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항공진흥협회
제   목     제1회 항공문학상 공모 안내
이   름     관리자   [ webmaster@airportal.co.kr ]
홈페이지     http://www.airtransport.or.kr
첨부파일#1     [붙임]제1회 항공문학상 홍보포스터(최종)(1).pdf (size : 110.661 Mb)     Download : 792
첨부파일#2     [붙임]제1회 항공문학상 공모 안내(1).hwp (size : 34.5 Kb)     Download : 901
첨부파일#3     [붙임]응모신청서 및 양식(1).hwp (size : 41 Kb)     Download : 776
(작성일 : 2013년 07월 01일 (10:28),   조회수 : 2688)

□ 공모개요
ㅇ 행 사 명 :「제1회 항공문학상」
ㅇ 공모내용 : 항공을 소재로 한 창작문학
ㅇ 참가대상 : 대한민국 전 국민
ㅇ 공모기간 : 2013. 7. 1(월)~2013. 9. 30(월)
   ※이메일 접수 : 마감일 17:00까지, 우편접수 : 마감일 우편소인분까지
ㅇ 주    최 : 국토교통부
ㅇ 주    관 : 한국항공진흥협회
ㅇ 후    원 : 한국공항공사, 인천국제공항공사, (주)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주)

□ 주제 및 공모부문
ㅇ 작품주제 : 항공과 사람을 주제로 한 창작 문학작품
   ※항공 여행 체험(외국, 기내, 공항 등) 및 관련 분야의 현장감 넘치는 삶을 소재로 한 부문별 창작품
ㅇ 공모부문 : 시, 소설, 수필

부  문
시(동시포함)
소설
수필
편  수
5편 이상
1편
3편 이내
원고량
(“200자 원고지” 기준)
※제한없음 ※단편소설 : 80매 내외
   중편소설도 가능(300매 내외)
※20매 내외

  ※응모작품은 “200자 원고지”의 원고량 내외로 작성하되, 최종제출시 A4용지 출력물(파일)로 제출

□ 응모요령
ㅇ 접수방법 : 우편접수 또는 이메일접수(택일)
   - 우편접수 : (157-822)서울특별시 강서구 하늘길 78 한국공항공사빌딩 5층
               한국항공진흥협회『제1회 항공문학상』담당자 앞
   - 이메일접수 : airkada@naver.com (메일명 : 응모부문/성명/생년월일)
ㅇ 제출사항 : 응모신청서 1부, 작품 사본 6부(A4용지)
   ※한국항공진흥협회 홈페이지(http://www.airtransport.or.kr )에서 응모신청서를
     다운 받아 작성후 응모작품과 함께 “우편 또는 이메일” 제출
ㅇ 문 의 : 한국항공진흥협회(02-2669-8714∼6)

□ 유의사항
 ㅇ 국내외 타 문학 관련 공모, 문학지 등에 출품되지 않은 본인의 순수한 창작 작품이어야 함
 ㅇ 타 기관/단체에 중복 투고했을 경우 심사와 시상에서 제외됨
    (규정 위배 시 수상 이후에도 취소 사유에 해당)
 ㅇ 응모작품은 반환되지 않으며, 표절/위작/모작 또는 이전에 발표된 작품인 경우 수상이 취소됨
 ㅇ 수상작의 저작권(지적재산권)은 3년 간 주최·주관·후원사에 귀속됨
 ㅇ 각 부문별 중복지원 불가능(1인당 1개 응시부문 가능)

 ㅇ 시상내역 및 입상자 수는 작품접수 상황에 따라 변동될 수 있음

※ 자세한 내용은 제1회 항공문학상 공모 안내 파일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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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제1회 항공문학상 발표 관련 공지
이 름 관리자 [ webmaster@airportal.co.kr ]
홈페이지 http://www.airtransport.or.kr
(작성일 : 2013년 11월 28일 (14:44), 조회수 : 917)

제1회 항공문학상 발표는 내부사정(심사지연 등)으로 인하여 12월 첫째주로 연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당초 발표예정 : 11월 중순 → 12월 초

최종발표를 기다리신 응모자 분들께 죄송한 말씀을 드리며, 제1회 항공문학상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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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제1회 항공문학상 최종 수상자 발표 및 시상식 개최
이   름     관리자   [ webmaster@airportal.co.kr ]
홈페이지     http://www.airtransport.or.kr
첨부파일#1     제1회 항공문학상 최종 수상작 결과 발표.hwp (size : 36 Kb)     Download : 324
첨부파일#2     제1회 항공문학상 시상식 개최 안내.hwp (size : 35 Kb)     Download : 60
(작성일 : 2013년 12월 06일 (12:00),   조회수 : 183)

1. 제1회 항공문학상 최종 수상작 결과 발표

구분 부문 저자명 작 품 명
대 상 소설 이영석 하늘, 너의 꿈
최우수상 서용기 구름 위의 저녁식사
최우수상 수필 김정석 비행기가 하늘 위로 날기 전까지

2. 제1회 항공문학상 시상식 개최

ㅇ 일 시 : 2013. 12. 18(수), 14:00~15:00
ㅇ 장 소 : 메이필드호텔 카라홀(3층) ※ 서울 강서구(김포공항 부근) 소재
ㅇ 주 관 : 한국항공진흥협회
ㅇ 주 최 : 국토교통부
ㅇ 후 원 : 한국공항공사, 인천국제공항공사,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ㅇ 참 석 : 약 100여명
ㅇ 내 용 : 시상식 및 부대행사(공항견학)

※ 자세한 내용은 첨부파일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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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항공문학상 홈페이지 바로가기
우리나라 항공산업 위상제고와 항공문화 저변 확대를 위해 ‘13년 “제1회 항공문학상”을 시작으로 추진․운영※항공에 대한 문화 창달 및 일반국민의 인식 제고

목적

  • 항공인의 진솔한 삶과 도전을 소재로 한 시‧소설·수필 등 문학 작품을 통해 항공산업의 가치와 의미 전달
  • 항공을 소재로 한 문학창작 활동을 촉진함으로써, 범국민적 관심유발 및 항공문화 저변을 확대하고 국민들에게 다양한 문화향유 기회 제공

공모내용

작품주제 "항공"과 "사람"을 주제로 한 창작 문학작품

※항공 여행 체험(외국, 기내, 공항 등) 및 관련 분야의 현장감 넘치는 삶을 소재로 한 부문별 창작품

공모부문 시(동시), 소설(단편), 수필(수기)
주관 및 후원

주관|한국항공진흥협회

후원|국토교통부

한국공항공사, 인천국제공항공사, (주)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주)

당선작 안내

  • 2013년 제1회 항공문학상 당선작품(총15편)
연번 작품명 저자명
대상 하늘, 너의 꿈 이영석 당선작보기
최우수상 구름 위의 저녁식사 서용기 당선작보기
비행기가 하늘 위로 날기 전까지 김정석 당선작보기
우수상 블랙박스는 말이 없다 이응수 당선작보기
하얀 눈이 내리면 최지운 당선작보기
산골에서는 김수희 당선작보기
감동, 그 뜨거운 맛 윤영주 당선작보기
장려상 하늘을 걷는 걸음 김래영 당선작보기
멀리뛰기 김민중 당선작보기
즐거운 상상 김경구 당선작보기
어떤 초대 류미월 당선작보기
활주로의 내력 박미림 당선작보기
나를 이끌어가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임솔아 당선작보기
나의 쉼터, 나의 즐거움 유창남 당선작보기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 게재
이 름 관리자 [ webmaster@airportal.co.kr ]
홈페이지 http://www.airtransport.or.kr
(작성일 : 2014년 01월 02일 (14:47), 조회수 : 87)

대 상
소설 _ 하늘, 너의 꿈 이영석
최우수상
시 _ 구름 위의 저녁식사 서용기
수필 _ 비행기가 하늘 위로 날기 전까지 김정석
우수상
소설 _ 블랙박스는 말이 없다 이응수
하얀 눈이 내리면 최지운
시 _ 산골에서는 김수희
수필 _ 감동, 그 뜨거운 맛 윤영주
장려상
소설 _ 하늘을 걷는 걸음 김래영
시 _ 멀리뛰기 김민중
즐거운 상상 김경구
어떤 초대 류미월
활주로의 내력 박미림
수필 _ 나를 이끌어가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임솔아
나의 쉼터, 나의 즐거움 유창남
길 권순화

항공문학상은 항공을 소재로 한 문학창작 활동을 촉진함으로써,
항공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항공분야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제1회 항공문학상”작품을 공모했습니다.
지난 7월 1일부터 9월 31일까지 작품 공모를 마감하여 예심과 본심을
통해 시(동시), 수필, 소설 3개부문에서 15명의 수상자를 선정,
발표했습니다.
시상식은 12월 18일 개최하며 상금은 3개부문에 총 1,000만원이며,
부상품으로 대상에게는 유럽 / 미주 왕복항공권과 우수상에게는
동남아 왕복항공권, 장려상에게는 국내왕복 항공권 등이 제공됩니다.
발행일 2013년 12월 18일
펴낸곳 한국항공진흥협회 www.airtransport.or.kr
Tel. 02. 2669. 8715 Fax. 02. 2669. 5590
주 최 :
주 관 :
후 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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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항공문학상 대상 수상작

