝이라 불리는 곳. 다섯 달치 눈이 한 달 새 내렸다는군요. 북극의 이상 고온으로 따뜻해진 수증기가 이례적인 폭설로 쏟아졌다고요. 예전 같았으면 저 역시 그렇게 분석했을 거예요. 따뜻해진 북극의 영향으로 추운 시베리아가 더욱 차가워진 거라고. 그런데요, 엄마. 북극이 왜 따뜻해졌을까요.


미희를 만난 건 이른 봄이었어요. 삼월 중순쯤 됐을까요. 계절상으로는 봄이지만 일 년 중 8개월 가까이 눈이 내리는 야쿠츠크에는 오월에도 눈이 내려요.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 있죠. 이미 봄인데도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날들이 이어져요. 그날도 전날 내린 눈이 야쿠츠크를 뒤덮고 있었어요. 이 년을 질질 끌다 완성한 논문을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너무 피곤한데도 논문을 끝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워서 곧장 집으로 들어가기가 싫었어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죠. 영화관에서 러시아어로 더빙된 영화 한 편을 보고 마트에 들렀어요. 한참을 구경한 후에 고기며 과일, 온갖 군것질거리와 케이크까지 사고 나오자 밖이 어두워져 있었어요. 찬바람까지 불기 시작해서 서둘러 집으로 향했어요.

집 근처에 이르러 두껍게 언 눈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언덕을 올라가고 있을 때였어요. 아파트 입구 옆에 검은 형체가 언뜻 보였어요. 내가 살던 곳은 개발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동네라 치안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해가 지면 걸어다니는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요. 잔뜩 긴장한 채로 열쇠를 손에 꼭 쥐고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막내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석이 아저씨였어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긴장이 탁 풀려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아이, 아저씨. 놀랐잖아요.’ 하자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어요. 그러곤 따라오라고 하더군요. 집에다 짐을 넣어두곤 아저씨를 따라나섰어요. 오랫동안 아저씨를 보지 못했던 터라 반가우면서도 오랜만에 보는 아저씨가 낯설었어요.


아저씨는 아파트 뒤로 죽 이어진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갔어요. 낮에는 가끔 산책이나 할 겸 해서 숲길로 다닌 적이 있었지만 한밤중에 숲으로 들어간 건 처음이었어요. 달빛에 반사된 흰 눈길이 끝도 없이 꼬불꼬불하게 이어져 있었어요. 자주 왔었던 곳인지 아저씨는 거침없이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나중엔 거의 뛰다시피 걷는 바람에 쫓아가기가 힘들었어요. 숲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빽빽한 나무 때문에 길이 잘 보이지 않았어요. 몇 번을 미끄러지면서 걷다 보니 덜컥 겁이 났어요. 몇 달 동안 보지 못했던 아저씨, 인적이 없는 깊은 숲. 혹시 또 북쪽에서 무슨 얘기가 내려왔나? 이제는 어쩔 수 없어서 나를 해치려 하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걸음을 멈췄는데, 아저씨가 멀리서 뭔가를 안고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어요.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하다가 멈췄어요. 그리고 잠깐이나마 아저씨를 의심했던 것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느꼈어요. 아저씨가 울고 있었거든요.


처음엔 죽은 짐승인 줄 알았어요. 고라니 같은 것이 어두운 색 담요에 쌓여 있는 줄 알았다고요. 다가가서 보니 아저씨 품 안에 안긴 것은 사람이었어요, 엄마. 사람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야윈 어린아이였어요. 몇 시간을 그 숲속에 있었던 건지, 아니 몇 날 며칠을 있었던 건지, 새파랗게 얼어 있었어요. 그제야 아저씨도 얇은 티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는 얼른 목도리를 벗어 아저씨의 목에 두르고 병원에 가자고 말했어요. 고집부릴 때가 아니라고 말을 해도 아저씨는 ‘집으로 좀 가자우.’ 할 뿐이었어요.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지금 돌이켜봐도 생각이 잘 나질 않아요. 전기장판을 틀어놓고 뜨거운 물을 욕조에 받았어요. 갑자기 온도 차이가 나면 뇌혈관이 터질 수도 있어 마냥 뜨겁게만 할 수도 없었어요.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아이를 닦고 얇은 옷을 여러 겹 입혔어요. 니트 모자를 씌우고 양말까지 신기고 나서 좀 기다리자 창백했던 아이의 볼에 아주 조금씩 혈색이 돌았어요. 어찌나 안도감이 들었는지요. 뭘 좀 먹여야 할 것 같아 냄비에 쌀죽을 끓였어요. 아저씨는 부엌 식탁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목도리 끝만 만지작거리고 있더라고요.

죽을 좀 드시라고 해도 드시지도 않고, 차를 끓여 드려도 가만히 보고만 계셨어요. ‘저 애가 미희예요?’ 하자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아저씨가 보낸 돈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요. 딸 하나 잘 먹여보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데. 열 살이라는 미희는 여덟 살도 채 안 되어 보였어요.

아저씨가 목도리를 벗어서 잘 개어놓은 후에 입을 열었어요.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아저씨의 목소리가 너무 작고 약해서 나는 무서웠어요. 예감이 좋지 않았어요. 나는 얼른 ‘아저씨, 걱정 마세요. 내가 여기서 미희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다 할 테니까.’ 하고 아저씨 입을 막았어요. 아저씨는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다시 말했어요.

“난민증….”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고 말을 이었어요.

“도와달라.”

아저씨가 가고 나서 한참을 부엌에 앉아 있다가 미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어요. 미희는 뒤척이지도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어요. 이불을 걷고 몸이 좀 따뜻해졌는지 보려고 양말을 벗겼어요. 여러 번 동상에 걸렸는지 발가락이 모두 검게 변해 있었어요. 소용없겠지만, 그래도 연고를 좀 바른 채로 다시 양말을 신기고 이불을 덮어줬어요. 이 작은 아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여기까지 오느라 몇 개의 국경을 넘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니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게 허무하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지역별로 눈의 결정을 관찰하고, 쌓인 눈의 깊이를 측량하고, 매일 내리는 눈의 양을 기록하고…. 엄마, 그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내가 부지런히 기후를 관측하고, 관찰하고 기록할수록 사람들은 두려워하겠죠. 겨울이 점점 더 혹독하게 추워지고 있고 지상에서 봄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하니까요. 지난 4년간 매달렸던 논문 때문에 책상 옆에는 하얀 에이포용지가 눈처럼 쌓여 있었어요. 엄마, 나는 지금까지 무얼 하며 살았던 거죠?

엄마. 이 년 전 겨울을 기억해요? 맞아요. 석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잠시 들렀잖아요. 오랜만에 집에 왔다고 엄마가 잡채며 갈비찜이며 맛있는 것도 많이 해줬었잖아요. 그때 얘기했던 철이 아저씨, 기억나요? 내가 한국에 돌아간다고 내 손에 오천 루블짜리 지폐를 쥐여줬던 그 아저씨요. 학교 앞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타려는데 누가 갑자기 제 앞에 끼어들더니 손에다가 종이 같은 걸 쥐여주는 거예요. 검은 야구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서 누군지 몰라봤는데 내 귀에다 그러데요. ‘조심히 잘 가라. 내 이름 김춘일. 잊지 말라.’

