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회 항공을 소재로 한 창작문학 항공문학상 공모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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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내역
구 분시상부문상장인원상금 및 부상
대상공통
(학생부 및 일반부)
전 부문 중 1편국토교통부 장관상1명·300만원
·유럽 또는 미주(장거리) 왕복항공권 (2매)
최우수상학생부대상 수상부문을 제외한
공모부문에서 각 1편
한국항공진흥협회 회장상2명·300만원 (각 150만원씩)
·동남아 왕복항공권 (각 2매)
일반부
우수상학생부공모부문에 관계없이 4편한국공항공사 사장상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상
㈜대한항공 사장상
아시아나항공(주) 사장상
4명·200만원 (각 50만원씩)
·국내선 왕복항공권 (각 2매)
일반부
장려상학생부공모부문에 관계없이 8편한국공항공사 사장상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상
㈜대한항공 사장상
아시아나항공(주) 사장상
8명·200 (각 25만원씩)
일반부
합 계15명총 1,000만원,국내·외 항공권
최종 당선작 : 15편
구분부분부문저자명작 품 명
대 상일반부소설박사무엘나의 작은 종이비행기
최우수상학생부수필조영훈미래의 동반자이자 친구, 비행기
최우수상일반부이미순야자나무의 날개
우수상학생부소설정예림비행기의 수호천사
우수상학생부정윤성푸른 공책
우수상일반부수필박창규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서
우수상일반부안지숙최초의 비행
장려상학생부유선재일탈 속 풍경
장려상학생부윤준혁공항
장려상학생부수필이원빈내 첫 여행 프랑스, 그리고…
장려상학생부소설성원모나이스 랜딩
장려상일반부최선옥민들레의 비행
장려상일반부소설양진영나의 아름다운 에스키모 비행사
장려상일반부수필윤영욱수묵 산수 병풍
장려상일반부수필박찬중푸른 하늘에 피어오르는 나의 꿈
[제3회 항공 문학상 대상 수상작품]
 
나의 작은 종이비행기
 
소설부문 / 일반부 / 박사무엘
 

담당하는 꼬리 날개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이 크게
자랑할 일은 아닌지 몰라도, 나에게는 큰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일임은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어렸을 적 내 손에는 늘 비행기가 들려있었다.
그것이 종이로 대충 접어 만든 종이비행기이던,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형비행기이던,
아니면 직접 조종이 가능한 RC비행기이건 간에, 늘 비행기를 쥐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이 커다란 땅과는 어울리지 않던 동양에서 온 아주 작은 남자아이는 그렇게 비행기에
관한 꿈을 키워갔던 것이다.
나는 30년 전, 낯선 땅으로 건너온 입양아였다. 그렇다고 당신이 쉽게 떠올릴만한 그런
불행한 삶을 산 것은 아니다. 미국으로 입양 온 아이들 모두가 수잔 브링크와 같이 슬픈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단코 아니니까.
나의 양부모님은 나와는 달리 눈부시게 밝은 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고, 눈처럼
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다. 양어머니의 이름은 수잔-물론 수잔 브링크는 절대
아니다-이었고, 양아버지의 이름은 콘래드였다.
수잔과 콘래드는 누구보다 인자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나를 돌봐 주었다. 그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아마, 누구보다 입양아의 심정을 잘 알고 있는 내가 다른 아이를
입양한다고 해도 수잔과 콘래드처럼 아이에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 정도로 수잔과 콘래드는 나에게 완벽한 부모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섯 살 당시 나의 삶이 그렇게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완벽한
부모님이 생겼다고 달라질만한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당시의 나로서는 갑자기
뚝 떨어진 미국이라는 나라가 마치 외계의 행성에 온 것처럼 낯설고 두렵기만 했던
것이다.
수잔과 콘래드가 사는 곳은 워싱턴 주 킹 카운티의 교외마을로 시애틀에서 서쪽으로 두
시간가량 차를 타고 이동해야만 닿는 곳이었다. 당연히 마을 사람 대부분이 수잔과
콘래드와 같은 백인이었고, 나는 그 마을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였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고, 쉴 새 없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으며, 또 나를 볼 때마다 신기한 눈빛을 하고는 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았던 세계가 모두 무너져버리고, 내가 만들어온 작고 초라한 유대
관계 또한 한꺼번에 실종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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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소설 _ 나의 작은 종이비행기
“제이크, 걱정하지 마렴. 우린 널 사랑한단다.”
늘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기 바쁜 여섯 살의 나를 보며 수잔과 콘래드는
끊임없이 그 말을 속삭였다.
불행한 것은 당시의 나는 그 간단한 언어조차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무지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나는 그들이 박지훈이라는 내 이름을 두고 왜 나를 제이크라고
부르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수잔과 콘래드의 체온에 그저
자그마한 위안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수잔과 콘래드의 아이가 나 하나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 이외에도 다른 두 명의 아이를 더 입양하였는데, 한명은 나보다 세 살이 많고 검은
피부를 지닌 샘이었고, 또 한명은 나보다 딱 한 살이 어린 인도 출생의 안나였다.
내가 수잔과 콘래드의 집에서 살기 훨씬 전부터 그 집에 사로 있던 샘은 누구보다도
밝은 성격의 소유자로, 가장 처음 내가 입양을 왔을 당시, 양부모님보다 훨씬 더 나를
반겼었다.
“난, 샘이야. 이제 나도 남동생이 생기는구나!”
샘은 그 전부터 꽤나 남동생이 가지고 싶다고 수잔과 콘래드를 졸랐던 모양인데, 그건
어쩌면 입양아라는 이유로 샘이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안나의 경우, 나보다 조금 늦게 수잔과 콘래드의 집에 살게 되었는데, 샘처럼 밝은
성격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워낙 머리가 영특한 탓에 누구보다 빨리 이곳의 생활에
적응을 해 나갔고, 친구들도 우리 셋 중 가장 많았다.
당시 수잔과 콘래드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오직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작은 아이의
눈에서 쉽사리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샘과 안나 또한 그런 양부모님의
분위기를 읽은 탓인지 늘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의 친절이
더욱 불편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말썽꾸러기 제이크, 너만 웃으면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 텐데.”
어느 날인가 아무리 상냥하게 대해줘도 반응이 없는 나를 보며 샘은 지친 표정으로
그런 말을 했었다. 안나 또한 샘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제이크, 눈치 있게 굴어.”
안나의 그 말 때문에 나는 그 순간부터 억지로 웃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나는 수잔과
콘래드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예스라는 답을 했고, 어디를 가든 입 꼬리를
떨어뜨리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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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소설 _ 나의 작은 종이비행기
“제이크, 넌 고작 일곱 살이잖니. 네가 싫은 것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단다. 아버지는
네가 조금 더 솔직한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일곱 살의 나이에 거짓 미소를 만드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하더라도 콘래드의 눈을 속이기에는 어설펐던 것이었다. 나는 콘래드의 그 말을 듣고
그때까지 억지로 참아 왔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제이크, 이것 봐라.”
콘래드는 울고 있는 나를 보면서 당황한 표정으로는 황급히 작은 종이비행기 하나를
접어주었다. 그건 내가 한국에서 알고 있던 종이비행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나는 어느새 울고 있던 것도 잊어버린 채, 콘래드가 날린 종이비행기의 궤적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아주 잘 날지?”
“응”
예스. 나는 그제야 솔직히 콘래드의 말에 대답했고, 콘래드는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울음을 그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콘래드는 근처의 공장에서 일을 하는 엔지니어로 그리 풍족한 삶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았다. 그 날 이후부터 콘래드는 늘 나를 볼 때면 비행기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마도 내가 비행기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았는데, 그 이야기들을 해 주려고 일부러 비행기 관련 서적들을 몰래 읽는 모습을
나에게 들킨 적도 있었다.
그런 콘래드의 덕분에 나는 그 이후로 늘 손에 작은 종비행기를 들고 있었다. 그런 나의
모습에 심술이 난 샘은 몇 번이나 내 비행기를 빼앗으려 장난을 쳤지만, 나는 절대로 그
비행기만큼은 빼앗기는 법이 없었다. 물론 모든 일에 심드렁한 안나는 늘 종이비행기
하나를 두고 싸움을 벌이는 샘과 나를 그저 한심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부턴가 동네에 친구들을 만들어 집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샘과 안나와는
달리 난 늘 방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스케이트를 사달라고 조르는 샘과 예쁜
원피스를 사달라고 떼를 쓰는 안나와는 달리, 나는 커다랗고 하얀 종이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지 재미있게 놀 수 있었다.
콘래드는 그런 나에게 유일한 친구였고, 매일 나와 함께 종이비행기를 접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때마다 콘래드가 알려준 종이비행기 접는 방법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형을 시켰는데, 그건 비행기의 머리 부분에 무게감을 늘리기 위해 작은 나무토막을
달거나, 아니면 종이를 오려 붙여 원래 날개보다 더 큰 날개를 만들거나 하는 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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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소설 _ 나의 작은 종이비행기
일이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만든 종이비행기는 더 이상 종이비행기라고
부르기에 어색할 정도로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놀이거리에
불과했던 종이비행기 접기는 그 당시 나에게는 어쩌면 수잔과 콘래드, 샘과 안나의
사랑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내 마음 어딘가의 빈 곳을 채워주는 일종의 명상과도
같은 작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때까지의 나는 언젠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겠노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콘래드의 집이 시애틀에서 떨어진 내륙의 촌마을이 아니라 바닷가의 항구
마을이었다면, 비행기가 아니라 배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킹 카운티의 작은 마을은 강이나 호수조차 보기 힘든 평야였고,
덕분에 바라볼 수 있는 건 광활한 들과 그 위로 맞닿아있는 하늘뿐이었다.
덕분에 비행기를 접지 않는 시간이면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 하늘을 보는 것으로
채워나갔다. 하루 종일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다 보면, 때때로 뜻하지 않은 것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 대부분은 좀처럼 보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가끔씩 우리 마을 위를 여유롭게 날아간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처음으로 독수리를 발견한 날, 나는 그 사실을 안나와 샘에게 자랑하듯 말했지만,
안나는 예의 그 심드렁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고, 샘은 끝까지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내심 독수리가 보고 싶었던 샘이 내 방으로 찾아와 며칠인가 나와 같이
하늘을 바라보기는 했었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질렸다는 표정으로 다시 다른
놀이거리를 찾아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오히려 심드렁한 표정의 안나는 내 방에 있는 책을 빌리려 왔다가 우연히 창밖으로
날아가는 독수리를 볼 수 있었다. 노크를 하고 방으로 들어온 안나를 무시하고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내가 독수리를 발견하고 소리를 친 탓이었다. 매우
우연한 일이었고, 기가 막힌다면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나도 봤어, 독수리.”
안나의 증언에 샘은 분한 표정으로 다시 내 방에 며칠간 찾아왔지만, 이내
질려버리고는 또 괜한 시간을 낭비했다며 화를 내었다.
“너도 독수리처럼 날고 싶어?”
빌려갔던 책을 돌려주러온 안나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
대답을 마친 나는 안나의 얼굴에서 약간의 불안감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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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소설 _ 나의 작은 종이비행기
아마도 내가 독수리처럼 날 수 있다며 멀리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든 비행기가 저 독수리보다 훨씬 더 잘 날았으면 좋겠어.”
“그깟 종이비행기가? 말도 안 돼.”
안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종이비행기를 만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나는 자신있어할 만큼 대단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냈고,
그걸로 콘래드에게 시합을 요청했다.
언제부턴가 콘래드와 나는 서로 따로 만든 비행기를 가지고 누가 만든 것이 더 멀리
나는지 시합 같은 것을 하고는 했는데, 그 당시까지는 아쉽게도 내 전패였다.
“아주 멋진 비행기구나.”
이미 종이비행기라고 부르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이상한 모양으로 변한 내
종이비행기를 본 콘래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으며 나의 시합 요청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리고 내가 만든 그 멋진 비행기는 콘래드가 만든 비행기보다 정확하게 내 걸음으로
열세 걸음정도 더 멀리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마침내 얻은 첫 승리였던 것이다.
“제이크, 네가 만든 종이비행기가 내 것보다 훨씬 멀리 날았으니까 주는 선물이다.”
나와의 시합에서 진 콘래드는 바로 다음날 커다란 상자를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내가
선물을 받는 것을 본 샘은 자신도 선물을 달라며 양아버지를 졸랐지만, 콘래드는 이건
제이크에게 주는 상이라며, 샘에게도 억울하면 멋진 종이비행기를 만들어오라는
대답을 했다. 나는 그 순간 나에게 윙크를 하는 콘래드를 보며, 웃음을 참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물론 샘이 또 종이비행기를 만들겠다며 며칠인가를 몰두하다 다시 질려버렸고, 늘
그렇듯이 친구를 만나러 밖으로 나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다.
커다란 선물 상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온 나는 콘래드에게 받은 선물을 풀어보고는
놀라고 말았다. 그 상자 안에는 고무 동력기와 글라이더 세트가 들어 있었고, 나는
새로운 장난감에 환호성을 질렀다.
설명서대로 조립을 한 것만으로도 고무 동력기와 글라이더는 내가 만든
종이비행기보다 훨씬 빠르고 높게 날았고, 그 순간 내가 느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유레카!”
언젠가 안나가 나에게 설명해줬던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가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그
단어가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그 날 이후로 종이비행기를 만드는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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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동력기와 글라이더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고무동력기는 뱅뱅 감긴 고무의 힘으로 프로펠러를 돌리는 힘에 의해 날아갔고,
글라이더는 마치 우리 동네 위를 가끔씩 날아가는 독수리처럼 바람을 타고 활공을
했다. 단지 날개의 위치나, 꼬리 날개의 각도 등을 변경하는 것만으로도 고무 동력기와
글라이더의 비행거리가 달라졌고, 나는 기껏 만들어 놓은 고무동력기와 글라이더를 몇
번이나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일을 반복했다.
결국 조립과 분해, 재조립의 과정을 견디다 못한 나무가 부러져버리면, 나는
콘래드에게 부탁해 새로운 글라이더와 고무동력기를 얻었고, 양아버지는 그런 나의
부탁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가끔씩 콘래드는 글라이더와 고무동력기 말고도 부탁한 적이 없는 프라모델들을
사오기도 하였는데, 그것만큼은 공평하게 샘의 것도 들어있었다. 나는 그 작은
모형비행기를 만드는 것에도 꽤 흥미를 보였지만, 샘은 아니었다.
“난 손이 커다라니까, 이런 작은 건 못 만들어.”
그래도 콘래드의 기대를 저버리기는 싫었는지, 샘은 늘 양아버지가 사다준 프라모델을
나에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관심도 없는 비행기들을 보란 듯 방에 전시해놓기도
했다. 그건 샘이 음악에 빠지기 전까지의 일로, 언제부턴가 각종 음악 앨범들을 사
모으기 시작한 샘은 방이 좁다며, 그때까지 모아놓은 모형비행기들을 다 내 방으로
옮겨놓았다.
결국 내가 만든 프라모델과, 샘이 가지고 있던 프라모델들까지 합쳐놓은 내 방은 마치
작은 비행기 전시장처럼 꾸며져 버렸고, 나는 그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오타쿠.”
안나는 어디선가 그 말을 주어 듣고 와서는 나를 놀리듯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고, 그건
금세 샘에게도 전염이 되었다. 그 당시 샘과 안나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제이크가
아니라 오타쿠였지만, 난 전혀 상관이 없었다. 나는 내 방에 가득 늘어서 있는
모형비행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그건 안나와 샘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종이비행기에서 고무동력기로 관심을 돌린 나는 결국 지역에서 열린 모형항공기
대회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얻어 상을 받았다. 사실 상을 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그저 양아버지와의 종이비행기 시합을 했던 것처럼 시합을 하고 싶어 나간
것뿐이었지만, 샘과 안나의 오타쿠란 소리는 그날로부터 쑥 들어가 버렸다. 물론 가장
기뻐한 것은 고무동력기를 선물해준 나의 양아버지 콘래드였고, 콘래드는 상을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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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소설 _ 나의 작은 종이비행기
당사자인 나보다도 훨씬 더 기뻐했다.
그 후로도 나는 비행기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모형항공기 대회에서 상을 받은 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콘래드를 본 이후로 나는 더욱 비행기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 덕분인지, 핑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늘
수업시간에도 새로운 비행기 설계도를 궁리할 뿐이었다.
안나는 그 당시 나와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한 학년이 아래임에도 늘 일등을 놓치는
법이 없어 학교의 유명인이었다. 때문에 나는 종종 안나와 비교 대상이 되는 불행을
겪고는 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잘하는 게 있는 법이야. 다만 안나가 잘 하는 것과 네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다른 것뿐이란다, 제이크.”
어머니인 수잔은 늘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콘래드만큼은 끝까지
나를 믿고 응원을 해 주었다. 비록 공부를 하지 못해도 잘 하는 것이 있을 거라는
콘래드의 말처럼 나는 비행기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고무동력기에 질린 나는 RC 항공기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가지
부품만 구해지면 리모컨으로 조종 가능한 비행기나 헬기 등을 만들 수 있었다.
거기에는 엔지니어인 콘래드의 도움이 컸다. 전자기판 같은 부분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생기면, 콘래드는 밤을 새서라도 나에게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인가 간단한 파트타임 일을 하며 집에서 RC비행기나
RC헬리콥터 등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할 때쯤, 우리 가족은 너무나도 크게 변해 있었다.
샘은 뉴욕에서 꽤 유명한 작곡가가 되어있었고, 안나는 천재들만 모인다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배우는 중이었다. 킹 카운티의 작은 마을의 집에는 수잔과 콘래드, 그리고
나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변해있었다. 변한 것은 내가 아니라 샘과 안나였지만, 나는 그것에 커다란
불안감을 가졌다. 분명 나 혼자만을 생각한다면 비행기를 만들고 언제든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행복한 삶이었지만, 안나와 샘을 생각하면 초조함이 생겨났다.
가끔씩 집으로 돌아오는 샘과 안나는 늘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난 그들의
걱정거리였다. 오직 콘래드만이 괜찮다고 날 안심시켜주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아 나에겐 조금의 위로도 되지 않았다.
“자신을 가져, 제이크.”
나는 콘래드보다도 더욱 나를 믿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지역의 커뮤니티 칼리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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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소설 _ 나의 작은 종이비행기
알아봐 준 것도 콘래드였다. 나는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초조함에 쫓겨 그가
소개해준 칼리지를 아무 생각도 없이 다니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콘래드가 알아봐 준 칼리지는 항공기에 대한 공부를 하는 곳이었고, 목적도
없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나는 차츰 새로운 지식을 쌓는 일에 흥미를 느껴가기
시작했다.
비행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막상 새로운 것을
배우다보니, 내가 아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건 종이비행기도, 고무동력기도,
RC도 아닌 진짜 사람을 태우는 비행기였다.
백지상태에 가까웠던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빠르게 많은 것들을 습득해나갔다.
거기에는 그때까지 내가 느낀 초조함도, 그리고 지금껏 혼자 연구해온 모형비행기들도,
그리고 비행기자체에 대한 동경심도 모두 도움이 되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걸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순수한 호기심으로 많은 것을 배우는 동안 2년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결국 졸업을
할 당시의 나는 처음 입학을 할 때와는 달리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시애틀에 위치한 B사에 인턴으로 들어갈 기회도 얻게 되었다.
인턴 과정을 마치고 B사에 취업을 하던 날, 나는 날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가족들
사이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콘래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울음을 터트려보였고, 샘과 안나는 그런 나를 놀리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분명 진짜 가족들보다 더 소중한 가족을 얻었고, 그건 무척이나
커다란 행운이었다.