하늘, 너의 꿈

                                이 영 석

“정신 바짝 차려.”
“네, 기장님.”
마치 한 밤중에 네온사인이 여기저기 반짝이는 것처럼,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각종 첨단기기의
빨갛고 노란 불빛들이 조종석 실내를 밝히고 있다.
“인천에어포트 타워, 히어 에어투데아 부라보 747 헤딩 300, 하이트 3000.”
“클리어 어프로치 33L 런웨이.”
기장이 헤드셋에 착용된 마이크로 인천공항관제탑에 방향과 고도를 말하자, 헤드셋 이어폰으로
인천공항 관제탑 관제사가 활주로를 지정해 준다.
오랜 세월 알아온 사람인 양 짤막한 영어 단어로 교신하는 기장과 관제탑의 대화가 끝나자
조종석에 있는 기장과 부기장의 양손이 바빠지면서 조종석 내의 단추와 여러 기계장치를 돌리고
누른다.
곧 착륙이 예정돼 있는 비행기 밖 상황은 눈까지 내리고 있어 바로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조종간을 잡은 기장과 부기장의 얼굴에는 잔뜩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기장님, 활주로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데요.”
“알고 있는 상황 아닌가, 자! 최선을 다해 보자고...”
창밖으로 활주로는 보이지 않고 순간순간 반짝이는 불빛이 길을 인도하듯 앞으로 내달렸다
꺼지고 또 다시 내달렸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활주로에 커져있는 유도등이다.
“기장님, 너무 악천후라 육안으로 착륙해야 할 것 같은데요. 다시 할까요?”
부기장의 물음에 기장은 뒤를 한 번 힐끔 쳐다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흐린다.
“이 사람아! 시간이 어디 있어, 그냥 한 번 해보자니까...”
기장과 부기장은 말이 없는 채 조종석은 긴장이 흐르고 있다. 잠시 후 육안으로 눈이 잔뜩 쌓인
활주로가 보이더니 바로 ‘쿵’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듯 했다. 이내
하늘, 너의 꿈
이 영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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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너의 꿈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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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음과 함께 비행기 동체가 흔들리더니, 동체가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활주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기장과 부기장은 조종간을 잡고 왼쪽, 오른쪽으로 흔들리더니 잠시 후 조종석에는
빨간 불빛이 반짝거리며 비상상황을 알리는 비상등이 울린다.
“기장님, 동체가 활주로를 이탈했습니다. 좌측 엔진에 불이 붙었습니다.”
“좌측엔진 내부 소화기 작동.”
부기장이 좌석 좌편에 있는 빨간 소화기 작동 레버를 위로 올렸다. 비행기 엔진에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소화기가 내장돼 있다.
“기장님, 소화기 작동 중에 있습니다.”
몇 초가 지났을 까. 기장이 말한다.
“좌측 엔진 소화완료, 관제탑 비상상황 대비해 구급차, 소방차 부탁한다.
기장과 부기장은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온 몸에 힘이 빠진 듯 머리에 쓴 헤드셋을 벗고 조종간을
뒤로 빼더니 일어난다.
“자 수고하셨습니다. 엑셀런트입니다. 그런데 소화기를 너무 일찍 작동하셨습니다. 소화기를
일찍 작동하면 바람 때문에 소화액이 뒤로 분사돼 불을 끌 수 있는 소화액이 줄어 화재가 계속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 점 다음부터 주의해 주십시오.”
기장과 부기장 뒤에서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감독관이 나무라듯 말하더니 테스트 보고서에
항목마다 체크를 하고 있다. 감독관이 말과 함께 테스트확인서를 기장과 부기장에게 건네줬다.
테스트확인서를 받은 기장과 부기장은 인사말과 함께 조종석 밖으로 나간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장과 부기장이 나간 곳은 비행기 조종석이 아니다. 비행 시뮬레이터였다. 항공사 조종사들은
매년 두 번 비행 시뮬레이터에서 각종 비상 상황에 대해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실제 비행기로
비상 상황을 만들 수 없어 시뮬레이터를 사용해 각종 악천후와 비상상황을 연출한 후 조종사들의
대처능력을 보는 것이다.
기장과 부기장이 나가도 감독관은 뭔가를 계속 받침대 위에 있는 종이에 계속 쓰고 있다. 감독관
옆에 있던 20대 여성은 다시 조종석에 앉더니 조종석에 있는 각종 계기판을 테스트 이전으로
세팅하고 있다.
하늘, 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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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관님, 너무 지적하시는 거 아녜요. 저 분들 그래도 잘 하시는 편인데요. 10초 만에 엔진
불을 소화했어요.”
“비행기 사고는 많은 인명피해를 줄 수 있어! 소영씨, 내가 지적하는 것이 저 사람들한테는
나중에 큰 도움이 돼. 소영씨도 전문가 다 되어가는 것 같아
조종사 평가할 줄도 알고, 오늘 테스트 한 조종사들소속이 어디지.”
“에어투데이 항공사인데요.”
김 감독관은 손에 들은 받침대 위 종이에 항공사란에 ‘에어투데이’라고 적더니 감독관란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사인을 한 후 소영이에게 건넨다.
“소영씨, 자! 이거 스캔해서 에어투데이 항공사하고 국토교통부, 서울지방항공청 담당자에게
보내줘.”
“네 감독관님”
김 감독관은 공군 조종사로 있다가 예편한 후 국적항공사에서 30여년을 근무했다. 정년퇴직한
후 지금은 비행시뮬레이터 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는 베테랑 조종사로 오랜 비행경력과 다양한
경험으로 비행시뮬레이터 감독관으로 특채되어 3년째 근무 중이다.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호랑이감독관으로 소문나 있는 인물.
송소영은 감독관을 보조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기술직인 ‘테크니션’이다. 테크니션은
감독관이 미리 정한 비상상황을 시뮬레이터에 연출해 논다. 쉬운 기계 작동인 것 같지만
수백종류의 비상상황을 연출해 놓고, 그것을 다시 제자리에 세팅하는 일은 조종사 못지않은 비행
상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감독관님, 오늘 테스트한 조종사들 테스트확인서 소속 항공사와 국토교통부,
서울지방항공청으로 보내줬구요. 이건 내일 테스트하는 조종사들과 소속 항공사 명단 이예요.
그리고 저 오늘 마지막인 거 아시죠.”
소영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던 김 감독관에게 여러 장의 종이를 건네주면서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소영이 준 서류를 건네받아 보고 있던 김 감독관은 고개를 들며 말한다.
“참 그만둔다며. 박 교수한테 얘기 들었어. 학교 가서 뭐하려고 그리고 새 학기 시작하려면 한
달도 넘게 남았는데...”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하늘, 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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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여자가 조종사가 된다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다른 길을 알아봐야 될 거 같아요.
모교에서 항공학부 항공운항학과 조교교관으로 일하면서 다시 한 번 생각보려구요. 거기서
경비행기 조종하면서 미국으로 가서 시험 볼까 고민 중이에요. 학기 시작 전까지 한 달 정도
남아서 한 20일 머리 좀 식힐 겸 여행 다녀올 거예요.”
“그래, 조금 쉰 후에 생각해 봐, 하지만 절대 꿈은 포기하지 마. 그동안 수고했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감독관님.”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소영은 아쉬움 가득한 마음과 함께, 홀가분한 마음도 든 채 사무실
밖을 빠져나간다. 소영은 고등학교 졸업 후 공군사관학교에 삼수까지 하면서 지망했지만 세 차례
모두 떨어졌다. 시험성적은 합격권에 들었지만 체력테스트에서 번번이 떨어진 것. 비행기
조종이라고는 일반대학 항공운항학과에 입학해 학교에서 시험용 경비행기를 조종해 본 것이
전부다.
소영이 비행시뮬레이터 감독관 보조역할인 테크니션을 한 것은 3년 전. 대학은사였던 박 교수가
김 감독관과의 친분으로 테크니션으로 추천했다. 하루에 3번에서 5번 시뮬레이터 테크니션
했으니 지난 3년 동안 최소 450번 이상을 시뮬레이터 비행을 했다. 그것도 비상상황만을
연출하는 비행이었다. 게다가 소영은 감독관이 퇴근 후 혼자 시뮬레이터에 앉아 인천국제공항은
물론 전 세계 공항을 대상으로 이착륙을 경험한 것까지 친다면 소영의 비행기록은 웬만한 조종사
버금간다.
사무실 밖 복도를 걷던 소영은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단축버튼을 눌러 ‘
교수님’이라고 쓰인 화면을 보더니 스마트폰을 귀에다 댔다. 신호음이 몇 차례 울리더니
상대편에 전화를 받는다.
“응, 소영아.”
“교수님, 저 오늘 시뮬레이터 테크니션 그만뒀어요. 아직 학기 시작 전까지 한 달 정도
남았죠.”
“그래, 학기 전까지 학교에 내려와야지. 숙소는 조교 기숙사를 신청해 놨다. 경비행기이지만
와서 테스트도 해보고 준비도 해야 돼. 경비행기도 민감해.”
“네, 교수님. 지난 3년 동안 있던 직장 그만두니 만감이 교차되네요. 여행 좀 다녀와서 학교로
내려갈게요.”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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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다. 조심히 다녀오고 학기 시작 전에 보자.”
“네 안녕히 계세요.”
얼마 전 테크니션을 일하고 있던 소영에게 대학은사였던 박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박 교수는
항공운항학과 교수로 공사를 졸업하고 공군조종사로 있다가 예편해 항공사 베테랑 기장으로
근무한 바 있다. 지방에 있는 이 대학에서 항공운항학과를 설립하면서 교수로 스카우트돼 갔다.
김 감독관과는 공사 동기다. 박 교수는 경비행기를 조종할 때 도와줄 수 있는 조교교관이 그만둬
김 감독관의 양해를 구하고 소영에게 조교교관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소영은 지난 3년 동안 다녀보지 않은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다. 배낭여행으로 유럽으로 가서
홍콩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20일간의 일정으로 여정을 짰다. 전화를 끊은 소영은 힘찬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20일 후.
“땡큐 후쿠오카 타워, 컨텍 인천타원 에어 투데이 부라보 747 라디오 133.8 플랩 37,000”
“롸저, 에어투데이 부라보 747 라디오 133.8 굿 데이” 한국 국적사인 에어 투데이항공이 일본
영공인 후쿠오카비행선을 넘어 한국영공으로 들어오고 있다. 기장은 헤드셋마이크를 통해
후쿠오카 공역을 관제하는 관제사와 인사를 한 후, 한국 공역을 관제하는 관제사에게
라디오주파수와 고도를 알렸다. 한국공역에 들어온 에어 투데이 747의 기장과 부기장은 긴장이
풀렸다. 매번 하는 비행이지만 다른 나라 영공에 있을 때에는 바짝 긴장을 하다가 한국 영공에
진입하면 긴장이 풀린다. 고국 영공이기 때문에 하늘에서도 편안함을 느낀다.
“기장님, 이번 비행 끝나면 휴가시죠.”
“연가까지 내서 한 달 정도 돼지, 군대에서 제대하는 아들놈하고 와이프하고 여행이나 갔다
오려고...”
“좋으시겠어요. 에휴! 저는 내일 또 비행 있습니다. 화물기 장거리예요.”
긴장을 풀은 부기장은 조종간을 놓고 기장에게 말을 건다. 자동비행을 하기 때문에 조종간을
잡고 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부러움 가득한 말을 전하는 부기장은, 기장이 뒤쪽 가방에
뭔가를 뒤적거리며 찾는 것을 보고 말을 이어간다.
“뭐 찾으세요 기장님!”
“어디 있지, 여기다 뒀는데, 와이프가 매일 한 병씩 마시라고 챙겨준 게 있는 데, 상황버섯
엑기스라나 뭐라나, 여기 있네!”
작은 생수병에 담긴 것을 꺼내 다시 바로 앉는 기장의 얼굴에는 흐뭇함이 가득하다. 부인이 매일
자신의 몸을 신경써주는 것이 고맙기 때문이다.
“기장님! 조종석에는 외부음식 반입하면 안 되는 규정 모르세요.”
“야! 이 사람아 이게 진짜 내부음식이야, 우리 집사람이 정성스럽게 만든 것이 진짜
내부음식이지! 캐터링센터에서 만든 음식이 내부음식이냐? 외부 음식이지!”
기장은 뚜껑을 열고 500cc생수병에 담긴 갈색빛깔이 나는 물을 한 모금 자랑스럽게 마신다. 반
정도 마신 기장은 부기장에 말을 건넨다.
“이봐! 자네도 한 모금 마셔봐, 상황버섯액기스인데 홍콩 갈 때도 한 병 마셨어!”
부기장은 뭔가 찝찝했지만 기장이 주는 것인지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생수병을 받아들은
부기장은 기장의 성화에 못 이겨 이내 한 모금 마신다.
“많이 쓴데요. 기장님.”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쓴 거라네. 헉!”
말을 잇지 못하던 기장이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배를 뒤튼다. 이를 본 부기장이 안전벨트를
급하게 풀고 기장의 몸을 잡는다.
“기장님,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헉!”
기장의 몸을 붙잡고 있던 부기장도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런 표정을 짓더니 기장이 앉은 좌석
뒤로 쓰러진다. 기장과 부기장은 잠시 후 의식이 잃었다.
상미는 이상함을 느꼈다. 비행기 고도가 내려가지 않고 있는 것을 직감했다. 국적사
스튜어디스생활 5년 동안 수없이 인천국제공항에 들어가는 항로로 비행한 까닭에 항로를 눈에
꿰고 있는 데, 오늘은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보통 착륙 10분전에
하는 기장의 착륙인사방송이 나오지 않았다.
“저기, 여기요.”
“죄송합니다. 잠시 만요.”
앉아 있는 손님이 불렀지만 상미는 창밖을 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상미는 비행기 입구로 가서
창문 밖을 내다보고 바로 반대 쪽 창문 밖도 내다봤다. 비행기 좌측의 영흥화력발전소와 우측의
하늘, 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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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호가 너무 작게 보였다. 순간 상미는 비행기 고도가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보통
때라면 눈으로 발전소와 호수가 확연히 보였는데 너무 작게 보이는 것이다. 상미는 빠른
걸음으로 비행기 앞부분에 있던 윤은정 스튜어디스 팀장에게 가 귓속말로 속삭인다.
“팀장님, 이상해요. 비행기 고도가 내려가지 않고 있어요.”
윤 팀장도 기장의 착륙인사방송이 나오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때 이었다. 상미의 귓속말을
들은 윤 팀장도 비행기 좌측과 우측의 창문을 내다보더니 기장실로 향한다. 상미도 팀장을 따라
기장실로 함께 간다.
“기장님! 기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조종실 앞 문 앞에서 알림버튼을 누르던 팀장은 안에서 인기척이 없자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보통 여객기 조종실 문은 개방됐지만 9. 11테러이후 조종석에 기장의 허락 없이는 무단으로
들어갈 수 없는 규정이 있어 문이 잠겨 있다. 윤 팀장과 상미는 조종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뒤에서 어쩔 줄 모르는 상미와 다르게 윤 팀장은 차분했다.
“상미씨 비상용 도끼좀 갖고 와요.”
“네, 알겠습니다.”
윤 팀장은 상미가 가져온 비상용 도끼를 받아들더니 조종실 손잡이를 부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
“팀장님 이것 좀 보세요. 이상해요.”
수많은 점들이 왔다 갔다 하는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상사인 듯한 남자를 부른다. 열 명 남짓한 남자들이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가운데 맨
뒷자리 책상에 앉아 있던 김태기 팀장은 일어나 남자가 응시했던 모니터를 보러 가까이 간다.
“팀장님, 이 비행기가 이상한데요. 고도를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인천공항에 착륙하려면 1만
피트로 내려가야 하는데, 3만 피트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요.”
남자는 국토교통부 항공교통센터 관제사이고 김태기 팀장은 10명의 관제사를 지휘하는
팀장이다. 관제사는 홍콩으로 오는 여객기가 후쿠오카 타워를 넘어 인천타워와 인사를 한 후 3
분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고도를 내려야 하는데 내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김 팀장은
관제사에게 다급하게 말한다.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26
“콜 해봐.”
“에어투데이 부라보747 체크 컨디션, 에어투데이 부라보747 체크 컨디션.”
관제사의 계속된 콜에도 에어투데이 747기에서는 반응이 없다. 최 팀장은 고개를 돌린다. 몇
명의 관제사들 시선이 김 팀장에게 집중됐다.
“이대로 가면 고도 때문에 인천공항에 착륙하지 못해, 비상상황 발생보고하고 인근 비행기 주의
요구해. 그리고 공군에도 이 상황을 전파해, 일어나 내가 할게.”
관제사가 일어나고 김 팀장이 마이크를 잡고 계속 에어투데이 747기에 콜을 하다 몇 번해도
대답이 없자 영어로 해야 하는 규정을 무시한 채 한국말로 콜을 한다.
“에어투데이 부라보747 체크 컨디션, 에어투데이 부라보747 체크 컨디션. 무슨 일 있습니까.
응답하세요! 응답하세요!”
조용하던 국토교통부 항공교통센터 관제소가 분주히 움직인다.
조종실 문이 확 젖혀졌다.
스튜어디스 윤 팀장이 비상용토끼로 조종실 손잡이를 부수고 조종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
기장은 조종석에 앉아 쓰러져 있고 부기장은 기장이 앉은 조종석 뒤편으로 주저앉은 채 의식이
없었다. 상미는 소리치며 놀랐지만 팀장은 몇 초간 조종실 상황을 좌우로 살피더니 기장과
부기장을 흔들며 소리친다.
“기장님, 기장님 괜찮으세요.”
“부기장님, 부기장님. 괜찮으세요. “
팀장이 몇 번 흔들어도 기장과 부기장은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윤 팀장은
기장의 쓰고 있는 헤드셋에서 계속 울려대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기장의 헤드셋을 벗겨 자신의
머리에 쓰고는 다급하게 말한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를 들은 관제센터의 김 팀장은 마치 죽은 조상이 돌아온 것처럼 반가우면서 눈이 동그래지며
말한다.
“에어투데이 747 무슨 일 있습니까.”
하늘, 너의 꿈
27
“에어투데이 747 스튜어디스 팀장 윤은정입니다. 고도가 떨어지지 않아 조종실 문을 비상용
도끼로 부수고 들어와 보니 기장님과 부기장님이 쓰러져 계시고 의식이 불명상태입니다. 지금
조종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관제소의 김 팀장은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대답을 하지 않아 테러나 비행기가 납치되는
하이재킹 상황도 염두에 뒀다. 북한이 가깝고 청와대도 몇 분이며 가는 상황에 이미
오산공항에서 공군기가 출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도 녹록치 않다. 홍콩발
비행기는 단거리여서 교대조종사가 탑승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인천공항에 착륙하려면 빨리
고도를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천공항을 지나쳐 북한영공으로 간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생각도 잠시, 관제소 김 팀장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윤 팀장님 잘 들으세요. 지금 비상상황입니다. 먼저 승객 중에 조종사나 조종과 관계된 승객을
호출하세요. 급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조종실 밖으로 나간 윤 팀장은 전화기모양의 마이크를 들고 기내방송을 한다.
“기내에 조종사나 조종관련 업무에 종사하시는 분이 있으며 기내 앞부분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기내에 의사나 의료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분이 계시며 기내 앞부분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은정은 애가 탔지만 승객들의 동요를 생각해 차분한 목소리로 세 번 연속 기내방송을 했다.
전화기를 상미에게 준 은정은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로도 방송을 하라고 지시한 후 초조하게
기다린다. 기내에는 상미의 외국어 호출방송이 울린다. 은정은 커튼을 친 스튜어디스
전용공간에서 왔다 갔다 하지만 기내가 마치 운동장처럼 길게 느껴진다.
관제소 김 팀장도 속이 바짝 타고 있다. 테러나 하이재킹은 아니지만 비행기 고도를 내리지
못하면 인천공항에 착륙하지 못한다. 인천공항과 북한과의 거리는 비행기로 5분여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조종사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거나 조종사가 없을 경우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비행기와 인천공항과의 거리는 2분정도 남았다.
“이봐 평양타워에 콜하고 이 상황을 알려줘.”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28
“네 알겠습니다.”
관제소 최 팀장은 북한영공으로 비행기가 넘어가는 상황에 대비해 북한영공을 관할하는
평양관제소의 이해를 부탁하려는 것이다.
“팀장님, 평양타워에서 연락을 해왔는데 원리원칙대로 한답니다.”
원리원칙. 무서운 말이다. 조종사가 있을 경우 강제 착륙시키겠지만 조종사가 없어 영공을 계속
날아가거나 불시착할 때 격추도 가능하다. 조종사가 없어 불시착할 경우 북한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명분으로 격추를 한다면 끔찍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팀장님, 우리 공군 오산비행장에서 F16전투기 2대가 출격했습니다. 북한 사리원비행장에서도
미그 전투기 2대가 떴답니다.
관제소 최 팀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관제소 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조종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 뿐.
그 순간 에어투데이 747에서 콜이 들어왔다.
“타워, 여기는 에어투데이 747. 타워, 여기는 에어투데이 747.”
소영은 이상했다. 앞좌석 뒤에 있는 조그만 화면에 인천공항이 가까운 데도 안전벨트 착용 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스튜어디스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조종사와 의사를 찾는 방송이
한국어와 3개 외국어로 10번 이상 반복되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풀은 소영은 조심히 앞쪽으로 갔다.
“무슨 일이죠?”
스튜어디스 팀장 은정과 상미가 조종사가 나타난 줄 알고 고개를 돌렸지만 외소하고 가녀린
외모, 조종사와는 거리가 먼 소영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 자리에 가 앉아주세요. 죄송합니다.”
“무슨 일 인데요. 조종사나 조종관련 업무종사자 찾지 않았나요.”
이런 비상상황에 웬 여자가 귀찮게 구는 것인지 상미는 짜증이 났다.
“저는 송소영이라고 합니다. 제가 비행시뮬레이터 테크니션으로 근무했었는데....”
은정은 솔깃했다. ‘비행’이라는 단어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행시뮬레이터
테크니션이 뭔지 몰랐다. 스튜어디스에게 생소한 단어다.
하늘, 너의 꿈
29
“비행시뮬레이터 테크니션이 뭐죠?”
“항공사 조종사들이 받는 시뮬레이터 비행 감독관을 보조해 주는 역할...”
“보조라고요. 조종할 줄 아나요. 이 비행기 조종할...”
“어쨌든 우리보다는 났겠지. 상미씨 비켜. 이리로 오세요.”
의구심에 꼬치꼬치 캐묻는 상미의 말을 막은 은정은 소영의 손을 잡고 조종실로 가서 무턱대고
조종석에 앉혔다. 조종실로 오는 중간에 기장과 부기장이 들것에 눕혀져 통로에 있던 것을
발견한 소영은 비행기에 이상이 생겼다는 직감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조종석에 앉은 소영에게
은정은 헤드셋을 씌워주고 상황을 설명하면서 헤드셋마이크에 대고 말을 하라고 재촉했다.
소영은 놀랐지만 다급한 상황인 것만은 확실했다. 소영은 헤드셋 마이크에 입을 댔다. 그 시각
에어투데이 747은 이미 인천공항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인천공항 착륙은 이미 물 건너갔다.
“타워, 여기는 에어투데이 747. 타워, 여기는 에어투데이 747.”
관제소의 김 팀장은 에어투데이 747에서 들려오는 콜을 듣고 왔다갔다 서성대다 놀라 마이크
앞자리로 달려가 마이크를 잡았다.
“파일럿입니까?”
“아닙니다. 비행시뮬레이터 테크니션입니다.”
“테크니션이면 항공사 테스트 시뮬레이터 감독관 보조 말하는 겁니까?”
관제소 김 팀장은 순간 실망했다. 조종사를 기대했지만 시뮬레이터 테크니션이라니. 그러나 이내
이마저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댔다. 비행기가 인천공항 상공을 지나고
있는 상황. 5분이면 북한영공이다.
“비행기 조종 경험 있습니까?”
“학교에서 경비행기 몇 번 조종한 경험은 있습니다.”
“경비행기요?”
“예, 대학에서 항공운항학을 전공했습니다.”
관제팀장은 그나마 경비행기를 조종한 경험이 있어 소영이를 믿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이 비상상황에서 수백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소영 이뿐이다.
조종석에 앉은 소영이는 실제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조종해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20여일의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30
배낭여행이 끝나면 모교로 돌아가서 항공운항학과 조교로 다시 출발하려고 다짐했는데
비상상황에서 다시 조종석에 앉았다. 그것도 정말 하늘을 나는 비행기 조종석에 말이다.
소영이는 비상상황이지만 흥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헤드셋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에어투데이 747, 여기는 에어투모로우 101 응답하라.”
“에어투모로우 101, 여기는 에어투데이 747 말하라.”
“항공교통센터 관제소의 요청으로 에어투데이 747을 지원하기 위해 근처를 날고 있다.
에어투데이 747은 이미 인천공항 상공을 지나 군 공역으로 들어왔다. 4분 안에 헤딩을 틀어야
한다. 머리 위에 있는 헤딩보턴을 좌로 180도 돌려 좌선회하라.”
에어투모로우 101은 중국 국적의 비행기. 중국 푸동공항에서 출발해 인천공항으로 오는
화물기로 베테랑 조종사가 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인이다.
항공교통센터 관제소 김 팀장은 중국국적 항공사 중에 한국인이 조종하고 있는 항공기를
수배하고 있었다. 관제사인 탓에 비행기 조종은 문외한이어서 에어투데이 747기를 지원해 줄
비행기 조종사가 필요했다. 부하직원을 통해 계속 콜을 했다. 중국 국적의 에어투모로우 101
조종사는 최장호 기장. 대한민국 최고의 항공사에서 근무하던 최 기장은 잠깐의 실수로 인해
퇴직하고 중국 항공사에 취직했다.
관제소 김 팀장이 중국 국적의 비행기를 찾은 이유는 북한이 중국국적 항공사 비행기에 대해서
관대하기 때문에 북한 영공에 가까이 접근해도 시비가 없다.
중국 국적 에어투모로우 최 기장은 중국인 부기장의 만류에도 고도를 착륙고도인 1만 피트에서
3만 피트로 무리하게 올렸다. 중국인 부기장이 회사에 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최 기장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의 국적기가 위험에 처한 상황을 그대로 볼 수 없었다.
“에어투데이 747 제발 부탁한다. 헤딩을 남쪽으로 선회하라.”
에어투데이는 일반항공기가 들어갈 수 없는 군 공역으로 들어갔다. 군 공역을 4분정도 날아가며
북한영공으로 들어가는 비상상황이다. 1분이 지나 3분이 남았다. 소영이는 고개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급박한 상황에 매일 시뮬레이터 비행기에서 보던 헤딩보턴이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 기종이 틀리면 버튼의 위치도 틀리다. 그렇게 또 1분이 지나 북한 영공까지 2분 남았다.
“에어투데이 747. 헤딩을 돌려라. 에어투데이 747. 헤딩을 빨리 돌리기 바란다.”
하늘, 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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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투데이 747 레이더에는 좌측 중국에서 오는 에어투모로우 101기가 포착됐다.
“에어투데이 747. 헤딩을 돌려라. 에어투데이 747. 헤딩을 빨리 돌리기 바란다.”
에어투모로우 101기 최 기장의 비행기가 좌측에서 오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에어 투모로우
101기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지만 헤딩보턴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우리 공군
오산비행장에서 날아 온 우리 F16전투기 2대도 따라붙었다. 에어투데이 747 레이더에는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북한군 미그전투기 2대도 접근하고 있었다. 북한영공으로 넘어가면 북한
비행장에 강제착륙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소영이 눈이 머리 위 좌측에 헤딩보턴을 찾았다. 소영이가 테크니션을 담당한 시뮬레이터 기종은
우측에 있었는데 이 비행기는 좌측에 있었다. 소영은 손을 올려 천천히 헤딩보턴을 좌측으로
틀었다. 드디어 비행기가 서서히 좌측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주먹을 움켜쥐고 파이팅 포즈를
혼자 취한 소영은 헤드셋마이크로 흥분한 목소리를 전한다.
“에어투모로우 101, 여기는 에어투데이 747 좌선회하고 있다.”
에어투모로우 101도 에어투데이 747의 뒤를 우측으로 선회해 뒤를 쫓고 있다. 중국국적
에어투모로우 부기장은 중국말로 기장에게 “당신을 보고하겠다”고 말한다. 최 기장은 “
OK”라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
대한민국 항공사의 실수를 막은, 그리고 과거 자신의 실수를 보답한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뒤를
따르던 우리공군 F16전투기들로 날개를 틀어 좌측으로 선회했다. 전투기는 여객기와 달라
좌측으로 선회하는 거리가 짧았다. 북한 영공까지 2분. 반원을 틀어 선회하는 거리까지 계산하며
30초만 늦었어도 북한과 시비가 벌어질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에어투데이 747의 선회로 이를 지켜본 항공교통센터 관제소, 인천공항 관제탑, 그리고
비상상황으로 이들의 교신을 듣고 있던 인근의 민간항공기 조종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좌측으로 선회하던 에어투데이 747이 다시 남쪽으로 향하자 전투기가 옆에 붙어 소영이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마치 소영이의 첫 비행을 축하해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소영도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전투기는 에어투에이 747보다 더 빨리 날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영이는
기쁨도 잠시 다시 긴장해야 했다. 이제는 착륙이 남았다.
“여기는 에어투모로우 101, 에어투데이 747, 180도 선회 후 헤딩을 제자리로 돌린다.”
“에어투모로우 101, 여기는 에어투데이 747 남측 선회 후 헤딩 제자리로 돌렸다”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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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너의 꿈
에어투데이 747은 북측으로 가던 기수를 틀어 남측으로 향했다. 에어투모로우 101은 마치
엄마가 아들에게 길을 안내하듯이 에어투데이 747을 안내해 인천공항에 접근시켰다.
에어투모로우 최 기장은 대한민국 국적기인 에어투데이가 그나마 안전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행운을 빌었다.
조종간을 잡은 소영의 손에서는 진땀이 났다. 객실에 안전벨트 착용 착륙안내방송을 하고 온
은정과 상미도 긴장한 상태에서 착륙을 앞두고 각자 자리에 가서 안전벨트를 맺다.
“에어투데이 747, 에어투모로우 101이다. 행운을 빈다.”
소영은 짧은 시간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비행을 도와 준 에어투모로우 101에게 감사의
인사도 못했다. 곧 이어지는 착륙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 넘어 산이다.
소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지난 3년간의 시뮬레이터 비행동안 실제상황이 아닌 것을 알기에
뒤에서 전혀 긴장을 하지 않았지만 조종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중해 살펴봤다. 어떻게
착륙하는 가에 따라 많은 사람의 생명이 좌우될 수도 있다. 소영은 결심했다. 눈을 뜨고
헤드셋마이크에 힘주어 말한다.
“인천공항타워 여기는 에어투데이 747 헤딩 300 고도 3000이다.”
소영의 힘 있는 목소리는 인천공항 관제탑에 힘차게 울린다. 인천공항 관제탑에서는 활주로를
지정해 준다.
“에어투데이 747 클리어 어프로치 33L”
33L 활주로 인천공항 3개 활주로 중에 가장 좌측에 있는 활주로다. 인근에 장애물이 없어 자칫
착륙 실수를 하더라도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는 활주로다. 시뮬레이터 비행 당시에도 비상상황이
많아 소영이가 가장 많이 테크니션하던 활주로로 익숙하다. 그러나 시뮬레이터와 실제상황은
다르다. 활주로가 시야에 들어왔다. 소영이는 양 날개를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자동착륙장치로 조절했지만 바퀴를 내리는 랜딩과 날개를 단계별로 내리는 것은 조종사가 해
줘야 한다. 계기판의 열십자를 좌우측에 있는 1mm 정도 네모난 사각에 맞추면서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날개 한쪽이 지상에 닿으면 비행기 동체가 반쪽 날 수도 있다. 조금씩 눈앞으로
오는 활주로가 부담이 됐다.
‘쿵’
드디어 비행기 동체가 활주로에 닿았다. 바퀴 브레이크가 작동하지만 바람의 저항을 비행기
33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날개가 심하게 받았는지 날개가 꺾이는 소리가 심하게 들렸다. 갑자기 동체가 틀어짐을 느꼈다.
30도 정도 좌측으로 비행기 동체가 활주로를 벗어났다. 소영이는 우측 날개에 이상이 있음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우측날개부분 엔진에 불이 났다. 계기판에도 엔진부분에 불이 났다는
표시가 나면서 비상벨이 울리고 있었다. 소영이는 시뮬레이터에서 본대로 조종석 우측에 있는
빨간 레버를 당겼다. 불이 꺼지지 않을 경우 승객들을 반대편으로 대피시켜야 한다. 미리
대피시켜서도 안 된다. 반대편 엔진에서도 불이 나면 대형 참사가 난다. 15초를 기다렸다. 엔진
불이 꺼졌다. 소영은 한 숨과 함께 조종간을 잡고 엎드렸다. 순간 은정이가 조종석으로 들어왔다.
“괜찮아요. 소영씨”
“네! 전 괜찮아요. 승객 분들은 무사한가요.”
“모두 무사합니다. 아무 일 없어요.
소영은 긴장한 탓일까. 조종간을 잡고 쓰러졌다. 기절하는 소영의 귀에 소리를 지르며 출입구로
가는 승객들의 고함과 구급차와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어렴풋이 귀에 들렸다.
소영은 생각한다. ‘정말 내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조종했나’
10일 후
충남 서산의 경비행장에서 가녀린 여자기 남자 셋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 공군 조종사의 슈트
옷을 입은 세 명의 남자는 한 여자에게 고개를 숙인 채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
“왜 자신감을 갖지 못해, 착륙할 때는 착륙만 생각하라고, 왜 바퀴가 세 번이나 활주로에
부딪히냐구”
체구보다 거센 호통소리의 여자는 소영이었다. 남자 셋은 모교 항공운항학과 훈련생.
“다음부터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소영의 호통을 막은 것은 핸드폰 소리였다.
“예, 교수님 연구실로 오라고요. 알겠습니다. 비행기 깨끗하게 손 봐 둬 알았지”
핸드폰을 끊은 소영은 세 명의 훈련생에게 말을 하고 달려간다.
‘똑똑’
“들어와”
하늘, 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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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이가 박 교수의 연구실로 들어서자 검은 양복을 입은 두 남자가 일어선다. 따라서 박 교수도
일어서면서 두 남자를 소개한다.
“송 조교, 에어투데이 알지, 자네가 비상조종해서 착륙했던 항공사, 거기서 온 분들이야”
소영은 생각지도 않은 방문에 당황했다. 그날 처음 비행기 조종은 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담보된 조종이라 이후에 악몽을 시달렸다. 소영은 의자에 앉기도 전에 물었다.
“여기 웬일이세요. 그날 일은 정리되지 않았나요. 기장님과 부기장님은 괜찮으세요”
“기장과 부기장이 마신 상황액기스는 기장 부인이 모르고 일부 독버섯을 넣고 끓여서
의식불명에 이르게 됐습니다. 지금은 병원에서 치료중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여기 온 것은
에어투데이에 많은 도움을 주신 송소영씨를 스카우트하기 위해서입니다.”
스카우트라는 말에 박 교수와 소영이는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에어투데이 직원들은 말을
이어갔다.
“실제상황에서 비행기를 안전하게 착륙시켜주신 보답으로 회사에서는 송소영씨를 미국
항공훈련원 1년 과정에 2억 원의 비용을 대기를 결정했으며, 이후 에어투데이 정식 조종사로
채용하기로 했습니다. 또 송소영씨의 안전한 착륙을 도왔던 중국 국적 에어투모로우의 최장호
기장도 선임기장으로 채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년 후.
인천공항을 출발하는 에어투데이 비행기에 최 기장과 소영이가 나란히 조종석에 앉아 이륙하고
있다. 멀리 아침 태양이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를 바라보면서 찬란히 뜨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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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위의 저녁식사
최우수상
서 용 기