오천 루블이면 아저씨들이 한 달 동안 쓸 수 있는 생활비였어요. 김 춘 일. 그날 처음으로 철이 아저씨의 진짜 이름을 알았어요. 그리고 밖에서 아저씨를 만난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죠. 감시 때문에 아저씨들이 우리 아파트에서 공사가 있는 날에만 조심스럽게 집 안에서 만나곤 했었거든요. 그 좁은 집에서 새해가 되면 떡국을 끓여 먹고 여름이 되면 냉면을 말아 먹곤 했었어요. 날이 새도록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도 하고, 같이 카드게임도 하고요. 철이 아저씨는 난민증을 발급받아서 곧 한국으로 떠날 예정이었어요. ‘기회가 되면 꼭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 하고 헤어졌는데….

그날 아저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내가 한국에서 호사를 누리며 쇼핑도 하고 매일같이 배가 터지도록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야쿠츠크에서의 일들은 새까맣게 잊어갈 때, 야쿠츠크의 사람들은 가장 추운 겨울을 나고 있었어요. 한국에서의 짧은 시간을 보내고 야쿠츠크의 집에 도착했던 날이었어요. 식탁 위에 황토색 봉투 하나가 반듯하게 놓여 있더라고요. 너무 놀랐어요. 집 열쇠는 나만 가지고 있었거든요. 집주인이 왔다 갔나 하고는 봉투를 열었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어요. 엄마. 철이 아저씨는 국경을 넘지 못했나 봐요.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진. 봉투 속에는 눈 속에 거꾸로 처박힌 철이 아저씨와 아저씨 옆으로 번져 나온 새까만 피, 그리고 아저씨가 쓰고 있던 야구모자가 찍힌 사진이 들어 있었어요.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그리고 누가 우리 집에 그 봉투를 두고 갔던 걸까요.


그 후로 아저씨들과 전혀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시내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내 쪽에서 먼저 피하고 모른 척했죠. 두려웠어요. 아저씨들과 보낸 따뜻했던 모든 시간을 후회하기 시작했어요. 왜 위험하게 아저씨들과 가까이 지냈을까. 주변에서 조심하라고 말릴 때 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까. 내가 어려울 때마다 기꺼이 나서서 도와주었던 아저씨들을 미워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아저씨들과 같은 처지에 놓일까 봐 벌벌 떨었어요. 내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자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환경, 안전에 대한 안정감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요. 박사를 다른 곳에서 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죠.

‘시베리아의 이상 저온 현상에 관한 연구’. 그동안 작업해놓은 논문과 논문계획서를 가지고 다른 지역 대학의 교수들에게 연락을 돌렸어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당시 이상 기후 현상이 급속도로 심각해져서 러시아 전역에서 연구팀을 꾸리고 있었어요. 야쿠츠크에 있으면서 직접 관측하고 연구한 이력 때문에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조건으로 연구팀에 합류시켜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엄마와 통화했던 내용도 기억이 나요. ‘우리 딸 출세했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보람이 있네.’ 평소에는 무뚝뚝하던 아빠도 그날은 ‘수고했다.’고 나를 격려했었죠.

박사과정은 정규학기인 9월부터 시작하기로 했어요. 나는 3월부터 8월까지 남는 시간에 연구 과제를 좀 미뤄두고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 전역을 도는 여행을 계획했어요. 하루라도 빨리 야쿠츠크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떠나기 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서 하릴없이 TV를 보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소름이 끼쳤어요. 이 시간에 누굴까. 가만히 문가로 가서 귀를 기울였어요. 그때 ‘막내야.’ 하고 부르는 석이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엄마, 사실 그날, 나는 봤어요. 철이 아저씨를 따라가던 두 사람을요. 그날 학교에 가는 길에 우리 집 아파트 앞에서 봤던 사람들이었어요.

문을 열자 아저씨가 술에 취한 채 손에는 검은 봉지를 들고 서 있더군요. 아저씨는 현관에 서서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고 마른세수만 몇 번을 하더니 봉지를 내려놓고 뒤돌아섰어요. 석이 아저씨의 뒷모습과 철이 아저씨의 뒷모습이 겹쳐졌어요. 항상 붙어다니던 두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가면 영영 보지 못할 것만 같았는데도 아저씨를 잡지 못했어요. 봉지 안에는 아저씨들이 월급날이면 사다 주곤 했던 오렌지 두 개와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어요. 석이 아저씨까지 위험해질까 봐 나가서 배웅조차 하지 못하고 문을 잠갔어요. 그때서야 내게 아저씨들이 어떻게 했었는지 다시 생각이 났어요. 내가 논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 ‘막내야, 그래도 네가 열심히 해야 우리가 더 신이 나서 일을 하디.’ 하던 일들, 때때마다 가족처럼 챙겨주던 일들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엄마, 사실 그날, 나는 봤어요. 철이 아저씨를 따라가던 두 사람을요. 그날 학교에 가는 길에 우리 집 아파트 앞에서 봤던 사람들이었어요. 한 사람은 갈색 가죽점퍼에 러시아 털모자를, 한 사람은 두툼한 패딩점퍼에 검은색 니트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공사하러 오는 아저씨들 중에 새로 온 분들인가 보다 하고 지나쳤는데, 그날따라 학교에서도, 버스정류장에서도 그 사람들과 마주쳤어요. 내가 버스에 올라 철이 아저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자리에 앉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 동전으로 창문에 얼어붙은 성에를 긁어내고 밖을 내다봤어요. 철이 아저씨의 뒤를 그 두 사람이 밟고 있었어요.

엄마. 그날 내가 학교에 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철이 아저씨가 오천 루블을 가지고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내가 ‘설마, 아닐 거야….’ 하고 넘기지만 않았더라면, 빠르게 대처를 했었더라면, 철이 아저씨에게 위험하다고 알렸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요? 애초에 아저씨가 난민증을 받는 걸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날의 나는 왜 더 조심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우리는 왜, 만나서는 안 되는 걸까요.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석이 아저씨가 아이스크림을 주고 간 날 내게 한 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어요.

“막내야.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디….”

엄마, 그럼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왜 일어났던 걸까요.

석이 아저씨가 다녀갔던 밤, 나는 다른 도시로 가려는 계획을 모두 취소했어요. 야쿠츠크에 남아, 아저씨들 곁에 남아 처음에 계획했던 연구를 마치기로 했어요. 내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어디로도 가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더는 도망치지 않고 아저씨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조금이나마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겠다고 했던 약속이오.


엄마.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미희는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어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좀 답답해했지만 집에서 그림도 그리고 공부도 하면서 의젓하게 잘 지냈어요. 석이 아저씨는 이른 새벽에 종종 찾아왔어요. 두부며 떡이며 야쿠츠크에서는 구하기 힘든 음식들을 어디서 그렇게 구해오는 건지. 미희는 아저씨가 두고 간 음식들을 먹으면서 내게 국경을 넘어 야쿠츠크까지 오게 된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어요.

그사이 아저씨의 부탁대로 나는 미희와 아저씨의 난민증을 신청했어요. 야쿠츠크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는 아저씨 대신 내가 다른 도시로 넘어가서 변호사를 만나고 왔어요. 하루, 이틀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난민증 발급은 계속해서 미뤄졌어요.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내 박사 논문 심사가 통과됐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학기가 끝나는 유월쯤이면 논문 발표까지 끝이 날 예정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유월 말쯤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죠. 아저씨와 미희에게 그 사실을 차마 얘기하지 못하고 몰래 조금씩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어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야쿠츠크의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렀어요. 온갖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넘쳐나고 쇼핑할 곳도 많은 한국에 비해 야쿠츠크의 생활은 너무 단조로웠어요. 눈이 있는 동안에는 밖에 나가 30분 이상 걷기도 어려울 만큼 춥고, 고요했어요.