막상 B사에 입사를 한 이후의 삶은 생각처럼 그렇게 즐겁지 않았다. 세상일은 정말
생각하는 것처럼 잘 풀리지 않는 법이었다. 입사할 당시만 해도 꿈에 부풀었던 나는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회사를 다니는 것에 심각한 회의를 느꼈다.
물론 수입은 파트타임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좋았고, 샘과 안나의 걱정스러운 눈길을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정작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처음 B사에 들어설 때, 나는 커다란 즐거움을 느꼈다. 격납고 안으로는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커다란 비행기들이 자리해 있었고, 나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 비행기에 여기저기 붙어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내 방에 있는 작은 프라모델과는 달리 진짜 비행기였다. 나는 그제야 내가 꿈을 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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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소설 _ 나의 작은 종이비행기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비행기를 만드는 회사에 입사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언젠가는 어릴 적 안나에게 말한 것처럼 독수리보다 더 빠르고 멋지게 날아가는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역의 칼리지를 졸업한 나에게 배당된 일은 항공기의 정비일일 뿐이었다.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큰 꿈은 그저 꿈일 뿐이었고, 나는 주어진 매뉴얼에 따라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것이 전부였다.
정비라고해도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저 매뉴얼에 따라 이 부품이 어디에 잘
연결되어 있는지, 아니면 이 부품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일인
것이다. 어쩌다 문제가 생기거나 하더라도 그 일은 순식간에 내 손을 떠나 담당
정비사에게 넘어가기 바빴다.
즉, 내가 그동안 공부해 온 것들이 지금 하고 있는 정비 일에 사용되는 일은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내가 속한 팀의 담당 정비사는 윌슨 씨로, 내 양아버지인 콘래드보다 조금 젊어 보이는
외모의 사내였다. 윌슨 씨는 B사에 입사한지 20년차의 엔지니어로 많은 정비사들의
존경을 받는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당시 나의 눈에는 의욕 없는 표정으로 사는 그저
사람 좋은 아저씨로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늘 사건은 방심하고 있을 때 찾아오는 법이었다. 내가 한참이나 그렇게 회사에
대한 회의를 느낄 당시, 윌슨 씨가 갑자기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제이크, 네 파트 제대로 확인한 거야?”
늘 사람 좋은 미소만 짓고 있던 윌슨 씨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화난 얼굴로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그 당시 나에게 주어진 파트를 다 확인하고는 격납고 한쪽에 앉아 쉬고
있었고, 그저 갑자기 화를 내는 윌슨 씨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네, 끝냈는데요.”
내 대답에 가뜩이나 노기가 서린 윌슨 씨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버렸다. 윌슨 씨는 내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장갑을 낀 손으로 내 얼굴을 가격했다. 갑작스러운 일격에 맞은
나는 볼품없는 모습으로 비명을 지르며 격납고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내 비명소리가 꽤 컸던 탓인지, 아직 정비를 마치지 못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나와
윌슨 씨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는 창피한 마음과 억울한 생각에 그저 바닥에 주저앉아
윌슨 씨를 노려볼 뿐이었다.
“확인을 했어? 그럼 이건 뭐야?”
윌슨 씨는 손에 들고 있던 부품 하나를 내 앞에 보이며 소리쳤다. 그건 내가 귀찮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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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소설 _ 나의 작은 종이비행기
이유로 대충 확인하고 넘어간 꼬리 날개 부분의 아주 작은 부품으로, 평상시 문제가
생기는 일이 거의 없어 확인을 대충 하고 넘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이거 봤어? 그럼 이상이 있는데 왜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지?”
윌슨 씨의 말에 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태만하게 일을 한 것이 모두
앞에서 밝혀진 것 같아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래도, 그게 그렇게 중요한 부분도 아니고…….”
내 생각과는 달리 입에서는 엉뚱한 변명이 튀어 나가고 있었다. 맙소사, 나는
선생님에게 잘못한 일을 들킨 초등학생처럼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정말로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증거로 윌슨 씨의 얼굴이 다시 구겨지고 있었다.
“뭐? 중요하지 않아?”
윌슨 씨가 소리를 지르는 탓에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판단해? 뭘 안다고? 이런 사소한 것 때문에도 얼마든지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거 몰라? 제이크, 넌 대체 이 정비라는 걸 왜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윌슨 씨의 말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묻고 싶었다. 정비를 왜 하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제이크, 이 비행기 좌석이 몇 개야?”
“276석입니다.”
나는 윌슨 씨 너머로 보이는 B777-300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일등석 6석, 비즈니스
53석, 프리미엄일반 34석, 일반 182석. 지겹도록 외운 숫자였다.
“잘 알고 있네. 그럼 그 273명의 생명이 네 손에 달렸다는 건 생각해 본거야? 그리고
비행기에 타는 승무원들과,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들까지 생각하면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는 알고 있는 거야? 네가 그들의 삶을 망칠 자격이 있나?”
나는 윌슨 씨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에게는 그저 지루한 매뉴얼일
뿐일지라도 누군가의 생명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었다. 만약 저 비행기에
콘래드나, 안나, 샘, 수잔이 탈 것이었다면 분명 이렇게 지루한 표정으로 살펴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그 날 이후로는 회사의 누구보다도 윌슨 씨의 말을 잘 따랐다. 사소한 정비도
허투루 하지 않았고, 확인을 끝낸 것도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는 했다. 그 이전의 정비
일이 지루했다면, 윌슨 씨의 그 말을 들을 이후로는 정비일은 나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결국 그렇게 일을 하던 도중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입사 당시부터 비행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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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소설 _ 나의 작은 종이비행기
정비하는 것보다 만드는 일에 더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윌슨
씨의 도움 덕분이었다.
나는 회사의 도움을 얻어 비행기 설계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일하는 틈틈이 관련 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공부를 해나갔고, 가끔 막히는 부분은 윌슨
씨의 도움을 얻었다. 윌슨 씨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비행기에 대한 전문성을
지니고 있었고, 가끔 그가 막히면 그의 인맥을 통해서라도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지역 칼리지를 다닐 때와 같이 나는 비행기에 관한 지식만큼은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습득해 나갔고, 거기에 대한 흥미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또 예전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차 내가 태어난 나라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다. 대신 그
자리에 새로 배운 지식들로 가득 차버렸던 탓이었다. 처음 비행기를 좋아하기 시작한
계기가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었다지만, 내가 정비팀에서 연구팀으로 이전을 할 즈음에
나는 한국에 대한 것을 완전히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연구팀에서의 일은 내가 꿈을 꾸던 일이었다. 나는 실제로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고,
어린 시절 나를 비웃었던 안나에게 당당히 독수리보다 훨씬 빠르게 나는 비행기를
만들고 있노라고 자랑도 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삶에 만족했고, 행복했다. 그 행복함 때문에 과거의 불행한 기억은 아예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당시 내가 입양아라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렇게 몇 년이란 시간이 다시 흐르고, 나는 윌슨 씨와 만나는 일을 제외하고는
격납고로 가는 일이 점점 드물어졌다.
“제이크, 너한테 보여줄 것이 있어. 빨리 격납고로 와.”
갑작스러운 윌슨 씨의 호출에 격납고로 향한 나는 그곳으로 들어오는 B777-300ER
기의 부품들을 바라보며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내가 연구하고, 내가 만든
비행기였다. 나는 격납고 안에서 커다란 비행기의 동체가 하나 둘 이어지는 것을 보며
그렇게 감격하고 있었다.
“윌슨 씨, 고마워요. 이걸 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는데.”
“무슨 소리야,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윌슨 씨는 웃으며 계속 보잉기의 조립과정을 보라고 눈짓을 했다. 어느새 비행기는 제
모습을 거의 다 찾아갔고, 이제는 도색 작업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꼬리 날개 부분을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멋진 태극 마크가 새겨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윌슨 씨가 나를 부른 이유를 깨달았고, 또 기억 저편에 잠들어있던
내 나라, 한국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너에게는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불렀어.”
윌슨 씨의 말에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저 고맙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돌아보면, 참
오랜 기간 동안 떠나온 땅이었고, 언제든 갈 마음만 있었다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담당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할 거란 생각은 지금까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고, 그건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나는 다음날로 B777-300ER기의 노선을 확인했다. 그 비행기는 운이 좋게도 시애틀
터코마 공항에서인천 공항을 향해 첫 출항을 할 예정이었고, 나는 어렵지 않게 그 표를
구할 수 있었다.
휴가를 내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갑자기 한국을
가보겠다는 말을 가족들에게 꺼내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나, 한국에 가볼까 해.”
결국 수잔의 생일 때문에 모인 가족들 앞에서 그 말을 꺼냈고, 수잔과 콘래드, 샘은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는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를 했지만, 안나만큼은 끝까지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샘은 태어난 곳이 미국이었기에 딱히 자신의 나라를 갈 일이 없었지만, 안나는
이상할정도로 자신이 태어난 인도에 관련된 것을 멀리했다. 그만큼 안나에게는 우리의
가족이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난 알고 있었다. 지금 가족이야말로 안나의 진짜
가족이었고 미국이야말로 안나의 진짜 고향이었다.
‘너도 독수리처럼 날고 싶어?’
나는 어린 시절 안나가 나에게 물었던 말을 떠올렸다.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안나는
내가 한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꼭 가야해?”
“아니, 하지만 가고 싶어.”
안나는 결국 나에게 못 이기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나에게도 안나만큼 가족이 소중했지만 그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법이 다를 뿐이었다. 그건 나도, 그리고 안나도 알고 있었다.
“꼭 돌아와야 해. 약속.”
나는 안나와 어릴 때처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어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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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소설 _ 나의 작은 종이비행기
적에도 둘이 이렇게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던 적은 없었다.
비행기로 연결된 게이트를 통과하면서 안나의 얼굴이 떠오른 나는 피식 웃음을 보였다.
사실 돌아오지 말라고 해도, 돌아와야 할 터였다. 여섯 살의 나에게 미국이 낯선
땅이었다면 지금은 한국이야말로 나에게는 완전히 미지의 땅이었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선 나는 좌석을 확인하고는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비행기의 꼬리
부분에 위치한 좌석이었는데, 일부러 그쪽 자리를 구한 것이었다.
기분 좋은 음악이 흐르고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창문 너머로는 연신 빗방울이 부딪쳐
흘러내렸지만, 그건 그것대로 운치가 있어보였다.
천천히 활주로로 이동하는 B777-300ER기의 움직임을 느끼며,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여섯 살 때 미국으로 오던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비행기를 탄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건 꽤나 웃기는 일이었다.
내 기대에 걸맞게 비행기는 빗속을 뚫고 활주로를 달려 하늘로 날아올랐다. 생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질적인 감각이 내 몸을 감쌌고, 그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기쁨으로 돌아왔다.
빗방울이 흐르는 창문 밖으로 점차 작아지는 시애틀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 마을 위를
날아가던 독수리가 보았을 풍경이었다.
‘아, 이렇게 작게 보이는 구나. 이렇게 자유로운 기분이구나.’
나는 그 순간 어린 시절 꿈을 꾸던 하늘을 날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수첩 하나가 들려
있었고, 내 손은 수첩 한 장을 쭉 찢어내어 비행기를 접어가고 있었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울던 날 콘래드가 날 위해 접어주었던 작은 종이비행기와 똑같은 모양의
비행기였다.
 
끝.
[우수상]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서
수필부문 / 일반부 / 박창규
생환 장구를 걸치고 항공기로 걸어가는 길이 항상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발을
내딛어 걷다보면 보조동력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막을 찢어버릴 듯
퍼지는 소리.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이어플러그를 끼고 주위를 잔잔하게 만든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고요함이다. 숨을 크게 한 번 내쉬면 이때부터가 시작이다. 앞에는 양
날개에 4개의 프로펠러를 달고 있는 항공기가 날 바라보고 있고 나는 그 항공기의
계단을 올라 바다로 나간다.
비행기를 타면 배를 탈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바다를 볼 수 있다. 낮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대에 바다에서는 노을을 보지만 하늘에서는 구름에 비친 노을을 볼 수
있다. 전자가 세상이 빨간색에서 점점 주황색으로 변해가는 색채 적 강렬함을 남기는데
반해 후자는 뿌연 주황색 빛이 맘속에 퍼지며 감정적 인상을 심는다. 노을이 구름에
가려 보이는 것이다. 무엇이든 가려지면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한 것임에도 구름에
가려진 노을을 볼 수 있다는 사실과 육지와는 다르게 구름과 노을을 일직선상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놀랍다. 거기다가 넓게 퍼진 주황색 빛은 진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더 이상 자세히 볼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맘속에 떠오르게 만든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시정이 뚝 떨어진다. 멀리 봐봐야 1KM 밖을 내다 볼 수 있을
뿐이다. 항공기가 1KM를 지나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승무원들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 속에서 비행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특히나 갑작스럽게 뇌우를
마주치는 경우도 있다. 30KM 밖에서 내리치는 뇌우도 뚜렷하게 보인다. 간혹 모든 걸
잊고 뇌우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너무나도 밝은 흰색 기둥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뇌우는 흰색의 강렬한 울림으로 우리들 눈에 말을 건다. 나 아름답지
않느냐고, 나를 바라봐 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즈음엔 우리들 머릿속에 경보가
울려대고 있다, 위험하다고 말이다.
어느 하루는 날이 정말 맑았다. 그래서 난 수mile 밖에 있는 울릉도를 볼 수 있었다.
교과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여러 번 보게 되었을 때 즈음엔 더 이상 감흥이 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울릉도 근해에 가면 창문 가림 막을 걷고 울릉도 위치를 확인하곤
한다. 2009년경에 가족과 함께 들렀었던 기억도 새로이 되살려 보았다. 누나를 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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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 수필 _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서
걸었던 해안 길과 함께 먹었던 오징어 회를 생각했다. 항공기에서 내려 잠시나마 저
섬에 발을 딛고 추억을 회상하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울릉도엔 활주로가 없었을 뿐더러
우리가 내릴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바다를 돌아다니며 초계 활동을 한다. 그렇지만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학생으로서 공부 할 때에는 머릿속 생각이기에 모든 것이 쉬워보였다. 적 잠수함을
금방이라도 찾아내어 ‘적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세력을 확인하였음’이라는 통신을
내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다엔 수많은 선박과 어선 그리고 정체 모를
쓰레기가 너무 많다. 그 많은 것들을 재치고 바다 속으로 숨어 버린 잠수함을 찾는 일은
사막 속에서 바늘 찾는 것과 같다. 그 일을 우리 승무원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 잠수함이 아래로 내려올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바다를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전 오후 야간을 가리지 않고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고 바다의
감시자가 되어 언제나 하늘 위에 떠있다. 일출이 찾아오는 시간에는 사라지는 별빛과
떠오르는 태양을 함께 보게 된다. 날이 바뀌었음을 대한민국의 그 누구보다 먼저 알게
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엔 새벽녘의 이슬이 맺혀있는 자동차를 탄다.
뉴스에서 북한이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미사일 기술을 획득 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물론 발표한 것과 다르게 사실이 아닌 측면도 있었고 사실이더라도 차후 몇 년 동안 더
다듬어야 하는 기술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때 내가 군인임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항공기를 탈 때마다 오늘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 걱정이
우리의 주 적 때문에 더 커진 것이다.
누나가 살아있었으면 내게‘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해’라고 했었을 거라
생각한다. 평상시에도 내 걱정이 많았는데 내가 비행을 할 때마다 어떤 걱정스런 말을
했었을 지도 생각해본다. 동생이 힘들어할까봐 자기 병 걸린 것도 알리지 말라고 했던
누난데 내가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하면 밤잠을 잘 수는 있으려나. 누나가
노르웨이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나를 불렀었는데, 그때 내가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해본다. 만약 내가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갔더라면 나를
반겨주면서 이렇게 말했겠지.‘오는 동안 괜찮았니? 기내식 뭐 먹었어?’
2010년에 베트남을 가며 처음으로 3시간 이상 비행기를 탔었다. 몇 시간 이상 타야
나오는 진 모르겠지만 그 날 기내식을 먹어봤다. 승무원 누나가 메뉴를 물었고 나는
고기가 들어간 반찬을 선택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늘에서의 식사는 맛과는 별개로
특별했고 내 삶에 의미 있는 날이라 생각했다. 여행을 끝낸 후 집에서 밥을 먹을 때
누나가 어떤 기내식을 먹어봤냐고 물었다. 그땐 귀찮은 듯이 대답했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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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 수필 _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서
그때의 경험 때문일까 나는 자꾸만 비행 전에 내가 먹는 음식들의 이름을 되새겨 본다.
새우볶음밥, 참치김밥 그리고 카레볶음밥. 때론 사소한 추억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때가 있나 보다.
비행이 식사 시간과 겹치면 도시락을 먹는다. 물론 항공기의 진동 때문에 토할까봐
밥을 안 먹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위에 부담이 가지 않는 메뉴를 시키고 고르고
고르다 보니 새우볶음밥이 내 주식이 되었다. 생새우를 먹진 못하지만 볶음밥 속에
들어간 작은 새우는 씹기에 좋아 괜찮다. 하지만 먹는 건 일단 고역이다. 항공기가
민항기보다 훨씬 낮게 날기 때문에 하늘에 떠있음에도 해풍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먹는 걸 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전 내내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서글프게도 속이 좋지 않을 때마다 생각나는 건 누나다. 위에 생긴 암 때문에 떠나기
6개월 전부터는 먹고 싶은 것도 먹지 못했던 내 누나가 생각난다. 어느 날은 통닭이
하도 먹고 싶다기에 닭을 시켜줬는데 먹다가 토하는 모습을 보고는 내가 너무나도
한심하게 생각됐다. 누나가 잠들고 나서야 혼자 샤워를 하면서 울었는데 그때 흘린
눈물을 생각하면 솔직히 속 좀 안 좋은 건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힘들어지는 건 똑같기에, 이 작은 아픔에도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누나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미안함 때문이지 누나와 함께 비행을 하고 싶단 생각을 한다. 내가 힘들어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라는 핑계를 직접 설명하고 싶다. 내가 누나와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
하늘 위로 올라와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말도 하고 싶고 그 말을 듣고 누나가 내 잘못들을
용서해 주었으면 한다. 타인의 아픔은 가족이라도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법이다.
누나에게 누나 아픈 거 별거 아니라고 이야기해대던 내 모습이 속이 안 좋을 때마다
한심하게 떠오른다.
잦은 후회에도 삶은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간혹
비행기가 하늘로 뜰 수 있는 원리를 알고 있음에도 그 놀라움에 감탄을 멈추지 못할
때가 많다. 육중한 철 덩어리가 하늘에 떠있는 사실 자체가 놀랍지 않으면 그 무엇이
놀랄 수 있을까. 일주일에 몇 번이고 아무 일도 아닌 마냥 하늘에 오르내리는 항공기를
보면서도 나는 매일매일 이 사실이 경이롭다. 베르누이의 정리라는 유명한 공식이
있다는 것도, 끊임없이 소모되는 연료 덕택에 떠있다는 사실을 앎에도 항공기가 하늘에
떠있다는 것 자체가 주는 놀라움에 나는 무지한 인간이 된다.
하지만 그 무지한 인간이 수많은 SF영화를 보고, 지금의 항공기보다 더 좋은 항공기가
나오길 바라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라 여긴다. 영화 스타트렉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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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 수필 _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서
바다에 잠수 할 수도 있고 우주를 마음껏 여행하는 항공기가 멀지 않은 미래에
개발되길 꿈꾼다. 시공간을 도약할 수도 있고 수만 광년 멀리 떨어진 행성에 다다를 수
있는 항공기가 개발되길 꿈꾼다. 공중에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내가
근무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남을 앎에도 나는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놀라운 기적을
매일매일 생각하고 있다. 특히 스타워즈에 나오는 레이저 건이나 수직 이착륙기는 나의
로망이자 많은 이들의 바람일 것이다.