구름 위의 저녁식사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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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네 가족 나란히 앉아 저녁을 먹는다
입맛 까다로운 딸아이의 얼굴에 나팔꽃이 핀다
창밖에선 구름도 케첩을 발라먹는지 온통 붉다
이토록 높은 고도, 빠른 속도 안에서
아내는 그 동안 얼마나 이 밥을 먹고 싶었을까
아주 천천히 저녁식사를 즐기는 동안
식사를 마친 구름의 얼굴빛은 점점 검붉어간다
지구가 어둡다고 불을 켜고 일어서는 별들
철지난 영화 한 편 되살리는 리모컨
우주 미로의 출구라도 찾는 듯
제각기 헤드폰을 낀 채 응시하는 모니터
땡볕 고스란히 스며든 고추장 튜브를 짠다
우리가족의 설렘도 사과처럼 익어가고
지상의 고달픔은 모래알처럼 작아진다
구름 속을 날아가는 새들처럼
아내여! 우리도 모처럼 흰 구름 한 잔 할까?
온가족 오붓이 식사하는 그 무렵
이미 동사무소에 주민등록증 반납하신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 자꾸만 떠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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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하늘 위로 날기 전까지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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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셔틀버스 좌석에 앉아 창밖을 본다. 하늘색 비행기 한 대가 웅장한
소리를 자랑하며, 창공에서 서서히 착륙하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비행기가
바로 나의 직장이다.
공항에서 일해서 좋은 점은, 해외에 나가지 않더라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다양한 인종들이 조화를 이룬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마치,
인천국제공항은 세계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와도 같다. 이곳을 가히, 세계의 작은 축소판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공항 1층의 작은 무대에서 아름다운 연주 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온다. 그 음악소리가 곧 가슴으로 스며들고 기분은 상쾌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하루에 비행기 열 대 정도를 타며, 한 달로 따지면 그 수가 대략 200대 정도가 된다. 그러나
나는 비행기를 타고, 단 한 번도 하늘 위로 날아본 적은 없다. 아마도 나와 같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럴 때면 가끔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남과는 다른 나에게서 이상한
특별함과 자부심을 갖게 되기도 한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럴 때면 그냥 공항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한다고 둘러대는 때가
많았다. 그것은 나 스스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떳떳하거나 당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해왔으리라.
대학교를 졸업한 후, 난 부모님이 계신 영종도에서 살게 되었다. 이 섬에 들어와 산지 2년이 조금
넘었다. 지금 내 나이 서른한 살, 영화 시나리오 작가란 꿈을 꾸며 글을 쓰고 있지만, 금전적인
여유가 뒷받침 되지 않아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영종도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화물청사와 인천공항 밖에 없었다. 일자리를 찾던 중, 대한항공 기내 실을 정리 정돈하는 일에
지원하게 되었다.
첫 출근 날, 인천국제공항이 뽐내는 화려한 외관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공항을 가득 메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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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정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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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그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회사의 인솔자를 만난 후,
그의 안내를 받고 보호구역내로 들어갔다. 사무실 라커룸에서 작업복을 입고 일할 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비행기에 처음으로 올라타게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감과 설렘, 그리고
긴장감이 요동쳤다. 아마도, 나에겐 비행기에 대한 어떤 막연한 동경심 같은 것이 있었던 거
같다. 그것은 인간이 무언가를 처음 접하였을 때, 느끼게 되는 미지에 대한 알 수 없는 호기심과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기내실로 들어가서 내가 목격한 것은 실망 그 자체였다. 나의 기대와 상상과는
너무나도 비대칭하게, 비행기 안은 쓰레기장처럼 지저분했다. 카펫에 쏟아진 오렌지 주스,
빵부스러기, 찢어진 책들과 신문들, 그리고 아기의 기저귀 등등.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비행기에 대한 환상이 철저하게 깨지는 순간이었다. 기내에 대한 첫인상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배신당한 느낌과 비슷했다. 비행기를 단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나이기에,
비행기 안은 항상 깨끗할 것이라 착각하며, 수십 년을 살아왔던 셈이다. 내가 하는 일은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까지, 기내에 있는 쓰레기들을 치우고 기내를 깨끗하게 정리 정돈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나의 직업은 비행기 청소부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런 직업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는,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일을 하는 내내, 후회와 짜증이 밀려왔다. 허리를 최대한 숙이고 기내에 있는 쓰레기들을 줍고,
좌석 포켓 안에 담긴 팜플렛 교체와 정리, 밀테이블과 윈도우 닦기를 반복하다 보니, 허리와
무릎이 너무 아팠다. 일하는 것이 서툴러서 감독님께 호되게 혼나다 보니, 몸이 아픈 것보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그래도 대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한 나인데…. 이렇게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을 하려고, 수십 년간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니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퇴근길에 전화로
친구에게 하소연을 했지만, 내가 듣고 싶은 위로는 듣지 못했다. “그런 일도 참지 못하면, 네가
도대체 뭘 할 수 있겠냐?”라는 말이 친구의 대답이었다. 친구의 말은 정말 사실이었지만, 지금
내가 놓인 처지가 그저 서글펐고 싫었다. 때로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레 하는 일에 적응하게 되었고, 힘들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관두고 싶단 생각이 강렬하게 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대학교 친구한테 전해들은 소식
때문이었다. 대학교 같은 과였던 여자 후배가 대한항공에서 승무원으로 일한다는 사실을 친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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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알게 되었다. “혹시라도 걔 만나면 너 진짜 창피하겠다.” 친구는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친구의 그 말 한마디가 내게는 너무나도 쓰디 쓴 것이었다. 나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비행기에 탈 때마다 승무원이 된 후배를 만나면 어쩌나 하고, 항상 불안한 상태로 일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일을 한지 두 달이 넘었지만, 그 후배를 만날 순 없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죄인도 아닌데 친했던 사람과의 만남을 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지냈던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의 지난 과거의 생각과 행동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에 불과했다. 인간은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병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일을 하면서 동료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 함께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서 가족애와 비슷한 감정마저 들기도 했다. 동료들 중에는 지천명이 넘은 아저씨도
계셨다. 그는 딸의 치아교정비를 벌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또 야간엔 화물청사에서 물건 나르는
일을 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나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여자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병행하면서
일을 한다고 말했다. 이 일을 하는 아주머니들도 정말 많이 계신데, 모두 다 각자의 사정이
있었고, 그들에겐 일을 하는 목표와 꿈이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수치스럽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분들을 볼 때면, 정말 내 자신이 한심하고
창피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기내를 청소하면서 나에게 많은 정신적 변화가 일어났다. 나로 인해 깨끗해진 비행기를 볼 때면,
보람을 느끼고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집에서 청소도 하지 않았던 내가, 승객들을 위해 청소를
하게 된 건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였다. 비행기 청소하는 일을 시작한지 두 달이 조금 넘었을 때
어느새, 내 방 역시 기내 실처럼 깨끗하고 깔끔해지기 시작한 건, 직업병의 단적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웠던 내 정신상태가 일을
하면서 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고,
인상을 찡그리는 때보다 미소 짓는 날이 늘어났다.
6월이 지나고 7월이 오자 날씨가 무척이나 더워졌고, 일의 난이도가 갑자기 높아졌다. 땡볕에
달궈진 비행기 안에서 일을 하는 건, 정말이지 지옥이 따로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은 비행기 안에서 일을 할 때,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다. 무더위 속에서의 고통을 참지 못해 일을 관두는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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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아졌다. 나 역시, 이 정도면 열심히 일했다 생각하고 다른 일을 찾으려하던 중이었다. 직원들을
태운 버스 안에서, 덥다고 짜증을 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때, 박봉자 감독님이
말하셨다. “더워서 미칠 듯이 힘든 거 다 알아. 혼자만 힘든 게 아니라, 모두가 힘들어! 그런데
그거 알아? 이 일도 못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
봐!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어.” 박봉자 감독님께선, 어느 위대한 철학자들에게도 전혀 뒤지지
않는 진리에 가까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더운 걸 죽도록 못 참는 내가 여름의 무더위를 버티며
일할 수 있었던 건, 박봉자 감독님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는 법이라고 했던가. 비행기 안에서 일하던 중, 승무원이 된 후배를 우연히
만났다. 졸업하고 2년 만에 만난 우리는 서로를 보며 너무 반가워했고, 웃으며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후배와의 만남이 창피스럽지 않았던 건, 나 스스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수치심을 느끼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제 또다시 만날지도 모를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웃으며 건넸다. 하늘에서 일하는 그녀가 무사히 지상으로 내려오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스스로 청소하는 일이 더럽고 지저분하며 하찮은 일이라 생각했었던 그런 나는, 이제 더 이상
없다. 오히려, 청소하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럽고 지저분한 편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비행기 객실 정리정돈을 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승객들은
쾌적한 환경에서 안락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일엔 이유가 있는 법이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라고. 그렇다! 세상엔 쓸데없는 일이나 쓸모없는
인간이란 없는 법이다.
밤하늘을 향해 비행기가 날아간다. 그 비행기가 어둠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것을
바라본다. 공항엔 환한 미소로 가족과 상봉하는 사람들도 있고, 타국으로 떠나는 애인을 보며
슬퍼하는 남자도 보인다. 형형색색의 감정들이 공항 안을 가득 채운다. 그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일을 끝내고 피곤해진 몸과 마음이 다시 상쾌해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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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는 말이 없다
이 응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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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투어 출발지는 시민회관 서편 광장이었다. 대구광역시에서 운영하는 시티투어는 5개 코스가
있는데 이날 우리가 예약한 코스는 <제 3코스>로 오전 10시에 출발 오후 5시에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게 되어있는 코스였다. 행선지는 도동서원, 비슬산 자연휴양림, 현풍 곽씨 재실, 유치곤
장군 호국기념관이다. 점심은 비슬산 휴양림에서 그곳에 산재한 식당을 이용하거나 준비해온
음식으로 해결하면 된다.
우리란 1942, 3년에 태어난 신사생, 또는 임오생으로 S고등학교 동기생 가운데 대구에 나와서
살고 있는 성암회 계원 6명을 말한다. 처음 계를 만들 때에는 9명이었는데 한 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한 명은 아내랑 사별이후 자식을 따라 서울로 가버렸으며, 또 한 명은 뇌졸중을 앓아
요즘 병원생활을 하고 있다. 모두 오래 산다고들 하지만 일흔 고개에 얹히니 이런저런 탈로 하나
둘 떨어져 나가는 걸 보면, 그것도 세상물정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의 허사(虛辭)는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가 나가고 있는 계모임 가운데서는 정이 들고, 또 가장 오래된 모임이다.
우리 성암회는 한 달에 한 번씩 매월 3번째 금요일에 만나는데, 지난달 모임 때 한 사람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까지는 만나기만 하면 거저 술이나 마시고, 이놈저놈 찍어다가 욕도
하고, 그러다가 의견이 상충되면 티격태격 언쟁도 좀 해보다가, 그래도 또 시간이 남으면
고스톱으로 메우다가 헤어지는 게 관행으로 돼 있었는데, 그 스타일을 한번 바꿔보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제 나이가 있기 때문에 술도 그렇고, 또 큰돈은 아니라곤 하지만 고스톱도 끝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그런 발상이 나온 것으로 안다. 모두 좋다고는 의견일치를 보았다. 하긴
30여년을 그렇게 지냈으니 진저리도 날만했다. 느지막이 철이 든 건지 그 대안으로 채택한 것이
시티투어였다.
버스는 팸플릿에 나와 있는 대로 10시 정각에 출발했다. 최근에 뽑았던지 빨간 색깔의 새 차였다.
45명 좌석의 빈자리는 거의 보이질 않았다. 두 명이건 세 명이건 대부분 단체손님들로 인터넷
등으로 사전 신청을 받아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우리만 처음이었지 이용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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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더러 있는가 보다.
버스가 시가지를 빠져나오자 밝은 색상의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은 여자 안내원이 마이크를 들고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하루 여러분들의 안내를 맡은 도우미 김입니다. 먼저 오늘 코스를
말씀드리고···.”
시티투어가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들었지만 우리가 직접 이용해보는 건 이날이
처음이었는데, 절후가 마침 녹음방초의 계절이어서 그런지 기분도 상쾌했고, 크건 작건 여행이
가져다주는 약간의 흥분과 설렘도 가담이 돼, 늦게나마 이렇게 방향전환 한 걸 이구동성으로 참
잘했다고 섬겨대면서 출발했다.
“김이라는 저 여자 말이야 처녀여, 아주머니여.”
“야, 이 사람아. 주제파악을 좀 해라. 처녀면 어쩔 거구 아줌마면 어쩔 건데, 도대체 나이는
어디로 먹는지 모르겠다.”
오나가나, 늙으나 젊으나 그 버릇을 개 못 주는 주책바가지는 있게 마련, 일행 가운데 하나가
우쭐대고 하나가 다독거린다.
처음 들린 곳은 4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지키고 있는 도동(道東)서원이었다. 조선 오현(五賢)
가운데 한사람이고 무오, 갑자사화의 중심인물이었던 한훤당 김굉필이 기거했던 그곳은, 혼자
따로 한번 들린 일도 있어 나한테는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세상의 모든 도(道)는 이곳
동녘에서 태어난다고 했던가, 그래서 도동서원이란 현판을 내걸었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고색창연한 고택이다.
점심은 예정대로 비슬산 휴양림에서 준비해온 음식을 꺼내놓고 먹었다. 말이 났으니 얘기지만
거저 만나면 술이나 마시고 고스톱 패나 붙들고 앉았던 곗날에다 비하면 오늘 행사는 건강, 품격,
모양새 등 모두가 진일보 된 양상이어서 시간이 보태질수록 잘했단 생각이 든다.
이날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유치곤 장군 호국기념관이었다. 사실 나는 유치곤 장군을 잘 모른다.
우리가 역사에서 누구를 잘 안다는 건 거의 모두가 비대칭관계로, 일테면 내가 이순신 장군을
아는 것과 같은 그런 관계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나한테 유치곤 장군은 선 이름이다. 아까
출발하면서 안내원한테 잠깐 들은, 영화 <빨간 마후라>의 실제 주인공이라는 게 모두다. 비록
사병출신이긴 하나 나는 공군 출신이고, <빨간 마후라>도 이미 그 당시에 다 본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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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의 실제 주인공을 오늘 여기 와서 처음 들었다는 사실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등잔 밑이 어두웠다는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기념관에는 장군의 이력과 유품을 정리해놓은 호국관, 오늘의 공군이 있기까지 발전과정을
입체적으로 꾸며놓은 한국공군의 변천사와 전투기 한 대에 탑재한 화력의 가공할 위력 따위를
설명해놓은 전시실, 그리고 버스 한 대분의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식 소형 홍보관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아마 지자제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기념관 같은 것으로 보였다.
어쨌거나 당시 F-51무스탕 전투기로 103회를 출격해서 적의 심장부를 폭격했다는 장군의
업적은 상상만으로도 훌륭하고 대단한 성과였다. 내가 입대 후 정훈교육을 받을 때 한국공군이
보유한 전투기는 무스탕 10대가 모두였으며 그것도 전쟁이 터지고 반년쯤 뒤에서야 겨우
도입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당시 여건이 얼마나 열악하다는 걸 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홍보관에서는 영화 <빨간 마후라>를 보여주었다. 낡은 화면에다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이어서, 나는 일행과 같이 잠시 앉아 보다가, 그 시간에 하나라도 다른 걸 보는 게 낫겠다
생각하곤 혼자 밖으로 나왔다.
들어오면서 보니까 기념관 마당에 F-86 F형 전투기 한 대가 있어 그쪽을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공군 지원병으로 군복무를 전투비행단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 비행기를 보자 지난날 그들과
더불어 지냈던 일들이 언뜻 떠올라, 옛날 벗을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솟구쳤던 것이다.
그때가지만 해도 예사롭게, 퇴역한 비행기들이 이렇게 전시용으로도 쓰이고 있구나,
이 비행기들이 이런 시골까지 들어오자면 운반과정이 힘들 텐데 어떤 수단으로 옮겼을까, 이런
생각들과 함께 50여 년 전 날만 새면 붙어살았던 그런 유형의 비행기를 여기에 와서 또 이렇게도
만나게 되는구나 하는, 감개무량함에 젖어 손으로 기체를 어루만지며, 잠시나마 지난날 회억에
빠져 있었다.
<R. O. K. AF 002>
비행기 측면에 박힌 글씨다. 모든, 대한민국의 전투기에는 그게 다 박혀있는 눈에 익은 문자, <R.
O. K. AF>는 대한민국 공군이고 <002>는 비행기 고유번호다. 차량으로 치면 번호판과 같은
역할을 한다.
후미에 박힌 <002>에 눈이 멎는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얼른 수직
꼬리날개를 보았고, 거기 그려진 번개표 마크를 보고 또 한 번 움찔하며 놀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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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표는 내가 근무했던 제일전투비행단을 상징하는 심벌마크로 그때 그 색깔 그대로
붙어있었다. 그 비행기는 50여 년 전 바로 내가 정비를 했던 전투기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군복무 만 3년 중 피교육생활 8개월을 빼고 2년 4개월을 K-2 전투비행단에서 이들 F-86
전투기와 더불어 보냈었다. 아침 점호만 끝나면 항상 우리는 편성된 조별로 바로
라인(주기장)으로 나가서 50여대 전투기에 올라 탑재된 통신장비의 이상 유무를 점검했다. 그건
당시 우리 통신 중대 일과의 시작이었다.
<002>를 확인하는 순간 파일럿 홍 소령, 왕 대령, 그리고 우리 통신 중대의 선임하사관 임 상사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나한테 <002>는 단순한 점검의 대상만이 아닌 특이한 관계로
기억에 남아 있다. 제대 이후 나는 <002>를 다시 만나리라곤 생각해보지 않았고, 아니 아예 그런
쪽으로는 상상도 해보질 않았는데, 그 비행기를 다시 여기에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아닌 게
아니라 극적인 해후가 아닐 수 없다.
그날은 영내 전 부대원들이 기지극장에서 정훈교육을 받았다. 날이 흐리거나 비행 스케줄이 없는
날 전투비행단 소속 사병들은 그런 식으로 일과를 짜서 보내곤 하는데, 흔히 있는 일이다.
이날 초빙 연사는 가나안 농군학교 교장 김용기 장로였다. 공군본부 군종감이 직접 모시고 온
특별 연사라고 했다. 그는 그해 생겨난 제1회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부문 수상자로 이미
매스컴을 탄 유명인사다. 군종감은 그를 소개하면서 막사이사이상은 아세아의 노벨상이라고
부를 만큼 권위 있는 상이라고 칭송했고, 모시기 어려운 분을 모셨으니 오늘 선생님의 말씀을 잘
새겨들어 앞으로 우리들 생활에 하나의 신념으로 삼자고 했다.
군종감의 소개가 없었더라면 하찮은 시골 노인네로밖에 볼 수없는, 작달막한 키의 상고머리에다
흰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은 중늙은이가 한 사람이 단상 위에 올랐다. 눈매 하나만은
초롱초롱 살아 번득였다.
“···내가 동경제국대학을 다녔는데, 2학년 때 여름 방학이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다고
고드반 구두를 맞춰 신고는 한껏 뽑아서는 들어왔지요. 그런데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차에서 막
내려서는데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잖아요. 할 수 없이 구두를 벗어서는 싸서 들었습니다. 고드반
구두가 어떤 구둡니까, 구두를 망가뜨릴까봐 그놈을 가슴에 품고는 맨발로 십리 길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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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집에 들어와서 보니 구두는 멀쩡한데 내 발은 망가져서 피투성이가 돼 있더라고요. 나는
구두를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구두가 나를 위해 있는 건지, 내가 구두를 위해 있는
건지 모르겠더란 말입니다. 세상에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날부터 나는 구두를
벗어던지고 고무신을 신기로 했던 것입니다. 나는 누가 뭐래도 농사짓는 사람한테는 고무신보다
더 좋은 신발은 없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지난 달 막사이사이상을 받으러 필리핀에 갈 때도 이
차림, 이대로 고무신을 신고 갔었지요. 비행기 안에서 고무신 신은 사람은 나 한 사람
뿐이더구만요. 고무신은 ···.”
김 장로는 자기가 신고 있는 흰 고무신 신은 발을 그대로 번쩍 들어 내뵈며 열변을 토했다.
참석한 장병들이 그의 연설에 빠져 한창 감동을 받고 있을 즈음이다. 갑자기 비상벨이 울었다.
따르릉, 따르릉···.
벨 소리는 김 장로의 연설로 조용한 극장을 온통 흔들어놓았다. 비상벨은 병사들이 있는 곳엔,
휴게실 같은 데까지도 물론 예외 없이 동시에 울게 되어있다. 금세 극장 안은 불안과 긴장으로
술렁거렸다.
전투비행부대가 있는 기지에서 비상벨이 우는 경우는 준전시를 의미한다. 적기가 나타났거나
기지가 피습 당했을 경우, 아니면 전투기가 추락했을 경우 등을 말한다. 비상벨의 성격을 잘 아는
사람들의 집단이라 김 장로의 연설은 그쯤에서 엉거주춤 끝나버렸고, 참석한 장병들은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의 근무처로 급히 돌아갔다.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 되어 근무처로 냅다 뛰었다. 내가 근무하는 전투기 통신정비중대는 대형
격납고 안에 있었다.
“오키나와 항법 갔던 편대가 지금 막 돌아왔는데, 그중 한 대가 바퀴가 나오지 않아 못 내리고
지금 비행장위에서 돌고 있다.”
근무처를 혼자 지키고 있던 선임하사관 임 상사의 이야기였다. 컨트롤 타워의 인터폰 방송이
방금 있었다고 했다.
나는 동료들과 같이 라인으로 나왔다. 현 상황이 궁금했던 것이다. 하늘에는 정말 F-86 비행기
한 대가 타원을 거리며 평상시의 착륙할 때 그들이 취하는 이니셜 코스로 도는 게 보였다. 이날은
비행이 없는 날이라 쉽게 표가 났다. 4대로 구성된 편대가운데 이미 3대는 착륙해서 라인에
들어와 있고 1대만 못 내린 채 지금 컨트롤 타워의 지시를 받으며 돌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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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에는 이미 비상사태를 안 많은 정비병들이 쏟아져 나와 하늘을 보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 부문에 이상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원인이 된
정비계통에서는 문책이 따를 건 번하기 때문이다.
항공기 사고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왜 일어나는지는 항상 궁금증으로 안긴다. 사고가
예상되는 모든 부분이 이중구조로 되어있고, 또 50시간, 100시간 점검 등이 있어, 모든 부품이
내용(耐用) 시기 전에 사전 교체를 해서 예방을 한다. 일부나마 내가 직접 맡아 해봤기 때문에,
어느 구석에도 사고 날 이유가 없는데도 사고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나고 있는 것이, 아닌 게
아니라 참으로 아리송하다.
내가 공군에 입대한 것은 62년도 10월이다. 사병 108기. 그해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 들어갔으나
한 학기를 간신히 다니고 기어이 휴학계를 내고는 말았다. 설마 붙고 나면 무슨 방도가 생기겠지,
형편이 어려운 처지의 무모한 진학이 화근이었다. 3년 뒤를 약속하고, 그런 점에서는
의무복무연한인 군복무 3년이 우리한테는 참 멋진 제도라고 생각하며 입대로, 진로를 수정했던
것이다. 공군은 지원제다가 당시 4대 1이라는 꽤 높은 비율을 뚫어 들어갔었다.
8주의 기본군사훈련을 마치고 적성검사에 따라 내가 배치된 곳은 항공기 통신정비학교였다.
모두 시험을 거쳐 들어온 사람들이지만 그들 중에서도 통신 분야에 떨어진 사람들이 IQ가
높다고 했는데, 주변 사람들 입에서 나온 소리라 자화자찬인지 그런 것 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
주변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대학교를 다니다가 온 사람들만은 분명했다
그때만 해도 일반 수신기(라디오 등)는 진공관으로 만들어진 제품들이었는데, 항공기에서
사용되는 통신장비들은 트랜지스터로 대표되는 반도체로, 또는 IC라는 집적회로로 변환되는
과정에 있어, 전자라는 새로운 분야에 발을 들여놓아, 나는 모처럼 군대에 와서 취침시간을
줄여가며 억센 공부를 한번 했다. 점수미달로 유급을 하면 퇴교처분(귀가조치)을 한다는 바람에
내 기억으로는 고3 때보다도 더 힘든 공부를 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그 즈음 시중에서
라디오점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공군 하사관 출신이라고 할 만큼 통신학교만 나오면
그쪽으로는 도사가 된다고들 했다.
6개월간 통신교육을 마치고 배치된 곳이 K-2의 전투비행단 소속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유일한
전투기인 F-86, 이른바 세이버 제트기의 통신 분야 담당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통신장비를 땠다, 붙였다하는 것뿐이지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말해 작동하는 방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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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 뿐이지 그 이상 깊은 내용은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공군에서
미국 물건을 빼고 나면 사람밖에 남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돌아다녔으니까.
미군들은 매주 한 번씩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공구의 드라이버 하나까지 마모상태며 숫자를
확인했다. 그야말로 약한 자의 슬픔이 어떤 것인가를 그때에도 절감하며 지냈던 것이다.
그렇게 지내던 참인데 그날 그런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제대 날짜가 3개월밖에 남지 않아,
앞으로 제대를 한 뒤에는 복학을 해야 할지, 학교는 더 미루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할지 한창
고심이 컸던 무렵이기도 했다.
하늘에는 사고 비행기가 세 바퀴 째 돌고 있었다. 바퀴가 안 나오면 결국은 동체착륙을 해야 할
판인데 그때를 대비해서 비행기에 주입된 연료를 최소한으로 지니고 나머지는 낭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때 우리 통신 중대 중대장 김 대위가 나를 찾는다고 했다.
“어이 이 하사, 빨리 스리 원(310도방향) 런웨이로 나가거라. 작전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곧
사령관님이 그쪽으로 나가실 모양이야.”
“예 알았습니다.”
나는 곧 정비타워에서 준비해준 옐로우 카(주기장 안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는 노란색깔의
스리쿼트 차량)의 지원을 받아 그쪽으로 갔다. 비행훈련이 있는 날이면 그곳은 내 근무처다.
이곳 K-2 기지 비행장 활주로는 지구의 양극을 기점으로 130도와 일직선인 310도 방향으로
누워있다. 이날은 바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고 있었다. 모든 이착륙 비행기는 비상시를
제외하곤 바람을 안고 뜨고, 안고 내리기 때문에, 비행훈련 중에는 항상 한쪽 런웨이 타워는
열려있어야 하며, 그곳엔 영관급 교관요원 파일럿 한사람이 근무하면서 이착륙비행기를 감시
감독하게 되어있다. 런웨이 타워는 컨테이너 비슷한 크기 나지막한 시설이지만 천장이 모두
투명한 유리로 덮여있고, 항공기 이착륙지점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조종석에서 느끼지 못하는
이착륙 시 비행자세라든가 비행 상태를 교정시켜준다. 그리고 썩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갑자기
통신상태가 두절되어, 바퀴를 미처 못 빼고 내리는 경우엔 연막탄을 쏘아 내리는 비행기를 다시
뜨게 하는 일 등을 도와준다. 또 그 옆에는 만약을 대비 앰뷸런스와 소방차가 대기하고 있는데,
거기 나온 파일럿은 그들의 상태도 감시감독하게 되어있다.
런웨이 타워로 나온 나는 바로 통신기를 작동시켰다. 그곳에 있는 통신기는 ARC-27로 F-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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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에 장착된 통신기와 같은 형이다. 비행기와 컨트롤 타워와 주고받는 내용들이 런웨이 타워
수신기에서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곧 작전 사령관 왕 대령이 지프차로 나타났다. 교관요원들도 여러 명 따라 나왔다. 작전 사령관이
나오는 예는 잘 없는데 이날은 상황이 달랐다.
들어서자마자 왕 대령을 마이크를 잡았다.
“홍 소령, 내 말 잘 들려, 나 사령관이다.”
“라저(잘 알겠다는 비행용어).”
“연료는 얼마나 남았나?”
“3갤런쯤 됩니다.”
“알았다. 지금 내가 런웨이에 나와 있으니까, 일차적으로 하드랜딩을 한번 시도해보란 말이야.
알았지?”
지금까지는 작전실에서 교신을 나누었던 모양이다.
“네, 이번 이니셜에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착륙지점을 활주로 안으로 좀 댕겨서···.”
“라저.”
하드랜딩이란, 지금 상태가 윙 기어(양 날개 밑 바퀴)는 나오고 있지만 노스 기어(앞바퀴)가
나오지 않는 상황임으로, 착륙을 시도하면서 윙 기어를 활주로에 쾅 부닥뜨리게 해서 그
충격으로 노스 기어가 나오도록 하는 방법을 말한다. 왕 대령은 망원경으로 310도 방향
끄트머리를 열심히 지킨다.
곧 비행기는 진입을 했고, 평상시 착륙 때와는 달리 떨어지듯 활주로에 닿았다. 하지만 바퀴가
세멘 활주로에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하얀 연기만 진하게 생길뿐 노스 기어는 보이질 않았다.
수레 모양 윙 거어로만 구르든 기체는 다시 하늘로 솟는다. 열심히 지켜보든 왕 대령이 다시
마이크 키를 누른다.
“아무래도 어렵지 싶은데, 그래도 한 번만 더 시도해보자. 홍 소령, 파이팅.”
“라저.”
홍 소령의 담담한 대답이다.
문제의 전투기가 비행을 하는 동안 왕 대령은 컨트롤 타워에다, 예상되는 사고를 대비 후속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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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지시한다. 주변에 떠 있는 항공기들을 파악, 모두 불러들이라고 했으며, 민간여객기들은
유도로로 내리는 것을 검토해보라는 주문도 따른다.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를 해보다가 안 되면
결국엔 동체착륙을 할 수밖에 없는데 만약의 경우 폭발로 인한 활주로 손상 같은 것은 감안한
지시인 듯했다. 평상시 대기하고 있는 앰뷸런스와 소방차 외에 더 많은 보조 장비들을
보완시켰다.
지금 문제가 된 전투기의 파일럿이 홍 소령인 것을 알자 내 머릿속엔 그의 얼굴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조종간부후보생출신인 그는 현재 18대대 편대장이다. 많아야 마흔이 될까 말까 한
아직 동안이다. 런웨이 타워에 가장 많이 나오는 교관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해서, 평소
근무자라곤 교관과 나 두 사람뿐이기 때문에 약간의 친분도 생겼다. 원래 18대대가 야간이나
흐린 날에만 출격하는 부대지만 그는 부대 내에서도 우수한 조종사로, 그해 18대대가 3만 시간
무사고 비행기록을 세워, 전투비행단 창단 이래 초유의 역사를 쓴 핵심 멤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생사의 기로에서 시련을 맞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런웨이 타워에서 홍 소령과 둘이 있을 때 그가 심심풀이 땅콩삼아 내게 한 이야기들이
문득 떠오른다.
“이 하사, 내 얘기 한번 들어보라고. 올 봄에 미국 존슨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왔잖아. 그때
지시에 의해 우리 일전비(제일전투비행단)에서 독도 앞바다까지 마중을 나갔거든. 왕 대령을
리드로 해서 나도 편대원으로 같이 출격했는데, 그런데 말이야, 참으로 서글픈 현실을 발견한
거야. 우리가 탄 게 명색 전투기잖아. 그런데 아무리 파워를 밀어도 여객기를 못 따라
오겠더라고. 이게 말이 되는 얘기여. 우리 공군들의 위상이 이러니 큰 일 아냐. 우리 세이버(F-86
전투기) 저거 싹 바꿔야 한다고.”
이런 우리 공군의 현주소를 걱정하는가 하면, 또 한 번은 무슨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우리 파일럿들한테는 좋은 게 하나 있더라고. 전쟁이 나더라도 다쳐서 위독하느니, 불구가
되느니 하는 이런 불상사는 없는 거야. 안 죽으면 멀쩡하니까 말이야.”
신나는 발견처럼 그 말 한마디를 던져 놓고 어린아이처럼 웃던 모습이 선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자꾸만 내 신경을 건드린다.
두 번째 하드랜딩도 별 성과 없이 끝났다. 이젠 동체 착륙밖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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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년 전에 비슷한 상황을 맞은 일이 있어, 그때는 비행기를 착륙지점에 얹어놓고 조종사는 벨
아웃(조종사를 보호하기위한 비상탈출)한 일이 있었는데, 파일럿은 무사했지만 착륙한 비행기가
옆으로 붙어 격납고를 들이받는 바람에, 그 안에서 정비중인 전투기 7대를 잃은 엄청난 사고를
치른 일이 있다. 그 이야기는 공군들만이 아는 비밀을 넘어 당시 국민들도 크게 놀랐던 일이다.
F-86이란 기종이 이미 미국에서는 퇴역한, 일테면 내용(耐用)연수가 한계에 이른 중고품들이기
때문에, 이런 잦은 사고는 후진국의 비애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슬픈 현실이기도 했다.
이윽고 왕 대령의 동체착륙 지시가 떨어졌다. 어떤 개인의 용단이 아니라 작전회의에 의한
결정이었다. 이제 연료가 바닥이 나면 착륙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활주로 주변은 초 긴장상태에 들어갔다. 예상되는 착륙지점에는 두 대의 불자동차가 하얀 거품의
소화제 포말을 뿌리고 주변엔 사고처리반 인원들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여려 유형의 사고를
대비하고는 진입하는 비행기를 지켜보고 있다. 비행기를 한 대 잃는다는 수십억의 국민세금도
그렇지만 파일럿 홍 소령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활주로를 가운데 두고 마지막 타원을 그린 비행기는 마침내 왕 대령이 지시한 착륙지점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윙 기어만 뽑아 활주로 중간지점까지 저공으로 날아온 비행기는 조금 전
하드랜딩을 시도할 때와 같은 양상으로 닿아, 상당한 거리를 그대로 가다가 양력의 한계를 받자
그대로 머리를 활주로 박았다. 아무리 파워를 줄여 붙였지만 시속 2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다.
튀어 오르는 불똥과 물보라 같은 하얀 연기가 일어난다. 쇠붙이가 내뱉는 마찰음이 귓구멍을
따갑게 한다. 비행기가 멎을 예정지를 향해 소방차등의 사고 처리반 차량들이 전력으로
질주한다.
비행기가 멎었다. 처리반 장병들이 전투기 옆으로 우 몰려들었다. 기체가 멎은 지가 한참이나
되었는데도 캐노피(조종석을 만들고 있는 투명한 덮개)는 열리지 않았다. 자동으로 작동이
불가능했던지 한참 뒤에서야 처리반 요원들에 의해 캐노피가 열려졌고, 그러고도 한참 뒤에서야
홍 소령이 헬멧과 낙하산을 짊어진 채 끌려나오다시피 부축이 되어 나오고 있었다. 충격으로
인한 실신상태는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쪽에서 벌어진 상황을 하나하나 열심히
지켜보았다. 다행하게도 가장 크게 염려했던 폭발이나 불은 나지 않았다. 지휘부에서는
그것만으로도 무척 다행이란 듯 숨을 몰아쉬었다. 홍 소령은 나오자마자 앰뷸런스에 실려
기지병원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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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전투기는 옐로우 카에 끌려 활주로를 떠나고 있었다. 치밀한 작전의 결과이긴 전투기 한
대는 잃었어도 최소한의 피해로 막은 내린 셈이다. 활주로를 천천히 빠져나가는 전투기의
꼬리부분에 박한 <002> 넘버가 그때서야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아니 우리 통신반 중대원들이
무시로 오르내렸던 항공기 가운데 하나다. 중천의 햇살을 받아 그 숫자는 더욱 또렷하게 빛까지
쏟아내고 있었다.
그날 뒤로 <002>기체는 라인에서 보이질 않았다. 감찰관 실에서 사고조사를 한다니까 어디엔가
박혀 있겠지, 그리고 그게 끝나면 고철더미로 사라지겠지, 한번 사고 난 비행기는 사고의 크고
작음을 떠나 비행장에서 사라지는 게 그들의 운명이다. 지상의 동체와 그런 점은 또렷하게
다르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나는 전역명령을 받았고 그곳을 떠났다. 떠나기 직전 들은 소문에 의하면
파일럿 홍 소령은 더 이상 전투기는 타지 않고 자리를 옮겨 C-34 수송기 조종간을 잡는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다. 전투기 파일럿으로 출발한 사람들 가운데 신체적, 정신적 이상이 생겼을
경우 그런 일이 있다고 했다. 아마 그날 동체 착륙으로 인한 충격이 그 원인을 제공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50년 남짓, 반세기 가까운 세월 저쪽의 회억에서 허둥대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나는 기적처럼
만난 <002>를 쓰다듬으며, 기체의 곳곳을 둘러본다. <002>를 여기에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이거야말로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반갑고 반가웠다. 마음 같아선 끌어안고 만단정회를
풀어놓으며 눈물이라도 쏟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똥을 튀며 망가졌던 기체의 앞부분은 몰라보게 재생되어 있었고, 당시 말썽을 일으켰던 노스
기어도 그대로 붙어있었다. 모르긴 해도 그날 이후로 비록 하늘을 날아야하는 비행기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외양만은 보수가 되어 어디엔가 박혀 있다가 이곳에 기념관이 생기면서
옮겨진 것 같았다. 여기에 이렇게 떡 버티고 있으니 새삼스레 보아 그런지 위풍도 있었다.
더군다나 내 눈에 자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당시 같이 근무했던 선임하사관 임 상사의 얼굴과 동료들이 떠오르고, <002>가 동체 착륙하던
그날 런웨이 타워로 나와 조바심을 태우던 작전사령관 왕 대령의 얼굴과 주인공이었던 홍 소령의
얼굴도 아슴푸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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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또 하나, 그 뒤 80년도 초로 기억하고 있는 어느 날, 나는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한번
본 일이 있는데, 거기서 본 내용도 같이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대통령이 탄 비행기 서해 상공에서 고장으로 회항>
아프리카 쪽으로 국빈방문차 출국 길에 올랐던 대통령 탑승기가, 우리나라 영역도 못 벗어난
군산 앞바다위에서 연료가 새는 것을 발견하고, 되돌아왔다가 5시간 뒤 재출발했다는 기사였다.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아직 대통령 전용기가 따로 없기 때문에, 2개의 민간항공사와
협의해서 일이 있을 때마다 교대로 차출, 내부를 개조해서 운영하고 있는데, 이날은 K항공사
비행기가 맡아 운행하다가 그런 변을 맞았다는 것이다. 또 기사에 의하면 운행 중 연료가 새는
일은 기압의 변화로 인해 가끔 생기는 일로서, 운항에는 별지장이 없으나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회항했다고 적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그 기사에서 내 눈을 번쩍 뜨게 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당시 운행을 맡았던 조종사
이름을 보는 순간이었다. 바로 <002>의 파일럿 홍 소령, 홍문기였기 때문이다. 내가 확인해볼
사항도 아니어서 그냥 넘어가고 말아 혹 동명이인지 알 수는 없으나, 홍문기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이 아니란 걸 감안한다면 얼마든지 그 분일 수도 있고, 나이로 봐서도 전역을 해 민간항공사
일을 본다면 베테랑 조종사로 그런 일을 맡지 않았을까 싶었으며, 그런 분 같으면 실력으로나,
경험으로도 국가원수를 모시는 사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잠깐 생각해보았던 일이 있었다. 그런
짐작만 하고 이내 지워버렸던 일이 오늘 <002>를 보자 또 떠오른 것이다.
나는 모처럼 죽마고우를 만난, 아니 옛날 전우를 만난 기분으로 전투기 몸체를 한참 쓸어보다가
나도 모르게 캐노피를 열고 조종석으로 들어가 보았다.
“핼로 타워, 샌드볼트 제로 제로 투 래디오 체크 오버”
나도 모르게 내입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 나는 아침 점호만 마치면 레시버를 들고 동료들과 한께