매일같이 빨리 한국에 가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한국에서 큰 사건이 터졌어요. 많은 학생이 목숨을 잃고 많은 사람이 가족을 잃었어요.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가 TV와 인터넷으로 전세계에 보도됐어요. 아저씨와 미희는 나를 안아주며 위로해줬어요.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북한에서도 아파트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났어요. 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어요. 너무 많은 사람이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무턱대고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 앞에서 나는 미희의 손을 꼭 잡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뉴스가 끝나고 미희가 내게 물었어요. 슬픔을 참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엄마. 엄마는 슬픔을 견뎌내는 법을 알고 있나요? 그렇다면 내게도 좀 알려주세요. 그날 나는 미희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 아이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미안해, 미희야. 이모가 미안해.’ 하면서요.

미희 안에는 얼마만큼의 슬픔이 있었던 걸까요.

엄마. 나는 확신하게 됐어요. 슬픔에도 무게가 있다는 걸요. 얼마나 무거운 슬픔이 그 아이 안에 있었기에 그 작은 아이가 날아가버리지 않고 이 땅을 걸을 수 있었던 걸까요. 어떻게 열 살짜리 아이가 국경을 넘고 도시의 경계를 넘어 추위의 끝, 한극에 다다랐을까요.


겨울 같았던 봄이 지나고 유월이 됐어요. 아저씨가 난민증이 나왔다고 내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마침, 내 논문도 학술지에 발표가 됐어요. 아저씨와 미희에게 그제야 나도 한국에 돌아간다고 이야길 했어요. 아저씨는 떠나기 전에 꼭 파티를 하자고 했어요. 아저씨의 입에서 나온 ‘파티’라는 말이 퍽 우스워 나는 웃었어요. 케이크는 내가 준비하겠다고 했었죠.

아저씨와 미희가 다른 도시로 떠나기로 한 날 진짜로 나는 케이크를 샀어요. 생일 때만 불던 초를 불자 미희가 신기했는지 왜 초를 부느냐고 물었어요. 나는 미희에게 이제 미희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됐다고 얘기했어요.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아는 나라가 있냐고 묻자 미희는 야쿠츠크가 제일 좋다고 대답했어요. 춥기만 하고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여기가 뭐가 좋으냐고 묻자 이렇게 말하더군요.

“여기에는 아빠가 있잖슴까.”

그 말에 우리는 같이 웃었어요. 우리에게 좋은 날들이 올 것 같았어요. 죽음이 늘 내 뒤에 있는 것 같은 두려움도, 누군가로부터 감시받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함도, 답답한 아파트에서 숨어 있어야만 하는 생활도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날은 따뜻하다 못해 더워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두꺼운 겉옷을 모두 벗어버렸어요.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죠. 아주 잠깐이었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어요. 마음 놓고 웃고 떠들었던 잠깐의 시간이요.

엄마. 이것이 내가 아는 이야기의 전부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후로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요.

저녁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도시로 가는 걸 도와주기로 한 사람이 집으로 왔어요.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미희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매일 걸고 다녔던 목걸이를 미희에게 걸어줬어요. 엄마가 내게 주었던 그 목걸이 말이에요. 나를 지켜줄 거라던 호루라기 목걸이. 미희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고맙슴다.’ 하고는 웃었어요. 아저씨 손을 꼭 잡고는 눈물을 참으며 끝까지 웃어줬어요. 아저씨는 내게 ‘잘 있으라우.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만나자.’ 하고 악수를 청했어요. 아저씨의 거친 손이 따뜻했어요. 울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 눈물이 나더군요. 지금 헤어지면 우리가 언제 또 만날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눈물이 났어요. 그리고 세 사람은 차를 타고 떠났어요.

엄마. 이것이 내가 아는 이야기의 전부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후로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요. 미희와 아저씨는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고, 나 역시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런 축복이 주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한국에서의 교수 임용이 자꾸만 미뤄졌어요. 실력으로, 경력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점수들이 있었어요. 열심히 살아도 되지 않는 일들이 있더라고요. 칠월이 되고, 팔월이 되고 여름이 끝나가는데도 나를 부르는 곳이 없었어요. 결국, 나는 또 야쿠츠크를 떠나지 못하고 야쿠츠크 대학의 박사후 연구원으로 취직했어요.

엄마 아빠는 왜 계속 그 추운 곳에 있으려 하냐고 야단이었죠. 엄마 아빠를 실망하게 하는 것 같아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직접 갈 필요가 없었는데도 탐사대와 함께 노릴스크, 무르만스크와 같은 북극권의 도시들을 돌며 기후를 관측했어요.

북극의 기온은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어요. 재작년보다는 작년이, 작년보다는 올해 기온이 더 높았어요. 겨울이 다가오는데도 북극은 여전히 따뜻했어요. 내가 논문에서 주장한 것과 같이 탐사대도 북극이 따뜻해지는 이유를 ‘지구온난화’로 꼽았어요. 그렇게 결론을 내려놓고 어떻게 기후가 변하고 있는지를 기록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었죠.

한 달 정도 북극권의 도시에 있다가 야쿠츠크로 돌아온 날이었어요. 시월 초였는데 야쿠츠크에는 폭설이 내렸어요. 이상할 만큼 따뜻한 북극, 무서울 만큼 추운 시베리아. 순간 섬뜩했어요. 정말 단순히 지구온난화 때문에 북극이 따뜻해지고 있는 걸까. 오랜 시간 매달려 연구를 하면서도 처음의 가정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어요. 만약, 지구온난화가 아니라면요. 그렇다면 이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북극권의 도시들을 다니면서 시력이 더 나빠졌어요. 야쿠츠크에 살면서도 눈에 반사된 빛이 강해서 시력이 많이 나빠졌던 터였죠. 안경을 몇 차례나 다시 맞췄어요. 안경 없이는 모든 물체가 형체를 잃고 흐릿하게 보였어요. 시력이 나빠지자 신기하게도 귀가 밝아졌어요. 소리만으로도 어떤 눈이 내리는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베갯잇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깊이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은 오랜 탐사로 피곤하기도 했고, 날도 너무 추웠어요.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아놓고 반신욕을 했어요. 그걸로 모자라서 반신욕이 끝난 후엔 팔팔 끓인 우유에 홍차를 넣어 밀크티를 만들어 마셨어요. 그런데도 추웠어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어요. 전기장판을 틀어놓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엎드려 있는데 어디선가 ‘삑’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처음에는 분명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려 누웠는데 또다시 ‘삑’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삑. 삑. 삑. 삑. 삑.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그리고 밖으로 뛰쳐나갔어요. 삑. 삑. 삑. 자작나무 숲 쪽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삑. 삑. 삑. 눈이 아직 얼지 않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이 푹푹 빠졌어요. 무릎까지 쌓인 눈 때문에 빨리 걸을 수가 없었어요. 삑. 삑. 삑. 온 세상이 희뿌옇게 빛나고 있었어요. 보이지 않았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어요. 어느새 석이 아저씨의 뒤를 따라 걸었던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어요. 삑. 삑. 삑. ‘설마… 아닐 거야.’ 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어요. 내 눈앞에서 흰 눈과 하얀 자작나무가 한데 엉겨붙은 것만 같았어요. 삑. 삑. 삑. 소리가 나는 곳에 이르면 나는 무엇을 보게 될까요. 엄마, 나는 두려웠어요. 삑. 삑. 삑.