항공기에서 근무하는 게 멋지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은 영화‘진주만’을
보면서였던 것 같다. 주인공이 조종하는 비행기를 보며 자유로움을 느꼈고 어떤
면에서는 그 자유로움이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해주는 특별한 권리라 느꼈다. 다른
교통수단들보다 월등히 빠르게 움직인다는 사실이 가장 매력적인 점이고 교통 정체가
없다는 점이 두 번째 장점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관제사들과 나누는 대화를 듣는 다는
게 승무원으로서 묘한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
아버지는 내게 자긍심을 가지라고 했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수많은 아르바이트와
직장에서의 일 보다 지금의 일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러기에 충분한
자긍심을 가져도 된다고 하셨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해상 초계기를 타고
있다고 하면 부러워하고 어떻게 내가 타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기도 한다. 그럴 때 마다
나는‘운이 좋아서’라고 답했지만 실제로 내가 운이 좋아서 이런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장교교육대대를 수석으로 수료하며 임관하면서 나는‘삶은 그 어떤 방향으로도
흘러갈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삶을 통제하는 자만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나는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이끌어가기 위해 많은 교육을
수료했다. 해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생환훈련부터 시작해서 조종훈련, 장비 숙달 훈련
그리고 전술 훈련까지 여러 단계를 거쳤다. 그리고 마침내 정승무원이 되었을 때
짜릿한 쾌감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운이 이 자리를 가져다 준거보단 내 노력에
기인한 결과라고 생각했으며 나는 노력함으로서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내 발목을 잡은 건 누나의 운명이었다. 그녀가 나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는 건 많은 이들이 증명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누난 뜻하지 않은 병으로
금방 삶을 놓아야 했으며 그건 그녀의 의지로 해결될 수 있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을 이런 방식으로 잃어보았기에 내 삶을 통제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을 자주
상실하였고 그러기에 나는 매번의 비행이 두려웠다. 아무리 내가 많은 준비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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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 수필 _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서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의하여 운명이 결정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다에서 낙뢰를 보는 게 무서웠고 낮은 시정 하에서 비행하는 건 더욱더
무서웠다. 내가 비행 나갈 때 북한 잠수함들이 나와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고 하나하나의 행동이 나를 두려움으로 엄습했다. 그 두려움의 태반은 부모님에
대한 걱정이고 누나에 이어 나까지 잃으면 얼마나 상심하실까 하는 생각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래서 비행을 나갈 때마다 안심 시키는 전화를 한다.‘아무 일도
없어요.’,‘오늘 울릉도 보고 왔는데 예전 생각 많이 났어요. 한 번 또
가요.’부모님에게 하는 말이 나를 안심시키는 말이었다.
보이지 않는 적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보이지 않는 적을 찾아 헤매는 건 많은 인내심을
요구했다. 항상 준비해야 했고 그런 점에서 나는 조금 기준 미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중이다. 그러면서도 가끔 창문 가림 막을 젖히고
바다를 바라본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그 어느 곳에서 보는 것보다 넓어 보인다.
이 넓은 바다 위에 떠있는 날, 누나가 위에서 바라보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대신 걱정해주겠지. 바다가 아무리 넓어도 나를 보고 걱정하고 있을게 분명하다.
그녀에게 나는 보이는 존재이기에 난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그리고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찾아 바다를 비행할 것이다.
.
[장려상]
내 첫 여행 프랑스, 그리고…
수필부문 / 학생부 / 이원빈
"손님 여러분 이제 곧 이륙하겠으니 안전한 이륙을 위해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Ladies and Gentlemen, soon the flight will lands, please take your
seat belt for the safe landing.. Monsieur et Mademoiselle, l'avion sera decolle,
S'il vous plait portez votre ceinture de securite pour bon decollage." 안전벨트
착용에 대한 3개 국어가 빠르게 지나간다. 한국어, 영어 그 다음에는 프랑스어일
것이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니까. 나는 프랑스어를 배우는 중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나를 원망하며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나는 지금 대한항공 A-380기와 함께 파리로 내 생애 첫
비행기 여행이자 첫 해외여행을 떠나는 중이다.
내가 이 비행기에 앉아있는 이유를 회상해보면 그것은 작년 오월이었을 것이다.
동아리에서 신청한 국제관련 강연으로 인해 펜팔을 시작한 이후로 내 삶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독도나 김치, 문화유산 등 한국의 것을 외국에 널리 알리며 기존에
존재하는 한국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내용인데 강연을 보던 중 펜팔에
관한 홍보방법이 나왔다. 그 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펜팔은 과거에 외국에 사는 또래
청소년과 편지로 그 나라의 소식을 주고받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펜팔에
대해 듣게 된 이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펜팔 사이트
중‘Student of the world'란 사이트에 가입을 해 프로필을 올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강남스타일로 세계를 제패한 가수 싸이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고 서서히 EXO와 같은 아이돌 그룹도 해외로 진출함에 따라 프로필을
올리자마자 수십 통의 펜팔을 원하는 해외의 친구들이 메일을 보내왔다. 처음 온
메일은 프랑스인이었다. 차츰 대화를 한 후 나는 그녀가 프랑스에 사는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녀가 2000년대 초 동유럽
인종청소사건 때문에 프랑스로 이민을 오게 되어서 국제정치에 관심이 많은 내가 더욱
흥미를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프랑스에 대해서 특별히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바게트의 나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소위 예술의 나라, 파리,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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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알베르 카뮈같은 대문호 등. 나는 모든 프랑스인이라면 이런 것에 조예가
깊으며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알고 그녀와 대화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였다. 프랑스인으로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것은 한국인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이나 별반 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프랑스에
관한 관심을 촉진시켜주었다. 이후 내가 알고 있던 프랑스와 현지인이 알려주는
프랑스가 뒤섞이며 나는 이 나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또한
그녀가 알려주는 짤막한 프랑스어 표현에 흥미를 느끼고 있던 나는 프랑스어를
정식으로 배우기로 했고 프랑스라는 한국에서 7000km 떨어진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렇게 프랑스어와 프랑스를 배우며 이 후 사귄 다른 친구들과도 대화를
지속해 나가던 중 12월 크리스마스가 막 끝났을 즈음 펜팔친구들을 직접 만나고
프랑스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여행을 계획한 것이다. 첫 해외, 항공여행이라 보다
안전하기 위해 잘 알려진 대한항공을 이용하고 모든 사전준비를 철저히 하고 공항에
나갔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순위에 들어간다는 인천공항은 크기부터 달랐다. 곳곳에 청소차가
돌아다니며 이미 깨끗한 바닥을 더욱 깨끗하게 만들고 있고 세계 곳곳에서 온
외국인들, 분주한 승무원까지 모든 공항의 풍경은 여행 전부터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티켓을 수령한 후 근처에 있는 한식당에서 배웅하러 나온 가족과 함께 밥을
먹었다. 첫 비행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마치 모래알을
씹듯이 먹었지만 잘 소화시켰다. 이 후 남은 시간은 1시간 정도, 벤치에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공항 곳곳을 돌아다녔다. 큰 휴게실과 샤워실이 있다는 것에
놀랐으며 벤치마다 휴대폰 충전이 가능하다는 것도 꽤나 놀라웠다. 이후 시간이 되어
탑승수속을 밟기 위해 여권과 티켓을 손에 쥐고 캐리어를 끌며 짐 검사를 마쳤다.
짐 검사는 내 예상보다 간단했다. 캐리어와 가방을 바구니에 담고 코트에 핸드폰과
지갑을 속에 넣고 기계를 통과하면 되는 것이었다. 무사히 검사를 마친 후 도장을 받고
나왔다. 그 다음에 내 눈에 비친 풍경은 끝없이 이어진 면세점이었다. 살 것이 있어
보이면 사라는 부모님의 허락을 뒤로하고 비행기 시간 때문에 탑승 게이트로 떼지
못하는 발걸음을 했다. 이후 탑승게이트, 이미 먼저 온 사람부터 긴 줄이 있었다.
사람들은 다양했다. 청소년들, 가족여행, 프랑스로 돌아가려는 외국인, 대한항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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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해서 한국에서 환승해서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인들까지. 나는 축구나 야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중·고등학생 운동부 뒤에 줄을 서서 그들이 하는 프랑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로 식사예절이나 에펠탑 그리고 파리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파리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긴 하지만 이미 많은 정보를 인터넷이나 책으로 접한
후여서 흥미는 생기지 않았다. 이후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서서히 비행기에 탑승하기
시작하며 나도 승무원들에게 여권과 티켓을 보여주고 난 후 내 비행기로 들어갔다.
나중에 수화물을 따로 찾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일부로 기내용 캐리어를 장만했기에
캐리어를 위의 짐칸에 올려놓고 가방은 밑 좌석에 넣어둔 후 안전벨트를 차고 조용히
이륙하기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비행기는 컸다. 3-4-3의 좌석배치가 되어있었고 각
좌석마다 개인용 모니터가 하나씩 달려있었다. 친절한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나는 우측
창문에서 통로부분에 해당하는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남은 자리가 하나둘씩 채워져
가고 내 두 옆자리는 앞서 말한 한국에서 환승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인 두 명이
일본인 특유의‘스미마셍’을 연발하며 앉았다. 일본어를 못하고 상대측에서도
한국어를 못하기에 서로 예의와 매너를 지키며 있었다. 또한 나의 좌측 에는 중국에서
온 듯한 관광객 가족이 앉아서 중국어로 된 책을 읽고 있었으며 앞에서는 한국인
노부부가 자식을 만난다는 이야기를 옆 사람과 얘기하고 있었다. 이후 비행기가
출발한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이야기다. 우측 창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풍경은 활주로에서 본
공항 의 모습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가 탑승하기 전 우리의 짐을
실어주던 아저씨들이 우리에게 잘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안정적인
속도로 활주로를 주행하던 비행기는 속도를 내더니 점점 빠른 속도로 직선의 활주로를
질주했다. 앉아있던 내가 이륙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3...2...1... 비행기가
이륙했다. 한 순간 몸이 롤러코스터처럼 붕 뜬 기분이었다. 비행기는 좌우로 흔들흔들
거리다 이내 균형을 잡았는지 요동치지 않았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장시간의 기내생활을 해볼 수 있었다.
모니터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영화와 음악 그리고 각종 즐길거리가 있었다.
먼저 음악을 찾아보았다. 음악파일에는 클레식, 힙합, R&B, 샹송과 같은 장르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모차르트의 호른 협주곡을 들으며 여행가기 전
마지막으로 가서 사용할 프랑스어를 적어둔 수첩을 꺼내 읽었다. 인사말, 감사표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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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유용한 표현들을 비행기 안에서 배웠다. 1 시간 뒤 공부를 마치고 나는 친구들과
할 일과 앞으로의 일정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보았다. 내가 갈 곳은 파리, 스트라스부르
그리고 뮐루즈였다. 내 친구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기 때문에 드골 공항에 내린 후
스트라스부르를 먼저 들려야 했다. 드골공항에 5:00에 도착해 파리 동역에서 6:40
기차를 탄다, 이것은 처음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게 굉장히 도전적인 일이었다.
비행기가 예정시간 보다 먼저 도착하길 기대했다. 그 때 복도 끝 쪽에서 카트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기내식이었다. 처음에는 서양식을 골랐다. 처음 먹는 기내식은
맛있었다. 하지만 좌석 때문에 팔을 사용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다. 아무튼 다 먹고 난
후 그릇을 치우자 모니터를 또 활용하고 싶어졌다. 이번엔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부터 프랑스 영화까지 다양한 종류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본 영화는
메이즈 러너와 한 프랑스 요리영화 그리고 한국영화 한 개였다. 나머지 두 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는 2번째 기내식을 먹으면서 본 탓인지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프랑스로 이민을 오게 된 인도인 가족이 그곳에서 전통 레스토랑을 개업하며 기존의
미슐랭 별을 획득한 레스토랑과 경쟁한다는 이야기였다. 프랑스 영화답게 색상의
대비와 같은 화려한 면이 굉장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역시 프랑스어가 들리지 않아 한국어 자막으로 영화를 보아야 했다. 이렇게
있으면서 비행기에서 느낀 것은 때때로 화장실로 다녀오면서 장시간 앉아있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화장실은 아늑했다. 하지만 갈 때마다
잠긴 문을 다시 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힘들었지만 그것조차도 처음 해외여행이라
매우 설렜다. 이렇게 2번의 기내식과 간식이 지나고 1 시간 후 곧 이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이 때쯤 나의 얼굴은 11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은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기내에서 승무원들이 창문을 내리도록 하고 조명을 꺼 어둡게 만들어서 잘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지만 마음속에 가득 찬 설렘 덕분에 하나도 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후 다시 안전벨트를 착용해 달라는 안내방송이 3개 국어로 나온 후 점점
비행기가 하강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 때 처음으로 압력차에 의해 귀가
아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기내식 때 받았던 생수가 다행히 고통을 없애 주었다.
이후 프랑스 땅에 멈춘 비행기가 멈추고 승객들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12월 말
프랑스의 오후 5시는 생각보다 어두웠다. 이후 비행기에서 나가면서 마주친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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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은 내가 진짜로 외국에 와있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으며 나 혼자서 모든 것을 진행하고 처리해야한다는 압박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봐온 드골 공항이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본 후기처럼 앞서간
사람들을 따라가며 입국수속을 받았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프랑스의 입국수속은 엄격하리라고 생각한 것보다 실망스러웠다. 줄을 선후 도장을
받고 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절차에도 불구하고 미국보다 낮은 테러율을
가진 프랑스에 나는 새로이 놀랐다. 하지만 인천공항보다 더욱 분주해 보이는 드골
공항으로부터 앞으로 벌어질 여행을 설레게 해주었다.
입국 수속을 마친 후 쉴 새 없이 표지판을 따라 파리로 가는 열차인 RER을 타기 위해
분주히 캐리어를 끌었다. 티켓을 살 때 기계고장 때문에 영국인 아가씨와 이야기하며
겨우 티켓을 뽑고 RER에 탑승했다. 우리나라의 공항철도보다는 지저분해 보였다.
자리간격과 짐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충분치 않아 불편했다. 하지만 창 밖에 보이는
저녁의 일 드 프랑스의 모습을 구경하며 파리 북 역에 도착했다. 소매치기가 많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철저한 준비 때문에 나에게는 그런 것은 없었다. 북 역 앞에 나와서
보이는 첫 파리의 모습은 상당히 분주해 보였다. 거리에는 많은 오토바이 그리고 많은
행인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풍경을 감상하며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6시 10분,
기차가 출발하려면 30분이 남았고 동역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인종차별은
없을지, 식사는 나와 맞을지, 그동안 예약한 것들은 취소되지 않았는지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며 나는 기분 좋은 마음으로 두 블록의 거리를 힘차게 걸어갔다.
 
[장려상]
인간 동력 항공기
소설부문 / 일반부 / 강승체
대학 시절, 민기는 언제나 배트맨 로고가 가슴에 박힌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그렇다고 딱히 마블 사의 광팬인 것도 아니었다. 본인은 그냥 배트맨이 좋을 뿐이라고,
그렇게 덤덤히 말했다. 그래도 절대 티셔츠 하나를 돌려 입는 것은 아니다. 단지 똑같은
배트맨 티셔츠가 여러 장 있을 뿐, 그러니 위생적으로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라는
것이 민기의 주장이었다. 어디까지나 누군가 물어봤을 때 답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별났다.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고, 학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밖에서 뛰어 노는 쪽이었다. 특히 그 나이 때의 사고뭉치들이 그렇듯,
집에 돌아올 때면 팔다리에 상처가 나고 피가 말라붙은 채로인 적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부모님은 언제나 초조해하며 그의 귀가를 기다렸다고 한다. 민기의 배트맨 사랑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그는 우연찮게 채널을 돌리다 나온 영화에서 배트맨을 보고
그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배트맨 피규어를 모으고 코스튬도 샀다. 민기의 부모님은
밖에서 다치느니 장난감을 모으는 편이 더 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웬만한 요구는 다
들어주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그런 생각을 전혀 알지 못했던 민기는, 늦은 밤 집 앞
놀이터의 미끄럼틀 위에 올라간 뒤, 배트맨 망토를 두르고 공중으로 힘차게
뛰어올랐다. 머리부터 떨어졌으면 아마 죽었을 거야. 민기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 때 크게 다친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금
웃긴 이야기지만 나는 그의 비밀을 들었다는 이유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유쾌한 일이다.
나와 민기는 같은 공대를 같은 해에 입학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린 시절 그다지
사고뭉치도 아니었고, 눈에 띄게 특별한 점이 없는 아이였다.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받아내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만, 어느 학교 어느 반에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비밀 활동이 있었다. 그것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하늘 위의 비행기를 쳐다보는 일이었다. 내가 자란 곳은
경상남도 김해고, 집이 공항에서 멀지 않아 고개를 위로 들기만 하면 비행기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비행기들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어린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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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경외감을 주었다. 어떻게 저 무거운 쇳덩이가 그것도 수백 명의 사람을 태우고
하늘로 뜰 수 있는 것일까. 중력을 거스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이를 테면 종일
그런 탐구심에 묻혀 살았다. 그것은 아주 우연찮게 내게 주어진 특징이었다. 목포에서
태어났다면 배에 관심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성장 과정 중의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린 순간, 나는 이미 진로를 항공우주공학과로 정했던 것 같다. 확실한 결심이
서고부터는 학교생활에 조금 더 충실해졌다. 수학과 물리를 특히 열심히 했다. 그러다
쉬는 시간이 되면, 창가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그러면 여지없이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
한 여름 해가 쨍쨍히 오른 대낮에 대학교 캠퍼스를 걸어 다니는 건 괴로운 일이다. 수업
가는 길의 아스팔트는 자글거리고 옷은 금세 땀에 젖는다. 사람이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폭염인데도 수업은 언제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진행된다. 미국의 고등학교들은
대설이 내리거나 폭염주의보가 발생하면 그날은 휴교라고 하던데. 민기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우선 여기는 미국이 아닐뿐더러
고등학교도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저 에어컨이
빵빵한 교실만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야 박준우. 이번 방학 때 뭐할 거냐?”
에어컨 바람이 가득 흐르는 교실에 들어와서 민기가 나를 보며 물었다.
“글쎄. 특별히 할 일은 없는데. 그냥 집에서 빈둥거리지 않을까?”
“그러면 안 되지! 한창 젊을 때 뭐든 하는 게 좋다고.”
“왜 그러는데?”
민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이번에 우리 동아리에서 HPA하는 거 있잖아. 그거 그만둔다는 사람들이 생겨서
새로 뽑으려고 하거든. 너 그때 일반 학생 대상 리크루팅 때 못 와서 아쉬워했잖아.
그래서 이번에 혹시 같이 할 생각 있나 하고.”
HPA는 Human Power Aircraft(인간 동력 항공기)의 약자다. 민기는 비행기 제작
동아리의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몇 개월 전 인간 동력 항공기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동아리 사람들과 일반 학생들을 직접 뽑아 팀을 꾸렸다. 나는 그 팀에 지원할 생각이
있었으나 면접 전날 밤부터 몸살 기운이 있더니, 다음 날 꼼짝도 못할 정도로 앓아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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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버리는 바람에 지원하지 못했다.
“갑자기 중간에 들어가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건 걱정 마. 너도 어쨌든 항공과 학생이잖아. 꼭 동아리 사람이 아니더라도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할래.”
내가 말했다.
