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 |
원미닛고 제4회 1분소설공모전 (2025.6.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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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닛고 | 2 | | 2025-06-08 |
427 |
2025년 제 25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 (2025.6.3~7.23 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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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조합중앙회 | 13 | | 2025-06-04 |
426 |
제29회 근로자문학제 수상자 명단 발표(200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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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복지공단 | 4952 | | 2008-08-05 |
425 |
2024년 제 10회 철도문학상 공모전 안내 (2024. 4. 22.(월) ~ 6. 2.(일)) & 수상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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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도문화재단 | 1107 | | 2024-07-07 |
424 |
2025년 고용보험 수기 공모전 (2025.4.7~2025.5.9.까지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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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용정보원 | 57 | | 2025-04-22 |
423 |
"실업극복 수기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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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 4420 | | 2009-01-30 |
422 |
2010 제 17회 대한항공 여행사진공모전(2010.9.3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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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 2713 | | 2010-07-23 |
421 |
2025년 제11회 철도문학상 공모전 안내 (2025. 4. 21.(월) ~ 6. 1.(일)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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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도문화재단 | 46 | | 2025-04-23 |
420 |
2022년 오뚜기 제2회 푸드 에세이 공모전 ( 2022년 2월 15일(화) ~ 4월 5일(화) ) & 수상작 발표 (2022.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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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 | 2385 | | 2022-03-20 |
419 |
【부산광역시】 제1회 계단문학상 공모전 : 2025. 3. 24.(월) ~ 2025. 5. 12.(월)까지 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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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24 | 108 | | 2025-04-17 |
418 |
2018년 문화예술제제39회 근로자문화예술제개최 안내 (문학분야 : 2018년 7월 16일(월) ~ 8월 31일(금)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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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복지공단 | 2247 | | 2018-0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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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국민내일배움카드 우수사례 수기·콘텐츠 공모전 (2024. 6. 10.(월) ~ 2024. 7. 14.(일)) & 수상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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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 | 1208 | | 2024-07-09 |
416 |
영축총림 통도사 화엄산림법회 신행수기 공모(2020.12.30. 마감 & 당선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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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 2086 | | 2020-12-16 |
415 |
2021년 제21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 (2021.6.1.화~7.28.수 17시 마감) & 수상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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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조합중앙회 | 2313 | | 2021-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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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제5회 등대문학상공모전 (2017.9.30. 마감) ?& 수상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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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항만공사 | 2617 | | 2017-0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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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제11회 손바닥문학상 공모 (2019년 11월10일 밤 12시 접수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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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 2223 | | 2019-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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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2024.5. 14.(화) ~ 9. 10.(화) ) & 당선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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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사업본부 | 1208 | | 2024-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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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제 24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 (2024.6.3~7.31 접수) & 당선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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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조합중앙회 | 1211 | | 2024-06-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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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제1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 2월 15일~3월 15일까지) & 당선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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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노인회 | 1326 | | 2024-04-08 |
409 |
2024년 제 2회 2024년 직지콘텐츠 공모전 (2024년 8월 26일(월) ~ 9월 13일(금) 자정까지) & 수상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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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직지문화협회 | 1209 | | 2024-07-08 |
[<오마이뉴스 창간 10주년 기념 기획-르포기사 공모전> 기타(사는이야기 등) 분야 우수작]
2010년, 올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강제병합 100주년에 6·25전쟁 60주년, 그리고 4·19 혁명 50주년과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6·15남북공동선언 10주년이 그것들이다. 나는 앞서 열거한 주요 역사 가운데 '6·25전쟁'으로 우리 민족의 슬픔과 내 가족사의 아픔을 회고하려 한다.