그리고 소리가 끊어졌어요.


엄마, 미희가 깨어나기를 기도해주세요. 미희의 심장박동 소리가 그날의 호루라기 소리와 겹쳐서 들려요. 미희는 아직도 그 숲속에서 호루라기를 불고 있는 걸까요?

석이 아저씨의 행방을 알 수가 없어요.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돼 북한으로 이송되었단 소식만 들었어요. 아저씨의 난민증은 발급이 되지 않았다는 걸, 그때는 몰랐어요. 미희는 유엔의 안전가옥까지 갔다가 다시 나를 찾아왔던가 봐요. 야쿠츠크에 오면, 다시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요? 그날 밤 자작나무 숲에서 그 작은 몸집의 아이가 입술이 부르트도록 호루라기를 불고 있었어요. 자작나무 숲속에서 정신을 잃기 전에, 눈앞이 온통 새하얀 속에서도 미희가 불고 있던 호루라기, 그것만은 선명하게 보였어요.


엄마. 슬픔에 무게가 있다는 얘기, 했었죠. 그날 알았어요. 슬픔은 온도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요. 따뜻하고 무거운 슬픔. 미희는 호루라기를 불면서 그 슬픔을 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빠를 왜 잃어야만 했는지, 언제 다시 볼 수 있는지, 누군가 그 아이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미희는 호루라기를 불고, 불고 또 불면서 따뜻하고 무거운 슬픔이 제게서 증발하기를 바랐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엄마, 슬픔은 증발하지 않아요. 끊임없이 순환할 뿐이에요. 그날도, 슬픔 때문에 뜨거워진 공기가 북극까지 가닿았던 게 아닐까요.

엄마, 나는 자꾸만 우리의 슬픔 때문에 북극이 따뜻해진 것만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우리가 이 슬픔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요? 우리는 왜 헤어져야만 할까요.

어서 달나라로 가서 살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그곳에선 우리의 슬픔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요.

엄마. 울지 말아요. 제발 울지 말아요. 이제 괜찮아요.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예요. 아직, 우리의 삶이 끝나지 않았잖아요. 내 옆의 작은 아이의 심장이 아직 뛰고 있어요.

호루라기를 부세요. 우리가 아직 이곳에 있다고, 호루라기를 불어주세요.

김혜인

작 ‘자작나무  숲의  온도’  김혜인  수상  소감

잊지  않겠습니다

김혜인 제공
또다시 추운 계절입니다. 찬바람이 불면 잃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뒤에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를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만나기도 전에 헤어지는 일들,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이지도 못하고 영영 그리워해야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슬픔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는 거라고 믿습니다. ‘잊지 않겠다’는 말을 품고 또 하루를 살아갈 당신께 이 작은 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겨울,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무사히 났으면 좋겠습니다. 모두의 안녕을 바랍니다.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늘 두렵고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런 제게 용기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한겨레21>과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간에도 시차가 다른 곳에 사는 자식들을 응원하고 계실 아버님, 어머님, 아빠, 엄마, 늘 따뜻하게 챙겨주는 아가씨, 새로운 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선팔이, 그리고 막내 식빵이. 소중한 이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 글의 첫 독자가 되어주고 슬픔을 함께 나눠준 남편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한겨레21

손바닥문학상

푼타아레나스행 택배

제9회 손바닥문학상 가작

제1194호
등록 : 2018-01-02 10:17 수정 : 2018-01-05 11:35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잠에서 깼을 때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놀란 마음으로 주변을 더듬자 솜으로 된 쿠션과 딱딱한 뼈대가 느껴졌고 뼈대를 더듬어갈수록 사각형 구조가 만져졌다.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발을 뻗었더니 무릎을 살짝 폈을 뿐인데도 끝에 닿았고 얼마 있지 않아 솜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풍겨왔다. 옆으로 누운 성인 남자의 어깨보다 조금 높은 키, 쭉 뻗은 자세에 못 미치는 길이와 인조가죽, 그리고 쿠션 등을 고려할 때 내가 소파에 누워 있는지 모르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새벽녘 소파에 앉았던 기억이 난다. 밤샘 택배 분류 작업을 마치고 같이 일하는 조 선배와 소주를 나눠 마신 다음 돌아오는 길이었다. 단지에 들어서 취기를 낮추려고 담배를 꺼내 물고 분리수거실 주변을 서성였다. 그때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 작은방, 그러니까 내 방에 있던 소파였다. 어둡긴 해도 소파의 모습이 낡은 여행용 가방을 닮았기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소파의 등받이 부분은 짙은 밤색으로 평범했지만 깔고 앉는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했을 법한 구제 스타일 트렁크를 닮아 있었다. 약간 밝은 밤색의 사각형 트렁크, 모양뿐 아니라 실제 구제 트렁크로 보이도록 그림까지 그려진데다 클립과 단추 같은 인테리어 소품이 달려 있어 언뜻 보면 진짜 가방을 붙여놓은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손잡이 양옆의 금속 클립을 동시에 누르면 딸깍 소리를 내며 천천히 주둥이가 열리는 그런 트렁크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밖에 나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위에서 자고 나온 터였다. 찜찜한 기분으로 담배 불똥을 손끝으로 툭 털어내고 소파에 앉았었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설마 엄마가 기어코 버리고 만 것일까?

엄마는 좁은 방에 소파까지 들이는 건 무리라고 했다. 접었다 펼 수 있는 간이침대를 놓든가, 그것도 아니면 맨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라는 식으로 잔소리를 해대고는 했으니까. 매형한테 눈치가 보여 그랬는지 모른다. 엄마는 대한민국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든 아파트를 손에 넣어야 한다며 있는 대로 대출을 받아 전세까지 낀 다음 아파트를 장만했다. 처음에는 일이천 올라 좋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일단 오르면 좋은 거고 어차피 끼고만 있어도 망할 일이 없다, 라는 생각은 순진했던 모양이다. 내가 가게를 얻기 위해 제2금융권에 담보로까지 잡힌 아파트에, 턱까지 찬 전세금을 내려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엄마는 깡통이 된 아파트를 팔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었는데 그때 누나한테서 연락이 왔다. 언젠가 이 동네가 다시 뜰 거라는 확신을 했는지 살고 있던 소형 아파트를 팔아 전세자금을 마련하겠다고. 그런 다음 가족을 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누나와 매형, 조카 세윤이를 데리고서. 집은 매형과 엄마의 공동명의로 바뀌었고 석 달 뒤 나도 들어왔다. 낡은 트렁크 소파와 함께.