“좋아. 잘 생각했어. 아주 재미있을 거야.”
“따로 준비해야 할 건 없어?”
“응. 그냥 몸만 오면 돼. 아 그리고 방학 때 학교에 남아있어야 해.”
“그럼 여름 학기 기숙사 신청하자.”
“그럴 줄 알고 미리 내가 해놨지. 룸메이트 친구.”
민기가 씩 웃었다.
“이번엔 면접은 안 봐도 돼?”
“응. 급하게 충원하는 거라 따로 면접은 없고 동아리 애들끼리 괜찮은 사람 있으면
꼬셔 오기로 했어.”
민기는 제 몫을 다했다는 듯이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뜻하지 않은 기회에 조금 두근거렸다. 인간의 힘으로 하늘을 나는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부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그
이후로도 하늘을 나는 인간에 대한 전설은 수도 없이 많이 생겨났다. 물론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일 뿐, 실제로 비행에 성공했는지 까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수세기
전의 인간도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욕망이 후대로 전해져
내려와 비행기라는 것을 탄생 시켰다. 하지만 인간 동력 항공기는 우리가 타는 일반
비행기와는 또 다른 문제다. 엄청난 추력을 내는 제트엔진도, 프로펠러를 돌릴 모터도
없이 오직 인간의 힘을 동력으로 하여 하늘을 나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에 여름 햇빛을 가득 머금은 구름들이 몽실몽실 떠다니고
있었다. 구름은 아주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나는 턱을 괴고 그 속도를 가만히 눈으로
좇았다. 가슴 속에서 산뜻한 감동이 일었다.
*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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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이 되었다. 팀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공부도 해두고 기본적인 지식도 익혀가려
했는데 시간이 금세 지나가 버렸다. 별 수 없이 나는 조금 긴장한 채로 민기가 말해준
곳으로 찾아갔다. 기계공학동의 실습용 제작실이었다. 내부는 일반 교실의 두 배
정도로 넓었고 길쭉한 테이블이 여섯 개 놓여있었다. 그 곳은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
정리라고는 한 번도 하지 않은 듯이, 이를테면 아수라장이었다. 잘린 PVC 조각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접착제, 도면을 그렸던 종이들, 무작위로 구멍이 뚫린 발사우드
등이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어 준우 왔냐? 이리 와서 앉아.”
그나마 정리가 된 테이블에 민기와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있었다. 아마 나와 같이 새로
뽑힌 학생일 것이다. 그녀는 흰 무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굉장한
미인이라고까지는 못해도 피부가 맑고 또렷한 눈에 깊이가 있어 전체적으로 묘한
매력을 주는 여자였다.
“자 우리 인간 동력 항공기 팀과 함께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민기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나와 같이 들어온 여자가 마음에든 눈치다.
“둘 다 항공과라 어떤 프로젝트인지는 대강 알고 있을 테니 설명은 간단히 할게요.
우선 우리는 네 개의 부서로 나뉩니다. 프로펠러와 추력 계산을 담당하는 동력부,
항공기의 주익 설계를 담당하는 날개부. 항공기 운항을 관장하는 제어부, 동체의
구조적인 설계를 담당하는 동체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로젝트 전체를 이끄는
팀장.”민기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대회는 언젠데?”
민기가 말을 마치자 내가 물었다.
“대회는 9월. 정확한 날짜는 아직 미정이고, 장소는 전라남도 고흥에 있는 항공
센터.”
“기대 된다. 진짜 재밌을 것 같아.”
조용히 듣고 있던 여자가 말했다.
“당연히 그럴 거예요 누나.”
민기가 답했다.
“아, 우리보다 누나시구나.”
내가 말했다.
“응. 이래봬도 다음 학기부터 대학원생이야.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건데 말 편하게
해.”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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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간단한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 정식으로 함께 일한 게 된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 민기가 그녀와 나에게 가벼운 악수를 청했다. 그녀의 손을 잡을 때
민기는 대단히 기쁜 표정이었다.
그녀와 나는 날개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항공기 날개 제작은 CAD로 도면 작업을 한 후,
PVC를 기본 재료로 레이저 커팅을 통해 날개의 뼈대를 만든다. 그 후에 표면을 덮는
마무리 작업을 하면 된다. 누나와 나는 신참이다 보니 날개부의 팀원들에게 도움을
받아 서서히 작업에 적응했다.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그녀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아주 쾌활한 사람이었다. 말하는 데 거침이 없고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런 것은 분명 보통
여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그 외에도 그녀에게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추진’이라는 희한한 이름이었다. 이름이 외자인 것도 흔치
않지만, 더 놀랍게도 그녀는 로켓 추진 연구실에서 석사를 할 예정이었다. 물론
연구실은 로켓 엔진의 추진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름 따라 간다잖아. 누나는 쿨하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대학원 면접 때 가산점을 받았을 거라고도 했다.
*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방학 때는 밤샘 작업이 이어진다. 다음 날 수업이 없으니 자고
싶은 만큼 잘 수 있고, 공대에는 날 때부터 야행성인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여느 날처럼 새벽까지 일을 하고 누나와 함께 기숙사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있음에도 주위는 깜깜했다. 길옆으로 선 길쭉한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새벽바람에 흔들렸다. 어쩐지 으스스한 길이다. 추진 누나와
같이 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나는 전공이 로켓 쪽이면서 어쩌다 항공기 만드는 데 지원했어?”
나는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어 물었다.
“특별히 안 될 이유도 없지. 그냥 대학원 가기 전에 보내는 마지막 방학이니까 뭔가
의미 있는 걸 하고 싶었어.”
그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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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로켓 전공인 친구들은 항공 쪽은 흥미 없어 하던데.”
“그럴 리가. 항공과 학생이라면 기본적으로 둘 다 좋아할 수밖에 없어.”
“어째서?”
“결국 둘의 본질이 같으니까.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을 떠나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모든 비행체의 본질이지. 높은 곳으로 향하는 것.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봐.”
“일종의 욕구 해소인 셈이네?”
“그렇지. 그래도 우린 좀 더 특별해.”
“왜?”
“하늘로 향하려는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그게 직업으로까지 이어지려면
사람마다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법이거든.”
그녀가 말했다.
“우리 집은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나는 할머니 손에 자랐어. 연세가 꽤 있으셨지만
항상 즐겁게 사시던 분이셨지. 엄마 몰래 군것질 거리도 많이 사주시고, 머리 끈 같은
것도 어디서 자꾸 가져오시는지 나한테 챙겨주셨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거야. 그 때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히 나. 여름방학
때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전화를 받고 황급히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셨지. 집에 도착해서야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런데 병원에서 부검을 했는데 원인이 뭔지 알아? 폭염으로 인한
사망이래. 우리 집 뒤편에 조그만 밭이 있었는데 거기서 밭일을 하시다가 너무 더워서
돌아가신 거야. 더워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은 해도 진짜 사람이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나는 어린 마음에 꽤 깊은 상처를 받았어. 그 날 저녁 내내 울었지. 그러다가
창밖으로 문득 하늘을 봤는데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더라. 그리고 난 이런 곳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했어. 더위로 사람이 죽을 정도인데 나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그래서 나는 새로운 별을 찾기로 했어. 폭염으로 고통 받지 않아도 되는
아름다운 별. 기왕이면 언제나 잔잔한 봄바람이 불고, 거리마다 분홍빛 꽃들이
흐드러져 달보드레한 향을 내는 별. 그런데 그 때는 적당히 괜찮은 별을 찾아서
비행기타고 슝 가면 될 줄 알았는데 우주라는 곳이 그렇게 쉬운 곳이 아니더라고.
아무튼 어릴 때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도 그런 식으로 가닥을 잡고 공부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전공도 로켓 쪽으로 하게 되더라. 지금은 나름 만족하고 있어.”
누나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의 별은 아직 못 찾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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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했다.
“걱정 마. 그 별에 갈 수 있는 기술이 개발 되는 것보다 그 별을 찾아내는 게 훨씬 빠를
걸? 몇 광년씩 이동한다는 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야.”
“하긴 그렇네.”
“이제 네 차례야.”
이번엔 누나가 나를 보며 물었다.
“나?”
“넌 어쩌다 항공과로 왔니?”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째서일까?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그저
비행기가 멋있었을 뿐인데. 뭔가를 말하려 해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때마침
기숙사에 도착하는 바람에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나고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방에선 민기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대회 일이 다가오면서 부쩍 바빠진 모양이다.
창문이 열려있었는데 밖에서 맹꽁이 소리가 났다. 기숙사 뒤편에 수풀이 있어 이맘때면
수많은 맹꽁이들이 울어대곤 한다. 민기는 그 소리를 듣자 살짝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이불이 침대 옆으로 떨어졌다. 나는 창문을 닫고 민기의 이불을 바로 덮어준 뒤, 불을
끄고 내 침대에 누웠다. 천장에서 묵묵히 작동하는 에어컨 불빛이 보였다.
나는 그날 꿈을 꾸었다. 민기가 다이달로스, 내가 이카로스가 되었다. 우리는 미노스
섬의 어느 탑에 갇혀 있었다. 민기는 깃털들을 밀랍으로 붙인 거대한 날개를 내게
전하며 태양을 주의하라고 말한다. 나는 그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다고 반박한다. 그럼
됐다면서 민기가 먼저 하늘 높이 날아갔다.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민기가 보였다. 나는
뒤이어 힘차게 날아올랐다. 바람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짜릿한 쾌감이 몸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왔다. 나는 하늘을 날고 있다. 그러나 이내 밀랍이 녹기 시작하고 나의
날개는 분해된다. 아니 나는 태양 근처는 가지도 않았는데! 그 때 저 밑에서 웃고 있는
추진 누나가 보였다. 그것 봐 여긴 무지하게 더운 별이라고 했잖아. 그런가, 폭염인가.
나는 굉장한 속도로 바다를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
프로젝트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우리는 거의 하루 종일 일했다. 마지막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제작 공정을 빨리 마무리하고 이제는 실제 비행 리허설과 그것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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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놓친 부분을 세밀하게 점검할 때다. 그러나 무리한 작업량으로 인해 팀원들은
상당히 지쳐있었다. 날은 또 어찌나 더운지. 이대로 가다간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또
팀을 나가버리는 사람이 생길까 걱정하던 차에, 팀장인 민기가 이틀간의 전원 휴가를
선언했다. 주말에 조금 쉬어두는 것이 전체 효율로 봤을 때 더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만의 여유인지.”
민기와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학교 근처 카페로 들어왔다. 그가 의자 뒤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사실 이렇게 공식적으로 쉬는 날을 정한 건 프로젝트 시작하고 처음이야.”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
“무사히 잘 날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래.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1등 해야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민기가 웃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물론 처음엔 등수 욕심도 있었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 다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뿐이야.”
“등수에 욕심 없는 것 치고는 굉장히 엄한 팀장이시던데. 너 지금 후배들한테 무서운
선배로 찍힌 건 알아?”
“하하, 그건 어쩔 수 없지. 누군가 한 명은 악역을 맡아야 하니까.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건 우리 항공기가 얼마나 멋지게 날아 오르냐 하는 거야. 참가
팀들 간의 경쟁은 그다지 신경 쓸 필요 없어.”
민기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팀들도 우리 못지않게 열심히 했을 테고, 그들의 항공기도 역시 성공적으로
비행했으면 좋겠다는 게 내 솔직한 마음이야.”
“그래?”
“실은 나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가 사람들에게 우리가 제작한 항공기의 비행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어. 나름 큰 행사이니까 과학 잡지 같은데도 실릴 거고 그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그렇겠지.”
내가 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항공과가 그렇게 인기 있는 과는 아니잖아. 전국에 그리 많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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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전자나 컴퓨터공학 같은 것을 선호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거야. 모두가 해마다 출시되는 신형 스마트폰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세상 어딘가
에서는 누군가 비행기를 날리고 있다는 걸. 대한민국의 항공 기술이 다른 나라에
뒤쳐지지 않도록, 후세대의 더 편리한 항공 시스템을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걸 꼭 알리고 싶었어.”
민기의 목소리에서 가슴에 품어왔던 깊은 진심이 느껴졌다. 열정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문득 진이 누나가 떠올랐다. 어쩐지 나만 빼고 다들
자신만의 확실한 이정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자신들의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때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불현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한 구석을 파고 들었다.
“그건 그렇고.”
민기가 말했다.
“슬슬 리허설을 해야 하니까 미리 장소를 물색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내일까지 쉬니까 내일 같이 가볼래?”
내가 물었다.
“오, 그래 주면 고맙지. 그런데 글쎄, 한 명 정도 더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 그럼 누구랑 가지? 제어부에 건우나 동력부에 민수 정도면 같이 가줄 것도
같은데. 둘 다 한 번 물어볼까?”
나는 무심코 생각나는 사람들을 골랐다. 그런데 민기가 잠시 우물쭈물 하더니 말했다.
“추진 누나한테 부탁해 보는 건 어때?”
그것은 수줍은 고백이었다. 사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민기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녀가 팀원이 된 후로 팀장인 민기가 날개부 쪽에 오는 일이 부쩍 많아졌고, 다른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나를 포함해서) 모든 질문이나 부탁은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특유의 묘한 분위기 같은 것이 있어서, 확실히 다른 여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매력이 있었다. 민기는 거기에 반해버린 것이다.
“동아리 내 연애는 금지 아니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금지지.”
민기는 그렇게 답한 후에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그런데 누나는 동아리 원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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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허설 준비를 하던 중에 큰 문제가 생겼다. 항공기 조종사 역할을 맡은 민기의
몸무게가 비정상적으로 급증해버린 것이다. 불규칙적인 생활패턴과 과한 스트레스로
인한 폭식이 원인이었다. 새벽에 문을 연 곳이 교내에 있는 24시간 햄버거
프랜차이즈뿐이었던 탓도 있다. 그는 거의 매일 작업을 하는 중에 햄버거 세트를
사먹었고, 그 결과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뚱보가 되고 말았다. 인간 동력 항공기는 1kg
의 무게에도 매우 민감하다. 특히 조종석은 처음 설계할 때부터 전체 항공기의
무게중심을 고려한 위치에 놓이기 때문에, 조종사의 몸무게가 급변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민기는 처음 항공기 설계 당시의 무게로 돌아가야 했다. 정확히 그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 가벼워지면 상대적으로 양력이 너무 커져 항공기가 위로
솟구칠 수 있고, 반대로 더 무거워지면 항공기가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다. 리허설
장소를 찾는 것은 우선 뒤로 미루기로 했다. 민기는 모든 일을 잠시 내려놓고 혹독한
몸만들기에 들어갔다. 여기서 몸만들기란 다이어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인간
동력 항공기는 조종사가 페달을 밟아서 움직이는 항공기다. 조종사의 발이 페달을
돌리면 크랭크가 돌아가면서 맞물려 있는 풀리가 돌아가고 최종적으로 프로펠러를
회전 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조종사는 상당한 사이클 경험을 필요로 한다.
비행하는 동안 지속적인 출력을 낼 만큼의 탄탄한 허벅지는 필수다. 그래서 민기는
교내의 헬스장에 배치된 사이클 머신을 이용해 훈련하기로 했다. 살도 빠지니까
겸사겸사 좋은 거지. 민기는 오히려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없이 한 곳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좋아하는 눈치였다. 대신 그는 자신이 정한 계획표를 철저히 지켰다. 아무리 잠이
오지 않아도 자정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일곱 시부터 학교 운동장에서
땀이 살짝 날 정도로 가볍게 조깅을 한 후 아침 식사를 한다. 식단은 저칼로리 음식들로
짜고 약간 부족한 감이 들 정도로 먹는다. 그러고 나서 오후까지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자유로이 시간을 보낸다. 식단의 변화와 혹독한 사이클 훈련을 견디려면 충분한 휴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민기는 이 시간을 대부분 책을 읽으며 보냈다. 배트맨이 나오는
마블 코믹스도 보고, 때로는 비행 역학에 관한 전공 서적도 읽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헬스장에 가서 두 시간 동안 사이클 훈련을 했다. 이 시간만큼은 고통의 순간이다. 큰
출력을 내기 위해선 강한 페달링이 필요했기 때문에 훈련 내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파워로 페달을 밟아야 한다. 허벅지는 터질 듯 뜨거워지고 땀이 온몸을 적신다.
그는 매일 매일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야만 했다. 요령도 없고 휴식도 없다. 오직 정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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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최대의 파워를 내는 것이 전부다. 목적이 단순할수록 그에 대한 노력은 무거운
법이다. 그는 그런 인고의 나날을 참고 견뎌야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대로 바빴다.
팀장이 잠시 자리를 비우니 예상보다 그 빈자리가 컸다. 맡은 일만 잘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각 부서간의 연계되는 부분에 대해 지시해주는 사람이 없어, 매번 이 팀 저
팀을 오가며 직접 물어서 조율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작업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고
여러 곳에서 불협화음이 생겨났다. 시간만큼은 빨리 흘러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방학의 반이 지나고 개강까지 한 달이 남았다.
민기가 몸만들기에 들어간 후로 나는 그와 예전만큼 자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볼 때면 그는 날개부의 진행 상황도 물어보고 따듯한 격려도 해주었다.
나는 팀장의 역할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루는 느지막이
일어나서 학교 앞 카페에 왔다. 베이컨 샌드위치와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다가오는 주의 날씨를 확인했다. 리허설 날짜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장마는 이미 끝나서 날씨는 일주일 내내 쾌청했다. 나는 그 중
풍속이 적당한 날을 골랐다. 아버지는 항상 기상청은 믿을 곳이 못 된다고 하셨지만, 그
날 갑자기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 만일 기상 관측 위성을 가뿐히 속이고 비가 오더라도
거기까진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부디 기상청의 예보대로만 되기를
기도했다.
항공기의 설계 도면을 펴고 날개 쪽에서 빠뜨린 부분은 없나 확인하고 있는데
아르바이트생이 샌드위치와 커피를 가져왔다. 갈색으로 염색한 단발머리에 생기
넘치는 얼굴을 한 여자였다. 전체적으로 말랐지만 몸의 선이 매끄럽고 가슴이 무척
컸다. 그녀에게 카페 아르바이트생으로 뽑히는 것쯤이야 무엇보다 쉬울 것 같았다.
나는 비교적 단골손님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존재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도 말을 걸어본 적은 없다.
그녀의 외모는 상당히 예쁜 편이었기 때문에 하루에 한번 꼴로 남자 손님들이 번호를
물을 정도였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원래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 데다가 하루에 한 번 꼴로 나타나는 여러 남자들 중의 한 명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항상 어중간한 시간대에 잠에서 깨어 카페에 오기 때문에 손님이 나 혼자인 날도
많았다. 오늘도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이컨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내려두며 그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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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비행기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네.”
내가 답했다. 뭔가 덧붙이고 싶었지만 입은 거기서 멈췄다.
“우와, 나도 어릴 때 비행기 만드는 거 좋아했었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불쑥 내 앞자리에 앉았다.
“이건 그러니까 고무 동력기 같은 게 아니고 진짜 비행기인 거죠? 사람들이 여행 갈
때 타는.”
“사실은 고무동력기 쪽에 좀 더 가까워요. 좀 더 크고 조종사가 있다는 것만 빼면.”
그녀가 너무 적극적으로 비행기에 관심을 보여서 나는 조금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린다고는 하기 힘든 조합이다. 아니 오히려 무관계성의 최고봉이라고 할 정도다.
카페 아르바이트생과 항공기라니. 비빔 만두와 명왕성 같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와 대화를 하는 것이 전혀 괴롭지 않았고 오히려 바라던 바였기 때문에, 인간동력
항공기 프로젝트에 대해 최대한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었다.