선착순으로 라인에 나와 전투기들의 밤새 이상 유무를 점검했었다. 그러면 타워에서서는 <라저,
제로 제로 투>하고 양호하다는 답신이 나오게 되어 있다. 비록 회신이 없는 가상의 일방적
교신이지만, 순간적이나마 만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그 때 그 F-86전투기 <002>가 여기 시골에 와서 저렇게 전시되어 있다는 걸아는 사람은, 물론
나도 오늘 우연히 발견처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구한 운명적 만남이다. 할 수만 있다면 홍 소령을 수소문해 찾아 같이 이곳을 한 번 더 찾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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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은 심정이다. 내가 일흔을 넘겼으니까, 이젠 그도 여든 줄에 들어서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닌 게 아니라 묘한 감흥이 회오리처럼 인다.
잊혀진 사람이 가장 슬프다고 했던가. 감정이입을 해본다면 잊혀진 물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002>에 붙어서 애마처럼 애지중지하던 사람들도 이젠 다 떠났고,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불원간에 다 떠날 것이며, 그 사실을 이야기로 들은 사람들도 다 떠나고 나면 세상에
모든 것들이 다 그러하듯, 저 <002>도 하나의 엉거주춤한 전시물로 저렇게 박혀 있다가
고철더미로 사라질 것이 아닌가.
“야, 이 친구야. 다른 사람들은 다 버스에 올랐는데 혼자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자네 땜에
버스가 못 가고 있잖아.”
우리 일행 중 한사람이 캐노피 안에 들어앉아 뭉그적대고 있는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때서야 나는
묻힌 회억 속에서 빠져 나온다.
“영화 다 끝났어?”
“벌써 끝났제. 얼른 나와라. 그런데 뭔 구경거리가 있다고 그 속에까지 들어가서 꾸무적대냐?”
“아이, 그냥 좀 볼 게 있어가지구.”
내가 오르자 곧 버스는 곧 떠났다. 달리는 버스위에서도 내 머릿속은 <002>에 대한 여러 가지
상념에서 못 헤어난 채 허우적거려야했다. 그만큼 오늘 나한테 있었던 일은 감동과 기적으로
나를 묶어놓았던 것이다.
어느 틈에 버스는 시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지금까지 젊은 춤꾼들에 의해 차체가 흔들리는
느낌을 받을 만큼 신나는 춤사위로 가득하던, 운전석 위 모니터에서는 5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시티투어는 정확하게 약속시각을 지켰다.
뉴스 중간에 올 봄 LA 해변공항에서 착륙하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를 일으킨 A항공사 소속
여객기의 사고원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이 마치 이번 사고를
위해 만든 말처럼 요긴하게 써먹은, 착륙하다가 일어난 이번 사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
원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블랙박스만 풀어보면 모든 게 금세 해결되는 것 같이
떠들더니만 사고가 난지 너덧 달이 지나도록 조용한 것을 보면,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어려운가
보다. 하나의 사고인데도 관계되는 소속부서마다 다른 색깔의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오늘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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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그 범위를 크게 넘어서지는 못 한듯 들린다. 항공기 사고는 경우에 따라 3, 4년은 넘겨야 그
원인이 밝혀진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3, 4년 뒤면 다 잊어버리지 누가 그걸 기억한다고 저런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명 짜른 놈은 그때까지 살기나 하겠어. 그게 조사는 무신조사여 그냥 어물쩍해서 넘어
가고보자는 거제.”
뉴스를 들은 주변 사람들의 주고받는 이야기들이다.
오늘 꿈에도 생각 못한 <002>를 만난 끝인데다가, 그런 뉴스에다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그런지, 내 머릿속에도 아슴푸레하나마 떠오르는 게 하나있다. 나한테 제대회식을 마련해준
자리에서 임 상사가 한 말로 기억한다. 동체착륙의 여파는 그때까지도 장병들이 모인자리에서는
선착순으로 등장했었다.
“비행기 사고원인 저거 누구도 쉽게 결말을 못 낸다. 노스 기어가 안 나와서 동체착륙을 했다면,
누가 보더라도 과오가 어디에 있다는 건 번한 거 아냐. 그래도 그게 어려운 거야. 내가 8동안 너덧
번 떨어지는 걸 보았지만 아직 한 번도, 이게 원인이라며 자신 있게 밝혀내는 걸 못 보았다니까.
모르긴 하지만, 아마 섣불리 발표했다간 사고보다 더 큰 걸 잃을지 몰라, 그래 뭉그적대는 거
같더라고. 아마 내 생각이 옳을 거야.”
어느 틈에 버스는 아침에 우리가 출발했던 시민회관 서편광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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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내리면
우수상
최 지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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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도 훨씬 넘는 먼 옛날, 루이 16세의 프랑스 왕국이 아직은 ‘갈리아’라는 로마 제국의
속주로 기억되던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론 강 옆의 조그만 군사도시 리옹에서
백여 쌍의 신랑 · 신부들이 주교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주교의 주례가 끝나고 하객들의 우렁찬 박수 속에 부부들이 입맞춤으로 성대한 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던 순간이었다. 로마 병사들이 말발굽과 군화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식장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날카롭게 날이 선 검으로 거기 모인 사람들의 목숨을 하나둘씩
거두어갔다. 로마 황제가 방어선을 뚫고 제국 내로 들어온 야만인들을 물리치러 가는 도중
그리스도교도들의 본거지로 알려진 이곳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부하들과 함께 쳐들어 온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 신자들을 무지 싫어하여 황제가 되기 전부터 수많은 신자들을
죽였었다. 순식간에 식장을 가득 메운 사람 모두가 병사들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백인대장이 주교의 심장에 검을 꽂는 순간 하얀 눈이 내리던 겨울 하늘은 이내 시커멓게
변하면서 천둥과 함께 세찬 비를 퍼부었다. 순식간에 발목까지 물이 차올랐다. 숱한 전장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웠던 병사들은 그리스도교들이 가장 우러러 숭배하는
하느님의 노여움이라 여기곤 줄행랑을 쳤다. 그런데 일주일이 넘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황제가
다시 그곳을 찾았을 적에는 분명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야 할 신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과연 이들을 치웠던 말인가? 병사들은 모두 하느님이 천사를 내려 보내어 이들을 모두
천국으로 데려갔다고 생각하였다. 그로 인해 하느님의 기적을 확인한 병사들은 황제 몰래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본 기적을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이후부터 리옹에는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대신 주룩주룩 세찬 비가 내렸다. 프랑스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은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닷바람으로 기후가 따뜻해져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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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지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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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내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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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에 로마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한 예비부부들과 하객들이 하늘에서 흘리는 눈물이 비로 변해
내린다고 믿었다. 그래서 결혼식 날 하얀 눈이 내리면 그 부부는 오랫동안 행복하게 산다는
전설이 더불어 전해져 내려왔다.
리옹에서 마차로 삼십 분 거리에 떨어진 곳에 비달롱이라는 작은 마을이 자리한다. 이 마을은
너도밤나무 숲이 마을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다. 최근에 마을 사람들은 시장이나 공터에 모이면
마을을 통과하는 작은 강 옆으로 자리한 종이공장의 몽골피에 형제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과연 대학도 제대로 못 다닌 시골 촌뜨기들이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부원장이자 파리 대학의
교수로 계시는 샤를(프랑스의 과학자, ‘샤를의 법칙’으로 유명하다)을 제치고 가장 먼저
하늘을 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 달 전에 몽골피에 형제가 장작을 아궁이에
잔뜩 집어넣고 불을 때운 다음 거기서 나온 뜨거운 수증기로 주머니를 부풀게 만들어 닭과
오리가 타고 있던 바구니를 종탑보다 높이 띄운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수증기가 가득 담긴
주머니에 매달린 바구니를 타고 비달롱을 떠나 리옹까지 날아간다는 형제들의 계획에는 성공을
의심하였다. 더구나 조국의 위대한 과학자인 샤를 교수보다 먼저 하늘을 날 것이라는 말에는
콧방귀를 뀌었다.
샤를도 아카데미에서 몽골피에 형제처럼 기구를 이용해 사람이 하늘을 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몽골피에 형제와 방법은 달랐다. 그는 주머니에 뜨거운 수증기 대신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를
집어넣었다. 샤를은 자신이 제일 먼저 왕과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만든 기구가 사람을
싣고 하늘을 나는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비달롱이라는 조그만 시골에서 몽골피에
형제들이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들이 자신의 업적을 가로챌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어서였다.
샤를은 예정보다 일찍 왕과 대신들이 자리한 궁전에서 자신의 수소 기구를 띄어 올리는 실험을
하였다. 자신이 직접 승선하였다. 그의 기구가 떠오르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궁전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왕이 가장 아끼는 분수대에 빠지고 말았다. 재미난 기사거리를 놓치지 않는
신문사의 기자들과 호기심 많은 시민들은 몽골피에 형제와 샤를을 경쟁자로 몰아가며 누가 과연
승자가 될 것인지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샤를 교수의 실험은 실패했다. 몽골피에 형제의 실험은 어떻게 것인가? 한낱 종이기술자에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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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한 형제들이 과연 샤를 교수를 능가할 수 있을 것인가?」
샤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다음날 신문의 첫 면을 가득 메운 기사였다.
저 멀리 알프스 산맥에서 불러온 산바람이 마을을 둘러싼 너도밤나무 숲을 지나가며 조제프의
집이자 공장이기도 한 풍차의 바람개비를 힘차게 돌렸다. 바람개비에 연결된 도르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큰 돌로 된 수레를 움직였다. 수레는 천천히 풍차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를 길어
올렸다. 바람이 아니었다면 조제프의 아내는 분명 끙끙대며 한참동안이나 가족들이 마시고 씻을
물을 우물에서 길어 올려야 했을 것이다.
“여보, 도련님을 모셔 와야 하지 않을까요?”
아내는 저녁 식탁에 올릴 호밀빵을 구우면서 남편 조제프에게 넌지시 물어 보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너도밤나무 색이라고 부르는 진한 황갈색 탁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야지.”
조제프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동생 자크를 부르기 위해 집을 나섰다.
“도련님한테 까뜨린느 아가씨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아요.”
조제프는 풍차가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버려 들리지 않는 아내의 고함소리를 뒤로 하고 모퉁이를
돌아 자크가 있는 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도밤나무는 오늘따라 세찬 산바람에 추위를
느끼는 듯 온 몸을 마구 떨었다. 머지않아 큰 비가 내릴 적이면 나무는 이렇게 몸을 흔들었다.
조제프는 내일 실험이 걱정되었다.
조제프는 누가 먼저 하늘을 나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다만 내일 실험에 성공하여 당당히
과학자로 대접받고 싶었다. 그건 아버지의 소원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부터
비행기구를 만들어 하늘을 날겠다는 자식들의 꿈을 바보 같다고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한
형편에도 갈릴레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쓴 저서들을 사다주며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런 아버지의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서 조제르와 자크는 열심히 과학
공부를 하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형제들이 아버지의 공장만 물려받지 않았더라면
대학에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제프와 자크는 다른 과학자들처럼 대학에서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이런 아버지의 뒷바라지로 해박한 과학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이 일생을 걸쳐 만든 열기구가 내일 비달롱 하늘에 두둥실 떠올라 리옹까지 날아간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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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걱정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날씨였다. 로마 황제에게 죽은 옛 리옹의 부부들과
하객들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물이라는 세찬 비를 맞고서 기구를 띄우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내일 실험엔 후원자인 아를랑데 후작부인이 직접 타기로 되어 있어서 그녀의 안전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일주일 전부터 넋 나간 사람처럼 언덕 꼭대기에 앉아 아이자크 성만 바라보는 동생
자크였다. 그 전까진 매일 밤 실험이 끝나면 선술집 피아노를 두들기며 마을 사람들과 흥겹게
노래를 부르던 동생이었다. 일주일 전에 자크는 까뜨린느가 자신을 놔두고 마을의 부자인
아르강트씨의 큰아들과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크가 까뜨린느를 처음 만난 건 그가 열일곱 살 되던 해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 날도 세찬
바람에 너도밤나무가 흔들리면서 누렇게 변해버린 낙엽들을 마구 떨어뜨렸다. 힘차게 돌아가던
조제프의 풍차 공장으로 수요일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제랄드가 방문하였다. 그는 마을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데보린 성의 영주 버먼 공작의 가정교사였다.
그런데 그 날은 자크와 동갑으로 보이는 하얀 드레스의 금발머리 아가씨와 함께 방문하였다.
조제프가 어디에서 온 천사냐고 물었을 적에 제랄드씨는 파리에 사는 큰형의 외동딸로 흑사병을
피해 잠시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알려주었다. 형의 부탁으로 지게에 나무를 한 아름 해 가지고 온
자크는 제랄드씨의 뒤에서 수줍은 듯 몸을 비비 꼬며 서 있는 까뜨린느에게 첫눈에 반하였다.
비달롱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크는 마을에서 까뜨린느만큼 아름다운 아가씨를 본 적이 없었다. 그
날 이후 자크의 꿈속에는 매일 밤 까뜨린느가 찾아와 그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흑사병을 피해 잠시만 비달롱에 머문다던 까뜨린느는 흑사병으로 파리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숙부 제랄드의 곁에 남았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제랄드는 그녀를 친딸처럼 아끼며
사랑해주었다. 까뜨린느는 버먼 공작의 자제들과 함께 제랄드에게 교육을 받았다. 까뜨린느는
숙부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로 똑똑하고 영리한 아가씨였다.
파리의 과학 아카데미에서는 과학자들이 흑사병의 전염 원인이 무엇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쥐가 흑사병을 옮긴다는 쪽과 나쁜 공기가 옮긴다는 쪽으로 나뉘면서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데보린 성에서도 자크와 까뜨린느가 이걸 두고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이제 종이는 몸이 불편한 제랄드를 대신해서 자크가 가져다주고 있었다. 물론 가까이서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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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뜨린느를 보고 싶은 자크가 순순히 응한 것이었다. 자주 마주치면서 자크와 까뜨린느는 서로의
이름과 나이를 알았고 차츰 좋아하는 음식이며 취미, 잠잘 때의 버릇 등을 알게 되었다. 둘 다
어려운 라틴어가 가득한 시집보다는 과학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안 후부터는 옛
과학자들에서부터 현재 활발히 연구가 진행 중인 이론들까지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날도 자크와 까뜨린느는 정원 모퉁이에 놓인 대리석 의자에 앉아 아카데미에서
연구 중인 흑사병의 전염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게 말다툼으로까지 번진 것이었다.
“배에 숨어든 쥐 때문이야. 그래서 런던에서 발생한 흑사병이 쉽사리 바다 건너 파리까지 번질
수 있었던 거야.”
자크의 주장을 까뜨린느가 반박하였다.
“그럼 쥐가 리스본에서 이스탄불까지 대륙 횡단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이야? 흑사병이 퍼지는 건
균을 담은 나쁜 공기가 바람에 실려 떠돌아다니기 때문이야. 그 때문에 쉽사리 도버 해협도 건널
수 있었던 거고.”
“말도 안 돼. 그럼 이 세상에서 흑사병에 안전한 곳은 없어. 이곳도 흑사병이 발생한
마르세유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에 하루에도 수십 차례 밤나무가 흔들리는 걸.”
“두고 봐. 아카데미는 반드시 내 말이 맞다고 증명해 줄 거야.”
“아무리 봐도 네 생각이 틀린 것 같은데.”
“그럼 우리 내기할까?”
까뜨린느의 제안에 자크는 순간 몸이 움찔하였다. 너무도 당당한 자신감에 그만 기가 죽은
탓이었다. 까뜨린느는 자신이 이기면 조제프의 공장에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로 수출하는
백피지 두루마리를 한 묶음 달라고 청하였다. 베네치아의 시장에서 백 두카토(당시 베네치아에서
사용되었던 금화)에 팔리는 아주 값비싼 물건이었다. 자크는 베네치아에서 사시다가 삼년 전에
형과 결혼하여 이곳으로 이사를 오신 형수님한테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잠시 고민에 잠겼던 자크는 내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이기면 애인이 되어달라고
당당히 까뜨린느에게 부탁하였다.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아카데미는 쥐가 균을 옮겨서 흑사병이 퍼지는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자크는 까뜨린느를
마을 선술집으로 데려가 술에 얼큰하게 취할 적이면 늘 치던 피아노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사랑을 고백하였다. 그녀는 자크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너도밤나무가 잘 무르익은 밤송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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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렁주렁 매달던 오년 전 가을밤이었다.
조제프가 우려했던 대로 가는 빗줄기가 조금씩 그의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내일
비행은 틀렸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잠시 퍼붓다 가는 비가 아니라는 듯 먹구름은 계속 비달롱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리옹 쪽에서는 가끔 섬광이 번쩍이다 사라지기도 하였다. 비도 오는데
동생이 얼른 내려와 아내가 막 구운 빵에 따뜻한 스프를 들며 잠자리에 들었으면 좋으련만 형의
바람과는 반대로 자크는 비를 흠뻑 맞으며 언덕 아래의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덕에 다다른
조제프는 자크의 뒤에서 짐짓 헛기침을 내뱉었다.
“내일 정오래. 성당에 가서 까뜨린느 아가씨를 축복해주는 건 어때?”
“형 혼자선 절대 기구를 띄울 수 없어. 불을 지필 사람이 없잖아.”
“누가 그런 걱정하래? 너 말고도 불 지필 사람은 많아.”
자크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형의 왼쪽 소매에 잔뜩 고인 물방울을 털어주었다.
“내일 반드시 이곳에서 기구를 띄우자. 우리가 파리의 교수님보다 못할 게 없잖아.”
조제프는 까뜨린느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내일 있을 실험을 걱정하는 동생을
대하는 게 마음이 편하였다. 그는 애써 밝은 웃음을 지었다.
“힘들어.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아. 며칠 늦추지 뭐. 아를랑데 부인에게는 내가 내일
말할게.”
“내일은 눈이 왔으면 좋겠다.”
동생과 어깨동무를 하며 언덕을 내려오던 조제프는 자크의 말에 금방 하늘과 똑같은 먹구름이
얼굴에 드리워졌다.
제랄드는 까뜨린느와 자크가 사귀는 걸 반대하였다. 친딸이나 다름없는 조카가 시골 촌뜨기
종이기술자와 어울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무렵 제랄드는 동방과 후추 무역을
하며 큰돈을 번 마을 최고의 부자 아르캉트의 자제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까뜨린느보다
두 살 위인 큰아들이 제랄드를 통해 예쁘고 똑똑하다는 까뜨린느의 소문을 전해 듣고는 결혼하고
싶다고 청하였다.
그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제랄드는 곧바로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하였다. 그러나 자크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까뜨린느는 숙부의 결정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자크를 버리고
아르캉트씨의 큰아들과 결혼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자크는 아르캉트 큰아들의 끈질긴 구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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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의 설득에도 꿈쩍을 않던 그녀가 왜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마음을 바꾸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까트린느는 숙부의 어마어마한 은행 빚을 해결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아르캉트의
자제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자크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 사실을 그가 안다면 더욱 괴로워 할
것이 분명할 터였다. 이제 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면 까뜨린느는 성당에서 아르캉트의
큰아들에게 평생을 함께 하겠노라고 하느님 아버지께 맹세할 터였다.
조제프와 자크의 앞에 호밀빵 두 덩어리와 멀건 야채 스프가 놓였다. 비록 보잘 것 없지만 한나절
동안 아내가 정성스레 준비한 저녁이었다. 그걸 잘 알기에 조제프는 아내가 너무나 고마웠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종이로 인해 조제프의 종이는 더 이상
시장에서 팔리지 않았다. 더구나 실험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재료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마구
들어갔다. 다행히 예전부터 실험에 관심을 보인 아를랑데 공작부인의 후원으로 실험을 계속할 수
있었다.
“주여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여기 모인 우리들에게 강복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조제프가 기도하자 식탁에 둘러앉은 아내와 자크, 그리고 조제프의 여덟 살 된 아들 피에르가
일제히 아멘이라고 대답하였다.
“자, 들자.”
기도가 끝나자 식구들은 식탁에 놓인 빵과 스프를 먹었다. 자크만 식사를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도련님 때문에 걱정이에요.”
“저러다 괜찮아지겠지.”
“내일 실험은 할 수 있을까요?”
“글쎄……”
우렁찬 천둥이 조제프의 귓가를 때리고 지나갔다.
“내일은 꼭 당신의 기구가 하늘을 나는 광경을 보고 싶었는데.”
아내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아무래도 내일 실험은
틀렸다고 단정한 것이다.
“나의 허무맹랑한 말을 믿고 기다린 지가 벌써 팔년인가? 당신과 함께 한 세월이 벌써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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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렀군. 미안해, 그동안 고생만 시켜서.”
조제프는 아내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평생을 걸쳐 만든 기구가 두둥실 떠오른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가 살며시 아내를 안아 주었다. 피에르가 그의 허벅지를 툭툭 치며
뒤에 꽁꽁 감춰주었던 것을 내밀었다. 백피지 두루마리를 만들고 남은 종잇조각으로 만든
종이장갑이었다.
“삼촌한테 들었는데 하늘에 가까워질수록 추워진대. 그래서 만들었어. 아빠 손 시럽지
말라고,”
“네가 만든 거야?”
“으응.”
아들의 선물에 감격한 조제프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고맙다.”
조제프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볼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빗방울은 점점 가늘어졌다. 조제프는 아내와 피에르와 함께 침대에서 서로를 꼭
안으며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방에 혼자 틀어박혀 침대 머리맡을 눈물로 적신 자크도 곧
휘네프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잠의 요정)의 활을 맞았다. 꿈속에서 자크는 오랜만에
까뜨린느를 만나 오랫동안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조제프의 걱정과는 달리 하늘의 먹구름이 세찬 비를 토해내진 않았다. 오랜만에 단잠을
잔 조제프는 창문을 열었다. 공장 앞 너도밤나무 숲에서 지저귀는 종달새의 노래를 들으며 활짝
기지개를 폈다. 조제프는 날은 흐리지만 다행히도 비가 내리지 않은 날씨를 보고는 실험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은 뒤 자크를 깨웠다. 그들은 어제 먹다 남긴
호밀빵으로 대충 아침을 먹은 다음 서둘러 기구를 마차에 옮겨 실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알린
실험 시간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조제프와 자크는 기구를 띄울 언덕 꼭대기에 도착하였다. 그곳엔 이미 수많은 사람들과 기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형제의 실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제프와 자크는 그들의 부담어린 시선을
피하면서 천천히 그들이 탈 바구니에 양모와 짚단을 차곡차곡 실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기자들이 조제프의 주위에 몰려들어 이런저런 질문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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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조제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으나 기자들의 질문에 친절히 답변해주었다. 자크의 주위에도 한
무리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하던 일만 계속 하였다. 기자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샤를 교수가 당신의 실험을 보기 위해 리옹에 와 있다는 사실은 아십니까? 과연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과학자라는 명성을 가진 그의 앞에서 당신의 기구가 리옹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광경을
보여주며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줄 자신이 있는지요?”
“자꾸 그 분과 절 경쟁자로 몰아가지 마십시오. 누가 먼저 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분이나 저나 인간이 하늘을 나는 꿈을 현실로 이루고자 노력한 과학자라는 것입니다.”
조제프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서 있자 가슴이 무척이나 떨렸다.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어젯밤
피에르가 준 종이장갑을 손에 끼고 자신의 가슴을 두어 번 세차게 때렸다. 피에르도 아버지를
따라 역시 조막만한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세차게 쳤다.
‘아빠, 난 아빠의 성공을 믿어요.’
피에르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잠시 후 요란한 장식을 한 마차가 도착하였다. 마치 무도회에 나가는 듯 실크 드레스를 입었으며
보석과 장신구를 귀와 팔에 주렁주렁 찬 아를랑데 공작부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화가들은
몽골피에 형제의 기구를 스케치하다 말고 중년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앳된 얼굴을 지닌
부인의 자태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게 하늘을 난다는 기구인가요?”
“예, 부인.”
부인의 질문에 조제프는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의외로 작군요. 하지만 이게 샤를 교수보다 먼저 날 거라는 제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부인은 아주 젊었을 적에 군인인 남편과 결혼하여 그의 임지인 비달롱으로 오게 되었다. 얼마 후
전쟁이 나서 남편은 비달롱에서 멀지 않은 전쟁터에서 죽었지만 그녀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두
아이를 키우며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사치스런 파티나 무도회에 나가길 좋아했지만
학문에도 관심이 많아 남편이 남긴 유산으로 주변의 학교들과 학자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부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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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는 인류 최초로 하늘을 날겠다는 조제프와 자크 형제가 허무맹랑한 꿈을 가진
정신병자라기보다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과학자로 보였다. 후원금을 얻기 위해 자신의
저택에서 자신 있는 말투로 기구를 설명하던 그들의 눈빛에 부인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부인은
몽골피에 형제의 실험을 위해 후원금을 아끼지 않았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기구에도 먼저
타겠다고 나섰다.
양모와 짚단을 태워 끓인 물이 수증기가 되어 점점 주머니를 볼록하게 만들자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기구를 바라보았다. 오늘 실험에 쓰는 주머니는 사람을 태우기 위해 그동안에
사용했던 것보다 다섯 배나 큰 것을 이용하였다. 자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에 가죽
주머니를 매고 서 있었다. 부인은 점잖게 손부채를 흔들며 어서 기구가 날아오르기를 기다렸다.
조제프는 주머니가 팽팽해졌다고 느끼던 순간, 있는 힘껏 기구를 고정하던 닻을 잘랐다. 아내는
차마 그 광경을 바라보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아버지, 제발 그 이가 가까이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허나
너무 교만에 빠져 날개를 잃게 하진 않게 하여 주소서.’
아내는 구경꾼들의 탄성 소리에 조심스레 눈을 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높이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마치 부딪히기라도 하려는 듯 검은 먹구름으로 달려가는 남편의 기구가 떠
있었다.
“엄마, 아빠가 하늘을 날았어.”
피에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엄마의 치맛자락을 연신 흔들었다. 아내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양 볼에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구경꾼들은 손을 흔들거나 모자를 허공에 던지며 시골 촌뜨기
형제들의 성공을 환호해 주었다. 기자들은 그 놀라운 광경을 열심히 글로 적었다.
「비달롱의 몽골피에 형제, 샤를 교수를 제치고 인류 최초로 하늘을 날다」
화가들은 기구가 두둥실 하늘에 떠있는 광경을 재빨리 새하얀 종이에 그렸다.
기구 안에서는 조제프가 이젠 까만 점들로 보이는 마을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부인은 손부채를 더 세차게 흔들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크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실험이 성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형, 어서 리옹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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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만 짧게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래.”
조제프는 서둘러 방항타를 리옹이 자리한 북서쪽으로 돌렸다.
샤를은 망원경을 손에 들고 하늘이 잘 보이는 성당 앞 광장에 자리하였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살펴보았다. 어느새 시침과 분침이 12에서 하나가 되어 만났다. 그는
몽골피에의 형제들의 실험이 11시에 있다고 들었다. 만약 실험이 성공하였다면 지금쯤 그들의
열기구는 리옹 상공에 나타나야 하였다. 그런데 아직은 먹구름 아래로 날아가는 까마귀 떼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성당에는 아르캉트의 큰아들과 까뜨린느의 결혼을 보기 위해 몰려든 하객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리옹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마을에서 과학 사에 길이 남을지도 모를 중요한 실험이
벌어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부잣집 아들의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식을 더 보고 싶어 하였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이 낡았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샤를이 서 있는 광장까지 삐거덕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성당의 우람한 정문이 열렸다. 그러자 오늘 새로이 부부의 인연을 맺은
아르캉트의 큰아들과 까뜨린느가 하객들의 꽃가루를 받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까뜨린느의
얼굴은 새신부답지 않게 어두웠지만 애써 웃음을 지으며 하객들의 축하에 일일이 답해주었다.
“저게 뭐야?”
하객들 중 하나가 남쪽 하늘에 자리한 먹구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 소리에 샤를은 얼른
망원경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하객들도 일제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커다란 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건 큰 새로 바뀌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사람들은 그제야 커다란 풍선에
매달린 바구니라는 것을 알았다.
바구니는 성당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샤를은 영문을 모른 채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천천히 광장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이겼군. 최초로 하늘은 날은 인간은 내가 아니라 저들이야.”
샤를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그런 그의 어깨로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종이가 내려앉았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구니가 지나간 자리에는 하얀 종잇조각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종잇조각들은 마치 눈처럼 금세 광장을 하얗게 뒤덮었다. 엄마를 따라 결혼식에 따라온
아이들은 종잇조각들을 맞으며 광장을 뛰어다녔다.
하얀 눈이 내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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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다, 눈이야.”
샤를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종잇조각을 맞으며 멍하니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객들은 지금
하늘을 날고 있는 저 바구니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이 타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는 바로 자크였다.
조제프는 살며시 동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크의 어깨가 살며시 들썩이고 있었다.
“조제프씨, 기구가 이상해요.”
부인의 다급한 외침에 조제프는 황급히 방향타를 만졌다. 그러나 이미 방향타는 말을 듣지
않았다. 김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주머니가 점점 홀쭉해지고 있었다. 다급하게 불을 지피던
자크의 노력도 헛수고였다.
“떨어진다.”
광장에서 덥수룩한 수염에 머리가 벗겨진 할아버지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외침대로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는 리옹의 병사들이 주둔하는 병영으로 떨어졌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샤를과 까뜨린느가 황급히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는 비달롱의 언덕에서 리옹의 병영까지 3.2km를 비행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다음날 파리의 여러 신문들은 일제히 이 기사를 1면으로 다루었다. 왕과 과학
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이 두 눈으로 직접 그 광경을 보길 원하였다.
조제프의 종이 공장으로 샤를이 방문하였다.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몽골피에씨.”
“일부러 여기까지 와 주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교수님.”
조제프는 공손히 샤를의 축하인사에 답했다.
“교수님도 다음 달에 실험을 하신다구요?”
“그래봐야 전 2등 아니겠습니까?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먼저 하늘을 난 건 저희지만 후일 교수님의 수소 기구가 더 쓰임이 많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어제 실험으로 열기구는 많은 짐과 사람들을 싣는 건 힘들다는 걸 알았습니다. 수증기는 금방
증발하는데다 그걸 막자면 계속 불을 지펴주어야 합니다. 아무래도 장거리의 비행엔 무리입니다.
그러나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나 헬륨 기체를 이용한다면 충분히 그 단점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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봅니다. 그러니 반드시 실험에 성공하실 겁니다.”
샤를은 조제프의 격려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어제까지도 그는 자신의 업적을 빼앗은
몽골피에 형제를 시기하였다. 그런데 조제프는 오히려 으스대기 보다는 자신을 격려해 주었다.
샤를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곳에 온 연유를 이야기 하였다.
“아카데미에서 당신들을 위원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당당하게
자신을 과학자라고 소개하십시오.”
조제프는 아내와 피에르에게 얼른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 자크에게도 전해주기 위해 언덕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곳에서 자크가 성을 바라보며 까뜨린느를 그리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조제프의 예상은 빗나갔다. 붕대를 이마에 칭칭 감은 자크는 열심히
바구니를 꿰매고 있었다.
“성에 안 가 볼 거야? 이제 보내면 영영 다신 까뜨린느를 볼 수 없어.”
조제프는 동생과 눈이 마주치자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언덕을 달려오면서 동생을 만나면
하려고 했던 말은,
“우리가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위원이 되었대. 우리도 이젠 명실상부한 과학자라고.” 이었다.
“내 곁을 떠나서 정말 미안하고……”
잠시 침묵이 형제의 주변을 감쌌다.
“그런 날 위해 눈까지 뿌려주어서 고맙대.”
“괜찮니?”
“응, 형. 저녁 먹자고 부른 거지? 이것만 고치고 금방 내려갈게. 먼저 가.”
“녀석.”
조제프는 살며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제프는 그날, 동생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지
못했다.
리옹에는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는다. 대신 주룩주룩 세찬 비가 내린다. 사람들은 천년도 훨씬
넘는 먼 옛날, 결혼식장에서 로마 군인에게 목숨을 잃은 부부들과 하객들이 하늘에서 흘리는
눈물이 비로 변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닷바람으로 기후가 따뜻해져서 눈 대신 비가 내리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무엇이 되었든
리옹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눈이 결혼식 날에 내리면 그 부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는
하얀 눈이 내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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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을 마을 사람들은 굳게 믿었다.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 실험이 성공한 뒤부터는 그것은 더 이상 전설이 아니었다. 결혼식이
있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은 열기구를 타고 하늘에서 하얀 종이꽃들을 뿌려주었다. 마치 부부의
행복한 앞날을 축하하는 하얀 눈처럼. 리옹에도 이젠 겨울에 하얀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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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에서는
김 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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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 매다가
콩을 따다가
비행기 날아가면
허리 한번 펴시고
고추 따다가
무 뽑다가
비행기 지나가면
무릎 주욱 펴신다
나물 뜯다가
감자 캐다가
비행기 날아가면
온 몸 주욱 펴신다
우리 할머니
쉬어가며 일 하라고
아픈 허리 펴시라고
말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산골 하늘 비행기는
천천히,
일부러 천천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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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그 뜨거운 맛
우수상
윤 영 주