나는 빛고을 무등산 자락의 옥녀봉과 태봉이 우뚝 솟은 산자락에 위치한 '효골'이란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조선 성종대왕의 계비였던 제헌왕후가 폐비가 되어 식솔들이 수난을 당하던 때에, 폐비 둘째 조카 남촌공이 효골에 귀양을 와있었다. 얼마 후 윤비의 적자인 연산군이 등극을 하자 조카인 남촌공을 한양으로 불렀지만, 그는 "벼슬도 싫고 시골에서 유유자적 시문에 심취하며 살겠다"며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폐비가 나의 15대조 할머니고, 우리 가문은 향관조인 남촌공의 후손으로 500년을 이어온 전통가문이었다. 할아버지 형제는 모두 여섯이다. 그 중 넷째 할아버지는 17살 신부를 맞이했는데(나에게는 할머니) 그만 혼례 후 3개월 만에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넷째 할머니는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됐다. 넷째 할머니는 재가하지 않고 살다가 셋째 할아버지의 아들(나의 아버지)를 양자로 들였다.
아버지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소농을 꾸리시면서 나주 도래 풍산 홍씨가에 장가를 들어 큰아들 그리고 둘째아들에 이어 딸을 둘을 낳고 나를 낳았다. 청상과부 할머니는 손자와 손녀를 마치 자신이 낳은 것처럼 기뻐하며 손수 조산원이 되었다. 손자 손녀들이 자라, 어느덧 맏손자가 중학을 졸업하고 광주군청과 효지면사무소에서 호적서기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 맏형의 나이가 해방될 때 18살이었다.
건준서 일하던 맏형, 22살 나이에 스러져가다
맏형인 영철 형은 일찍이 분단의 아픔을 생각하며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해 통일세상을 꿈꾸고 있었는데, 공직자였기에 지하조직에 가담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지하조직원들을 좌익으로 분류하여 여순사건의 근간조직으로 파악했다. 조직원을 회유하여 보도연맹에 가입을 권했지만 형은 응하지 않았다. 이제는 면사무소에도 출근하지 못하고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집은 그동안 맏형이 배급을 타오고 봉급을 받아 저축하여 전답도 사고 황우도 부려 머슴까지 두고 살았기에 중농이었다. 효골 마을에서는 아버지의 아호가 '동강'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동강은 아들을 셋이나 두었는데, 똑똑하고 잘생긴 맏이가 장차 면장이 되고 군수까지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여순사건이 발생한 다음해 2월 하순, 맏형이 경찰에 붙잡혔다. 형은 조직을 말하라는 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실토하지 않았고 대질 신문을 벌이던 서창면 만호리 앞산에서 경찰이 쏜 3발의 총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만호리에 사는 형의 친구 한경수가 효골로 달려와 형의 죽음을 알려줬다.
당시 나는 9살이었는데, 어머니를 따라 나주 풍산 외할아버지 제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제사를 마친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어젯밤 꿈자리가 이상하다는 말씀을 하셨고, 그때 효골의 큰집 머슴이 헐레벌떡 달려와 맏형의 죽음을 전했다. 그 순간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한참 뒤 깨어난 어머니와 함께 30리길이나 되는 만호리를 단숨에 달려가니, 아버지와 친구들이 죽관을 만들어 형의 시신을 입관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이라도 봐야 한다며 죽관을 붙들고 통곡하다 또 다시 혼절했다.
그날이 조춘 3월 24일이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22살의 청년이던 형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형은 재판도 없이 공권력인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효골뿐만 아니라 군에서도 '똑똑하고 잘생긴, 장래가 촉망된 청년'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형이었다. 이날 묘소에서 형과 지하운동을 함께했던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마지막 조소를 남겼다.