“어쩐지 듣는 것만으로도 두근두근 하네요. 시간만 있었으면 저도 참가하고 싶을
정도예요.”
“이런 쪽으로 공부하고 계신가요?”
“아니. 그건 아니에요.”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학교를 그만뒀어요. 물론 다닐 때도 이과 쪽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돈을 모으는 중이죠.”
“뭘 하고 싶은데요?”
“실은 스튜어디스를 준비 중이에요. 그래서 비행기에도 관심이 많았던 거고.”
“스튜어디스가 되는 건 어렵나요?”
“절대 쉽다고 할 수는 없죠. 세상에 쉽게 이룰 수 있는 꿈이 있긴 할까 싶지만.
스튜어디스는 그 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 거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대학은 아예 그만 두신 건가요?”
“네. 원래 전공은 경영학이었거든요. 그런데 스튜어디스가 너무 하고 싶어서 때려
치고 나왔어요. 스튜어디스를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매일
비행기를 타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월급을 받을 수 있다니. 그런 게 신의 직장이
아니면 뭐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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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비행기를 타면 굉장히 피곤할 것 같은데요.”
“물론 그렇겠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는 비행기에 대한 로망이 있어요. 하늘 위를 이동하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기분이 짜릿하다고 할까, 아무튼 결코 다른 일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쾌감이 있어요.
그 느낌 하나만 믿고 대학도 때려 칠 정도니 말 다했죠 뭐. 그래서 일단은 열심히 돈을
모아서 원하는 대학의 항공운항과로 재입학 하는 게 첫 번째 목표예요.”
“잘 됐으면 좋겠네요.”
내가 말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고마워요. 비행기 도면을 보고 있길래 나도 모르게 그만 너무 말을 많이 했네요.
방해가 된 건 아니죠?”
“괜찮아요. 별로 급한 일도 아니고.”
“우리 카페 자주 오는 거 같던데. 앞으로 우리 인사하고 지내요. 그 프로젝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궁금하고.”
“네. 좋아요.”
그렇게 정말 우연히, 그녀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최현주라고 했다. 그
때 항공기도면을 꺼내놓지 않았다면 아마 영영 말 한 번 못해봤을지도 모른다. 얘기를
해보니 마침 나이도 같아서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그녀는 정말로 인간 동력 항공기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았다. 혹시 우리 비행기에 스튜어디스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다. 카페를 나오는데 그녀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
여느 때처럼 새벽까지 일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찾아온 공복이었다. 며칠 전, 학교에서 오 분 거리에 괜찮은 덮밥 집이
생겼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었다. 더구나 24시간 문을 여는 전국 체인점이라고 했다.
나는 잠시 작업을 멈추고 함께 먹으러 갈 사람이 있는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원자는 없었다. 팀 내에서는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서 자고 싶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추진 누나마저도 달콤한 야식의 유혹을
거부했다. 민기처럼 되지 않으려면 밤에 음식을 먹는 건 되도록 자제하는 게 좋겠어.
그녀는 나에게도 한 번 참아보기를 권했으나 나는 너무 배가 고파서 혼자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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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다.
여름의 장점은 새벽에도 춥지 않다는 것이다. 딱 적합한 정도로 시원하다. 밖은 어둡고
고요했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혼자 걸었다. 나는 가끔 찾아오는 이런 순간을 좋아했다.
새벽 거리를 걷다 보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은 복잡한 상념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 역시 즐기는 편이었다.
쉽게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게는 생각보다 잘 숨겨져 있었다. 어두워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아마 나는 바로 근처에 가게를 두고 그 주위를 빙빙 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배회하다가 현주를 만났던 카페를 지났다. 낮이었다면 들어가서 길을 물었을
텐데. 그녀라면 덮밥 체인점 같은 곳은 누구보다 쉽게 알려줬을 것이다. 친절하고 생기
넘치는 웃음을 지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우연찮게 덮밥 집에 도착했다.
그곳은 자취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원룸 촌으로 가는 골목 구석에서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조명을 좀 더 밝은 걸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덮밥 집으로
들어갔다.
가게는 굉장히 좁았다. 일본의 회전 초밥 가게처럼 여러 명이 일렬로 앉을 수 있는 바
형태로 된 테이블이 있고 그 뒤로는 따로 배치된 2인용 테이블 네 개뿐이었다. 손님이
아무도 없어서 나는 바 형태의 테이블에 앉았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주방에서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남자가 나왔다. 오십 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늦은 시간에 혼자 오셨네.”
그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가 고파서요.”
나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젊을 때는 팍팍 먹어둬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힘을 못 쓴다오.”
그는 들릴 듯 말 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메뉴 판을
뽑아 읽었다. 메뉴는 다섯 가지뿐이었다. 볶은 돼지고기 덮밥, 튀긴 돼지고기 덮밥, 파
돼지고기 덮밥, 양파 돼지고기 덮밥, 마늘 돼지고기 덮밥. 온통 돼지 세상이다. 그러나
특별히 불만은 없었다. 가게 주인이 신실한 힌두교 신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볶은
돼지고기 덮밥을 시켰다. 주인은 주문을 받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칼과 도마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냄새가 솔솔 흘러나왔다. 나는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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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으로 나온 단무지를 먹으며 조용히 기다렸다.
“자, 여기 나왔습니다. 볶은 돼지고기 덮밥.”
그는 덮밥과 함께 계란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건 뭔가요?”
“날계란인데, 톡 깨서 비벼먹어요. 흰 자는 빼고.”
나는 시키는 대로 계란을 깨서 노른자만 걸러 덮밥에 비벼 먹었다. 배가 고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맛있었다.
“와, 정말 맛있어요.”
“다행이구만.”
남자는 내 말을 듣더니 허허 웃었다.
“이번에 새로 장사를 시작하신 건가요?”
“장사한지는 벌써 이십 년이 넘었지. 이곳으로 이사 온 것뿐이야.”
“어쩐지 굉장히 맛있더라니. 연륜에서 나오는 맛이었네요.”
“오래 했다고 무조건 맛있는 건 아니야. 내가 열심히 고민해서 만든 나만의 레시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맛이 있는 거지.”
“특제 소스 같은 건가요?”
“맞았어. 덮밥은 사실 소스가 가장 중요하다고. 몇 년간의 실험을 통해 완성된 기업
비밀이지.”
“어쩐지 멋있네요.”
“요즘도 난 새로운 소스를 개발 중이야. 새롭다고 해 봤자 들어가는 재료의 비율이
달라지는 정도지만. 매일 새벽 손님이 없을 때 혼자 소스를 만드는 게 내 인생의 소소한
재미랄까.”
“제가 방해가 되었군요.”
“아니라고는 안 하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그는 오늘의 소스를 만드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말을 듣고 밥을 먹으니 과연 소스의 맛이 도드라졌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상큼한, 풍미가 느껴지는 맛이었다. 역시 요리는 정성이야, 라고
생각하고 잠시 숟가락을 놓았다. 이십 년간 장사를 하면서도 계속 노력하는 주인을
보니 카페에서 만난 현주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도 스튜어디스란 꿈을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다니던 대학까지 자퇴했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지금 학교를 그만둘 정도로 하고 싶은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항공 공학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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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맞았다. 나는 현재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슴 한편에
보이지 않는 공허감이 남았다.
나는 빨리 다시 현주를 보고 싶었다. 그녀와 같이 있으면 나도 그녀를 닮아가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나는 갖지 못한 단호한 열정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보다 그녀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믿음으로 가득 찬 눈이며, 쾌활한
목소리까지. 나는 그녀를 꼭 다시 만나고 싶었다. 어쩌면 친구 이상으로.
“잘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나는 주인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계산을 했다. 가격은 오천 원이었다. 이 정도면
대단히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맛있었으면 친구들한테 소문 좀 내줘. 가게 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라.”
“네. 그럴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가게를 나왔다. 여전히 사방이 어두웠다. 여러 가지 풀지 못한
마음이 남아서일까, 학교를 나올 때와는 달리 어둠이 썩 반갑지 않았다. 하지만 볶은
돼지고기 덮밥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덮밥 집이 문전성시를
이루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민기가 팀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전에 보다 훨씬 말라 보였지만 허벅지 근육은 눈에
띄게 굵어졌다. 팀장이 돌아오자 작업도 정상 속도를 되찾았다. 각 부서들은 곧 있을
리허설을 위해 마무리 작업에 열을 쏟았다. 추진 누나와 나는 항공기 좌우 방향을
조정하는 러더를 만드는 중이었다. 구조를 조립한 후, 마일러 필름을 이용해 러더의
스킨을 덮어주고 히팅건을 이용해 표면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필름에 미세한 상처라도
나면 찢어질 위험이 있으므로 집중해야 했다. 대충 마무리가 되자 누나는 잠시 쉬었다
하자고 말하고,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두 개 뽑아 나에게 하나를 건넸다.
“작업실은 너저분하니까 밖에 가서 마시자.”
그녀가 말했다.
밖에서는 약한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셨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빨간 말보로 한 갑을 꺼냈다.
“괜찮다면 한 대 피워도 될까?”
“담배도 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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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도 있지. 나도 나름 공대녀잖아.”
“공대 여자는 담배를 피운다?”
“공대에다가 석사 중인 여자라면 그럴 확률이 매우 높지.”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 동안 한 번도 담배 피우는 걸 못 봤는데.”
“원래는 안 펴. 스트레스를 받거나 고민거리가 생길 때만 자연스레 손이 가더라고.”
“지금은 둘 중 어느 쪽인데?”
“둘 다.”
“그런데 담배를 그렇게 원할 때만 필수도 있는 거야? 끊고 싶어도 못 끊는 애들이
대부분이던데.”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 보통은 거의 불가능 할 거야.”
“하지만 누나는 가능하다.”
“공대에다가 석사 중인 누나라면.”
그녀가 덧붙였다.
“나는 상관없으니까 펴도 돼.”
“고마워.”
그녀는 빳빳이 잘 마른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가 깊은 숨을 한 번 들이
쉬자 담배 잎이 천천히 타 들어갔다. 그 사이 빗줄기가 조금 굵어졌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고 그녀는 머릿속으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것에 대해 그녀가 굳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묻지 않았다. 나는 차가운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너는 요새 별 일 없어?”
담배 한 개비를 끝내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어쨌든 어색한
침묵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며칠 전 카페에서 대화를 나눈 스튜어디스 친구 얘기를
했다. 그녀에 대한 호감 때문에 이야기가 조금은 미화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외모라던가, 목소리라던가. 하지만 대체로 그녀의 꿈인 스튜어디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즘 보기 드문 멋진 친구네.”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넌 완전히 그 친구에게 반했니?”
“그냥 얘기만 나눈 사인데 뭐.”
나는 살짝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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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확실히 영향을 받은 건 있어.”
“어떤 점에서?”
“글쎄, 꿈을 좇는 투지라고 해야 되나? 그렇지만 단순히 젊은 청춘의 열정 같은 게
아니었어. 말하자면 그녀의 확고함이 느껴진 거야. 그것은 그녀의 눈빛, 말투, 목소리를
통해서 절절히 전해졌어. 대혁명이 일어나 세상이 뒤집어져도 흔들리지 않을 본인만의
확고한 믿음. 예를 들면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비행기 테러가 일어난다고 해도 그녀는
스튜어디스를 하려고 할 거야. 그녀가 스튜어디스가 되기 위해 얼마나 준비했는지,
재능은 있는지,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 그녀는 분명히
스튜어디스가 될 거고, 그 후에도 우수한 스튜어디스로서 이름을 날릴 거야. 대화를
하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런 점에 반했다는 거야 아니면 부러웠다는 거야.”
“굳이 고르라면 부러웠다는 쪽이 아닐까. 반한 건 이야기를 나누기 훨씬 전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와 예쁘다, 라고 생각했으니까.”
누나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으흠. 결국 그런 거였구만.”
“그런 거라니?”
내가 물었다.
“어쩐지 요즘 네가 어딘가 불편해 보였거든.”
“내가?”
“나는 거의 매일 너랑 같이 작업을 하니까 표정이나 분위기 같은 걸로 알 수 있어.
날개를 만드는 솜씨가 예전만 못 하다고 해야 되나? 커팅을 할 때나, 구조들을 접착
할때도 미묘하지만 확실히 감각이 서툴러졌어. 너는 모르겠지만 너 가끔씩 멍한 표정도
짓는다고. 어디론가 조금씩 빗나가는 느낌이랄까.”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분명 그랬다. 당장 대회 날짜에
쫓겨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마음 한 편에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대회가 다가오면서 생기는 불안감인 줄 알았다. 하지만 누나의
말을 들은 순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가슴 속의 무언가는 대회와는 별개의 것이다.
나는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 정체되어 있었다. 가끔 내가 멍해지는 것은 내 안에
존재하는 공허의 한 부분이 표정으로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회에 집중하기
위해 그것을 의도적으로 밀어냈다. 실제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 정도의 잡념을
잊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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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그 애도 나름대로의 일들이 있었을 테니까. 대단한 역경을
거쳤을 수도 있고 아주 우연찮게 스튜어디스가 자기한테 잘 맞는 직업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의 꿈을 확실히 찾는 사람은 아주
예외적인 부류야. 대부분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냥 마음 편히 먹고 자기의 생활을 하면
돼. 수업도 열심히 듣고, 책도 많이 읽고, 여행도 다니고 그러면서 나한테 맞는 길을
찾아가는 거지. 그러다 보면 어느 샌가 적절한 궤도에 올라있을 거야.”
“나는 이미 내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어. 지금 하는 일도 아주 즐겁고 적성에도 잘
맞아.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부러운 걸까?”
“아직 무언가를 결정할 때는 아닐지도 모르지. 그게 당연한 거야, 넌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에 들어섰잖아. 모든 것이 막연하고 어떠한 확신도 없을 시기지. 그런 부분은
조금씩 채워나가는 수밖에 없어. 우선은 지금 하는 일을 열심히 해봐. 끝나고 나면 분명
어떤 변화가 있을 거야.”
“고마워. 어쩐지 인생 선배 같네.”
내가 말했다.
“이제 들어가자. 할 게 많아.”
벤치 옆 쓰레기통에 음료수 캔을 버리고 다시 복잡한 작업실로 들어왔다. 여전히
알아가야 할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
리허설을 앞두고 전체 미팅이 있었다. 각 부서들 사람들이 전부 모여 전체적인 진행
상황과 앞으로의 일정들을 확인했다. 팀장인 민기는 직접 한 사람씩 붙잡고 이런 저런
지시를 했다. 다들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들뜬 표정들이었다. 미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준우야. 잠깐 할 말이 있는데.”
동체부의 한태선이었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몇 번 마주칠 일이 있어서 안면은 있지만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다. 그는 기계공학과에서 들어 온 학생이었다.
“무슨 일이야?”
“저기에 앉아서 이야기하자.”
우리는 근처에 있던 과 휴게실로 와서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널 부른 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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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했다.
“뭐가 궁금한데?”
나는 날개에 관한 질문일 거라고 예상했으나 그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리허설 장소를 찾는다고 들었어.”
“맞아. 내일쯤 미리 가서 몇 군데 둘러볼 생각이야.”
“그거 말인데.”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뭐?”
“미리 가서 둘러보는 것 말이야. 내가 듣기론 너랑 민기랑 추진누나 셋이 간다고
들었는데 맞아?”
“응. 그런데 왜?”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그건 누가 정한 거지?”
“누가 정했냐고? 그냥 민기랑 얘기하다가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그러니까, 네가 간다고 한 거지?”
“응.”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너 추진 누나 좋아하는 거지?”
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일격에 적잖이 당황했다.
“무슨 소리야? 그냥 리허설 장소만 같이 가는 건데.”
“거짓말 할 필요 없어. 넌 날개부니까 추진 누나랑 늘 같이 붙어 다닐 거 아냐. 그리고
누나는 괴,굉장히 매력적인 여자이니까 안 반하는 게 이상하지.”
그는 창피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아니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게 그렇잖아. 민기는 프로젝트의 팀장이고 추진 누나는 팀에서 가장 어른이니까.
리허설 장소를 답사하는 데는 그 둘이면 충분해. 그런데 거기에 넌 왜 끼어 있는
거지?”
“난 그냥 별 생각 없이 가겠다고 민기랑 얘기하다가 같이 가기로 한 건데.”
“거짓말 마. 어제 추진 누나랑 얘기하다가 들었어. 리허설 장소 정하는 데 같이
돌아보자면서 너한테 전화가 왔었다고. 팀장인 민기를 제쳐두고 굳이 네가 전화를 해야
할 이유가 뭐야?”
“그건 그냥 내가 누나랑 같은 날개부니까 그런 거지. 전화 같은 거야 민기가 하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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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든 아무런 상관없어. 단지 공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뿐이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민기가 직접 전화하기가 떨린다며 나에게
미룬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태선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럼 넌 추진 누나한테 전혀 마음이 없다 이거야?”
그가 물었다.
“네가 말하는 게 이성적으로 끌리는 것을 말하는 거라면 누나는 그냥 좋은 선배일
뿐이야.”
“정말 확실한 거지?”
“그렇대도.”
태선은 그 말에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고마워. 갑자기 이렇게 말해서 미안해. 사실 내가 누나를 좋아하고 있거든.”
갑작스런 고백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요즘 대회가 다가오니까 예민하기도 하고, 누나가 자꾸 생각나는데 고백하고 싶어도
용기가 있어야 말이지.”
“그럼 나 대신에 네가 가는 게 어때?”
“아냐, 아냐. 갑자기 그러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그런 식으로 마음이 들키고 싶지는
않다고. 물론 누나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겠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속보이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지. 더구나 단 둘이 가는 것도 아니고.”
“정말 괜찮은 거야?”
“그래. 네가 경쟁자가 아니라는 걸 안 것만으로 충분해.”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용건을 마친 태선은 돌아가기 전에 넌지시
말했다.
“그리고 이건 당연히 비밀로 해줄 거지?”
“응. 그럴게.”
그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을 말하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민기도 진이
누나를 좋아하는 상황에서 굳이 쓸데없는 경쟁을 조장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전체 미팅을 마치고 나온 아이들이 각자의 길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바로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앞 카페에 들렀으나 카운터에는 현주 대신 다른
사람이 서있었다. 다음에 만나면 알바 시간을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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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네 시쯤 민기와 진이 누나를 만나서 리허설 장소를 살피러 갔다. 마땅한
장소라고 해봤자 거대한 항공기가 움직일 수 있는 곳은 극히 제한적이다. 미리 상의한
결과 후보지는 대운동장, 중앙도서관 옆 넓은 평지, 인문사회과학부 건물 뒤의
공원으로 좁혀졌다. 각 장소마다 장점과 단점이 존재했다. 리허설은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밀한 부분까지 따지며 의견을 나눴고, 세 군데를 모두
돌아보고 나서 최종적으로 대운동장을 리허설 장소로 결정했다. 세 장소 중에 가장
넓고 평탄했으며 주변에 장애물도 없었다. 다만 항공기가 있는 곳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서 그 점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워낙 다른 조건들이 좋아서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했다. 우리는 마지막 확인을 위해 대운동장으로 갔다. 한 여름 저녁의 해가 아주 조금씩
저물고 있었다. 더위가 한풀 꺾이자 상쾌한 미풍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불었다. 그
시원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저 정도는 괜찮겠지?”
민기가 말했다. 운동장 양 끝에 있는 축구 골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골대는 서로를
마주보며 축구장 하나 크기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일부러 골대 근처까지 가서
리허설을 하지 않는 한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말했고 추진 누나와
민기도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실감이 안 난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걸 언제 다 만들지 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리허설이라니.”
민기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생 했어. 멋진 팀장 덕분이야.”