장발장이 꼬제트를 안고 요새처럼 높다란 수도원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는 그때, 내 귀에 꽂히는
엄명이 있었다.
“어서 나와 불 좀 떼거라”
하는 수 없이 책을 든 채 부엌으로 나간 나는 한 손에 부지깽이를 들고 한 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며
그 대목을 읽어나갔다. 잠시 후, 노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카락에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솔가리 불똥이 날아온 줄도 모르고 스릴 있게 진행되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김장하던 어머니는 엉겁결에 함지박을 내 머리에 뒤집어 씌었는데, 그 맵고 뜨거운
맛이란...
이런 사유로 인해『레미제라블』은 40여 년 동안 나의 애독서이면서 때론‘뜨거운 맛’으로
정의되곤 한다. 여기서 뜨거움이란 그때의 정황묘사이기도 하거니와 그만큼 강렬한 감동이
내면화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발장의 이미지는 나에게 늘 긍정적인 담론의 소재로,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원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에 나는 뜻밖의 장소에서 새삼 그,
‘뜨거운 맛’을 경험했다.
인천공항 3층 출국장에 도착하니 13시 30분쯤이었다. 탑승시간이 15시 15분이라 새벽부터
서둘러 오기를 잘했다고 자찬하며 탑승수속 카운트로 갔다. 프린트해간 예약확인증으로 발권을
요구하자 체크하던 안내직원이 말했다.
“고객님의 탑승권 발행이 불가능합니다.”
며칠 전에 해당 항공사 홈페이지를 통해 예매를 한 다음 직원과 통화로 확인까지 했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당황해 하는 나에게 그녀는“ESTA”승인을 받아오면 가능하다는 정보를 주었다. 구여권을
전자여권으로 교체하기만 하면 비자 문제는 자동 해결되는 줄 알고 있었던 게 오산이었다.
일러준 대로, 2층 고객용 카페로 내려가니 컴퓨터가 있었다.
감동, 그 뜨거운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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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앉아있던 젊은이의 도움으로‘전자여행 허가제 헵싸이트’에서 개인정보를 차례로
기입하였고, 끝으로 승인절차만 남았다. 그런데, 카드번호 기입과정에서 수 차 에러가 나지
않은가.
초조해진 나는 시야에 들어온 건너편 사무실로 뛰어갔다. 여직원 몇 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직원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하며 하소연을 했다. 고객의 어려움에
공감하며 인정을 베풀만한 연배라고 나름 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그녀는 쌀쌀하고 건조한 음성으로 딱 잘라 거절했다.
“우리로선 도리가 없어요.”
“$14 입금만 하면 되는데,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
동료와 나누던 대화를 방해받아 속상했는지 아까보다 더 사무적인 어조로,“그건 미국대사관측
소관”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덧붙여“근무 중이니 나가 달라”고 했다. 나는 순간 눈자위가
붉어졌다. 그만한 일에 눈물이 난다는 것은 노화 탓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미국행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생이던 아들이 3개월 어학연수를 다녀오더니, 유학을 보내달라고 했던 때가 벌써
6년 전이다. 책상 앞에 진득하게 앉아있기를 요구하는 교과공부 보다 스포츠에 소질이 있는
아이는 그쪽 교육 환경이‘나 스타일’이라며 졸아댔다. 마침 남편 사업이 잘 되던 때라
막둥이에게 글로벌 교육 기회를 주기로 했다. 미국으로 간 아이는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주입식이란 사슬에서 벗어나 축구, 농구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며 창의성과 인성을 중점에 둔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였다.
변고는 집에서 생겼다. 경제위기 태풍에 휘말린 가장의 사업체가 큰 타격을 입었고, 학비
조달길이 막혔다. 숙고하지 못한 결정을 후회해서 될 일도 아니고, 일단 아이를 고교 졸업은
시켜야 했다. 모든 보험료를 급히 해약하고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환급금으로 학비 충당을
해나갔다. 마침내 다음날(6월2일)이 졸업식이었다.
미국의 졸업식은 학생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날이다. 아들이 무대 위에서 부모님께 전하는
마음의 편지를 낭독하는 이벤트가 있다는 데, 그 시간에 부모 둘 중 한 쪽이라도 참석하고
싶었다. 아니, 그동안 맡아준 홈스테이에게 밀린 하숙비를 완납하고 감사의 말도 전해야 했다.
말하자면 아들 유학결산과 동반귀국을 목적으로 떠난 길이었다.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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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비는 아껴둔 항공 마일리지가 해결해 주었다. 그때 한 중년 남자직원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지나가다 내 몰골을 본 모양이었다. 그는 내 말을 경청해 주었고, 곧“너무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고 위로를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용카드로 14불을 입금함으로써(나는 현금을
그에게 지불했음) 즉시 문제해결을 했는데 설명을 들어보니 원인은 카드에 있었다.
남편의 회사 채무 관련하여 내가 담보 서 준 대가는 가혹했다. 그이와 더불어 나 또한 신용불량자
신세가 되었다. 신용카드도 정지되었기에 보험환급금으로 만든 전(全)재산(아이 이름으로 만든
생활비용 카드)이 현금카드였던 것이다. 이런 낭패를 당하게 한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그 남자 직원은 내 무거운 케리어를 끌어주면서 3층 카운트로 가, 탑승권을 끊어 손에
쥐어주었다. 출국장 입구까지 안내하여“안녕히 다녀오시라”는 배웅으로 서비스를 마무리
하는 것이다.
점심은커녕‘머리카락에 붙은 불을 끈’심정으로 나는 탑승구를 향해 달려갔다. 천신만고 끝에
성당 안으로 잠입한 장발장의 안도감을 절감하면서...
그랬다. 나는 LA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새삼 애독서의 에필로그를 떠올렸다. 공항에서
경험한 두 직원의 상반된 태도 덕분이었다.
법과 원칙에 충실한 자베르 경감은 휴머니스트 장발장을 사로잡기 위해 일생을 올인했다. 마침내
장발장을 체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 졌을 때 그는,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법과 원칙에 앞서 배려와 사랑임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의
평생 신념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그가 세느강에 몸을 던졌을 때 파장이 수면을 타고 퍼져 나갔다.
직원의 융통성 있는 친절이 장발장류 감동이라면 원칙만 앞세우는 직원의 불친절은 자베르류
오인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아닐까. 한 권의 책이 진한 감동으로 독자를 영원히 사로잡듯이
서비스업종인 항공사 또한 원칙보다 감동으로 평생고객을 확보해야 하리라.
감동의 다른 이름, 그‘뜨거운 맛’은 나에게 남편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으라고 채근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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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걷는 걸음
장려상
김 래 영