트렁크 소파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거미줄 같은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 어느 골목의 골목 거기서 또 골목의 끝 추로스&도넛 가게에 자리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사람들의 엉덩이 세례를 받겠노라고 다짐을 하면서.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골목 어딘가에서 거대한 타란툴라가 막고 섰는지 내 가게까지 찾아오는 이는 드물었다. 일단 입소문이 퍼지면 북한산 끝자락이라도 찾아올 거라는 믿음은 병신 같은 희망이었다. 가게는 여섯 달을 버티지 못했고 수천만원의 시설비만 날린 채 또 다른 희망이에게로 넘겨졌다. 시설을 몽땅 버리다시피 하고 나올 때 챙긴 유일한 물건 중 하나가 소파였다. 가게 테라스에 놓여 있던 안락의자는 매형 어머니가 쓰신다 하여 부천으로 보내드리고 소파는 침대 대용으로 쓰려고 작은방에 들여놨다. 소파를 구석에 밀어놓고 엄마에게 약속했다. 원룸 보증금을 마련할 석 달 동안만 얹혀살겠다고.

약속한 기일이 지났기 때문에 소파를 버린 걸까? 매형 눈치가 보여 그러는지 엄마는 최근 들어 부쩍 잔소리가 늘었다. 서른도 훌쩍 넘었는데 앞으로 뭐가 될 거냐고 뭐가 될 생각이 있기는 하냐고 공연히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왜 달동네 하꼬방 같은 데서 과자나 굽는 일을 시작했느냐고. 거지 같은 소파 하나 남기자고 돈 칠천 털어먹었냐면서 말이다. 황홀한 갭투자의 성공은 물 건너간데다 명의마저 넘어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탓인지 엄마의 말끝은 거칠고 바짝 말라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처음에는 소파를 좋아했으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혼란스러우면서도 눈꺼풀은 무거웠다. 열두 시간 동안 택배 분류를 하고 나면 누구나 그렇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의 기준이 잠과 식욕에 맞춰진다. 뜨거운 사발면도 1분 안에 먹을 수 있고 사람들이 오줌 묻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작업장 한쪽의 종이상자 위에서도 꿀잠을 잘 수 있게 된다. 그 5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먼지바람에 목구멍이 간질거려도 부은 눈꺼풀은 돼지본드로 붙여놓은 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더불어 적당한 어둠과 좁은 공간이 주는 푸근함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처음과 달리 소파 안이 편안해졌고 비좁은 소파 안은 소파 바깥의 일이 들어올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 안이 훨씬 더 안전한 곳인지도 모르겠다고.

소파 밖에는 사람들과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근 시간과 대출 상환일 같은. 반면 소파 안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수염고래의 종류, 인천공항 리무진 버스의 운행 시간, 그리고 유튜브에서 본 다큐멘터리의 시답잖은 장면 같은 것들로 말이다. 대출금을 깎아주거나 할부금을 유예해주지도 않는 것들인데 저마다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어째서 소파 안이 이따위 것들로 채워져 있을 뿐인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 마음이 편안했다. 어쩌면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상상하느라 현실을 잊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멍청한 상상을 수정구슬처럼 끌어안고 잠이 올 때까지 문질러대고는 했다.


실제 소파에도 반질반질 윤이 나는 곳이 있는데 왼쪽 팔걸이 부분이다. 소파에 누우면 발가락이 팔걸이에 닿았는데 잠들기 전까지 발목을 까딱거리며 그 부위를 쓰다듬고는 했다. 그래서 왼쪽 팔걸이 부위만 매끄럽게 윤이 났고 조카 세윤이가 그쪽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엄마는 세윤이를 들어 반대편 쪽에 내려놓고는 했다. 그러고는 이놈의 소파 좀 버리든가 하지, 라는 말을 지나가는 듯 흘렸다.

엄마의 잔소리가 심해질 것 같으면 밖으로 나와 단지 안을 서성였다. 그렇게 기다리다보면 얼마 안 있어 거실 불이 꺼졌고 안방에 있는 등에 불이 들어왔다. 그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가 다시 소파 위에 조용히 누웠다. 안방에서 새어나오는 텔레비전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소파 위에서 자는 건 생각보다 편안하다고. 진짜 트렁크 가방처럼 뚜껑이 열리게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소파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는지 소파가 느끼는 감각을 조금씩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우선 소파에 전해지는 온도를 순차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싸구려 가죽을 데우고도 남아 이렇게 등에까지 전해진 걸 보면 시간은 오후 한 시에서 두 시 사이인 듯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각도를 가늠해봐서도 그랬다. 어쩌면 오후 네 시를 훌쩍 넘긴 때라 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점심 때는 지난 것이고 먹는 것보다는 잠이 더 궁했으니까. 한 시간만 더 자게 해준다면 1ℓ의 피와 바꾸자 해도 그럴 수 있을 만큼 여전히 눈이 뻑뻑하고 무거웠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수천 번 오간 어깨도 콕콕 쑤셔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엊저녁의 잔업은 정말 너무했다. 알바들이 담당하는 시간대에는 유독 물량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어제는 그에 더해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마저 빨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다음 조와 교대할 때 보니 우리가 분류한 택배가 3천 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너무 피곤할 때 나오는 반응은 둘 중의 하나다. 기절하듯 쓰러지든지, 오히려 잠에 들지 못하고 희부연 허공을 매가리 없이 떠돌든지. 새벽에 업무를 마치고 로커룸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도 그랬다. 눈앞의 사물이 흐릿하게 번지는 가운데 입에서는 단내가 났고 마음은 정처 없이 어딘가를 헤맸다. 그럴 때면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리모컨을 미친 듯이 찾게 된다. 어떤 순간이든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마술 같은 리모컨을. 눈앞의 택배상자를 없앨 수는 없더라도 잠깐만이라도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면서 말이다. 정말 그런 리모컨이 있다면 고래 뱃속에라도 찾으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방광이 터질 때까지 소변을 참다 오줌을 누면 노란 줄기 끝에 피가 섞여 나왔는데 그럴 때면 세정 버튼을 세 번 네 번 연속으로 누르며 얼른 흘려보내곤 했다. 그런 다음 목구멍을 따끔따끔하게 만드는 가래를 그러모아 뱉고 생각했다. 초당 14㎝씩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가 멈춘다면 정말 세상도 멈춰지는 것일까 하고.

실제 딱 한 번 멈춘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던지지 말 것 고가의 스탠드가 들어 있습니다, 라고 쓰인 상자를 옮기는 중이었고 선배는 이어폰을 낀 채 작은 상자를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선배의 셔츠 주머니에 들어 있던 라이터는 금방이라도 슉 빠질 만큼 주머니 안을 들락거리고 있었는데, 그러다 선배가 커다란 상자를 앞에 두고 상체를 숙였을 때 컨베이어 벨트 아래로 라이터가 떨어졌다. 플라스틱 조각이 거대한 압력에 눌려 바스러지는 소리, 베어링 어느 부분이 뻑뻑하게 끌리는 소리가 들렸고, 컨베이어 벨트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다 곧 멈춰 섰다. 당황한 선배는 이어폰을 집어던지고는 어떻게, 어떻게 소리만 반복했다. 나는 놀라고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라이터가 떨어질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이 씨, 이거 어떡하냐.