누나가 말했다.
“그래. 네가 없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야.”
내가 덧붙였다.
“아니, 난 별로 한 거 없어. 팀원들 모두가 잘해 준거지. 각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거야. 물론 중간에 나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덕분에 우리가 들어왔잖아?”
내가 말했다.
“그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 너도 누나도 그 전에 있던 사람들 보다는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 나간 애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오히려 누나랑 네가 들어와서
다행일정도야.”
우리는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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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팀장이라는 자리가 쉽지만은 않았어. 물론 처음 팀장을 맡겠다고 할 때도
가벼운 생각으로 지원한 건 아니었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짊어져야 할 무게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지.”
“실패했을 때의 부담감 같은 거야?”
내가 물었다.
“비슷하지만 꼭 그렇진 않아. 우리는 항공기 제작에 전문가들도 아니고 아직 일개
대학생들일 뿐이니까 반드시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지.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무사히 항공기를 날림으로써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할 책임 같은 게 있어. 팀원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기간도 잘 부탁할게. 성공적인 비행을 위해.”
옆에 있던 누나가 말했다.
“응. 노력할게.”
“대회가 끝나도 지금 함께했던 사람들 다시 볼 수 있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내가 말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민기가 웃었다.
“공대 바닥이 넓으면 얼마나 넓다고. 게다가 대부분 항공과 사람들인데 싫어도 오며
가며 마주치게 될 걸? 다들 많이 친해졌으니 앞으로도 자주 보며 지냈으면 좋겠어.”
“나이 많은 대학원생도 거기에 끼워 주니?”
누나가 말했다.
“당연하지. 누나가 부르면 언제든 나갈 거야.”
“멋진 팀장님이네.”
그녀의 말에 민기의 얼굴이 귀까지 붉어졌다. 그는 창피했던지 한 바퀴 돌아보고 올게
라고 말하고 갑자기 운동장 옆으로 난 육상 트랙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누나와 나는
멀어지는 민기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어느 새 시간이 늦어 주위가 어둑해지고
하늘에 하얀 달이 떠올랐다. 부디 문제없이 리허설이 끝났으면 좋겠다. 리허설 때
항공기가 잘 날아만 준다면 실제 대회에서도 성공적인 비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정말 잘 할 수 있겠지?”
내가 말했다.
“걱정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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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나를 보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 하지 마. 실제 대회도 아니잖아. 리허설일 뿐이라고. 문제가 있다면 오히려
리허설 때 발견되는 게 좋은 일이지.”
“그렇긴 하지만 어쩐지 불안해. 뭐랄까, 우리가 직접 만든 항공기가 하늘을 난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그 마음 정말 잘 이해해. 항공과 학생이라도 직접 하늘을 나는 항공기를 만들어 내는
일은 쉬운 게 아니지. 보통은 이론 공부를 하는 것에 그치니까. 아마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서 그런 걸 거야. 자신이 만든 항공기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마주하는 것도 꽤
떨리는 일이지.”
“정말로 그래.”
“비행기가 이 정돈데 로켓은 어떻겠니. 내가 있는 연구실에서는 우리나라의 실제적인
발사 로켓이 연구 주제이기 때문에 항상 그런 떨림을 가지고 일해야 해. 내 개인적인
성취를 떠나 나라의 일이기도 하고 넓게 보면 앞으로 인류가 짊어져야 할 문제이기도
하니까.”
“스케일이 다르다?”
“그런 셈이지. 물론 떨리는 건 마찬가지지만.”
“항공기 쪽으로 오길 잘했군.”
“무슨 소리. 로켓이 얼마나 멋진데.”
“글쎄 난 비행기가 더 멋진 거 같은데.”
우리는 그런 식으로 비행기냐 로켓이냐를 놓고 열띤 토론을 펼쳤다. 그 모습을 본
민기가 무슨 재미난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는지 우리를 향해 돌아오고 있었다.
“사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이 프로젝트를 한 사람들
중에서도 나중에 대학원은 로켓 쪽으로 오는 애들 많을 걸. 비행기니 로켓이니 해도
결국은 하늘 위를 향하는 거지. 목적지는 모두 같아. 중요한 건, 우리는 모두 같은 곳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야.”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운동장을 스치는 저녁 바람이 불면서 어떤 특별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곳을 보고 있다.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좋아서일까 끝없이 펼쳐진 여름 저녁의 하늘은 맑고 아름다웠다.
보기만 해도 모두가 반할, 한 점 나무랄 데 없는 그런 하늘이다. 문득 지금 이렇게 같은
목표를 가진 세 사람과 같은 하늘 아래를 걷고 있는 시간이 굉장히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떨리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무사히 리허설을 치를 수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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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리허설 당일이 되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빗소리가 나지 않는 것에 일차적으로
안심했고, 창을 통과한 쨍쨍한 햇살이 얼굴에 드리우자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결국
기상청은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견디면서도 제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꽤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민기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그 동안 미뤄
놓았던 묵은 수염을 깔끔히 면도했다. 그리고 학생식당으로 가서 아침으로 토스트와
샐러드를 먹었다. 다 먹고 일어났을 때, 민기로부터 문자가 왔다. 항공기 이동이
끝났다. 바로 대운동장으로 오면 될 것 같다. 리허설 시간까지 참지 못한 후배들의
성화로 일찌감치 운동장으로 옮겨버렸다는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주모자는 아마
민기일 것이다.
인간 동력 항공기는 거대한 자태를 뽐내며 운동장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우리 팀원들을
비롯해서 아침 운동을 나온 학교 근처 주민들과 학생들 모두 항공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다들 뼈대가 훤히 보이는 비행기가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민기는 헬멧을 쓰고
사이클 선수들이 입는 쫄쫄이 옷을 입고 있었다. 옷까지 그렇게 입을 필욘 없잖아, 하고
내가 말하자 가벼울수록 좋은 거니까, 라고 민기가 답했다. 그렇게 무게를 줄이려는
사람이 선글라스는 왜 끼고 왔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이번엔 속으로만 생각하고 말하지
않았다.
리허설 시간이 되자 모든 팀원들이 도착했다. 몇몇은 큼직한 DSLR 카메라를 들고
왔다. 민기가 리허설을 시작하기 전에 단체사진을 찍자고 말했다. 후배 한 명이
삼각대를 놓더니 타이머를 맞추고 돌아와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삼각대까지 준비해
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진을 다 찍고 드디어 리허설을 시작하려는 차에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에 타이트한 민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깨
근육이 큼직하게 드러난 남자였다.
“저기 지금 여기서 뭘 하시려는 건가요?”
아이들은 낯선 남자의 등장에 웅성거렸다. 팀장인 민기가 그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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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동력 항공기 프로젝트를 진행 하는 중입니다. 지금부터 리허설을 하려고요.”
남자가 알아듣기에는 너무 긴 프로젝트였는지, 그는 마뜩잖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축구부 시합을 하기로 했는데요.”
그의 뒤로 한 손에 축구화 가방을 든 남자 여러 명이 우리를 마주보며 서있었다. 날도
더운데 빨리 좀 비키지, 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럴 리가요. 분명 예약을 했을 텐데.”
민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직접 민기와 그에게로 다가가서 말했다.
“분명히 했어. 수요일 열 시부터 열두 시까지.”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키가 작은 축구부 학생 하나가 지지 않겠다는 듯 재빨리 말했다.
“제가 분명히 예약 했어요 선배. 어제 밤에 확인까지 했는데.”
이런 식이면 결국 막다른 길이다. 그러나 축구부원들은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을
태세였다. 물론 우리가 양보할 수도 없다. 저 거대한 항공기를 아침부터 끌고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잠시 침묵이 내렸다. 이렇게 더운
날에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은 바짝 마른 종이에 불을 붙이는 것 마냥 쉬운 일이다. 그
때 추진 누나가 불쑥 나섰다.
“그럼 그냥 예약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면 되잖아!”
모두들 수긍했다. 축구부 주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 모두 나를 쳐다보기에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교내 예약 시스템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로그인을 하고 나의
예약 내역 페이지를 띄웠다. 그곳에는 한 치의 오류도 없는 정확한 날짜와 시각이 적혀
있었다. 나는 보란 듯이 그것을 축구부 주장이란 놈에게 보여주었다. 한 번 보고는 못
믿겠는지 그는 꽤 공들여 다시 확인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네 아이디로 들어가 봐.
그는 뒤에 서있던 후배에게 그렇게 말했다. 후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즉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는 다음 주 수요일로 예약했던 것이다. 주장이라는 남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해가지고는.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우리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휙 돌아섰다. 양쪽의 무리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축구 측은 멍청한 후배에
대해, 항공 측은 축구부 주장의 무성의한 사과에 대해. 그러나 중요한 리허설 날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민기는 다시 팀을 정비하고 리허설 준비에
나섰다. 어째서인지 축구부는 그대로 돌아가지 않고, 운동장 관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놈의 항공인지 뭔지 프로젝트를 지켜보겠다는 듯 했다.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169
“자 시작하자!”
민기가 조종석에 착석했다. 그의 뒤를 따라 다섯 명의 후배들이 항공기로 다가갔다. 두
명은 날개의 양 끝을 잡고, 두 명은 조종석 뒤편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항공기의 꼬리
부분을 덩치가 큰 후배 한 명이 잡고 준비 완료를 외쳤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맑고
기분 좋은 바람이 적당히 불었다. 항공기를 잡지 않은 팀원들은 옆으로 물러서서
사진과 동영상 촬영을 준비했다. 나는 추진누나와 함께 그들 옆에 섰다.
민기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페달이 돌아가고 항공기를 잡은 후배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항공기에서 이륙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간이기도 했다. 비행기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비행 중인 기체가 난기류에
흔들리거나 혹은 벼락이라도 맞아서 추락할까 걱정한다. 그러나 사실 비행기는 그렇게
쉽게 추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착륙을 하는 짧은 시간이 사고가 날 가능성이 가장 큰
순간이다. 그만큼 조종사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항공기는
무사히 날아올랐다. 이륙에 성공하자 팀원들 사이에서 와 하고 탄성이 터졌다.
항공기는 마법처럼 중력을 거스르며 비행했다. 바람도 적당하고, 비행기의 상태도
좋았다. 굉장히 멋진 비행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얼마 가지 못해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순항하던 항공기가 비스듬히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중심을 잡으려 해도 항공기는 점점 더 기울었고 급기야 조종 불능 상태가 되었다.
러더를 쳐. 엘리베이터를 올려. 팀원들이 민기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당황한 그들의
목소리는 이리 저리 뒤섞여 공기 중에 흩어졌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실제로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항공기가 곡예비행을 하는 것이 슬로모션에 걸린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결국 항공기는 민기와 함께 빙글빙글 회전하며 추락했다.
우리는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갔다.
“야 김민기 괜찮아?”
민기는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항공기의 날개도 동체에서 분리되어
심각하게 찌그러졌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디 아파? 다쳤어?”
추진 누나가 물었다.
“아으, 다리가 너무 아파요.”
민기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끙끙댔다. 표정이 일그러진 정도를 보아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일단 민기를 업고 학교 내의 건강 관리실로 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170
축구부원들이 킬킬댔다. 우리한테 양보했으면 그런 일도 없잖아. 그들은 마치 들으라는
듯이 한 마디씩 던졌다. 최악이다. 가슴이 쿵쾅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리허설은
그렇게 끝이 났다.
*
생각했던 것보다 민기의 부상은 심각했다. 왼쪽 정강이뼈에 금이 간 것이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부모님이 민기를 아예 큰 병원에 입원시켜버렸다. 그들은 공부하라고
대학에 보내놨더니 무모한 짓이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민기는 병원으로부터
전치 6주의 진단을 받았다. 그 정도로 크게 다칠 높이에서 비행한 것은 아니었지만
항공기에 스핀이 걸리면서 추락하는 바람에 큰 부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민기는 대회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 동력 항공기 프로젝트 팀은 갑작스런
팀장의 부재로 인해 대혼란에 빠졌다. 우선은 추락 원인을 알아내야 했다. 전체 미팅을
가지고 팀원들 간에 의견을 나눈 결과 프로펠러 회전으로 인한 안티 토크가 사고의
원인으로 밝혀졌다. 항공기 앞에 달린 프로펠러가 돌면서 작용 반작용 법칙에 의해
동체 파이프에 반대 방향의 힘이 똑같이 걸리는 것이다. 문제는 그 파이프에 고정된
날개도 동시에 기울기 때문에, 당연히 항공기는 똑바로 날 수가 없다. 이미 비스듬히
기울어진 항공기를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띄우려고 하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나는 날개부에 속한 팀원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몇 번이고
점검했는데 그 때 발견했어야 했다. 그 사실에 대한 죄책감으로 나는 더 열심히 일했다.
리허설은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니까.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비행을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시간이 지나자 다행히 프로젝트는 안정을 되찾았다. 한태선이 임시 팀장이 되었다.
그는 추진 누나에게 유독 말을 많이 걸긴 했지만 나름대로 역할을 잘 해냈다. 새로운
조종사는 적합한 체격의 후배 한 명이하기로 했다. 민기의 사고 이후 팀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 다들 사뭇 비장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 후로 다시 시행한
리허설에서는 성공적인 비행이 이루어졌고 어느새 방학이 끝났다. 개강을 한 후에는
다들 바빠졌지만 틈틈이 작업실에 들러 일했다. 마지막 리허설을 하는 주말에 나는
일일 휴가를 얻어 민기의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그는 한쪽 다리에 거대한 깁스를 찬
채로 움직임이 없는 미라처럼 누워있었다. 나를 보고 일어나려 하자,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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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있으라고 말했다.
“몸은 좀 어때?”
“아주 좋아. 사실 깁스만 없으면 일상생활도 가능할 정도야.”
그가 말했다.
“미안해. 리허설 전에 날개를 좀 더 살펴봤어야 하는 건데. 그런 기본적인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어.”
“아니야. 네가 미안할 게 아니야. 이런 건 어떻게든 한 번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야. 그리고 리허설에 발견 된 게 어디냐. 만약 그 때 우연찮게 비행이 그럭저럭 잘
됐으면 더 큰 문제가 생겼을 거야. 본 대회에서 그런 사고가 나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대회 날까지 퇴원은 역시 무린가?”
“글쎄. 일단 지금은 기다렸다가 상태가 나아진다 싶으면 의사한테 얘기해보려고.”
그는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깁스를 똑똑 두드렸다.
“새로 뽑힌 조종사 녀석은 잘 하고 있어?”
“응. 나름 잘 맞는 거 같더라. 체력도 있고 제법 조종 실력도 있었어. 물론 너만큼은
아니지만.”
“그거 다행이네. 퇴원이 일주일만 빨랐어도 내가 하는 건데 참 아쉬워.”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넌 그 사고를 당하고도 조종을 하고 싶냐?”
“당연하지. 생텍쥐페리는 비행기 사고로 두개골이 파열되고 파혼까지 당한 후에도
민간항공사에 취직해서 야간 우편비행을 했다고.”
“생텍쥐페리라면 그 어린왕자를 쓴 사람인가?”
“맞아.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멋진 비행사였어. 하늘을 너무 사랑해서 쉴 새 없이
비행했지. 그러다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해서 극적으로 구조된 적도 있고, 과테말라
상공에서는 폭발 사고로 부상도 입었어. 하지만 그러고도 또 전투기 조종사로
지원했다니까?”
“터프한 남자네.”
“나도 한 터프하지.”
“그런 터프가이가 어린왕자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썼다니.”
“무슨 소리. 어린 왕자는 생텍쥐페리의 하늘에 대한 동경으로 인해 탄생한
작품이라고. 그는 우리 인생에서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줬어. 목숨을 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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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모험이야말로 인간의 소명을 가장 숭고하게 실현하는 것이라고 믿었지. 그는
나이가 들어 조종사 자격을 박탈당했을 때도 상사를 끈질기게 설득해서 조종간을 잡고
끈임 없이 비행했어. 그러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비행을 나선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 그대로 실종된 거야. 당시 사람들은 그가 어린 왕자를 찾아 떠나간 것이라고
말했어. 생텍쥐페리는 언제나 자신을 순수하게 만들어주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거든.”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는데? 시신은 찾았어?”
“아니. 그가 사라진 지 70년이 지났지만 결국 찾지 못했어. 비슷한 시신을 찾긴
했었는데 그게 생텍쥐페리인지는 끝까지 확인되지 않았지.”
“정말 동화 같은 이야기네.”
내가 말했다.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난 그가 정말로 어린 왕자를 찾아 떠난 거라고 생각해. 지금쯤 어느 별에 도착해서
지구로 빛을 내고 있을지도 몰라. 자신과 닮은 우리들을 응원하면서.”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환자치고는 밝은 표정이었다.
나는 극구 말렸지만 민기는 휠체어를 타고 나를 배웅하러 병원 입구까지 따라 나왔다.
“아무튼 앞으로 조금만 더 힘내줘. 사고를 당하고 대회마저 망쳐버린다면 정말 슬플
거야.”
“그래. 너도 몸조리 잘 해.”
“그리고 태선이 자식도 잘 감시해줘.”
그가 말했다.
“어디까지나 팀장은 공적인 자리라고, 팀원들에게 사적으로 접근하거나 하면 안
된다고 전해줘.”
“그거 진이 누나 말이야?”
“그래. 그 자식이 진이 누나를 좋아한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 그래서 항상
경계하고 있었는데 지금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걱정되면 빨리 나아서 학교로 돌아와.”
“알겠어. 오늘 와줘서 고마워. 정말 힘이 났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더라고. 지루해 죽을 거 같아.”
“자주 올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가 들어가는 것을 본 후에 택시를 잡아타고 학교로 왔다.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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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 가보니 팀원들은 이미 돌아와 있었다. 진이 누나는 지친 얼굴로 마지막
리허설도 무사히 끝났다고 했다. 조금씩 끝을 향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빨리 기숙사에
가서 씻고 싶다며 그녀가 작업실을 나가자 몇몇 아이들이 웅성댔다.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오늘 리허설이 끝나고 태선이가 그녀에게 고백했다는 것이다. 물론 결과는
보기 좋게 차였다. 그 후에 태선의 표정을 봤어야 한다며 아이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태선이 보이지 않았다.
*
가을이 되고 처음으로 나뭇잎 색이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동안 미처 눈치 채지 못한
걸 수도 혹은 정말로 이제 서야 잎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걸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수업 하나를 끝내고 나와서 단풍나무 거리를 걸었다. 다음 수업까지
두 시간 정도가 비었다. 변명이라고 해도 별 수 없지만, 나는 앞으로 두 시간 뒤에
수업을 남겨둔 채로 작업실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가 조금 쌓였는지도 모르겠다.
애매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나는 중앙 도서관으로 왔다. 서가에 들어서자 신선한 종이
냄새가 났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 냄새를 좋아했다. 아직도 새 책을 사면 책장을
포르르 넘기며 향기부터 맡는다. 그 덕분이라 말하긴 뭐하지만, 나는 나름 꾸준히
독서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특히 소설을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단편소설을 선호했다.