"내가 사랑하고 우리가 존경하던 친구 영철 동지를 잃고 한없이 슬프기만 합니다. 조국이 해방되면 통일세상이 온다고 조금만 참고 기다리자고 우리를 달랬던 동지였습니다. 경찰에 붙들려 한 달간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끝내 조직을 불지 않아 우리 동지들이 살고 있습니다. 윤 동지는 분명 좋은 세상을 만들어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자고 기회만 나면 말하곤 했습니다. 특히 할머님과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좋은 세상에서 결혼도 하여 손자도 안겨드린다고 호언장담 했었습니다. 그러던 동지가 갔습니다. 부디 저세상에서 평안히 잠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집안 머슴들에게도 다정다감하기만 했던 맏형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날 장례식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버지 친구와 머슴 몇 사람, 그리고 가족들만 참석해 형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봤다. 이때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까마귀 떼가 몰려와 마치 장송곡이라도 부르는 듯 묘소 주위를 날았다. 내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형을 떠나보내는 순간엔 내내 소리 내어 울기만 했다. 나는 장례식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면서 끝없이 형의 묘를 뒤돌아보았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통곡은 효골에 도착 할 때까지 끝이 없었다. 장례를 다 끝내고 돌아오면서 형을 따르던 큰집과 참봉할아버지 머슴이 형을 추모하는 말을 했다.
"영철 도련님은 정말 우리를 친형제처럼 사랑하고 돌봐주었습니다. 이제 해방이 되면 신분도 타파되고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면서 사랑방에 와서 재미있는 얘기도 해줬습니다. 먹을 것도 가지고 와서 대화하곤 했는데,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영철 도련님 때문에 저희들은 희망을 가졌고 나날이 새로웠습니다. 이제 저세상으로 가버렸으니 누가 우리를 기쁘게 해 주겠습니까? 저희들은 형제들보다 더 슬프기만 합니다. 참으로 좋은 우리들의 선생님이었습니다. 언문도 가르쳐 주시고 어느 때는 천자문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들 이름도 한문까지 가르쳐 주었지요."
머슴들은 자신들과 함께하며 일익을 담당해준 맏형이 없어, 이제 누가 자신들을 위로해 줄까 하는 아쉬움에서 더욱 슬픔의 애도사를 한 것 같았다. 나도 분명히 기억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영철 형이 머슴들과 어울리고 말도 놓으라는 등 양반의 체신을 구겼다고 아버지와 형이 집안 어르신인 참봉 할아버지에게 불려가서 큰 꾸지람을 듣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형은 몰래 머슴사랑방에서 같이 잠을 자고 재미있는 얘기도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기쁨이었기에, 형이 늘 존경받았음을 나도 알고 있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22살의 젊은 청년이었던 형은, 청상과부인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육영으로 자라왔기에 부모님보다 할머니의 꿈은 더 크기만 했었다. 할머니는 18살 때(아버지가 장가를 든 나이)부터 형을 빨리 장가보내어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안아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물론 부모님도 바라고 있었지만 영철 형은 아직은 결혼할 시기가 아니라고 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세상이 오고 그때 결혼해도 늦지 않는다고 하였다. 형은 그렇게 수년 동안 결혼을 미루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명주 한복과 두루마기를 해놓고 형이 장가 가는 그날만을 기다렸지만 그날은 결국 오지 못했다. 형은 명주 한복과 두루마기를 입고 죽관에, 영원히 땅속에 묻히고 말았다.
반년동안 계속된 상차림과 그칠 줄 모르는 통곡 소리
형의 장례를 모두 치른 뒤 가족·머슴들과 함께 효골로 돌아왔다.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위로를 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소위 좌익 빨갱이로 몰려 경찰이 쏜 총에 형이 죽었기에, 우리집에 오는 걸 꺼려하는 친지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우리집은 효골은 물론 광주군 일대 많은 사람들과 좋은 교류를 했었기에, 남들 몰래 조문을 해 주었다.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인 김도석 면장도 집으로 찾아와 자신의 부하 직원이었던 영철 형의 죽음에 대해 "효골뿐만 아니라 이 사회 이 나라에 동량을 잃었다, 큰 위로를 보낸다"고 말했다.
집안의 대들보였던 맏형의 빈자리를 18살의 둘째 형은 채우지 못했다. 끝없는 슬픔이 계속되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상을 차려놓고 형을 기다렸다. 그리고 형이 묻힌 만호리 묘소를 찾아가곤 했다. 반년이 지나도 형을 위한 아침저녁 상차림은 계속되었다. 아울러 계속되는 통곡의 울음도 그칠 줄 몰랐다.