네가 뭘 알아!
소년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소녀는 물끄러미 소년을 바라봤다.
시린 하늘 속을 비행기 한 대가 헤엄치고 있었다.
* * *
책상 위에는 지우개 가루와 종이로 만든 종이무지와 함께 도면이 놓여 있었다. 다미는 있는 힘껏
소리 지르고 어깨춤도 덩실덩실 추고 싶었지만 불행하게도 밤이었고, 온가족은 자고 있었으며,
아파트의 방음 구조는 끔찍하리만치 취약했다. 덕분에 다미는 소리도 못 지르고, 춤도 못 췄다.
그리고 잠은 더더욱 못 잤다. 책상 앞에 앉아 라디오를 켜놓고 실실 웃으며 도면만 2시간쯤
쳐다보자 그제야 잠이 쏟아졌다. 창밖에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가 눈을 떴을 때는 해는 이미 다미의 창문을 지나 아파트 위층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소녀는 기지개를 켜고 목운동을 했다. 엉금엉금 이부자리 밖으로 기어
나와 문을 열자, 아무도 없는 싸늘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고양이 기지개로 마무리한 다음
다미는 핸드폰을 찾아 시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야야야야. 니 일어남?
- 아니, 안 일어났다.
바로 답장이 왔다. 다미는 일단 씻고 연락할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보냈고, 시후는 답장이
없었다. 기본적인 준비를 끝낸 다음 다미는 도면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을 손에 꽉 쥐고 세 층
위로, 계단을 걸어 올라가 1507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하늘을 걷는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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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누구냐고 묻는 소리가 들리자 다미는 인터폰에 대고“언니야! 나 다미!”라고 씩씩하고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났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짧은 단발에 경쾌해 보이는 인상의
아가씨였다. 여자는 다미의 머리를 두드리며 친근함을 표했다. 다미는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시후는 뭐해?”라고 물었다. 시란은 동생이 방에서 공부한다고 손짓을 해보이고 소파로
돌아갔다. 두 여자가 떠드는 소리에 시후가 방에서 나왔다.
“야, 보여줄 게 있어!”
“안 볼래.”
다미는 웃으며 시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봐.”
“그래, 한 번 봐라.”
거실에서 시란이 훈수 두는 소리가 들렸다. 다미는 핸드폰에서 아까 찍은 도면 사진을 시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뭘 찍은 사진인지 파악하느라 시간이 걸리고, 뭘 그린 도면인지 알아채느라
시후는 뚫어지게 화면을 바라봤다. 다미는 결국 그 시간을 참을 수 없었는지 발을 동동 구르다
이렇게 말했다.
“나랑 비행기 만들자.”
시후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다미의 얼굴을 내려다 봤다. 머리 하나는 작은 자신의
소꿉친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면서 시후는 거절하기 참 어렵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렇지만 자신이 그 일에 참여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두 생각은 치열하게
싸웠고, 그러는 동안 시후는 멍청한 얼굴로 다미를 바라보며 아무 대답 없이 서 있었다.
다미는“좋아, 그럼 하는 거야!”라고 말한 다음 시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야, 아무리 그래도
고3인데. 고3 여름 방학에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그랬다가는 고4를 맞이해야 해.”다미에게
휩쓸려서 비행기를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뒤늦게 처절하고 강력한 어조로 항변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후는 이미 고개를 끄덕인 후였다. 다미는 고맙다고 말한 다음 남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너흰 여전하네.”
시란이 감자 칩을 바삭 깨무는 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샐쭉한 표정으로 남동생이 누이를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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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다봤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 시후의 오른손에는 연필이, 왼손에는 접착제가 들려 있었다. 도면을
내려다보며 시후는 나무판 위에 어디랑 어디를 연결해야 하나 연필로 꼼꼼하게 표시했다. 그래,
차라리 모형 비행기 만드는 게 낫지. 소년은 끓어오르는 속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다미가 비행기를 만들자고 외친 다음 날, 시후는 다미네로 불려갔다. 누이는 잘 다녀오라며
내쫓았고, 시후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려 12층으로 내려갔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시후는“야아- 서다미, 나 왔다.”하고 소리를 내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다미는 온 집안의 가구를 한쪽으로 몰아넣고 줄자로 낑낑거리며 길이를 재고 있었다. 소녀는
소년을 보자마자 줄자의 끄트머리를 쥐어주며 거실 끝에 서 있으라고 부탁했다. 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서 있던 소년은 거실 길이를 재고 한숨을 내쉬는 다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비행기가 들어갈까 해서.”
농담으로 생각 없다, 생각 없다 몇 번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생각이 없을 줄이야. 시후는 황망한
얼굴로 다미를 쳐다봤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않니? 혀를 뒤로 당겨 핀볼 게임의
핀볼처럼 말을 내뱉으려던 시후는 깊게 숨을 들이 쉬고 다미에게 다시 물었다.
“너 대체 무슨 비행기를 만들려고 했던 거야?”
“복엽기.”
“보… 뭐?”
다미는 두 손 사이가 뜨게 겹쳐 복엽기 날개 모양을 그리며 설명했다.
“왜 옛날 전투기 중에 날개가 위랑 아래 두 겹으로 된 그거 있잖아. 그 비행기.”
“아, 그거.”하고 짧게 깨달은 시후는 왜 하필 복엽기냐고 되물었고 다미는“그게
멋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속으로 우물우물 그것 참 너답다고 대꾸한 시후는 대체 집 안에서
비행기를 만들 생각을 했냐고 타박을 놨다. 다미는 딱히 만들 곳이 없으니까 그랬다고 항변했다.
“그럼 가지고 나갈 땐 어떻게 하게.”
하늘을 걷는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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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시후의 시선을 피했다.
“대책 없는 지지배 같으니라고.”
“어, 어쩌지?”
다미는 진심으로 당황한 듯 했다. 시후는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리고 결론을 냈다.
“차라리 엔진 달린 모형 비행기로 바꾸자.”고 권했고, 다미는“그런 방법이 있었구나?”라고
활짝 웃어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시후는 믿지도 않는 신을 찾아 이렇게 대책 없이 비행하다가
느닷없이 급선회하는 계획에 자신이 탑승해도 되는지 물어봤다. 당연하게도 신은 대답해 주지
않으셨다.
일단 가야할 길을 정하고 나니 일은 일사천리였다. 다미는 동력기에 맞게 도면을 수정했다.
그 전에 그렸던 도면은 동력 없이 커다란 비행기일 뿐이었다며, 오히려 이쪽이 더 진짜라서
좋다고 다미는 쫑알댔다. 뭔가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어도 시후는
틈틈이 수정을 도왔다. 엔진과 부속물들 그리고 뼈대가 될 나무까지 전부 주문한 소녀는 그날 쉴
새 없이 핸드폰으로 떠들어댔고, 소년은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30분에 한 번씩 대꾸해 줬다.
며칠 뒤 택배가 도착했다. 차라리 잘라서 사용하는, 그냥 조립만 하면 될 걸 샀으면 좋았을 텐데.
소년은 방에 한가득 어질러진 나무판을 보며 이를 득득 갈았다. 그와 반대로 소녀의 마음은 이미
하늘을 걷고 있었다.“시후야, 하늘을 걷는 기분이라는 게 이런 건가 봐.”시후는 벌컥 성이
나다가도 정말로 즐거워하는 그 모습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화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결국 시후는 한 손에는 연필을, 다른 한 손에는 접착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잔뜩 깔아 놓고, 시후는 공작용 칼로 나무를 조심조심 잘랐다. 그 다음
자른 나무 위엔 연필로 연하게 번호를 써서 알아보기 쉽게 했다. 다미는 그 옆에서 시후가 자른
나무의 단면을 사포로 문질러 매끄럽게 만들었다.
“넌 대체 이걸 어디서 얻은 거냐.”
소년이 도면을 칼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사포질에 열중하며 다미는 힐끗 도면을 쳐다봤다.
“인터넷에서? 그리고 책 보면서 대충 가늠 좀 해보고. 아빠 서재에도 굴러다니는 디자인 많아.
거기서 하나 빌려왔지롱.”
“……그 아버지에 그 딸이네.”
소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소년의 말에 소녀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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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형제가 실질적인 비행기의 시초가 되었던 그 순간부터 다미는 아버지의 인생이
결정되었다고, 어느 날부터 그렇게 느꼈다. 어쩌면 전생에 라이트 형제 중 한 명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도면과, 공식과, 수치와, 온갖 것들이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
작업실에 굴러다녔다. 다미는 기억할 수 없었지만 사진 안에서 자신은 모빌 대신에 천장에 달려
있는 비행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아버지가 만든 비행기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어느 순간부터 다미는 아버지를 보기 힘들어졌다. 일벌레, 일중독. 뭐가
되었든 아버진 일에 미쳐 있었다. 아니, 비행기에 미쳐 있는 건가. 다미는 아버지께 화낼 마음은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듯“대체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이제 와서 아빠 행세
하지 마요!”라고 한 번쯤은 소리쳐 보고 싶었지만 그건 그냥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일 뿐이지
진심은 아니었다.
그랬던 소녀가 느닷없이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후는 아마 아빠의 영향이라고 생각하겠지.
다미는 사포가 지나가 맨들맨들해진 자리를 바라봤다.
“다음 조각 주시죠.”
“널려 있는 게 조각이다. 알아서 가져가.”
“좀 주면 덧나니.”
불행하게도 두 고3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만은 않았다. 집중 호우로 인한 습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주요 조각이 뒤틀려 있었다. 문제는 이미 반쯤 완성한 다음에
알아차렸다는 것이었다. 시후는 바닥을 치며 이게 뭐냐며 짜증을 냈고, 다미는 한숨을 쉬고
곧바로 킬킬 거리며 웃었다. 웃음이 나냐는 시후의 말에 다미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두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나무 위에 다시 그리고, 자르고,
사포질을 하고, 조각과 조각을 연결했다.
그리고 며칠 뒤 간신히 모터를 달고, 피복을 씌우려고 할 때 쯤 다미가“시후야, 있잖아.”라고
말을 꺼냈다. 시후는 등 뒤에서 몰려오는 싸늘한 기운에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뭐, 왜. 뭐야.”
“꼬리가 짧아. 못 날아.”
시후는 거실 바닥을 구르며 짜증을 냈다. 다미는 구르는 시후를 바라보다 사과를 했다. 소년은
거실 바닥의 찬 기운을 즐기면서“오늘은 더 이상 안 할 거야.”라고 웅얼거렸다.
하늘을 걷는 걸음
94
다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그래, 그래. 하지 말자.”라는 말도 시후를 다독였다.
소년은 팔다리를 쫙 뻗어 누웠다.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봤다. 서쪽으로 창이 나 있는 서재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빛이 흘러 들어왔다. 시후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하늘에서 보면 참 멋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야. 너 왜 근데 갑자기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 거야?”
“아이고, 퍽이나 빨리 물어보네. 한 달 만에 물어본다?”
“너한테 휘둘리느라 생각을 못했어. 물어봐야지, 물어봐야지 하다가 비행기 뒤틀리고 뭐하고
정신이 없었잖아. 솔직히 말해서, 아저씨가 항공기 설계를 하시긴 하셔도 넌 비행기 별로 관심
없었잖아. 비행기는 그냥 비행기라면서.”
다미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그냥…….”말끝을 흐리며 다미는 말을 어떻게 이어갈지
생각했다. 소녀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빠를 이해하고 싶어서.”
“아저씨를?”
“응. 왜 그렇게 집착에 가까워 보이는지 알고 싶어서. 우리 아빠지만 참 신기해.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들더라.”
“어쩌다가? 계기가 있을 거 아냐.”
“계기? 계기라……. 그건 말 안 할래.”
다미가 웃었다. 시후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밥 먹으러 가자. 누나가 함박스테이크 해준대.”
소녀가 두 손을 내밀었고, 시후는 손을 잡아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
* * *
‘네가 할 말 아니잖아. 아저씨도 아저씨지만, 너도 참 신기해.’
소년이 아까 하지 못한 말이었다. 종이 위에는 삼각함수 공식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손은
분주하게 연필을 돌렸다. 집중력은 출타한지 오래였고, 시후는 멍한 얼굴로 연습장을 보다가
더러워진 연습장을 찢어 비행기를 접었다. 더듬더듬 기억을 되짚어가며 비행기를 완성했다.
여기저기 날개가 구겨져 있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95
물끄러미 종이비행기를 쳐다보던 시후는 문제집 사이에 비행기를 꽂았다. 뾰족한 모서리가
시후의 눈을 찌를 듯 노려봤다. 시후는 손가락으로 비행기의 고도를 조금 낮췄다.
고도를 낮춘 비행기는 문제집 사이에서 활주로를 찾기 위해서 용을 썼다. 시후는 문제집을 덮고
침대로 뛰어 들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시후의 몸을 날렵하게 받았다. 몸이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소년은 눈을 감았다.
유리창 너머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앞을 바라보자 탁 트인 하늘이 보였다. 구름은 없고, 하늘은 진하고 깊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물고 서 있는 관제탑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후를 바라봤다. 국적이 다른 비행기들은 날개를
매만지며 날아갈 준비를 했다. 웅크린 비행기를 보듬어 주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리를 쭉 뻗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시후는 곧 날아오를 비행기들과 그네들이 달릴 활주로를 보았다.
곧게 뻗어서 날기 위해 달려야하는 구간.
눈을 뜨자 활주로 위에 서 있었다. 비행기들이 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제탑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풍향, 풍속, 특별히 주의할 것 없음. 날기만 하면 된다는 신호가 왔다. 마주쳐 오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바람이 시후를 스쳐지나 갔다. 어서 달려.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뛰어,
저기 끝까지. 그러면 날 수 있어. 속삭였다. 발을 내딛자 아침이 왔다.
요 며칠은 전과 다를 것 없는 방학을 보내는 와중이었지만 책상에 앉은 소년은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칠판을 쳐다보자 무서워져서 어쩔 줄 몰랐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학원에서는 이 문제가 나온다며 전략적인 시험공부를 하라고 알려줬다. 에어컨의 찬 기운이 닿자
살갗이 베이는 기분이 들었다. 시후는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을 찾아가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을 하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그래, 차라리 안 괜찮으면 사나흘 푹 쉬어.”학원
선생님이 소년의 등에 대고 외쳤지만 소년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아픈 몸을 이끌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다미한테서 연락이 왔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하도 시끄럽게 울리는 통에 시후의 누나는 나갈
준비를 하다가 다미에게 대신 연락을 했다.“오늘은 안 되겠어. 미안해, 다미야.”누이는 약을
찾아서 동생을 먹이고는 밥 먹을 생각이 있으면 라면 먹지 말고 차라리 시켜서 먹으라고 말했다.
시후는 고개를 주억거리곤 이불을 코 밑까지 끌어 당겼다. 기침을 하자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처럼 머리가 흔들렸다.
하늘을 걷는 걸음
96
시후가 고개를 들자 탁 트인 하늘이 보였다. 구름은 없고, 하늘은 진하고 깊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물고 서 있는 관제탑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시후를 바라봤다. 어제와는 국적이 또
다른 비행기들은 날개를 매만지며 날아갈 준비를 했다. 카페에서 내려다보이는 활주로에 다미가
서 있었다. 시후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몸을 푼 다미는 단거리
달리기 주자처럼 달릴 자세를 취했다. 비행기가 엔진을 가동하자 그 소리에 맞춰 다미는
활주로를 달렸다. 날았다. 보지는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다미는 날았다. 시후는 그게
확실하다고 확신했다. 꿈이었으니까 믿을 수 있었다.
시후가 일어났을 땐 이미 다음날 오전이었다. 잠결에 부모님 얼굴을 본 것 같긴 했지만, 이미
출근하신 뒤였다. 아직 감기기운이 남아 있는 몸으로 방을 나오자 식탁엔 시란과 다미가 앉아
있었다. 누이가 마시고 있는 커피에서 따뜻한 냄새가 풍겼다.
“밥 먹을래?”
“조금 이따가 먹을래.”
누나의 질문에 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울리는 머리에 괴로워했다. 다미가 쪼르륵
다가와 사진을 들이밀었다.“너 없는 사이에 많이 완성했어. 모터로 하려고 보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 그래서 고무동력으로 바꾸려고.”옆에서 주절주절 말하던 다미는 시후가 전혀 안 듣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아니, 머리가 울려. 움직이질 못하겠다.”
점심까지 얻어먹고 내려간 다미는 내려가기 전“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을 두고 떠났다. 시후는
그 말에 불현듯 서러워져 이불 속으로 숨었다. 감기가 낫고 학원에 가자 선생님이 소년을 불렀다.
8월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졌다, 왜 이러느냐,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얼마 안 남았다, 마음을 다
잡아라, 한다면 하는 아이잖니 등등의 말을 건네는 선생님의 목소리에선 걱정과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어보였다.
“네, 괜찮아요. 그날 몸이 좀 안 좋았어요.”
‘몸이 안 좋아? 거짓말도 작작해라, 차시후.’
시후는 자리에 앉아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그날 몸 상태는 최고조를 달렸다. 어쩌면 너무
좋아서 들떠있었을지도 모른다.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97
과하면 안 하니만 못하다더니. 목표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점수는 끌어올려 놨어야했다. 누가
뭐라고 하던 일단은 그게 목표였다. 멍청하게 이거 하나 못하나. 소년은 소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야, 모의고사 점수 나왔어?
- 응. 올랐음 ㅎㅎㅎㅎㅎ
그 말에 답장할 수가 없었다. 수업시간 내내 시후는 자신이 잘못된 게 아닐까 의심을 했다.
소년이 느끼는 기분 중 가장 더러운 기분은‘억울함’이었다. 너는 하는데, 나는 어째서? 대체
내가 왜 억울해 해야 하는 거냐고. 대체 내가 왜. 시후는 저릿한 마음을 붙잡고 간신히 수업을
끝냈다. 수업이 끝난 후 건조한 표정으로 시후는‘다미한테 휘둘려서 비행기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라는 질문에‘아니’라는 대답을 냈다.
* * *
다미는 시후의 답을 기다렸다. 축하한다고 말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숫자가 사라져도 답은
나타나지 않았다. 못 봤나? 소녀는 고민했다. 내가 다시 보낼까? 아냐, 수업 중일 텐데. 다미는
거실에 널브러진 나뭇조각들을 보며 볼을 긁적였다. 모형은 완성이 되었다. 이젠 누가 봐도
비행기였다. 남은 건 피복과 도색과, 제대로 나는지 확인하는 일 뿐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금방
끝낼 수 있었지만 마지막은 시후와 함께하고 싶었다. 멋대로 굴었는데 다 받아주고. 어렸을
적부터 그랬지.
소녀는 아버지 서재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안방은 서재가 되었고 서재는 안방이
되었지만 정작 방의 주인은 그 전이나 후나 집에 자주 들어오지 못했다. 변변한 안부전화도 자주
오지 않았지만 다미는 아쉽다거나 그런 마음은 없었다. 뉴스에서 이번에 다미의 아버지가 새로
만든 비행기 얘기가 자주 흘러나왔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새가 엔진으로 뛰어드는 일을
최대한 줄일 수 있게 설계 되었다나 어쨌다나하는 얘기였지만 차라리 다미가 관심을 둔 건
‘새가 덜 죽겠구나.’하는 쪽이었다. 그런 소녀가 여름 방학을 전부 쏟아 부으면서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다.
다미는 서재 책장에 꽂혀있는 앨범과 일기장을 꺼냈다. 앨범에 담긴 건 과거였다. 다미는 그때를
하늘을 걷는 걸음
98
추억했다. 잊고 있던 과거에 다미는 처음 비행기를 탔다. 소녀가 비행기를 보자마자 처음 한
생각은‘이게 어떻게 날 수 있을까?’였다. 아이는 장난감 비행기야 몇 번 가지고 놀았고, TV
에서도 비행기를 보긴 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실제 비행기는 생각보다 너무
컸다. 떨어지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아빠 손을 잡았을 때 다미 아빠는,“비행기 날개가 보이지?
날개는 앞쪽이 위쪽으로 적당한 각도로 들려 있단다. 날개 모양의 곡면이 날개로 접근하는
공기의 흐름을 변화시키는데, 날개로 접근하는 공기의 흐름은 날개 앞부분에서 날개와 부딪혀 두
갈래로 나뉘지. 그러면 위로 올라간 공기의 흐름은 날개 위 곡면 모양을 따라 흐르게 되고 다른
하나는 날개에 부딪혀 날개 아래쪽으로 꺾이게 되는데, 이때 날개와 꺾인 공기는 작용반작용
법칙인 뉴턴의 제 3법칙에 의해 상호작용을 하여 비행기를 공기 중으로 띄우는 힘인 양력을
발생시킨단다.”
정도로 정리될 수 있는 내용을, 아는 비행기라고는‘떴다, 떴다 비행기’가 최고인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보다 어렵게 설명했었다. 다미 어머니는 옆에서 애는 그래봤자 모른다고 타박을 놨고
아버지는 혹시 모른다며 다미를 붙잡고 처음보다 더 깊이 있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미는 전혀
모르겠기에 아버지의 손을 놓고 엄마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자판기 음료수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도 그때도 기억하는 건 아빠 표정이 자기가 가장 좋아하던 만화를 보던 때와
똑같았다는 것, 그것만큼은 사진을 보기 전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제주도였다. 창문에 앉아서 하늘에서 하늘을 보고,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던 때를 기억한다. 그 후로도 어디를 가면 꼭 창가에 붙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땅보다는 성층권에서 바라볼 수 있는 구름밭이 좋았다. 하늘과 하늘이 맞닿은 그곳이
좋았다. 발을 디디면 단단하게 올라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구름에서 맛있는 맛이 나거나 그럴
것 같진 않았지만 누우면 정말 편안할 것 같았다. 폭신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면서도 솜사탕
냄새가 나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을 땐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갔었다. 나리타에서 내려 도쿄로
갔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다미에겐 그냥 집이 좀 작아졌다, 모르는 말이다. 이정도의 느낌만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머물면 머물수록 다른 나라라는 걸 실감했었다. “일단 말이 안
통하니까 진짜로 다른 나라 같아.”라는 말에 다미 엄마는 깔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나라 같은 게 아니라 다른 나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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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말만 통하면 어디든 같은 나라겠네?”그 외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다미네 가족은 일
년에 한 번쯤은 꼭 해외로 나갔다. 그것도 다미가 고등학교 들어오면서 관두긴 했지만.
사진을 다 본 다미는 일기장을 펼쳤다. 첫 장엔 <내 세상은 넓어지고 동시에 줄어들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일기장만이 아니었다. 생각들을 적어둔 공책, 다이어리 등 주문처럼 첫 장에 쓰여
있었다. 가족끼리 갔든 아버지 혼자든 다녀왔던 곳들의 하늘 사진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어느
곳은 바다의 하늘이었고, 산의 하늘이기도 했었다. 때로는 하늘의 하늘이었다. 그러다 다미는
어느 날의 일기, 아니 어느 날 남긴 아버지의 생각에 착륙했다.
<비행기에 대한 집착 혹은 동기는 잊어버렸다. 지금 남은 거라고는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목적
뿐. 소명은 잃었어도 목표는 뚜렷하다. 잠도 못자고 가족도 제때 못 보고 힘들게 일할 거 관두는
게 낫지 않겠냐는 질문도 받았지만, 만들다 보면 내가 왜 비행기에 대해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아, 그러면 나도 알 수 있겠구나.’ 다미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미는 고3 여름방학
시후에게 도움을 청해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일기장을 닫았다. 다미는 주섬주섬 서재를 정리하고 시후네로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시란이
문을 열었다. 거실에 청소기가 있는 걸 보니 청소 중이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소녀를 안으로
들이고 소파에 앉혔다. 청소 중이었던 게 아니냐고 물으니 시란은 다 끝났다고 웃으며 청소기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었다. 뭣 좀 마시자며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은 사이다에 냉침한 홍차였다.
“언니는 참 신기한 걸 마셔.” 소녀가 붉게 빛나는 사이다를 보며 중얼거렸다.
“맛있어!”
“맛있지?”
눈을 동그랗게 빛내며 다미는 홀짝홀짝 홍차를 마셨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축 처진
목소리의“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가 들렸다. 누이는 동생을 반갑게 맞이했고, 다미도 친구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동생이자 친구인 소년은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소년은 현관 근처에
서서“너 왜 왔어?”라고 물었다 “걱정이 돼서.”소녀가 멋쩍게 웃었다. 소년은 무서운 표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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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더니 위를 한 번 쳐다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잠깐을 그러고 있던 시후는 크게 숨을 들이 쉬고
가방을 내려놨다.
“잠깐 나가자.”
의아한 표정의 시란을 뒤로 하고 다미와 시후는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평소라면 잘 오지도 않을
곳이지만 얘기할 곳이 마뜩찮았다. 그리고 최대한 시끄러운 곳이 좋았다. 얘기가 안 들리게.
소리를 안지를 수 있도록 사람이 많은 곳으로. 주문한 음료를 받아 다미 앞에, 그리고 자신 앞에
둔 시후는 탁자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다미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시후의 얼굴을 살폈다. 딱
봐도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아픈 게 느껴졌다.
“서다미.”
시후가 부르자 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 비행기 안 만들 거야.”
“…….”
다미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하지 않았다. 시후가 계속 말하게 뒀다.
“비행기 안 만들어. 아니 못 만들어. 대체 내가 왜 그러고 있어야 하는지, 그 자체를 모르겠어.”
소녀는 물끄러미 소년의 눈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탁자 위에 올린 손을 꽉 쥐었다.
“여름방학의 취미라고하기에는 내 앞가림하기도 힘들어. 그러면 할 필요가 없지. 그렇다고 널
돕자니 뚜렷한 이유가 생각이 안나. 이래도 내가 너랑 함께 공작놀이 해야 할 이유가 없지. 넌
네가 비행기를 만드는 이유도 나한테 설명해 주지 않았잖아? 이번만이 아니야. 전에도 그 전에도
넌 항상……! 항상 그랬어.”
시후는 커지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눌러 가며 말했다. 소년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항상 나를 끌어들이고 설명해주진 않았지. 휘둘리는 것도 지겨워. 그리고 내 앞가림 못할
정도로 휘둘리는 건 더더욱 싫어. 왜 항상 나여야 하냐고. 손해를 보는 것도, 휘둘리는 것도,
뒷수습을 해야 하는 것도 나야? 네가 뭔데. 친구라고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나 먼저 간다.”
터진 둑처럼 단숨에 쏟아낸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소녀는 남아 있는 커피 두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미는 마음이 착잡했다.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시후는 울고
있었다.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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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두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곧 태풍이 몰아쳤다. 사나흘 동안 하늘은 어둡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울부짖었다. TV에서는 조심하라는 말이 연일 흘러나오고, 비행기의 결항 소식을
알려왔다. 시후는 마음이 찝찝하긴 했지만 연락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아니더라도
누나가 알아서 잘 챙기겠지. 시후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침대로 던져 버렸다. 눈에 안 보이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태풍 때문에 개학이 연기되길 빌었지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개학 하루 전날 물러났다. 학교는
상대적으로 멀끔한 편이었지만 학교 가는 길은 엉망이었다. 나무는 뽑혀 있었고, 간판은 떨어져
있었다. 유리는 금이 갔고 도로는 흙으로 분칠한 상태였다. 하지만 하늘은 먼지가 쓸려나가
깨끗했다. 푸르고 푸르도다. 공항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비행기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었다.
어질러져 있었지만 하늘이 맑은 덕분이었는지 기분은 상쾌했다. 태풍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닌 것 같았지만 응어리가 풀린 기분이었다. 선도부도, 학생주임 선생님도 없는
교문을 통과해 교실에 도착했을 때 시후를 맞이한 건 텅 빈 교실이 아니라 다미였다. 아, 같은
반이었지.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시후는 애써 티내지 않고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다미가 시후의 팔을 잡았다.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
“이런 저런 얘기.”
시후는 다미를 쳐다봤고, 다미는 시후를 노려봤다. 그렇지만 다미의 표정은 미안하다는
얼굴이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일부러 인상을 쓰는 느낌이었다. 소년은 한숨을
내쉬고 학교 뒤편으로 가자고 말했다. 두 사람은 벤치에 멀뚱히 앉아 있었다. 이렇게 갑갑하게
있을 거 나한테 왜 나오자고 한 거야? 시후가 입을 열려고 한 순간, 다미가 먼저 입을 뗐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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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느닷없는 사과에 시후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사과 받을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화를
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과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화를 못 이겨 터트린 것도
있었으니까 사과를 한다면 자신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쉽게 말을 못 꺼내서 어정쩡하게 됐지만.
“그냥 전부. 네 마음을 몰랐던 것도, 멋대로 군것도. 곁에 있으면서 응석만 부렸구나, 뭐 그런
것들. 전부 사과할게. 전부 미안해.”
다미가 전에 없던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늦여름의 매미가 태풍이 지나간 자리를 틈타
요란하게 울었다. 시후는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인상 쓴 얼굴로 시후는 다미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사실 부러운 것도 있었어. 넌 열심히 하잖아. 뭐든지- 나처럼 이렇게 설렁설렁 사는 것도
아니고. 이래야 되나 싶기도 하지만… 아니라는 거 알면서도 열심히 안 하게 되고. 그래서 큰마음
먹고 열심히 하고 싶은 게 생겨서 도와달라고 그랬던 건데. 그게 싫었다니 미안해.”
‘대체 네가 뭘 알아!’
소년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소녀는 전과 마찬가지로 물끄러미 소년을
바라봤다. 시린 하늘 속을 비행기 한 대가 헤엄치고 있었다. 결국 그 시선을 참지 못한 시후는
소리를 질렀다.
“열심히 하는 것 밖에 없어서 그런다! 난 꿈꾸는 미래도 없고, 뭔가 열심히 하고 싶은 것도 못
찾았어. 공부는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거라서 하는 거야. 그래, 나 하루하루 그냥
공부만 하면서 살아간다! 왜! 뭐! 왜!”
“왜 소리를 질러! 누가 너보고 잘못했대?!”
“그럼 대체 뭐야!”
“그런 거 없으면 어때! 어차피 찾으려고 하는 거잖아! 나라고 뭐 그런 게 있는 줄 알아? 내가
집에서 조물딱조물딱 모형 비행기 만드는 게 내 꿈으로 보여? 나도 없어! 찾으려고 하는 거 아냐!
찾으려고! 그리고 이해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시원하게 소리를 질러댄 두 청소년은 서로를 마주보며 씩씩거렸다. 이이익! 끓어오르는 화를 못
삭인 소녀는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앞으로 푹 고개를 숙였다. 소녀의 코가 무릎에 닿았다. 그
모습에 당황한 소년은 아무 말 못 하고 굳은 자세로 소녀를 내려다 봤다. 늦여름의 습기가 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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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하게 소년과 소녀를 눌렀다.
“어쨌든 미안해.”
“……나도 미안해.”
소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소녀가 고개를 돌려 소년을 힐긋 쳐다봤다.
“나 아직 비행기 다 못 만들었어.”
시후가 깜짝 놀라 소꿉친구를 바라봤다.“진즉에 다 만들었을 줄 알았는데?”라는 질문에
소녀는 다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그냥 너 없이 만들기 싫었는걸.”이라고 꿍얼
거렸다. 시후는 조용히 다미를 쳐다봤다. 학교가 웅성거렸다. 시계를 쳐다보니 아이들이 몰려올
시간이었다. 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어나자. 비행기는 주말에 마저 만들고.”
다미가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니까 얼른
들어가자.”
* * *
두 사람은 토요일 내내 비행기를 붙잡고 씨름을 했다. 피복과 도색을 끝내고, 고무 동력기를 단
비행기를 완성했다. 일요일은 날씨의 변덕 덕분에 때 이른 가을 날씨였다. 기온이 자꾸 미쳐
간다고 다미는 투덜거렸다. 시후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너도 그 미친 기온에 일조했다며 타박을
놨다.“환경을 생각해야겠어. 이러다간 북극곰이 멸종할 거야. 해수면은 솟구치겠지.”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다미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시야를 가리는 건 아무 것도 없는 잔디밭이었다.
보이는 건 말간 하늘뿐이었다.
시후가 다미에게 비행기를 건넸다.
다미는 비행기를 받아들었다.
비행기가 손을 떠나 하늘로 빨려 들어갔다.
“드디어 비행기가 날았네.”
“응, 드디어. 한… 두 달 걸렸나?”
“어.”
하늘을 걷는 걸음
104
탈탈거리며 날던 비행기가 잔디밭에 안착했다. 첫 비행이라 우아한 착륙은 못했지만 꽤
만족스러운 비행이었다. 착륙한 비행기를 보며 시후가 중얼거렸다.
“언젠간 나도 하늘을 날겠지?”
“사뿐 사뿐 걸을 수 있을 거야.”
다미가 대답했다.
소년은 소녀를 내려다봤고, 소녀는 소년을 올려다봤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둘은 빙그레 웃고, 비행기를 잡으러 갔다.
* * *
“아빠? 응, 아뇨. 별 일 없어. 그냥 전화했어요. 일은? 응, 아. 그렇구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비행기 만들려면 대학교를 어디로 가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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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뛰기
장려상
김 민 중