아무래도 일상이 너무 바쁘다 보니 긴 장편 소설을 읽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갈피를 끼워가며 읽는 타입도 아니었다. 책은 그 자리에 앉아서 한 번에 다
읽어야 제대로 완독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짧은 시간에 감동을 얻을 수 있는
단편 소설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책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민기의 말을 기억해내고 어린 왕자를 읽어보기로 했다. 이미
어릴 때 읽은 적이 있지만 한번쯤 더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도서
검색용 컴퓨터 앞으로 가서 어린 왕자의 위치를 검색했다. 책을 찾아서 막상 손에 잡고
보니 그리 두껍지 않았다. 이 정도면 수업 가기 전에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근처 의자에 앉아 어린 왕자를 읽기 시작했다. 민기가 말해 준 생텍쥐페리의 배경을
알고 읽으니 어릴 때 읽은 것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이것은 누구보다 하늘을
사랑했던 비행사의 소설이다.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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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니 수업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비록 다 읽었지만 책을 빌려서 가방에
넣었다. 고집 있게 생긴 여성 도서관 사서가 좋은 책을 읽는 구나, 하고 칭찬을 건넸다.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그녀를 향해 한 번 미소 짓고는 도서관을 나왔다. 밝은
햇살이 내리쬐자 아주 깊고 오래된 동굴에서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교실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그 햇빛을 마음껏 즐겼다.
*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현주에게 대회 날짜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스튜어디스가 필요하면 불러달라고 했다. 정말로 오지는 않더라도
날짜 정도는 알려주고 싶었다. 내일이 일요일이라 한 번 찾아가보기로 했다. 부디
시간이 어긋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다음 날 카페에는 머리를 예쁘게 묶은 그녀가
일을 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다른 손님은 없었다. 그녀는 내가 들어오자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왔네.”
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 아이스 카페라떼 한 잔을 주문했다.
“비행기는 잘 날렸어?”
그녀는 내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커피를 내려놓고 말했다.
“본 대회는 아직 안 했어. 9월 26일이야.”
“오. 얼마 안 남았네.”
“응. 만약 오고 싶다면 와도 돼. 비행기는 실컷 볼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런데 나 다음 주에 서울로 올라가.”
“집이 서울이었어?”
“아니, 서울에 있는 학원을 등록했어. 지금까지는 일을 하면서 혼자 공부 했는데, 이제
돈도 충분히 모았고 본격적으로 입시 준비를 하려고.”
“서울까지 올라가야 하는 거구나.”
“아무래도 서울의 학원이 좋으니까.”
“거기서는 방을 구해서 혼자 사는 거야?”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 만은, 방 구할 형편까진 안 돼서 이모 집에서 지내기로 했어.
겨우 몇 달 정도니까 괜찮아.”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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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열심이구나.”
“꼭 하고 싶은 일이니까.”
그녀가 답했다.
나는 그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뒤늦게 전화번호도 교환했다.
그리고 우리는 비행기와 스튜어디스에 대해, 좋아하는 음악과 영화에 대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했다. 이토록 마음이 잘 맞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당장이라도 고백하고
싶었지만 태선을 떠올리고 참았다. 그녀와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친해지고 싶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손님이 하나 둘씩 카페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더 이상 함께
앉아있을 수 없게 되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순간,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카운터에 서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네가 너무 부러워.”
인사를 기대하고 있던 그녀는 살짝 당황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흔들리지 않고 스튜어디스라는 꿈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말이야. 나는 도통 모르겠어.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게 있는데 어째서 그 꿈을 좇는 게 이렇게 걱정되고 불안할까?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멍청한 실수로 사고나 일으키고, 남들만큼
열정적이지도 못하고.”
“걱정이 많은 친구네.”
“비결이 있다면 알려줘.”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바라봐 주었다.
그리고 잠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저 입을 뗀 건 그녀였다.
“지금 보니까 너 많이 지쳐 보여.”
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에 나를 끌고 카페 입구로 나왔다. 카페 앞 나무에서 허우룩한
가을 향기가 났다. 그리고 그녀는 가만히 내 몸을 안아주었다. 부드러운 온기가 그녀의
가슴을 통해 전해져 왔다.
“포옹만큼 효과 좋은 위로가 없대.”
“고마워.”
나는 살짝 부끄러워졌다.
“내가 좋아하는 미국 작가가 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어. 낙천주의자는 비행기를
만들고 비관주의자는 낙하산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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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비행기랑 낙하산 모두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게 해주지만 둘은 완전히 반대지.
비행기는 위로 날아오르는 반면 낙하산은 아래로 내려오니까.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은 낙천주의자들이 비행기를 만들었고, 그들은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었어. 하지만 반대로 비관적인 사람들은 비행기의 추락만을 생각하지. 비행기를 타는
내내 언제 사고가 날까 늘 불안한 거야. 그래서 그들은 낙하산을 만들었어. 그런데 이
비관주의자들이 나쁜 걸까? 아니, 오히려 낙하산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안심하고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었어.”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문득 사라진 생텍쥐페리를 생각했다.
“네가 좋아하는 걸 한다고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어.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늘 꼬리를 물고 따라오지.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런 불안들도 꿈을
향해 도전 하는데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야. 그런 불안을 이겨냈을 때, 비행기는
훨씬 안정적으로 날아가는 거니까.”
나는 가만히 서서 가슴 속으로 그녀의 말을 되뇌어보았다. 그리고 잊어버리지 않도록
단단히 기억해두었다.
“고마워. 정말 많은 위로가 됐어.”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야.”
“서울 가기 전에 또 만날 수 있을까?”
“좋아. 꼭 그러자. 연락해.”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카페 입구에
서있어 주었다. 오랜 앙금이 사라진 기분이다. 무엇과 무엇이 섞여 만든 앙금인지도
모른 채, 시간이 해결해주기만을 간절히 바라던 고통이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기계공학동 앞 벤치에서 진이 누나를 만났다.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 너. 그녀는 나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가을이 되니 더위가 많이 사라졌다. 나는 벤치에 앉아 그녀와 함께 따스한
햇살을 마음껏 즐겼다. 벤치 위 등나무에서 작은 새들이 포롱거렸다.
*
대회가 다가오면서 시간은 걷잡을 수 없이 빨리 흘러갔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 흐름에
저항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가는 대로 발 맞춰 움직일 뿐이다. 그 정도면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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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하다. 나는 날개에서 놓친 부분이 없는지 매일 확인했다. 팀원들 간에 만남도 자주
가지고 마지막까지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면 특제 소스가 있는 덮밥 집에
배를 채우러 갔다. 그 곳은 예상했던 대로 손님이 굉장히 많아져서 나는 항상 새벽
시간에 들러야 했다. 나는 소위 말하는 단골손님이 되었고, 마침내 다섯 가지 메뉴를 다
맛보았다. 파 돼지고기 덮밥이 가장 입맛에 맞았다. 현주는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나에게 연락을 해서 한 번 더 만났다. 나는 그녀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민기를 소개시켜주기로 했다. 그녀가 서울로 떠나고 나서도 그녀의 따스한
목소리가 꽤 오래도록 귀에 머물렀다. 기분 좋은 그리움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남은 시간 동안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다행히 마음속을 불안하게
떠다니던 조각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민기에게 전화를 걸어
대회전에 병문안을 한 번 더 갈까 물었다. 그는 대회가 끝날 때까지는 면회 사절이니까
대회에 집중하도록 해, 라고 말했다.
나는 팀장님의 말을 받들어, 묵묵히 그리고 빈틈없이 대회를 준비했다.
*
기계공학동 건물은 세 가지 전공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기계공학과,
항공우주공학과, 원자력공학과. 덕분에 수업이 있는 평일에는 많은 학생들이
얽히고설키며 자신의 강의실을 찾아간다. 그러나 한 번 길을 잃으면 온종일 헤매게 될
정도로 넓다. 내가 알기로 학교 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그리고 ㄷ자 모양의 건물
왼쪽 귀퉁이를 소규모의 항공과 학생들이 점유하고 있다. 거대 기업의 지분을 나눠
갖는 주주가 된 기분이다. 나는 항공과 2층 복도를 걷는 것을 좋아했다. 계단을 올라 2
층 교실로 가는 짧고 단출한 복도에는 우리나라 항공기와 로켓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사진 하나에 담긴 많은 이들의 노력이 느껴졌다. 한편으론 우리나라 항공 우주 기술의
역사가 복도 하나로 끝난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래도 그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어린 시절 김해 공항을 오가던 비행기를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따듯하고
그리운 마음이다. 언젠가 내가 만든 항공기 역시 이곳에 걸릴 것이라는 상상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만 먹으면 실제로 가능한 일이다. 적당한 시간과 의욕만 있으면
항공기를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한 곳에서 나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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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를 하루 앞두고 작업실에 잠시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복도를 지나게 되었다.
내일이 대회여서일까,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떨림이 있었다. 만약 성공적으로
비행하여 우승을 한다면 우리의 항공기도 여기에 걸고 싶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팀원들은 이미 교수님께 말씀을 드리고 일주일 전부터 대회장인 전라남도 고흥에
가있었다. 그곳에서 리허설을 하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 고치고 하는 식으로 대회를
준비했다. 학교에 남은 것은 대학원생인 추진누나와 급히 처리할 일이 있었던
나뿐이었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그녀와 함께 버스를 타고 고흥으로 갈 예정이었다.
계단을 내려와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데 1층 세미나실의 문이 열려있었다. 안에서는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항공우주 강연이 열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참석자가 많지
않아서 빈 좌석이 듬성듬성 눈에 띄었다. 가장 앞줄에 앉아있는 추진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이젠 뒤통수만으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맨 뒷줄 의자에
앉았다. 키가 작고 뚱뚱한 남자가 강연을 하고 있었는데, 제법 말솜씨가 좋아서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에 집중했다.
여러분들 어렸을 때 한 번쯤 하늘을 날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죠? 누구나 다들 있을
겁니다. 매우 자연스러운 거예요. 예쁜 여자를 보면 꼬시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라니까요(학생들이 웃었다). 지금이야 비행기만 타면 되지만 옛날에는
어땠을까요? 먼 과거에 하늘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신들의 세계였죠.
인간이 하늘을 날고자 하는 욕망은 신화나 전설로 나타날 뿐, 실제로 날 수 있는 기계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어쩌면
사람이 실제로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당시에는 새의
움직임과 관련해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어요. 그러니까 이카로스처럼 날개를 달아서
직접 인간이 하늘을 날도록 하는 것 말이죠. 그리하여 많은 과학자들이 나름대로
과학적인 설계를 통해 비행 기계를 만들어냈고, 높은 탑 같은 곳에 올라가서 훌쩍
뛰어내리곤 했어요. 물론 대부분 추락해서 죽어버렸죠. 아, 하늘나라로 갔으니 어찌
보면 성공한 건가? (이 부분에서 학생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그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비행기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겠죠. 그런 선구자들의
희생은 의미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늘을 날기 위해 시도한 최초의
인간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입니다. 네 맞아요. 모나리자 그린 그
다 빈치. 그 양반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지금으로 치면 항공과 박사 논문 쓰면서 그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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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중에 그린 그림이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이런 것들이니 진짜 천재죠 천재. 아무튼
그는 <조류의 비행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바람을 이용하여 큰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비행 가능성에 대해 썼습니다. 그는 크게 두 가지를 비행기계를
발명했는데, 그 중 하나는 바로 나사 원리를 이용한 프로펠러입니다. 지금의
헬리콥터의 수직비행을 가능하게 해준 소중한 유산이죠. 그럼 나머지 하나는 뭘까요?
바로 오니솝터라는 거대한 날개입니다. 이건 현재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요?(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바로 배트맨의 수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배트맨의 박쥐 날개가 실은
오니솝터였단 말이죠. 참 신기하지 않나요? 무려 오백 년 전에 대예술가가 창조한 비행
기계가 현재까지 남아서 우리 생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건 분명 어느 분야에서나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인간의 순수한 욕망이 끝내 열매를
맺은 것이죠. 자 그럼 이제 현대의 비행으로 넘어가 봅시다.
강연은 그 후로 한 시간 가량 더 진행되었는데, 시간가는 줄 모른 채 그곳에
앉아있었다. 말을 잘하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강연자는 다른 대학의 항공과
교수님이었는데 그의 수업은 언제나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이 끝나고
나는 가장 먼저 세미나실을 나왔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공기를 가르는 엔진
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보니 비행기 한 대가 보였다. 고향인 김해를 떠나와서 비행기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다. 그 시절엔 비행기가 뜨면 저절로 웃음이 났다. 그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어떠한 잡음도 없는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때 느꼈던
나의 감정은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른 동경이었다. 어리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순수한 마음이다. 나는 아직 그 기억을 잊을 만큼 어른이 되지는 못했다.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문득 이대로 고향 집에 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 곳에선 아직도 김해 공항을 오가는 수많은 비행기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때의 마음을 실컷 느끼고 싶다. 귀향은 의외로 간단하다.
기숙사로 향하는 발걸음을 돌려 택시 승강장으로 가서 택시를 잡아타고 기차역으로
간다. 그 곳에서 가장 빨리 출발하는 기차를 잡아타기만 하면 된다. 충분한 잔액이
남아있는 체크카드가 뒷주머니의 지갑에 있었다. 그 열망이 너무 커서 순간적으로 정말
발걸음을 돌릴 뻔 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지금 집에 가면 내일 대회에 참가하는 건
불가능하다. 일찍 기숙사에 가서 조용히 내일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잠시 기계공학동 앞 벤치에 앉았다. 수업이 끝난 오후라 오가는 학생은 없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비행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일 드디어 우리가 만든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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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를 날린다. 얼른 그 장면을 보고 싶었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팀원들이 저마다의 소망을 담아 항공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새로운 별을 찾아가는 탐사선의 첫 발걸음으로, 하늘을 나는 조종사를
해보고 싶어서, 혹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기쁨을 얻기 위해. 신기하게도 구성원들의
소망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이런 다양한 꿈들이 우리의 항공기에 담겨 하늘
위로 날아간다. 비행기를 만든다는 건 그런 것이다.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작업을 하는
내내 열정이 생기고 지속적인 설렘도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불안과 걱정도
존재한다. 자신의 실수로 비행기가 추락하지는 않을지, 과연 평생 비행기 제작을
업으로 삼을 수 있을지, 내가 정말로 이 일을 사랑하는지. 끝없는 불안의 연속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고통은 표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가슴 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모습을 숨긴 채 우리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그 또한 꿈을 향해
나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다. 마치 별은 보이지 않는 꽃 때문에
아름답다는 어린 왕자의 말처럼.
내일이면 그 고통이 조금은 덜어질 수도, 어쩌면 더 심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뭐가
어찌됐든 나의 능력을 원 없이 발휘해보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항공기가 잘 날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미처 보지 못한 문제들을 점검하자. 항공기가 날아올랐을 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개를 가질 수 있도록.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 정도의 노력을
쏟을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관심으로부터 발현된 재능일 수도 있고, 선천적인 능력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던, 비행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같은 재능을
가졌지만 각자 다른 꿈들을 가진 친구들이 있다는 것도 정말로 기뻤다. 그것은 분명 큰
행운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곳을 보고 있다.
추진 누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조금씩 다를지 모른다. 직접
동체를 만드는 기술자가 될 수도 있고, 이론 연구에 몰두하는 연구원이 될 수도 있으며,
아예 이쪽과는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열정 넘쳤던 대학생 시절,
우리가 모두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탁 트인 하늘을 보자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선은 내일 대회에서 성공적인 비행을 이루어내고
장려상 / 소설 _ 인간 동력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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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었다.
그 때 민기에게서 문자가 왔다. 의사와 부모님을 잘 설득해서 내일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고, 부모님의 차를 타고 내일 아침 바로 대회장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말해주고 싶었다. 그럴 줄 알았어. 네가 못 오는
건 말도 안 되지. 우리 항공기 이제 정말 잘 난다고. 그건 그렇고 너 배트맨 날개를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 레오나르도 다 빈치래. 그리고 다 빈치가 우리 선배님이래.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그러나 나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내일 대회장에서 직접
말하면 된다. 우리의 항공기가 성공적인 비행을 마치고 무사히 착륙했을 때, 모두가
흥분해서 기뻐할 때, 민기에게 다가가서 말하자. 수고했다고.
정신을 차려보니 비행기 소리는 어느새 사라졌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남기고 간 하얀
궤적이 남았다. 그 선명한 길이 참 예뻐서, 길게 늘어진 구름을 보며 설레는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렸다.

[장려상]
수묵 산수 병풍
수필부문 / 일반부 / 윤영욱
내 어릴 적 고향 집의 제사상 뒤에는 여섯 폭짜리 수묵산수 병풍이, 망자가 사는
선계인양 고고하게 항상 펼쳐져 있었다. 우리 집은 종갓집이라 제사도 꽤 많아 그
수묵산수 병풍이 펼쳐지는 날도 많았다. 나는 병풍을 볼 때마다 병풍에 있는 산수화는,
인간 현실에는 없는 신선이 사는 상상의 세계라고 그냥 믿어 왔었다.
그것이 중국 장가계(張家界)에 와서, 그 수묵산수 병풍 속의 풍경을 현실에서 그대로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을까? 다만 그 병풍의 주인이던 내 어머니와 함께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만 진하게 남게 했다. 어머니는 가난한
농촌에서 우리 육 남매를 길러 학교에 보내느라 허리가 휘도록 일만 하셨지, 생전에
외국 여행은 고사하고 제주도 한 번 못 보고 가셨으니, 생각해 보면 죄인이 따로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울컥했다.
모처럼 중국 여행을 맘먹고 계약금을 지불하자, 미지의 여행에 대한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끼니때가 되어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 나는 모든 여행을 좋아한다. 특히 이국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머나먼 이국이면 더욱 가슴 설렌다. 그 여행은 또한 비행기를 타고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행기를 탈 때면 가장 많이 가슴이 뛴다. 하릴없이 지나가는
하늘의 비행기만 쳐다보아도, 나도 저 안에 있을 것을 생각하며 괜스레 신비로움을
짜릿짜릿 맛보곤 한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그것도 비행기를 타고 외국 여행을 한다는
것은, 삶에 찌든 우리 인간들에게 주는 최고의 활력소요, 최고의 정보요 공부며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느긋하게 계류장에서 탑승객들을 상냥한 웃음으로 맞아주던 우람한 몸집의 비행기는,
아기처럼 아주 느릿느릿 활주로에 나왔지만, 이내 서서히 가속하여 죽어라 막판
스퍼트를 하고는, 눈 깜작할 사이에 제비처럼 가벼운 몸매로 하늘로 솟구쳤다. 그는
안개 길을 달리는 내 승용차보다도 손쉽게 구름 속을 올라갔고, 순항고도에 이르자
수평을 잡고, 고속버스보다 손쉽게 하늘 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일백 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도 있었지만, 장가계의 미혼대(迷魂臺)는 저승에 가지 못하고
미로를 헤매는, 망자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란 뜻의 이름값대로 참으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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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 수필 _ 수묵 산수 병풍
아마도 생전에 장가계를 못 본 영혼들이 저승에 가지 전에 장가계를 보고 가겠노라고,
정말로 미혼대에 머물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장가계의 경치는
우리 집 수묵산수 병풍 속의 산수화와 너무나 꼭 닮아 있었다.
어머니는 설악산이나 내장산 한 번 못 보고 가셨다. 어머니는 워낙에 소박한 분이라,
가을 설악산이나 내장산의 단풍만 보셨더라도, 그 정도로도 오늘 나의 장가계 만큼이나
감탄을 연발하셨을 분이셨다. 그분에게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받았으면서도, 왜
좋은 곳에 한 번도 못 모셨을까 생각하니 불효자가 따로 없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장가계의 십리화랑(十里畵廊)은 십리를 가는 동안 내내 눈에 보이는 풍경들이, 우리 집
수묵산수 병풍 속의 수묵산수화를 꼭 빼닮았다. 만약에 보이는 풍경을 계속 그림을
그리던지 계속 사진을 찍었더라면, 십리는 족히 걸어놓을 수 있는 작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십리화랑이란 이름은 전혀 과장이 아닌 아주 사실적인 표현처럼
느껴졌다.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간 곳은 어디였을까?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뚜렷한 곳은
떠오르지 않고, 언젠가 서울 창덕궁에 한 번 모시고 간 것이 생각날 뿐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왕의 즉위식이 열렸던 인정전, 왕과 중신들이 나랏일을 논의한 선정전, 왕과
왕비의 침실이었던 대조전을 보면서 매우 신기해 하셨다. 그리고 정원과 식물원을
거닐며 너무나 즐거워 하셨던 것 같은데, 나는 왜 그 뒤로도 그런 즐거운 모습을 더 많이
만들어 드리지 못했을까 한스럽다.