나는 참으로 답답하기만 했다. 분명 숨을 거둔 형이 살아 돌아올 리 없는데도 할머니와 어머니는 "꼭 집으로 찾아 올 것 같다"며 곡을 하는 것이다. 우리집은 길가 대로변에 있어 주변 사람들도 통곡 소리를 고스란히 다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내가 답답하여 "할머니 어머니, 이제 제발 그만 우세요, 우신다고 죽은 형이 살아오기라도 한답니까?"라고 했지만 두 분 다 철부지 애가 하는 소리라며 응답하지 않으셨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서 농사를 지으러 들녘에 나가지만 재미가 없다. 집안의 기둥이 무너졌으니 온 집안엔 을씨년스러운 기운뿐이었다. 그러나 살기 위해 농사를 짓고 가을을 맞이했다. 농사도 풍성하지 못했지만 다른 어떤 재미도 없었다. 아직도 형이 생각나면 훌쩍 만호리로 달려가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나도 여러 번 묘소에 갔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소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어른들은 여우들의 짓이라고 했다. 나는 형이 비록 숨졌지만 그 고운 육체가 여우의 먹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형이 살아서는 공권력에, 죽어서는 짐승에게 혹독한 시련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슬펐다.
나는 큰 돌로 구멍을 자주 메우곤 했지만 다음에 가 보면 또 구멍이 나 있었다. 가을 내기가 끝나고 도선산에서 시제를 지냈는데 많은 종중들이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문장대부가 "올봄에 우리 문중에서 유능하고 똑똑한 영자 항렬인 영철 족손을 잃었다"며 아버지를 세워 위로를 보냈다.
당시 난 3학년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이 맏형과 학교 1회 동창생이었기에 형 소식을 듣고 나를 조용히 불렀다. 선생님은 "영전아, 비록 형이 돌아가셨지만 좋은 일 하다 가셨기에 모두들 슬퍼하고 있다, 너의 집안에서도 아픔이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격려해줬다. 그 말씀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도 당돌하게 "선생님 우리 형이 어떤 나쁜 잘못을 해서 죽게 되었나요? 재판도 없이 돌아가셨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했었다.
형이 떠난 지 1년... 가족은 살기 위해 일했다
한해를 넘어 다시 찾아온 봄. 형이 없는 세상이 마치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있을 때 1주기가 돌아왔다. 결혼하기 전에 세상을 떠나면 제사도 안 지내고 무덤도 없이 평장을 하기 일쑤였지만, 22살이나 먹어 운명했기에 봉분을 만들고 묘소에서 1주기를 지냈다.
영원한 형의 친구였던 한경수를 비롯한 몇 사람과 형을 따르던 머슴 세 사람이 묘소를 찾아왔다. 다시 한 번 통곡의 메아리가 만호리에 울려 퍼졌다. 형이 떠난 1년 사이 10살이 되어 몰라보게 자란 나였다. 어린 동생이 형의 빈자리를 내내 그리워하는 짧은 글을 써서 마치 추도사처럼 읽었다. 참석한 모두가 어린 것이 신통하다는 표정들이었지만 나는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고 제 우상이었던 영철 형님! … 형이 떠나신 지 1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지만 아직도 살아 집으로 돌아오실 것만 같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님은 아침저녁으로 형님 밥상을 차리고 눈물바람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는데 형님은 부활하실 수가 없나요. 저는 꿈에서 자전거를 태워주시는 형님 모습과 언젠가 도선산에 올라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얘기해주던 때도 보았습니다. 저세상에 계시면서도 우리나라 통일을 생각하며 좋은 세상 만들기를 하고 계시겠지요. 형님이 못다 한 통일 세상의 뜻을 이어받는 동지들이 열심히 할 것입니다. 저도 장래 형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1년 동안에 나도 모르게 많이 자라고 공부도 열심히 했으며 어른 같은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3월이 지나 다시 농사철이 왔고, 신명이 나지 않았지만 온 식구들이 살기 위해서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