- 할머니가 기다리실 텐데……
- 제주도 바다는 어떤 색깔일까?
- 미국 가면 공부 열심히 해야지!
두근두근
콩닥콩닥
그 마음
모두 모아
두 팔을
날개 벌리고
힘차게 도움닫기해서
땅을 박차고
한숨에 날아오르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멀리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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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상상
장려상
김 경 구

왜 가끔 그럴 때가 있지.
남 앞에 섰을 때
말도 제대로 못해
나만 점점 작아 보이고
자신감이 뚝 떨어질 때 말이야
그럴 때 이런 건 어때?
비행기 탔을 때
내려다 본 세상을 떠올려 보는 거
아파트도 지우개처럼 작고
큰 논밭도 색연필로 칠한
그림처럼 작아 보이고
학교도 레고처럼
운동장도 손바닥보다 작게 보였잖아.
어때?
거인이 된 거 같지 않니?
마치 걸리버 아저씨처럼
영화의 킹콩처럼 말이야.
힘이 퐁퐁 솟을 거야.
이 세상의 나는 나 혼자 뿐이야.
내가 주인공이지.
자, 비행기 타고
붕붕 날아다니는 것처럼
기분이 둥둥, 한결 좋아졌지?
즐거운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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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초대
장려상
류 미 월


멕시코공항 착륙 직전
상공에 펼쳐지는 야경이 절창이다.
보석한줌 뿌려놓은 듯 신대륙을 발견한 듯
도심의 불빛은
검은 모래 털고 갓 세수한 얼굴처럼
투명하게 빛을 발한다.
좁은 기내에서 움츠렸던 세포들이 툭툭 깨어나며
바람구두 신은 듯 일제히 몸이 가벼워진다.
고도를 낮추며 원경이 근경으로 바뀌는 진풍경은
공중을 누비는 비행기가 아니면 맛보기 힘든
유화 한 폭 같은 선물이다.
오랜 시간 낯선 곳 떠돌다
인천공항이 가까워지면
서해안의 절묘한 선과
진초록 김포평야는 엄마 품 같다.
삶의 동맥에서 뿜어오는 기운이
여독을 솜사탕처럼 녹여준다 .
구름위의 산책자처럼
초대된 공중의 그림 전람회를 마치고 오는 길은
한 폭 한 폭 멋진 풍경들이 가슴속에 스며
삶의 에너지로 불끈불끈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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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주로의 내력
장려상
박 미 림

섬이다
배 한 척 보이지 않는,
사람들 썰물과 밀물 되어 오갈 뿐
벼랑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탄탄대로
길만 길이 되는
섬과 섬을 이어주는 관제탑은 등대다
그곳에는 수시로 별이 생성하고 소멸한다
육중한 별은 천천히 내려왔다가
서서히 접어드는 하늘 길
가끔 연착된 별이 덤으로 반짝일 때도 있다
먼 곳에서 날아와 쉬고 있는 깃털 사이
비상하는 새떼들이 자유롭다
정비사의 지친 어깨를 길게 늘어놓고 있는 나른한 오후
별들이 키 재기를 하고 있다
오랜 세월,
바닥은 모든 것들에게 공평하였다
우리만 욕망이 발동하여
어느 날 덜컥거렸을 뿐,
하늘 문 열리고 닫히는 곳에서
천개의 점멸 신호등들
적절한 각도에서 붉거나 흰 눈빛의 유도등
어둠의 저 편, 천리 경계 너머 밝혔다
곧은 길 솔기 끝이 시위를 당기는지
바닥이 기립 자세로 총총
나,
섬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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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끌어가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장려상
임 솔 아