작업반장이 달려오는 사이, 사람들은 일단 스위치부터 끄라고 운전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난 당황하는 척 선배를 바라보다 벽 쪽으로 걸어가 멈춘 세상을 조용히 바라봤다.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진 상자들, 그리고 소리를 지르는 반장의 일그러진 얼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어지러워 커다란 창이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이미 캄캄한 어둠으로 넘어가는 중이었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궁금했지만 두꺼운 유리로 막힌 탓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지 사선으로 내리치는 빗물이 긴 꼬리를 물며 유리를 타고 흐를 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쌓여왔을 먼지도 함께 씻겨나갔고 밤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재가동되려면 30분 이상은 걸리겠다는 운전팀 사람들의 얘기가 들렸다. 쌍욕을 듣고 있는 선배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뒷주머니에 넣어둔 에너지바를 꺼내 조용히 비닐포장을 뜯었다. 포장지를 구겨넣은 다음 사람들이 정신없어하는 사이 한입 물었다. 다섯 가지 곡물을 초콜릿으로 감싼 과자는 달콤했다. 불룩해진 뺨을 손으로 밀어넣으며 침과 범벅이 된 내용물을 목구멍 깊숙이 넘겼다. 에너지바를 씹는 동안 컨베이어 벨트는 멈췄고 창을 때리는 빗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렇게 세상은 잠시 멈춰 있었다.

집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가운데 소파에 누워 잠을 기다리고 있으면 한없는 고요함이 비틀어진 척추 위에 내려앉았다. 그럴 때는 시간이 멈춘 듯했다. 잠에서 깨고 보면 시간은 여지없이 흘러 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멈춘 기분이 들었다. 지난 토요일 특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다른 가족들은 새로 오픈한 고기뷔페에 가고 없었다. 사거리 어디로 나오라는 문자를 무시하고는 바나나를 입에 물고 추로스 가게에서 자주 들었던 보사노바를 플레이시켰다. 두 시간이 넘는 동안 해의 기울기는 변해갔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일시 정지된 상태였다. 다만 언제나처럼 잠의 끝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내 어깨를 짚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는지 엄마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얘, 저녁 먹어. 세수도 하고, 얼른.

푹! 묵직하게 소파가 눌리면서 덩달아 내 허리에도 불편함이 전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파가 받는 느낌이 조금씩 더 선명히 전달됐고 살짝 찢어진 소파의 틈새로 약간의 시야도 확보할 수 있었다. 누가 앉은 걸까? 눌린 무게로 보아 엄마나 누나는 아닌 것 같았다. 경비 아저씨일까? 분리 배출을 하러 나온 사람일지도 몰랐다. 틈새가 넓지는 않아 우선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얼마간 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응, 아니. 아직 안 버렸는데, 왜? 도로 가져가?

쉰이 넘어 보이는 탁한 목소리의 남자는 평소에 담배를 많이 피우는지 목소리 끝에 가래가 끓었다. 아내와 통화하는 모양이었다. 뭔가를 도로 갖고 오라는 소리로 들렸다. 남자는 스탠드만 도로 가져가겠노라고 대답을 한 뒤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럭저럭 괜찮게 보였는지 쿠션 상태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날 깔고 뭉개고 있는 그에게 점잖게 말하고 싶었다. 여보세요, 이 소파에는 사람이 들어 있습니다. 이래 보여도 여기에 많은 잡동사니가 들어 있어요. 보통 소파가 아니라고요, 라고. 하지만 마음의 소리는 전달되지 않고 쿠션의 바람 빠진 소음만이 찢어진 가죽 틈으로 새어나갔다. 남자는 기대한 것보다 별로라고 생각했는지 허리를 소파 등받이에 세게 밀면서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슬리퍼를 신은 발로 소파 밑동을 걷어찼다.

거죽만 그렇지 완전 쓰레기네.

찢긴 틈새로 남자를 올려보자 눈이 부셨다. 옅은 먹구름 사이로 늦여름의 해가 이글거렸다. 남자는 찡그린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지 가져온 종이상자를 평평하게 펴기 위해 손톱으로 테이프를 뜯었다. 그러나 퉁퉁한 남자의 손은 서툴렀다. 한번에 뜯지 못하고 쓸데없이 동작만 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이 생각났다. 일을 시작하고 맞이한 첫 주말 1600개의 택배를 정신없이 분류하고 나자 돈이고 뭐고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 내 마음은 태평양의 드넓은 바다 위를 달려 칠레의 땅끝 마을로 도망치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하고 많은 나라 중에 칠레를 떠올렸을까?

언젠가 푼타아레나스행 국외 택배가 국내 배송팀으로 잘못 온 적이 있었다. 영문으로 갈겨쓴 주소가 낯설었고 무엇보다 긴 이름의 도시를 읽어내기 어려워 난감해하는데 반장이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또 오류 났네. 아니, 이거 바코드 리더기에 문제 있나. 그러나 저러나 자네 이거 못 읽어? 여기 푼타아레나스라고 쓰여 있잖아. 몰라? 칠레 항구도시 푼타아레나스. 아, 대학원까지 나온 사람이 그것도 몰라?

그래요? 저는 처음 들어봐서.

그려? 나처럼 삼십 년 넘게 우편, 택배, 탁송 이런 업계에만 있어봐. 상투메 프린시페, 기니비사우, 거 뭐냐 산토도밍고. 세상천지 모르는 데가 없어.

왠지 창피하기도 하고 발음에서 느껴지는 신비한 운율, 그리고 이런 곳에도 택배가 가는구나 싶은 마음에 푼타아레나스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다. 인터넷에 올라온 정보는 별다를 게 없었다. 도시의 인구와 규모 그리고 기후 정도, 그저 그런 도시란 생각을 하던 중에 ‘푼타아레나스의 사람들’이란 오래된 다큐멘터리가 눈에 띄었다. 뭔가 특별한 게 있나 싶어 플레이를 시키자 한 남자가 나왔다. 남자는 허름한 목조 주택 거실에 놓인 낡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는데 김이 올라오는 동안 고개를 기울여 더운 기운이 뺨에 닿게 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뺨의 흉터에 촉촉이 물기가 맺혔고, 남자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나서 한 모금 마셨다. 커피를 마신 다음에는 자신을 뱃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러고는 자기가 있는 이곳은 태평양과 대서양 남극해가 만나는 원양어업 기지의 최전선 푼타아레나스라고 말했다. 남자의 굵은 목주름과 뺨의 흉터가 클로즈업되는 동안 성우가 말을 이었다. 푼타아레나스는 칠레 남단 마젤란해협에 접한 도시로 푸에고섬의 우수아이아를 제외하면 세계 최남단의 도시로서 지명은 ‘모래밭의 곶’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파나마운하가 개통하기 전까지는 태평양과 대서양, 남극해 간의 연락항으로 큰 역할을 했는데 1990년대 이후로는 쇠락하고 있다고. 그때 난 남자가 앉아 있는 낡은 소파를 보며 성우의 말을 잊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왠지 그곳이 어디인지 꼭 기억해야 할 것만 같았다.

소파에 편히 기댄 남자의 표정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눈은 파도처럼 출렁이는 듯 보이면서도 깊은 곳에 닻을 내린 느낌을 주었다. 자외선을 많이 받은 탓인지 탁해 보이는 눈동자는 오랫동안 창밖을 응시했고 조금 있자 주방에 있던 래브라도레트리버 한 마리가 곁으로 다가와 바닥에 앉았다. 개는 킁킁대며 고개를 휘저었고 남자가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자 말갛고 빨간 혓바닥을 내밀고 침을 흘렸다. 한참을 침묵하던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 남기로 결심을 했죠.