장가계(張家界)란 이름은 옛날 한고조 유방의 개국 공신이었던 장씨(장량) 일족이 숨어
들어와 살면서, 장가의 땅이란 뜻이란다. 그들은 개국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토사구팽을 피해 목숨이라도 건지겠다고 여기까지 도망쳐 온 슬픈 운명이었지만,
이처럼 유명한 무릉도원에서 자연을 벗 삼아 신선처럼 살 수 있었고, 후세에 장가의
땅이란 당당한 이름까지 남기게 되었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래서 인생을 가리켜 새옹지마라고 하는가 보다.
장가계를 떠나 계림에 들렀다. 계림은 계수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지만,
이름과는 달리 막상 사람들이 찾는 것은 계수나무가 아니라 아름다운 산수였다.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라는 말 그대로 계림의 산수는 가히 천하에서
제일가는 갑이었다.
장가계에서 본 바위들은 비교적 기둥처럼 저 혼자서 뾰족뾰족 솟아있고, 바위틈에 작은
소나무 분재 몇 개씩을 운치 있게 달고 있었는데 반해, 계림의 바위들은 하나의 큰
산봉우리를 이루면서 뾰족뾰족 솟아 있고 무엇인가 나무들이 비교적 많았다. 계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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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 수필 _ 수묵 산수 병풍
산들은 대체로 그 생긴 형태가 베트남의 하롱베이의 산들과 조금씩 닮은 것 같았다.
그러나 계림의 산수만큼은 또한 우리 집 수묵산수 병풍 속의 수묵산수화를 너무나 꼭
빼닮아 있었다.
우리 집 수묵산수 병풍을 생각하면, 온 힘을 다해 제사상을 차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항상 떠오르곤 한다. 어머니는 제삿날이 다가오면 지에밥을 만들어 누룩에 버무리어
술을 안치고, 시퍼렇게 녹이 슨 놋그릇들과 놋수저들을 흙으로 문질러 닦고, 김치를
담고 고사리나물과 집에서 기른 콩나물을 만들고, 전을 만들고 시루떡을 찌고 탕을
끓이고, 몸이 열이라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종갓집 맏며느리인 자신의
처지를 한 번도 한탄한 적이 없었으며, 그저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온 힘을
다해 상을 차리셨다. 하지만 제사가 끝나면 또한 어머니의 삶은 단조로운 늘 똑같은
밭일로, 늘 똑같은 우리 집 수묵산수 병풍 속의 수묵산수화를 닮아 가고 있었다.
계림의 산들 사이에는 이강(리江)이 스며들어 흐르고 있는데, 이(리)자가 스며들
이자였다. 우리는 이강에서 얼마 동안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계림의 풍광을
감상했는데, 마치 수묵산수화를 떼지 않고 쭉쭉 진열해 놓은 것 같은, 그 자연의 화랑이
백리나 된다고 하여, 백리화랑(百里畵廊)이란 이름이 붙었다. 장가계에 십리화랑이
있다면 계림에는 그보다 규모가 훨씬 큰 백리화랑이 있었던 것이다. 장가계의 풍광은
바위와 소나무는 최고의 걸작이었지만 그 중에 물이 부족한 듯하더니, 계림의 풍광은
거기에다가 물과 뱃사공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완벽한 산수화를 이루고 있었다.
생전에 어머니는 시댁 조상들의 사대봉사 제사를 모시면서, 일면식도 없는 남편의
조상들에게 평생 동안,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모셨는지 모른다. 나도 지금은 어머니의
제사를 모시게 되었지만, 생전에 하셨던 어머니의 그 정성을 조금이라도 닮아야 할
텐데, 너무나 족탈불급이라 참으로 걱정이다. 어쩌면 어머니는 아마도 대대로 이어져
오는 시댁의 조상들과, 당신 사후에 당신과 당신의 자식들 사이를 이 제사가 영원히
이어줌으로서, 이를 통해 당신이 영생할 것이라 믿었을는지도 모른다.
계림을 떠나 서안에 당도하니,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영생을 꿈꾸는 사람이 또 있었다.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은 사후에 영생을 꿈꾸며 거대한 자신의 무덤을 생전에
건설해 놓았다. 마치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영생을 꿈꾸며 사후 자신의 무덤으로,
거대한 피라미드를 생전에 건설한 것과 닮은꼴이다. 진시황릉은 묘지라기보다는
웬만큼 큰 산이었다. 무덤 안에는 흙으로 빚은 지하 궁궐과 관청과 탑들과, 궁궐을
지키는 수많은 군인들과 말과 무기들과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밖에서
보기에는 하나의 산일뿐이어서, 이 또한 산수화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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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 수필 _ 수묵 산수 병풍
않았다. 영생을 꿈꾸었던 진시황제도 죽어서는 한갓 우리 집 수묵산수 병풍 속의
소재가 될 뿐이어서, 인생이란 참으로 허무한 것인가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내는 열차보다 잔잔하고, 창밖은 이름 모를 구름의 떼들로
가득했다. 내가 시방 지상 11㎞, 까마득한 구름 위 상공을, 시속 1100㎞의 쾌속으로
달리는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다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분명한
현실일지 몰라도, 나의 빈약한 감각으로는 도저히 느껴볼 수 없어 안타깝기만 했다.
다만 비행기를 타고 갈 때의 까닭 없이 풍선처럼 부풀었던 그 마음과, 비행기를 타고 올
때의 수많은 추억들이 내 안에서 서로 교차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행을 출발하는 아침은 유난히 가슴이 설렌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면 자동차야말로
여행을 위해 만들어진 최고의 걸작이란 생각에 괜히 감사해 진다. 그러한 고마움은
비행기를 타고 가면 최고로 절정에 달한다. 여행 전날은 밤잠도 설쳤고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공항으로 달렸는데, 어느덧 돌아올 시간이 다 되었다. 우리 비행기는 곧 인천
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자, 안도하는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서로
교차되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구름은 무심히 산을 넘어가고, 새들은 지쳐서
둥지로 돌아오네.”우리 비행기도 이젠 지쳐서 제 둥지로 돌아오려고 구름 속을 헤집고
있는 것인지, 갑자기 창밖이 짙은 안개 속처럼 희뿌옇다. 비행기는 새처럼 날개를 세워
에어브레이크를 걸고, 새의 발처럼 랜딩기어로 활주로에 사뿐히 내려 밟는다. 나는
그를 통해서 상상도 못했던 나의 수묵산수 병풍 속의 수묵산수화를 만났고, 신선이
사는 자연과 소통했던 행복한 추억을 반추해 보았다. 누가 과연 이런 여행을 가능케
했을까? 나는 하릴없이 기장과 승무원과 관제사와 항공사와 비행기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비행기는 소년 시절 나의 꿈이었다. 산새소리 적막한 나른한 농촌의 들녘에서 소 풀을
뜯길 때면, 흘러가는 구름위로 가끔씩 지나가는 비행기는 나의 꿈이었다. 비행기를 본
날 밤에는 때때로 내가 구름 위를 날고 있는 꿈을 꾸곤 했었다. 언감생심 쳐다볼 수도
없는 저 높은 곳을 구름과 함께 날아다니는 비행기는, 어린 나에게 너무나 큰 희망을
심어주었기에 꿈속에서라도 타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얀 긴 줄의 비행기구름을 보거나
비행기가 가깝게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희망에 부풀었다. 바다 건너 이방세계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새로운 세계와 인생에 대한 까닭 모를 꿈이 솟구쳤다.
나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중국의 아름다운 산수가, 어릴 적 제사상 뒤에
펼쳐졌던 수묵산수 병풍과, 내 어머니를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를 많이 만들어 주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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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
같다. 어머니는 평생을 이른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올망졸망한 산들로 둘러싸인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어머니의 삶을 사진으로 찍으면, 뒷산을 배경으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밭에서 김매기를 하는, 화려하지는 못하지만 소박한 한 폭의
산수화였음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어머니 역시, 우리 집 수묵산수 병풍을 누구보다
많이 닮은 삶을 그대로 살다 가신 것이다.
[장려상]
푸른 하늘에 피어오르는 나의 꿈
수필부문 / 일반부 / 박찬중
새벽 네 시 반. 알람소리에 덮고있던 타올을 걷어차고 일어난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열대야가 8월 들어 벌써 며칠째인가. 덥다. 현관문을 열어젖혀도 더운 것은
마찬가지다.
샤워 후 양배추와 치즈를 넣어 만든 샌드위치로 아침식사를 한다. 냉장고에 미리
준비해 둔 얼음커피를 담아 백팩에 넣고 아직 푸른 어둠 떠도는 골목으로 나선다.
원룸에서 30여분 거리인 회사에 도착한다. 지문인식기에 터치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교대근무자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그들보다 나를 더 반겨주는 건 벽에 걸린 여섯 개의 시계다. 나라별로 각각 다른 시각을
가리키고 있는 그것들은 우리 회사의 심볼이다. 이젠 시계를 보지 않아도 인천과의
시차를 다 외울 듯하다. 상해 1시간, 자카르타 2시간, 두바이 5시간, 파리 8시간,
상파울루 11시간, LA 17시간.
나는 시선을 내려 스케줄 칠판보드를 바라본다. 거기 내가 직접 써놓은‘오늘 할
일’이 오전/오후로 구분되어 있다. 회사홈피 내 온라인 견적 주문 처리하기, 인천공항
화물터미널(B동) 탁송, 포일론(포장재) 하차 작업, 우든 팩킹(나무 포장) 5건. 그래도
어제보단 수월할 것 같다. 어제 분당 H아파트 출장 포장과 상하차 작업은 정말
힘들었다. 이민 가는 고객답게 20피트 컨테이너를 꽉 채웠다.
시계를 보니 근무시간 20분 전. 잠시 스마트폰으로 페북을 검색한다.‘푸른 하늘에
피어오르는 나의 꿈’. 다이아몬드형 그러데이션으로 디자인한 타이틀이 눈에 들어
온다. 배경화면은 막 이륙하여 45도 각도로 날아오르고 있는 차이나 항공의 여객기
사진. 옆구리에 점선이 박힌 철갑상어 같다고나 할까, 푸른 바다를 유영하는 듯한
날렵한 모습이 언제 보아도 멋지다.
지난 주 동서울터미널에서 있은 친구 결혼식 때를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친구
결혼보다 내 취업이 더 화제였다. 앞에 앉은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 물류회사에 취업했다며? 근데 어떤 일 하는 거야?”
내가 답을 해 주기도 전에 옆의 친구가 끼어들었다.
“노가다 일이지 뭐야, 그치? 내 친척 형도 화물회사 다니는데 힘들어 죽겠다더구만.”
장려상 / 수필 _ 푸른 하늘에 피어오르는 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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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친구가 빈정거렸다.
“난 네가 무슨 승무원이나 된 줄 알았잖아. 비행기 사진에다 뭐 푸른 하늘에 꿈 어쩌구
하기에. 핫핫핫!”
여느 때 같으면 나 역시 그냥 웃어 넘어갔을 것이다. 취업 못한 친구들의 넋두리 정도로
치부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발끈하고 말았다.
“꼭 승무원만 하늘을 말하고, 꿈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거니?”
좌중의 친구들이 머쓱해 하건 말건 나는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난 진짜 항공화물을 부치는 일이 나에게 딱 맞아. 무엇보다 재미나.”
친구들 말대로 나는 K그룹자회사인 항공화물업체에 취직했다. 수습 3개월 후 얼마 전
‘완생’이 됐다. 취준생 시절 항공사지상직만을 고집했다. 사실 어느 일도 가치없다고
볼 수 없지만 몸보다 마음을 쓰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공항의 세련되고
화려한 모습을 동경한 나머지 공항 밖의 일은 제쳐놓았다. 하지만 벽이 너무 높았다.
실망한 나머지 다단계회사까지 생각하던 차에 항공화물서비스 분야의 채용공고가
눈에 띄었다. 그 중에서 화물지원팀은 내 적성에 꼭 맞을 것 같았다. 물론 처음엔
공항에서 승객 체크인 시 화물 무게를 재고 태그를 붙이고 발송하는 업무인 줄
알았지만….
여덟 시 정각. 팀별로 미팅시간이다. 스피커에서 사장님의 훈시가 들려
온다.“감소추세의 IT화물을 대신할 신선화물, 특송화물 등 고부가가치 신성장 화물을
발굴하고…” 이어 팀장님의 잔소리가 이어진다.“호랑이부터 보석까지 고객의 화물
운송을 신속, 정확, 친절하게!”
슬로건을 크게 복창할 때 창고 앞으로 2톤 픽업이 들어온다. 오늘의 첫 손님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뛰어나간다. 화물 생김새와 수량으로 보아 해외유학을 가려는가보다.
뒤따라온 주인 모녀가 승용차에서 내려 정리 안 된 물건 박스들을 가리키며 부탁한다.
“이 옷가지와 책들은 방습에 신경써 주시고, 저것들은 특수포장 해주세요.”
나는 보안확인서 작성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6미리 특수충격기(킹버블)로 정성껏
작업한다. 포장실명책임제를 설명하고 포장한 화물을 관리팀으로 인계한다. 이제 겨우
한 건인데 땀이 비오듯 한다. 장갑으로 땀을 훔치며 나는 웨이트트레이닝을 1회 한
셈이라고 여긴다. 나는 에어컨도 쐴 겸 온라인 견적 주문을 처리하려고 사무실로
돌아온다. 집에서 챙겨온 얼음커피를 파트너에게 건넨다.
문득 얼마 전 이직한 입사동기생 L이 떠오른다. 나의 파트너였던 그는 자신의 스펙에
비해 회사와 맡은 업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장려상 / 수필 _ 푸른 하늘에 피어오르는 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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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적성과 비전에 맞지 않아.”
그러면서 자신이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는 걸 회사 탓으로 돌렸다.
“요즘 열정페이만 요구하는 회사가 어딨어? 여긴 일할 분위기가 못 돼!”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면 스트레스도 줄고 비전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설득은 못 하고
그의 선택이 잘 되기를 바란다고, 서양식으로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다만 회사에 대해
불평을 했을 때 그것을 과도하게 일반화하지 말라고 충고했을 뿐이다.
이제 운송팀과 함께 공항에 갈 시간이다. 이틀 간격으로 돌아오는, 보안출입증을 목에
거는 이 순간이 내겐 가장 행복하다. 지게차의 도움을 받아 컨테이너 트럭에 화물을
가득 싣고 떠난다.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에 들어서는가 싶더니 금방 공항화물청사다.
회사 창고에 도착하여 하차 작업과 운송지별 분류까지 한 시간여 만에 끝냈다.
컨테이너 차량 끝에서 지게차까지의 그 짧은 거리를 나르는데도 어느새 장갑이
헐거워졌다. 그래도 널찍한 공간에 천장이 높아 자연 냉방이 되는 이곳만큼 일하기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 싶다.
나는 잠시 짬을 내어 화물청사 2층으로 올라간다. 화물청사는 활주로 바로 옆이어서
비행기동체를 자세히 볼 수 있다. 10여 분 남짓 공항풍경을 바라보고 돌아가는 시간이
내겐 그날 하루를 온전하게 살게하는 신비한 의식같다.
가뜩이나 지열로 뜨거운 활주로는 기체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까지 더해져
이글거린다. 고개를 들자마자 대한항공 B748F가 활주로 정렬을 하면서 사뿐히
랜딩한다. 이어 기다렸다는 듯 리프트가 붙어있는 컨테이너 트럭들이 모여든다. 카고
로더가 동체 아래쪽에 있는 화물칸으로부터 커다란 컨테이너와 팔렛을 내릴 준비를
한다. 마치 커다란 굼벵이에 달라붙어 공격하는 개미떼들 같다. 시선을 약간 돌려본다.
꼬리날개에 색동저고리를 입힌 아시아나항공 A380F가 토잉카에 밀려 출발선에서
심호흡을 한다. 이륙하자마자 좌측으로 흔들, 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 유유히 올라간다. 이번엔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의 파란 제비가
내려오더니, 이어 임무교대를 하듯 콴타스 호주 항공의 빨간 캥거루가 점핑을 한다.
어디에 끝까지 시선을 두어야 할지, 내 눈은 호사스럽기까지 하다. 멀리 길쭉한
옥타곤으로 돌출된 관제탑도 보인다. 이런 광경을 보면 볼수록 내 마음은 설렌다.
나의 꿈은 우리 회사 스물네 곳의 해외지점 중 한 곳의 지점장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누가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순전히 비행기를 탈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비치되어 있는 잡지 <CARGO NEWS>에서 한 해외지점장이 연간 40여 회
해외출장을 간다고 고백을 하였다. 내 평생 한두 번밖에 타보지 못할 것 같은 비행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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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처럼 자주 탈 수 있는 직업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내 생애 최초로 비행기를 탔던 경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시골에서 자라 전철도
두어 번밖에 타보질 못한 나였다. 기회는 대학 4학년 여름 이맘 때 왔다. 운좋게 학군단
장학생으로 뽑혀 런던 해외연수를 가게된 것이다. 여권이나 비자라는 말 자체가 낯설고
처음 구입한 캐리어조차 어색했다. 역시 생전 처음 보는 인천공항은 미래도시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곳은 또 언어나 문화면에서 갈라파고스처럼 동떨어진 섬 같기도 했다.
대합실에 보이는 여행객들이 마치 영화 세트장의 배우들처럼 느껴졌다. 대부분
선글라스와 멋진 모자를 착용한 그들은 공항패션을 마음껏 뽐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검색대를 통과할 때다. 나같은 평범한 사람한테까지 까다롭게 검색하는 건
뭐지? 순간 나는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 우쭐거렸었다.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꿈은 이루어졌지만 기내에서 나는 속으로 얼마나 막막했는지 모른다. 두터운 대기층을
통과한 기체가 평화로운 날개짓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이 비행기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을까, 내가 부친 짐은 어떻게 잘 따라오고 있을까 하는 걱정에 점호 취하는 신병처럼
허리를 곧추 세우곤 항로진행표시 스크린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둔탁한 엔진소리가 나는 왼쪽을 바라보니 FedEx 로고가 선명한 전용화물기가 슬슬
이륙 준비를 하고 있다. 프로펠러에 바람 감기는 소리를 따라 내 심장의 고동소리도
덩달아 커진다. FedEx는 DHL, UPS와 함께 우리 회사의 롤모델 업체다. 사장님께서
그들만큼 회사를 키우는 것이 필생의 목표라고 몇 번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나 역시 그
말을 듣고 열심히 일하겠노라고 마음속으로 다잡았었다.
드디어 엔진출력을 최대치까지 높인 화물기가 활주로를 질주하다 플랩을 가동시킨다.
이어 기체를 들어올리면서 품 안으로 바퀴를 집어넣는다. 나는 그 모습을 끝까지
쫓으며 저기에 타고 있을지도 모르는 내 자식들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파란 하늘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본다. 새로 생긴 비행운에 내 꿈의 연도 날려본다. 나는 누구보다
행복하다. 내가 좋아서 하고 있는 일이고 저 하늘은 이 초심을 잊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
가까워질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나를 다독이며 여느 때보다 힘차게 다음 스케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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