노트북을 버렸다. 발자크의 소설을 버렸다. 여분의 옷도 버렸다. 몇 시간이나 헤맨 끝에 간신히
구입했던, 야시장 할머니가 손수 꿰매서 만들어주었던, 수제 인형도 버렸다. 목발을 움켜쥐고
일어나 보았다. 배낭을 들어보았다. 분명 가벼웠겠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무겁게만 느껴졌다.
서있는 것조차 위태로웠다. 서있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올라왔다. 돌아갈 길은 까마득했다. 나는
태국의 우돈타니라는 도시에 있는 국제 병원에 있었다.
사고는 한순간에 일어났다. 말 그대로 어라, 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코너를 돌아 튀어나온
오토바이에 부딪쳤고, 넘어졌고, 일어날 수 없었다. 뜨끈한 온천에 발을 막 담근 것처럼, 발이
따끔거렸다. 발은 뭉개져있었다. 오토바이는 사라져버렸다.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 태국
우돈타니의 국제 병원을 찾아갔지만, 으깨진 발가락을 원상복구 시키지는 못했다. 나는 그곳에서
가운데 발가락 전체와 두 번째 발가락 절반을 절단하고, 나머지 부러진 발가락에 핀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았다. 공포와 통증은 밤낮없이 찾아왔다. 하루에 타이레놀 20알을 먹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오토바이 소리,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모든 언어들은 나를 벌벌 떨게
만들었다. 가족들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찾아올 수 없었고, 타이레놀 알레르기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음식을 삼켜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통증을 견뎌내기 위해 계속 타이레놀을
삼켜내야 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화장실을 갈 때였다. 침대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누군가
생살을 찢는 것처럼 발이 아팠다. 간호사는 웬만하면 서 있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오래 서
있을수록 통증이 심해질 거라고 했다. 요의를 참다가 화장실에 가면 그 잠깐 걸은 것 때문에
통증이 극대화되어 변기에 앉아 울고는 했다. 하지만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병원의
사람들과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나는 나의 상태가 정확히 어떠한 건지도 알지 못했다. 한국의
수지접합 전문 병원에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고, 전문의에게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 정확한 진단을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돌아갈 수가 있을까? 나는 10m도 걷지를 못했다. 무작정
비행기를 예약하고, 어떻게든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눈앞이 캄캄했다.
나를 이끌어가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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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내가 예약한 비행기는 대만에서 1박을 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것도 항공사에 도움을
요청해 가장 빨리 한국에 도착할 수 있는 비행기를 찾아낸 거였다. 공항에 가고 수속을 밟고
비행기를 타고, 대만에서 내려 호텔을 찾아가고 다시 공항을 찾아가고 수속을 밟고 게이트를
찾아가고……. 걸을 수 없는 내가 이런 것들을 해낼 수 있을까?
간호사에게 붕대를 잔뜩 얻었다. 발에 수건을 두르고 그 위에 붕대를 칭칭 감았다. 행인이 내
발을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핀으로 가까스로 연결해놓은 발가락뼈는 다시 자리를 이탈할 거였다.
버릴 수 있는 모든 물건을 버렸다. 병원에서 불러준 택시에 목발을 싣고, 나는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에 내려서부터는 이제 걸어야 했다. 택시에서 내려 목발을 쥐고 일어서자마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티켓을 끊으러 가는 길이 지나치게 멀게 느껴졌다. 행인들은 무심히
내 곁을 지나갔다. 행인이 내 곁을 스칠 때마다, 그 사람이 내 발을 건드릴까 나는 겁에 질렸다.
이 인파 사이에서, 나는 조난된 기분이 들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은 없었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티켓을 끊고 뒤돌아, 내가 찾아가야 할 게이트가 어디인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출국 도장을 받고
짐을 검사하고 면세점을 지나 게이트를 찾아가고 비행기에 탑승해야 했다. 나는 이미 진이
빠져있었다. 발은 퉁퉁 부어 있었고, 발가락이 터져버릴 듯 아팠다. 환상통이 극도로
치달아있었다. 누군가 이미 사라진 나의 발가락을 칼로 쑤시고 있었다. 나는 발길을 떼지 못했다.
그때, 항공사 직원이 나를 보고 기다리라 말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직원은 사라져버렸다.
항공사 직원은 휠체어를 끌고 왔다. 발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 발을 온전히 앞쪽으로 뻗을 수 있게
만들어진 휠체어였다. 직원은 나를 휠체어에 태워주었다. 피가 쏠리지 않도록 발을 들어
고정시켜 주었다. 나대신 도장을 받아주고, 나대신 내 짐을 검사받게 해주고, 나대신 행인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해주고, 나대신 나를 이끌어 가줬다. 내가 기다리는 일은 없었다. 나는 줄을
서지도 않았다. 승무원들이 다니는 통로로 직원은 나를 안내했고, 비행기가 도착했을 때, 직원은
나를 안아 자리에 앉혀 주었다. 내가 앉은 자리는 앞자리에 의자가 없는, 맨 앞자리였다.
직원들은 통증을 줄여주기 위해 발을 뻗을 수 있는 좌석을 내게 배치해주었다.
대만에 비행기가 도착했을 때, 승무원은 또다시 나를 안아 비행기에서 내려 주었다. 휠체어가
비행기 앞에 이미 대기되어 있었고, 내가 휠체어에 앉자 승무원이 나를 이끌어 택시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 내 휠체어를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125
밀어주고 있는 그 누군가,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익명의 승무원들이 바통을 넘기듯 나를 넘겨
목적지까지 이동시켜 주고 있었다.
대만은 그때 처음 가본 나라였다. 모르는 나라의 모르는 도시의 모르는 숙소에서, 나는 사고가
나고 처음으로, 두려움 없이 깊은 잠을 잤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에도 승무원은 휠체어에 나를 태워주고, 내 짐을 찾아주었다. 그리고 공항을
돌아다니며 내 가족을 찾아주었다. 인천공항에서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울었다. 가족을 만난
기쁨에 잠시 부둥켜안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 뒤를 돌아보았을 때, 승무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나를 가장 많이 도와주었던 사람들이었지만, 어떤 보답도 바라지는 않았다.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그냥 그렇게 사라졌다.
나는 바로 다음날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고, 재수술을 받았다. 절단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핀 삽입 수술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수술 후 나는 꽤나 오래 입원해 있었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재활치료를 받았다.
사람들은 내가 이제 해외여행을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오랫동안 사고의
악몽에 시달렸고, 오토바이 소리만 들어도 무서워했고, 자동차도 타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타야 할 때면 사고의 환영이 보였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여행을 다닌다. 자동차를 타고, 비행기를 탄다. 아는 사람이 없는 외국을
돌아다닌다. 어떤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아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들이, 여전히 당연하다는 듯 누군가를 도우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 절도범이나 살인범이나 뺑소니를 치는 사람들이 많은 것만큼, 그들이 없는 도시가 이
세상에 없는 것만큼, 누군가를 돕는 사람들 역시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 승무원들의 얼굴도
이름도 나는 알지 못하지만, 내 뒤에 서서 휠체어를 밀어주던 소리, 그들의 발자국 소리는 사고의
환영보다도 더 진하게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지금도 궁금한 세계를 향해
발을 뻗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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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쉼터, 나의 즐거움
장려상
유 창 남


나는 대한민국 무역인을 자부하며 더 큰 꿈에 도전하는 서른여섯 청년이다. 지난 8년간 한국에서
40만 킬로미터 이상의 도로운전을 하며 영업을 했고, 전 세계 20개 국가를 하늘 길로 날아다니며
해외세일즈를 했다. 그렇게 돌아다닌 덕분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마일리지가 50만 마일을
넘어섰다. 여권발급 3회 째, 한국 출입국 기록은 196회, 해외출장이 잦다는 사업가들도 만나고
수출파트 동료들도 많이 알게 되었지만 나보다 더 마일리지가 많거나 공항에 자주 다닌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을 정도다. 별것 아닐 수 있겠지만 내 나름 긍지와 자부심이 생기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느 신년 초엔가는 핸드폰요금을 조회한 적이 있었는데, 1년 동안의 요금이 5백만 원이
넘어선 적도 있다. 나도 놀랐는데 조회해준 직원이 더 놀라워했다. 이런 내용을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나에게 현재진행형이다. 하늘 길을 날아다니는
만큼 새로운 고객이 생겨나 수출이 늘어나는 것이고, 휴대폰요금이 올라가는 만큼 해외
바이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해외 비즈니스를 처음 시작한 지 8년이 됐다. 8년 동안의 이동거리가 이렇다 보니 한국에서
여유를 찾거나 즐길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여러 군데를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여유가 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해외출장이
잦아지면서 나는 특별한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출국수속을 마치고부터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다. 출국수속을 끝내고 느끼는 평온함을 지인들에게 말했더니 모두들
이해하지 못했다. 개중에는 공항공포증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처음 해외에
나갈 때 몹시 떨렸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공항에 가면 사람들은 좋아서 그러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이 분주한 모습이다. 어쩌면 나도 너무나 자주 반복되어온 공항 문화 속에서 억지로라도
찾아낸 여유인지는 모르겠다. 이유야 어떻든지 그 시간만큼은 아무도 나를 터치하지 못한다.
오직 나만의 시간이다. 약간은 심각한 업무문제로 전화를 받은 적도 있었다. 출국을 포기하고
되돌아갈지를 잠시 고민했지만 아주 잠시였을 뿐이다. 나는 지금 더 큰 일로 해외를 나가는
나의 쉼터, 나의 즐거움
130
길이라고 생각하니 어떤 변수가 생긴다고 해도 출국을 포기하고 되돌아오는 일을 하지 않는다.
출국수속 뒤에는 나만의 자유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일상탈출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출국 때 점점 일찍 공항에 도착하는 내가 전혀 이상하지도 않다. 언제인가 공항에 일찍
도착한 어느 날, 인천공항 이쪽저쪽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인천공항 중앙 쪽에서 기막히게
멋진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공항 방송국에서 틀어 놓은 음악이겠거니’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앙으로 다가갈수록 음악은 웅장해지고 있었다.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세 명이서 첼로 연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 TV에서 봤던 바네사
메이가 떠올랐다. 바이올린이 아닌 첼로였는데도 말이다. 클래식, 가요, 팝송 등 주옥같은
노래들을 첼로로만 연주하는데 전율이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더 첼로스”라는
팀이었다. 전에는 몰랐지만 인천공항에서 주기적으로 공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날
이후부터 인천공항에 가면‘오늘은 무슨 공연을 할까?’하며 기대하게 된다. 내가 평상시에
클래식 공연이나 콘서트를 보러 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는데 공항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품격 있는
공연을 볼 수 있게 돼, 나의 문화적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내 삶의 문화적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주었다.
바쁜 일상보다 사실 더 바쁜 게 해외출장길이다. 그런데 이제는 출국 일정이 잡히면 설렐
정도다. 얼른 공항에 가서 수속을 마치면 드디어 일상탈출이 시작 된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켜놓은 휴대폰으로 별별 전화가 걸려 와도 입국하기 전까지는 내가 나설 수 없게 된다. 남겨진
직원들에게 살짝 미안해지기도 하는 순간이다. 내가 조금만 늦게 출발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면서도 이제는 양보할 마음이 없을 정도로 공항은 나만의 특별한 휴식처가 돼버렸다. 이렇게
은근 기대하며 공항에 도착하면 어김없이 편안함이 몰려온다. 잠시지만 업무들과 분주함을
완전하게 꺼놓는 시간이지 않은가? 나에게 찾아온 편안함과 달콤함을 마음껏 즐길 때가 됐다.
나만의 쉼터.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출국장 내 무료라운지로 달려간다.
은행에서 발급받은 카드 중 전 세계 공항 라운지를 무료로 이용하는 프라이어리티 패스 카드가
있다. 나처럼 출장이 잦은 사람에게는 최고의 카드다. 비용은 1년에 10만 원 정도인데 라운지 한
번 이용에 3만원이 넘으니 나는 큰 비용을 벌고 있는 셈이다. 나에겐 무료지만 실제 이곳은 유료
라운지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히 쉴 수 있는 아주 좋은 곳이다. 출국장 2층 양 쪽 끝에
하나씩 위치해 있어 접근성이 용이하다.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131
출국장 2층 라운지에서 충분히 쉰 뒤 1층으로 내려간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또 한
번의 큰 기대를 한다. 인천공항이 어떤 곳인가! 전 세계 최고의 공항, 하루 이용객만 15만 명 정도
되는 세계패션 일번지이다. 전 세계 사람들의 패션, 스타일,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면세점에 진열된 상품들을 바라보며‘오늘의 신상품은 뭘까?’‘요즘 트렌드는 뭘까?’
하며 호기심 천국이 시작된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한 시간, 두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그러다 비행기 시간이 점점 다가오면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곤 한다. 다음 출장 때는 좀 더 일찍
와서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생각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드디어 출발이다. 비행기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세상과 단절된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가장
여유로운 나만의 공간. 비록 좁은 의자지만 이 작은 의자는 나의 침대가 되고 책상이 되고 식탁도
된다. 이 작은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해본다. 영화시청, 공연방송, 책 읽기, 쇼핑, 식사,
잠 등등. 너무 많아 헤아릴 수가 없다. 나에게 비행기는 최고의 만능헬퍼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12시간 동안 비행기를 어떻게 타나요? 난 못 타겠어요.”라며 자주
질문한다. 당연히 비행기를 오래 타면 힘들다. 하지만 그 긴 시간동안 불평과 짜증을 낸다면
출장길은 엉망이 돼버릴 것이다.“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처럼 부정적인 내용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긍정적인 내용들로 내 정신을 채우면 출장은 아름답게 시작될 것이다.
또 우리나라 승무원들은 내가 만나본 어느 외국항공사 승무원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친절로 감동을 준다. 비행기에 타서부터 내릴 때가지 최상의 서비스와 미소로 내 출장길을
기쁘게 맞아주는 우리나라 승무원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
내가 이렇게 공항과 비행기를 자랑하는 이유는, 자랑스러운 무역인이기 때문이다. 최종물류는
선박을 통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빠른 정보교환을 위해서는 비행기 외의 방법은 없다. 어쩌면
나는 비행기와 공항이 불친절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이용해야만 한다. 그런데 휴식처와
쉼터라고 여길 정도로 대우를 받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인천공항도 세계 최고이고 우리나라
항공사의 친절도 세계 최고라고 자랑한다. 그렇게 전하는 나를 보며 해외바이어들은 한국에 오고
싶어 하고 인천공항과 우리나라 항공사를 이용하고 싶다고 한다. 이제는 나의 쉼터뿐이 아니라
나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다. 나의 즐거움이자 자랑인 비행기와 인천공항이 한국을 대표하는
무역인들과 이용객들에게 더 큰 만족을 줄 것을 의심치 않는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항공사와
인천국제공항이 톱을 달리듯이 나도 대한민국 대표하는 무역인으로 성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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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권 순 화


고도 10000km의 하늘 길을 달리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높이 오른 걸까? 시속은 800km를 훨씬
웃돈다. 자동차 탔을 때의 속도를 감안해보면, 시속 800km라니, 가늠할 수조차 없다. 이렇게
세상은 모르는 것 천지다.
인생도 그렇다. 우리는 수많은 길들 중, 보통 익숙한 길만을 다닌다. 그 길을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나듯, 궤도에서 벗어나는 걸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힘들 때는 잠시 다른
길로 한 번 가보라. 혹시 아는가? 그 길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고, 더 맛있는 과일나무가
있는지.
가장 높이 있는 하늘 길은 다른 길보다 막힘없고 환하다. 아래를 찬찬히 내려다보라. 그러면 높이
있어서 너그러운 하늘을 알 수 있으리라. 세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 보인다. 맑은 구름은
닮고, 어두침침하고 암울한 먹구름 따위는 버려라. 그렇게 모든 걸 비워라. 그리하면 바람처럼
자유로워진다. 이것이 진정한 힐링(healing)이다.
하늘 정원의, 뽀얀 구름 나무가 자라있는 길. 그 사이를 비행기가 걷고 있다. 비행기 팔에 햇빛이
팔짱을 끼고 사이좋게 거닌다. 젊은 날 남편이랑 연애할 때의 추억이 생각난다. 그때는 비행기
안에서처럼 세상이 천천히 가는 줄 알았다. 밖은 시속 800키로 이상으로 달리고 있는데 말이다.
얼굴처럼 마음의 주름도 없었던 청춘시절은 빛처럼 눈부셨고, 낙원처럼 평화로웠다. 그런데
결혼의 길로 들어서보니, 그렇지만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그렇다면 진짜 낙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불과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전혀 예상치 못했을 하늘 길. 어쩌면 옛 사람들이 동경했던
파라다이스가 아닐까 싶다. 훼방꾼이 없어 어디든지 갈 수 있으니까. 날개 있는 새들도 날 수
없는 신의 영역에서 날고 있는 황금 콘도르. 그 안에서 사람들의 표정은 꿈꾸듯 피어난다.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사회책의 지도 같은 땅을 날던 비행기가 내려가자, 내 몸은
*‘닐스’처럼 작아졌다. 하늘에서 보이던 땅 밑 소인국이 순식간에 커졌다. 여행 자체가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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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탐험이다.
한 겨울인 호주의 날씨는 선선했다. 차가운 이국(異國)의 낯선 공기를 가르며 성큼성큼 내딛었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듯 경쾌했다. 나만의 착각이면 어떠랴? 실은 금발과 푸른
눈들이 북적이는 공항에서 긴장한 내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한 방어였다. 잠시 후 한국인
가이드와 만난 후 초보의 긴장은 다소 느슨해졌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함께 할 일행과 인사를
나누며 승합차에 올랐다.
짠돌이과에 속하는 남편 때문에 삼복더위 때도 에어컨 한 번 제대로 켤 수 없었다. 우리 집에서
에어컨은 손님이 왔을 때나 제구실을 했다. 우리는 8월 더위보다 숨 막히는 남편 눈치를 보며,
그나마 돌아가는 고마운 선풍기로 견뎌야했다.
언젠가 여름휴가를 간 적이 있다. 남들처럼 1년에 한 번이 아니었다. 몇 년 만이었다. 그런데 방값
비싸다고 오밤중에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휴가철이니 당연히 평소보다 비싼 것인데,
바가지도 이런 바가지가 없다고 외계인 같은 소리를 해대는 남편 때문에 완전히 꼬여버렸다.
남편의 요지는 이거였다. 편안한 내 집 두고 왜 여기 와서 바가지요금 물어가며 고생을 하냐고?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몇 년 만의 휴가가 아니냐고 난 포르티시모로
목소리를 높였다. 휴가철이니 그런 걸 알고도 한 번 쓰는 거지. 이게 뭔가? 그래서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했나보다. 결국 그 날 사니 마니 하는 말까지 오가며 크게 다투고야 말았다. 꼭 그
길 밖에 없었던 것일까? 가족을 위해서 한 번만 양보할 수는 없었을까? 지나서 생각해보니,
그래도 펑펑 쓰는 것보다 구두쇠일지언정 알뜰한 게 낫다는 걸로 위안 삼았다. 따져보면 내게만
구두쇠인 게 아니라 자신에게도 철저한 사람이 아니던가. 함께 이불을 덮었을 때부터 알았으니
이제 무뎌질 때도 되었건만 지금도 남편의‘길’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유난히 입덧이 심했다. 음식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억지로 쑤셔 넣는다
해도 곧이어 다시 올라와버렸다. 겪어본 사람은 알리라. 그래도 그때 그나마 먹을 수 있었던 게
과일이었다. 아직 눈바람이 가시지 않은 2월의 어느 날, 그날따라 딸기가 그렇게 먹고 싶었다.
남편에게 부탁을 하고 기다렸는데, 남편이 가져온 건 탱글탱글한 딸기가 아니라 딸기
아이스크림이었다. 딸기를 구하려고 했으나 파는 데가 없었다나? 대형마트에 가면 얼마든지
있는데, 아직 비싸서 못 샀겠지, 잘 알면서도 그리 서운할 수가 없었다. 딸기 아이스크림이 단
줄도 몰랐다. 결국 딸기는 4월이 되어 값이 떨어져서야 맛볼 수 있었다.
제1회 항공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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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은 시부모님이 오셔서 자장면과 탕수육 세트를 시켰다. 예고 없이 오셔서 장봐 놓은 것도
없었고, 시부모님이 자장면을 좋아하셔서 오랜만에 시킨 배달음식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퇴근하고 온 남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쓸데없는데 돈 썼다고. 그렇게 남편은 모든 게
악착같았다. 때로는 지나침에 속상한 적도 많지만, 어쨌든 그 덕에 오래지 않아 집도 장만했으니
나의 불만은 접어야 했다. 그렇게 훼방꾼 없는 우리의 비행은 순조로웠다. 그대로라면 우리에게
다른 길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은 한 길로만 가는 게 아닌 듯하다. 본의가 아니더라도.
전혀 예상치 못했더라도.
슬슬 더위가 밀려오는 초여름이었다. 평소 술도 잘 먹지 않던 남편이 그날따라 음주운전을 했다.
무엇에 홀린 듯 운전대를 잡았다던 남편은, 늦은 시각이라 오가는 차들이 많지 않은 도로에서 큰
사고를 내고야 말았다. 그로인해 큰 부상을 입었고, 오랜 기간 병원신세를 져야했다.
쌍방과실이었지만 음주운전이라 책임이 무거웠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우리는 많은 걸 잃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남편에게 큰 후유증은 없었지만, 집을 팔고 셋방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보험비
아깝다고 보험도 넣어두지 않은 상태였기에 다른 길은 없었다. 갑자기 닥친 엄청난 일에 우리는
사막처럼 피폐해졌다. 사막에 비가 내리지 않듯 내 얼굴도 물기를 잃고 메말라갔다. 이때까지
따갑지 않던 사막의 모래바람이 내 코와 눈을 사납게 때렸다.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남의 손에
맡겨가며 신발 한 켤레가 한 달 만에 다 닳도록 뛰어다녔었다. 늦은 시간까지 눈치보고 있을 아이
생각에 부랴부랴 가는 걸음이 바빴었다. 먹고 싶은 거 참고, 하고 싶은 것 참아가며 어렵게 쌓은
성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모래언덕처럼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난 몇 달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남편이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용돈 아껴가며 모은 돈이란다.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이 돈으로
내 소원이던 해외 한 번 갔다 오란다. 대신 이젠 돌이킬 수 없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고 했다.
맞잡은 남편의 손이 떨렸다. 본인의 실수이긴 하나, 더욱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짠돌이
남편으로서의 그 제안은 과히 파격적이었다. 적은 용돈에서 이런 돈을 모은 것도 신기했다.
난 거절하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그 통장을 받았다. 어디서 그런 결심이 섰는지는 모르겠으나,
짠돌이 아내로서 처음 와본 여행길, 하늘 길은 내 인생 최고의 길이었다.
같이 온 일행들은 여행의 여유가 묻어났다. 이들에게 내 마음을 들킬 세라 꼭꼭 숨겨 두고
빗장까지 걸었다. 그리고 이국의 신비로움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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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그리하지 않아도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마술 방망이처럼 내 마음을 부풀렸다. 겨울인데도
곳곳에 잔디가 푸르렀다. 4계절 변함없는 풋풋함을 간직한 이 곳 잔디가 부러웠다. 곧 있음 깨게
될 한여름 밤의 꿈이란 걸 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한여름 밤의 꿈’에서 사랑도피를 하게 된
헤르미아와 라이샌더의 꿈은 숲에서 이루어졌다. 눈꺼풀에 발라놓은 사랑의 묘약이 방해꾼들을
해결했듯이, 여행은 내 눈꺼풀에 치유의 묘약이 되었다. 짧게나마 머물렀던 호주에서의 여행은
추억의 페이지에 길을 냈다. 생각날 때마다 펼쳐 보고 걸을 테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이륙한다. 창문 너머 작아지는 집들과 나무, 길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를 이곳을 눈 카메라에 열심히 찍었다. 마음이 좀 가볍다. 이때까지도 못 버린 남은 앙금들은
가는 동안 하늘에 마저 버리련다. 높은 곳에 있어서 아무도 못 줍는 저 넓은 창공으로 말이다.
또한 여기서 에너지 충전한 만큼 돌아가면 열심히 살리라 다짐해본다. 안은 편안하고
여유롭지만, 밖은 정말 열심히 달리는 비행기처럼 살아온 남편과 다음에는 이 좋은 하늘 길을
함께 걷겠노라고...
*닐스 - 만화 ‘닐스의 모험’에 나오는 남자아이. 몸이 작아졌다 커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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