대다수 선원들은 칠레 여자와 짧은 연애를 한 뒤 몇 푼 쥐어주고 떠나는 게 다반사였지만 자신은 남기로 했다고. 더러 임신한 여자까지 버리는 경우가 있을 만큼 선원들은 이곳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노라고 말했다. 그와 달리 자신은 푼타아레나스에 머물 결심을 했을 뿐이라고. PD가 왜냐고 묻자 담배를 꺼내든 남자가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거실에 앉아 창밖을 보면 남태평양과 대서양 그리고 남극해의 물결이 한데 모여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바다는 날마다 새롭고 여기에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노라고 말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되고 싶지도, 될 필요도 없다고 말하며 순한 미소를 지었다. 화면은 남자의 얼굴을 비추다 이내 창밖 풍경을 보여줬는데 항구가 멀지 않은지 여기저기 어선이 정박해 있는 풍경과 하역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곁불을 쬐고 있는 모습을 담아냈다. 그렇게 앵글은 쇠락한 항구의 구석구석을 훑다 거대한 크레인 위로 초점을 옮겼는데 그곳에 재갈매기가 앉아 있었다. 가만히 있던 갈매기는 갑자기 몇 걸음 나오더니 머리를 까닥거리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틀림없이 따로 찍은 뒤 편집한 것이었을 테지만 마치 네가 앉은 그 낡은 소파는 아주 먼 바다를 건너왔구나, 라고 말을 하는 듯했다.

남자는 푹신한 소파에 등을 파묻고 편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 뒤로도 거실을 거닐며 이런저런 얘길 덧붙였다. 푼타아레나스에 닿기 전에 수마트라의 어느 항구에 오랫동안 머문 적도 있었고 베링해의 거친 파도를 건너본 적도 있다는 얘기들. 남극해 주변을 항해할 때엔 흰수염고래를 만난 적도 있다는 그런 얘기들 말이다. 허풍 섞인 얘기와 그의 꼬부라진 콧수염이 재밌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가 앉은 소파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다음 내용은 기억이 흐릿하다. 무책임한 선원들을 나무라는 말도 있었던 것 같고, 산업의 최전선 기지에서 고생하는 역군들을 응원하는 내용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남자의 눈빛과 소파가 기억에 남을 뿐이었다. 남자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다 살짝 웃고는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의 옆모습이 엔딩 장면으로 잡혔다. 꽤 아팠을 법한 상처는, 시간이 멈춘 소파 위에 누울 수 있다면 그런 것쯤은 괜찮다는 듯 옆모습에 드러난 바늘 자국은, 흉측했을 처음과 달리 제법 아물어 있었다.

종이상자를 정리하고 분리수거를 모두 마친 남자는 뭔가 아쉬웠는지 떠나기 전 다시 한번 털썩 앉았다 일어섰다. 그 바람에 소파가 출렁였고 그 출렁임은 파도를 닮아 있었다. 이대로 대양의 끝 푼타아레나스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낡은 소파에 앉아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이 끝도 없이 부풀어올랐다.

제법 오래 갇혀 있었던 탓에 허리가 결렸지만 밖에 나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새벽 1시 특근 교대 전까지는 쉬고 싶었다. 다시 잠들기 위해 송충이처럼 몸을 말고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선잠이 들었을 때 작고 여린 손길이 느껴졌다. 간지럽고 그러면서도 자극적인 뭔가가 종아리 부근에 들러붙는 것 같았다. 이번엔 또 뭘까.

지은아 이거 봐, 잘됐지?

응, 완전 똑같은데.

초등학교 1학년쯤 됐을까 싶은 여자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찢긴 틈으로 하얀색 타이즈에 분홍 원피스를 입은 아이와 태권도 도복을 입은 여자애가 서 있는 게 비스듬히 보였다. 그중 분홍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가 소파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엿듣고 있자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여자애 중 한 명이 캐릭터 스티커를 소파 한쪽에 대고 손톱으로 문질렀던 모양이다. 분홍 원피스의 여자애가 더 자세히 보려고 상체를 수그리자 아이의 목에 걸린 펜던트가 소파에 닿았다. 난 아이들의 장난을 지켜보며 세윤이를 떠올렸다.

여섯 살 세윤이도 한때는 자주 그랬다. 특히 사람 몸에 스티커 붙이기를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한 건 삼촌의 몸이었다. 알이 통통하게 오른 종아리에 대고 그러길 좋아해서 자고 일어나면 도라에몽에 나오는 도라미나 타요에 나오는 캐릭터가 내 몸에 새겨 있었다. 잠에서 깬 내가 스티커를 지우려고 들면 세윤이는 지우지 말라며 목에 매달리고는 했다. 그러면 스티커를 지우지도 못하고 출근했는데 다음날 퇴근하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스티커를 확인했고 많이 지워져 있으면 내가 소파에 누운 틈에 또 다른 스티커를 새겨놓고는 했다. 난 평소 놀아주지 못해 미안했던 탓에 꼼짝 않고 세윤이를 기다려주었다. 캐릭터가 부서지지 않고 온전히 새겨질 때까지 말이다. 그러면 세윤이는 감은 내 눈에 자기 손을 흔들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세윤이가 붙여준 스티커 중 가장 마음에 든 건 고래 캐릭터였다. 인어공주에서 나왔는지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건지는 몰라도 커다란 고래가 수면 위로 반쯤 몸을 드러내고 물을 뿜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지를 걷어올리고 일을 하다보면 스티커의 고래와 눈이 마주쳤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흰수염고래가 생각났고 흰수염고래를 떠올리면 푼타아레나스가 궁금해졌다. 낡은 소파가 있는, 시간이 멈춘 그곳이.

은지야, 근데 여기다 붙여도 돼?

될걸? 이거 버린 거잖아.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는 하나 더 붙이겠다며 가방에 손을 넣고 뒤적거렸다. 성가셨지만 세윤이를 생각해 조금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한동안 꽤 즐겼던 세윤이는 얼마 전부터 싫증이 났는지 스티커 놀이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어쩌다 붙이더라도 냉장고에 한두 개 붙이는 정도였다. 일부러 자는 척을 해도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고 가끔 곁에 오더라도 스티커를 꺼내는 대신, 삼촌은 집이 어디야, 라고 물으며 발그레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삼촌 나가면 세윤이 방으로 꾸며주겠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야, 어떡해. 비 온다.

도복을 입은 여자애가 가방을 집어들고 놀이터 쪽으로 뛰어가며 말했다. 그러자 스티커를 반밖에 붙이지 못한 여자애가 허둥대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들이 뛰어가는 사이 빗방울이 낡은 소파 위로 떨어졌다. 둔탁하게 떨어지는 빗방울은 뿌옇게 앉은 먼지를 털어내며 제법 리듬이 느껴지는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노를 젓는 어부가 앞발을 까딱이는 것처럼 정겨웠다.

툭, 투투둑, 툭 툭.

비는 늦여름의 소나기답지 않게 그칠 듯하면서도 한동안 더 내렸는데 찢긴 틈새를 타고 소파 안으로도 흘렀다. 약간의 오한이 느껴져 축축이 젖은 몸을 부둥켜안았다. 비가 반갑지 않은 건 고양이도 마찬가지인지 소파 팔걸이 밑에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웅크리고 앉았다. 녀석은 물이 튀긴 수염을 발바닥으로 몇 번 털어내다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렸다. 고양이가 돌아본 쪽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찢긴 틈 사이로 싸구려 천으로 만든 바지와 낡은 운동화가 보이는 걸로 봐서 경비 아저씨인 듯했다. 그는 종이상자가 담긴 커다란 마대를 얼른 처마가 있는 곳으로 끌었다. 그러고는 어지럽게 널린 유모차와 장난감 트럭을 한데 모으고 내 앞으로 왔다. 빗방울이 모자를 타고 내려 그의 얼굴을 적셨다. 피곤한 듯 보였다. 새벽에도 본 것 같은데 그 역시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이 씨, 누구야. 어떤 인간이 또 딱지도 안 붙이고 이렇게 놨어. 잡히기만 해봐라 그냥. CCTV 확인해야겠구먼.

그때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소파가 버려진 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경비 아저씨는 씩씩거리며 관리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엄마가 버린 걸까? 언젠가 엄마도 소파가 예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가게를 오픈하던 날 내가 만들어준 추로스를 들고 그 위에 앉아 차를 마셨다. 위가 좋지 않은 엄마는 커피 대신 마테차를 끓여달라 했고 내가 끓여준 차를 받아들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물었다.

참 푹신하고 좋다. 어디서 샀어?

이태원 앤티크 거리서 여섯 시간 발품 팔아서 구했지. 그 주인이 그러는데 3년 동안 안 팔리던 걸 내가 산 거래, 하하하.

아유, 뭘 그런 얘기를 한대. 재수 없게. 어쨌든 진짜 특이하다, 이 소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곰곰이 어제 일을 떠올렸다. 어제 오후 출근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파는 원래 있던 자리에 있었다. 매형은 퇴근 전이었고 엄마와 누나는 세윤이 때문에 피자를 시켜 먹고 있었다. 한 조각 먹어보라는 누나에게 조금만 더 자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누나가 식탁 어쩌고 하는 말을 잠결에 들었던 것도 같은데 별일 아닌 듯해 흘려들었다. 어쩌면 소파를 버려도 괜찮냐고 물었던 것일까?

비가 그치고 얼마 후면 해가 질 것이고 다시 출근을 해야 할 것이다.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얼른 소파에서 나가 출근 준비를 해야 할까, 아니면 조금 더 잠을 자야 할까? 오한에 머리까지 지끈거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리모컨의 존재가 미칠 듯이 간절해졌다. 내가 만일 신이라면 그런 리모컨을 어디에 숨겨놓을까?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세 개의 대양이 맞물려 흐르는 곳, 아무것도 아닌 남자가 살고 있는 푼타아레나스밖에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다는 잔잔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남자가 푹신하게 허리를 묻을 수 있는 소파 그 안에 말이다.

가로등이 켜지고 뜸했던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중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엄마와 누나일까? 세윤이가 삼촌 소파 버리지 말라고 성화를 부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빨래를 널기에 낡은 소파보다 더 좋은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일지도.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야, 이거 횡재했네.

아주 좋아죽네. 좋아죽어. 그렇게 좋아?

아, 좋지 그럼.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일해먹지.

한 사람은 조금 전에 다녀간 경비 아저씨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맞은편 3개 동을 담당하는 경비 아저씨였다. 두 사람은 다행히 관리소 구조조정의 여파에서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아, 이럴 줄 알고 폐기물 스티커 하나 구해놨지, 이 사람아. 수소문해서 인터폰으로 연락하니까 그 여자가 그러더라고, 자기가 깜빡했다고. 식탁 배달해준 사람들이 낡은 소파를 대신 버려주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말만 하고는 깜빡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자기가 돈 갖다줄 테니까 우선 나보고 붙여주면 안 되냐고 하잖아. 요놈은 지난주 목요일에 누가 붙여놓은 거 내가 살짝 뜯어놓은 거고.

아저씨 말에 따르면 그랬다. 어떤 멍청한 사람이 재활용되는 줄도 모르고 엄한 물건에 폐기물 딱지를 사서 붙여놨더라고. 그래서 자기가 살살 떼어 보관하고 있었다고.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서 자신의 행동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공으로 생긴 4천원이 어지간히 좋았는지 소파 등받이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빗물에 젖은 부분을 손바닥으로 털어낸 다음 마른 수건으로 한 번 더 닦았다.

가만있자, 요놈을 어디에다 붙이냐.

그는 이리저리 재다 좀 전의 여자애가 붙이다 만 자리 미완성으로 남은 스티커 자국 위에 폐기물 딱지를 붙였다. 얼마나 꼼꼼히 붙이는지 동그란 딱지 군데군데를 손톱으로 문질러가며 습기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런 다음에도 수건으로 한 번 더 눌러 마무리를 했다.

경비 아저씨가 떠나고 초저녁 땅거미가 소파를 덮었다.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몸을 웅크리는 사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윤이었다. 목소리가 밝은 걸 보니 누나와 간단한 장을 보고 간식도 사먹을 모양인 것 같았다. 나올 때 재활용 상자에 가득 찬 맥주캔을 들고 나왔다면 근처를 지나칠 테고 어쩌면 소파를 발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날 알아볼 수 있을까? 귀찮아 곧장 아파트 입구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얼굴을 내밀고, 이 소파 정말 버린 거야, 라고 물어야 하겠지만 그저 엉뚱한 상상만 들 뿐이었다. 어쩌면 경비 아저씨가 붙여준 스티커는 폐기물용이 아니라 해외 배송을 뜻하는 특별 우표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해외 배송 택배가 우리 쪽으로 넘어올 때면 택배상자를 유심히 보고는 했는데 언제나 동그란 모양의 도장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다. 물결 모양의 도장이 새겨진 택배를 보면서 생각보다 많은 물건이 바다를 건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했다.

난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푼타아레나스로 향하는 바다 위의 소파를 떠올렸다. 소파는 한참을 떠돌다 태풍을 만날지도 모른다.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 남반구 끝에 닿자면 말이다. 하지만 조금 고돼도 상관없을지 모르겠다. 피곤한 몸을 소파 안쪽에 바싹 붙이며 잠꼬대처럼 말했다.

이 소파는 푼타아레나스행 택배로 분류됐습니다.

가작 ‘푼타아레나스행 택배’ 김영석씨 수상 소감

아름다운 곳에 닿기를 소망한다

김영석 제공

 
무심코 잘못된 방향으로 걷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우산에 시야가 가려 그렇게 되기도 하고 꺾어야 할 골목에서 꺾지 못하고 무작정 걸었던 적이. 한참 지나 돌아보면 ‘어느새 이렇게 멀리?’ 하는 생각에 놀라기도 했다.

언젠가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고 돌아가던 길, 그날도 잘못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문득 낯선 곳에 선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길의 끝까지 걸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바보 같은 짓임을 알면서도 해진 운동화는 앞을 차고 나아갔다. 낯선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잘못된 곳으로 향하고 있다 말하는 머릿속 지도가 처음부터 잘못된 건 아니었을까?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목표에서 벗어났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고 돌아와서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내 손에 지도 같은 건 들려 있지 않다. 다만 푼타아레나스와 같은 남반구의 아름다운 곳에 닿기를 소망할 뿐이다.

푼타아레나스에 닿지 못하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다. 두려운 길 한가운데서 만난 손바닥문학상이라는 휴게소, 지금은 그 휴게소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수상 소감을 쓰고 있다. <한겨레21>과 심사위원들께,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실 분들께 감사하며.

모두가 닿으려는 곳에 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번쯤 용기 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 자신, 그리고 우리를 응원하고 싶다. 모든 지도의 처음은 낯선 길에서 시작됐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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